[强小기업 CEO] 치과용 접착제 부문 세계 1위, 徐柄寅 비스코 회장 : 월간조선

“미안합니다만, 우선 이 카메라를 담보로 등록금 영수증을 끊어주시면 안 될까요?”

“이봐요 학생, 여기는 전당포가 아니라 학교라니까요.”

1964년 봄.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재 캘리포니아주립대 입학처에서 한국인 유학생과 이 학교 직원이 등록금 문제로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수중에 돈이 없던 유학생은 “한국 외환관리법상 등록금 영수증이 있어야 송금이 되니 먼저 영수증을 끊어달라”고 고집을 부렸고, 입학처 직원은 “절차상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거듭 ‘노(no)’를 외쳤다. 다급한 마음에 이 학생은 갖고 있던 카메라를 담보로 내놓으며 “돈을 좀 빌려달라”고 통사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두 사람의 지루한 공방은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한 미국인 학생이 조건 없이 등록금을 빌려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됐다. 당시 등록금은 400~500달러 수준. 미국 유학생 수가 급증한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해프닝의 주인공이 서병인(徐柄寅) 비스코(BISCO) 회장이다.

미국 시카고 샴버그에 위치한 비스코 본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자리 잡고 있는 비스코는 치과 재료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과 품질을 자랑하는 기업. 특히 치과용 충전제(充塡劑·filler)와 접착제 분야에서 전 세계 시장의 30%를 장악,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회사의 제품은 현재 한국을 비롯해 세계 60여 개 국가에 수출되고 있다. 종업원 150명에 연매출은 3000만 달러(한화 약 300억원). 명성에 비해 크지 않은 규모지만 이 회사의 연구개발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이다.

창업주인 서병인 회장은 비스코의 연구개발 책임자이자 경영인이다. 미국 이민 1세대인 그는 1981년 비스코를 설립, 세계 치과 재료 시장을 리드하는 강소(强小)기업으로 입지를 굳혔다. 수익금의 일부를 모교인 성균관대와 캘리포니아주립대뿐만 아니라 서울대, 경북대, 연세대, 경희대 등에도 기부하고 있다.

부인 정민숙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세 딸은 모두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 후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장녀인 줄리(Julie) 씨는 예일대와 MIT 대학원을 졸업한 후 비스코에서 매니지먼트와 파이낸스를 맡고 있고, 둘째딸 캐롤(Carol)은 브라운대를 나와 비스코 연구원으로 근무 중이다. 그리고 막내딸 콜린(Coleen)은 시카고에서 건축가로 활동 중이다. 자신 일은 물론 자녀 교육까지 성공한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다.

30여 년 전 등록금이 없어 지니고 있던 카메라를 담보로 내놓던 가난한 청년이 어떻게 미국 사회에서 튼실하게 뿌리 내릴 수 있었을까. 중국 출장길에 잠시 한국에 들른 서병인 회장을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여행을 온 듯 편안한 면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좋은 재료 만드는 것이 나한테는 놀이

비스코의 한 직원이 제품의 강도를 측정하고 있다. 이 회사가 생산하는 치과 재료는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중국엔 무슨 일로 방문한 건가요.

“베이징(北京)과 시안(西安)에 있는 대학 부속 치과병원에서 특강 요청이 들어와 강의를 하고 오는 길입니다. 치과 재료, 특히 접착제에 관한 내용이 강의의 핵심이었지요. 이런 강의는 저희 회사 영업에도 도움이 돼 요청이 들어오면 거절하지 않고 다닙니다.”

서 회장은 사업가지만 치과 재료 연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치과학회와 치과대학을 상대로 강의하고 있다. 올해는 치과용 접착제에 관한 교재(敎材)도 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CEO가 직접 영업을 하고 다니는 셈인데, 힘에 부치지 않습니까.

“간접적인 영업이죠. 저는 이 일이 재미있습니다. 새로운 재료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일도 즐겁고요. 사실 저는 애초부터 사업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좋은 재료를 만들고 싶었고, 그게 저한테는 아주 재미있는 놀이 같았지요.”

―올해가 창립 30주년인 것으로 압니다. 중소업체로서 짧지 않은 역사인데, 아직 판매망이 구축되지 않은 건가요.

“저희 회사는 충전제와 접착제 생산에만 집중해 제품군이 다양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판매 조직을 갖고 있지 않죠. 인터넷이나 강의를 통해 홍보하고 영업하는 수준입니다. 만약 내가 연구원이 아니라 판매 전문가였다면 회사 규모가 훨씬 커지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별도의 영업망 없이도 세계 시장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CEO인 그가 직접 진두지휘하는 R&D의 힘이 아닌가 싶다. 그는 어떻게 치과 재료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됐을까. 좌충우돌 그의 미국 유학 생활과 이민 정착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충주비료 다니며 유학 준비

서병인 회장은 경북 대구의 평범한 가정에서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지방 방송국 간부였지만 명예만 있고 실속이 없어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공부를 곧잘 했던 그는 지역 명문 경북고에 진학했고, 수학과 화학 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 무렵 그의 꿈은 전투기 조종사였다. 남자답고 멋있어 보여 어렸을 때부터 전투기 조종사를 동경했다고 한다.

“고교 시절 제 목표는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공부하는 틈틈이 평행봉, 링 등 기계체조로 몸을 단련하며 공군사관학교 시험을 준비했지요. 그런데 대학 등록금을 대주기로 한 작은아버님께서 상대 진학을 적극 권유하셨습니다. 상대를 나와야 취직이 잘되고 사업도 할 수 있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죠.”

이과반이었던 그는 작은아버님의 뜻에 따라 문과인 서울대 상대에 지원했다가 보기 좋게 낙방했다. 이과 공부를 해놓고 갑자기 문과 시험을 본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그는 속으로 ‘차라리 잘됐다’며 쾌재를 부르곤 당시 후기였던 성균관대 화학과에 지원해 여유있게 합격했다.

“결과적인 일이지만 당시 서울대 상대에 합격했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사실 저는 1년 재수해 서울대 화학과에 진학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작은아버님께서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성균관대에 진학하라고 권하셔서 다니게 됐지요.”

1960년 성균관대를 졸업한 그는 당시 대학 졸업자들에게 최고의 직장으로 부상한 충주비료에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충주비료는 광복 후 한국에 설립된 최초의 화학비료 공장이었다. 설립 초기 이 공장에는 외국인도 많았지만 한국 최고 학력의 엘리트들이 즐비했다. 그는 “설립 초기 충주비료는 서울대 기계과와 화학과 졸업생들의 집합소였다”고 회고했다.

“충주비료 연구원 중 성균관대 졸업생은 제가 유일했습니다. 선배도 후배도 없었지요. 그래서인지 ‘내 앞날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이 들더군요. 이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선진국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더 하는 것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서 회장은 충주비료에서 만 4년 동안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며 미국 유학 준비를 했다. 습관처럼 AFKN 방송을 들었고, 사택에 거주하는 미국인 상사의 대학생 딸과 데이트를 하며 영어를 익혔다. 덕분에 국사(國史)와 영어로 치르는 유학 시험에 단번에 합격했다.

생면부지의 샌프란시스코로

비스코의 주요 임원진. 이 회사에는 현재 150명의 종업원이 근무하고 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가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습니까.

“캘리포니아주립대 등록금이 가장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가을 학기에 가기로 계획했는데 갑자기 봄으로 앞당겨 가게 되면서 서두르다 보니 대학 선택의 폭이 좁아진 것도 한 이유지요.”

유학을 한 학기 앞당겨 가게 된 건 유타에서 공부하고 있는 대학 동기의 조언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가 등록금에 대한 부담을 털어놓자 친구는 “봄에 오면 중간에 여름방학이 있어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을 수 있으니 서둘러서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국영기업에서 4년 근무했으면 퇴직금도 꽤 될 것 같은데, 학비에 대한 부담이 컸나 봅니다.

“저도 퇴직금을 염두에 두고 유학을 준비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제 상사가 ‘유학 후 돌아오라’며 사직서를 휴직계로 바꾸어 처리하는 바람에 퇴직금을 정산할 수가 없었지요.”

퇴직금 외에 유학 자금으로 모은 돈은 미국인 상사가 가지고 있었다. 그의 월급을 미국인 상사가 생활비로 사용하고, 그만큼의 달러를 서 회장 몫으로 차곡차곡 쌓아놓았다가 나중에 미국으로 송금해 주기로 협약했던 것이다. 외환관리법상 내국인은 송금에 제한이 있어서 생각해 낸 묘안이었다. 그는 등록 후 몇 달 만에 1500달러를 송금받았다고 한다.

―항공료도 꽤 되었을 텐데요.

“당시 한국에는 미국 직항 노선이 없어 일본 도쿄에서 환승해 갔는데, 하와이를 경유해 가는 비행기였습니다. 항공료가 대학원 등록금 수준으로 비싼 편이었죠. 이 비용은 친구들과 계를 만들어 제가 가장 먼저 타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당시 단돈 50달러를 들고 유학을 갔다고 들었습니다.

“50달러가 아니라 정확히 60달러였습니다. 출국하기 전 친구가 담배 한 갑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 안에 속을 털어내고 1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돌돌 말아 넣은 담배 한 개비가 들어 있더군요. 당시엔 해외에 나갈 때 50달러 이상을 가져가면 불법이라 친구가 머리를 짜낸 것이죠. 참 고마운 친구예요.”

1964년 1월 30일. 일본 도쿄에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중국인이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하이, 만나서 반가워요. 미국엔 무슨 일로 가지요?”

첫 해외 나들이라 잔뜩 긴장해 있던 그는 “공부하러 간다”고 아주 짧게 답했다. 중국인은 자신을 홍콩대 영문과 교수라고 소개했다. 그러곤 “미국은 처음이라 처남이 공항까지 마중 나오기로 했다”며 “샌프란시스코에 누구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 흑인 학생 도움으로 첫 등록금 해결

스물일곱 청년에게 샌프란시스코는 생면부지의 땅이었다. 입학 허가서를 보내준 대학 이외에 아는 곳도 아는 사람도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를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학교에서 누군가 마중 나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중국인 교수가 걱정스러웠는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를 따라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중국인 교수와 그의 처남은 “이곳에서 가장 저렴하게 숙박할 수 있는 곳은 YWCA 호텔입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택시를 타고 총총히 사라졌다.

숙박료 10달러를 지불하고 YWCA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주머니에 50달러가 남았다. 이튿날 학교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미터기 탓에 그는 좌불안석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학교에 겨우 도착, 영어 시험을 치르고 신입생 환영 파티에 참석하니 유색 인종의 학생들이 너도나도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중 한 흑인 학생과 룸메이트가 되기로 했다. 유학 생활의 단초인 숙소 문제를 운 좋게 해결한 셈이다.

다음 날은 등록 절차를 밟기 위해 학교 본부에 갔다. 담당 직원은 먼저 등록금부터 내줄 것을 요구했다.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었던 그는 당황했다. 당시 한국의 외환관리법은 등록 영수증이 있어야 송금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서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샌프란시스코에서 400달러가 훨씬 넘는 돈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암담해진 그는 다급한 마음에 보물처럼 여기던 일제 카메라를 담당직원 앞에 내밀었다. 의아해하는 교직원에게 카메라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면 곧 갚겠다고 하소연했다. 교직원은 매우 어이없어 하며 “여기는 학교지 전당포가 아니다”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때 이 촌극을 지켜보고 있던 한 흑인 학생이 청년에게 다가와 “필요한 돈이 얼마냐”고 물었다. 그러곤 선뜻 400달러가 넘는 돈을 조건 없이 빌려주었다. 알고 보니 이 학생은 룸메이트의 절친한 친구였다.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행운이었다.

치과 재료 연구에 눈떠

우여곡절 끝에 한 학기를 마치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네바다주로 갔다. 그곳 갬블링 업소에서 여름방학 내내 접시 치우는 일을 해 1000달러가 조금 넘는 돈을 모았다. 이 돈으로 2학기 등록을 마치고 생활했지만 몇 달 가지 않아 바닥이 났다. 주중에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필요했다.

―아르바이트를 구했습니까.

“운 좋게 호텔 벨보이로 일하게 됐어요.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손님들을 공항에서 픽업하고 소지한 짐을 룸까지 옮겨다 주는 일이었지요. 주급보다 팁이 많아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주말이 없는데다 월요일 아침이면 감기는 눈을 비비며 학교로 직행해야 하는 등 피곤한 나날이었지만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그는 이 생활을 1년 반 동안 했다. 그 이후에는 장학금을 받게 되어 벨보이 자리는 후배 유학생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현지 학생들이 2년이면 마칠 석사 과정을 그는 3년 반 만에 겨우 마쳤다. 당시만 해도 한국과 미국의 학력 차가 심해 보충 공부를 하다 보니 졸업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졸업 후 그는 현지 업체에서 경험을 쌓고 싶은 마음에 귀국을 미루고 취업을 했다. 메디슨 케미칼이라는 작은 회사였는데 1년 정도 근무하다 직속 상사를 따라 치과 재료 회사인 W.A.에릭슨사(社)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치과 재료 연구에 눈을 떴다.

―그때는 시민권자가 아닌데도 현지 취업이 되었나요.

“케미컬 전공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학위만 있으면 취업이 되었습니다. 연봉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가 에릭슨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글로벌기업 존슨앤존슨사가 자연치아와 비슷한 새로운 치과용 충전제를 개발했다. 그 전까지 사용한 아말감이나 금·은보다 훨씬 보기가 좋았다. 그러자 에릭슨사의 주요 고객인 치과의사들이 자신들도 그런 제품을 공급받고 싶다고 아우성을 쳤다. 규모가 크지 않은 에릭슨사로서는 위기였다. 사장이 그에게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좋으니 연구해서 유사 제품을 개발할 수 없겠느냐고 사정했다.

―개발 경험이 있었습니까.

“경험은 없었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경쟁사에서 노하우를 공개할 리 만무하고, 그때부터 순전히 독학으로 연구한 끝에 1년 반 만에 존슨앤존슨사 것보다 우수한 제품을 개발해 냈죠. 이후 10년 동안 다양한 치과 재료를 개발했습니다.”

전 세계 60여 개 국가에 수출하고 있는 비스코의 효자 제품들.

에릭슨사 사장에게 속은 뒤 독립 결심

폐업 위기에 처했던 에릭슨사는 그가 연속해서 개발한 제품들 덕분에 승승장구했다. 다만 회사가 개인 명의로 되어 있고, 사장의 나이가 많은 것이 걱정거리였다. 사장이 갑자기 쓰러질 경우 회사가 큰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이를 간파한 서 회장은 사장에게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날 경우 회사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 이끌어갈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나를 보드 디렉터 명단에 올려놓아라”고 건의했다.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직원의 건의였기에 사장은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몇 년 후 주정부에 가서 회사 자료를 들춰보니 서 회장의 이름이 올라 있지 않았다.

―굉장히 서운했겠네요.

“제품 개발은 물론 실제 경영도 제가 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탈했습니다. 뭔가 내가 사장에게 이용당한 기분이었죠.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뭐 때문에 남의 밑에서 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 게 마음에 걸렸지만 독립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결혼은 언제 한 건가요.

“에릭슨에 근무할 때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아내는 경기여고 출신의 재원인데, 집안이 어려워 국립의료원간호대에 진학했고,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와 줄곧 간호사로 일했죠.”

독립하기로 결심했지만 선뜻 회사를 박차고 나올 수 없었다. 고액의 연봉과 자동차를 포기하고 많지 않은 자본금으로 독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몇 날 며칠 동안 혼자 고민하느라 위산과다 증세가 생길 즈음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그는 이때다 싶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부인이 뭐라고 하던가요.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아이들을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한번 해보라고 격려해 주더군요. 아내의 말이 큰 힘이 됐습니다.”

1980년 그는 에릭슨사를 나왔으나 바로 회사를 설립할 수 없었다. 에릭슨사 입사 당시 ‘사직 후 100마일 이내에서 같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사인을 한 까닭이다. 그가 그만두었다는 사실이 동종 업계에 퍼지면서 그를 데려가려는 경쟁사가 많았지만 최소한의 도의는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모두 거절했다.

그러던 중 샌디에이고에 있는 한 벤처회사에서 그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인공심장에 들어가는 밸브를 제조하는 회사였다. 젊은 사장은 그를 보자마자 “당신에게 돈이 있으면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치과용 접착제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사장은 그가 써낸 비즈니스 기획안을 보더니 “이거 괜찮겠다”며 모(母)회사 사장을 소개해 주었다. 이 회사는 새로운 인공심장 밸브를 개발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었고, 그에게 컨설팅을 받고 싶어 했다.

충전제 기계 하나로 창업

―인공심장 밸브가 치과 재료와 연관이 있나요.

“당시 인공심장 밸브는 인공다이아몬드 재료인 카본(Carbon·탄소)으로 만들고 있었어요. 카본은 색깔이 검습니다. 당연히 밸브도 검어 사람들이 이게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과히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뼈 성분과 비슷한 재료로 대체하는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었고, 비용이 400만 달러 정도 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제가 보니 200만 달러면 충분히 개발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기획안을 작성해 보여줬더니 오너가 당장 팀에 합류하라고 하더군요.”

그는 월급을 받지 않을 테니 제품 개발에 따라 생기는 수익의 일정분을 배당해 달라고 사장과 딜했다. 만약 딜이 깨지면 자신이 개발한 재료에 대해 권리를 갖겠다는 조건까지 덧붙였다. 대신 개발에 필요한 장비는 서 회장이 책임지기로 했다.

월급 없는 직장 생활을 한 지 1년쯤 되었을까. 어느 날 한 치과 재료 판매사에서 전화가 왔다. 그가 에릭슨 시절 개발한 충전제에 발암물질이 섞여 있다는 모 대학의 연구결과가 발표돼 제품을 팔지 못하고 있으니 대체품을 만들어달라는 전화였다. 그는 판매상에게 “에릭슨에 직접 문의하라”고 말한 후 곧바로 대체품 개발에 들어갔다. 그가 퇴직한 후 에릭슨사는 연구개발 기능이 상실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얼마 후 판매상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체품 만들어놓았으니 가져가라”고 말했다.

판매상은 시험 사용 후 합격점을 받았다며 제품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건값은 회사와 딜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 나중에 받겠다고 미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그는 회사 측에 “이제 그만 시카고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더 이상 남의 회사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월급을 받는 직원이 아니라서 회사는 그를 잡을 명분이 없었다. 다만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충전제 만드는 기계만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동안 사용한 것에 대한 감가상각비를 제했는데도 기계 값이 5만 달러나 되었다.

―월급도 안 받았는데 5만 달러는 어떻게 마련했습니까.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사실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동안 충전제를 공급해 주고 받지 않은 돈이 생각났어요. 판매사에 전화해 정산해 달라고 했더니 거짓말처럼 딱 5만 달러를 주더군요.”

시카고로 돌아온 그는 이 기계를 자본으로 비스코를 설립했다. 사명(社名)인 비스코는 그의 이름 약자와 컴퍼니의 약자를 따서 조합한 것이라고 한다. 출범 당시 직원은 그를 포함해 총 8명이었다.

서병인 회장이 직접 이끌고 있는 비스코 R&D 팀. 이들이 세계 치과 재료 부문을 리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 없게 하는 게 목표

―자본금이 5만 달러짜리 기계 하나였던 셈인데, 그러고도 운영이 됐습니까.

“이미 거래처가 확보된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라 큰 걱정은 없었습니다. 다만 창업 3~4년 동안은 직원들 먹여 살리기 바빠 신제품을 개발할 여력이 없었어요.”

비스코는 해가 거듭될 때마다 거래처를 늘려 갔다. 에릭슨 시절 그와 인연을 맺은 이들은 모두 그의 성실성을 믿고 거래를 텄다. 회사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그는 잠시 접어두었던 신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그리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세계 최초로 치아는 물론 금속에도 잘 붙는 접착제를 개발했다. 이 접착제가 바로 비스코의 효자상품인 ‘올본드’다. 이 제품 하나로 비스코는 치과 재료 분야에서 세계적인 회사가 되었고, 창업 5년 만에 사옥을 짓게 되었다. ‘올본드’는 그만큼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올본드가 나오면서 치아 치료 방법이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올본드가 나오기 전에는 보통 보철이나 브릿지를 할 때 치아를 무리하게 갈아내야 했습니다. 치아에 거는 방식이라 그렇게 해야 빠지지 않았죠. 그런데 올본드가 나온 후에는 브릿지라도 양쪽 이를 갈아 걸 필요가 없어졌지요. 접착력이 좋아 한번 붙이면 여간해서는 빠지거나 떨어지지 않으니까요.”

올본드는 광고 한 번 하지 않고도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각국의 치과학회나 치과대학 교수들이 강의할 때 올본드를 거론한 덕분이다. 그가 주저자 혹은 공동저자로 발표한 100여 편의 논문도 홍보에 도움이 됐다. 이 논문은 세계 치과대학의 필독논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 회장은 시술이 더욱 간편해진 올본드 업그레이드 제품을 내놓는가 하면 고분자화합물을 이용한 제품군을 끊임없이 선보이고 있다. 또한 후진을 양성하고 후배들에게 좀 더 큰 기회를 주고 싶어 매년 4명의 성균관대 학생들에게 인턴십 기회를 주고 있다.

그에게 “앞으로 목표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가까이는 지금 진행 중인 비스코 중국 현지 법인화 작업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이고, 멀리는 치아 치료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70이 훨씬 넘은 나이인데도 그는 앞으로도 계속 현역으로 활동하겠다는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성공 노트]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라
상대에 진학하지 않았는데도 결국 사업가가 됐다. 집안 어른들 뜻에 따라 상대에 갔다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 파고들다 보니 남들이 인정해 주었다는 점이다.

성실함엔 국경이 없다
에릭슨사에 근무하던 시절 회사 일을 내 일처럼 했고, 고객을 내 가족처럼 챙겼다. 회사 일로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이는 나를 ‘성실맨’이라고 평가했다. 내가 독립한다고 했을 때 그들은 어떻게든 나를 돕고 싶어 했고, 지금껏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고 있다.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 온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덕에 단돈 100달러도 안 되는 돈을 들고 유학을 갔고,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독립 선언과 함께 퇴직한 후에는 세상을 거시적 안목으로 보려 노력했다. 경쟁사들이 고액의 연봉으로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고 내가 갈 길을 착실히 준비한 덕에 성공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치과 재료 분야에서 비스코의 경쟁사는 3M 같은 거대 기업들이다. 이들 거대 기업은 백화점식 상품 생산과 판매로 시장을 점령한다. 나는 이들과 상품의 종류가 아니라 질로 승부하기 위해 충전제와 접착제 분야에만 집중했다. 나의 무기는 CEO인 내가 직접 제품을 연구개발하는 케미스트라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