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그룹, 특혜설 나돌자 포기
“다른 계열사들이 번 돈을 반도체에 쏟아 부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그룹만이 주인 될 수 있어. 오너의 빠른 의사결정이 요구되는 업종 특성상 포스코식의 국영 민간기업 형태로는 어려워.”
⊙ “하이닉스는 초우량 기업. 실사과정에서 추가 부실 나올 확률 없다”(金敏哲 하이닉스 CFO)
⊙ 매출의 97%가 해외에서 발생하는 수출 효자기업
⊙ “국내에서 주인 찾기가 쉽지 않을 것. 효성이 마지막 기회였는데…”(하이닉스 고위 관계자)
“다른 계열사들이 번 돈을 반도체에 쏟아 부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그룹만이 주인 될 수 있어. 오너의 빠른 의사결정이 요구되는 업종 특성상 포스코식의 국영 민간기업 형태로는 어려워.”
⊙ “하이닉스는 초우량 기업. 실사과정에서 추가 부실 나올 확률 없다”(金敏哲 하이닉스 CFO)
⊙ 매출의 97%가 해외에서 발생하는 수출 효자기업
⊙ “국내에서 주인 찾기가 쉽지 않을 것. 효성이 마지막 기회였는데…”(하이닉스 고위 관계자)
- 하이닉스 본사 1층에 있는 쇼룸.
“42개의 회사에 입찰 참여 의향을 물었는데, 회사를 사겠다고 나선 곳이 효성그룹 딱 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효성이 입찰 제안서를 내자마자, 일부에서 ‘대통령 사돈기업이다. 특혜다’라며 매도했습니다. 제안서를 낸 곳이 두 군데라도 되면 모를까, 한 군데였는데 특혜라니 말이 됩니까. 앞으로 국내에서 주인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한국 기업이 인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효성그룹이 하이닉스의 매입의사 철회를 선언했던 2009년 11월 12일, 평소 알고 지낸 하이닉스 고위 관계자는 이런 얘기를 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날 효성그룹은 ‘인수 포기 발표문’을 냈다.
<하이닉스는 그 자체로 경쟁력을 갖춘 회사로, 반도체라는 국가 기간산업을 영위하는 기업임에도 인수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한국 기업이 없었다. 효성은 大乘的(대승적) 관점에서 하이닉스 인수를 검토했으나, 세간에서 제기되는 특혜시비로 인해 인수 추진이 어렵게 됐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특혜시비가 불거지면 협상을 진행할 수 없다. 우리는 하이닉스를 포기하지만, 하루빨리 산업자본이 이 회사를 인수하기를 바란다.>
이로써 수년을 끌어 온 하이닉스의 매각은 불발됐다. 채권단은 재매각을 선언했고, “2010년 1월 말까지 새로운 인수 의향자의 접수를 받는다”고 밝혔다.
필자는 재계의 몇몇 고위 관계자에게 “왜 하이닉스 입찰에 참여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L그룹 고위 관계자는 하이닉스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적임자라며, 매각 주체 측에서 몇 차례 만남을 요청했습니다. 회사의 고위층이 내부 검토를 지시했는데 ‘절대 不可(불가)’로 결론이 나 우리의 이런 입장을 분명하게 전달했습니다. 하이닉스를 인수할 경우, 그룹 자체가 휘청거릴 수 있다고 결론 내렸어요. 향후 시장 가능성, 천문학적 단위의 투자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겁니다. 국가 기간산업인 만큼, 국내에서 인수할 회사가 없다면 포스코와 같은 공기업 성격의 민간기업으로 키워야하지 않겠느냐고 조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그룹 고위 관계자의 이야기도 비슷했다. S그룹은 지금까지 반도체사업을 해 본 적은 없지만, 풍부한 현금 유동성으로 인해 M&A가 진행될 때마다 거론된다.
S그룹 고위 관계자는 “그룹의 사업과 연관성이 너무 없다. 그룹으로 편입시킨다 해도, 회사를 경영할 인력을 새로 꾸리기조차 벅차다”고 말했다.
국내의 간판 기업이자, 수출시장에서 혁혁한 功(공)을 세우고 있는 하이닉스가 왜 오늘날 아무도 찾지 않는 골칫덩어리가 된 것일까. 세계 시장에서 그들의 경쟁력은 없는 것일까.
하이닉스의 정확한 명칭은 주식회사 하이닉스반도체다. 이천, 청주의 국내 사업장을 비롯해 중국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에 생산 공장이 있고, 全(전) 세계 16개국에 판매 법인 및 국내외 사무소를 두고 있는 글로벌 기업이다.
前身(전신)은 1949년에 설립된 국도건설주식회사다. 이 회사는 1983년에 현대전자산업(주)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96년 기업을 공개하고 증권거래소에 上場(상장)했다.
출발과 동시에 날개 꺾여
社史(사사)에서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은 1999년에 일어났다. DJ정부가 재벌그룹들의 중복 투자를 막겠다는 취지로 행한 이른바 ‘빅딜’사건으로, LG그룹은 눈물을 삼키며 LG반도체를 현대그룹에 넘겼다. 현대전자는 1999년 LG반도체를 흡수합병, 반도체 기업으로 변신했다.
이후 현대전자는 반도체와 상관없는 자회사 및 계열사를 매각하고 2001년 社名(사명)을 (주)하이닉스반도체로 바꾸었다. 본격적인 반도체 전문회사로 변신을 선언한 것이다. 故(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하이닉스에 대해 의지가 남달랐다고 했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LG반도체와 합병해 규모를 키웠고, 삼성전자와 경쟁 구도에 들어갔다. 직원들은 삼성전자를 넘어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겠다고 들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하이닉스는 발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날개가 꺾였다. 2000년 반도체 시장이 사상 최악의 불경기에 시달리면서, 하이닉스의 매출이 곤두박질했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던가. 설상가상으로 하이닉스의 회사채 3년 만기는 2001년에 집중돼 있었다. 결국 하이닉스는 2001년 말, 과다한 금융비용으로 휘청거리다 부도 위기에 처했고, 외환은행 등 채권단의 관리 감독하에 들어갔다.
당시 해외매각설 등이 제기됐지만, 첨단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해외에 팔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채권단이 맡게 된 것이다.
하이닉스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 반도체 시장의 규모(2008년 말 기준)는 총 2490억 달러다. 이 중 메모리는 460억 달러, 비메모리는 2030억 달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선전하고 있는 메모리 분야는 전체 시장에서 5분의 1밖에 안된다.
權五鉉(권오현)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은 2009년 7월, “향후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진출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이닉스는 비메모리 사업을 진행하다가 2004년 미국 시티그룹 벤처캐피털에 매각했다. 현재 비메모리 부문의 1위는 미국의 인텔社(사)다.
하지만 비메모리 분야는 워낙 방대해서, 인텔을 제외하고는 군소집단이 난립해 있는 형국이다. 반도체 전체 시장의 1위는 인텔, 2위는 삼성전자, 하이닉스는 7위다.
반도체 산업, 국내 수출의 10% 담당
지식경제부가 내놓은 자료에 의하면 국내 총 수출은 2538억 달러(2004), 2844억 달러(2005), 3254억 달러(2006), 3714억 달러(2007)에 이어 2008년 4220억 달러로 계속 늘어났다. 이 중 반도체 수출은 265억 달러(2004), 299억 달러(2005), 373억 달러(2006), 390억 달러(2007), 327억 달러(2008)를 기록했다. 최근 5년 동안 국내 외화벌이의 10%를 반도체가 담당하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분야는 현재 ‘빅4’로 구성돼 있다. 하이닉스 관계자의 설명이다.
“2009년도 2분기 기준으로, 세계 1위의 D램 업체는 삼성전자로, 전체 시장의 47.6%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뒤를 이어 하이닉스(20.2%), 美(미) 마이크론(10.8%), 일본 엘피다(10.2%), 대만 난야(6.9%) 순입니다. 낸드플래시 부문은 삼성전자가 전체의 40.7%를 점유하고 있고, 일본의 도시바(30.6%), 하이닉스(10.4%), 마이크론테크놀로지(9.1%), 인텔(6.9%) 순입니다.”
하이닉스는 2009년 말 자산총계를 기준으로 재계 서열 18위(공기업 포함) 그룹이다. 하이닉스반도체, (주)실리콘화일 등 2개의 상장회사와 (주)하이닉스엔지니어링, (주)하이로지텍, (주)현대디스플레이테크놀로지 등 6개의 비상장 법인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비상장된 해외법인 13개를 합하면, 하이닉스를 포함한 계열사는 총 21개다.
이 회사는 2008년 6조495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중 수출이 6조2896억원으로, 전체 매출의 97%를 차지했다. 최대주주는 6.4%의 지분을 가진 외환은행이다. 이어 우리은행(6.3%), 한국정책금융공사(5.5%), 국민연금공단(5%), 신한은행(4.7%), 기타 채권기관(5.9%) 순이다.
7분기 연속 영업적자, 2009년 3분기 흑자 전환에 성공
이들 채권은행 이외에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주식 수는 5억8963만8133주로 소액주주가 41만명이 넘는다. 하이닉스의 매각에 많은 사람의 눈과 귀가 쏠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재 매각을 추진 중인 지분은 채권단이 보유하고 있는 하이닉스 지분 28.07%다. 채권단은 처음에는 보유 지분 전량을 한꺼번에 팔기를 원했다. “하이닉스의 가격이 4조원대”라는 얘기는 채권단이 보유한 주식의 시장가(28.07%를 종가로 계산한 금액)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어 추정된 수치였다.
하지만 채권단은 효성그룹이 실사에 나서기도 전에 포기하자, 인수자가 없으면 28.07% 중 일부만이라도 나눠 판다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 이마저 실패하면 해외 업체에 순서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국가의 기간산업을 외국에 넘길 수 없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즉 ‘국민주’ 방식을 통해 포스코와 같은 기업으로 바꾸자는 주장이다.
하이닉스의 새로운 주인 찾기는 무산됐지만, 다행히도 하이닉스는 2009년 3분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2007년 말부터 2008년을 반도체 업계에서는 ‘암흑기’라고 불렀다. 공급과잉으로 D램 가격이 폭락하면서 반도체 경기가 사상 최악으로 치달았기 때문. 하이닉스는 2007년 4분기에 매출액 1조850억원에 영업적자 3180억원을 기록했다. 2008년 한 해 동안 영업적자가 무려 1조9210억원이었다.
2009년에도 1, 2분기까지 영업적자가 7260억원이었는데, 드디어 2009년 3분기에 흑자로 돌아선 것이다. 하이닉스는 2009년 3분기에 매출 2조1180억원, 영업이익 2090억원을 기록했다. 영업흑자로 돌아선 곳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뿐이고 미국, 일본 업체는 여전히 적자 상태다.
金敏哲(김민철) 하이닉스 CFO(전무)의 설명이다.
“사상 유례없는 메모리 반도체 불황이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메모리 시장에 뛰어들었던 대만 업체들이 탈락했습니다. 하이닉스가 고비를 넘기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확신했던 저희는 채권단을 설득했습니다. 채권단은 저희 의견을 받아들여 두 차례 유상증자를 실시했고, 그 돈을 R&D에 집중 투자했습니다. 2006년 매출액 대비 5.3%에 불과했던 R&D 투자를 2008년에 10.8%까지 끌어올렸어요. 현재 저희와 삼성전자 이외에는 50나노를 본격 생산할 수 있는 업체가 없습니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제품 포트폴리오가 경쟁사보다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2008년 말에 연구개발 인력을 전체의 20%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공장 하나 짓는 데 3조~4조원 들어
다음은 김민철 전무와의 대화다.
―2010년 반도체 경기가 어떻게 될 것으로 전망합니까.
“전 세계에서 몇 년 동안 PC교체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내부 검토 결과, PC 교체가 늘어나면서 D램 매출이 10% 이상 늘 것으로 전망됩니다.”
―주요 고객사가 北美(북미)에 집중돼 있어, 미국發(발) 경제위기로 타격을 입지는 않았나요.
“최대 고객이 HP, IBM 등 미국 업체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꾸준히 수출 판로를 뚫어서 유럽, 중국, 인도, 러시아 등 세계 35개국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회사의 재정상황은 어떻습니까.
“부채비율이 연결재무제표상으로 200% 정도로 높은 편입니다. 차입금이 7조5000억원 정도 되고요. 2002년에 기술개발이 늦었는데, 그때의 교훈으로 이번 위기가 닥쳤을 때 연간 4조원씩, 3년을 R&D에 쏟아 부었습니다. 이 이유 때문에 부채 비율이 높아졌지만, 이 중 실질부채는 5조원 정도라고 봐야 합니다. 회사가 보유한 현금유동자산이 1조5000억원 정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영업이익이 나고 있기 때문에 갚을 수 있어요.”
―인수의향서를 내고 실사를 할 때 드러날 추가 부실은 없습니까.
“단언컨대 추가 부실이 나올 확률은 없습니다. 채권단에 의해 관리된 지 8년이 넘었습니다. 회사의 모든 정보를 공개했고 대규모 소송도 없습니다. 최근 증자를 통해 필요한 설비를 확충했기 때문에, 향후 2~3년 내에 대규모의 투자가 들어갈 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는 곳이 없는 이유가 뭘까요.
“반도체 산업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도체 공장 하나 짓는데 3조~4조원이 들어갑니다. 투자가 조 단위다 보면, 오너 입장에서는 부담을 느낍니다. 하지만 반도체는 진입장벽이 높아 다른 업체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분야고, 우리는 이미 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주인을 만나면 세계적인 초우량 기업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회사가 인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글로벌 비즈니스 감각이 있고 장기적 비전을 갖춘 곳에서 회사를 경영했으면 합니다. 반도체의 특성상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수라는 점에서는 오너가 있는 기업이 회사를 사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시세차익을 노린 단순 헤지펀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네요.”
―국내에서는 사고자 나서는 기업이 없고, 외국에는 팔 수 없다면 참 아이러니한 구조 아닙니까.
“반도체는 국가의 기간산업이고, 국민성과 어울리는 사업입니다. 協業(협업)이 필수이고, 24시간 긴장해야 하는 사업입니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미국, 중국과는 맞지 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라도 꼭 우리나라가 영위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봅니다.”
연구인력 외국 회사의 두 배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하이닉스 본사를 찾았다. 하이닉스의 평균 공장 가동률은 88%라고 한다. 본사 1층에 마련된 쇼룸에는 메모리 반도체의 공정과정이 전시돼 있었다.
쇼룸은 국내 반도체 역사의 현장이었다. 지금은 판매는 물론 생산조차 하지 않는, 16MD램부터 최첨단 제품이 모두 전시돼 있었다. 쇼룸이 주는 감동에 비교하자면, 반도체 공장 내부는 외부인에게는 시시한 공간이다. 클린룸에서 모든 작업이 이뤄져야 하는 반도체의 특성상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朴星昱(박성욱) 연구소장 겸 부사장을 만났다. 박 부사장은 “하이닉스는 경쟁력이 충분한 기업”이라고 했다.
박 부사장의 얘기에 따르면, 반도체의 핵심 경쟁력은 人的(인적)자원, 설비 투자능력, 기술 및 원가 경쟁력, 고객확보 능력 등이다. 첫 번째 조건인 인적자원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하이닉스 측의 설명이다. 하이닉스 전체 직원 1만7000명 중에서 연구개발 인력이 3600명 정도로 전체의 21%를 차지하기 때문.
하이닉스의 연구개발 인력은 메모리분야 1위 업체인 삼성전자보다는 적지만 3~4위 회사인 외국 업체보다는 두 배 정도다.
박 부사장은 “그동안 회사 경영의 어려움으로 구조조정을 하면서도, 연구개발 인력만큼은 꾸준히 확보해 왔다. 반도체의 자산인 인력 확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술 및 원가 경쟁력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보였다. 반도체의 핵심은 ‘얼마나 싼 칩을, 얼마나 고객의 구미에 맞게 납품할 수 있느냐’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닉스는 비용절감을 위해 반도체 공정개발에 전력투구하고 있고, 고객의 입맛에 맞는 신개념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하이닉스에서 2007년 말 처음 생산한 ‘CIS(시모스이미지센서칩)’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제품은 메모리칩에 비메모리 성능을 덧붙여 만든 것으로 요즘 유행하는 융복합 반도체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하이닉스가 ‘고객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빨리 생산하기는 하나, 원천 기술은 부족하다’는 지적을 끊임없이 해 왔다.
메모리 시장은 더욱 커질 것
이에 대해 박 부사장은 “반도체의 신기술을 개발한 뒤 상용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10년”이라며 “과거에 회사의 경영상 어려움으로 준비를 제대로 못 했지만, 4~5년 전부터 産學硏(산학연) 합동으로 원천기술 연구를 해 오고 있다. 조만간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원천기술을 갖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일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의 추락’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 부사장의 말에 따르면, 메모리 시장은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할 것이고, 메모리 시장이 빅4 업체를 중심으로 재편됐기 때문에 하이닉스의 시장 점유율이 오히려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80년대에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업체는 총 41개였단다. 1990년대에 23개로 줄었고, 2007년 불황을 거치면서 빅4 업체와 두세 개의 군소업체가 남았다.
많은 사람이 하이닉스 인수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설비투자 능력’ 때문이다. 공장 하나 짓는 데만 3조~4조원이 소요된다.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해야 반도체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 몇몇 그룹에서 “하이닉스를 잘못 인수했다가, 그룹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박 부사장의 얘기.
“반도체는 돈을 수조 원 쏟아 부어야 하고, 그나마 그 돈이 얼마 뒤에 회수될지 알 수 없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제 과거와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41개의 회사 중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느라 규모에서 경쟁을 벌였지만, 이미 시장은 ‘살아남을 사람만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어요. 수요를 계산하고, 공급을 할 여력이 생겼다는 얘깁니다. 여전히 시장의 진폭이 있기는 하지만, 과거처럼 그 등락폭이 크지 않을 겁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반도체도 충분히 이익을 보장하는 투자를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반도체는 진입장벽이 높아서 다른 회사가 섣불리 참여할 수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박성욱 부사장은 4년 전에 대만 업체를 만났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대만 업체의 한 부사장이 그에게 ‘대만은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대단위 자본을 투입할 것이다. 장비를 사면 기술은 다 준다고 하더라. 설계는 외부에서 사람을 뽑아 시키면 된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란다. 박 부사장은 속으로 ‘반도체는 그렇게 만만한 사업이 아닌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대만은 오늘날 메모리 시장에서 영향력이 미미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중국 기업은 어떨까. 이들 나라의 기업들이 삼성전자나 하이닉스와 경쟁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민성’을 들고 나왔다.
“반도체 사업 초기에 국가가 지원한 것은 맞지만, 반도체와 우리의 국민성이 잘 맞아떨어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반도체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통한 개발, 생산, 500개 공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 긴밀히 협조해야 하는 사업입니다. 하이닉스는 ‘팀별 프로젝트’를 많이 하는데, 부하 직원이 상사를 제치고 팀장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반도체는 협업 사업입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이나 중국은 메모리 분야와 잘 어울리지 않아요.”
시련 겪으며 단련돼
하지만 그는 메모리 3~4위 회사들에 대한 동향 파악에는 늘 신경을 쓰고 있다. 그들이 최근에 향후 회사의 미래 방향과 관련된 각종 핑크빛 전망들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재계에서는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오르기 위해서 과거 견인차 역할을 했던 반도체, 자동차, 중공업이 아닌 지식, 서비스 산업의 힘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박 부사장은 이에 대해 “반도체는 앞으로도 우리가 부강한 국가가 되는 데 힘을 보탤 산업군”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좀 다른 질문을 던져 봤다.
―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 공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술 유출 우려는 없습니까.
“내부의 모든 문서가 암호화돼 있고, 외부로 종이 한 장도 가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주의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반도체의 특성상 일부분이 나간다고 해서 쉽게 베낄 수 없습니다. 국내 공장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것이 좋지만, 가격 경쟁력을 생각하면 굳이 이를 고집해야 하나 싶습니다. 엔지니어 몇 명이 중국 회사로 나간다고 해도, 국내 반도체산업에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하이닉스는 이천 본사에서 기술개발을 한 뒤 중국에서 생산만 하기 때문에 그런 위험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메모리 회사인 삼성전자와 차별화된 경쟁력이 있습니까.
“주인 없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직원들의 정신이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 초에 회사가 어려웠을 때 모두 똘똘 뭉쳤습니다. 혁신을 하지 않으면 회사가 생존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회사 전체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이닉스가 과연 살아남을 수는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하이닉스는 엄청난 위기를 이기고, 오늘날을 맞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경쟁력은 없다고 봅니다.”
―반도체 시장의 불확실성도 줄고, 향후 몇 년간 조 단위의 투자도 필요 없으며, 게다가 직원들까지 뭉쳐 있는데 왜 사겠다는 기업이 없을까요.
“과거의 경험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이닉스의 운명은?
국내 기업들은 정말 단순히 과거의 경험 때문에 하이닉스에 입질을 하지 않는 것일까. 재계 한 관계자는 이런 분석을 내놨다.
“반도체의 특성은 대규모 투자와, 그 투자를 회수하기까지 걸리는 긴 시간입니다. 삼성전자가 긴 불황을 뚫고 메모리 분야의 1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제품군이 휴대폰, LCD 등으로 다각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반도체 부문에서 연속 적자를 내더라도, 캐시 카우 역할을 할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던 셈이죠. 그런데 하이닉스는 사업군이 다각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결국 다른 계열사들이 번 돈을 이 회사에 쏟아 부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그룹만이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10大(대) 그룹 내에서 주인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2차 매각이 무산될 경우 하이닉스의 운명은 가혹해질 수 있어요. 포스코식의 국영 민간기업 형태로는 하이닉스를 제대로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반도체는 빠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오너 경영인에게 적당한 사업이기 때문이죠. 언제까지 채권단이 경영할 수도 없고, 결국 국민들이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과연 2010년에는 하이닉스가 새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사진 : 조준우
▣ 반도체란?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필수 부품으로 컴퓨터, 통신장비, 통신시스템, 자동차, 디지털가전제품, 산업기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돼 ‘산업의 쌀’이라 불린다. 반도체는 메모리와 非(비)메모리 반도체로 나뉜다.
메모리는 데이터를 기억할 수 있는 반도체로, D램과 플래시메모리, 롬(ROM)메모리 등을 일컫는다. 비메모리는 정보의 저장이 아니라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이 주가 되는 반도체로 CPU와 같은 프로세서나, OP-AMP와 같은 증폭기, 연산처리 등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주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회사다.
메모리 반도체는 다시 휘발성과 비휘발성으로 나뉜다. 휘발성 메모리는 전원이 끊어지면 정보가 지워지는 D램 같은 제품으로 주로 디지털TV, 디지털셋톱박스, DVD플레이어 등에 사용된다. 비휘발성 메모리는 전원이 공급되지 않아도 데이터가 지워지지 않는 제품으로 노어형, 낸드형으로 나뉘는데,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USB 드라이브, MP3 플레이어, 차량용 내비게이션 등에 쓰인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 내외, 비메모리 분야가 80% 가량을 차지한다. 때문에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메모리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한 편이다.
효성그룹이 하이닉스의 매입의사 철회를 선언했던 2009년 11월 12일, 평소 알고 지낸 하이닉스 고위 관계자는 이런 얘기를 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날 효성그룹은 ‘인수 포기 발표문’을 냈다.
<하이닉스는 그 자체로 경쟁력을 갖춘 회사로, 반도체라는 국가 기간산업을 영위하는 기업임에도 인수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한국 기업이 없었다. 효성은 大乘的(대승적) 관점에서 하이닉스 인수를 검토했으나, 세간에서 제기되는 특혜시비로 인해 인수 추진이 어렵게 됐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특혜시비가 불거지면 협상을 진행할 수 없다. 우리는 하이닉스를 포기하지만, 하루빨리 산업자본이 이 회사를 인수하기를 바란다.>
이로써 수년을 끌어 온 하이닉스의 매각은 불발됐다. 채권단은 재매각을 선언했고, “2010년 1월 말까지 새로운 인수 의향자의 접수를 받는다”고 밝혔다.
필자는 재계의 몇몇 고위 관계자에게 “왜 하이닉스 입찰에 참여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L그룹 고위 관계자는 하이닉스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적임자라며, 매각 주체 측에서 몇 차례 만남을 요청했습니다. 회사의 고위층이 내부 검토를 지시했는데 ‘절대 不可(불가)’로 결론이 나 우리의 이런 입장을 분명하게 전달했습니다. 하이닉스를 인수할 경우, 그룹 자체가 휘청거릴 수 있다고 결론 내렸어요. 향후 시장 가능성, 천문학적 단위의 투자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겁니다. 국가 기간산업인 만큼, 국내에서 인수할 회사가 없다면 포스코와 같은 공기업 성격의 민간기업으로 키워야하지 않겠느냐고 조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그룹 고위 관계자의 이야기도 비슷했다. S그룹은 지금까지 반도체사업을 해 본 적은 없지만, 풍부한 현금 유동성으로 인해 M&A가 진행될 때마다 거론된다.
S그룹 고위 관계자는 “그룹의 사업과 연관성이 너무 없다. 그룹으로 편입시킨다 해도, 회사를 경영할 인력을 새로 꾸리기조차 벅차다”고 말했다.
국내의 간판 기업이자, 수출시장에서 혁혁한 功(공)을 세우고 있는 하이닉스가 왜 오늘날 아무도 찾지 않는 골칫덩어리가 된 것일까. 세계 시장에서 그들의 경쟁력은 없는 것일까.
하이닉스의 정확한 명칭은 주식회사 하이닉스반도체다. 이천, 청주의 국내 사업장을 비롯해 중국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에 생산 공장이 있고, 全(전) 세계 16개국에 판매 법인 및 국내외 사무소를 두고 있는 글로벌 기업이다.
前身(전신)은 1949년에 설립된 국도건설주식회사다. 이 회사는 1983년에 현대전자산업(주)으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96년 기업을 공개하고 증권거래소에 上場(상장)했다.
출발과 동시에 날개 꺾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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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닉스 직원들이 반도체 공정 상황을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 |
이후 현대전자는 반도체와 상관없는 자회사 및 계열사를 매각하고 2001년 社名(사명)을 (주)하이닉스반도체로 바꾸었다. 본격적인 반도체 전문회사로 변신을 선언한 것이다. 故(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하이닉스에 대해 의지가 남달랐다고 했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LG반도체와 합병해 규모를 키웠고, 삼성전자와 경쟁 구도에 들어갔다. 직원들은 삼성전자를 넘어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겠다고 들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하이닉스는 발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날개가 꺾였다. 2000년 반도체 시장이 사상 최악의 불경기에 시달리면서, 하이닉스의 매출이 곤두박질했다.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던가. 설상가상으로 하이닉스의 회사채 3년 만기는 2001년에 집중돼 있었다. 결국 하이닉스는 2001년 말, 과다한 금융비용으로 휘청거리다 부도 위기에 처했고, 외환은행 등 채권단의 관리 감독하에 들어갔다.
당시 해외매각설 등이 제기됐지만, 첨단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해외에 팔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채권단이 맡게 된 것이다.
하이닉스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 반도체 시장의 규모(2008년 말 기준)는 총 2490억 달러다. 이 중 메모리는 460억 달러, 비메모리는 2030억 달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선전하고 있는 메모리 분야는 전체 시장에서 5분의 1밖에 안된다.
權五鉉(권오현)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은 2009년 7월, “향후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 진출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이닉스는 비메모리 사업을 진행하다가 2004년 미국 시티그룹 벤처캐피털에 매각했다. 현재 비메모리 부문의 1위는 미국의 인텔社(사)다.
하지만 비메모리 분야는 워낙 방대해서, 인텔을 제외하고는 군소집단이 난립해 있는 형국이다. 반도체 전체 시장의 1위는 인텔, 2위는 삼성전자, 하이닉스는 7위다.
반도체 산업, 국내 수출의 10% 담당
지식경제부가 내놓은 자료에 의하면 국내 총 수출은 2538억 달러(2004), 2844억 달러(2005), 3254억 달러(2006), 3714억 달러(2007)에 이어 2008년 4220억 달러로 계속 늘어났다. 이 중 반도체 수출은 265억 달러(2004), 299억 달러(2005), 373억 달러(2006), 390억 달러(2007), 327억 달러(2008)를 기록했다. 최근 5년 동안 국내 외화벌이의 10%를 반도체가 담당하고 있다.메모리반도체 분야는 현재 ‘빅4’로 구성돼 있다. 하이닉스 관계자의 설명이다.
“2009년도 2분기 기준으로, 세계 1위의 D램 업체는 삼성전자로, 전체 시장의 47.6%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뒤를 이어 하이닉스(20.2%), 美(미) 마이크론(10.8%), 일본 엘피다(10.2%), 대만 난야(6.9%) 순입니다. 낸드플래시 부문은 삼성전자가 전체의 40.7%를 점유하고 있고, 일본의 도시바(30.6%), 하이닉스(10.4%), 마이크론테크놀로지(9.1%), 인텔(6.9%) 순입니다.”
하이닉스는 2009년 말 자산총계를 기준으로 재계 서열 18위(공기업 포함) 그룹이다. 하이닉스반도체, (주)실리콘화일 등 2개의 상장회사와 (주)하이닉스엔지니어링, (주)하이로지텍, (주)현대디스플레이테크놀로지 등 6개의 비상장 법인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비상장된 해외법인 13개를 합하면, 하이닉스를 포함한 계열사는 총 21개다.
이 회사는 2008년 6조495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중 수출이 6조2896억원으로, 전체 매출의 97%를 차지했다. 최대주주는 6.4%의 지분을 가진 외환은행이다. 이어 우리은행(6.3%), 한국정책금융공사(5.5%), 국민연금공단(5%), 신한은행(4.7%), 기타 채권기관(5.9%) 순이다.
7분기 연속 영업적자, 2009년 3분기 흑자 전환에 성공
이들 채권은행 이외에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주식 수는 5억8963만8133주로 소액주주가 41만명이 넘는다. 하이닉스의 매각에 많은 사람의 눈과 귀가 쏠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재 매각을 추진 중인 지분은 채권단이 보유하고 있는 하이닉스 지분 28.07%다. 채권단은 처음에는 보유 지분 전량을 한꺼번에 팔기를 원했다. “하이닉스의 가격이 4조원대”라는 얘기는 채권단이 보유한 주식의 시장가(28.07%를 종가로 계산한 금액)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어 추정된 수치였다.
하지만 채권단은 효성그룹이 실사에 나서기도 전에 포기하자, 인수자가 없으면 28.07% 중 일부만이라도 나눠 판다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 이마저 실패하면 해외 업체에 순서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국가의 기간산업을 외국에 넘길 수 없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즉 ‘국민주’ 방식을 통해 포스코와 같은 기업으로 바꾸자는 주장이다.
하이닉스의 새로운 주인 찾기는 무산됐지만, 다행히도 하이닉스는 2009년 3분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2007년 말부터 2008년을 반도체 업계에서는 ‘암흑기’라고 불렀다. 공급과잉으로 D램 가격이 폭락하면서 반도체 경기가 사상 최악으로 치달았기 때문. 하이닉스는 2007년 4분기에 매출액 1조850억원에 영업적자 3180억원을 기록했다. 2008년 한 해 동안 영업적자가 무려 1조9210억원이었다.
2009년에도 1, 2분기까지 영업적자가 7260억원이었는데, 드디어 2009년 3분기에 흑자로 돌아선 것이다. 하이닉스는 2009년 3분기에 매출 2조1180억원, 영업이익 2090억원을 기록했다. 영업흑자로 돌아선 곳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뿐이고 미국, 일본 업체는 여전히 적자 상태다.
金敏哲(김민철) 하이닉스 CFO(전무)의 설명이다.
“사상 유례없는 메모리 반도체 불황이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메모리 시장에 뛰어들었던 대만 업체들이 탈락했습니다. 하이닉스가 고비를 넘기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확신했던 저희는 채권단을 설득했습니다. 채권단은 저희 의견을 받아들여 두 차례 유상증자를 실시했고, 그 돈을 R&D에 집중 투자했습니다. 2006년 매출액 대비 5.3%에 불과했던 R&D 투자를 2008년에 10.8%까지 끌어올렸어요. 현재 저희와 삼성전자 이외에는 50나노를 본격 생산할 수 있는 업체가 없습니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제품 포트폴리오가 경쟁사보다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2008년 말에 연구개발 인력을 전체의 20%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공장 하나 짓는 데 3조~4조원 들어
다음은 김민철 전무와의 대화다.
―2010년 반도체 경기가 어떻게 될 것으로 전망합니까.
“전 세계에서 몇 년 동안 PC교체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내부 검토 결과, PC 교체가 늘어나면서 D램 매출이 10% 이상 늘 것으로 전망됩니다.”
―주요 고객사가 北美(북미)에 집중돼 있어, 미국發(발) 경제위기로 타격을 입지는 않았나요.
“최대 고객이 HP, IBM 등 미국 업체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꾸준히 수출 판로를 뚫어서 유럽, 중국, 인도, 러시아 등 세계 35개국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회사의 재정상황은 어떻습니까.
“부채비율이 연결재무제표상으로 200% 정도로 높은 편입니다. 차입금이 7조5000억원 정도 되고요. 2002년에 기술개발이 늦었는데, 그때의 교훈으로 이번 위기가 닥쳤을 때 연간 4조원씩, 3년을 R&D에 쏟아 부었습니다. 이 이유 때문에 부채 비율이 높아졌지만, 이 중 실질부채는 5조원 정도라고 봐야 합니다. 회사가 보유한 현금유동자산이 1조5000억원 정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영업이익이 나고 있기 때문에 갚을 수 있어요.”
―인수의향서를 내고 실사를 할 때 드러날 추가 부실은 없습니까.
“단언컨대 추가 부실이 나올 확률은 없습니다. 채권단에 의해 관리된 지 8년이 넘었습니다. 회사의 모든 정보를 공개했고 대규모 소송도 없습니다. 최근 증자를 통해 필요한 설비를 확충했기 때문에, 향후 2~3년 내에 대규모의 투자가 들어갈 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는 곳이 없는 이유가 뭘까요.
“반도체 산업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도체 공장 하나 짓는데 3조~4조원이 들어갑니다. 투자가 조 단위다 보면, 오너 입장에서는 부담을 느낍니다. 하지만 반도체는 진입장벽이 높아 다른 업체들이 쉽게 넘볼 수 없는 분야고, 우리는 이미 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주인을 만나면 세계적인 초우량 기업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회사가 인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글로벌 비즈니스 감각이 있고 장기적 비전을 갖춘 곳에서 회사를 경영했으면 합니다. 반도체의 특성상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수라는 점에서는 오너가 있는 기업이 회사를 사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시세차익을 노린 단순 헤지펀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네요.”
―국내에서는 사고자 나서는 기업이 없고, 외국에는 팔 수 없다면 참 아이러니한 구조 아닙니까.
“반도체는 국가의 기간산업이고, 국민성과 어울리는 사업입니다. 協業(협업)이 필수이고, 24시간 긴장해야 하는 사업입니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미국, 중국과는 맞지 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라도 꼭 우리나라가 영위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봅니다.”
연구인력 외국 회사의 두 배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하이닉스 본사를 찾았다. 하이닉스의 평균 공장 가동률은 88%라고 한다. 본사 1층에 마련된 쇼룸에는 메모리 반도체의 공정과정이 전시돼 있었다.
쇼룸은 국내 반도체 역사의 현장이었다. 지금은 판매는 물론 생산조차 하지 않는, 16MD램부터 최첨단 제품이 모두 전시돼 있었다. 쇼룸이 주는 감동에 비교하자면, 반도체 공장 내부는 외부인에게는 시시한 공간이다. 클린룸에서 모든 작업이 이뤄져야 하는 반도체의 특성상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朴星昱(박성욱) 연구소장 겸 부사장을 만났다. 박 부사장은 “하이닉스는 경쟁력이 충분한 기업”이라고 했다.
박 부사장의 얘기에 따르면, 반도체의 핵심 경쟁력은 人的(인적)자원, 설비 투자능력, 기술 및 원가 경쟁력, 고객확보 능력 등이다. 첫 번째 조건인 인적자원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하이닉스 측의 설명이다. 하이닉스 전체 직원 1만7000명 중에서 연구개발 인력이 3600명 정도로 전체의 21%를 차지하기 때문.
하이닉스의 연구개발 인력은 메모리분야 1위 업체인 삼성전자보다는 적지만 3~4위 회사인 외국 업체보다는 두 배 정도다.
박 부사장은 “그동안 회사 경영의 어려움으로 구조조정을 하면서도, 연구개발 인력만큼은 꾸준히 확보해 왔다. 반도체의 자산인 인력 확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술 및 원가 경쟁력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보였다. 반도체의 핵심은 ‘얼마나 싼 칩을, 얼마나 고객의 구미에 맞게 납품할 수 있느냐’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닉스는 비용절감을 위해 반도체 공정개발에 전력투구하고 있고, 고객의 입맛에 맞는 신개념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하이닉스에서 2007년 말 처음 생산한 ‘CIS(시모스이미지센서칩)’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제품은 메모리칩에 비메모리 성능을 덧붙여 만든 것으로 요즘 유행하는 융복합 반도체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하이닉스가 ‘고객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빨리 생산하기는 하나, 원천 기술은 부족하다’는 지적을 끊임없이 해 왔다.
메모리 시장은 더욱 커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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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닉스 연구소의 총책임자 박성욱 부사장. |
일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의 추락’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 부사장의 말에 따르면, 메모리 시장은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할 것이고, 메모리 시장이 빅4 업체를 중심으로 재편됐기 때문에 하이닉스의 시장 점유율이 오히려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80년대에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업체는 총 41개였단다. 1990년대에 23개로 줄었고, 2007년 불황을 거치면서 빅4 업체와 두세 개의 군소업체가 남았다.
많은 사람이 하이닉스 인수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설비투자 능력’ 때문이다. 공장 하나 짓는 데만 3조~4조원이 소요된다.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해야 반도체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 몇몇 그룹에서 “하이닉스를 잘못 인수했다가, 그룹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박 부사장의 얘기.
“반도체는 돈을 수조 원 쏟아 부어야 하고, 그나마 그 돈이 얼마 뒤에 회수될지 알 수 없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제 과거와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41개의 회사 중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느라 규모에서 경쟁을 벌였지만, 이미 시장은 ‘살아남을 사람만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어요. 수요를 계산하고, 공급을 할 여력이 생겼다는 얘깁니다. 여전히 시장의 진폭이 있기는 하지만, 과거처럼 그 등락폭이 크지 않을 겁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반도체도 충분히 이익을 보장하는 투자를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반도체는 진입장벽이 높아서 다른 회사가 섣불리 참여할 수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박성욱 부사장은 4년 전에 대만 업체를 만났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대만 업체의 한 부사장이 그에게 ‘대만은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대단위 자본을 투입할 것이다. 장비를 사면 기술은 다 준다고 하더라. 설계는 외부에서 사람을 뽑아 시키면 된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란다. 박 부사장은 속으로 ‘반도체는 그렇게 만만한 사업이 아닌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대만은 오늘날 메모리 시장에서 영향력이 미미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중국 기업은 어떨까. 이들 나라의 기업들이 삼성전자나 하이닉스와 경쟁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민성’을 들고 나왔다.
“반도체 사업 초기에 국가가 지원한 것은 맞지만, 반도체와 우리의 국민성이 잘 맞아떨어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반도체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통한 개발, 생산, 500개 공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 긴밀히 협조해야 하는 사업입니다. 하이닉스는 ‘팀별 프로젝트’를 많이 하는데, 부하 직원이 상사를 제치고 팀장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반도체는 협업 사업입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이나 중국은 메모리 분야와 잘 어울리지 않아요.”
시련 겪으며 단련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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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이천 하이닉스 본사에 있는 D램 생산공장 모습. |
최근 재계에서는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오르기 위해서 과거 견인차 역할을 했던 반도체, 자동차, 중공업이 아닌 지식, 서비스 산업의 힘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박 부사장은 이에 대해 “반도체는 앞으로도 우리가 부강한 국가가 되는 데 힘을 보탤 산업군”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좀 다른 질문을 던져 봤다.
―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 공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술 유출 우려는 없습니까.
“내부의 모든 문서가 암호화돼 있고, 외부로 종이 한 장도 가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도 주의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반도체의 특성상 일부분이 나간다고 해서 쉽게 베낄 수 없습니다. 국내 공장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것이 좋지만, 가격 경쟁력을 생각하면 굳이 이를 고집해야 하나 싶습니다. 엔지니어 몇 명이 중국 회사로 나간다고 해도, 국내 반도체산업에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하이닉스는 이천 본사에서 기술개발을 한 뒤 중국에서 생산만 하기 때문에 그런 위험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메모리 회사인 삼성전자와 차별화된 경쟁력이 있습니까.
“주인 없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직원들의 정신이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 초에 회사가 어려웠을 때 모두 똘똘 뭉쳤습니다. 혁신을 하지 않으면 회사가 생존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회사 전체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이닉스가 과연 살아남을 수는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하이닉스는 엄청난 위기를 이기고, 오늘날을 맞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경쟁력은 없다고 봅니다.”
―반도체 시장의 불확실성도 줄고, 향후 몇 년간 조 단위의 투자도 필요 없으며, 게다가 직원들까지 뭉쳐 있는데 왜 사겠다는 기업이 없을까요.
“과거의 경험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이닉스의 운명은?
국내 기업들은 정말 단순히 과거의 경험 때문에 하이닉스에 입질을 하지 않는 것일까. 재계 한 관계자는 이런 분석을 내놨다.
“반도체의 특성은 대규모 투자와, 그 투자를 회수하기까지 걸리는 긴 시간입니다. 삼성전자가 긴 불황을 뚫고 메모리 분야의 1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제품군이 휴대폰, LCD 등으로 다각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반도체 부문에서 연속 적자를 내더라도, 캐시 카우 역할을 할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던 셈이죠. 그런데 하이닉스는 사업군이 다각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결국 다른 계열사들이 번 돈을 이 회사에 쏟아 부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그룹만이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10大(대) 그룹 내에서 주인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2차 매각이 무산될 경우 하이닉스의 운명은 가혹해질 수 있어요. 포스코식의 국영 민간기업 형태로는 하이닉스를 제대로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반도체는 빠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오너 경영인에게 적당한 사업이기 때문이죠. 언제까지 채권단이 경영할 수도 없고, 결국 국민들이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과연 2010년에는 하이닉스가 새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사진 : 조준우
▣ 반도체란?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필수 부품으로 컴퓨터, 통신장비, 통신시스템, 자동차, 디지털가전제품, 산업기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돼 ‘산업의 쌀’이라 불린다. 반도체는 메모리와 非(비)메모리 반도체로 나뉜다.
메모리는 데이터를 기억할 수 있는 반도체로, D램과 플래시메모리, 롬(ROM)메모리 등을 일컫는다. 비메모리는 정보의 저장이 아니라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이 주가 되는 반도체로 CPU와 같은 프로세서나, OP-AMP와 같은 증폭기, 연산처리 등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주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회사다.
메모리 반도체는 다시 휘발성과 비휘발성으로 나뉜다. 휘발성 메모리는 전원이 끊어지면 정보가 지워지는 D램 같은 제품으로 주로 디지털TV, 디지털셋톱박스, DVD플레이어 등에 사용된다. 비휘발성 메모리는 전원이 공급되지 않아도 데이터가 지워지지 않는 제품으로 노어형, 낸드형으로 나뉘는데,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USB 드라이브, MP3 플레이어, 차량용 내비게이션 등에 쓰인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 내외, 비메모리 분야가 80% 가량을 차지한다. 때문에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메모리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한 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