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세계 읽기] ‘민주주의와 국민통합의 날’ 행사로 본 튀르키예 민주주의 : 월간조선

2024년 12월 3일 윤석열(尹錫悅)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언했다가 무산됐을 때, 필자의 주변인 중에는 이것이 2016년 7월 15일에 튀르키예(터키)에서 있었던 쿠데타를 떠올리게 한다는 반응을 보내온 이가 있었다. 2016년 튀르키예 군부(軍部) 일각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쿠데타는 에르도안이 국민의 의지를 등에 업고 진압하자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후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 정부는 ‘페툴라 귈렌 테러리스트 조직(FETÖ)’을 쿠데타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고 그 뿌리를 뽑기 위하여 군대, 사법부, 경찰, 학교, 재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수사와 숙청을 단행했다.

민주적 수단이 아닌 물리적 폭력을 사용한 ‘비상조치’로 정치적 목표를 이루려다가 어이없게 실패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그토록 미워하고 두려워했던 상대방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만을 낳았다는 점에서, 정말로 9년 전의 튀르키예와 지금의 한국은 비슷할지도 모른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오히려 의석 190석을 지닌 민주당 이재명(李在明) 정부가 탄생했고, 국민의힘은 ‘내란특검(內亂特檢)’으로 벌벌 떠는 위치로 전락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런 외형적 유사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2016년 7월 15일에 튀르키예가 겪은 쿠데타의 독특한 성격을 다소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필자는 지난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튀르키예가 개최한 ‘민주주의와 국민통합의 날’ 행사에 초청받아 참여할 수 있었다. 필자 이외에도 수십 개국의 언론인과 작가들이 앙카라와 이스탄불에 초청되었다. 필자는 이 기회에 관련 도서를 읽고, 튀르키예 정부가 건립한 ‘7월15일박물관’을 둘러보고, 튀르키예 현지인들과 얘기하며 2016년 쿠데타에 대한 튀르키예 정부의 입장과 튀르키예의 기억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사건을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2016년에 일어난 불발 쿠데타는 그 이전 튀르키예 정치사를 수놓았던 쿠데타들과는 명백히 구분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케말주의와 ‘쿠데타 관행’

아드난 멘데레스 전 총리.

쿠데타는 언제나 현대 튀르키예 정치사의 분기점(分岐點)으로 작용했다. 튀르키예 쿠데타의 역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해체 위기에 놓인 오스만 제국에서 등장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케말 파샤)와 큰 연(緣)을 맺고 있다. 아타튀르크는 군 장교와 관료들을 규합하여 아나톨리아와 이스탄불에서 외국 세력을 몰아내고 1923년에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국했다.

아타튀르크의 최대 관심사는 오스만 제국이 유럽 열강에 침탈당하며 겪었던 굴욕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타튀르크는 이슬람교의 공적(公的) 영향력을 배제하는 세속주의(世俗主義)와 국가 주도의 하향식(下向式) 근대화를 골자로 하는 ‘케말주의’를 튀르키예의 국시(國是)로 남기고 1938년에 서거했다.

이후 튀르키예는 1946년에 다당제(多黨制) 민주주의를 도입했다. 하지만 다당제 개혁은 이슬람을 더 공적으로 표현하기를 원하고, 국가주의 경제보다는 자유시장 경제를 지지하는 야당 세력의 선거에서의 약진으로 이어졌다. 1950년 집권한 민주당의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는 아타튀르크를 국부(國父)로 존경하지만 케말주의에는 염증을 느끼는 시민들의 선풍적 지지를 얻으며 권력을 유지했다.

아타튀르크의 후예를 자처하며 그의 사명감을 공유하는 군부 장교들은 멘데레스에게 커다란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공화국 정신’을 사수한다는 명목으로 1960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멘데레스를 체포했다. 멘데레스는 이듬해 처형되었다.

‘자유주의 이슬람’의 등장

다른 국가와 달리 튀르키예 군부는 쿠데타 후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고 선거를 다시 실시했지만, 이로써 튀르키예의 ‘쿠데타 관행’이 시작되었다. 케말주의 군부는 국가가 정치적으로 분열되거나 케말주의 원칙이 흔들린다고 판단할 때마다 주기적으로 정치에 개입했다. 1971년과 1980년에는 좌우 갈등이 극심해져 발생한 치안 마비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군부가 정치에 개입했다. 군은 1997년에도 1960년과 마찬가지로 세속주의 원칙을 민선(民選) 정부가 흔든다는 이유로 정부가 퇴진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케말주의 국시 수호’를 명분으로 거의 10년 주기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군부에 대한 정치적 반발은 계속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튀르키예 유권자들은 쿠데타 때는 발언을 삼가다가 뒤이은 선거에서 다시 반대파 정부에 투표를 하면서 조용히 정치적 불만을 표했다.

이런 상황은 2002년 총선에서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이 대승(大勝)하면서 달라졌다. 1997년에 물러난 네즈메틴 에르바칸 정부 시기 이스탄불 시장을 했던 에르도안은 케말주의를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수감 생활까지 한 전력(前歷)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80년대 투르구트 외잘 총리의 경제 자유화 개혁으로 탄생한 아나톨리아의 수출 기업을 육성하는 친(親)시장 정책으로 튀르키예 경제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에르도안이 공적 영역에서 종교, 특히 이슬람을 표현하는 문제를 지지해 온 데 대한 케말주의자들의 반발은 유럽연합(EU) 가입을 방패로 삼으며 무마했다. 유럽연합이 언론·출판·결사(結社)의 자유를 가입 조건으로 내걸기에, 자신은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서 국민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유럽으로의 합류는 케말주의자들의 1세기에 걸친 꿈이었기에 그들로서도 에르도안에게 설득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 2011년까지만 하더라도, 에르도안은 서구에서도 민주주의, 시장경제, 이슬람을 조화시키는 ‘자유주의 이슬람’의 대표로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으로 이슬람과 ‘문명의 충돌’을 벌인다는 부담이 극심했던 서구 입장에서 이슬람이 자유주의 질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서사(敍事)는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 시기의 상징이 바로 페툴라 귈렌과 그가 이끄는 ‘귈렌 운동’이었다.

페툴라 귈렌

페툴라 귈렌. AP/뉴시스

페툴라 귈렌은 1941년 튀르키예 동부 에르주룸에서 태어난 이슬람 설교자였다. 그는 사상적으로 튀르키예 동부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종교 지도자 사이드 누르시(1876~1960년)의 영향을 받았다. 수피(이슬람 신비주의)파 지도자였던 누르시는 종교를 억누르는 아타튀르크 식 세속주의 대신에, 근대의 과학, 합리, 이성(理性)이 이슬람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한 이슬람 근대주의자였다. 누르시는 근대주의에 맞게 코란을 해석한 《리살레 누르》를 저술하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누르주 운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 서부 해안의 이즈미르로 옮겨가 설교 공동체를 만들었던 젊은 페툴라 귈렌도 누르주 운동을 따르는 인물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튀르키예에서는 이미 케말주의 국가원칙과 사회 하부의 괴리가 드러나고 있었다. 아타튀르크는 종무청(宗務廳·Diyanet)을 만들어 전국의 모스크와 이슬람 성직자들을 국가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슬람의 안식일인 금요일 예배에는 종무청이 직접 설교 내용을 하달해 국가 정책을 모스크에서 알릴 정도였다. 그러나 케말주의가 경제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보수적인 농촌 출신 국민들에게 문화적 영향력을 더는 행사하지 못하자 종무청의 영향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사회 하부에서 국가에 포섭된 모스크가 아니라 자신들이 자율적으로 코란을 해석하고 종교 활동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발생했다.

귈렌은 이 시기에 ‘흐느끼며 코란과 《리살레 누르》를 설교하는’ 특유의 예배 방식을 선보이며 설교자로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말이 되었을 때 귈렌은 ‘흐느끼는 공동체(ağlayan cemaat)’로 유명한 종교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귈렌 운동의 확산

튀르키예 학생들은 앙카라에 있는 7·15기념관을 찾아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한다.

1980년에 공산주의자들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케난 에브렌이 이끄는 세 번째 쿠데타가 발생하자, 귈렌은 곧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할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이슬람에 입각한 반공주의자였던 귈렌은 쿠데타를 지지하며 군부와 협력을 모색했다. 에브렌 정부도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전통 도덕인 이슬람을 포용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귈렌에게 더 큰 기회는 1983년에 시작된 투르구트 외잘 총리의 경제 자유화 개혁에서 다가왔다. 외잘 정부는 국가가 완전히 통제하던 교육 인프라를 민간에 개방하고 사립학교 설립을 허용했다. 이미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했던 귈렌은 전국적으로 사립학교를 개설하고 학생을 모집하며 청소년들을 육성하는 데 집중했다. 1980년대 말이 되자 귈렌 식 학교는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귈렌 학교는 시골 지역에서 학생을 모집하여 장학금을 제공하고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도록 했다. ‘등대’라고 불리는 기숙사에서는 상급생이 ‘형’ 혹은 ‘언니’로 불리며 학생들의 일상을 통제했다. 학업에 우수한 학생들은 압도적 우대를 받았고, 학생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귈렌의 설교집을 읽으며 하루를 복기(復棋)하는 일종의 ‘생활총화’를 했다.

이런 성과 위주 통제 교육 덕택에 귈렌 학교 학생들은 이공계를 중심으로 높은 학업 성과를 보이며 엘리트 집단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문제로 자녀를 교육시키기 어렵고 또 자녀가 세속주의적 대도시 문화에 물들 것을 우려한 내륙의 보수적 농촌 가정들 사이에서 귈렌 학교의 인기가 치솟았다.

1990년대에 귈렌 운동은 사업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팽창했다. 1980년대에 최초로 등장한 귈렌파 엘리트는 군(軍), 경찰, 사법부, 언론, 학계로 진출하며 명성을 얻고 있었다. 재계에서도 귈렌의 영향력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외잘 시기에 형성된 아나톨리아 수출 기업들은 일반적으로 독립산업인사업가협회(MÜSIAD)에 소속되었지만. 이와는 별도로 귈렌 운동에 참여하는 기업인들도 등장했다.

귈렌은 이들 엘리트를 바탕으로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에 나섰다. 1991년에 동구 공산주의가 붕괴되며 러시아가 장악했던 공간이 튀르키예에 개방된 것이다. 귈렌 운동은 튀르키예 정부보다 앞서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구(舊)소련의 튀르크 무슬림 지역으로 진출해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를 파견했다. 러시아와 공산주의 대신에 튀르크와 이슬람 전통을 부활시키고자 한 국가들에 귈렌 학교는 교육 인프라를 확대할 매력적인 선택지로 다가왔다. 귈렌 운동은 구소련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 진출의 노하우를 쌓고, 해외 귈렌 학교를 자신들의 사업 발판으로 확대했다.

귈렌과 에르도안의 동맹

1997년에 이슬람의 영향력을 억제하고자 했던 케말주의 군부의 쿠데타가 다시 발생하자 귈렌 운동은 해외 활동에 더욱 집중했다. 귈렌 본인은 1999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로 이주했다. 미국에서 귈렌은 튀르키예계 무슬림 학교를 설립하고, 미국 대학에 유학생을 보내며 교육계와 학계 진출을 도모했다. 이때부터 귈렌은 본격적으로 자신을 사이드 누르시 사상을 따르는 ‘자유주의 이슬람 지식인’으로 내세우며, 서구에도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튀르키예 안팎에서 귈렌이 쌓은 이미지와 영향력은 마찬가지로 2003년에 케말주의와 이슬람주의 대신에 ‘자유주의 이슬람’이라는 대안(代案)을 표방하며 집권한 총리 에르도안과 겹치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귈렌은 정의개발당 정부를 지지하고, 케말주의자를 비판하며 에르도안과 동맹을 맺는 전술을 채택했다. 2016년에 에르도안이 “귈렌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발표했을 때 많은 이가 의아해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존경받던 종교인이자 교육자, 정부의 동맹이었던 귈렌이 어쩌다 ‘테러리스트’로 지목되게 된 것일까?

귈렌, 경찰 조직 장악

귈렌은 자유주의, 이성, 평등한 공동체를 주장해 왔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훗날 유출된 그의 연설과 발언을 보면, 귈렌은 권력욕을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었다. 귈렌은 1980년대 이래로 귈렌 학교를 졸업한 젊은 엘리트들을 ‘황금세대’라고 불렀다. 귈렌은 ‘황금세대’를 점(點)조직 형태로 튀르키예 정계와 관료, 재계, 언론 등지로 진출시켜 국가를 접수할 수 있게 해주는 자산으로 육성했다. 후일 귈렌 운동에서 뛰쳐나온 이들은 귈렌 운동이 겉으로는 수평적 공동체를 표방하지만, 실제 내부는 절대적 위계 서열을 바탕으로 운영된다고 증언했다. 귈렌 본인을 제외하면 누구도 운동의 전모를 알 수 없는 비밀 조직이나 다름없다는 폭로도 더해졌다.

2000년대 들어 귈렌 운동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타깃은 여전히 국가 관료제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케말주의자들이었다. 귈렌은 케말주의자가 장악한 군부에 진출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대신 경찰 조직을 장악하고자 했다. 앙카라 경찰학교를 졸업한 귈렌 조직원들은 경찰 간부에 오르고, 조직적으로 입학 시험지를 유출하여 귈렌 학교 학생들을 입교시켰다. 이후에는 간부 승진에서 특혜를 주어 경찰 조직 장악을 완료했다.

귈렌에 포섭된 경찰들은 2007년의 에르게네콘, 2010년의 발요즈 스캔들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두 스캔들은 케말주의 군부가 에르도안 정부에 대항해 다시 한 번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으로 촉발되었다. 귈렌계 언론이 전국적으로 스캔들을 키웠다. 이 두 사건으로 케말주의자들의 영향력은 대거 약화되어 에르도안의 권력이 강화되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에르도안은 훗날 이 쿠데타 스캔들이 귈렌계 경찰 간부에 의한 증거 조작과 사법부 관료들에 의한 편파적 판결로 잘못 처리되었다고 인정하며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국가 내의 심층국가(deep state)’로 알려진 케말주의 군부를 약화시켰다고 확신한 귈렌은 2010년대부터 에르도안 정부 자체를 조종하고자 했다.

에르도안과 귈렌의 균열

2013년 5월 이스탄불의 탁심 게지 공원에 쇼핑몰을 짓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발표되자 이에 반발하는 거센 시위가 일어났다. 사진=AP/뉴시스

에르도안과 귈렌의 균열은 2010년에 이스라엘 문제를 발단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가자지구로 향하던 튀르키예 구호선 마비 마르마라(Mavi Marmara)호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공격에 에르도안이 이스라엘을 격하게 비난하며, 튀르키예는 일약 이슬람 세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귈렌은 미국 내 유대인 단체와 구축한 우호 관계가 훼손된다며 튀르키예 정부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더 큰 사건은 2012년에 있었던 튀르키예 국가정보부 수장 하칸 피단 스캔들이었다. 에르도안 정부는 동부 쿠르드 무장 반군과 평화 협상을 모색해 왔는데, 쿠르드 문제에서 강경론을 견지하던 귈렌은 이에 대해 불만이었다. 귈렌계 경찰은 피단이 반역죄를 저지르고 있다며 그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수사를 시작했다. 자신이 임명한 정보부 수장까지 공격을 받자 에르도안은 본격적으로 귈렌과 결별을 결심하게 됐다.

2013년은 귈렌과 에르도안의 관계가 파탄에 이른 해였다. 이해 5월에 이스탄불 중심가 탁심 광장의 게지 공원을 수용해 쇼핑몰로 재개발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반대 시위가 시작되었다. 재개발 반대 시위는 곧 정의개발당을 향한 반(反)정부 시위로 번졌다.

에르도안을 정치적으로 여전히 이용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던 귈렌 세력은 게지 공원 시위 당시는 정부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이후 에르도안 정부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자 귈렌은 경찰 네트워크를 활용해 12월에 대규모 반부패 수사를 벌였다. 정의개발당 내각 장관들을 향한 표적 수사는 2014년 초에 에르도안의 아들을 둘러싼 부패 스캔들로도 확대되었다. 하지만 스캔들 상당수는 경찰의 적법한 수사보다는 귈렌계 요원들이 확보한 불법 도·감청 자료가 귈렌계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불거졌다. 1980년대부터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육성한 경찰, 사법부, 언론 네트워크가 정부를 흔드는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다.

에르도안의 반격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 있는 7·15기념관.

하지만 2014년 8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정의개발당이 승리를 거두고 에르도안이 총리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풍향이 바뀌었다. 2000년대에 에르도안이 거둔 경제적인 성과를 여전히 많은 국민이 기억하고 있었고, 2011년과 2013년 사이에 발생한 이집트 혁명과 쿠데타, 바로 남쪽에서 벌어지는 시리아 내전(內戰)은 다수 튀르키예 국민에게 정치적 혼란에 대한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당시 아타튀르크 이래 한동안 튀르키예 공화국을 이끌어 왔던 케말주의 정당 공화인민당은 정의개발당이 상실한 지지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을 전혀 회복하지 못해 유의미한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귈렌 세력은 정당을 결성해 공개적으로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과거 튀르키예 군부가 누렸던 ‘딥스테이트’ 지위를 자신들이 차지하기를 열망했다. 하지만 귈렌은 정부를 흔들 수는 있어도 정부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국민의 지지를 확인한 에르도안은 2014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튀르키예 각계각층에 포진한 귈렌 조직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2016년 7월 15일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이전 케말주의 군부도 네 차례나 정치에 개입했으나, 이들은 국부 아타튀르크의 유지(遺旨)를 받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은 7·15 쿠데타와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전의 쿠데타들은 내부 정치 갈등이 극심해 국민 대다수가 피로감을 느낀 상황에서 이루어져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6년에는 그 수준의 정치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튀르키예를 둘러싼 지정학이 급박하게 돌아가며 국가적 위기감이 폭넓게 공유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숙청

쿠데타 소식에 분노한 시민들은 에르도안을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거리로 뛰쳐나와 맨몸으로 쿠데타군 전차(戰車)에 맞서며 저항했다. 쿠데타 주범들은 “타협은 없다. 짓밟아라”라는 명령을 내리고 전투기로 정부 시설을 폭격하기까지 했으나, 시민 저항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 과정에서 민간인 대략 170명이 사망하였으며, 쿠데타군 측에서도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역설적으로 쿠데타는 에르도안을 중심으로 국민을 단결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하지만 쿠데타의 후과(後果)도 컸다. 튀르키예 정부는 귈렌파 ‘평행국가’를 색출하기 위해 광범위한 숙청에 들어갔다. 군대, 경찰, 사법부, 교육계에 걸쳐 5만 명 이상이 쿠데타 직후 며칠 만에 퇴출 대상에 올랐다. 지금까지 군인, 판사, 교사, 공무원 등 16만 명 이상이 해고되거나 정직(停職)되었고, 7만 명 이상이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범위가 너무 컸기에 외부에서는 쿠데타 자체가 에르도안의 자작극(自作劇) 아니냐는 의심까지 등장했다.

에르도안, 외교 노선 전환

하지만 정말로 귈렌파가 튀르키예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사례들은 있다. 대표적인 것이 귈렌파 학자인 아딜 왹쉬즈 사건이다. 왹쉬즈는 민간인임에도 쿠데타 당시 쿠데타군과 함께 공군 기지에 있었기 때문에 군부 내의 귈렌파에 명령을 내린 쿠데타 주동자 혐의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귈렌파 판사가 이틀 만에 석방 판결을 내렸고, 그는 국경을 넘어 도주해 사라졌다.

이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귈렌파와 2016년 쿠데타의 맥락이 튀르키예 외부인이 보기에는 너무 이해하기 어려워 에르도안 정부는 끝없이 의심을 샀다. 게다가 쿠데타 이후 격앙된 튀르키예 여론도 외부에 차분한 설득을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서구 학자와 논평가들 중에는 에르도안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귈렌을 옹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이 보기에는 에르도안은 불발 쿠데타를 빌미로 비(非)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체제를 추구하는 권위주의적 독재자인 반면, 귈렌은 이슬람주의와 서구 자유주의의 절충점을 찾기 위해 고민해 온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귈렌 송환 문제가 에르도안과 트럼프의 외교적 충돌까지 번지자, 나토 회원국인 튀르키예 내에서 반미(反美) 여론까지 불거질 정도였다.

이는 대서양동맹의 틀에서 튀르키예의 독자적 입지를 모색하던 에르도안 정부의 외교 노선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튀르키예는 완전히 독립적인 다극(多極) 세계의 축(軸)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대전략을 세웠다. 서구 입장에서는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올해 튀르키예 정부가 쿠데타 진압 9주년을 기념하며 외국 언론인과 작가들을 대거 초청한 것도 이러한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외부와의 소통 필요성

튀르키예만의 얘기는 아니다. 한 국가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을 실제 들여다보면, 외부에서 익숙하게 인식하는 구도와는 사뭇 다른 복잡한 양상이 드러난다. 이 오해는 국민감정은 물론이고 외교 정책에서도 돌이키기 힘든 피해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결국에 자국의 맥락을 외부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설해 주는 것은 그 국가의 정부, 언론, 지식인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한국인들은, 더 좁게는 한국의 보수 진영은 엉킨 실타래와 같은 한국 현대사의 진면목을 외부인들에게 잘 알리고 있는가? 어쩌면 한국 현대사와 정치에 대한 피상적인 관찰이 ‘서구 주요 외신’이라는 플랫폼에 유통되는 것을 무관심하고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보수의 관점’을 세우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관점을 외부인들에게 알리며 국제적인 소통의 장(場)을 여는 것임을, 앙카라와 이스탄불에서 튀르키예의 2016년 쿠데타 현장을 돌아보며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