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戰後 80년 일본의 ‘공기’와 한미일 관계 : 월간조선

1년여 만에 들른 도쿄(東京)는 사우나 그 자체다. 섭씨 35도는 기본이고, 체감온도 45도로 느껴질 정도로 불지옥이다. 거리 여기저기서 눈만 내놓은 채 양산·모자·마스크·장갑·옷으로 무장한 여성들이 많이 보인다. 열사병·자외선을 피하기 위한 ‘일본판 부르카’다.

도쿄 도착 즉시 긴자(銀座)로 나갔다. 단팥빵을 처음으로 발명한 기무라야(木村屋)를 시작으로 ‘열도(列島) 공기 읽기’에 나섰다.

일단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 800엔대였던 단팥빵 5개 세트가 1200엔이다. 필자가 애용하는 단골 호텔 중국 레스토랑의 정식도 대략 30% 정도 올랐다. 100엔숍에 가도 쓸만한 물건은 200엔대로 올랐고, 300엔 이상 특설 매대가 아예 따로 설치돼 있다. 가격이 그대로인 제품도 간혹 있지만 크기나 내용물이 대폭 줄어들었다. 전체 평균해서 1년 만에 30~40% 정도 올랐다. 라멘 가격의 마지노선이던 1000엔은 이미 팬데믹 기간 중 무너졌다. 지금은 라멘 값 1500엔이 일반적이다.

글을 쓰는 도중 ‘5월 일본 실질임금 2.9% 하락’이라는 기사가 뜬다. 물가 인상이 가속화되면서 5개월 연속 실질임금 인하라고 한다. ‘생활대국’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생활난(生活難) 대국’이 2025년 일본의 현실이다.

일본인 60%, 민생지원금 반대

이재명 정부는 집권 즉시 ‘민생지원금’이라는 이름으로 두 차례에 나눠 1인당 15만~5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물가 인상에 대응하기 위한 일시적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자유민주당(자민당) 주도로 비슷한 논의가 나오고 있다. 1인당 2만 엔이다. 여론조사 결과 일본인 60%가 지원금 지급에 반대하고 있다. 포퓰리즘에 기초한 정치적 계략일 뿐, 근본 치유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민생지원금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은 어떨까? 6월 초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62%, 지원금 예산을 위한 추경예산 편성 찬성이 61%에 달했다. 민생지원금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지만, 한국인 3명 중 2명은 정부가 나누어 주겠다는 ‘공짜 돈’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한일(韓日) 양국의 가치관 차이라고 할까. 정부가 주는 공짜 돈에 대한 인식이 양국 간에 크게 다르다.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전부 너그러운 곳이 한국이다. 일본은 주는 쪽, 받는 쪽 서로 경계한다.

교토(京都)의 아침 풍경 중 하나로 ‘우치미즈(打ち水)’란 것이 있다. 아침 청소와 함께 집 앞이나 인도(人道)에 물을 뿌리는 풍습이다. 먼지도 없애고 길의 온도도 낮추려고 물을 뿌리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 초까지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교토의 우치미즈에는 세상을 대하는 일본인의 독특한 생각이 배어 있다. 자세히 보면 ‘정확히’ 자기 집 앞에만 물을 뿌릴 뿐, 옆집 경계선을 ‘절대’ 넘지 않는다. 물을 뿌리는 김에 남은 물을 옆집 앞에 뿌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결코 그러지 않는다. 왜일까? 내가 옆집까지 넘어 물을 뿌릴 경우 상대도 나에게 빚을 진 기분으로 곧바로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의(善意)라 해도 경계선을 넘어 옆집에까지 물을 뿌리는 것은 실례로 인식된다. 일본인이 많이 쓰는 속담 중에 ‘공짜보다 더 비싼 것도 없다(ただより高いものはない)’는 말이 있다. ‘공짜보다 더 무서운 것도 없다’는 말도 있다. 공짜에는 반드시 그 이상의 요구나 대가(代價)가 뒤따른다는 의미다.

한국인은 서로 간에 큰 선물을 주고받는 데 익숙하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것이 수백, 수천만원짜리 ‘명품 선물 스캔들’이다. 일본인은 다르다. 수천 엔 단위의 과자나 계절별 전통음식 정도는 허용되지만, 식음료를 넘어서는 고급 선물은 ‘절대’ 터부시한다. 공짜라지만 일단 받을 경우 자기도 그 이상의 답례를 해야만 한다. 집앞에 물 뿌리는 간단한 행위조차 서로를 어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선을 넘지 않는 나라이니, 비싼 선물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쇼와 100년’ 기념하는 일본

1945년 9월 27일 연합군 총사령부로 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찾아간 히로히토 천황. 두 사람의 대조적인 자세와 표정이 승자와 패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더 이상 전후(戰後)가 아니다(もはや戰後ではない).’

일주일 정도 도쿄에서 머물며 필자가 느낀 열도의 공기다.

2025년은 쇼와(昭和) 100주년이 되는 절목(節目)이다. 쇼와는 히로히토(裕仁) 천황이 1925년 12월 25일 즉위하면서 사용한 연호(年號)다. 히로히토는 7년 전 레이와(令和) 시대를 연 나루히토(德仁) 현 천황의 할아버지다. 그는 23세 나이로 천황 자리에 오른 뒤, 1989년 87세 나이로 숨지기까지 64년간 일본의 상징으로 군림했다. 쇼와 시대에 일본은 제국주의, 전쟁, 원폭(原爆), 패전(敗戰), 기아(飢餓), 고도성장, 버블경제 등 천국과 지옥을 경험했다.

2025년 일본 전역에서는 ‘쇼와 100년’ 기념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태평양전쟁과 원폭, 무조건 항복과 천황의 ‘인간 선언’은 쇼와 100년의 주요 테마다.

쇼와는 기묘한 정서로 일본인 의식 속에 남아 있다. 차 한잔을 마셔도, 노래 한 곡을 불러도, 옷차림 하나에도 특특한 ‘쇼와 로망’이 존재한다. 쇼와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궁핍하지만 뭔가 고즈넉하고 안정적이며 아날로그 저음(低音)으로 내려가는, 화(和)와 협(協)이 교차하는 노스탤지어의 대상이다. 20세기에 출생한 장년(壯年) 세대만이 아니라 21세기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도 열광하고 반기는 ‘올드 패션’ 같은 것이 쇼와 시대다.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은 쇼와 100년에 즈음한 일본 지식사회의 반응이자 분위기다. 이 말은 원래 1956년 일본 전역을 휩쓸었던 당대의 유행어였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을 기해 철저히 망가진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전사(戰死)한 남편이나 형제에 대한 슬픔과 눈물도 한순간일 뿐, 기아·질병·실업(失業)이 밀려들었다. 점령군 미군을 상대로 한 공공 매춘(賣春) 시설이 전국 곳곳에 들어섰다.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은 패전국으로서의 상처가 아물고 ‘평화의 일본’으로 되돌아갔다는 ‘일본 부활’ 선포다. 가난과 굴욕의 기억을 넘어, 당장의 밥 한 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되돌아왔다는 안도감의 표현이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반공(反共) 전선 구축(構築)이 큰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지만, 원폭과 공습으로 엉망이 된 산천의 복구도 전후 11년 뒤쯤이면 대체로 완결된다.

‘전쟁을 염두에 둔 세계관’으로부터 탈피

이번에 일본을 찾았다가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다. 69년 전 풍미했던 유행어가 다시 들린다는 것이 이상했다. 물가도 오르고 ‘공짜 돈’ 논의가 있다 해도 21세기 열도 상황을 ‘참혹한’ 전쟁 상황에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어서다.

그 같은 의문은 유명 작가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의 역사론을 통해 풀 수 있었다. 그는 좌우를 넘나드는 쇼와 관련 논픽션 작가다. 최근 일본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확산시키는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17세기 전국(戰國) 통일 후 일본은 크게 3개의 시대를 살아왔다. 막부(幕府)가 통치한 에도(江戸)시대 265년,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1945년 종전(終戰)까지 근대화 시대 77년, 이후 지금까지의 80년이다. 일본인들의 통상적인 역사 인식대로라면 2025년은 ‘전후 80주년’이 된다. ‘전후’라는 단어, 즉 전쟁을 염두에 둔 세계관이 80년째 이어져 온 셈이다. 전후 80년은 전쟁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을 바탕으로 한 자유와 번영의 역사다. 전쟁만을 출발점으로 한 시대가 아니라, 다른 기준과 발전에 기초한 현대사 재정립이 절실하다.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

‘전쟁 기억 유효기간’ 종료

호사카의 생각이 아니더라도, 21세기의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은 20세기의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과 질적으로 다르다. 20세기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은 패전 후 경험했던 가난으로부터 해방, 즉 경제적 측면에 방점(傍點)을 두고 있다. 21세기의 같은 말은 어떨까?

여러 시각이 있겠지만, 현대 일본인 대부분이 당연시하고 원하는 것 하나가 있다. 바로 ‘의식의 해방’이다. 전쟁을 일으킨 전범(戰犯)국가 일본, 아시아에 피해를 준 가해자 일본인, 전사자 300만 명에 이르는 전쟁 피해자, 인류 최초의 원폭 투하 대상이 되었던 일본 열도…. 이런 기억들은 전부 강물에 흘려 보내자는,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말이 바로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이다.

히로시마(廣島) 시민이 들으면 화를 낼 얘기가 될 수 있다. 식민지 피해자 한국인은 한층 더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급변하는 시대 흐름이다. 시간은 사람, 산천, 그리고 시대의 공기를 전부 바꾼다. 싫든 좋든 ‘전쟁의 기억’은 이미 ‘유효기간 종료’ 시대로 치닫고 있다.

물론 일본에 얽힌 과거사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어 하는 포퓰리즘 정치가에게 ‘전쟁의 기억’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현 천황 나루히토는 1960년생이다. 일본이 아무리 초장수대국(超長壽大國)이라고 해도 인구의 70% 정도가 1945년 이후 출생자들이다.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고 평화로 나아가자는 의미의 ‘전후’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가해자–피해자 논리에 기초한 ‘전후’란 단어를 시종일관, 영원히 사용해야만 할 시기는 지났다”는 것이 호사카의 생각이다.

TV 좌담회 중 여론조사의 충격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의 전쟁은 1945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끝났다. 아시아와 달리 독일을 포함한 유럽은 현대사의 원점(原點)을 1945년에 두지 않는다. 유럽에는 일본처럼 말끝마다 ‘전후’를 앞세우는 역사관 자체가 없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전후’라는 단어를 영원히 남기는 것이 좋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전후’라는 단어가 ‘가해자 일본’을 공격하는 심리적 단어가 될 수는 있겠지만, 미래가 아닌 과거에 집착하는 세계관의 소산이라는 점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싫든 좋든 일본은 전쟁 기억의 ‘유효기간 종료’ 시대에 접어들었다. 필자가 얼마 전 시청한 TV 좌담회에 나타난 일본의 모습은 그 단적인 예다. 이날 좌담회의 주제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에 국민총생산(GDP) 대비 5% 국방 예산을 강요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반미(反美)·평화주의 논조가 강한 인물들이 토론자로 등장했다.

방송 도중 TV 리모컨을 이용한 시청자 설문조사가 이뤄졌다. 리모컨의 특정 키를 눌러 찬반을 표시하는 방식의 리얼타임 여론조사다. ‘일본 국방 예산 5%로 인상에 찬성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당장 시청자 1만 명 정도가 답을 보내왔다. 그중 대략 60% 정도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필자도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좌담회 참석자들이었다. 트럼프를 비난하면서 ‘평화 노선 유지, 5% 인상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마련된 좌담회였는데 시청자 반응이 정반대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논객들 모두 ‘뭔가 잘못됐다’는 식으로 반응하면서 “국방비 5% 인상이 여러분의 세금으로 충당된다는 점을 고려해 조사에 신중히 답해 주길 바란다”며 ‘반대’를 유도했다. 하지만 2차 리모컨 조사에서도 여전히 60%대가 ‘찬성’이라고 답했다. 좌담회 참석자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일본인도 국방비 증강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듯하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이를 보면서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것이 지금 일본의 공기임을 실감했다.

맥 빠진 한일 수교 60주년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 6월 17일 캐나다 캐내내스키스 G7 정상회의 때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연합뉴스

2025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일 수교일인 6월 22일을 전후해 관련 행사들이 서울과 도쿄에서 열렸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뭔가 맥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트럼프와의 관세 협상이 양국 모두에 발등의 불이 되면서 한일 수교 60년 기념행사도 뒷전으로 밀린 느낌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이재명 정부에 대한 일본의 ‘판단 유보’ 때문인 것 같다. 필자가 만난 일본인들을 통해 느낀 바로는 일본인의 90%는 아직 이재명 정부를 믿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완전 불신’은 아니더라도 ‘뭔가 신뢰하기 어려운 불편한 상대’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 배경에 ‘이재명=반일 친중(反日親中)’이란 생각이 있다.

나머지 10%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를 중심으로 한 자민당 내 일부 세력이다. 그들이 이재명 정부를 전폭 신뢰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뭔가 희망적 관점에서 한국을 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의 의미는 트럼프의 공세에 맞서는 ‘한일공투(共鬪)’ 가능성에 있다.

한국와 일본이 함께 워싱턴에 맞서는 ‘한일공투’는 이재명 정부도 원하는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분야가 다르다. 일본은 국방비 증강과 미군 유지비에 관한 군사적 분야의 공투에 주목한다. 반면 한국은 관세 협상과 같은 경제 분야 공투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인 중에는 일본 지식인과 미디어 대부분이 ‘이재명=반일 친중’으로 규정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가 많을 것이다. 사실 취임 후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을 향해 러브콜을 보냈다. 트럼프와의 만남이 어려워지면서 이시바와의 정상회담부터 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나 행동 때문에 한일 정상회담 개최도 간단치 않다. 간단히 말해 현재 일본은 위안부·징용공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재논의를 받아들일 분위기가 아니다. 중국에도 정면 대응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과거사 문제를 재론할 경우 일본은 곧바로 받아칠 가능성이 크다. 타협은 없이 양국 간 갈등과 불화만 가속화될 것이다. 이시바 총리는 자민당 내 권력 기반이 약해 자민당 내 강경파들의 반한(反韓)·혐한(嫌韓) 분위기를 막기 어렵다.

이재명, 트럼프와의 만남이 중요

7월 8일 현재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의 접촉은 6월 6일 밤 이뤄진, 외교 결례라 볼 만한 밤 10시 행해진 20분 통화가 전부다. 이 글이 나갈 때쯤에는 좀 더 진척된 대화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7월 초 기준으로 미국 동맹국 정상 가운데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가 한국 대통령일지 모르겠다. 일본은 그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2025년 여름, 한국 외교·안보·경제를 통틀어 최고 핵심 순위는 무엇일까?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한미 정상 접촉이 열 배 백 배 더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스쳐 지나가는 식이어도 좋다. 일단 한미 정상이 악수를 하고 얼굴을 마주치는 스킨십이 절실하다. 그래야 한국과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국제적 신뢰도와 함께 일본과 중국의 한국에 대한 평가도 올라간다. 미국이 한국을 무시하는 한, 일본·중국이 앞서서 한국에 손을 내밀 가능성은 희박하다.

‘세계 무역 10위권의 준(準)강대국 한국이 트럼프나 일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오해하기 쉬운데, 그런 판단의 주체는 한국만이 아니다. 월스트리트, 일본 금융계가 트럼프와의 한국 대통령의 만남에 주목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미국이, 트럼프가 관심을 갖지 않는 나라는 ‘지구 밖 혹성’에 불과한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트럼프가 무시할 경우 한국도 일순간에 그런 변방으로 추락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군사·안보 문제만이 아니다. 당장 금융·외환(外換)시장이 어려워질 수 있다.

트럼프 집권 후 한미일 모임 사라져

한국은 현재 약 6834억 달러의 외환 채무(債務)를 갖고 있다. 외환 보유액은 4046억 달러다(2025년 5월 기준). 문제는 1년 이하 단기 부채인데, 약 1500억 달러다. 3개월, 6개월, 1년 단기 부채의 40%는 일본에서 온다. 일본의 저금리 자본이 대한해협을 건너와서 ‘빠르고 간단한’ 고금리 서민 대출로 활용된다. 이런 단기 채무는 국제정세에 ‘아주’ 민감하다. 사소한 이유 하나만으로도 대출 연장이 거부될 수 있다. 그럴 경우 다른 금융업계도 눈치를 살피게 된다. 도미노처럼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의미다.

2025년 현재 금융의 향방을 좌우하는 최대 변수는 트럼프다. 시진핑 10명, 푸틴 10명이 있어도 트럼프 하나를 못 당한다. 일본 금융계는 트럼프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일본 돈이 한국 운명을 전부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라도 치명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재명 정부가 트럼프와의 접촉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매달려야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트럼프 2.0 시대’가 열린 이후 다자(多者)간 회담이나 모임이 사라지고 있다. G7과 나토의 경우 ‘G1(미국)+나머지’로 가는 추세다. 다자가 아니라, 1 대 1 딜(deal)이 트럼프 2.0 외교의 기본이다. 한국 외교에서 일본이 한층 더 중시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틈만 나면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이 열렸다. 다자간 국제회의가 열릴 때면 한미일 모임은 거의 정례화됐다. ‘북핵(北核) 대응 공조(共助)’는 3국 모임의 단골 메뉴다. 트럼프 2.0 시대에는 이런 풍경을 보기 어려워졌다. 정상회담은 물론 정부 차원의 한미일 3각 모임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문제는 한미 양국 관계다. 여러 상황으로 볼 때 미일 모임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고 한층 더 강화될 수도 있다. 한국은 다르다. 한미일 3국 모임도 사라지고, 정상회담은 물론 한미 양국 모임 자체가 확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외교 능력도 문제지만, 일단 한국 자체의 매력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일본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한미일 3국 회담 개최도 힘들 듯하다.

국력은 주변국과의 상대적 관계로 결정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중국·일본·러시아 초강대국으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 특히 워싱턴의 눈에 한국은 아직 ‘약소국’이다. 그게 냉엄한 현실이다. 일본은 그같은 ‘살벌한’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문화·경제·역사 체제로 볼 때 한일 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나라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반일정책 여부다. 현실적으로, 한국이 반일정책을 펼치는데도 한국과 함께하려는 일본인은 극히 드물다. 20세기 중·후반에 볼 수 있던 ‘역사 반성 세대’의 친한(親韓) 노선은 사라졌다. 한국이 반일 행태를 보이더라도 이해하면서 받아 줄 만한 사람들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한국이 일본의 경쟁자로 떠오른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전후’라는 단어 자체를 잊어 가는 시대 흐름이 주된 원인이다.

센카쿠(尖閣) 열도와 타이완 주변 해상안보선(Sea Lane) 방어, 나아가 트럼프의 반중(反中) 전선은 일본의 가장 큰 외교·안보 현안이다. 일본의 관심은 호주·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과의 안보 관계 증진이다. 한국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은 사실상 외교적 수사(修辭)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참의원 선거 앞둔 일본, 휴가철 들어가는 미국

7월 20일 일본 참의원 선거 포스터들. 선거 결과에 따라 일본은 경천동지할 대변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사진=유민호

일본은 7월 20일 참의원(參議員·상원의원 해당) 선거를 치른다. 6년 임기 참의원의 절반인 125명(보궐 1석 포함)을 선출한다.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여당의 과반수 획득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이시바가 직접 나서 ‘2만 엔 공짜 돈’까지 약속하고 있지만, 자민당을 대하는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미일 관세 협상과 국방비 증액, 주일 미군 주둔비 문제는 참의원 선거가 끝난 후부터 본격화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미국은 7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 여름 휴가에 들어간다. 워싱턴의 미국 정부기관에는 아마 20대 초반의 청춘남녀 인턴들만 남아 있을 것이다.

미일 간에 관세 협상과 안보 문제가 타결된 후에야 한국과의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틀리기를 바라지만 8월, 9월을 넘겨 10월 초에나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될지 모르겠다. 한미 정상회담도 일러야 9월 중순 이후, 특히 유엔 총회 기간중이나 그 전후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만약 트럼프가 유엔 총회에 불참할 경우에는 10월 이후로 미뤄질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이재명 대통령 취임 후 4개월 이상 지나서야 한미 정상회담이 이뤄진다는 얘기가 된다.

강자의 불확실성, 약자의 불확실성

‘불확실성’은 트럼프 2.0의 키워드 중 하나다. 리버럴 미디어에게는 비난의 대상이지만, 사실 불확실성은 강자가 행사하는 파워(power)이기도 하다. 약자들은 연일 돌변하는 트럼프의 눈치만 보면서 ‘알아서’ 행동하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불확실성은 한국 정부의 군사·외교·경제정책의 특징이기도 하다. 좋게 말해 실용 외교·중립 노선이다. 트럼프가 보기에는 길짐승인지 날짐승인지 구별이 안 된다. 지금 트럼프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미국인지 중국인지 분명히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확실성은 강자에게는 무기이지만, 약자에게는 치명적인 실책이나 허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참의원 선거 후 일본은 그동안의 불확실성을 떨치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수준의 대변신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시바가 추락할 경우, 그동안 외곽으로 밀려났던 ‘아베 신조(安倍晉三)의 아바타’들이 부활할 것이다. 트럼프가 요구하는 대로 국방비를 대폭 증액하고 반중 전선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군사·외교 차원에서의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고 할까.

1940년대 초 태평양전쟁 직전, 일본은 전 세계 항공모함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저력을 가진 일본이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군사적으로 실천할 경우, 과연 한국의 대응 방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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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戰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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