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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의 시각

역사를 바꾼 1995년 《월간조선》 12·12 녹음테이프 특종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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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학자 박선이의 분석: 활자와 육성을 융합한 저널리즘 혁신의 폭발적 반향이 전두환 단죄의 길을 열었다. 성공한 쿠데타도 단죄된다!
- “육성을 동반한 12·12 녹취록 특종은 12·12 군사반란 주도 세력이 정치적 실권의 상당 부분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던 당시 한국 사회의 역사적 모순 한가운데로 그야말로 ‘굉음을 내며’ 돌진했다”
  《월간조선(月刊朝鮮)》은 ‘역사를 기록하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잡지’라고 내세우는데, 최근 발간된 ‘좋은 저널리즘 연구회’가 기획한 《한국 저널리즘의 혁신》(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간행)이란 책이 1995년 9월호 《월간조선》의 12·12 사건 보안사 녹음테이프 특종을 그런 측면에서 다루고 있어 소개한다. 박선이 명지대 겸임교수(전 《조선일보》 논설위원)가 쓴 논문 〈뉴미디어 이전 인쇄 매체의 저널리즘 혁신: 《월간조선》 ‘12·12 군사반란’ 녹취록 특종〉은 활자와 목소리를 융합한 미디어적 혁신이 특종을 매개로 폭발적인 반향을 부르고, 이것이 12·12 사건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법정으로 불러내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단죄로 가는 길을 여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게 요지이다.
 
  전두환 정부 출범의 출발점이 된 1979년 12월 12일 밤 군부 내 충돌은 1987년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일찌감치 ‘하극상(下剋上)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되었으나 3당 합당으로 생긴 민주자유당의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후보는 1992년 “12·12는 쿠데타적 사건이지만 역사 평가는 후대(後代)에 맡기자”고 했고, 1993년 이른바 문민(文民)정부 출범 이후에는 검찰이 이를 공식화했다. 1995년 7월 18일,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58명에 대한 내란죄 고소 사건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정권 창출 과정에서 취한 행위로, 새로운 헌법질서를 만드는 정치 행위이기 때문에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백 브리핑에서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내란죄는 성격상 미수죄(未遂罪)만 처벌할 수 있고 기수(旣遂·범죄의 완성)에 이르면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어느 형법 교과서에 나와 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의 연원인데 이게 뒤집히는 데 《월간조선》의 녹음테이프 특종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종이 잡지가 ‘육성’ 기사를 냈다
 
  박선이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검찰이 ‘공소권 없음’을 결정한 지 꼭 한 달 후. 1995년 8월 18일, 《월간조선》 9월호가 12·12 사건 녹취록을 특종 보도했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8시50분 첫 통화를 시작으로 다음 날 아침 6시 무렵까지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당시 군 최고위급 인사들의 육성 그대로 들려주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실제 육성을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90분짜리 카세트테이프를 부록으로 붙인 파격적인 제작이었다. ‘12·12 사건이 녹음되었다!’ 빨간 글자의 제목은 제호만큼이나 큰 활자로 사람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월간조선》 표지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군사반란의 실제 상황… 장군들의 긴박한 현장 육성이 들려온다. 격동하는 역사가 굉음처럼 다가오는 생생한 현장감.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역사적 순간의 포착. 충성·배신·항명·허위보고가 불멸의 증거로 녹음된 한국 현대사의 가장 길었던 밤을 느껴보십시오!〉
 
  박선이 교수는 특종의 충격을 이렇게 전했다.
 
  〈표지 사진으로는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카세트테이프 사진이 한 장 실렸다. ‘79.12.12 20:50~79.12.13 22:50’이라는 손글씨 메모가 또렷했다. 잡지는 서점 판매대와 거리 가판대에 꽂히는 대로 그 자리에서 다 팔려버렸다. 발매 일주일 만에 20만 부 판매 기록을 세웠다. 종이 잡지가 ‘육성’ 기사를 냈다. 파격이었다. 모든 신문과 방송이 이를 기사로 받았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12·12 자료 화면을 깔고 녹음테이프 육성을 내보냈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군사반란 생중계”(《월간조선》, 1995)가 공개되면서, ‘성공한’ 군사반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형법 이론에 근거한 검찰의 결정이나 3당 합당 후 “정치보복은 하지 않겠다”던 정가 분위기는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대법원, ‘성공한 쿠데타’를 단죄(斷罪)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결국 군사반란 및 내란 혐의로 법정에 섰다. 사진은 1996년 8월 26일 선고 공판 때의 모습. 사진=조선DB
  12·12 녹음테이프 특종 두 달 뒤인 10월 19일 박계동(朴啓東) 의원이 국회 대(對)정부 질문에서 노태우 4000억원 비자금설을 폭로하고 노 전 대통령이 10월 27일 연희동 자택 앞에서 비자금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개 사과했다. 특종 넉 달 뒤인 1995년 12월, ‘5공 청산’을 위한 두 개의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 가운데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은 5·18 내란죄, 내란목적살인, 군반란죄 등의 범죄에 대해 1993년 2월(노태우 정부)까지 공소시효(公訴時效)가 정지되었다고 보고 이들에 대한 처벌 가능성을 열었다.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은 형법상 내란의 죄, 외환의 죄 등에 대하여 아예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했다.
 
  검찰은 그해 12월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재수사를 결정했고, 전두환·노태우 등의 신군부 핵심 인사를 이듬해 1월 23일 5·18 사건 내란 혐의로, 2월 28일 12·12 사건 반란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 재판에서 1심은, 당시 계엄사령관을 사전재가(事前裁可) 없이 체포한 것은 명백한 반란죄라고 판시하면서 “전두환은 수괴로서 군 병력을 동원해 12·12와 5·17, 5·18을 일으켜 헌법질서를 문란하게 한 점 등을 고려할 때 법정 최고형을 피할 수 없다”며 사형을 선고했고 노태우에 대해서는 22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대법원도 12·12 군사반란에 대해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반란죄를 인정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역사적인 확정 선고를 했다.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폭력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 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따라서 그 군사반란과 내란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
 
  이 문장은 실패한 비상계엄 선포자 윤석열 대통령의 헌재 결정문에도 반영될지 모른다. 성공한 쿠데타도 단죄한 대한민국 헌법이 실패한 쿠데타를 용서할 것인가의 문제가 걸린 탄핵재판이 계속되고 있다.
 
 
  취재 보도 관계자들 심층인터뷰
 
  박선이 교수는 〈1995년 7월 18일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은 불과 1년 9개월 만에 완벽하게 부인되었다. 그 출발점에 《월간조선》의 12·12 녹취록 특종과 생생한 ‘육성’ 보도가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박선이 교수는 이 역사적 특종은 언론의 혁신 사례라고 평가했다. 당시 언론계에선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던 12·12 사건 보안사 녹음테이프 녹취록을 근거로, 테이프를 입수한 《월간조선》이 이를 활자로만 다루지 않고 녹음테이프를 부록으로 낸 점이 특종의 영향력을 극대화했다는 것이다. 감정이 실리는 목소리가 건조한 활자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을 실증했다는 점에서 뉴미디어적 혁신이라고 했다.
 
  〈녹취록 문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기사로 보도한 ‘특종’, 그리고 종이 잡지가 지닌 문자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 육성(음향) 재생 매체를 동원해 활자와 청각 매체의 융합을 이룬 점이다. 엄밀히 말해 ‘매체 융합’이라기보다 원시적인 형태의 매체 병행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는 이러한 발간 방식은 사실(fact)을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려 했던 저널리즘 혁신의 노력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박선이 교수는 12·12 녹취록 보도가 이루어낸 ‘혁신’의 특성과 한계를 살펴보기 위해 당시 취재 보도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수행했다고 밝혔다. 조갑제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현 조갑제닷컴 대표), 김기철 기자(현 《조선일보》 선임기자), 이계성 전 《한국일보》 기자, 익명을 요구한 당시 중앙일간지 정치부 데스크 2명 등.
 
  인터뷰 과정에서 새롭게 확인된 사실도 있었다. 녹취록 내용이, 《월간조선》 특종 1년 8개월 전인 1993년 12월, 당시 일간지 기자가 쓴 책 《지는 별, 뜨는 별》이라는 단행본을 통해 일부 공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월간조선》의 특종을 다른 뉴스 매체들은 왜 놓쳤을까?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군사반란의 ‘육성 증언’을 왜 한국의 저널리즘은 수년간 묵혀 두었을까?
 
  〈《월간조선》의 12·12 녹취록 특종은 이미 일정 정도 알려진 내용을 ‘발굴’ 보도한 ‘특종’이라는 점과 활자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으로 카세트테이프를 제작 배포했다는 점 모두를 저널리즘의 혁신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김기철 “녹취록 읽고 녹음 찾아야겠다” 결심
 
김기철 《조선일보》 선임기자. 사진=조선DB
  박선이 교수는 특종의 배경을 설명한다. 《월간조선》이 녹취록을 입수한 것은 1995년 8월 초였다. 우종창 《월간조선》 기자가 A4용지에 인쇄된 녹취록을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에게 가져왔다. 조 편집장은 입사 3년 차이던 김기철 기자에게 “재미있는 자료 같은데 한 번 읽어보라”고 건넸다. 녹취록에는 12·12 당시 제3 야전군 사령관을 맡고 있던 이건영(李建榮) 중장을 중심으로 노재현(盧載鉉) 국방부 장관, 김용휴(金容烋) 국방부 차관, 김종환(金鍾煥) 합참의장, 윤석민(尹誠敏) 육군참모차장, 장태완(張泰玩) 수도경비사령관, 김학원 1군 사령관, 진종채(陳鍾埰) 2군 사령관 등 1979년 당시 대한민국 국방의 최고위 핵심 인물들 19명 사이에서 그날 밤 긴박하게 오간 통화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김기철 기자는 “나에게 12·12는 현실이라기보다 역사적 사실이었는데, 기록을 읽다 보니까 그게 이제 생생하게 재현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박선이 교수에게 증언했다. 1979년 12·12 사건이 일어났을 때 김기철 기자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12·12와 이듬해 ‘서울의 봄’을 뉴스로 접했지만 어릴 때 일이라 구체적인 현실로 인지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전두환 정부 때 대학을 다녔고,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그는 녹취록을 읽어본 즉시 이것은 보통 특종감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장군들, 직속상관에게 거침없이 거짓말을 하는 참모들, 당장 반란을 제압해야 한다며 펄펄 뛰는 장군, 북한의 동정을 걱정하며 우리 군 내부의 유혈 충돌로 확대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장군…. 역사의 방향을 바꾼 거대한 사건인 동시에 충성과 배신이 엇갈리는 기막힌 인간 드라마였다.
 
  김기철 기자는 ‘글로는 현장의 긴박감을 다 표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녹취록이 있으면 녹음테이프가 분명 있을 것이니 반드시 원자료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녹취록과 관련해서 여쭤볼 일이 있다고 이건영 의원에게 전화를 하니 그날이 일요일이었는데,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녹취록 인쇄본을 들고 집으로 찾아갔다.
 
 
  이건영 “집에 있는데 한번 같이 들어보시겠습니까?”
 
이건영 전 3군 사령관. 사진=조선DB
  12·12 군사반란 직후 보안사령부에 구금되었던 이건영 장군은 54일 만에 강제 예편 후 풀려났다. 이후 마사회장을 지내고 1993년 정주영(鄭周永) 대표가 창당한 통일국민당을 통해 정계에 입문, 비례대표로 제14대 국회에 진출한 뒤 여당인 민자당으로 옮겼다. 김기철 기자는 녹취록 내용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녹음테이프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물었다.
 
  이건영 의원은 별로 머뭇거리지도 않고 “집에 있는데 한번 같이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랬고 즉시 같이 듣기 시작했다고 한다. 녹음기에서 울려 나오는 육성을 듣는 순간 김 기자에게 떠오른 느낌은 “이거다!”였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실감하는 정도가 글로 읽는 게 1이라면, 당시 상황 속에 당사자들 육성으로 듣는 건 열 배 이상이었다. 12·12 현장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긴박했다.
 
  ‘정말 그 현장에 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몇 분 듣다가 테이프가 끊어져버렸다. 아마도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 김기철 기자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테이프를 가져가서 수리해서 돌려드리겠다”고 제안했다. 그러고 바로 테이프를 들고 회사로 돌아갔다.
 
  조갑제 편집장은 이건 녹음테이프로 내야 한다는 결심을 한다.
 
  “딱 감이 오더라고. 이거는 목소리다, 목소리. 장태완 장군이 길길이 뛰고 하는 거, 이걸 글로 아무리 표현해 봐라, 이거 안 된다고.”
 
  늘어지고 끊어진 카세트테이프를 복원하자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결정한 16년 전 12·12 밤의 극한 혼란 상황이 마치 중계방송이라도 하듯 재생되었다.
 
  “아, 이걸 어떻게 하지… 어떻게 되는 건가… 이러고 있었다. 장군들이 허둥지둥하고, 참모가 사령관에게 거짓으로 답하고, 목소리를 들어보면 감정이 다 들어 있고 이 사람 이거 지금 거짓말하고 있네, 아니면 사실을 말하고 있네,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거는 목소리로 내야 된다, 바로 그 생각부터 했다.”(조갑제, 박선이 교수에게 증언)
 
  “나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다”며 반란군 측을 무력(武力)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이건영 3군 사령관이 “쌍방충돌 없이 잘 돼야지, 그렇지 않으면 굉장한 불상사가 생겨” 하고 말하자, “그까짓 거 충돌이고 뭐고 몇 놈 죽어도 좋은데”라고 오가는 전화 통화는 활자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긴박감을 내뿜고 있었다. 《월간조선》 측은 이건영 장군을 간곡히 설득, 테이프 공개에 동의를 받았다.
 
 
  녹취록과 육성 테이프 대조 작업
 
  1995년은 뉴스 미디어가 인터넷을 활용하는 데 막 눈을 뜬 시기였다. 1995년 3월 《중앙일보》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인터넷 홈페이지에 지면 뉴스를 올리는 인터넷 신문을 발간했다. 조선일보사가 인터넷상에서 ‘세계 최초로 동영상을 구현한 멀티미디어 신문’을 공식 서비스하기 시작한 것은 《월간조선》의 12·12 특종 3개월 후인 11월 16일이었다. 1995년은 아직 ‘뉴미디어’라는 말이 쓰이기도 전이었다.
 
  〈조갑제 편집장은 카세트테이프를 부록으로 붙이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김기철 기자는 “인쇄 매체에서 녹음테이프를 만들어 음성 매체를 제공한다는 생각 자체가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었다”고 말했다. 1995년 무렵 카세트테이프 60~90분 분량 1000개 제작 시 개당 단가는 500원 안팎으로, 인쇄 및 포장비는 별도였다.〉
 
  《월간조선》 9월호 임시특가는 7000원으로 책정되었다. 8월호까지는 권당 6500원이었다. 난제(難題)는 마감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해설을 붙여야 했고, 녹음테이프를 책과 함께 보급할 수 있도록 물류 방안도 세워야 했다.
 
  (보안사의 이건영 장군) 전화 감청을 담고 있는 녹음테이프를 원 상태 그대로 내놓을 수는 없었다. 녹취록은 시간대도 뒤섞여 있었고,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말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김기철 기자가 녹취록과 육성 녹음테이프 내용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대화 순서를 확인하고 대화 속 인물들을 정리했다. 단순히 녹음을 푸는 것만이 아니라 녹취록과 육성의 실제 인물들을 인터뷰해 기사로 썼다. 하지만 해설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녹음테이프 자체가 별개의 ‘오디오 기사’였다.
 
  〈녹음테이프에 담을 해설은 12·12 군사반란과 신군부 출현 과정 등을 오래 취재해 맥락을 꿰뚫고 있는 조갑제 편집장이 그 자리에서 써내려 갔다. 조 편집장은 정리한 원고를 들고 경기도 고양시 지구레코드사로 달려갔다. 녹음은 별다른 NG 없이 바로 진행되었다. 80분 분량의 12·12 당시 군 고위 인사들의 통화 내용을 시간대에 맞춰 배열하고 사이사이 해설을 넣었다. 육성을 동반한 12·12 녹취록 특종은 12·12 군사반란 주도 세력이 정치적 실권의 상당 부분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던 당시 한국 사회의 역사적 모순 한가운데로 그야말로 ‘굉음을 내며’ 돌진했다.〉
 
 
  조갑제 편집장이 해설을 직접 쓰고 녹음
 
구창회 전 9사단 참모장. 사진=조선DB
  박선이 교수는 〈12·12 군사반란에 참여한 측과 이를 막으려 했던 육군본부 쪽 장군들의 대화가 혼란스럽게 펼쳐지는 가운데, 육성 사이사이 제시되는 해설(조갑제)은 육성 주인공들의 소속과 12·12 이후 이들의 거취 등 사실 전달에 충실하여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줄기를 지켰다〉면서 조갑제 편집장이 직접 쓰고 녹음한 해설의 일부를 소개했다.
 
  〈1979년 12·12 사건은 모든 한국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녹음테이프는 그날 밤 육군본부와 합수본부로 갈라져 맞섰던 우리 군 지휘관들의 긴박한 육성이 그대로 담긴 역사적인 자료입니다. 이 테이프는 주로 수도권 방어를 책임진 3군 사령관이 국방부, 육군본부 각 군단 및 사단의 지휘관들과 통화한 내용입니다. 12·12 사건의 현장 중계방송과 같은 내용, 이 테이프의 녹취 기록은 《월간조선》 9월호에 그 전문(全文)이 실려 있으므로 대조하여 들으시면 이해하기가 쉽겠습니다. 역사의 고동과 숨결까지 느끼게 해주는 장군들의 육성, 그 길었던 겨울밤의 현장으로 여러분들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조갑제 편집장은 3군 사령관이 9사단 참모장 구창회(具昌會) 대령에게 지시하는 내용과 대답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해설한다.
 
  〈하나회 멤버인 구창회씨는 나중에 대장까지 진급합니다. 이 통화에서 이건영 3군 사령관은 예하 부대인 9사단(사단장 노태우) 참모장 구창회 대령에게 30연대 출동 사실을 확인하며 부대 출동을 막습니다. 구 대령은 “연대 출동 안 합니다”라고 세 차례에 걸쳐 거짓 답변을 합니다. “지금 9사단 30연대장(직전 통화한 김봉규 대령)이 삼송리까지 출동한다고 전화가 왔다”는 이 사령관에게 구 대령은 “연대 출동 안 합니다”라고 딱 잘라 답합니다.〉
 
  박선이 교수는 〈조갑제 편집장은 이 통화 해설에서 구창회씨가 하나회 회원이며, 나중에 대장 진급을 했다는 사실만 건조하게 전함으로써, 군 조직에 따른 명령 계통을 따르지 않고 하나회라는 사조직에 충성했던 12·12 당시 반란군 가담 군인들의 거짓말과 행태에 대해 평가와 판단을 내리기보다 사실 전달에 충실한 저널리즘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잡지 발매 전날 방송 매체에서 먼저 보도
 
  박선이 교수는 잡지 발매 전날 저녁 방송사 뉴스로 먼저 공개되었다는 점도 활자 매체와 전파 매체의 영역이 뚜렷이 구분되던 시절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MBC 등 방송사들은 8월 17일 오후 9시 뉴스 머리기사로 녹취록과 육성 공개 특종을 전달했다. 방송사들은 12·12 군사반란 사건이 긴박하게 진행되는 10시간 동안 군 고위 인사들의 전화 통화가 육성 그대로 녹음된 테이프가 나왔다는 스트레이트 기사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기존의 영상 자료를 배경으로 녹음테이프에 담긴 육성 통화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도하는 군내 사조직 하나회가 공식적인 명령 계통을 누르고 하극상을 벌였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박선이 교수는 《월간조선》의 12·12 녹취록 특종은 전형적인 ‘단독’ 보도로, 이 육성 자료를 뉴스 보도에 직접 활용할 수 있는 방송에서는 적극적으로 다뤄진 반면 텍스트만 소화할 수 있는 종이 신문에서는 특종 내용을 확산하기보다 기밀 자료 누출이라는 정부 측 문제 제기에 더 초점을 맞춘 보도들을 내보낸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1995년 《월간조선》의 12·12 녹취록 특종이 녹음테이프 발매라는 혁신적 방식을 택한 것은 종이 매체들에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고도 했다. 당시 중앙일간지 정치부 중견 기자로 이 특종을 놓쳤던 한 언론인은 “(당시) 정말 놀랐다”고 회고한다. 그전부터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 녹취록이 있다는 말은 있었지만, 이를 직접 육성으로 들은 후 “왜 이런 기사를 놓쳤을까”라는 내부 비판들이 있었다고 한다.
 
 
  《월간조선》의 12·12 사건 특종의 필연적인 측면
 
12·12 후 내란 방조 혐의로 군사재판정에 선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사진=조선DB
  《월간조선》의 12·12 사건 특종은 우연적 요소도 있지만 필연적인 측면도 있다. 《월간조선》은 이 사건에 대하여 지속적인 보도를 한 매체였다. 전두환 세력은 12·12가 언젠가는 자신들을 옭아매게 될 것임을 예감, 그 진상에 대하여 철저한 내외부 통제를 가했다.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뒤에도 국가안전기획부의 언론 통제는 한동안 힘없이 계속되었다.
 
  그해 10월호 《월간조선》과 《신동아》는 다 같이 ‘이후락(李厚洛) 인터뷰’를 실었다. 대선 출마가 확실해진 김대중의 납치 사건에 대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은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도 있었다. 안기부는 두 잡지의 인쇄를 막았고 이게 정치 문제가 되자 며칠 뒤 풀었다. 안기부의 개입이 광고 역할을 하면서 두 잡지는 기록적 판매부수를 보였다. 《월간조선》은 인쇄부수 40만 부를 훌쩍 넘겨 한국 잡지 사상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이정표를 세웠다. 참고로 일본의 《문예춘추》는 1972년 〈타나카의 금맥과 인맥〉 기사로 현직 수상을 실각시킨 적이 있는데 이때 100만 부 이상을 찍었다고 한다. 인구 비례로 계산하면 1987년 10월호(9월호도 정승화 인터뷰로 40만 부 돌파) 《월간조선》 판매 기록은 《문예춘추》를 능가한다. 한강 이남(以南)의 어떤 잡지보다도 많은 부수였다. 현재의 《문예춘추》 판매부수는 약 37만.
 
  1987년의 대선 정국에 끼친 영향 면에선 《월간조선》 9월호에 실린 정승화(鄭昇和) 12·12 당시 계엄사령관 인터뷰가 컸다. 이 기사가 계기가 되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정 장군을 부총재로 영입했다. 군사변란이 12월 대통령 선거의 가장 큰 쟁점이 되면서 살벌해졌다. 노태우 캠프는 김영삼을 주적(主敵)으로 삼아 공격했고 김영삼은 ‘군정(軍政) 종식’ 구호로 대응했다.
 
  전두환 정권이 가장 큰 취약점으로 알고 숨겨왔던 12·12 사건을 처음으로 공론화시킨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월간조선》의 정승화 장군 인터뷰는 《월간조선》 유정현(劉正顯) 부장이 조갑제 기자에게 지시하여 이뤄졌다. 12·12 사건으로 고초를 겪고 나와 서울 강남 대치동 아파트에서 칩거 중이던 정 장군의 친구가 유 부장에게 인터뷰의 뜻을 알려와 조 기자가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인터뷰가 계기가 되어 그는 정승화 장군이 2002년에 향년 73세로 별세할 때까지 친하게 지냈다.
 
  나는 사흘 동안 그의 아파트로 출근하면서 집중 인터뷰를 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어떤 예감이 생겼다. 현직 계엄사령관에게 가한 전두환 그룹의 행위에 대한 역사의 보복이 있을 것이란 생각.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 소장) 측은 자신들이 먼저 쏘아 놓고는 정승화 측 경비병의 선제(先制) 사격이 12·12의 발단이 되었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날 밤 정 장군을 연행한 합동수사본부 요원들은 현직 계엄사령관이고 육군대장인 그를 물고문했다. 정 장군은 칩거 생활 중 자신이 겪은 일들을 차분히 녹음해 두었다. 그는 헤어질 때 수십 개의 녹음테이프를 나에게 건네주었고 나는 이를 풀어 대선 기간 중 《12·12 사건-정승화는 말한다》(까치 출판사)란 책으로 펴냈다. 이 테이프에서 정승화 장군은 물고문당하는 장면을 설명하다가 ‘내가 6·25 때 죽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며 울먹였다.
 
  그 8년 뒤 《월간조선》이 발굴한 보안사 녹음테이프는 이 주제에 대한 장기간의 취재가 이뤄낸 특종이고 12·12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결정적 자료가 되었다.
 
 
  군(軍) 지도부의 적나라한 인간상 드러나
 
  이건영 장군에 대한 보안사 감청 테이프는 위기에 처한 한국군 지도부의 적나라한 인간상을 드러냈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누가 눈치를 보는지, 누가 버티는지를 실시간으로 듣는 느낌이었다. 이 테이프의 마지막 대화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신원 불상의 두 장교가 상황이 끝난 뒤 나누는 잡담이 녹음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소곤이 총 맞았지.
  -복부 관통돼가지고.
  -원로들 싹 바뀌더군, 엘리트들로.
  -우리 박 형 어디 한자리 없는가.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
  -참 불행한 일이야. 정승화, 참 걔, 그 3군 사령관도 그렇고, 참 높은 게 좋은 거 아니에요.
  -그저 편하게….
  -심부름이나 열심히 하고.
  -은하식당에서 만두에다 소주 한 잔 하는 팔자가 제일 좋지.
  -변동이 있으면 좀 알려줘요. 요즘 말이야 귀가 멀어서.
  -알았습니다.
  -오케이, 고맙습니다.〉

 
  박선이 교수는 논문에서 조갑제 대표의 특종론을 소개했다.
 
  “요새 언론 풍조를 보니까 특종에 대한 평가를 애써 무시하려는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언론 자유가 지금에 비할 수 없이 어려웠던 1970년대, 1980년대에도 특종 하면 그 기자가 유명해지고 그 특종이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특종 욕심이 있어야 열심히 뛰게 되고, 거기서 경쟁이 이루어지고, 경쟁하다 보면 묻힌 정보가 다시 이 세상에 드러나고, 그게 또 우리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활자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육성 녹음테이프 발행은 뉴미디어 출현 직전 등장한 종이 잡지의 저널리즘 혁신이었다. 그 혁신은 12·12 군사반란과 5·18을 역사의 재판정으로 불러냈고,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피고석에 세웠다. 그 재판정에서는 증거로 제출된 12·12 사건 육성 녹음테이프가 재생되고 또 재생되었다. 이 특종을 바탕으로 뉴스와 특집 보도 프로그램이 제작되었고, 녹취록 속 인물 군상을 드라마로 재현한 영화 〈서울의 봄〉은 2023년 11월 개봉 후 극장 관객 1300만 명을 기록했다. 진실에 접근하려는 저널리즘의 노력이 빚어낸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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