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억원이 1조3808억원으로… 6공 비자금 문제 다시 불거져
⊙ “노태우 돈은 안 받았다”(최태원) vs “노태우 돈이 SK 성장의 발판”(노소영)
⊙ 이혼 소송이 SK그룹 정체성·사회정의 문제로 번져
⊙ 300억 조성 경위·자금 흐름 ·사실관계가 쟁점
⊙ “노태우 돈은 안 받았다”(최태원) vs “노태우 돈이 SK 성장의 발판”(노소영)
⊙ 이혼 소송이 SK그룹 정체성·사회정의 문제로 번져
⊙ 300억 조성 경위·자금 흐름 ·사실관계가 쟁점
- 최태원(왼쪽 사진) SK그룹 회장이 2024년 4월 16일, 이혼 소송 항소심 2차 변론에 출석하고 있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변론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전편은 아침 드라마였다. 대한민국에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남녀가 자식 셋을 낳고 살다가 27년 만에 이혼하기로 했을 때, 더구나 이혼 사유가 남자 측의 동거인과 혼외자 때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입 가진 사람들은 한마디씩 했다. 아침 드라마 같은 불륜 스토리가 여기 있다고 말이다.
남녀의 이혼 소송에서 1심 재판부는 이렇게 판결했다. 남자는 여자 측에 665억원의 재산을 분할하라. 남녀가 주인공인 아침 드라마는 이렇게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1년 반이 지나고, 후속편은 더욱 강해져 돌아왔다. 기존의 막장 스토리에 전직 대통령, 전직 대통령 부인, 수백억원대의 돈, 잊힌 정치권 실세까지 총망라된 스펙터클한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2심 재판부는 이렇게 판결했다. 남자는 여자 측에 1조3808억원의 재산을 분할하라. 2심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각종 자극적인 요소들은 더는 이 사건을 한 부부의 이혼 스토리로 보지 않는다.
2심 판결 자체를 두고 법조인들 사이에서 얘기들이 오가고 이미 작고한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으며, 정치권은 뭉칫돈을 회수하겠다고 나섰다. ‘세기의 이혼’이라고 하는 최태원(崔泰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盧素英)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얘기다.
이들의 이혼소송은 현재 진행형이다. 2심 판결에 불복한 최태원 회장은 대법원에 상고했고, 대법원은 8월 21일 이혼 소송 사건 1부에 사건을 배당했다. 주심은 서경환(徐慶桓) 대법관이 맡고 노태악(盧泰嶽), 신숙희(申叔憙), 노경필(魯坰泌) 대법관이 사건을 함께 심리한다. 상고심에서는 2심 법원이 1조3808억원으로 설정한 재산 분할 범위가 적절했는지가 주된 심리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선경 300억원, 최서방 32억원’
최태원-노소영 부부의 이혼이 더는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게 된 이유는 2심 재판 과정에서 나온 작은 메모 때문이었다. 665억원 분할(1심)에서 1조3808억원 분할(2심)로 바뀐 결정적 계기가 된, 이른바 ‘김옥숙 메모’다. 김옥숙(金玉淑) 여사는 고(故) 노태우(盧泰愚) 전(前) 대통령의 부인이자 노소영 관장의 어머니다. 노소영 관장은 1심 재판 때부터 줄곧 노씨 일가가 SK의 성장에 실질적 도움을 줬다는 식(式)의 주장을 펴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노 관장이 1심 재판 때 최태원 회장이 보유한 지주사 ㈜SK 주식 50%를 재산 분할 대상으로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심 재판부는 노 관장의 주장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고, 노 관장은 2심에서 이에 대한 증거로 김옥숙 여사가 20여 년 전에 작성한 메모 2장과 선경건설이 발행한 약속어음 50억원짜리 6장 사진을 제출했다.
〈1998.4.1. 현재
최 실장 2억, 노재우 251억+90억, 선경 300억, 최 상무 32억, 정해창 30억, 이병기 52억. 총 맡긴 돈 667억+90억.
1999.2.12. 현재
노 회장 150억, 신 회장 100억, 선경 300억, 이병기 52억, 최서방 32억, 정실장 30억, 최석립 2억. 총 686억〉
“노씨 일가가 SK 재산 형성·유지에 기여”(2심 재판부)
메모장에 적힌 ‘선경 300억원, 최서방(최태원 지칭) 32억원’.
노소영 관장 측은 “대통령 재임 당시에 노태우 대통령이 선경(현재의 SK) 측에 300억원 이상을 건넨 증거”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이 돈이 1991년에 최태원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崔鍾賢) SK 선대회장이 태평양증권(SK증권의 전신)을 인수하는 데 쓰이면서 SK그룹 성장의 발판이 됐고 이후로 노태우 대통령이 SK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면서 유·무형의 이바지를 했다고 봤다. 태평양증권 인수 과정에 쓰인 돈은 500억원인데 최종현 회장 개인이 어떻게 동원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당시 국세청, 은행감독원이 조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YS 정권 들어와서 선경이 사돈지간이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타깃이 되어 세무조사, 검찰조사가 이뤄졌고, 선경은 유·무형적인 특혜를 받지 않은 것으로 결론 났다.
2심 재판부는 “대통령 사위가 아닌 일반적인 기업인의 경우 청와대 시연 기회(무선이동통신기술 시연을 뜻함) 자체를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고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으로 태평양증권을 인수하고 제2 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되거나 제1 이동통신인 한국이동통신(현재의 SK텔레콤)을 인수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오늘날의 최태원 회장이 가진 SK 주식 중 일부는 노소영 관장이 재산 형성 및 유지에 이바지한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심에서의 재산 분할 665억원이 2심 판결에서는 1조3808억원으로 늘어났다. ㈜SK의 주주는 2024년 6월 30일 현재, 최태원 17.9%, 최기원(최태원의 여동생) 6.65%, 최재원(최태원의 남동생) 0.14%, 노소영 0.01% 등이다.
“어음 300억은 받은 돈이 아니라 우리가 주기로 한 돈”(SK)
SK그룹은 메모장에 적힌 대로 선경그룹이 노태우 대통령 측으로부터 300억원을 받은 적이 없다며 노소영 관장 측과 180도 다른 주장을 펼쳤다. 노소영 관장 측이 메모장의 근거로 내놓은 선경건설이 발행한 50억원짜리 어음 6장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지만, 다른 용도라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에게 받은 돈이 아니라 SK그룹이 오히려 노 대통령 퇴임 이후에 주겠다고 약속한 돈이며, 돈을 주겠다는 근거로 약속어음을 써줬다고 했다. 특히 약속어음은 1992년 12월에 발행됐는데, SK의 태평양증권 인수는 1991년 12월이라서 시기상으로도 이 돈이 태평양증권 인수에 사용됐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노소영 관장 측의 주장과는 반대로 300억원이 그룹의 사세(社勢)를 확장하는 데 사용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당사자는 작고한 노태우 대통령과 최종현 회장, 그리고 어음 전달자인 손길승(孫吉丞) SK텔레콤 명예회장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만 당사자 중에 유일한 생존자는 손 명예회장뿐이다. 그는 1965년에 선경직물에 입사해 SK그룹 회장까지 지낸 SK의 속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다.
그는 재판부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약속어음은 제가 선경건설에서 받아서 전달한 어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가 직접 받아서 전달했기 때문에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저와 최종현 회장, 노태우 대통령 측만 아는 사실일 것”이라며 “당시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 관리와 조성을 담당하고 있던 이현우 경호실장이나 비자금 심부름을 하던 이원조 비서관이 불러서 찾아가면, 기업마다 통치자금을 마련해주어야 하는데 선경은 규모상 300억원 정도는 분담해야 하니 준비해서 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은 최종현 회장을 직접 만나서도 300억 이야기를 꺼냈고, 최종현 회장이 하는 수 없이 대통령께서 퇴임하고 활동자금이 필요하실 때 약속한 300억원을 꼭 드리겠다고 했고, 저도 그 사람들에게 같은 얘기를 했다. 이런 약속을 한 후에 한동안은 잠잠하다가 청와대 측에서 정권이 끝나갈 무렵 차기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 저를 찾아와서, 주기로 약속한 300억에 대해 증표를 달라고 했고, 이 얘기를 선대회장(최종현)에게 전달하자 회장님께서 짜증을 내시면서 그러면 약속어음이라도 전달해주라고 했다. 저는 최종현 회장의 지시에 따라 약속어음을 일 년에 수백, 수천억원씩 수도 없이 발행하는 선경건설 사장에게 요청해 약속어음을 발행해 가져오도록 해서 전달했다”고 했다.
외신들, 이혼 소식 전해
누구 말이 맞는지와 상관없이 2심 판결은 SK는 물론 재계(財界)에 적잖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4대 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대한민국 재판부가 SK그룹은 정권의 비호로 성장한 그룹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그동안 유공, 이동통신을 인수한 것을 두고 루머처럼 떠돌던 일들이 사실일 가능성이 커졌다”며 “특히 SK그룹의 2세이자 총수인 최태원 회장이 국내 대표 격인 경제단체장을 맡는 상황에서 재판부가 내린 판결이라서 대외적 이미지에도 타격이 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외신들도 소식을 전했다. ‘로이터’는 ‘한국 법원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계획된 이혼의 목적으로 아내에게 10억 달러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BBC’는 ‘한국의 재벌 최태원이 전 부인에게 현금으로 1조3800억원(7억8800만 파운드)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국내 사상 최대 규모의 이혼 합의금이다’ 등 《The Times》 《니케이아시아》 ‘블룸버그’ 등이 뉴스를 송출했다.
2심 판결에 당황한 SK그룹 측은 판결 직후인 6월 17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 위원장은 “이번 소송은 개인 간의 소송으로 그간 회사 차원에서 개입하지 않았지만 이번 항소심 결과를 보고 SK그룹이 6공 비자금과 비호로 성장한 것이라는 정의가 내려져 버렸다. SK에는 15만 명에 가까운 구성원과 많은 고객, 투자자가 있다. 그 모든 분에게 설명하여야 하는 중요한 뉴스가 됐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1995년에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있었고 6공 정부 인사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특혜를 받았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SK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에 다른 입찰자보다 2배나 높은 금액을 적어서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는데 과연 특혜라고 할 수 있느냐. 이번 기회에 제기됐던 오해를 없애 SK의 역사와 가치를 지켜내겠다”고 말했다.
이날 설명회에는 최태원 회장도 참석했다. 최 회장은 “사법부 판단을 존중해야 하지만 저는 이번에 상고하기로 했다. 첫째, 재산 분할 관련해서 객관적이고 명백한 오류가 발견됐다. 또 하나 커다란 이유는 제6공화국 후광으로 SK 역사가 전부 부정당하고 후광으로 사업을 키웠다는 판결 내용이 존재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가족들만 아는 비밀이었다”(노소영 측)
확실한 것은 ‘300억원’이라는 거액이 김옥숙 여사의 메모장에 기재돼 있으며, 이 메모로 인해 재판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메모장에 적힌 ‘300억원+알파’ 등 총 900여억원의 돈은 1995년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수사 때도, 또 최태원-노소영 1심 이혼 소송에서도 나오지 않았었다.
노소영 관장 측은 이제야 증거를 제출한 이유에 대해 “당사자들 사이에서 가족들만 아는 비밀로 했다. 이 내용이 알려지면 대내외적으로 많은 억측과 불필요한 논란이 일게 되어 가족 간의 화합에 큰 장애가 될 뿐 아니라 그룹 경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피고(최태원)의 행태에 비춰 피고 측이 언론 등을 통해 악용할 것도 염려됐다. 하지만 부득이 관계 당사자들을 설득해 양해를 얻어 증거로 제출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 측은 “1990년대에 발행한 약속어음을 계속 보관하고 있었음에도 1심 소송에서 제출하지 않다가 2심에서 약속어음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하면서 증거로 제출한 점 등을 고려하면 주장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메모에 따르면 노태우 대통령은 SK 외 동생인 노재우씨에게 251억원+90억원, 당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이던 정해창씨에게 30억원, 당시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인 이병기씨에게 52억원을 각각 맡겼다.
노태우 회고록 어디에도 없는 ‘선경 300억원 등 900여억원’
기자가 몸 담고 있는 조선뉴스프레스는 2011년에 《노태우 회고록》을 출간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책을 낸 이유에 대해 “역사와 국민 앞에서 내 인생과 철학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남겨놓는 진실한 술회라고 믿어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회고록에 ‘900억원의 자금’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下)권 ‘정치자금’ 부분의 일부다.
〈결론부터 말하면 통치행위와 관련해 기업인들로부터 돈을 받아 정치적으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아 있던 돈은 대부분 금융기관 등에 위탁해놓았다가 전액 몰수돼 국고(國庫)로 들어갔다.(중략)
1997년 4월 17일자로 비자금과 관련해 법원이 나에게 최종적으로 부과한 추징금은 2628억9600만원이었다. 2008년 현재 2339억3088만2160원을 갚았고, 미납액이 289억6511만7840원이다. 일부 언론에선 내가 납부 능력이 있으면서도 고의로 미납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나는 비자금 사건이 발생하자 보유 중이던 현금과 비자금을 빌려간 기업에 대한 채권 내역을 제출했다. 현금은 원금 1218억1232만7505원과 이자, 채권은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 회장 등 다섯 기업주에게 대여한 원금 1538억7900만여원과 그 이자였다. 원금만 2756억9132만여원이고, 이자를 포함하면 4000억원이 넘었다. 추징금을 완납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검찰은 그러나 1995년 12월 8일 이후 이 재산에 대해서 압류만 해놓고 채권을 회수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노태우 회고록》 어디에도 ‘선경 300억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추정이 가능하다. 노태우 대통령이 책을 집필할 당시에 비자금을 사돈과 측근에게 맡겨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거나, 비자금 얘기를 하면서도 정말 가족들만 아는 일이라서 끝내 비밀로 했거나, 아니면 비자금이 아닌 본인 돈이라서 굳이 기록으로 남길 이유가 없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이 가능성에 대해 모두 의구심을 보인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 돈을 노태우 대통령이 잊어버렸을 가능성은 작다고 보고 있다.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900여억원은 노태우 대통령이 스스로 밝힌 ‘5년 동안 모은 통치자금 5000억원’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런 큰 금액을 잊기란 쉽지도 않고, 메모장에 따르면 노태우 대통령이 돈을 맡겨놓은 곳은 선경뿐 아니라 동생, 6공 최측근 등 여럿이다. 이들 모두가 비자금이 아니라고 입을 맞출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 본인의 돈이었을 확률도 낮다. 노 대통령은 1987년에 대선 공약으로 재임 중 재산 공개를 내세웠고, 1988년 4월에 연희동 자택과 주식·예금 등 5억2000만원을 공개했다. 불과 3년 만에 5억2000만원이 900억원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면 1000페이지가 넘는 회고록을 작성하면서도 가족 관련 얘기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300억원은 대체 무슨 돈인가
노소영 관장 측이 2심에서 사실상 승소(勝訴)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나온 돈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이 무렵 김옥숙 여사의 아들 노재헌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동아시아문화센터에 김옥숙 여사가 147억원의 기부금을 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자금의 출처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 여사는 동아시아문화센터에 2016년 10억원을 시작으로 총 5회에 걸쳐 147억원을 출연했다. 2020년에는 무려 95억원을 출연했다. 동아시아문화센터는 2012년에 설립한 한중문화센터에서 시작한 재단이다. 주요 사업은 동아시아 국가 상호 간 전략·문화 협력 및 청년 교류지만, 노태우 대통령의 대(對)중국 외교를 기리는 평가 사업을 하고 있다. 사무실 주소도 노 대통령이 살던 연희동 건물에 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메모상에 존재하는 900여억원과 147억원의 기부금은 세간의 관심을 끌 만했다.
최태원 회장 측은 2심 재판을 하면서 ‘김옥숙 메모장’이 공개되자 자금 출처에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형희 SK수펙스추구회 위원장은 “300억원에 대한 세부 내용은 없고 비자금이 들어왔을 것이라고 치부되고 있다. 별도 비자금이 존재하는지는 파악해봐야 할 부분이다”고 밝혔다.
SK 측의 얘기다.
“노소영 관장이 제출한 김옥숙 메모는 그 진위에 대한 근거가 입증되지 않았으나 굉장히 디테일해서 2심 재판부도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옥숙 여사가 ‘맡긴 돈’이라고 명시한 내역에 ‘선경 300억’을 비롯해 ‘이병기 52억’ ‘정해창 30억’ 등 노태우 정부 시절 주요 인사들이 언급됐고, 별채에 5억원, 금고에 10억1000만원을 넣어놓은 것 등 내용이 있습니다. 저희는 노태우 비자금 300억원이 그룹에 유입되어 경영에 쓰인 적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그것을 떠나 메모장에 대한 사실관계 검증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태원 회장 측은 만일 이 돈이 부정한 돈이라면 형사 처벌 대상이 아니냐는 주장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은 2001년 9월에 제정됐기 때문에, 이 사건이 발생한 1991~1992년 사이의 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돈이 ‘불법원인급여’에 해당할 수는 있다는 주장이다.
불법원인급여라면 소송 자체가 不可
노태우 비자금 사건의 전초라고 할 수 있는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수사한 함승희 변호사도 지적하는 부분이다. 함 변호사는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인 1993년에 대검 중수부 검사를 맡아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수사했고 노태우 대통령으로 자금이 흘러들어 간 사실을 밝혀냈지만, 사건은 은폐됐다. 그로부터 2년 뒤 본격적인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다.
함승희 변호사의 말이다.
“불법원인급여는 로마법의 ‘클린핸즈(clean hands) 원칙’에서 나온 겁니다. 로마법은 ‘법정에 들어와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려면 네 손을 깨끗하게 씻고 들어오라’고 합니다. 가령 ‘내가 도박을 했는데 상대방이 돈을 안 준다’는 식으로 불법(不法)을 약속하고 돈(혹은 대가)을 주기로 한 것은 소송으로 청구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민법의 불법원인급여입니다.”
― 노태우 대통령의 900억원이 불법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는 거군요.
“민법 제746조는 불법원인급여에 대해 그 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이 된 선경 300억원은 갑자기 2심 재판 과정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정체불명의 돈이 어디서 흘러나왔는지를 명백히 따져봐야 합니다.”
2심 재판부는 이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에 따르면 ‘최종현이 노태우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은 것이 불법원인급여인지 여부는 1991년경을 기준으로 판단함이 타당하다’고 돼 있다. ‘1991년경 기준’이 어떤 것인지, 불법원인급여인지 아닌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기업 소송을 주로 담당하는 한 변호사는 “2심 판단대로라면 노소영 관장 측이 부친으로부터 불법 비자금을 증여세 없이 받은 다음에 대규모 재산 증식의 원천으로 쓴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민사소송법의 자유심증주의 원칙
2심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300억원에 대해 구체적인 자금 출처 흐름을 추적하거나 주변인 조사 등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최태원 회장 측과 노소영 관장 측의 주장 중에서 어느 쪽의 주장이 더욱 타당한지에 대해 판단, ‘김옥숙 메모’를 비롯해 노 관장 측이 주장하는 SK 재산 형성에 대한 기여 주장이 신빙성이 있어 상당한 기여분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노소영 관장 측은 50억원짜리 어음 6장 중 2장은 SK 측에 ‘100억원을 줄 수 있는지’를 의사 타진하기 위해 이미 건넸고, 현재 4장의 어음만 보유하고 있다. 이형희 SK수펙스추구위원회 위원장은 “어음 부분도 받았다는 것인지, 이후 어디로 갔다는 것인지 (재판부가 인정하려면) 후속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심 재판부가 증거로 채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사소송법(202조)에 따른 자유심증주의 원칙이 있어서다. 민사소송법은 당사자의 사실에 관한 주장이 진실인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하고 심증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 자료를 참작하여 형성되는 자유로운 심증에 의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쉽게 말해 법관의 양심과 재판의 전문성을 신뢰하고, 그에게 자유로운 판단을 맡긴 것이다.
“자금 흐름 조사 했어야”(함승희 변호사)
함승희 변호사의 얘기다.
“SK의 주장이 무조건 맞다는 것도 아니고 최태원 회장 측을 편을 드는 것도 아닙니다. 위자료는 쌍방의 재력 등을 고려해서 판사가 재량에 따라 몇십억원을 판결할 수 있지만 재산 분할은 얘기가 다릅니다. 재산 형성의 기여도를 분명하게 따져봐야 하는 법률의 문제입니다. 판결문에 300억원이 기반이 되어 그룹이 성장했고, 대통령 사돈으로서 유·무형의 기여가 있었다고 하는데 메모만 보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 민사소송에서는 형사소송처럼 타이트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할 의무는 없지 않습니까.
“형사사건 수준은 아니지만 이처럼 중대한 소송에서는 사실 확인을 해야 맞습니다. 당시에 금융실명제가 없었지만 수표를 끊은 통장의 주인은 누군지, 이 돈과 김옥숙 여사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어음 중 일부는 SK 측으로 넘겼다는데 그것은 어찌 됐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300억원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 노소영 관장 측이 300억원을 맡겼다는 주장을 재판부가 받아들였는데요.
“007 가방 1개에 1만원권으로 1억원이 들어가니까 대략 300개 정도 되겠네요. 노태우 대통령의 돈이 SK로 갔다고 하니까, 300개 가방을 언제, 어떻게, 누가 전달했는지는 살펴봤어야 합니다. 만약 노태우 대통령 측이 수표로 끊어서 전달했더라도 수표 발행계좌, 수표를 수령한 측의 입금 내역 등 자금 흐름을 파악했어야 합니다.”
― 판사 재량으로 증거를 채택할 수 있잖습니까.
“자유심증은 논리와 경험에 맞아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판사 마음대로 증거로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보통 사람의 사고(思考)에 맞춰 말이 되는 수준인지가 기준입니다. 노태우 대통령 측이 SK에 300억원을 맡겼다면 상식적으로 영수증을 받는 것이 맞습니다. 돈은 노태우 대통령이 맡겼다는데 최종현 회장이 한참 뒤에 ‘나중에 돈을 준다’면서 어음을 끊어줬다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 1993년에 당시 수사팀을 진두지휘하셨을 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YS 정권 초기에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수사했는데 당시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타깃이 아니었기 때문에 샅샅이 조사하지 않았고, 2000억원 정도의 비자금을 찾는 수준에서 중단했습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에 ‘역사바로잡기’로 검찰 드림팀을 구성해 비자금을 철저히 조사했는데 김옥숙 비자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위 기업이니까 봐줬을 것이라는 법원의 판단도 당시 정치 상황으로 볼 때 경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자유심증주의는 판사의 고유 권한이고, 판사가 누구 편을 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 대해 경험 많은 판사가 한쪽 편을 들어 증거를 취사 선택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김옥숙 메모장에 등장하는 이병기 전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은 8월 10일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메모와 관련해서 아는 사실이 전혀 없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은 은행에 예치됐던 것으로 밝혀진 바 있고, 그게 내가 아는 전부”라고 말했다.

손길승 명예회장이 기억하는 당시 상황
100억원, 200억원도 아니고 왜 하필 300억원이었을까. 손길승 SK 명예회장은 《월간조선》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92년 초부터 전경련에서 ‘기업끼리 돈을 내야 한다’고 연락이 옵디다. 당시에는 전경련이 회사 그레이드에 따라서 대충 얼마, 얼마를 정했거든. 내가 조사를 해보니까 우리는 한 300억원 정도는 줘야겠더라고요. 제가 최종현 회장에게 보고하니까 ‘야. 사돈인데 어떻게 주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사돈하고 다른 겁니다. 통치자금이니까요’라고 했더니 최 회장이 ‘30억원 들고 가볼 테니 줘봐. 받나 안 받나 보자’고 하더라고요.”
― 노태우 전 대통령이 30억원을 받았다는 얘기를 최종현 회장께 직접 들으셨나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처음에는 ‘사돈끼리 왜 이러시느냐’면서 극구 받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30억원짜리 수표를 그냥 응접실에 두고 왔다더군요. 결국 그 돈이 되돌아오지 않으니, 최종현 회장이 ‘그 돈을 받네’라며 혀를 쯧쯧 차던 생각이 납니다. 그 후에 얼마간 연락이 없다가 집권 후반기쯤 되면서 청와대에서 비자금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300억원은 어떻게 됐느냐’ 연락이 왔습니다. 이 분(노태우 대통령)이 주변머리가 별로 없어서 전두환 대통령하고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연희동 집이 좁다’기에 그러면 ‘성북동에 지어 드리면 되겠느냐’고 구체적인 얘기가 오갔습니다. 그럼 집은 해결되는데 생활비가 문제 될 것 같다고 하면서 그쪽에서 ‘한 2억~3억원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걸 만들어 줄 준비를 했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끝냈는데 이후에도 이원조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이 자꾸 얘기를 하면서 대체 언제 줄 거냐고 하기에 ‘준다면 주는 거지, 무슨 걱정이냐. 사돈 사이에. 우리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습니다.”
― 이원조 의원은 TK 출신으로 5, 6공 때 금융계 황제로 불렸던 사람 아닙니까. 이원조 의원과 잘 알고 지냈습니까.
“이원조씨하고 막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이원조씨도 골치 아픈 거는 나한테 부탁하고 그랬거든. 그런데 자꾸 약속하라는 식으로 얘기하니까, 애초 전경련에서 생각한 우리 몫은 300억원 정도니까 그걸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최종현 회장이 어음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어느 회사로 할까 했더니 선경건설 것으로 하래요. ‘건설이 그걸 감당할 능력이 없다’니까 최종현 회장이 ‘100% 내 회사니까 사고가 나도 내가 손해를 감당하는 거고, 다른 데는 시끄러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건설에 지시했고 장부에는 기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흔적 남기지 마라. 이거는 절대 교환 안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지 않나요. 워낙 예전 일이고.
“노태우 대통령 사저를 지어 드리려고 땅을 산 증거도 있거든. 이런 생생한 이야기가 있는데 논리적으로 내 얘기를 좀 들어달라는 겁니다. SK는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SK가 상처를 입으면 내가 상처를 입는 거라고요. SK는 전문 경영인들의 운동장인데, 전문 경영인들이 열심히 일궈온, 그렇게 평판 좋은 회사를 이렇게 망가뜨리면 우리는 뭐가 되냐 이겁니다.”
“불법 자산은 추징하는 것이 맞다”(김복형 헌법재판관)
법조계에서는 300억원을 SK에 전달했다고 하더라도 환수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추징금이 완납됐고, 추가로 추징한다면 이에 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하는데 공소 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노 전 대통령은 2021년에 사망했고, 또 ‘범죄수익은닉규제법’은 사건 당시보다 한참 뒤에 만들어진 법이다.
이렇게 되자 ‘노태우 900억원’에 주목하는 정치권에서는 법을 고쳐서라도 처벌하겠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장경태(張京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9월 2일에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해당 개정안은 헌정 질서 파괴 범죄자의 범죄 수익에 대해서 당사자 사망 등으로 공소제기가 어려운 경우에도 몰수·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장 의원은 “불법적으로 축적한 범죄 수익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철저하게 추징돼야 한다. 이번 개정안이 5공, 6공 불법 자금을 단 한 푼도 남김없이 끝까지 추적하고 추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환(金永煥) 민주당 의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불법 정치자금에 대해 과세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탈세 제보서’를 8월 28일에 국세청에 제출했다. 국민의힘 송석준(宋錫俊) 의원은 심우정(沈雨廷)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검찰총장이 되면 이런 문제(비자금)에 대해 국민의 의혹을 해소할 생각이 있느냐. 역대 대통령 누구도 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강민수 국세청장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시효가 남아 있고 확인만 된다면 당연히 탈세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복형(金福馨) 헌법재판관은 지난 9월 1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 때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불법 자산이 확인된다면 국가가 귀속하거나 추징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피고인으로부터 추징할 수 있는 자산은 추징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월 12일 김복형 헌법재판관 임명안을 재가했다.
재벌가의 장남과 대통령 딸의 결혼은 결국 비극적인 스토리로 막이 내려졌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의 이혼 스토리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니라 숱한 사회적인 이슈를 갖고 있다. 특히 소송의 초점이 30년 만에 밖으로 나온 불법 비자금 여부에 쏠리면서, 이 문제는 법적 다툼이 불가피해졌다. 대법원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내놓을 것인가.⊙
남녀의 이혼 소송에서 1심 재판부는 이렇게 판결했다. 남자는 여자 측에 665억원의 재산을 분할하라. 남녀가 주인공인 아침 드라마는 이렇게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1년 반이 지나고, 후속편은 더욱 강해져 돌아왔다. 기존의 막장 스토리에 전직 대통령, 전직 대통령 부인, 수백억원대의 돈, 잊힌 정치권 실세까지 총망라된 스펙터클한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2심 재판부는 이렇게 판결했다. 남자는 여자 측에 1조3808억원의 재산을 분할하라. 2심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각종 자극적인 요소들은 더는 이 사건을 한 부부의 이혼 스토리로 보지 않는다.
2심 판결 자체를 두고 법조인들 사이에서 얘기들이 오가고 이미 작고한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으며, 정치권은 뭉칫돈을 회수하겠다고 나섰다. ‘세기의 이혼’이라고 하는 최태원(崔泰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盧素英)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얘기다.
이들의 이혼소송은 현재 진행형이다. 2심 판결에 불복한 최태원 회장은 대법원에 상고했고, 대법원은 8월 21일 이혼 소송 사건 1부에 사건을 배당했다. 주심은 서경환(徐慶桓) 대법관이 맡고 노태악(盧泰嶽), 신숙희(申叔憙), 노경필(魯坰泌) 대법관이 사건을 함께 심리한다. 상고심에서는 2심 법원이 1조3808억원으로 설정한 재산 분할 범위가 적절했는지가 주된 심리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선경 300억원, 최서방 32억원’
최태원-노소영 부부의 이혼이 더는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게 된 이유는 2심 재판 과정에서 나온 작은 메모 때문이었다. 665억원 분할(1심)에서 1조3808억원 분할(2심)로 바뀐 결정적 계기가 된, 이른바 ‘김옥숙 메모’다. 김옥숙(金玉淑) 여사는 고(故) 노태우(盧泰愚) 전(前) 대통령의 부인이자 노소영 관장의 어머니다. 노소영 관장은 1심 재판 때부터 줄곧 노씨 일가가 SK의 성장에 실질적 도움을 줬다는 식(式)의 주장을 펴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노 관장이 1심 재판 때 최태원 회장이 보유한 지주사 ㈜SK 주식 50%를 재산 분할 대상으로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심 재판부는 노 관장의 주장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고, 노 관장은 2심에서 이에 대한 증거로 김옥숙 여사가 20여 년 전에 작성한 메모 2장과 선경건설이 발행한 약속어음 50억원짜리 6장 사진을 제출했다.
〈1998.4.1. 현재
최 실장 2억, 노재우 251억+90억, 선경 300억, 최 상무 32억, 정해창 30억, 이병기 52억. 총 맡긴 돈 667억+90억.
1999.2.12. 현재
노 회장 150억, 신 회장 100억, 선경 300억, 이병기 52억, 최서방 32억, 정실장 30억, 최석립 2억. 총 686억〉
“노씨 일가가 SK 재산 형성·유지에 기여”(2심 재판부)
메모장에 적힌 ‘선경 300억원, 최서방(최태원 지칭) 32억원’.
노소영 관장 측은 “대통령 재임 당시에 노태우 대통령이 선경(현재의 SK) 측에 300억원 이상을 건넨 증거”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이 돈이 1991년에 최태원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崔鍾賢) SK 선대회장이 태평양증권(SK증권의 전신)을 인수하는 데 쓰이면서 SK그룹 성장의 발판이 됐고 이후로 노태우 대통령이 SK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면서 유·무형의 이바지를 했다고 봤다. 태평양증권 인수 과정에 쓰인 돈은 500억원인데 최종현 회장 개인이 어떻게 동원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당시 국세청, 은행감독원이 조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YS 정권 들어와서 선경이 사돈지간이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타깃이 되어 세무조사, 검찰조사가 이뤄졌고, 선경은 유·무형적인 특혜를 받지 않은 것으로 결론 났다.
2심 재판부는 “대통령 사위가 아닌 일반적인 기업인의 경우 청와대 시연 기회(무선이동통신기술 시연을 뜻함) 자체를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고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으로 태평양증권을 인수하고 제2 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되거나 제1 이동통신인 한국이동통신(현재의 SK텔레콤)을 인수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오늘날의 최태원 회장이 가진 SK 주식 중 일부는 노소영 관장이 재산 형성 및 유지에 이바지한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심에서의 재산 분할 665억원이 2심 판결에서는 1조3808억원으로 늘어났다. ㈜SK의 주주는 2024년 6월 30일 현재, 최태원 17.9%, 최기원(최태원의 여동생) 6.65%, 최재원(최태원의 남동생) 0.14%, 노소영 0.01% 등이다.
“어음 300억은 받은 돈이 아니라 우리가 주기로 한 돈”(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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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과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사진=조선DB |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당사자는 작고한 노태우 대통령과 최종현 회장, 그리고 어음 전달자인 손길승(孫吉丞) SK텔레콤 명예회장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만 당사자 중에 유일한 생존자는 손 명예회장뿐이다. 그는 1965년에 선경직물에 입사해 SK그룹 회장까지 지낸 SK의 속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다.
그는 재판부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약속어음은 제가 선경건설에서 받아서 전달한 어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가 직접 받아서 전달했기 때문에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저와 최종현 회장, 노태우 대통령 측만 아는 사실일 것”이라며 “당시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 관리와 조성을 담당하고 있던 이현우 경호실장이나 비자금 심부름을 하던 이원조 비서관이 불러서 찾아가면, 기업마다 통치자금을 마련해주어야 하는데 선경은 규모상 300억원 정도는 분담해야 하니 준비해서 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은 최종현 회장을 직접 만나서도 300억 이야기를 꺼냈고, 최종현 회장이 하는 수 없이 대통령께서 퇴임하고 활동자금이 필요하실 때 약속한 300억원을 꼭 드리겠다고 했고, 저도 그 사람들에게 같은 얘기를 했다. 이런 약속을 한 후에 한동안은 잠잠하다가 청와대 측에서 정권이 끝나갈 무렵 차기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 저를 찾아와서, 주기로 약속한 300억에 대해 증표를 달라고 했고, 이 얘기를 선대회장(최종현)에게 전달하자 회장님께서 짜증을 내시면서 그러면 약속어음이라도 전달해주라고 했다. 저는 최종현 회장의 지시에 따라 약속어음을 일 년에 수백, 수천억원씩 수도 없이 발행하는 선경건설 사장에게 요청해 약속어음을 발행해 가져오도록 해서 전달했다”고 했다.
외신들, 이혼 소식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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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위원장이 6월 17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최태원 회장-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간 이혼소송·재산 분할 항소심 판결 관련 공식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외신들도 소식을 전했다. ‘로이터’는 ‘한국 법원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계획된 이혼의 목적으로 아내에게 10억 달러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BBC’는 ‘한국의 재벌 최태원이 전 부인에게 현금으로 1조3800억원(7억8800만 파운드)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국내 사상 최대 규모의 이혼 합의금이다’ 등 《The Times》 《니케이아시아》 ‘블룸버그’ 등이 뉴스를 송출했다.
2심 판결에 당황한 SK그룹 측은 판결 직후인 6월 17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 위원장은 “이번 소송은 개인 간의 소송으로 그간 회사 차원에서 개입하지 않았지만 이번 항소심 결과를 보고 SK그룹이 6공 비자금과 비호로 성장한 것이라는 정의가 내려져 버렸다. SK에는 15만 명에 가까운 구성원과 많은 고객, 투자자가 있다. 그 모든 분에게 설명하여야 하는 중요한 뉴스가 됐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1995년에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있었고 6공 정부 인사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특혜를 받았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SK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에 다른 입찰자보다 2배나 높은 금액을 적어서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는데 과연 특혜라고 할 수 있느냐. 이번 기회에 제기됐던 오해를 없애 SK의 역사와 가치를 지켜내겠다”고 말했다.
이날 설명회에는 최태원 회장도 참석했다. 최 회장은 “사법부 판단을 존중해야 하지만 저는 이번에 상고하기로 했다. 첫째, 재산 분할 관련해서 객관적이고 명백한 오류가 발견됐다. 또 하나 커다란 이유는 제6공화국 후광으로 SK 역사가 전부 부정당하고 후광으로 사업을 키웠다는 판결 내용이 존재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가족들만 아는 비밀이었다”(노소영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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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장에 나란히 앉은 노태우 대통령의 가족들. 왼쪽 두 번째부터 소영씨, 어머니 김태향 여사, 장모 홍무경 여사, 아들 재헌씨. 사진=조선DB |
노소영 관장 측은 이제야 증거를 제출한 이유에 대해 “당사자들 사이에서 가족들만 아는 비밀로 했다. 이 내용이 알려지면 대내외적으로 많은 억측과 불필요한 논란이 일게 되어 가족 간의 화합에 큰 장애가 될 뿐 아니라 그룹 경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피고(최태원)의 행태에 비춰 피고 측이 언론 등을 통해 악용할 것도 염려됐다. 하지만 부득이 관계 당사자들을 설득해 양해를 얻어 증거로 제출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 측은 “1990년대에 발행한 약속어음을 계속 보관하고 있었음에도 1심 소송에서 제출하지 않다가 2심에서 약속어음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하면서 증거로 제출한 점 등을 고려하면 주장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메모에 따르면 노태우 대통령은 SK 외 동생인 노재우씨에게 251억원+90억원, 당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이던 정해창씨에게 30억원, 당시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인 이병기씨에게 52억원을 각각 맡겼다.
노태우 회고록 어디에도 없는 ‘선경 300억원 등 900여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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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뉴스프레스가 2011년에 출간한 《노태우 회고록》 표지. |
하(下)권 ‘정치자금’ 부분의 일부다.
〈결론부터 말하면 통치행위와 관련해 기업인들로부터 돈을 받아 정치적으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아 있던 돈은 대부분 금융기관 등에 위탁해놓았다가 전액 몰수돼 국고(國庫)로 들어갔다.(중략)
1997년 4월 17일자로 비자금과 관련해 법원이 나에게 최종적으로 부과한 추징금은 2628억9600만원이었다. 2008년 현재 2339억3088만2160원을 갚았고, 미납액이 289억6511만7840원이다. 일부 언론에선 내가 납부 능력이 있으면서도 고의로 미납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나는 비자금 사건이 발생하자 보유 중이던 현금과 비자금을 빌려간 기업에 대한 채권 내역을 제출했다. 현금은 원금 1218억1232만7505원과 이자, 채권은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 회장 등 다섯 기업주에게 대여한 원금 1538억7900만여원과 그 이자였다. 원금만 2756억9132만여원이고, 이자를 포함하면 4000억원이 넘었다. 추징금을 완납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검찰은 그러나 1995년 12월 8일 이후 이 재산에 대해서 압류만 해놓고 채권을 회수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노태우 회고록》 어디에도 ‘선경 300억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추정이 가능하다. 노태우 대통령이 책을 집필할 당시에 비자금을 사돈과 측근에게 맡겨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거나, 비자금 얘기를 하면서도 정말 가족들만 아는 일이라서 끝내 비밀로 했거나, 아니면 비자금이 아닌 본인 돈이라서 굳이 기록으로 남길 이유가 없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이 가능성에 대해 모두 의구심을 보인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 돈을 노태우 대통령이 잊어버렸을 가능성은 작다고 보고 있다.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900여억원은 노태우 대통령이 스스로 밝힌 ‘5년 동안 모은 통치자금 5000억원’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런 큰 금액을 잊기란 쉽지도 않고, 메모장에 따르면 노태우 대통령이 돈을 맡겨놓은 곳은 선경뿐 아니라 동생, 6공 최측근 등 여럿이다. 이들 모두가 비자금이 아니라고 입을 맞출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 본인의 돈이었을 확률도 낮다. 노 대통령은 1987년에 대선 공약으로 재임 중 재산 공개를 내세웠고, 1988년 4월에 연희동 자택과 주식·예금 등 5억2000만원을 공개했다. 불과 3년 만에 5억2000만원이 900억원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면 1000페이지가 넘는 회고록을 작성하면서도 가족 관련 얘기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300억원은 대체 무슨 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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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가 6월 12일 서울 종로구 SK본사 앞에서 SK그룹 ‘노태우 비자금’ 조성 과정 실체 규명 촉구 및 입장 요구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메모상에 존재하는 900여억원과 147억원의 기부금은 세간의 관심을 끌 만했다.
최태원 회장 측은 2심 재판을 하면서 ‘김옥숙 메모장’이 공개되자 자금 출처에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형희 SK수펙스추구회 위원장은 “300억원에 대한 세부 내용은 없고 비자금이 들어왔을 것이라고 치부되고 있다. 별도 비자금이 존재하는지는 파악해봐야 할 부분이다”고 밝혔다.
SK 측의 얘기다.
“노소영 관장이 제출한 김옥숙 메모는 그 진위에 대한 근거가 입증되지 않았으나 굉장히 디테일해서 2심 재판부도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옥숙 여사가 ‘맡긴 돈’이라고 명시한 내역에 ‘선경 300억’을 비롯해 ‘이병기 52억’ ‘정해창 30억’ 등 노태우 정부 시절 주요 인사들이 언급됐고, 별채에 5억원, 금고에 10억1000만원을 넣어놓은 것 등 내용이 있습니다. 저희는 노태우 비자금 300억원이 그룹에 유입되어 경영에 쓰인 적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그것을 떠나 메모장에 대한 사실관계 검증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태원 회장 측은 만일 이 돈이 부정한 돈이라면 형사 처벌 대상이 아니냐는 주장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은 2001년 9월에 제정됐기 때문에, 이 사건이 발생한 1991~1992년 사이의 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돈이 ‘불법원인급여’에 해당할 수는 있다는 주장이다.
불법원인급여라면 소송 자체가 不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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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 당시 전경련 회장(사진 가운데)이 1995년 11월 3일, 긴급 재계중진회의를 열었을 때 모습. 사진=조선DB |
함승희 변호사의 말이다.
“불법원인급여는 로마법의 ‘클린핸즈(clean hands) 원칙’에서 나온 겁니다. 로마법은 ‘법정에 들어와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려면 네 손을 깨끗하게 씻고 들어오라’고 합니다. 가령 ‘내가 도박을 했는데 상대방이 돈을 안 준다’는 식으로 불법(不法)을 약속하고 돈(혹은 대가)을 주기로 한 것은 소송으로 청구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민법의 불법원인급여입니다.”
― 노태우 대통령의 900억원이 불법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는 거군요.
“민법 제746조는 불법원인급여에 대해 그 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이 된 선경 300억원은 갑자기 2심 재판 과정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정체불명의 돈이 어디서 흘러나왔는지를 명백히 따져봐야 합니다.”
2심 재판부는 이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에 따르면 ‘최종현이 노태우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은 것이 불법원인급여인지 여부는 1991년경을 기준으로 판단함이 타당하다’고 돼 있다. ‘1991년경 기준’이 어떤 것인지, 불법원인급여인지 아닌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기업 소송을 주로 담당하는 한 변호사는 “2심 판단대로라면 노소영 관장 측이 부친으로부터 불법 비자금을 증여세 없이 받은 다음에 대규모 재산 증식의 원천으로 쓴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민사소송법의 자유심증주의 원칙
2심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300억원에 대해 구체적인 자금 출처 흐름을 추적하거나 주변인 조사 등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최태원 회장 측과 노소영 관장 측의 주장 중에서 어느 쪽의 주장이 더욱 타당한지에 대해 판단, ‘김옥숙 메모’를 비롯해 노 관장 측이 주장하는 SK 재산 형성에 대한 기여 주장이 신빙성이 있어 상당한 기여분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노소영 관장 측은 50억원짜리 어음 6장 중 2장은 SK 측에 ‘100억원을 줄 수 있는지’를 의사 타진하기 위해 이미 건넸고, 현재 4장의 어음만 보유하고 있다. 이형희 SK수펙스추구위원회 위원장은 “어음 부분도 받았다는 것인지, 이후 어디로 갔다는 것인지 (재판부가 인정하려면) 후속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심 재판부가 증거로 채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사소송법(202조)에 따른 자유심증주의 원칙이 있어서다. 민사소송법은 당사자의 사실에 관한 주장이 진실인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하고 심증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 자료를 참작하여 형성되는 자유로운 심증에 의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쉽게 말해 법관의 양심과 재판의 전문성을 신뢰하고, 그에게 자유로운 판단을 맡긴 것이다.
“자금 흐름 조사 했어야”(함승희 변호사)
함승희 변호사의 얘기다.
“SK의 주장이 무조건 맞다는 것도 아니고 최태원 회장 측을 편을 드는 것도 아닙니다. 위자료는 쌍방의 재력 등을 고려해서 판사가 재량에 따라 몇십억원을 판결할 수 있지만 재산 분할은 얘기가 다릅니다. 재산 형성의 기여도를 분명하게 따져봐야 하는 법률의 문제입니다. 판결문에 300억원이 기반이 되어 그룹이 성장했고, 대통령 사돈으로서 유·무형의 기여가 있었다고 하는데 메모만 보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 민사소송에서는 형사소송처럼 타이트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할 의무는 없지 않습니까.
“형사사건 수준은 아니지만 이처럼 중대한 소송에서는 사실 확인을 해야 맞습니다. 당시에 금융실명제가 없었지만 수표를 끊은 통장의 주인은 누군지, 이 돈과 김옥숙 여사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어음 중 일부는 SK 측으로 넘겼다는데 그것은 어찌 됐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300억원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 노소영 관장 측이 300억원을 맡겼다는 주장을 재판부가 받아들였는데요.
“007 가방 1개에 1만원권으로 1억원이 들어가니까 대략 300개 정도 되겠네요. 노태우 대통령의 돈이 SK로 갔다고 하니까, 300개 가방을 언제, 어떻게, 누가 전달했는지는 살펴봤어야 합니다. 만약 노태우 대통령 측이 수표로 끊어서 전달했더라도 수표 발행계좌, 수표를 수령한 측의 입금 내역 등 자금 흐름을 파악했어야 합니다.”
― 판사 재량으로 증거를 채택할 수 있잖습니까.
“자유심증은 논리와 경험에 맞아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판사 마음대로 증거로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보통 사람의 사고(思考)에 맞춰 말이 되는 수준인지가 기준입니다. 노태우 대통령 측이 SK에 300억원을 맡겼다면 상식적으로 영수증을 받는 것이 맞습니다. 돈은 노태우 대통령이 맡겼다는데 최종현 회장이 한참 뒤에 ‘나중에 돈을 준다’면서 어음을 끊어줬다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 1993년에 당시 수사팀을 진두지휘하셨을 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YS 정권 초기에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수사했는데 당시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타깃이 아니었기 때문에 샅샅이 조사하지 않았고, 2000억원 정도의 비자금을 찾는 수준에서 중단했습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에 ‘역사바로잡기’로 검찰 드림팀을 구성해 비자금을 철저히 조사했는데 김옥숙 비자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위 기업이니까 봐줬을 것이라는 법원의 판단도 당시 정치 상황으로 볼 때 경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자유심증주의는 판사의 고유 권한이고, 판사가 누구 편을 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 대해 경험 많은 판사가 한쪽 편을 들어 증거를 취사 선택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김옥숙 메모장에 등장하는 이병기 전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은 8월 10일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메모와 관련해서 아는 사실이 전혀 없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은 은행에 예치됐던 것으로 밝혀진 바 있고, 그게 내가 아는 전부”라고 말했다.

손길승 명예회장이 기억하는 당시 상황
100억원, 200억원도 아니고 왜 하필 300억원이었을까. 손길승 SK 명예회장은 《월간조선》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92년 초부터 전경련에서 ‘기업끼리 돈을 내야 한다’고 연락이 옵디다. 당시에는 전경련이 회사 그레이드에 따라서 대충 얼마, 얼마를 정했거든. 내가 조사를 해보니까 우리는 한 300억원 정도는 줘야겠더라고요. 제가 최종현 회장에게 보고하니까 ‘야. 사돈인데 어떻게 주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사돈하고 다른 겁니다. 통치자금이니까요’라고 했더니 최 회장이 ‘30억원 들고 가볼 테니 줘봐. 받나 안 받나 보자’고 하더라고요.”
― 노태우 전 대통령이 30억원을 받았다는 얘기를 최종현 회장께 직접 들으셨나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처음에는 ‘사돈끼리 왜 이러시느냐’면서 극구 받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30억원짜리 수표를 그냥 응접실에 두고 왔다더군요. 결국 그 돈이 되돌아오지 않으니, 최종현 회장이 ‘그 돈을 받네’라며 혀를 쯧쯧 차던 생각이 납니다. 그 후에 얼마간 연락이 없다가 집권 후반기쯤 되면서 청와대에서 비자금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300억원은 어떻게 됐느냐’ 연락이 왔습니다. 이 분(노태우 대통령)이 주변머리가 별로 없어서 전두환 대통령하고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연희동 집이 좁다’기에 그러면 ‘성북동에 지어 드리면 되겠느냐’고 구체적인 얘기가 오갔습니다. 그럼 집은 해결되는데 생활비가 문제 될 것 같다고 하면서 그쪽에서 ‘한 2억~3억원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걸 만들어 줄 준비를 했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끝냈는데 이후에도 이원조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이 자꾸 얘기를 하면서 대체 언제 줄 거냐고 하기에 ‘준다면 주는 거지, 무슨 걱정이냐. 사돈 사이에. 우리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습니다.”
― 이원조 의원은 TK 출신으로 5, 6공 때 금융계 황제로 불렸던 사람 아닙니까. 이원조 의원과 잘 알고 지냈습니까.
“이원조씨하고 막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이원조씨도 골치 아픈 거는 나한테 부탁하고 그랬거든. 그런데 자꾸 약속하라는 식으로 얘기하니까, 애초 전경련에서 생각한 우리 몫은 300억원 정도니까 그걸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최종현 회장이 어음으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어느 회사로 할까 했더니 선경건설 것으로 하래요. ‘건설이 그걸 감당할 능력이 없다’니까 최종현 회장이 ‘100% 내 회사니까 사고가 나도 내가 손해를 감당하는 거고, 다른 데는 시끄러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건설에 지시했고 장부에는 기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흔적 남기지 마라. 이거는 절대 교환 안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지 않나요. 워낙 예전 일이고.
“노태우 대통령 사저를 지어 드리려고 땅을 산 증거도 있거든. 이런 생생한 이야기가 있는데 논리적으로 내 얘기를 좀 들어달라는 겁니다. SK는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SK가 상처를 입으면 내가 상처를 입는 거라고요. SK는 전문 경영인들의 운동장인데, 전문 경영인들이 열심히 일궈온, 그렇게 평판 좋은 회사를 이렇게 망가뜨리면 우리는 뭐가 되냐 이겁니다.”
“불법 자산은 추징하는 것이 맞다”(김복형 헌법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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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5년 11월 1일, 검찰의 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조선DB |
이렇게 되자 ‘노태우 900억원’에 주목하는 정치권에서는 법을 고쳐서라도 처벌하겠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장경태(張京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9월 2일에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해당 개정안은 헌정 질서 파괴 범죄자의 범죄 수익에 대해서 당사자 사망 등으로 공소제기가 어려운 경우에도 몰수·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장 의원은 “불법적으로 축적한 범죄 수익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철저하게 추징돼야 한다. 이번 개정안이 5공, 6공 불법 자금을 단 한 푼도 남김없이 끝까지 추적하고 추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환(金永煥) 민주당 의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불법 정치자금에 대해 과세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탈세 제보서’를 8월 28일에 국세청에 제출했다. 국민의힘 송석준(宋錫俊) 의원은 심우정(沈雨廷)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검찰총장이 되면 이런 문제(비자금)에 대해 국민의 의혹을 해소할 생각이 있느냐. 역대 대통령 누구도 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강민수 국세청장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시효가 남아 있고 확인만 된다면 당연히 탈세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복형(金福馨) 헌법재판관은 지난 9월 1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 때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불법 자산이 확인된다면 국가가 귀속하거나 추징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피고인으로부터 추징할 수 있는 자산은 추징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월 12일 김복형 헌법재판관 임명안을 재가했다.
재벌가의 장남과 대통령 딸의 결혼은 결국 비극적인 스토리로 막이 내려졌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의 이혼 스토리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니라 숱한 사회적인 이슈를 갖고 있다. 특히 소송의 초점이 30년 만에 밖으로 나온 불법 비자금 여부에 쏠리면서, 이 문제는 법적 다툼이 불가피해졌다. 대법원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내놓을 것인가.⊙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란… 1995년 중순부터 정치권에서는 전직 대통령 한 사람의 ‘4000억원설’ ‘차명계좌 보유설’ 등이 나돌았다. 1995년 10월 1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우일양행 명의로 128억2700여만원을 예치한 예금 조회표를 공개하면서 점점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5년 동안 약 5000억원의 통치자금이 조성됐다. 주로 기업인들로부터 성금으로 받아 조성된 이 자금은 저희 책임 아래 대부분 정당 운영비 등 정치 활동에 사용됐다. (중략) 국민 여러분께서 내리는 어떤 심판도 달게 받겠다.〉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 후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고, 한달여 후인 12월 5일에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신한은행 등 아홉 개의 금융기관에 개설된 37개 계좌 등에 4500억~4600억원대의 비자금을 맡긴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11월 1일,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출두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수사와 기소를 거쳐 1997년에 2628억원 추징이 확정됐고, 2013년에 이를 완납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2011년 회고록에서도 “비자금 사건이 발생하자 보유 중이던 현금과 비자금을 빌려간 기업에 대한 채권 내역을 제출했다”고 강조했다고 했고, 추징금을 납부하는 과정에서 2009년 동생 노재우씨와 조카 노호준씨를 상대로 비자금으로 설립한 회사를 내놓으라며 소송까지 벌인 바 있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2013년에 추징금 완납으로 종결됐는데, 이번에 딸인 노소영 관장 이혼 소송에서 재등장함에 따라 논란이 노태우 대통령 사후(死後)에도 지속될 조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