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격조종사 한 명의 이름도 대지 못한 5·18 진상규명위 조사보고서 분석. 문재인 정권 시절 국방부 특조위의 ‘양민 학살’ 결론은 전두환 회고록 재판과 진상규명위 조사를 거치면서 부인되었다. 이제 국군을 나치 군대처럼 만든 문재인, 송영무, 특조위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취소해야 한다.
⊙ 5·18 진상규명위도 사람을 겨냥한 기총소사가 아닌 위협사격 수준의 ‘헬기 사격’만 인정, 이마저도 조종사들 전원이 부인
⊙ 국방부 특조위의 구성과 조사 과정에 근원적 의문점 있어
⊙ 무장헬기 출동이 있었고 사격 명령이 있었으니 사격이 있었을 것이란 난폭한 논리
⊙ 사격 명령 받은 조종사들이 인명 피해를 우려, 이를 거부했는데도 ‘사격했다’고 몰아 진짜 ‘광주의 義人들’을 학살범으로 만들었다
⊙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국군 명예회복에 나서고 안보 단체가 앞장서야
⊙ 역사 조작의 가장 큰 피해자는 광주시민들이 될 것
⊙ 5·18 진상규명위도 사람을 겨냥한 기총소사가 아닌 위협사격 수준의 ‘헬기 사격’만 인정, 이마저도 조종사들 전원이 부인
⊙ 국방부 특조위의 구성과 조사 과정에 근원적 의문점 있어
⊙ 무장헬기 출동이 있었고 사격 명령이 있었으니 사격이 있었을 것이란 난폭한 논리
⊙ 사격 명령 받은 조종사들이 인명 피해를 우려, 이를 거부했는데도 ‘사격했다’고 몰아 진짜 ‘광주의 義人들’을 학살범으로 만들었다
⊙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국군 명예회복에 나서고 안보 단체가 앞장서야
⊙ 역사 조작의 가장 큰 피해자는 광주시민들이 될 것
- 5·18 진상규명위 조사보고서. 코브라 헬기 사격 모습.
광주(光州) 헬기 기총소사설(機銃掃射說)은 1980년 5월로부터 9년이 흘러 처음으로 제기되었다가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수사에 의하여 사실무근으로 정리되었는데 이로부터 22년이 흘러 2017년에 다시 논란이 되었다. 문재인(文在寅) 정권이 들어서자 기존의 국가 판단을 180도로 뒤집고 국방부가 ‘헬기 사격에 의한 양민 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시기에 벌어진 전두환(全斗煥) 회고록 재판에선 사람을 향한 헬기 기총소사가 아니라 그냥 ‘헬기 사격’으로 쟁점이 축소되어 인명(人命) 사상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사격 자체는 있었다’로 판단되어 피고인에게 유죄(有罪)가 선고되었다. 최근 5·18 진상규명위원회도 사상자에 대한 증거는 제시하지 않고 ‘헬기 사격은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광주 헬기 사격’은 국가 권력의 변천에 의하여 만들어진 ‘역사 왜곡’인가, 아니면 ‘진실 발굴’인가가 이 기사의 쟁점이다.
문재인과 기총소사설
2017년 1월 12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37년 만에 공식화했다”고 뉴시스가 보도했다. 광주시에 따르면 국과수는 전일빌딩 안팎에서 발견한 185개 총탄 흔적에 대한 법의학 감정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보고서에는 전일빌딩 외벽에서 35개, 10층 옛 전일방송 내부에서 150여 개의 총탄 흔적을 발견했으며 “헬기가 호버링(hovering·정지) 상태에서 고도만 상하로 변화하면서 사격한 상황이 유력하게 추정된다”는 내용이 실렸다고 전했다. 이 감정 결과에 따라 광주시는 전일빌딩이 갖는 역사·상징성을 고려해 전일빌딩 내에 추념 공간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뉴시스는, 5·18기념재단과 5월 단체도 이번 감정 결과를 토대로 전일빌딩 원형 보존과 5·18 헬기 사격 진실규명에 앞장설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 예비 후보는 2017년 3월 20일 윤장현 광주시장과 함께 전일빌딩 10층을 방문했다. 당시 언론은 문 후보가 ‘헬기 총탄 자국 현장’을 살핀 후 옛 전남도청 보존대책위 농성장을 찾았다고 보도했다. ‘헬기 사격’을 기정사실로 전제한 기사문이었다. 언론은 ‘5월 어머니들’이 “전날 KBS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문 후보가 군 복무 중 전두환 공수여단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은 사실을 공개한 데 대하여 항의했다”고 전했다. 문 후보는 이들에게 “(대통령이 되면) 5·18 광주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고 5·18을 폄훼하는 발언에 대해서도 엄벌하겠다. 전일빌딩 기총소사 부분도 규명하여 발포 명령자를 밝혀내겠다. 노여움을 풀어달라”고 말했다. 그해 8월 23일 문재인 대통령은 송영무 국방장관에게 ‘공군 전투기 부대의 광주를 향한 출격 대기 명령 관련 언론 보도와 전일빌딩 헬기 기총소사 사건에 대하여 특별조사’를 지시했다.
‘집단 살해 내지 양민 학살’
2017년 9월 출범한 5·18 특조위는 5개월의 활동 기간을 거쳐 2018년 2월 ‘5·18 기간 동안 광주 지역에서 공지협동 작전의 일환으로 헬기 사격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계엄군은 5.21. 헬기를 이용하여 일반 시민에게 위협사격을 하였고, 무장을 하지 아니하고 시위를 하는 시민들에 대하여 직접 사격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5.21. 헬기 사격은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것으로서 계엄군 진압 작전의 야만성과 잔학성 그리고 범죄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또한 시민들과 물리적 충돌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실시되었던 지상군의 사격과 달리 헬기 사격은 사전 계획적·공세적 성격을 띠고 있다. (중략) 대량 살상 능력을 갖춘 무장헬기까지 동원하여 사격을 하고 시민을 살상하는 행위는 집단 살해 내지 양민 학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보고서의 신뢰성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언론은 《월간조선》(2018년 10월호, 조갑제·이지영)뿐이다. 특조위 결론은 양민 학살인데 학살범, 즉 조종사들은 한 사람도 특정되지 않았고 학살을 초래한 기총소사가 어디서 언제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는 괴이한 보고서였다. 조사에 응한 조종사들은 무장 상태로 비행했고, 사격 명령을 몇 차례 받았지만 인명 피해가 우려된다고 판단, 사격을 거부했다고 증언했다. 특조위는 조종사의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무장헬기가 투입되었고 사격 명령도 있었으니 사격은 있었을 것이란 난폭한 논리(억지)를 적용, 국군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연상시키는 반(反)인류 범죄 집단으로 몰았다. 물론 사격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밝혀내지 못한 환상적(幻想的) 보고서였다. 국방부 장관은 이 보고서에 대한 재조사를 명령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 국민들에게 사과, 국가적 판단으로 공인했다.
재판에서 ‘기총소사’가 ‘헬기 사격’으로 변질
광주 헬기 기총소사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제대로 된 공방은 법정에서 이뤄졌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7년 회고록을 내면서 기총소사를 주장한 조비오 신부를 비방했다고 하여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재판이었다. 2020년 11월 30일 광주지방법원은 2년 5개월을 끈 재판 끝에 전두환 피고인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문에서 쟁점은 ‘헬기 기총소사’가 아니라 ‘헬기 사격’으로 축소된다. 사건의 핵심은 통상적으로 광주시민들을 겨냥한 사격, 즉 기총소사로 여겨졌는데 재판부는 인명 살상에 대한 규명 노력을 배제하고 위협사격 성격을 포함한 ‘헬기 사격’ 자체가 있었는가만 따졌다.(물론 전두환 측과 조종사들은 위협사격도 부인했다.)
재판부는 판결문 서두에 사건의 쟁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이 사건 회고록 중 쟁점 부분에서는 피해자(조비오-필자 주)의 주장을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기재하였으나, 피해자의 진술은 헬기에 의한 사격에 중점이 있고 피고인(전두환-필자 주)도 헬기에 의한 사격 사실 자체가 없다는 취지로 주장하고 있으며, 이 사건 회고록의 전체 취지도 피고인의 주장과 같으므로, 적시의 대상이 되는 사실은 헬기 기총소사가 아닌 헬기 사격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을 살상하는 헬기 기총소사가 아니라 헬기가 사격을 한 사실만 확인되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는 식이다. 앞서 있었던 국방부 특조위의 ‘집단 학살을 야기한 헬기 사격’은 재판에서 사라졌다. 문제가 된 회고록 내용(재판의 쟁점 부분)은 이러했다.
〈천주교의 조○오 신부도 명백히 광주 불로천변을 향해 헬기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기총소사하는 장면을 자신의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헬리콥터의 기체 성능이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이거나 아니면 계엄군의 진압 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 뿐이다.… 조○오 신부님은 90. 2. 23. 방영된 MBC의 다큐멘터리 ‘어머니의 노래’에서 인터뷰를 통해 ‘1미터 정도의 불꽃을 내뿜으면서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3번이나 지축을 뒤흔드는 기총소사를 직접 목격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지축이 흔들리는 정도의 사격 소리가 날려면 500엠디의 기관총 소리보다는 코브라의 발칸포여야 하는데 당시에는 코브라가 광주에 없었으며… 한 명의 부상자도 직접 증언이 없었(고)… 헬리콥터의 기총소사에 의한 총격으로 부상한 사람들을 목격했다는 진술도 헬리콥터가 장착한 화기의 성능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임이 방○○ 항공단장의 진술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조○오 신부는 자신의 허위 주장을 번복하지 아니하였다. 조○오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
이게 판사가 쓴 글이 맞나?
기소 대상이 된 회고록엔 통상적으로 사람을 향한 사격으로 해석되는 ‘기총소사’란 표현이 있는데 이를 단순히 ‘헬기 사격’으로 축소하면 검찰은 총 맞은 사람들을 찾아낼 의무를 피하게 된다. 유죄 인정이 훨씬 쉽게 되는 것이다.
재판부는 선고문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엄청난 희생이 있었을 것’이라는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의 반론에 대하여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위협사격을 배제한 채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하는 것을 전제로 주장하는 것이어서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며 배척한다. 1995년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검찰 수사 결과도 대부분의 근거가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실제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하였으리라는 전제에 터 잡은 것이므로 위협사격의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다”라면서 이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판단한다. 판사가 갑자기 사건의 쟁점을 ‘인명 살상 사격’이 아니라 ‘위협사격’으로 이동시켜 사안의 성격이 작아진 것이다.
이에 따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죄선고를 받긴 했지만 계엄군이 광주사람들을 헬기 기총소사로 죽인 행위를 했다는 것을 인정한 선고는 아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측 정주교 변호사는 1심 유죄에 대하여 항소이유서를 쓰면서 “원심(原審) 판결은 ‘이것이 판사가 쓴 판결문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편파적이고 자의적 판단을 자유심증주의(自由心證主義)로 포장하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목격자의 거짓과 착오를 철벽 방어했다”고 개탄했다.
정 변호사는 원심 판결이 ‘목격자 진술’만으로 헬기 사격이 증명되었다고 판단했다면서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기 위하여 적용한 이상한 억지들을 예시했다.
*전두환 측: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는 두 사람의 말이 서로 다르다.
→ (1심 재판부 판단) 오히려 두 사람이 말을 맞추어 허위로 진술하지 않았다고 볼 근거.
*전두환 측: 목격자가 매번 진술을 번복하였다.
→ (1심 재판부 판단)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이므로 오히려 신뢰할 수 있는 근거.
*전두환 측: 목격자는 502항공대 헬기를 목격했다고 진술했는데 그 헬기는 사격이 불가능한 가스살포기 탑재.
→ (1심 재판부 판단) 목격자가 본 헬기가 502항공대 헬기라고 단정할 수 없다.
*전두환 측: 목격자는 헬기의 왼편에 있었기 때문에 오른편을 볼 수 없었다.
→ (1심 재판부 판단) 반대편이라고 하여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두환 측: 10만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있던 광주시내 상공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그것을 본 사람이 불과 8명뿐인가.
→ (1심 재판부 판단) 모든 목격자를 전부 조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두환 측: 군인들이 전부 헬기 사격은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 (1심 재판부 판단) 군인들이 부인한다고 하여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두환 측: 사람들이 밀집한 광주시내 여러 곳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하면서 왜 피해자가 한 사람도 없는가.
→ (1심 재판부 판단) 위협사격을 배제한 채 조준사격만을 전제로 한 주장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전두환 측: 광주시내 여러 곳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하면서 왜 헬기 사격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가.
→ (1심 재판부 판단) 현장이 원상태로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
‘쓰레기 분리 처리 식’으로 증언을 왜곡
재판부는 “목격자가 헬기 사격을 봤다고 진술”했기 때문에 “군인들이 부인한다고 하여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세웠는데, 전두환 측 변호인은 그 반대 경우에도 그 논리가 그대로 성립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즉 “원심 판시 논리에 의할 경우 ‘목격자가 사격이 있었다고 진술하더라도 군인들이 사격은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명제도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주교 변호사는, 판사가 군인들의 진술을 “쓰레기 (분리) 재처리하듯 해 유죄의 증거로 사용했다”며 분개했다. 판사는, 군인들 진술이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내용임에도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목격자들의 진술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만 떼어내어 유죄의 증거로 재활용했다는 것이다(항소 이유서 초안).
〈예를 들어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이 육군참모차장 황영시 장군으로부터 무장헬기를 동원하여 시위를 강경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자신은 그 지시를 거부하고 대화를 통해 수습하였다고 한 진술은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진술입니다. 그런데 원심은 김기석의 진술 중 무장헬기를 동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 부분은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원심이 김기석의 진술과 공소사실이 부분적으로 부합한다고 한 판단은 마치 ‘발가락이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항소 이유서는 “한 사람의 진술은 전체적 맥락에서 진술의 취지를 발견해야 마땅한데 이를 무시한 채 진술에 사용한 일부 용어가 유사하다고 하여 공소사실에 부합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악의적 사실 왜곡”이라면서 “헬기 조종사들이 500MD 헬기의 무장 사실을 자인(自認)한 진술이 헬기 기총소사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1심 판단을 강하게 규탄했다. 헬기 조종사들의 진술은 무장한 사실을 ‘자인’하면서 기총소사는 강경하게 ‘부인’하는 내용이었다. 기총소사에 대한 ‘적극적 항변’을 기총소사를 입증하는 것으로 조작했다는 뜻이다. 1심 재판부가 ‘쓰레기 재처리하듯’ 선별적으로 유죄의 증거로 사용한 헬기 조종사들의 진술은 그 취지가 ‘사격 부인’이었던 것이다.
전두환 측은 “비겁하게도 권세에 눌려 거짓을 추종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로 인하여 원심은 그 지방의 민심에 영합한 판결을 선고함으로써 개인적 화(禍)를 면하게 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이 나라는 역사 왜곡이라는 큰 화를 입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진상규명위도 ‘기총소사·양민 학살 증거’ 찾지 못해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하여 2019년 12월 27일부터 2023년 12월 26일까지 실시된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송선태)의 종합보고서가 지난 6월 24일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되었다. 13개 조사 항목 중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의한 헬기 사격 사건’에 대해서는 보고서 채택 여부를 둘러싸고 위원들의 표결이 있었는데 찬성 6, 반대 3으로 진상규명이 이뤄졌다고 결정했다. 이 보고서의 헬기 사격 부분을 읽어보면 여기서도 전두환 회고록 재판의 맥락을 이어받아 헬기 기총소사가 아닌 헬기 사격을 전제로 조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두환 재판과 진상규명위 활동이 국방부 특조위의 주장을 강화하기는커녕 사실상 양민 학살의 존재를 부인하는 결과가 되었으니 특조위만 외롭게 되어 국군을 학살 집단으로 몬 ‘역사 조작’의 책임자로 몰리게 된 셈이다.
국방부 특조위가 집단 살해, 양민 학살이었다고 발표한 ‘헬기 기총소사’는 재판 과정에서 그냥 ‘헬기 사격’으로 축소되고 이번 진상규명위 조사 결과는 이렇다 할 새로운 증거의 발견 없이, 즉 사망자·부상자·쏜 조종사를 한 명도 확인하지 못하고 개연성과 가능성 수준에서 몇 군데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식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세 차례 국가적 조사와 재판 결과를 요약한다면 1980년 5월에 광주에서는 시민들을 죽이기 위한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것이 2017년 전일빌딩 탄흔 논란으로 시작된 8년에 걸친 세 군데 조사의 유일한 성과일지 모르겠다.
진상규명위의 보고서 중 결론 부분을 요약하면 이렇다.
〈위원회의 조사 과정에서 출동한 모든 기종의 헬기에서 사격 가능성이 발견되었다. 위원회 조사에서 조종사, 무장사, 정비사 중 일부는 최초 본대에서 출동할 당시 무장을 하고 광주로 들어왔다는 진술을 하였다. 위원회는 출동하는 조종사들에게 “코브라는 20mm 발칸을, 500MD는 7.62mm 기관총을 운용하라”는 지침을 주었고, 동시에 광주 상황의 심각성을 주지시킨 것으로 보았을 때 현지의 상황에 따라 사격도 충분히 전제해두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위원회는 광주로 투입된 이후 비행 임무를 수행할 때 무장 수준 또한 사격 가능한 상태였다는 것을, 조종사, 무장사, 정비사, 그리고 승무원에 대한 대인조사에서 확인한 바 있다. 비행 중인 조종사들에게 전달된 사격 관련 지시 등은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헬기들의 무장 수준이 바로 사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원회에서는 비행 임무 중인 조종사들에게 사격 지시와 명령이 여러 번 있었다는 사실을 대인조사를 통해서 확인하였다. 헬기 사격이 있었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로서 조선대학교 절토지였던 장소에서 발견된 20mm 연습탄 탄두를 들 수 있다.
전일빌딩 10층 탄흔은 국가기관의 선행조사에 헬기 사격과 관련된 중요한 증거로 채택되었다. 위원회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계엄군이 도청 일대에 본격적인 작전을 개시하기 이전에 육군항공의 헬기들이 임무에 투입된 몇몇 정황들 또한 확인이 된다.
이상과 같은 증거들을 토대로 조사 결과들을 종합해서 보면, 5·18 민주화운동 기간 광주에 출동한 모든 기종의 헬기에 사격을 지시하는 명령이 존재했으며, 그 명령은 살상을 포함한 위협사격 수준 이상의 지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광주에 출동한 3개 기종 모두에서 헬기 사격이 실행되었거나 사격의 개연성이 충분히 있음을 조사 과정에서 확인하였다.〉
부존재의 증명은 불가능하다
“무장한 상태로 헬기가 투입되었다, 사격 명령이 있었다, 그러니 사격이 있었을 개연성이 있다”는 주관적 추리로 끝난다. 사격했다는 조종사는 ‘이 사람’이라고 단 한 명의 이름도 대지 못하고 그런 허점을 덮기 위하여 이미 알려진 지엽적인 사실들을 질서 없이 나열한 보고서가 아닐 수 없다.
이 보고서를 읽어본 전두환 회고록 재판의 변호인 정주교 변호사는 아래의 글을 적어 보냈다. 그는 아마도 이 사안에 대하여 가장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 사람일 것이다. 정 변호사는 먼저 진상규명위의 보고서를 관통하는 논리의 오류를 지적한다.
〈헬기 사격 문제는 5·18 단체가 사실에 대한 ‘존재’를 주장하고 있고, 조종사들이 부존재(不存在)를 주장하는 구도이다. 그런데 부존재에 대한 증명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존재 사실을 주장하는 측이 입증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상규명위는 5·18 단체가 존재 사실의 논거로 제시한 주장을 쟁점으로 삼아야 타당하다. 그런데 진상규명위는 반대로 조종사들의 부존재 주장에 대한 논거를 쟁점으로 선정함으로써 처음부터 논리적 오류를 범하였다. 즉 조종사들은 헬기 사격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가지 논거를 제시하였는데 진상규명위는 조종사들이 주장한 그와 같은 논거를 쟁점으로 삼고 그것에 대한 반박을 진상규명의 방법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부존재에 대한 논거가 반박되었다고 하여 그것만으로 존재가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진상규명위는 5·18 단체와 조종사들을 동등한 대립 당사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각각 다른 시점에, 서로 다른 상황에서 각각의 상황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단편적 반론의 논거를 지시한 것이므로 그와 같은 단편적 주장을 5·18 단체의 주장에 대한 종합적이고 논리적인 반박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진상규명위는 전두환 회고록 사건의 법정에서 다루어진 검사와 변호인 측의 논리를 쟁점으로 삼는 것이 더 공평하다고 할 것이다.〉
새로운 사실 없이 해석만 달리해
정 변호사는 진상규명위가 발굴한 새로운 사실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보고서의 ‘5·18 민주화운동 기간 항공작전 운영과 무장 출동’ 부분 기술은 대부분 1995년 검찰수사 기록에서 밝혀진 사실이고 문재인 정권 당시 이루어진 국방부 특조위 보고서의 기초 사실과도 거의 같다. 이 부분은 형사판결문에 대비해 보면 ‘인정 사실’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것이 과거 조사 내용과 같다면 결국 이번 진상규명위에서 헬기 사격과 관련하여 새로 밝혀낸 사실은 더 없다는 이야기다. 결국 동일한 사실을 놓고 해석만 다르게 하겠다는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 당시 특조위는 조사실무를 담당하는 조사단과 위원들로 구성된 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사단은 대부분 현역 군인, 경찰 등 공무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위원들은 전원 민간인들이었다. 조사단은 상근하면서 기초 사실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면 비상임 위원들이 한 달에 한두 번 회의에 참석하여 조사 결과를 가지고 재판(?)을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내가 전두환 회고록 재판을 할 당시 조사단의 간부라고 하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그 요지는 조사팀의 조사 결과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내부 결론을 내렸는데, 위원회가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의결했다는 것이었다. 이번 5·18 진상규명위 역시 헬기 사격에 관한 객관적 증거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채 95년 검찰 조사를 근거로 괴이한 논리를 적용하여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냈다.〉
‘헬기 사격 없었다’는 진술을 짜깁기로 왜곡
정 변호사는 “헬기가 무장했고 사격 명령이 내려갔으니 사격이 있었을 것”이란 위험천만한 공상적 추리는 이번에도 반복되었다고 했다.
〈군인들이 광주에 갈 때 총을 들고 갔으니 사격을 하였을 수도 있다는 지극히 초보적인 논리이다. 이 부분 역시 국방부 특조위 논리와 똑같다. ‘헬기 사격 지시 및 명령’과 관련된 기초 사실은 모두 1995년 검찰 수사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그런데 특조위는 추론에 추론을 거듭하여 억지로 헬기 사격과 연결시켰는데 5·18 진상규명위도 이 논리를 그대로 베꼈다. 헬기 사격 명령이 있었다는 말은 과거 청문회와 수사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당시 전교사 지휘관이나 광주에 파견된 헬기 조종사들은 헬기 사격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기 위하여 상부에서 헬기 사격을 하라고 지시했지만 그 지시를 거부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이 원(原)진술자들이 헬기 사격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부분은 빼버리고 헬기 사격의 지시를 받았다는 부분만 부각하여 이 점을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증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7.62mm 및 20mm 탄약 불출 및 소모반납’ 부분은 전두환 회고록 재판 당시 언론에서 매일같이 헬기 사격 관련 추측 보도를 하였다. 당시 공장에서 근로자로 일을 하던 최○○가 직장 동료들과 그 방송을 보던 중에 ‘내가 그 무렵 성남 소재 항공대에서 탄약 담당을 하면서 헬기 무장사들에게 탄약을 지급했는데 나중에 반환을 받아 보니 탄약 몇 개가 비어 있었다’고 말을 하고 동료가 이를 방송사에 제보하여 최○○의 인터뷰가 뉴스에 나왔고, 그러자 광주지검 검사가 최○○를 수사함으로써 그의 진술이 증거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최○○의 진술은 만연한 진술일 뿐만 아니라 그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할 증거가 하나도 없다. 당시 검찰은 전일빌딩 탄흔은 UH-1H에서 M16 소총 사격을 한 탄흔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가 지급하였다는 탄약은 500MD의 7.62mm 탄약이고, 코브라 헬기의 고폭탄은 20mm 탄약이었다. 따라서 최○○의 증언은 전일빌딩 탄흔과 그 종류가 달라 특별히 취급되지 않았다.〉
정 변호사는 특히 2017년 이후의 재조사를 촉발한 전일빌딩 헬기 사격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전일빌딩에 대한 새벽 헬기 사격은 불가능
〈5·18 단체가 주장하는 헬기 사격에 관한 직접적·객관적 증거란 전일빌딩 탄흔이 유일하다. 헬기 사격 목격자들의 증언은 직접 증거이기는 하나 객관적 증거가 아니고, 군 작전 기록은 객관적 증거라고는 하나 직접적 증거가 아니다. 따라서 전일빌딩 탄흔이 유일한 객관적·직접적 증거다.
조비오 신부의 주장은 5월 21일 금남로 상공의 헬기 사격인 반면 5·18 단체가 주장하는 전일빌딩 탄흔은 5월 27일 재진입 작전 당시 발생한 탄흔이란 것이다.
전일빌딩 헬기 사격설은 2017년 초경에 처음 등장한 주장이었다. 5·18 단체는 처음에는 코브라 헬기의 발칸이라고 주장하다가, 500MD라고 주장하였다가, 전일빌딩 탄흔과 7.62mm 탄흔의 차이가 너무나 확연하자 슬그머니 M16 소총이라고 주장하였고, 소총을 헬기와 연결시켜려다 보니 UH-1H 헬기에 탑승한 승무원이 헬기 출입문을 열고 소총 사격을 하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전두환 회고록 재판 중 변호인 측에서 검사에게 전일빌딩 사격을 구체적으로 특정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하자 검찰이 뒤늦게 공소장에서 주장하는 전일빌딩 헬기 사격은 소총 사격이라고 밝힌 것이다.
전일빌딩 헬기 사격에 관해서는 특별한 목격자가 없다. 즉 계엄군이 자정 무렵 작전을 시작하여 새벽 4시 무렵 전일빌딩 점령을 완료하였다. 검사는 계엄군이 4시 무렵 전일빌딩으로 진입할 때 사격하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전일빌딩 헬기 사격에 관해서는 탄흔의 존재만이 유일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전일빌딩 진입을 현장 지휘하였던 당시 중대장이 전두환 회고록 광주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중대장은 전일빌딩에 접근할 당시 전일빌딩 상층부에서 지상을 향한 사격을 받고 상층부를 향하여 응사한 사실이 있다고 했다. 공수부대가 전일빌딩에 진입한 후 10층 내부 수색을 할 당시 10층 방송실 문이 잠겨 있어서 문밖에서 방 안으로 총구를 바닥으로 하여 위협사격을 한 후 진입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방송실 바닥에 난 탄흔은 그때 전일빌딩을 수색하던 계엄군이 문밖에서 방으로 위협사격을 하였을 당시 발생한 탄흔이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전일빌딩 헬기 사격의 쟁점은 국과수 감정인의 감정 결과를 검증하는 것이 실질적인 진실규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UH-1H 실사격 검증을 주장하였고, 당시 재판장이던 장동혁 현 국민의힘 의원도 법정에서 자신도 현장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재판 도중 장동혁 판사가 사직, 김정훈 판사로 교체되었고, 김 판사는 현장검증 신청을 기각하고 1심 판결을 선고하였다.
전일빌딩 탄흔에 대한 헬기 조종사들의 주장은 ① 비행 중인 헬기 안에서 어떤 사격을 하더라도 전일빌딩 방송실 안에서 발견한 밀집한 형태의 탄착이 형성될 수 없다 ② UH-1H의 프로펠러 때문에 헬기 안에서는 소총 사격을 할 수 없다 ③ 전일빌딩 방송실 바닥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탄흔 중 대부분의 탄흔이 창문에 인접한 곳에서 발견되었고, 심지어 창틀에서 10cm 이내의 탄흔도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창틀 때문에 80~90도의 탄도가 나와야 하는데 헬기에서는 그와 같은 탄도를 만들어낼 수 없다 ④ 전일빌딩 천장에서 30여 개의 탄흔이 발견되었고, 그것도 모두 창문에서 1m 이내에 밀집된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상향으로 70~80도 탄도가 나와야 탄흔이 형성될 수 있지만 방송실이 10층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탄도 형성은 불가능하다 ⑤ 전일빌딩에 대한 진입은 4시에 이루어졌고, 그 시간은 심야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조명이나 불빛도 없이 UH-1H가 도심에서 야간 비행을 할 수 없고(그 당시는 야간 비행 장치가 없었고 오로지 육안으로만 비행하였음), 시야가 확보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10층 방송실의 좁은 창문 안으로 150발의 소총 사격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등이었다.
그 때문에 회고록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조종사들은 헬기를 띄워서 한 번만 사격을 해보면 전일빌딩 탄흔이 얼마나 거짓인지 금방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끝내 헬기 실사격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주교 변호사는 이렇게 끝냈다.
〈헬기 사격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주장하여야 한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느 장소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종의 헬기에서 어떤 종류의 사격을 하였다고 주장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것에 대하여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와 같은 구체적 사실은 밝히지 아니한 채 여러 가지 의심할 정황을 근거로 막연히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결정한다는 것은 반론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부당한 주장인 것이다. 결국 5·18 진상규명위 역시 헬기 사격에 관한 객관적, 직접적 증거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고, 1995년 검찰 수사에서 밝혀진 사실 이외에 새로운 사실도 밝혀낸 것이 없다.〉
왜 헬기 사격 주장자들이 특조위 조사관이 되었나?
2020년 9월 21일 전두환 회고록 재판정에서 있었던 최해필씨의 증언은 문서상의 논란과 다른 박진감이 있다. 그가 조종사 출신의 육군 항공작전 사령관 출신이고 국방부 특조위 위원으로서 유일하게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다는 소수의견을 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변호인) 국방부 특조위 민간인 조사관의 이력이 백서에 나와 있는데 거기를 보면 안길정, 송선태, 정문영, 최용주 이상 4명의 위원은 이 사건 헬기 사격설을 주장하고 있는 5·18기념재단의 전·현직 연구원 또는 상임이사이고, 나머지 김희송 교수와 김정한 교수는 평소 개인적 논문을 통하여 헬기 사격설을 주장하여 오던 사람인데, 증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답 안종철 박사는 5·18 기록을 유네스코에 등재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김희송 교수 등은 광주에서 KTX를 타고 오가고 한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 그분들이 평소에 헬기 사격설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몰랐나요.
답 그런 내용의 깊이는 몰랐습니다.
문 평소에 헬기 사격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조사를 하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이는데, 왜 현역 군인과 현역 공무원으로 구성된 실무조사단에 굳이 민간인, 그것도 헬기 사격설을 평소에 주장하는 사람을 6명이나 위촉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저는 그 이유는 잘 모르고 제가 들어갔을 때 공군 준장 출신 한 사람과 저만 공군과 육군 대표로 국방부에서 위촉되었고, 제가 나머지 사람들의 면면을 자세히 알 수 없고 그냥 느낌에 특정 사안을 조사한다면 거기에 관련이 없는 객관적인 사람들로 구성하는 것이 나중에라도 객관성을 입증하는 데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이런 생각은 했습니다.
문 특조위의 궁극적 임무는 지시나 명령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지시나 명령이 시행되어 실제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여부를 밝히는 것이지요.
답 그렇습니다.
문 지시나 명령은 실제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는 있지만, 명령 자체가 사격은 아니지요.
답 실제로 계엄 지휘부의 황○○, 김○○ 이러한 장군들이 위력시위만 할 것이 아니라, 사격을 해서라도 시위진압을 빨리 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때 출동했던 이 중령, 김 중령, 차 소령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우리가 구두 명령으로는 움직일 수가 없다, 꼭 그렇다면 서류로 된 명령을 달라고까지 하면서 사격 지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거부했다는 진술을 받았고요.
문 특조위는 그 지시와 명령에 따라서 실제로 헬기 사격으로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조사하였나요.
답 조종사들에게서 진술을 다 받았습니다.
문 그러면 그 지시나 명령에 따라서 헬기 사격을 했다고 나왔나요, 안 했다고 나왔나요.
답 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사격 명령을 거부한 조종사들
문 증인이 (헬기 기총소사설에) 동의하지 못한 이유는, 헬기 사격 명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사격을 실시할 수 없다고 진술한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지요.
답 500MD나 코브라의 사격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에 대해서 조종사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을 향해서 쏘라는 총을 우리 국민을 향해서 쏘라고 지시한 사람들의 지시를, 속으로 아마 저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으로 못 하겠다고 말은 못 하고 서면으로 된 명령을 달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면으로 된 명령을 주면 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격하라는 지시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문서로 달라, 당신이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냐는 뜻으로, 거부하는 뜻으로 문서로 된 명령을 요구한 것이지, 문서로 된 명령을 주면 쏘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문 특조위는 세 번째 결론으로 “무장헬기가 광주에 출동하였다고 시인한 항공부대 관계자의 진술이 존재한다”라고 판단하였는데, 무장헬기가 출동했다는 것은 1995년 서울지검에서 조사할 당시부터 대부분의 헬기 조종사들이 무장 출동 사실을 다 시인하였지요.
답 예, 그렇습니다.
문 특조위 조사에서 새롭게 발견된 사실이 아니지요.
답 예,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닙니다.
문 특조위에서는 무장헬기가 광주에 출동하였다고 항공부대 관계자 5명이 시인했다고 하였는데, 이 항공부대 관계자 5명이 무기로 사격했다는 사실도 진술했나요.
답 아닙니다. 사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무장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문 항공부대 관계자 5명이 무장 사실은 인정했지만 헬기 사격을 했다고 진술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답 그렇습니다.
“조종사 100명 중에 왜 한 사람도 없나”
문 특조위는 마지막 여섯 번째 결론으로 “특별조사위원회는 조사 결과 AH-1J 코브라에 의한 헬기 사격 가능성도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라고 밝혔는데, 헬기 사격 조사팀이 서면조사, 면담조사, 현장조사, 국민제보를 받아서 코브라 헬기가 사격했다는 어떤 증거를 발견했나요.
답 없습니다.
문 증인은 실제로 헬기 사격이 실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요.
답 예.
문 증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답 제가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목격자들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헬기가 도시 상공으로 낮게 비행을 하면 로터가 다운롯이라고 해서 하강풍과 반사 바람을 맞아서 우리가 호각을 불 때 바람만 불어도 소리가 나는 것처럼 다다다다 하면서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납니다. UH 같은 경우는 거의 총소리처럼 들리고, 충돌방지등인 라이트가 붉은색으로 휙휙 돌아가는데 모터가 원형으로 돌아가서 회전 디스크라고 하고 이것이 두 개가 고속으로 돌아가면 한 개의 원판이 돼서 빛이 반사되어 아주 넓은 지역에 붉은 섬광이 비칩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 일반 목격자 입장에서는 헬기가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고 붉은빛이, 섬광이 막 비치면 총을 쏘는 것으로 생각하기 딱 좋습니다.
자신이 목격한 사실에 대해서 오락가락하며 진술을 하고 있는데 그런 목격자의 헬기 사격을 봤다고 하는 진술을 과연 믿을 수가 있는지, 그리고 만약 실제로 사격을 했다면 한 발씩 정확하게 사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면서 드르륵 하고 쐈을 것인데 그랬다면 사람이 한 발만 맞을 수가 없습니다. 60발 이상 맞을 수밖에 없고, 공중에서 기관총을 쏘면 길바닥에도 탄피가 비처럼 수두룩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분명히 탄피를 주웠을 것이고, 한 발 맞아서 병원으로 후송했다는 말은 있을 수 없고 그 정도의 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헬기에 의해 여학생이 다쳐서 기독병원으로 후송을 했다는 진술은 적절하지 않고, 그다음에 당시 내려온 헬기만 해도 수십 대인데 그렇다면 조종사만 해도 약 100명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무장사, 정비사, 그 많은 사람들 중에, 40년이나 지났는데 그중에 단 1명이라도 무장했다, 사격했다고 진술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그리고 육군항공장교들은 지휘관, 계급에 복종하지 않고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절대 응하지 않습니다.
장군이 뒤에 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안전하지 않은 비행은, 장군이 이쪽으로 가라고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 헬기에 탄 이상 뒤에 누가 있더라도 본인 자신이 지휘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시민을 향해서 총을 쏘면 끔찍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총을 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조종사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부분입니다.
특전사 병력이 UH-1H를 타고 화물실 문에 걸터앉아 M16으로 (전일빌딩을) 쐈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수십 발의 탄알이 밀집되도록 사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건물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M16으로 연속으로 쏘면 가능할까… 특전사 병력이 헬기에 걸터앉아서 M16으로 쐈기 때문에 탄흔 중 일부는 M16 실탄도 있고 M60 실탄일 가능성도 있다는 국과수 발표가 있어요. 그런데 각도 측면에서 보면 건물 상공에서 그렇게 제자리 비행을 하면서 만약 사격한다면 그 건물 안에도 누군가가 위협 세력이 있다는 것인데, 어느 간 큰 조종사가 공중에서 제자리 비행을 하면서 나를 쏘라고 하면서 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쏜 실탄이 어떻게 그렇게 밀집되어 있을 수 있는지, 바닥에 있을 수 있는지, 그래서 제가 유사한 상황에서 한 번 해보자고 했습니다.
특조위를 조사해야!
2017년 이후 광주 헬기 기총소사설은 조사와 재판을 거치면서 ‘양민 학살’로 커졌다가 ‘헬기 사격설’로 격하되고 이마저 사격 조종사가 특정되지 않아 증명되지 않은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2018년 10월호 《월간조선》 기사는 이런 사태를 예측이나 한 듯 이렇게 마무리했다.
〈국방부 5·18 특조위가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을 재판에 비유하자면 살인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한 것과 같다. 특조위 발표대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조종사들은 ‘양민 학살범’이 된다.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려면 완벽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특조위 조사결과보고서에는 완벽한 증거는커녕 비약과 추리만 있다. 어떻게 이런 조사를 근거로 조종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는가? 더 섬뜩한 것은 이런 부실한 조사가 아무런 반론도 없이 국가적 사실로 인정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중대한 사안에 객관적 증거 없이 ‘야만적 사격’이 있었다는 발표를 하는 것을 묵인한다면 이는 국가 기관에 의한 역사 조작을 용인하는 것이 된다. 적어도 국방부 장관은 이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선언,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를 지키고 현대사의 왜곡을 막았어야 했다.
이 조사 결과가 번복되지 않고 ‘국가가 공인한 사실’로 굳어지면 조종사들은 나치 유대인 학살범처럼 취급될 가능성이 있고, 국군과 국가도 전(全) 세계 앞에서 학살 집단으로 취급될 것이고,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갈 수도 있다. 특조위는 이런 끔찍한 연쇄반응을 생각하고 이런 무서운 결론을 내렸는가? 언젠가는 특조위 조사위원들이 조사를 받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국방부 특조위 위원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위원 중 최해필 전 항공작전사령관만이 소수의견을 냈다.
국군통수권자의 책임!
이제 당시 국방부 장관과 특조위를 조사하고 특조위 보고서를 취소해야 할 긴급한 이유가 생겼다.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나치 군대나 일본 제국 군대 같은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국군통수권자인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그리고 국방부 장관이 회의를 하고 자구책을 내어놓아야 한다. 성우회, 재향군인회, 사관학교 동창회, 호국안보 단체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광주사태에 북한군 600명이 개입했다는 황당한 자해적 주장을 했던 세력은 빠져야 한다. 누구보다도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음을 잘 알고 있을 광주시민들이 국군의 명예회복에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사격 명령을 받고도 거부한 조종사들을 ‘광주의 의인(義人)’으로 기려야 할 것이다.
최근 국제적 호평을 받던 방글라데시의 수상이 반정부 시위대에 관저가 포위될 지경이 되자 탈출, 인도로 갔다. 수상의 아버지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었던 건국의 영웅이었다. 수상은 독립투사 가족들에게 공무원 자리를 우선적으로 배정하는 고용특혜를 추진하다가 대학생들의 분노를 자극, 정권을 잃었다.
일부 광주사람들이 피해 보상을 넘어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특권까지 주장한다면 국민적 저항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불공정에 참지 못하는 젊은 세대가 커가고 있다. 국방부 특조위의 ‘헬기 기총소사에 의한 양민 학살’ 결론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볼 이들은 광주사람일 것이다.⊙
문재인과 기총소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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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0일 옛 전남도청 보존을 위해 천막 농성 중인 5·18 관련 단체 회원들과 만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전일빌딩 기총소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약속했다. 사진=조선DB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 예비 후보는 2017년 3월 20일 윤장현 광주시장과 함께 전일빌딩 10층을 방문했다. 당시 언론은 문 후보가 ‘헬기 총탄 자국 현장’을 살핀 후 옛 전남도청 보존대책위 농성장을 찾았다고 보도했다. ‘헬기 사격’을 기정사실로 전제한 기사문이었다. 언론은 ‘5월 어머니들’이 “전날 KBS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문 후보가 군 복무 중 전두환 공수여단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은 사실을 공개한 데 대하여 항의했다”고 전했다. 문 후보는 이들에게 “(대통령이 되면) 5·18 광주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고 5·18을 폄훼하는 발언에 대해서도 엄벌하겠다. 전일빌딩 기총소사 부분도 규명하여 발포 명령자를 밝혀내겠다. 노여움을 풀어달라”고 말했다. 그해 8월 23일 문재인 대통령은 송영무 국방장관에게 ‘공군 전투기 부대의 광주를 향한 출격 대기 명령 관련 언론 보도와 전일빌딩 헬기 기총소사 사건에 대하여 특별조사’를 지시했다.
‘집단 살해 내지 양민 학살’
2017년 9월 출범한 5·18 특조위는 5개월의 활동 기간을 거쳐 2018년 2월 ‘5·18 기간 동안 광주 지역에서 공지협동 작전의 일환으로 헬기 사격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계엄군은 5.21. 헬기를 이용하여 일반 시민에게 위협사격을 하였고, 무장을 하지 아니하고 시위를 하는 시민들에 대하여 직접 사격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5.21. 헬기 사격은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것으로서 계엄군 진압 작전의 야만성과 잔학성 그리고 범죄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또한 시민들과 물리적 충돌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실시되었던 지상군의 사격과 달리 헬기 사격은 사전 계획적·공세적 성격을 띠고 있다. (중략) 대량 살상 능력을 갖춘 무장헬기까지 동원하여 사격을 하고 시민을 살상하는 행위는 집단 살해 내지 양민 학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보고서의 신뢰성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언론은 《월간조선》(2018년 10월호, 조갑제·이지영)뿐이다. 특조위 결론은 양민 학살인데 학살범, 즉 조종사들은 한 사람도 특정되지 않았고 학살을 초래한 기총소사가 어디서 언제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는 괴이한 보고서였다. 조사에 응한 조종사들은 무장 상태로 비행했고, 사격 명령을 몇 차례 받았지만 인명 피해가 우려된다고 판단, 사격을 거부했다고 증언했다. 특조위는 조종사의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무장헬기가 투입되었고 사격 명령도 있었으니 사격은 있었을 것이란 난폭한 논리(억지)를 적용, 국군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연상시키는 반(反)인류 범죄 집단으로 몰았다. 물론 사격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밝혀내지 못한 환상적(幻想的) 보고서였다. 국방부 장관은 이 보고서에 대한 재조사를 명령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 국민들에게 사과, 국가적 판단으로 공인했다.
재판에서 ‘기총소사’가 ‘헬기 사격’으로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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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30일 고(故)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혐의 재판을 받기 위해 광주지방법원에 출두한 전두환 전 대통령. 전 전 대통령은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다. 사진=조선DB |
재판부는 판결문 서두에 사건의 쟁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이 사건 회고록 중 쟁점 부분에서는 피해자(조비오-필자 주)의 주장을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기재하였으나, 피해자의 진술은 헬기에 의한 사격에 중점이 있고 피고인(전두환-필자 주)도 헬기에 의한 사격 사실 자체가 없다는 취지로 주장하고 있으며, 이 사건 회고록의 전체 취지도 피고인의 주장과 같으므로, 적시의 대상이 되는 사실은 헬기 기총소사가 아닌 헬기 사격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을 살상하는 헬기 기총소사가 아니라 헬기가 사격을 한 사실만 확인되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는 식이다. 앞서 있었던 국방부 특조위의 ‘집단 학살을 야기한 헬기 사격’은 재판에서 사라졌다. 문제가 된 회고록 내용(재판의 쟁점 부분)은 이러했다.
〈천주교의 조○오 신부도 명백히 광주 불로천변을 향해 헬기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기총소사하는 장면을 자신의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헬리콥터의 기체 성능이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이거나 아니면 계엄군의 진압 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 뿐이다.… 조○오 신부님은 90. 2. 23. 방영된 MBC의 다큐멘터리 ‘어머니의 노래’에서 인터뷰를 통해 ‘1미터 정도의 불꽃을 내뿜으면서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3번이나 지축을 뒤흔드는 기총소사를 직접 목격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지축이 흔들리는 정도의 사격 소리가 날려면 500엠디의 기관총 소리보다는 코브라의 발칸포여야 하는데 당시에는 코브라가 광주에 없었으며… 한 명의 부상자도 직접 증언이 없었(고)… 헬리콥터의 기총소사에 의한 총격으로 부상한 사람들을 목격했다는 진술도 헬리콥터가 장착한 화기의 성능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임이 방○○ 항공단장의 진술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조○오 신부는 자신의 허위 주장을 번복하지 아니하였다. 조○오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
이게 판사가 쓴 글이 맞나?
기소 대상이 된 회고록엔 통상적으로 사람을 향한 사격으로 해석되는 ‘기총소사’란 표현이 있는데 이를 단순히 ‘헬기 사격’으로 축소하면 검찰은 총 맞은 사람들을 찾아낼 의무를 피하게 된다. 유죄 인정이 훨씬 쉽게 되는 것이다.
재판부는 선고문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엄청난 희생이 있었을 것’이라는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의 반론에 대하여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위협사격을 배제한 채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하는 것을 전제로 주장하는 것이어서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며 배척한다. 1995년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검찰 수사 결과도 대부분의 근거가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실제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하였으리라는 전제에 터 잡은 것이므로 위협사격의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다”라면서 이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판단한다. 판사가 갑자기 사건의 쟁점을 ‘인명 살상 사격’이 아니라 ‘위협사격’으로 이동시켜 사안의 성격이 작아진 것이다.
이에 따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죄선고를 받긴 했지만 계엄군이 광주사람들을 헬기 기총소사로 죽인 행위를 했다는 것을 인정한 선고는 아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측 정주교 변호사는 1심 유죄에 대하여 항소이유서를 쓰면서 “원심(原審) 판결은 ‘이것이 판사가 쓴 판결문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편파적이고 자의적 판단을 자유심증주의(自由心證主義)로 포장하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목격자의 거짓과 착오를 철벽 방어했다”고 개탄했다.
정 변호사는 원심 판결이 ‘목격자 진술’만으로 헬기 사격이 증명되었다고 판단했다면서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기 위하여 적용한 이상한 억지들을 예시했다.
*전두환 측: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는 두 사람의 말이 서로 다르다.
→ (1심 재판부 판단) 오히려 두 사람이 말을 맞추어 허위로 진술하지 않았다고 볼 근거.
*전두환 측: 목격자가 매번 진술을 번복하였다.
→ (1심 재판부 판단)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이므로 오히려 신뢰할 수 있는 근거.
*전두환 측: 목격자는 502항공대 헬기를 목격했다고 진술했는데 그 헬기는 사격이 불가능한 가스살포기 탑재.
→ (1심 재판부 판단) 목격자가 본 헬기가 502항공대 헬기라고 단정할 수 없다.
*전두환 측: 목격자는 헬기의 왼편에 있었기 때문에 오른편을 볼 수 없었다.
→ (1심 재판부 판단) 반대편이라고 하여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두환 측: 10만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있던 광주시내 상공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그것을 본 사람이 불과 8명뿐인가.
→ (1심 재판부 판단) 모든 목격자를 전부 조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두환 측: 군인들이 전부 헬기 사격은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 (1심 재판부 판단) 군인들이 부인한다고 하여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두환 측: 사람들이 밀집한 광주시내 여러 곳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하면서 왜 피해자가 한 사람도 없는가.
→ (1심 재판부 판단) 위협사격을 배제한 채 조준사격만을 전제로 한 주장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전두환 측: 광주시내 여러 곳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하면서 왜 헬기 사격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가.
→ (1심 재판부 판단) 현장이 원상태로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
‘쓰레기 분리 처리 식’으로 증언을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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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교 변호사. 사진=조선DB |
정주교 변호사는, 판사가 군인들의 진술을 “쓰레기 (분리) 재처리하듯 해 유죄의 증거로 사용했다”며 분개했다. 판사는, 군인들 진술이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내용임에도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목격자들의 진술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만 떼어내어 유죄의 증거로 재활용했다는 것이다(항소 이유서 초안).
〈예를 들어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이 육군참모차장 황영시 장군으로부터 무장헬기를 동원하여 시위를 강경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자신은 그 지시를 거부하고 대화를 통해 수습하였다고 한 진술은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진술입니다. 그런데 원심은 김기석의 진술 중 무장헬기를 동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 부분은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원심이 김기석의 진술과 공소사실이 부분적으로 부합한다고 한 판단은 마치 ‘발가락이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항소 이유서는 “한 사람의 진술은 전체적 맥락에서 진술의 취지를 발견해야 마땅한데 이를 무시한 채 진술에 사용한 일부 용어가 유사하다고 하여 공소사실에 부합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악의적 사실 왜곡”이라면서 “헬기 조종사들이 500MD 헬기의 무장 사실을 자인(自認)한 진술이 헬기 기총소사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1심 판단을 강하게 규탄했다. 헬기 조종사들의 진술은 무장한 사실을 ‘자인’하면서 기총소사는 강경하게 ‘부인’하는 내용이었다. 기총소사에 대한 ‘적극적 항변’을 기총소사를 입증하는 것으로 조작했다는 뜻이다. 1심 재판부가 ‘쓰레기 재처리하듯’ 선별적으로 유죄의 증거로 사용한 헬기 조종사들의 진술은 그 취지가 ‘사격 부인’이었던 것이다.
전두환 측은 “비겁하게도 권세에 눌려 거짓을 추종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로 인하여 원심은 그 지방의 민심에 영합한 판결을 선고함으로써 개인적 화(禍)를 면하게 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이 나라는 역사 왜곡이라는 큰 화를 입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진상규명위도 ‘기총소사·양민 학살 증거’ 찾지 못해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하여 2019년 12월 27일부터 2023년 12월 26일까지 실시된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송선태)의 종합보고서가 지난 6월 24일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되었다. 13개 조사 항목 중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에 의한 헬기 사격 사건’에 대해서는 보고서 채택 여부를 둘러싸고 위원들의 표결이 있었는데 찬성 6, 반대 3으로 진상규명이 이뤄졌다고 결정했다. 이 보고서의 헬기 사격 부분을 읽어보면 여기서도 전두환 회고록 재판의 맥락을 이어받아 헬기 기총소사가 아닌 헬기 사격을 전제로 조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두환 재판과 진상규명위 활동이 국방부 특조위의 주장을 강화하기는커녕 사실상 양민 학살의 존재를 부인하는 결과가 되었으니 특조위만 외롭게 되어 국군을 학살 집단으로 몬 ‘역사 조작’의 책임자로 몰리게 된 셈이다.
국방부 특조위가 집단 살해, 양민 학살이었다고 발표한 ‘헬기 기총소사’는 재판 과정에서 그냥 ‘헬기 사격’으로 축소되고 이번 진상규명위 조사 결과는 이렇다 할 새로운 증거의 발견 없이, 즉 사망자·부상자·쏜 조종사를 한 명도 확인하지 못하고 개연성과 가능성 수준에서 몇 군데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식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세 차례 국가적 조사와 재판 결과를 요약한다면 1980년 5월에 광주에서는 시민들을 죽이기 위한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것이 2017년 전일빌딩 탄흔 논란으로 시작된 8년에 걸친 세 군데 조사의 유일한 성과일지 모르겠다.
진상규명위의 보고서 중 결론 부분을 요약하면 이렇다.
〈위원회의 조사 과정에서 출동한 모든 기종의 헬기에서 사격 가능성이 발견되었다. 위원회 조사에서 조종사, 무장사, 정비사 중 일부는 최초 본대에서 출동할 당시 무장을 하고 광주로 들어왔다는 진술을 하였다. 위원회는 출동하는 조종사들에게 “코브라는 20mm 발칸을, 500MD는 7.62mm 기관총을 운용하라”는 지침을 주었고, 동시에 광주 상황의 심각성을 주지시킨 것으로 보았을 때 현지의 상황에 따라 사격도 충분히 전제해두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위원회는 광주로 투입된 이후 비행 임무를 수행할 때 무장 수준 또한 사격 가능한 상태였다는 것을, 조종사, 무장사, 정비사, 그리고 승무원에 대한 대인조사에서 확인한 바 있다. 비행 중인 조종사들에게 전달된 사격 관련 지시 등은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헬기들의 무장 수준이 바로 사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원회에서는 비행 임무 중인 조종사들에게 사격 지시와 명령이 여러 번 있었다는 사실을 대인조사를 통해서 확인하였다. 헬기 사격이 있었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로서 조선대학교 절토지였던 장소에서 발견된 20mm 연습탄 탄두를 들 수 있다.
전일빌딩 10층 탄흔은 국가기관의 선행조사에 헬기 사격과 관련된 중요한 증거로 채택되었다. 위원회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계엄군이 도청 일대에 본격적인 작전을 개시하기 이전에 육군항공의 헬기들이 임무에 투입된 몇몇 정황들 또한 확인이 된다.
이상과 같은 증거들을 토대로 조사 결과들을 종합해서 보면, 5·18 민주화운동 기간 광주에 출동한 모든 기종의 헬기에 사격을 지시하는 명령이 존재했으며, 그 명령은 살상을 포함한 위협사격 수준 이상의 지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광주에 출동한 3개 기종 모두에서 헬기 사격이 실행되었거나 사격의 개연성이 충분히 있음을 조사 과정에서 확인하였다.〉
부존재의 증명은 불가능하다
“무장한 상태로 헬기가 투입되었다, 사격 명령이 있었다, 그러니 사격이 있었을 개연성이 있다”는 주관적 추리로 끝난다. 사격했다는 조종사는 ‘이 사람’이라고 단 한 명의 이름도 대지 못하고 그런 허점을 덮기 위하여 이미 알려진 지엽적인 사실들을 질서 없이 나열한 보고서가 아닐 수 없다.
이 보고서를 읽어본 전두환 회고록 재판의 변호인 정주교 변호사는 아래의 글을 적어 보냈다. 그는 아마도 이 사안에 대하여 가장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 사람일 것이다. 정 변호사는 먼저 진상규명위의 보고서를 관통하는 논리의 오류를 지적한다.
〈헬기 사격 문제는 5·18 단체가 사실에 대한 ‘존재’를 주장하고 있고, 조종사들이 부존재(不存在)를 주장하는 구도이다. 그런데 부존재에 대한 증명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존재 사실을 주장하는 측이 입증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상규명위는 5·18 단체가 존재 사실의 논거로 제시한 주장을 쟁점으로 삼아야 타당하다. 그런데 진상규명위는 반대로 조종사들의 부존재 주장에 대한 논거를 쟁점으로 선정함으로써 처음부터 논리적 오류를 범하였다. 즉 조종사들은 헬기 사격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가지 논거를 제시하였는데 진상규명위는 조종사들이 주장한 그와 같은 논거를 쟁점으로 삼고 그것에 대한 반박을 진상규명의 방법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부존재에 대한 논거가 반박되었다고 하여 그것만으로 존재가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진상규명위는 5·18 단체와 조종사들을 동등한 대립 당사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각각 다른 시점에, 서로 다른 상황에서 각각의 상황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단편적 반론의 논거를 지시한 것이므로 그와 같은 단편적 주장을 5·18 단체의 주장에 대한 종합적이고 논리적인 반박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진상규명위는 전두환 회고록 사건의 법정에서 다루어진 검사와 변호인 측의 논리를 쟁점으로 삼는 것이 더 공평하다고 할 것이다.〉
새로운 사실 없이 해석만 달리해
정 변호사는 진상규명위가 발굴한 새로운 사실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보고서의 ‘5·18 민주화운동 기간 항공작전 운영과 무장 출동’ 부분 기술은 대부분 1995년 검찰수사 기록에서 밝혀진 사실이고 문재인 정권 당시 이루어진 국방부 특조위 보고서의 기초 사실과도 거의 같다. 이 부분은 형사판결문에 대비해 보면 ‘인정 사실’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것이 과거 조사 내용과 같다면 결국 이번 진상규명위에서 헬기 사격과 관련하여 새로 밝혀낸 사실은 더 없다는 이야기다. 결국 동일한 사실을 놓고 해석만 다르게 하겠다는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 당시 특조위는 조사실무를 담당하는 조사단과 위원들로 구성된 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사단은 대부분 현역 군인, 경찰 등 공무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위원들은 전원 민간인들이었다. 조사단은 상근하면서 기초 사실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면 비상임 위원들이 한 달에 한두 번 회의에 참석하여 조사 결과를 가지고 재판(?)을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내가 전두환 회고록 재판을 할 당시 조사단의 간부라고 하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그 요지는 조사팀의 조사 결과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내부 결론을 내렸는데, 위원회가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의결했다는 것이었다. 이번 5·18 진상규명위 역시 헬기 사격에 관한 객관적 증거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채 95년 검찰 조사를 근거로 괴이한 논리를 적용하여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냈다.〉
‘헬기 사격 없었다’는 진술을 짜깁기로 왜곡
정 변호사는 “헬기가 무장했고 사격 명령이 내려갔으니 사격이 있었을 것”이란 위험천만한 공상적 추리는 이번에도 반복되었다고 했다.
〈군인들이 광주에 갈 때 총을 들고 갔으니 사격을 하였을 수도 있다는 지극히 초보적인 논리이다. 이 부분 역시 국방부 특조위 논리와 똑같다. ‘헬기 사격 지시 및 명령’과 관련된 기초 사실은 모두 1995년 검찰 수사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그런데 특조위는 추론에 추론을 거듭하여 억지로 헬기 사격과 연결시켰는데 5·18 진상규명위도 이 논리를 그대로 베꼈다. 헬기 사격 명령이 있었다는 말은 과거 청문회와 수사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당시 전교사 지휘관이나 광주에 파견된 헬기 조종사들은 헬기 사격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기 위하여 상부에서 헬기 사격을 하라고 지시했지만 그 지시를 거부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이 원(原)진술자들이 헬기 사격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부분은 빼버리고 헬기 사격의 지시를 받았다는 부분만 부각하여 이 점을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증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7.62mm 및 20mm 탄약 불출 및 소모반납’ 부분은 전두환 회고록 재판 당시 언론에서 매일같이 헬기 사격 관련 추측 보도를 하였다. 당시 공장에서 근로자로 일을 하던 최○○가 직장 동료들과 그 방송을 보던 중에 ‘내가 그 무렵 성남 소재 항공대에서 탄약 담당을 하면서 헬기 무장사들에게 탄약을 지급했는데 나중에 반환을 받아 보니 탄약 몇 개가 비어 있었다’고 말을 하고 동료가 이를 방송사에 제보하여 최○○의 인터뷰가 뉴스에 나왔고, 그러자 광주지검 검사가 최○○를 수사함으로써 그의 진술이 증거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최○○의 진술은 만연한 진술일 뿐만 아니라 그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할 증거가 하나도 없다. 당시 검찰은 전일빌딩 탄흔은 UH-1H에서 M16 소총 사격을 한 탄흔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가 지급하였다는 탄약은 500MD의 7.62mm 탄약이고, 코브라 헬기의 고폭탄은 20mm 탄약이었다. 따라서 최○○의 증언은 전일빌딩 탄흔과 그 종류가 달라 특별히 취급되지 않았다.〉
정 변호사는 특히 2017년 이후의 재조사를 촉발한 전일빌딩 헬기 사격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전일빌딩에 대한 새벽 헬기 사격은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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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3일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는 광주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에서 총탄 흔적을 둘러보았다. 사진=조선DB |
조비오 신부의 주장은 5월 21일 금남로 상공의 헬기 사격인 반면 5·18 단체가 주장하는 전일빌딩 탄흔은 5월 27일 재진입 작전 당시 발생한 탄흔이란 것이다.
전일빌딩 헬기 사격설은 2017년 초경에 처음 등장한 주장이었다. 5·18 단체는 처음에는 코브라 헬기의 발칸이라고 주장하다가, 500MD라고 주장하였다가, 전일빌딩 탄흔과 7.62mm 탄흔의 차이가 너무나 확연하자 슬그머니 M16 소총이라고 주장하였고, 소총을 헬기와 연결시켜려다 보니 UH-1H 헬기에 탑승한 승무원이 헬기 출입문을 열고 소총 사격을 하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전두환 회고록 재판 중 변호인 측에서 검사에게 전일빌딩 사격을 구체적으로 특정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하자 검찰이 뒤늦게 공소장에서 주장하는 전일빌딩 헬기 사격은 소총 사격이라고 밝힌 것이다.
전일빌딩 헬기 사격에 관해서는 특별한 목격자가 없다. 즉 계엄군이 자정 무렵 작전을 시작하여 새벽 4시 무렵 전일빌딩 점령을 완료하였다. 검사는 계엄군이 4시 무렵 전일빌딩으로 진입할 때 사격하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전일빌딩 헬기 사격에 관해서는 탄흔의 존재만이 유일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전일빌딩 진입을 현장 지휘하였던 당시 중대장이 전두환 회고록 광주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중대장은 전일빌딩에 접근할 당시 전일빌딩 상층부에서 지상을 향한 사격을 받고 상층부를 향하여 응사한 사실이 있다고 했다. 공수부대가 전일빌딩에 진입한 후 10층 내부 수색을 할 당시 10층 방송실 문이 잠겨 있어서 문밖에서 방 안으로 총구를 바닥으로 하여 위협사격을 한 후 진입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방송실 바닥에 난 탄흔은 그때 전일빌딩을 수색하던 계엄군이 문밖에서 방으로 위협사격을 하였을 당시 발생한 탄흔이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전일빌딩 헬기 사격의 쟁점은 국과수 감정인의 감정 결과를 검증하는 것이 실질적인 진실규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UH-1H 실사격 검증을 주장하였고, 당시 재판장이던 장동혁 현 국민의힘 의원도 법정에서 자신도 현장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재판 도중 장동혁 판사가 사직, 김정훈 판사로 교체되었고, 김 판사는 현장검증 신청을 기각하고 1심 판결을 선고하였다.
전일빌딩 탄흔에 대한 헬기 조종사들의 주장은 ① 비행 중인 헬기 안에서 어떤 사격을 하더라도 전일빌딩 방송실 안에서 발견한 밀집한 형태의 탄착이 형성될 수 없다 ② UH-1H의 프로펠러 때문에 헬기 안에서는 소총 사격을 할 수 없다 ③ 전일빌딩 방송실 바닥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탄흔 중 대부분의 탄흔이 창문에 인접한 곳에서 발견되었고, 심지어 창틀에서 10cm 이내의 탄흔도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창틀 때문에 80~90도의 탄도가 나와야 하는데 헬기에서는 그와 같은 탄도를 만들어낼 수 없다 ④ 전일빌딩 천장에서 30여 개의 탄흔이 발견되었고, 그것도 모두 창문에서 1m 이내에 밀집된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상향으로 70~80도 탄도가 나와야 탄흔이 형성될 수 있지만 방송실이 10층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탄도 형성은 불가능하다 ⑤ 전일빌딩에 대한 진입은 4시에 이루어졌고, 그 시간은 심야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조명이나 불빛도 없이 UH-1H가 도심에서 야간 비행을 할 수 없고(그 당시는 야간 비행 장치가 없었고 오로지 육안으로만 비행하였음), 시야가 확보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10층 방송실의 좁은 창문 안으로 150발의 소총 사격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등이었다.
그 때문에 회고록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조종사들은 헬기를 띄워서 한 번만 사격을 해보면 전일빌딩 탄흔이 얼마나 거짓인지 금방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끝내 헬기 실사격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주교 변호사는 이렇게 끝냈다.
〈헬기 사격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주장하여야 한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느 장소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종의 헬기에서 어떤 종류의 사격을 하였다고 주장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것에 대하여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와 같은 구체적 사실은 밝히지 아니한 채 여러 가지 의심할 정황을 근거로 막연히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결정한다는 것은 반론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부당한 주장인 것이다. 결국 5·18 진상규명위 역시 헬기 사격에 관한 객관적, 직접적 증거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고, 1995년 검찰 수사에서 밝혀진 사실 이외에 새로운 사실도 밝혀낸 것이 없다.〉
왜 헬기 사격 주장자들이 특조위 조사관이 되었나?
2020년 9월 21일 전두환 회고록 재판정에서 있었던 최해필씨의 증언은 문서상의 논란과 다른 박진감이 있다. 그가 조종사 출신의 육군 항공작전 사령관 출신이고 국방부 특조위 위원으로서 유일하게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다는 소수의견을 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변호인) 국방부 특조위 민간인 조사관의 이력이 백서에 나와 있는데 거기를 보면 안길정, 송선태, 정문영, 최용주 이상 4명의 위원은 이 사건 헬기 사격설을 주장하고 있는 5·18기념재단의 전·현직 연구원 또는 상임이사이고, 나머지 김희송 교수와 김정한 교수는 평소 개인적 논문을 통하여 헬기 사격설을 주장하여 오던 사람인데, 증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답 안종철 박사는 5·18 기록을 유네스코에 등재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김희송 교수 등은 광주에서 KTX를 타고 오가고 한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 그분들이 평소에 헬기 사격설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몰랐나요.
답 그런 내용의 깊이는 몰랐습니다.
문 평소에 헬기 사격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조사를 하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이는데, 왜 현역 군인과 현역 공무원으로 구성된 실무조사단에 굳이 민간인, 그것도 헬기 사격설을 평소에 주장하는 사람을 6명이나 위촉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저는 그 이유는 잘 모르고 제가 들어갔을 때 공군 준장 출신 한 사람과 저만 공군과 육군 대표로 국방부에서 위촉되었고, 제가 나머지 사람들의 면면을 자세히 알 수 없고 그냥 느낌에 특정 사안을 조사한다면 거기에 관련이 없는 객관적인 사람들로 구성하는 것이 나중에라도 객관성을 입증하는 데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이런 생각은 했습니다.
문 특조위의 궁극적 임무는 지시나 명령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지시나 명령이 시행되어 실제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여부를 밝히는 것이지요.
답 그렇습니다.
문 지시나 명령은 실제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는 있지만, 명령 자체가 사격은 아니지요.
답 실제로 계엄 지휘부의 황○○, 김○○ 이러한 장군들이 위력시위만 할 것이 아니라, 사격을 해서라도 시위진압을 빨리 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때 출동했던 이 중령, 김 중령, 차 소령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우리가 구두 명령으로는 움직일 수가 없다, 꼭 그렇다면 서류로 된 명령을 달라고까지 하면서 사격 지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거부했다는 진술을 받았고요.
문 특조위는 그 지시와 명령에 따라서 실제로 헬기 사격으로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조사하였나요.
답 조종사들에게서 진술을 다 받았습니다.
문 그러면 그 지시나 명령에 따라서 헬기 사격을 했다고 나왔나요, 안 했다고 나왔나요.
답 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사격 명령을 거부한 조종사들
문 증인이 (헬기 기총소사설에) 동의하지 못한 이유는, 헬기 사격 명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사격을 실시할 수 없다고 진술한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지요.
답 500MD나 코브라의 사격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에 대해서 조종사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을 향해서 쏘라는 총을 우리 국민을 향해서 쏘라고 지시한 사람들의 지시를, 속으로 아마 저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으로 못 하겠다고 말은 못 하고 서면으로 된 명령을 달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면으로 된 명령을 주면 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격하라는 지시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문서로 달라, 당신이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냐는 뜻으로, 거부하는 뜻으로 문서로 된 명령을 요구한 것이지, 문서로 된 명령을 주면 쏘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문 특조위는 세 번째 결론으로 “무장헬기가 광주에 출동하였다고 시인한 항공부대 관계자의 진술이 존재한다”라고 판단하였는데, 무장헬기가 출동했다는 것은 1995년 서울지검에서 조사할 당시부터 대부분의 헬기 조종사들이 무장 출동 사실을 다 시인하였지요.
답 예, 그렇습니다.
문 특조위 조사에서 새롭게 발견된 사실이 아니지요.
답 예,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닙니다.
문 특조위에서는 무장헬기가 광주에 출동하였다고 항공부대 관계자 5명이 시인했다고 하였는데, 이 항공부대 관계자 5명이 무기로 사격했다는 사실도 진술했나요.
답 아닙니다. 사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무장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문 항공부대 관계자 5명이 무장 사실은 인정했지만 헬기 사격을 했다고 진술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답 그렇습니다.
“조종사 100명 중에 왜 한 사람도 없나”
문 특조위는 마지막 여섯 번째 결론으로 “특별조사위원회는 조사 결과 AH-1J 코브라에 의한 헬기 사격 가능성도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라고 밝혔는데, 헬기 사격 조사팀이 서면조사, 면담조사, 현장조사, 국민제보를 받아서 코브라 헬기가 사격했다는 어떤 증거를 발견했나요.
답 없습니다.
문 증인은 실제로 헬기 사격이 실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요.
답 예.
문 증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답 제가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목격자들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헬기가 도시 상공으로 낮게 비행을 하면 로터가 다운롯이라고 해서 하강풍과 반사 바람을 맞아서 우리가 호각을 불 때 바람만 불어도 소리가 나는 것처럼 다다다다 하면서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납니다. UH 같은 경우는 거의 총소리처럼 들리고, 충돌방지등인 라이트가 붉은색으로 휙휙 돌아가는데 모터가 원형으로 돌아가서 회전 디스크라고 하고 이것이 두 개가 고속으로 돌아가면 한 개의 원판이 돼서 빛이 반사되어 아주 넓은 지역에 붉은 섬광이 비칩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 일반 목격자 입장에서는 헬기가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고 붉은빛이, 섬광이 막 비치면 총을 쏘는 것으로 생각하기 딱 좋습니다.
자신이 목격한 사실에 대해서 오락가락하며 진술을 하고 있는데 그런 목격자의 헬기 사격을 봤다고 하는 진술을 과연 믿을 수가 있는지, 그리고 만약 실제로 사격을 했다면 한 발씩 정확하게 사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면서 드르륵 하고 쐈을 것인데 그랬다면 사람이 한 발만 맞을 수가 없습니다. 60발 이상 맞을 수밖에 없고, 공중에서 기관총을 쏘면 길바닥에도 탄피가 비처럼 수두룩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분명히 탄피를 주웠을 것이고, 한 발 맞아서 병원으로 후송했다는 말은 있을 수 없고 그 정도의 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헬기에 의해 여학생이 다쳐서 기독병원으로 후송을 했다는 진술은 적절하지 않고, 그다음에 당시 내려온 헬기만 해도 수십 대인데 그렇다면 조종사만 해도 약 100명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무장사, 정비사, 그 많은 사람들 중에, 40년이나 지났는데 그중에 단 1명이라도 무장했다, 사격했다고 진술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그리고 육군항공장교들은 지휘관, 계급에 복종하지 않고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절대 응하지 않습니다.
장군이 뒤에 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안전하지 않은 비행은, 장군이 이쪽으로 가라고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 헬기에 탄 이상 뒤에 누가 있더라도 본인 자신이 지휘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시민을 향해서 총을 쏘면 끔찍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총을 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조종사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부분입니다.
특전사 병력이 UH-1H를 타고 화물실 문에 걸터앉아 M16으로 (전일빌딩을) 쐈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수십 발의 탄알이 밀집되도록 사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건물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M16으로 연속으로 쏘면 가능할까… 특전사 병력이 헬기에 걸터앉아서 M16으로 쐈기 때문에 탄흔 중 일부는 M16 실탄도 있고 M60 실탄일 가능성도 있다는 국과수 발표가 있어요. 그런데 각도 측면에서 보면 건물 상공에서 그렇게 제자리 비행을 하면서 만약 사격한다면 그 건물 안에도 누군가가 위협 세력이 있다는 것인데, 어느 간 큰 조종사가 공중에서 제자리 비행을 하면서 나를 쏘라고 하면서 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쏜 실탄이 어떻게 그렇게 밀집되어 있을 수 있는지, 바닥에 있을 수 있는지, 그래서 제가 유사한 상황에서 한 번 해보자고 했습니다.
특조위를 조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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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국방부 특조위 위원 명단. |
〈국방부 5·18 특조위가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을 재판에 비유하자면 살인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한 것과 같다. 특조위 발표대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조종사들은 ‘양민 학살범’이 된다.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려면 완벽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특조위 조사결과보고서에는 완벽한 증거는커녕 비약과 추리만 있다. 어떻게 이런 조사를 근거로 조종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는가? 더 섬뜩한 것은 이런 부실한 조사가 아무런 반론도 없이 국가적 사실로 인정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중대한 사안에 객관적 증거 없이 ‘야만적 사격’이 있었다는 발표를 하는 것을 묵인한다면 이는 국가 기관에 의한 역사 조작을 용인하는 것이 된다. 적어도 국방부 장관은 이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선언,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를 지키고 현대사의 왜곡을 막았어야 했다.
이 조사 결과가 번복되지 않고 ‘국가가 공인한 사실’로 굳어지면 조종사들은 나치 유대인 학살범처럼 취급될 가능성이 있고, 국군과 국가도 전(全) 세계 앞에서 학살 집단으로 취급될 것이고,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갈 수도 있다. 특조위는 이런 끔찍한 연쇄반응을 생각하고 이런 무서운 결론을 내렸는가? 언젠가는 특조위 조사위원들이 조사를 받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국방부 특조위 위원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위원 중 최해필 전 항공작전사령관만이 소수의견을 냈다.
국군통수권자의 책임!
이제 당시 국방부 장관과 특조위를 조사하고 특조위 보고서를 취소해야 할 긴급한 이유가 생겼다.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나치 군대나 일본 제국 군대 같은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국군통수권자인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그리고 국방부 장관이 회의를 하고 자구책을 내어놓아야 한다. 성우회, 재향군인회, 사관학교 동창회, 호국안보 단체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광주사태에 북한군 600명이 개입했다는 황당한 자해적 주장을 했던 세력은 빠져야 한다. 누구보다도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음을 잘 알고 있을 광주시민들이 국군의 명예회복에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사격 명령을 받고도 거부한 조종사들을 ‘광주의 의인(義人)’으로 기려야 할 것이다.
최근 국제적 호평을 받던 방글라데시의 수상이 반정부 시위대에 관저가 포위될 지경이 되자 탈출, 인도로 갔다. 수상의 아버지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었던 건국의 영웅이었다. 수상은 독립투사 가족들에게 공무원 자리를 우선적으로 배정하는 고용특혜를 추진하다가 대학생들의 분노를 자극, 정권을 잃었다.
일부 광주사람들이 피해 보상을 넘어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특권까지 주장한다면 국민적 저항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불공정에 참지 못하는 젊은 세대가 커가고 있다. 국방부 특조위의 ‘헬기 기총소사에 의한 양민 학살’ 결론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볼 이들은 광주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