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올림픽을 앞두고 새삼 위대하게 보이는 서울올림픽, 한국과 세계를 바꾼 16일의 드라마, 세계 사람들의 善意가 모이니 이런 기적이 일어났다.
⊙ “올림픽은 하늘이 고생하는 한민족에게 준 선물”
⊙ ‘일본의 國士’ 세지마가 서울올림픽 유치 건의
⊙ 6·29 선언은 서울올림픽 성공과 김대중·김영삼 분열을 계산한 대도박
⊙ 고르바초프도 도왔다
⊙ “올림픽은 하늘이 고생하는 한민족에게 준 선물”
⊙ ‘일본의 國士’ 세지마가 서울올림픽 유치 건의
⊙ 6·29 선언은 서울올림픽 성공과 김대중·김영삼 분열을 계산한 대도박
⊙ 고르바초프도 도왔다
〈대통령에 재임하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자주 입에 올린 말은 ‘88서울올림픽’이었다. 내가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할 만큼 나의 최대의 관심사였다.〉(전두환 회고록)
아무리 힘이 지배하는 국제관계와 세계사지만 간혹 선의(善意)가 힘이 되어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수가 있다. 1950년 6·25 남침 때의 유엔군 파병과 1988년 9월의 서울올림픽이 대표적 사례다. 서울올림픽을 매개로 하여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선진화, 소련 및 동구 공산체제의 붕괴, 그리고 북한 정권의 몰락이 대세화되었다는 것은 이젠 정설(定說)이다. 서울올림픽은 도저히 불가능한 조건에서 성공하였는데, 그 동력은 착한 마음들의 집합이었다. 여러 나라 지도자들의 결단과 세계시민들의 선의가 한 덩어리가 되었으므로 지구촌 전체가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더 자유로워졌고 더 평화로워졌던 것이다. 1950년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세 악당의 음모를 저지하고 살아남았던 나라가 그 34년 뒤 ‘사랑의 복수’를 한 셈이다.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36년 전의 그날, 9월 17일을 생각하면 가슴부터 뛴다. 전날 서울엔 폭우가 쏟아졌지만 개회식은 청명한 하늘 아래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힘차게, 신나게, 아름답게 펼쳐졌다.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던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어 잠실로 달려갔고, 그 뒤 2주 동안 경기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우리 세대의 가장 아름다웠던 나날이었다.
많은 사람이 잊고 있는 사실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2년 전에 있었던 아시안게임의 성공이 예약했다는 점이다. 박세직(朴世直)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은 생전에 “아시안게임을 해보니 서울올림픽은 성공할 것이란 자신과 확신이 생겼다”고 했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던 김용식(金溶植) 외무장관은 자신의 회고록 《새벽의 약속》에 감동적인 글을 남겼다.
1955년 그가 일본 주재 한국 대표부의 대표로 있을 때 진해에서 휴양 중이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찾아가 업무보고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김 대표에게 지시를 구술시킨 후 늦여름의 조용한 진해만을 내려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 줄 아는가?”
노(老)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나는 늘 하나님께,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않게 잘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네.”
“각하, 언제쯤 우리도 남부럽잖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 30년 걸릴 걸세.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지내야 할 걸세.”
〈86년도의 아시안게임이 서울의 잠실에서 개최될 때, 관람석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30년 전 이(李) 대통령이 한 말을 회상하였다.〉
‘일본의 國士’ 세지마가 전두환에게 권하다!
서울올림픽이란 엄청난 발상은 경호실장 출신 박종규(朴鐘圭)에게서 비롯되었다. 1978년 9월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서울에서 주최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당시 대한사격연맹회장이던 그는 88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자는 생각을 구체화하여 4개 항의 메모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①남북한 간의 체제경쟁에서 남한의 우위 확보
②제3세계 국가 및 공산권에 대한 외교의 돌파구
③경제발전의 도약점
④사회선진화의 계기가 될 것이다.
대한체육회장이 된 박종규는 1979년 9월 21일 대통령의 재가(裁可)를 얻어냈고 정상천(鄭相千) 서울시장으로 하여금 발표하게 했지만 10·26 사건 뒤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5·17 뒤 박종규마저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됨으로써 서울올림픽 유치 계획은 잠시 실종되고 말았다. 이러다가 1980년 11월 이규호(李奎浩) 문교부 장관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서울올림픽 유치신청서를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내기로 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게 되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공표한 일을 별다른 이유 없이 변경할 수 없다”면서 유치 신청을 허락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대통령에 취임하던 때 내 머릿속에는 1988년 하계올림픽 유치가 하나의 아이디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아이디어를 심어준 사람은 일본 이토추상사(伊藤忠商事) 상담역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씨였다”고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엘리트 작전참모였던 세지마는 소설 《불모지대》의 모델이기도 한데 이병철(李秉喆) 삼성물산 창업자와 친밀했다. 이 회장의 요청으로 1980년 6월 한국에 와서 전두환의 육사 동기생 권익현(權翊鉉·나중에 민정당 대표)의 소개로 전두환 장군을 만났다. 그해 8월엔 다시 와서 대통령 취임을 앞둔 전두환에게 88올림픽 유치를 권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내가 권익현씨의 증언을 토대로 1990년 8월호 《월간조선》에 소개한 바 있는데 회고록은 이 사실을 확인해준 것이다. 세지마는 “장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고 국민의 힘을 한데 모으려면 올림픽을 유치하는 게 좋을 것이다”며 “한반도의 안전이 일본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는 만큼 한국의 올림픽 유치를 적극 돕겠다는 뜻을 비쳤다”고 한다.
당시 일본 나고야시 또한 올림픽 유치 의사를 밝힌 상태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혹시 무슨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선의의 조언’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勸善懲惡의 교과서
1981년이면 피를 흘리며 집권한 전두환 정부가 국내외의 도전 속에서 첫발을 떼고 있을 때여서 경제 관료들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관계자가 유치 신청에 반대했다. 찬성파는 전두환, 노태우(盧泰愚), 노신영(盧信永·외무장관), 이규호, 유학성(兪學聖·안기부장),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 회장), 조중훈(趙重勳·한진그룹 회장) 정도였다고 한다. 누가 뭐래도 올림픽 유치는 전두환 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이었다. 바덴바덴의 기적에 대해서는 많은 이의 공이 거론되고 있는데 표를 많이 얻는 데 기여한 것을 기준으로 하면 유치를 총괄 지휘했던 노태우 정무장관을 비롯하여 노신영, 박종규, 정주영, 조중훈, 김운용, 이연택씨 등이 있다.
한국의 선의에 악의(惡意)로 대한 것은 김일성 정권이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 저지를 당면 목표로 삼고, 1983년 아웅산 테러, 1986년 김포공항 테러, 1987년 김승일·김현희 조(組)의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을 벌이면서도 공동 개최란 미끼를 던지고 대응 행사로 세계청년축전의 개최를 추진했다. 이런 음모는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실패했다. 미얀마 외무장관이 정시(定時)에 와서 전두환 대통령을 아웅산 묘소로 안내했더라면 17명의 사망자는 18명이 되었을 것이고, 한국군은 서울올림픽을 포기하고서라도 대북(對北) 응징에 나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을 것이다.
일본 외교관이 바레인 공항에서 김승일·김현희의 출국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또 김현희가 독약이 숨겨진 담배개비를 깨물려다 어머니 생각에 멈칫하지 않았더라면 115명이 죽은 폭파 사건은 안기부의 자작극으로 몰려 서울올림픽의 분위기를 망쳤을 것이다. 북한 정권은 평양 세계청년축전 개최에 50억 달러를 투입했는데 이게 경제를 망쳐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을 예약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은 도덕 교과서에서만 배울 필요가 없다. 세계적 규모에서 착한 사람들이 이기고 나쁜 사람들이 진 곳에 서울올림픽이 있었다.
선의는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다. 선의는 유능해야 힘이 된다. 서울올림픽 주체 세력의 유능은 최다(最多)의 참여, 최고(最高)의 경기 운영, 최대(最大)의 수익으로 수치화되었다. 박정희·전두환의 올림픽 대전략을 외교 현장에서 집행한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동구와 소련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있는 기회를 잡아 서울올림픽의 성과를 북방외교로 확대시켜 임기 중에 한소(韓蘇), 한중(韓中), 한·베트남 수교를 이루고 유엔 동시 가입까지 성공시켜 한국인의 활동 공간을 지구촌 전체로 확대시켰던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동구 소련 사람들을 각성시켜 이듬해 1989년의 공산체제 붕괴를 재촉한 요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6·29 선언을 통하여 한국의 민주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에는 인색하다. 전두환 대통령은 단임제 실천으로 평화적 정권 이양, 물가 안정을 기본 축으로 한 경제 성장, 그리고 올림픽 준비를 자신의 3대 임무로 설정,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세 개 가운데 가장 정성을 다해 챙긴 것은 서울올림픽이었다.
“올림픽은 하늘이 고생하는 한민족에게 선물로 준 것”
제5공화국의 청와대는 통치사료 담당 비서관을 두었다. 조선조의 사관(史官)을 닮은 이 자리에 있었던 김성익(金聲翊)씨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이었다. 1986~88년 사이 그가 기록한 격동기의 대통령 언행은 드라마 대사처럼 생생하다. 비공개 자리에서 쏟아낸 입담 좋은 전두환 대통령의 솔직한 말은 구수하고 인간적이기도 하다. 올림픽과 관련된 전두환 어록을 따라가다가 문득 ‘순정’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서울올림픽에 꽂힌 한 사나이의 순정!
1986년 3월 1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 운영계획보고회가 대통령 주재로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만제(金滿堤) 부총리,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 손제석(孫製錫) 문교, 박세직(朴世直) 체육, 이해원(李海元) 보사부 장관, 김종하(金宗河) 대한체육회장 등 135명이 참석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렇게 강조했다.
“86·88을 우리가 어떻게 유치했습니까. 우리 한민족이 하도 고생을 많이 하고 잘해보려고 해도 안 되고 하니 하늘이 큰 선물로 준 것인데 이런 걸 활용 못 하는 민족은 이 지구상에 살아남을 수 없어요. 살아남아도 종노릇밖에 할 게 없어요. 이것을 우리가 소화하지 못하면 후손에게뿐 아니라 나라와 역사에 죄를 짓는 거요. 모든 분야에서 끝마무리를 잘해주기 당부합니다.”
그는 자신의 결단으로 유치에 성공한 88서울올림픽에 유별난 애정을 가지고 준비에 정력을 쏟았다. 수시로 전방과 치안 일선을 시찰, 안전 문제를 점검했으며 틈날 때마다 올림픽 경기장 건설 현장과 태릉 선수촌 등을 돌아보는 등 ‘올림픽 준비단장’을 자처했다.
1986년 3월 17일 대통령은 청와대 만찬에 기독교 지도자들을 초대했다. 여기서 올림픽이 남북관계에서 결정적 변수가 될 것임을 예언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하면 자동적으로 16일간 텔레비전을 돌려서 전 세계 40억 인구가 보게 됩니다. 그 선전비를 돈으로 따지면 얼마가 되겠어요. 그게 바로 우리 국력이고 경제력이고 우리 제품에 대한 보장이 됩니다. 그렇게 밀고 가면 북한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체제가 무너집니다. 그걸 북한이 잘 알 겁니다. 자기네 체제를 유지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기로입니다. 김정일이가 세습을 하려면 한국이 86·88을 못 하게 해야 하고, 그러려면 버마 사건 식으로 게릴라를 집어넣는다든지 가만 안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국과도 협조해서 군경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스스로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는 것을 한 번도 못 한 나라 아닙니까. 그래서 갈등과 불신도 있습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두고 권력을 잡으면 내놓기가 힘들어요. 내가 해보니 그렇습니다. 나한테도 88올림픽이나 마치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미국 상원의원, 우리 야당 의원도 있었습니다.
나보고 군인 출신이다 뭐다 하는데 나도 나름대로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내가 집권한 후 학생들이 시끄러워도 치안을, 경찰에 의해서 유지해왔습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한 일이 없어요. 모든 문제를 힘이 아니고 순리로 하려고 무척 애를 써왔습니다. 정치인은 혼란이 생겨야 수지가 맞지만 혼란이 생겨 손해 보는 것은 국가와 국민입니다.”
“사마란치, ‘올림픽까지 계속 집권’ 간청”
1986년 4월 28일 낮 대통령은 주요 언론사 사장들을 청와대로 초청, 점심을 함께하면서 비화(秘話)를 털어놓았다.
“내가 늘 말하지만 대통령이 어떤 일이 있어도 임기를 마치기 전에 죽지 않고 임기를 마치고 살아 나가면 민주주의 발전에 큰 전기(轉機)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내가 반드시 살아서 나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설사 빨리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더라도 나라를 생각해서는 내가 살아서 임기를 끝내고 물러가야 됩니다.
북한이 우리한테 별별 방해 공작을 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올림픽을 반대하다가 공동 주최하자고 하다가 이제는 종목을 반반씩 나누자, 24개 종목 중에 열 종목만 내놔라 운운. 내가 이번에 IOC 위원장을 만나보니 소련, 중공, 쿠바, 동구권이 어울려 IOC에 겁을 주었답니다. 이북에서 올림픽 종목을 몇 종목 안 주면 서울을 밀어버린다고 한다는 거예요. 언론에는 비밀입니다만 내가 구라파 방문 중에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스페인에서 스위스로 날아와서 만났습니다. 이분이 손을 떨면서 긴장해요. 이북이 군사적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얘기를 해요. 립시 주한미군 사령관이 미국에서의 기자회견에서 북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했는데 괜찮으냐고 나에게 물어요. 그래서 당신이 직접 들었느냐고 물었어요. ‘직접도 듣고 소련, 중공, 쿠바 등 몇 나라에서도 그러더라’는 얘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러지 말고 이북한테 10개 종목을 떼어주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면 어떠냐’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절대 그런 얘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한국이 이북에 비해서 군사력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50년대처럼 그렇게 약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한미군이 있지 않으냐,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북에 한 종목도 못 준다고 했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의연하게 잘해왔는데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걱정 마라’고 했습니다.
사마란치 위원장 말이 ‘그렇지만 각하는 88년 2월에 그만두시지 않느냐’고 해요. ‘그만두시면 국내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내가 우리 국민이 얼마나 우수하냐, 나보다 백배 잘할 유능한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올림픽은 내가 책임지마, 걱정 말라고 거듭거듭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 ‘군대 문제는 미군이 있어서 안심이 되는데, 대통령께서 올림픽만 마쳐주고 그다음에 그만두면 어떠냐’고 해요. 그래서 내가 ‘헌법 때문에 안 된다’고 하니 ‘야당과 협상하면 되지 않느냐, 1년 정도인데 뭐 그리 어렵겠느냐’고, ‘88년 2월에 퇴임하시기 때문에 걱정이 된다’고 했어요.
86·88이 다가오는데 나도 대통령을 무사히 끝내고 안전하게 보따리 싸서 우리 집에 돌아가도록 선례를 남겨야 선진화하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가급적 내가 속상한 일을 참고 순리로 여론에 의해 풀려나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독사도 밟으면 무는 겁니다.
외국 언론이나 외국 국회의원이 정부를 까면 우리 언론은 좋다고 그걸 잡아서 쓸 게 아니라 우리 정부를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아웅산 사건 후 군의 보복을 말렸다”
1986년 8월 11일 오전 전(全) 대통령은 청와대 상춘재에서 청와대 출입 기자단과 간담회를 가졌다.
“버마에서 아웅산 사건을 당하고 몇 분(分) 사이로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난 다음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잠이 오질 않았어요. 내가 그때 내자에게 말했어요. 이번에 내가 만약 죽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됐겠느냐고. 내가 살았으니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하늘이 하는 일이지, 인력(人力)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지 않으냐, 내가 살았다는 것은 분명히 하늘이 나한테 하라고 하는 일이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새로이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전쟁을 막아야겠다, 그래서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이와 같이 내 집념은 생사를 넘는 강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KAL 007기 격추 사건이 얼마나 슬프고 원통한 일이었나, 그리고 한 달 후에 버마에서 북한이 나를 죽이려고 테러를 했는데 원래 국가 원수에 대한 테러는 선전포고 사유가 될 수 있어요. 그때 우리 군에서는 육군, 해군, 공군 할 것 없이 북한을 때리려고 해서 세네월드 UN군 사령관이 얼굴이 새하얗게 됐어요. 내가 버마에서 돌아와 보니 군에서 전부 때릴 준비가 다 되어 있었어요. 위에서 승인을 안 해도 들어가겠다는 거야.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으냐고. 그래서 내가 그 보고를 받고 바쁜 가운데에서도 전방을 돌고 군 지휘관들을 만나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준 데 대해서는 감사한다. 그러나 전투를 하고 안 하고 하는 상황 판단은 국가 원수로서 폭넓게 보니 여러분보다는 낫다. 내가 필요한 시기, 적절한 시기에 때리라고 할 때 때리라고 했어요. 내 명령 없이 병사 한 명이라도 넘으면 나에 대한 불충이다, 내 명령에 따르라, 그렇게 진정을 시켰습니다.
지금 북한이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88년까지 승부를 보려는 저의를 갖고 있다고 나는 봐요. 북한은 30년 이상 국민 복지를 희생하고 군사비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GNP 규모가 해마다 커지니까 북한이 군사력으로 경쟁하는 데는 한계가 오게 되어 있어요. 88년에 올림픽과 정권 이양이 잘 끝나면 북한은 대화 노선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90년에 가면 틀림없이 진짜 대화를 하려고 할 것이고 올림픽만 끝나면 중공과 소련도 우리한테 태도가 달라질 겁니다. 그러나 어떤 분야든 우리가 취약점을 보이면 저네들은 집중 공격을 해요.”
“우리 대머리 세 사람이 야간 경기에 나가면”
서울올림픽의 예행연습이기도 했던 서울아시안게임은 1986년 9월 20일에 개막돼 10월 5일에 폐막됐다. 9월 14일 김포공항 구내에서 폭발물이 터져 5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했다. 지금까지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는데 북한의 테러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흘 뒤인 9월 17일 낮 전두환 대통령은 사마란치 IOC 위원장 등 국제 스포츠 요인들을 청와대로 초대, 점심을 대접했다.
〈대통령: 아시안게임은 어느 나라에서 치르는 것보다도 훌륭하게 치를 만반의 준비가 다 돼 있습니다. 방해하려는 집단이 있기는 하지만 여러분이 조금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사마란치 위원장: 제가 이곳에 여섯 번이나 왔습니다. 올림픽 가족을 대표해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는 저희의 기쁨을 말씀드립니다. 86아시안게임뿐 아니라 88올림픽에서 대성공을 거두기를 희망합니다.
대통령: 내가 사마란치 위원장을 스위스에서 만난 것까지 합치면 일곱 번을 만났는데 여기 계신 여러분을 다 두 번 이상 만났기 때문에 나도 올림픽 가족임을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IOC의 티토프 씨는 내가 소련인과 오찬을 같이하는 최초의 손님입니다. 의미가 있고 나도 아주 즐겁습니다. 독일의 바이츠 부위원장은 내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대통령 오찬 때 이어 오늘이 두 번째 오찬입니다. 두 분이 다 대머리이신데 나와 셋이 나가면 주변이 환해질 겁니다(참석자들 웃음). 야간 경기 할 때 우리 세 사람이 나가 있으면 선수들이 행복해할 것입니다(참석자들 폭소).
대통령: 티토프 씨는 언제 체조 금메달을 땄나요?
티토프: 56년 올림픽에서였습니다.
대통령: 티토프 씨, 우리도 조금만 기술을 배우면 체조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을 텐데 이번에 안 바쁘면 비법을 한두 가지만 가르쳐주고 가시오.
티토프: 작년에 각하를 뵌 후에 소련 코치로 하여금 한국 코치를 일주일 지도하게 했습니다. 각하 말씀을 소련 코치에게 전하겠습니다.
사마란치: 하계올림픽 회장인 국제육상연맹 회장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로마 교황과도 친분이 있습니다.
대통령: 교황께서 이곳을 다녀가셨는데 아주 훌륭한 분이더군요. 오시기 전에 한국말도 공부를 했는지 아주 잘했어요. 우리 경제가 너무 빨리 성장하는 문제가 있어서 경기를 조금 진정시키고 있어요.
사마란치: 다른 나라에서는 부러워합니다. 한국이 이렇게 발전하고 국민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와서 봐야만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올림픽 준비 상황은 말로가 아니라 진실로 훌륭합니다.
대통령: 1960년도에 우리 개인 소득이 82달러였는데 지금은 20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국제 환경에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90년에 가면 약 4000달러가 될 것입니다. 금년에 10.9% 성장될 전망이어서 10% 이하로 떨어뜨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퇴임 후 1986년이 가장 행복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해는 무역흑자를 처음으로 기록했다고 해서 흑자원년으로 불린다. 1985~87년의 3년간은 민주화 시위가 가장 격렬했으면서도 경제성장률 또한 가장 높았다. 이 시기의 소란을 추억하면 뭔가 밝게 느껴지는 것도 경제호황 속의 최루탄과 투석과 화염병과 함성이었기 때문이다. 평화적 정권 이양과 서울올림픽 성공은 이런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1980년대 10년간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0.1%로서 세계 1위였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80년대의 위대한 성취들, 평화적 정권 이양·서울올림픽·일본 따라잡기·IT 기반 확보·북방 정책이 펼쳐졌던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善意
이 무렵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진짜로 돕고 있던 사람은 멀리 모스크바에 있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 여부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온전한 대회가 되느냐였고 그 열쇠를 쥔 사람은 1985년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였다.
김일성은 1986년 가을 모스크바로 가서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2년 전 그는 소련을 방문했을 때 “이것이 나의 마지막 해외여행이다”고 얘기했었는데 왜 또 갔을까?
그 수수께끼는 독일 통일 이후 동독 공산당 정치국 비밀문서 속에서 풀렸다. 1986년 11월, 즉 김일성의 두 번째 방소(訪蘇) 한 달 뒤 모스크바에서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김일성이 자신을 찾아와 소련과 공산권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고르바초프는 김일성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 수뇌회의에서 서울올림픽 참가 여부가 논의되었다. 쿠바 수상 카스트로만이 보이콧에 찬성했고 다른 나라들은 참가를 결의했다. 남북한이 공동 개최를 하는 방향으로 노력해보고 그것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재독(在獨) 서병문(徐炳文) 박사는 “86년 11월의 이 150여 페이지짜리 수뇌회의 기록을 읽어보면 이 회의가 공산권의 급속한 개혁·개방을 재촉하는 분수령이었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회의에서 공산주의가 실패했음을 솔직히 밝힙니다. 이제는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고 국민이 잘살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 퍽 감동적입니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공산권 국가들이 결정한 데는 국내적인 압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공산국가는 모두 체육 강국인 데다가 두 차례나 반쪽 올림픽을 치러 또다시 보이콧할 경우 국민들의 불만이 커질 것을 우려했을 겁니다. 북한은 동독에 대해서도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이것만은 호네커가 듣지 않았습니다. 서울올림픽은 남북한 간의 결전이었을 뿐 아니라 동구 공산권의 붕괴를 앞당긴 촉매제였습니다.”
“평화적 정권 교체와 올림픽 성공시킬 수 있는 인물이 노태우”
1987년은 공동운명체가 된 전두환과 올림픽에 결정적인 해였다. 박종철(朴鍾哲)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시위가 서서히 모멘텀을 키우고 있던 1987년 6월 2일 저녁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및 민정당 소속 국회 의장단을 상춘재로 초청하여 노태우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는 의식을 진행했다. 대통령은 앉은 자세로 미리 준비해간 ‘추천의 말씀 자료’를 육성으로 낭독해갔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그동안 국군보안사령관 등 군의 주요 지휘관을 역임해서 누구보다 군부를 잘 알고 탁월한 안보 식견을 갖추고 있으며 내무장관과 정무, 체육부 장관 등 행정부의 직책을 맡아 정부 조직에 정통할 뿐 아니라 올림픽 조직위원장과 국회의원, 집권당 대표위원 등을 거쳐 당과 정치인의 생리를 알고 체험을 쌓음으로써 국정을 책임질 수 있는 정치 지도자의 경륜을 두루 쌓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당에 대한 국민의 지속적인 신뢰를 확보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와 88올림픽의 국가 양대사(兩大事)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적임자로 노 대표를 추천하는 나의 이 뜻을 여러분이 흔쾌히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격화된 반(反)정부 시위 속에서도 전두환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을 챙긴다. 6월 16일 신임 이한기(李漢基) 총리서리 등 국무위원 전원을 부부동반으로 청와대로 초청, 축하 저녁을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10년 주기로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박종철 사건 하나로 시작이 되어 시끄러운 일이 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한 번은 겪어야 할 과정입니다. 체육부 장관이 좀 나서야겠어요. 올림픽을 방해하려는 북괴의 사주에 의해 움직이는 게 분명한데 내가 염려한 대로 벌써 《뉴욕타임스》 등에서는 시위 사태에 따라 올림픽의 안전 문제를 들고나오는 모양이던데, 반체제와 반정부 세력이 연합전선을 펴는 데 빨리 이 줄을 끊어야 되겠어요. 올림픽이라는 게 다시 없는 호기인데 북한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거요.”
“정권 잃는 한이 있더라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1987년 6·29 선언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 겸 대통령 후보의 고독한 결단으로 포장되었으나 사실은 전두환 대통령이 먼저 노태우 후보에게 제의하여 이뤄진 것이다. 한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정치적 도박이었다. 이 선언으로 전날까지 가장 미움을 받던 노태우는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이 되어 그해 대선에서 승리, 직선제 초대 대통령이 되고, 서울올림픽을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성공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북방 정책을 추진, 격변기의 동구, 소련, 중국, 베트남과 수교, 북한을 고립시키고 한국인의 삶의 무대를 바꾼다. 6·29 선언을 결심하는 데 있어서 전두환 대통령 머리엔 서울올림픽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7년 6월 28일 일요일 아침 전두환 대통령은 연설문 담당인 김성익 비서관을 청와대 식당으로 불렀다. 그는 약 50분 동안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담화문 작성에 참고하도록 6·29 선언의 내용과 후속 일정을 미리 구체적으로 일러주면서 직선제 수용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노(盧) 대표 의견도 그렇고 직선제로 나가야겠어. 지식층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그걸 원하고 있어. 우리가 직선제를 안 받을 이유가 없다. 선진국에서도 직선제를 하는 나라가 거의 없고 또 직선제는 선거가 끝나면 결과에 승복을 안 해서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안 받았는데 직선제를 하지 않음으로 해서 야기되는 혼란보다는 적을 것 아닌가. 국민이 원하면 해보자.
직선제를 해서 나라가 망하는 일이 생기면 불행하지만, 중산층이 혼란을 원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주장해온 대로 대통령 선거법을 고쳐서 직선제에 가까운 간선제를 할 수 있지만 국민들이 직선제를 하자고 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시끄러워서는 평화적 정부 이양도 안 될 뿐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우리가 약속한 올림픽도 안 될 것 같아. 내 소신은 정권이 민정당에서 떠나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되겠다는 거야. 그게 나라가 잘되는 길이다.”
역사가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
“정권이 민정당에서 떠나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되겠다는 거야. 그게 나라가 잘되는 길이다”는 말은 서울올림픽에 순정을 바친 한 사나이의 감상적 고백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엔 차가운 계산이 깔려 있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단합하지 못할 것이란 확신!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나서 닷새 후에 7월 7일 당 총재직을 사퇴함으로써 정치인과 지식인층, 그리고 국민들한테, 사심(私心) 없이 해온 내 이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김대중은 직선제가 되면 대통령 선거에 안 나가겠다고 했지만 안 나올 리가 없다. 김영삼도 마음을 비웠다고 했지만 그렇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은 안 하지만 행동으로 사심이 없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확실히 하는 거야.
당 총재직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영구 집권이라고 하고 또 현실적인 권력 구조로 볼 때 다음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게 된다. 전 국민과 전 세계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던지고 프리(free)하게, 페어플레이(fair play)하는 거다.”
전 대통령은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그것을 보면서 6·29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하나 구술해주었다. 며칠 전부터 직선제로 방향이 선회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으나 막상 구체적인 내용을 듣는 순간 김 비서관은 “역사가 큰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한 충격과 흥분으로 잠시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우선 대통령이 민의(民意)를 있는 그대로 읽고 있다는 점과 시국(時局)을 이상한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점에 안도감을 가졌다. 그다음으로 생각이 미친 것은 모든 국민이 소망하는 이 좋은 소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놓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1987년 6월 28일 오후, 직선제 선언을 대통령 명의로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김성익 비서관의 건의를 받고 전두환은 6·29의 배경 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직선제 이외에는 국민 대중과 중산층에 뭘 갖다 대도 속임수 인상을 주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힘으로 해서 노 대표가 대통령 된다고 해도 1년도 못 가. 저 사람들이 지금 올림픽을 담보로 잡고 있는데 다음 정권을 힘으로 만들면 올림픽도 못 치른다. 그러면 역사의 큰 호기를 놓친다. 내 손으로 우리 대통령을 뽑겠다는 직선제 민의를 우리가 받아준다고 해서 야당한테 지지 않는다.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외부적으로는 역할분담론이 나와 있지만. 직선제를 받는 것은 야당과 언론의 급소를 찌르자는 거야.
얽히고설킨 것, 원한 많은 사람들한테, 누가 권력을 잡든, 어떤 정권이 잡든지 간에 맺힌 원한을 모두 풀어주겠다, 그래서 모두가 깨끗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나라의 백년대계를 향해서 출발하자는 거지. 내가 그 뚜렷한 명분과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 직선으로 다음 정권을 창출해내야 돼. 대통령 후보는 노태우 아닌가. 노 대표가 부각되도록 하는 것이 제일의 목표다. 노 대표 이름으로 해야 돼. 나는 국민으로부터 정치는 무능하구나 하는 소리를 듣더라도 노 대표가 부각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다. 사실은 내가 노 대표한테 직선제를 받도록 시킨 것이다. 2주일 전에 그랬는데 노 대표가 펄쩍 뛰었어.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그래서 내가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라고 했다. 그쪽에 팀이 있는 모양인데 극비리에 작업을 해왔다. 더 이상 보안을 하기도 어려운 모양이야. 괜히 질질 끌어서 미루면 담화 발표의 참뜻이 없어진다.”
전두환 대통령은 6월 18일 부산에서 시위대가 시청을 포위하는 것을 보고 다음 날 군 출동 준비 명령을 내렸으나 오후에 취소했다. 계엄령 선포 소문이 퍼지도록 하여 자제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면 서울올림픽은 날아간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중산층이다’는 이들이 70%나 되었다. 그들은 시위 격화로 서울올림픽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올림픽은 정권과 시위대 양쪽에 다 브레이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혈(無血) 민주화의 길을 연 6·29 선언은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다.
“김대중이 열세, 김영삼을 때려라”
‘1노(盧) 3(金)’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치열하던 1987년 11월 9일 오전 대통령 주재로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전두환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단일화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민정당은 김영삼 공격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앞으로 공략 목표를 김대중보다는 김영삼에 두라고 하시오. 김대중이 열세야. 이 사람은 구속학생 모임, 서대협, 대구학생 모임 등에 나가는데 2·12 총선 때 학생들이 일어나서 야당 붐을 조성하듯이 이번에도 학생들을 최후 보루로 쓰는 것 같아. 조직의 핵심을 학생에 두고 있어요. 김대중이 열세가 되면 야당 후보가 단일화되거나 김영삼으로 집중될 우려가 있어요.”
1987년 12월 대선(大選)의 가장 큰 쟁점은 전두환 정권의 치부인 12·12 사건이었다. 그해 9월호 《월간조선》에 정승화(鄭昇和)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기사가 실린 직후 김영삼은 그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 군사반란 세력 단죄를 다짐하니 정권 측은 긴장하게 되었고 선거판이 살벌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김영삼이 주적(主敵)으로 되고 김대중을 전략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계산이 이뤄진 것이다.
1987년 12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은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들을 불러 점심을 대접하면서 9일 전에 있었던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에 대하여 올림픽 방해 책동이라고 설명한다.
“KAL기가 공중 폭파된 게 틀림없다고 나는 봐요. 상당히 센 폭탄인 것 같아요. 해상에 떨어진 부상물(浮上物)이 거의 없어요. 범인을 잡아낸 게 우리 국력입니다. 이북은 두 가지를 목표로 한다고 봐요. 첫째는 대통령 선거가 있으니 이북에서는 이 기간에 최대한 혼란을 조성해서 선거가 안 되게 해야겠다 하는 것과, 둘째는 전 세계에서 올림픽에 참가하려는데 다 죽을 위험성이 있다고 겁을 주어서 참가를 안 하도록 하는 것으로 봅니다. 북한의 계획적인 테러인 것만은 분명해 보여요. 다른 나라는 이런 짓을 할 나라가 없고 할 이유도 없어요. 시체와 범인 여자를 인수해보면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전모를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가 지금 신경 쓰는 게 이북이 대통령 후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해칠까 봐 걱정입니다.”
KAL기 폭파 사건이 난 것은 11월 29일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테러 때와 마찬가지로 즉각 북한의 계획적인 범행이라고 추정했다. 폭파범 ‘마유미’는 12월 15일 서울로 이송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12월 10일 오전 제5공화국 경제치적 보고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정을 다지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허무는 것은 삽시간입니다. 건물 짓는 데는 5년에서 7년이 걸리지만 불을 싸지르면 하루 만에 다 타요. 이번 KAL 사건도 보세요. 그 뜨거운 중동에 어려운 사람들이 가서 일을 끝내고 손에 몇 푼씩 쥐고 희망에 차서 귀국하는데 폭발시키는 참사가 났어요.
이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외면하고 김일성을 순화해서 평화 공존시킨다고 하는데 김일성이 순화될 인물입니까. 그 얘기 하고 나서 며칠 안 돼 총격을 가해왔고 이런 참사가 일어났어요. 모스크바에서 얘기를 해도 말 안 듣는 김일성을 우리 대통령이 순화하고 타일러서 한반도에 평화 정착을 시키려 하는 것은 얼마나 소견머리 없는 일입니까.”
1988년 12월 18일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김대중-김영삼 분열구도 덕분에 3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6·29 선언을 결심할 때의 계산이 적중했던 것이다.
“감정이 북받쳐서 순순히 내놓을 기분이 아닐 때도 있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1월 7일 저녁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송별만찬을 가졌다. 인간적인 토로 속에서 또 올림픽 이야기가 나온다. 한 기자가 “집권 연장의 유혹을 느낀 적은 없으신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유혹을 느꼈다기보다 유혹한 사람들이 내외국인 중에 많았어요. 내가 85년에 미국에 갔었는데 민주당 상원의원 한 사람이 한국이 유치한 올림픽이 얼마나 중요한 거냐,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계속해야 되지 않느냐고 진지하게 얘기했어요. IOC 조직위에서는 수차, 대통령을 보고 서울올림픽을 결정했는데 바뀌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어요. 국내에서도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한 임기 더 하는 게 좋지 않으냐고 노골적으로 얘기한 전직 국회의원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나 같은 사람이 대통령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느냐, 나보다 훌륭한 분이 줄을 서 있다. 우리 국민은 우수하기 때문에 누가 후임 대통령이 되든 훌륭한 지도자로 양성해줄 거고 어려울 때 단합하는 힘이 있으니 절대 걱정 말라고 했어요. 작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이래서 정권을 이양할 수 없었겠구나, 이해가 갔어요. 내가 정권을 내놓는다고 하면 내가 잘못이 있더라도 덮어주고 보호해주려고 해야 하는데 내놓는다니까 까뒤집고 해요. 박건석(朴健碩)인가 하는 사람이 떨어져 죽은 사고가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 꼴도 잘 몰라요. 그런데 정부가 그 사람 돈을 먹었다고 공격하고.
사사건건 그런 식으로 물고 늘어지면 정치가 안 되고 투쟁이 돼요. 권투 선수를 뽑아서 권투를 하는 게 낫지. 사람이 감정의 동물입니다. 나가는 사람, 가만있는 사람 약을 올리면 이성을 잃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맞아 죽는 게 창피 안 당하고 더 행복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어요. 감정이 북받쳐서 순순히 내놓을 기분이 아닐 때도 있었어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어요.”
“겨우 잡은 선진국 문고리 삐끗하면 다시 닫혀”
다른 기자가 “재임 7년간 남기고 싶었던 게 뭐냐고 한다면 선진국의 문고리를 잡게 된 것이라고 말씀한 일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우리가 문고리는 열어놓았는데 이게 잘못하면 닫힌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국민이 조금만 합심하면 선진국이라고 하는 안방을 차지하게 돼요. 그래서 앞으로 4~5년이 정말 중요해요. 소련과 중공을 자유스럽게 여행할 수 있는 환경 변화가 올 것이고 이북과도 동·서독 정도로 교류가 트일 것으로 나는 봐요. 나는 우리 국민의 우수성을 실감했어요. 똑똑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비판도 많고 말도 많아요. 둔한 사람들이 많으면 통치하기는 쉽겠지만 발전은 없어요.”
또 다른 기자가 “대통령으로서의 경험을 후임 정부와 협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이라고 물었다.
“후임자는 나와 친한 사이니까 고통 스럽고 고민스러운 일이 있으면 자문을 해달라든지 요청이 있지 않겠나 봐요. 그러면 내가 그분을 위해 다소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요. 친하다고 해서 요청도 없는데 나서면 상호 불편해져요. 부자지간에도 자기 철학과 원칙에 따라서 하는 거니까.”
김성익 통치사료 비서관은 이런 메모를 남겼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 무렵 송별모임에서 자신의 심경을 말하는 일이 많아졌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한 데서 나오는 착잡한 느낌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 후임자 측의 분위기가 전해지면서 청와대 분위기는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전 대통령 역시 뭔가 섭섭한 느낌을 털어놓을 때가 있었으며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1월 14일 언론사 편집국장들과 가진 오찬 석상에서 “어떤 수모라도 참고 견디겠다는 각오가 없으면 대통령을 내놓을 수가 없다” “노태우가 모든 것을 잘 봐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섭섭한 꼴을 따지면 대통령 못 내놓아요. 요다음 사람이 잘해주면 대통령을 임기 동안 끝마친 전임 대통령이 한 사람 있다 하는 것으로 내외적으로 민주주의 의식이 달라지지 않겠느냐 봐요.”
레이건 대통령의 善意
이 무렵 서울올림픽의 성공에 선의를 가지고 신경을 써주고 있었던 이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었다.
《레이건 일기》의 567페이지에는 1988년 1월 14일 목요일에 쓴 내용이 실려 있다.
〈백악관 안보회의를 열었다. 한국의 스파이 이야기가 보고되었다. 바레인에서 잡힌 24세의 여성은 대한항공 폭파 용의자인데 자신이 북한 공작원이며 올해 열리는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자백을 했다고 한다.〉
이 일기는 당일 안기부의 김현희 수사보고를 인용한 것이다. 미국이 서울올림픽이 안전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소련을 통하여 북한 정권에 압력을 넣은 일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레이건 대통령, 슐츠 국무장관, 칼루치 국방장관까지 나서서 소련을 움직였다. 이런 사실은 1988년 6월 8일 청와대로 노태우 대통령을 예방한 프랭크 칼루치 미 국방장관의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칼루치 장관은 크라우 합참의장 등을 대동했다. 그는 그 직전에 있었던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에 대해서 보고하면서 서울올림픽의 안전 문제에 대해 거론했음을 밝혔다.
〈북한 문제와 올림픽 안전에 관해서는 수차 소련 측에 의견을 개진하였는 바, 셰바르드나제 외상은 오찬 시 레이건 대통령께 북한은 도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대하여 미국 측에서는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나, 분명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슐츠 장관은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소련 측에 북한이 최근 SA-5 미사일을 전방배치 한 것을 지적한 바 있고, 본인도 만찬석상에서 옆에 앉은 그로미코 의장(과거 25년간 외상을 지냄)에게 촉구하였던 바, “그는 북한에 알아본 바, 올림픽을 방해할 하등의 의사가 없다고 하더라”고 하였으며, 본인이 한국 측에 그렇게 전달해도 되겠냐고 문의한 데 대해서 좋다고 확답을 하였습니다.〉
“살아서 청와대를 나간다”
1988년 2월 8일 대통령은 청와대 식당에서 이념교육 유공 교수들을 초청해 오찬을 가졌다.
“친구지만 노태우도 인간 전두환은 잘 알아도 대통령 전두환은 이해 못 합니다. 그동안 나한테 와서 자기 얘기하고 내 얘기만 듣고 갔지 대통령의 고충을 알 길이 없어요. 앉아보면 ‘권위주의 청산’ ‘보통 사람’ 며칠 후에 없어질 겁니다. 인기만 끌다가는 1~2년 안에 나라 망칩니다.
나는 2월 24일까지 가차 없이 할 겁니다. 사람이 인기 먹고 삽니까. 지금 권위주의 배격 운운하는데 여러분이 전공하는 분야에서는 권위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면 해요. 교육계에 대가(大家)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옆의 사람 좋은 말하면 깎고 서로 치고받다 보니 대가라는 이름 듣는 사람이 없어요. 대가가 아니라도 추대해서 만들어야 됩니다. 군사독재라고 떠들어도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된 건 틀림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정통성의 시비가 있을 수 없게 되었으니 여러분이 교육을 하는 데에도 명분이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2월 19일 자신의 재임 중에 청와대를 출입한 언론인들과 청와대 출입기자단을 점심에 초대한 자리에서 “청와대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흉가입니다”라고 했다.
“보통 집으로 말하면 재수 없는 집이지. 이기붕 일가가 몰살하고 이승만 박사 쫓겨나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와서 육 여사가 시해되고 박 대통령이 또 시해되었어요. 여기 와서 대통령으로 일한 사람치고 제대로 살아나간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개인 집으로 치면 이런 흉가가 없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이런 느낌을 몰라요. 단임을 아무리 떠들어도 내가 버마에서 죽었다고 해봐요. 내가 살아야 단임이라는 것을 사실로서 입증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내가 지금은 죽어도 괜찮아요. 후임 대통령이 있으니. 내가 죽으면 정말 청와대가 흉가가 돼요. 그래서 내가 내 손주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해요. 총독부 이래 여기서 죽어만 나갔지 태어난 일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새 생명도 탄생한다는 사실로서 청와대를 바꾸어놓은 겁니다.”
올림픽 개회식 불참
올림픽 개회식을 일주일 앞둔 1988년 9월 10일 박세직 조직위원장이 초청장을 가지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을 찾았다. 전두환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참관하느냐 않느냐로 잡음이 일고 있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개회식 참석 요청을 정중히 사양한다.”
박 위원장은 붉어진 눈시울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바쁜 일이 많을 텐데 어서 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TV를 통해서 개회식 광경을 지켜봤다. 단상 로열박스에는 노태우 대통령은 물론 서울올림픽을 히틀러의 베를린올림픽에 빗대며 빈정거렸던 김영삼씨 모습도 보였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북한의 테러가 있을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행사가 무사히 끝나서 기뻤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찾아와서 감사를 표했다. 서울올림픽은 참가국 수와 선수단 규모에서 가장 큰 대회였고 가장 성공적인 대회였다는 치하도 했다. 16일간의 대회가 끝나자 검찰 중수부도 5공 비리 의혹 가운데 내사를 끝낸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소환 조사에 착수했다.〉(회고록)
서울올림픽에 순정을 바치고 이제 힘없는 한 시민으로 돌아온 전두환은 11월 23일 백담사로 떠났다. 6·25로 폐허가 된 나라가 한 세대 만에 세계 앞에서 만들어 보여준 화려한 가을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아무리 힘이 지배하는 국제관계와 세계사지만 간혹 선의(善意)가 힘이 되어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수가 있다. 1950년 6·25 남침 때의 유엔군 파병과 1988년 9월의 서울올림픽이 대표적 사례다. 서울올림픽을 매개로 하여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선진화, 소련 및 동구 공산체제의 붕괴, 그리고 북한 정권의 몰락이 대세화되었다는 것은 이젠 정설(定說)이다. 서울올림픽은 도저히 불가능한 조건에서 성공하였는데, 그 동력은 착한 마음들의 집합이었다. 여러 나라 지도자들의 결단과 세계시민들의 선의가 한 덩어리가 되었으므로 지구촌 전체가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더 자유로워졌고 더 평화로워졌던 것이다. 1950년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세 악당의 음모를 저지하고 살아남았던 나라가 그 34년 뒤 ‘사랑의 복수’를 한 셈이다.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36년 전의 그날, 9월 17일을 생각하면 가슴부터 뛴다. 전날 서울엔 폭우가 쏟아졌지만 개회식은 청명한 하늘 아래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힘차게, 신나게, 아름답게 펼쳐졌다.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던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어 잠실로 달려갔고, 그 뒤 2주 동안 경기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우리 세대의 가장 아름다웠던 나날이었다.
많은 사람이 잊고 있는 사실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2년 전에 있었던 아시안게임의 성공이 예약했다는 점이다. 박세직(朴世直)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은 생전에 “아시안게임을 해보니 서울올림픽은 성공할 것이란 자신과 확신이 생겼다”고 했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던 김용식(金溶植) 외무장관은 자신의 회고록 《새벽의 약속》에 감동적인 글을 남겼다.
1955년 그가 일본 주재 한국 대표부의 대표로 있을 때 진해에서 휴양 중이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찾아가 업무보고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김 대표에게 지시를 구술시킨 후 늦여름의 조용한 진해만을 내려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 줄 아는가?”
노(老)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나는 늘 하나님께,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않게 잘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네.”
“각하, 언제쯤 우리도 남부럽잖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 30년 걸릴 걸세.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지내야 할 걸세.”
〈86년도의 아시안게임이 서울의 잠실에서 개최될 때, 관람석의 한 모퉁이에서 나는 30년 전 이(李) 대통령이 한 말을 회상하였다.〉
‘일본의 國士’ 세지마가 전두환에게 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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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 유치를 조언한 세지마 류조 전 이토추상사 회장. 사진=조선DB |
①남북한 간의 체제경쟁에서 남한의 우위 확보
②제3세계 국가 및 공산권에 대한 외교의 돌파구
③경제발전의 도약점
④사회선진화의 계기가 될 것이다.
대한체육회장이 된 박종규는 1979년 9월 21일 대통령의 재가(裁可)를 얻어냈고 정상천(鄭相千) 서울시장으로 하여금 발표하게 했지만 10·26 사건 뒤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5·17 뒤 박종규마저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됨으로써 서울올림픽 유치 계획은 잠시 실종되고 말았다. 이러다가 1980년 11월 이규호(李奎浩) 문교부 장관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서울올림픽 유치신청서를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내기로 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게 되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공표한 일을 별다른 이유 없이 변경할 수 없다”면서 유치 신청을 허락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대통령에 취임하던 때 내 머릿속에는 1988년 하계올림픽 유치가 하나의 아이디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아이디어를 심어준 사람은 일본 이토추상사(伊藤忠商事) 상담역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씨였다”고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엘리트 작전참모였던 세지마는 소설 《불모지대》의 모델이기도 한데 이병철(李秉喆) 삼성물산 창업자와 친밀했다. 이 회장의 요청으로 1980년 6월 한국에 와서 전두환의 육사 동기생 권익현(權翊鉉·나중에 민정당 대표)의 소개로 전두환 장군을 만났다. 그해 8월엔 다시 와서 대통령 취임을 앞둔 전두환에게 88올림픽 유치를 권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내가 권익현씨의 증언을 토대로 1990년 8월호 《월간조선》에 소개한 바 있는데 회고록은 이 사실을 확인해준 것이다. 세지마는 “장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고 국민의 힘을 한데 모으려면 올림픽을 유치하는 게 좋을 것이다”며 “한반도의 안전이 일본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는 만큼 한국의 올림픽 유치를 적극 돕겠다는 뜻을 비쳤다”고 한다.
당시 일본 나고야시 또한 올림픽 유치 의사를 밝힌 상태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혹시 무슨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선의의 조언’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勸善懲惡의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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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84차 총회에서 서울은 일본의 나고야시를 꺾고 88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
한국의 선의에 악의(惡意)로 대한 것은 김일성 정권이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 저지를 당면 목표로 삼고, 1983년 아웅산 테러, 1986년 김포공항 테러, 1987년 김승일·김현희 조(組)의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을 벌이면서도 공동 개최란 미끼를 던지고 대응 행사로 세계청년축전의 개최를 추진했다. 이런 음모는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실패했다. 미얀마 외무장관이 정시(定時)에 와서 전두환 대통령을 아웅산 묘소로 안내했더라면 17명의 사망자는 18명이 되었을 것이고, 한국군은 서울올림픽을 포기하고서라도 대북(對北) 응징에 나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을 것이다.
일본 외교관이 바레인 공항에서 김승일·김현희의 출국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또 김현희가 독약이 숨겨진 담배개비를 깨물려다 어머니 생각에 멈칫하지 않았더라면 115명이 죽은 폭파 사건은 안기부의 자작극으로 몰려 서울올림픽의 분위기를 망쳤을 것이다. 북한 정권은 평양 세계청년축전 개최에 50억 달러를 투입했는데 이게 경제를 망쳐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을 예약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은 도덕 교과서에서만 배울 필요가 없다. 세계적 규모에서 착한 사람들이 이기고 나쁜 사람들이 진 곳에 서울올림픽이 있었다.
선의는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다. 선의는 유능해야 힘이 된다. 서울올림픽 주체 세력의 유능은 최다(最多)의 참여, 최고(最高)의 경기 운영, 최대(最大)의 수익으로 수치화되었다. 박정희·전두환의 올림픽 대전략을 외교 현장에서 집행한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동구와 소련 공산체제가 무너지고 있는 기회를 잡아 서울올림픽의 성과를 북방외교로 확대시켜 임기 중에 한소(韓蘇), 한중(韓中), 한·베트남 수교를 이루고 유엔 동시 가입까지 성공시켜 한국인의 활동 공간을 지구촌 전체로 확대시켰던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동구 소련 사람들을 각성시켜 이듬해 1989년의 공산체제 붕괴를 재촉한 요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6·29 선언을 통하여 한국의 민주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에는 인색하다. 전두환 대통령은 단임제 실천으로 평화적 정권 이양, 물가 안정을 기본 축으로 한 경제 성장, 그리고 올림픽 준비를 자신의 3대 임무로 설정,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세 개 가운데 가장 정성을 다해 챙긴 것은 서울올림픽이었다.
“올림픽은 하늘이 고생하는 한민족에게 선물로 준 것”
제5공화국의 청와대는 통치사료 담당 비서관을 두었다. 조선조의 사관(史官)을 닮은 이 자리에 있었던 김성익(金聲翊)씨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이었다. 1986~88년 사이 그가 기록한 격동기의 대통령 언행은 드라마 대사처럼 생생하다. 비공개 자리에서 쏟아낸 입담 좋은 전두환 대통령의 솔직한 말은 구수하고 인간적이기도 하다. 올림픽과 관련된 전두환 어록을 따라가다가 문득 ‘순정’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서울올림픽에 꽂힌 한 사나이의 순정!
1986년 3월 1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 운영계획보고회가 대통령 주재로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만제(金滿堤) 부총리,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 손제석(孫製錫) 문교, 박세직(朴世直) 체육, 이해원(李海元) 보사부 장관, 김종하(金宗河) 대한체육회장 등 135명이 참석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렇게 강조했다.
“86·88을 우리가 어떻게 유치했습니까. 우리 한민족이 하도 고생을 많이 하고 잘해보려고 해도 안 되고 하니 하늘이 큰 선물로 준 것인데 이런 걸 활용 못 하는 민족은 이 지구상에 살아남을 수 없어요. 살아남아도 종노릇밖에 할 게 없어요. 이것을 우리가 소화하지 못하면 후손에게뿐 아니라 나라와 역사에 죄를 짓는 거요. 모든 분야에서 끝마무리를 잘해주기 당부합니다.”
그는 자신의 결단으로 유치에 성공한 88서울올림픽에 유별난 애정을 가지고 준비에 정력을 쏟았다. 수시로 전방과 치안 일선을 시찰, 안전 문제를 점검했으며 틈날 때마다 올림픽 경기장 건설 현장과 태릉 선수촌 등을 돌아보는 등 ‘올림픽 준비단장’을 자처했다.
1986년 3월 17일 대통령은 청와대 만찬에 기독교 지도자들을 초대했다. 여기서 올림픽이 남북관계에서 결정적 변수가 될 것임을 예언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하면 자동적으로 16일간 텔레비전을 돌려서 전 세계 40억 인구가 보게 됩니다. 그 선전비를 돈으로 따지면 얼마가 되겠어요. 그게 바로 우리 국력이고 경제력이고 우리 제품에 대한 보장이 됩니다. 그렇게 밀고 가면 북한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체제가 무너집니다. 그걸 북한이 잘 알 겁니다. 자기네 체제를 유지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기로입니다. 김정일이가 세습을 하려면 한국이 86·88을 못 하게 해야 하고, 그러려면 버마 사건 식으로 게릴라를 집어넣는다든지 가만 안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국과도 협조해서 군경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스스로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는 것을 한 번도 못 한 나라 아닙니까. 그래서 갈등과 불신도 있습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두고 권력을 잡으면 내놓기가 힘들어요. 내가 해보니 그렇습니다. 나한테도 88올림픽이나 마치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미국 상원의원, 우리 야당 의원도 있었습니다.
나보고 군인 출신이다 뭐다 하는데 나도 나름대로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내가 집권한 후 학생들이 시끄러워도 치안을, 경찰에 의해서 유지해왔습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한 일이 없어요. 모든 문제를 힘이 아니고 순리로 하려고 무척 애를 써왔습니다. 정치인은 혼란이 생겨야 수지가 맞지만 혼란이 생겨 손해 보는 것은 국가와 국민입니다.”
“사마란치, ‘올림픽까지 계속 집권’ 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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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과 사마란치 IOC 위원장. 사마란치는 전 대통령이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퇴임하는 것을 우려했다. 사진=조선DB |
“내가 늘 말하지만 대통령이 어떤 일이 있어도 임기를 마치기 전에 죽지 않고 임기를 마치고 살아 나가면 민주주의 발전에 큰 전기(轉機)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내가 반드시 살아서 나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설사 빨리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더라도 나라를 생각해서는 내가 살아서 임기를 끝내고 물러가야 됩니다.
북한이 우리한테 별별 방해 공작을 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올림픽을 반대하다가 공동 주최하자고 하다가 이제는 종목을 반반씩 나누자, 24개 종목 중에 열 종목만 내놔라 운운. 내가 이번에 IOC 위원장을 만나보니 소련, 중공, 쿠바, 동구권이 어울려 IOC에 겁을 주었답니다. 이북에서 올림픽 종목을 몇 종목 안 주면 서울을 밀어버린다고 한다는 거예요. 언론에는 비밀입니다만 내가 구라파 방문 중에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스페인에서 스위스로 날아와서 만났습니다. 이분이 손을 떨면서 긴장해요. 이북이 군사적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얘기를 해요. 립시 주한미군 사령관이 미국에서의 기자회견에서 북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했는데 괜찮으냐고 나에게 물어요. 그래서 당신이 직접 들었느냐고 물었어요. ‘직접도 듣고 소련, 중공, 쿠바 등 몇 나라에서도 그러더라’는 얘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러지 말고 이북한테 10개 종목을 떼어주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면 어떠냐’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절대 그런 얘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한국이 이북에 비해서 군사력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50년대처럼 그렇게 약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한미군이 있지 않으냐,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북에 한 종목도 못 준다고 했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의연하게 잘해왔는데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걱정 마라’고 했습니다.
사마란치 위원장 말이 ‘그렇지만 각하는 88년 2월에 그만두시지 않느냐’고 해요. ‘그만두시면 국내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내가 우리 국민이 얼마나 우수하냐, 나보다 백배 잘할 유능한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올림픽은 내가 책임지마, 걱정 말라고 거듭거듭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 ‘군대 문제는 미군이 있어서 안심이 되는데, 대통령께서 올림픽만 마쳐주고 그다음에 그만두면 어떠냐’고 해요. 그래서 내가 ‘헌법 때문에 안 된다’고 하니 ‘야당과 협상하면 되지 않느냐, 1년 정도인데 뭐 그리 어렵겠느냐’고, ‘88년 2월에 퇴임하시기 때문에 걱정이 된다’고 했어요.
86·88이 다가오는데 나도 대통령을 무사히 끝내고 안전하게 보따리 싸서 우리 집에 돌아가도록 선례를 남겨야 선진화하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가급적 내가 속상한 일을 참고 순리로 여론에 의해 풀려나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독사도 밟으면 무는 겁니다.
외국 언론이나 외국 국회의원이 정부를 까면 우리 언론은 좋다고 그걸 잡아서 쓸 게 아니라 우리 정부를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아웅산 사건 후 군의 보복을 말렸다”
1986년 8월 11일 오전 전(全) 대통령은 청와대 상춘재에서 청와대 출입 기자단과 간담회를 가졌다.
“버마에서 아웅산 사건을 당하고 몇 분(分) 사이로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난 다음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잠이 오질 않았어요. 내가 그때 내자에게 말했어요. 이번에 내가 만약 죽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됐겠느냐고. 내가 살았으니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하늘이 하는 일이지, 인력(人力)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지 않으냐, 내가 살았다는 것은 분명히 하늘이 나한테 하라고 하는 일이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새로이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전쟁을 막아야겠다, 그래서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이와 같이 내 집념은 생사를 넘는 강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KAL 007기 격추 사건이 얼마나 슬프고 원통한 일이었나, 그리고 한 달 후에 버마에서 북한이 나를 죽이려고 테러를 했는데 원래 국가 원수에 대한 테러는 선전포고 사유가 될 수 있어요. 그때 우리 군에서는 육군, 해군, 공군 할 것 없이 북한을 때리려고 해서 세네월드 UN군 사령관이 얼굴이 새하얗게 됐어요. 내가 버마에서 돌아와 보니 군에서 전부 때릴 준비가 다 되어 있었어요. 위에서 승인을 안 해도 들어가겠다는 거야.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으냐고. 그래서 내가 그 보고를 받고 바쁜 가운데에서도 전방을 돌고 군 지휘관들을 만나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준 데 대해서는 감사한다. 그러나 전투를 하고 안 하고 하는 상황 판단은 국가 원수로서 폭넓게 보니 여러분보다는 낫다. 내가 필요한 시기, 적절한 시기에 때리라고 할 때 때리라고 했어요. 내 명령 없이 병사 한 명이라도 넘으면 나에 대한 불충이다, 내 명령에 따르라, 그렇게 진정을 시켰습니다.
지금 북한이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88년까지 승부를 보려는 저의를 갖고 있다고 나는 봐요. 북한은 30년 이상 국민 복지를 희생하고 군사비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GNP 규모가 해마다 커지니까 북한이 군사력으로 경쟁하는 데는 한계가 오게 되어 있어요. 88년에 올림픽과 정권 이양이 잘 끝나면 북한은 대화 노선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90년에 가면 틀림없이 진짜 대화를 하려고 할 것이고 올림픽만 끝나면 중공과 소련도 우리한테 태도가 달라질 겁니다. 그러나 어떤 분야든 우리가 취약점을 보이면 저네들은 집중 공격을 해요.”
“우리 대머리 세 사람이 야간 경기에 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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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20일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손을 흔드는 전두환 대통령 부부. 하지만 2년 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사진=조선DB |
〈대통령: 아시안게임은 어느 나라에서 치르는 것보다도 훌륭하게 치를 만반의 준비가 다 돼 있습니다. 방해하려는 집단이 있기는 하지만 여러분이 조금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사마란치 위원장: 제가 이곳에 여섯 번이나 왔습니다. 올림픽 가족을 대표해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는 저희의 기쁨을 말씀드립니다. 86아시안게임뿐 아니라 88올림픽에서 대성공을 거두기를 희망합니다.
대통령: 내가 사마란치 위원장을 스위스에서 만난 것까지 합치면 일곱 번을 만났는데 여기 계신 여러분을 다 두 번 이상 만났기 때문에 나도 올림픽 가족임을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IOC의 티토프 씨는 내가 소련인과 오찬을 같이하는 최초의 손님입니다. 의미가 있고 나도 아주 즐겁습니다. 독일의 바이츠 부위원장은 내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대통령 오찬 때 이어 오늘이 두 번째 오찬입니다. 두 분이 다 대머리이신데 나와 셋이 나가면 주변이 환해질 겁니다(참석자들 웃음). 야간 경기 할 때 우리 세 사람이 나가 있으면 선수들이 행복해할 것입니다(참석자들 폭소).
대통령: 티토프 씨는 언제 체조 금메달을 땄나요?
티토프: 56년 올림픽에서였습니다.
대통령: 티토프 씨, 우리도 조금만 기술을 배우면 체조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을 텐데 이번에 안 바쁘면 비법을 한두 가지만 가르쳐주고 가시오.
티토프: 작년에 각하를 뵌 후에 소련 코치로 하여금 한국 코치를 일주일 지도하게 했습니다. 각하 말씀을 소련 코치에게 전하겠습니다.
사마란치: 하계올림픽 회장인 국제육상연맹 회장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로마 교황과도 친분이 있습니다.
대통령: 교황께서 이곳을 다녀가셨는데 아주 훌륭한 분이더군요. 오시기 전에 한국말도 공부를 했는지 아주 잘했어요. 우리 경제가 너무 빨리 성장하는 문제가 있어서 경기를 조금 진정시키고 있어요.
사마란치: 다른 나라에서는 부러워합니다. 한국이 이렇게 발전하고 국민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와서 봐야만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올림픽 준비 상황은 말로가 아니라 진실로 훌륭합니다.
대통령: 1960년도에 우리 개인 소득이 82달러였는데 지금은 20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국제 환경에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90년에 가면 약 4000달러가 될 것입니다. 금년에 10.9% 성장될 전망이어서 10% 이하로 떨어뜨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퇴임 후 1986년이 가장 행복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해는 무역흑자를 처음으로 기록했다고 해서 흑자원년으로 불린다. 1985~87년의 3년간은 민주화 시위가 가장 격렬했으면서도 경제성장률 또한 가장 높았다. 이 시기의 소란을 추억하면 뭔가 밝게 느껴지는 것도 경제호황 속의 최루탄과 투석과 화염병과 함성이었기 때문이다. 평화적 정권 이양과 서울올림픽 성공은 이런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1980년대 10년간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0.1%로서 세계 1위였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80년대의 위대한 성취들, 평화적 정권 이양·서울올림픽·일본 따라잡기·IT 기반 확보·북방 정책이 펼쳐졌던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善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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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중 수시로 관련 시설들을 돌아보며 올림픽 준비에 전력했다. 1986년 5월 28일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시찰하는 전두환 대통령. 사진=조선DB |
김일성은 1986년 가을 모스크바로 가서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2년 전 그는 소련을 방문했을 때 “이것이 나의 마지막 해외여행이다”고 얘기했었는데 왜 또 갔을까?
그 수수께끼는 독일 통일 이후 동독 공산당 정치국 비밀문서 속에서 풀렸다. 1986년 11월, 즉 김일성의 두 번째 방소(訪蘇) 한 달 뒤 모스크바에서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김일성이 자신을 찾아와 소련과 공산권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고르바초프는 김일성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 수뇌회의에서 서울올림픽 참가 여부가 논의되었다. 쿠바 수상 카스트로만이 보이콧에 찬성했고 다른 나라들은 참가를 결의했다. 남북한이 공동 개최를 하는 방향으로 노력해보고 그것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재독(在獨) 서병문(徐炳文) 박사는 “86년 11월의 이 150여 페이지짜리 수뇌회의 기록을 읽어보면 이 회의가 공산권의 급속한 개혁·개방을 재촉하는 분수령이었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회의에서 공산주의가 실패했음을 솔직히 밝힙니다. 이제는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고 국민이 잘살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 퍽 감동적입니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공산권 국가들이 결정한 데는 국내적인 압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공산국가는 모두 체육 강국인 데다가 두 차례나 반쪽 올림픽을 치러 또다시 보이콧할 경우 국민들의 불만이 커질 것을 우려했을 겁니다. 북한은 동독에 대해서도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이것만은 호네커가 듣지 않았습니다. 서울올림픽은 남북한 간의 결전이었을 뿐 아니라 동구 공산권의 붕괴를 앞당긴 촉매제였습니다.”
“평화적 정권 교체와 올림픽 성공시킬 수 있는 인물이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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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는 전두환 대통령의 뜻에 따라 노태우 대표를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대회장 밖에서는 최루탄이 터지고 있었다. 사진=조선DB |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그동안 국군보안사령관 등 군의 주요 지휘관을 역임해서 누구보다 군부를 잘 알고 탁월한 안보 식견을 갖추고 있으며 내무장관과 정무, 체육부 장관 등 행정부의 직책을 맡아 정부 조직에 정통할 뿐 아니라 올림픽 조직위원장과 국회의원, 집권당 대표위원 등을 거쳐 당과 정치인의 생리를 알고 체험을 쌓음으로써 국정을 책임질 수 있는 정치 지도자의 경륜을 두루 쌓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당에 대한 국민의 지속적인 신뢰를 확보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와 88올림픽의 국가 양대사(兩大事)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적임자로 노 대표를 추천하는 나의 이 뜻을 여러분이 흔쾌히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격화된 반(反)정부 시위 속에서도 전두환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을 챙긴다. 6월 16일 신임 이한기(李漢基) 총리서리 등 국무위원 전원을 부부동반으로 청와대로 초청, 축하 저녁을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10년 주기로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박종철 사건 하나로 시작이 되어 시끄러운 일이 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한 번은 겪어야 할 과정입니다. 체육부 장관이 좀 나서야겠어요. 올림픽을 방해하려는 북괴의 사주에 의해 움직이는 게 분명한데 내가 염려한 대로 벌써 《뉴욕타임스》 등에서는 시위 사태에 따라 올림픽의 안전 문제를 들고나오는 모양이던데, 반체제와 반정부 세력이 연합전선을 펴는 데 빨리 이 줄을 끊어야 되겠어요. 올림픽이라는 게 다시 없는 호기인데 북한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거요.”
“정권 잃는 한이 있더라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1987년 6·29 선언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 겸 대통령 후보의 고독한 결단으로 포장되었으나 사실은 전두환 대통령이 먼저 노태우 후보에게 제의하여 이뤄진 것이다. 한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정치적 도박이었다. 이 선언으로 전날까지 가장 미움을 받던 노태우는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이 되어 그해 대선에서 승리, 직선제 초대 대통령이 되고, 서울올림픽을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성공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북방 정책을 추진, 격변기의 동구, 소련, 중국, 베트남과 수교, 북한을 고립시키고 한국인의 삶의 무대를 바꾼다. 6·29 선언을 결심하는 데 있어서 전두환 대통령 머리엔 서울올림픽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7년 6월 28일 일요일 아침 전두환 대통령은 연설문 담당인 김성익 비서관을 청와대 식당으로 불렀다. 그는 약 50분 동안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담화문 작성에 참고하도록 6·29 선언의 내용과 후속 일정을 미리 구체적으로 일러주면서 직선제 수용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노(盧) 대표 의견도 그렇고 직선제로 나가야겠어. 지식층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그걸 원하고 있어. 우리가 직선제를 안 받을 이유가 없다. 선진국에서도 직선제를 하는 나라가 거의 없고 또 직선제는 선거가 끝나면 결과에 승복을 안 해서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안 받았는데 직선제를 하지 않음으로 해서 야기되는 혼란보다는 적을 것 아닌가. 국민이 원하면 해보자.
직선제를 해서 나라가 망하는 일이 생기면 불행하지만, 중산층이 혼란을 원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주장해온 대로 대통령 선거법을 고쳐서 직선제에 가까운 간선제를 할 수 있지만 국민들이 직선제를 하자고 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시끄러워서는 평화적 정부 이양도 안 될 뿐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우리가 약속한 올림픽도 안 될 것 같아. 내 소신은 정권이 민정당에서 떠나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되겠다는 거야. 그게 나라가 잘되는 길이다.”
역사가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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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노태우 콤비는 1987년 6·29 선언으로 정국을 단번에 뒤집어놓았다. 사진=조선DB |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나서 닷새 후에 7월 7일 당 총재직을 사퇴함으로써 정치인과 지식인층, 그리고 국민들한테, 사심(私心) 없이 해온 내 이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김대중은 직선제가 되면 대통령 선거에 안 나가겠다고 했지만 안 나올 리가 없다. 김영삼도 마음을 비웠다고 했지만 그렇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은 안 하지만 행동으로 사심이 없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확실히 하는 거야.
당 총재직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영구 집권이라고 하고 또 현실적인 권력 구조로 볼 때 다음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게 된다. 전 국민과 전 세계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던지고 프리(free)하게, 페어플레이(fair play)하는 거다.”
전 대통령은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그것을 보면서 6·29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하나 구술해주었다. 며칠 전부터 직선제로 방향이 선회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으나 막상 구체적인 내용을 듣는 순간 김 비서관은 “역사가 큰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한 충격과 흥분으로 잠시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우선 대통령이 민의(民意)를 있는 그대로 읽고 있다는 점과 시국(時局)을 이상한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점에 안도감을 가졌다. 그다음으로 생각이 미친 것은 모든 국민이 소망하는 이 좋은 소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놓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1987년 6월 28일 오후, 직선제 선언을 대통령 명의로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김성익 비서관의 건의를 받고 전두환은 6·29의 배경 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직선제 이외에는 국민 대중과 중산층에 뭘 갖다 대도 속임수 인상을 주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힘으로 해서 노 대표가 대통령 된다고 해도 1년도 못 가. 저 사람들이 지금 올림픽을 담보로 잡고 있는데 다음 정권을 힘으로 만들면 올림픽도 못 치른다. 그러면 역사의 큰 호기를 놓친다. 내 손으로 우리 대통령을 뽑겠다는 직선제 민의를 우리가 받아준다고 해서 야당한테 지지 않는다.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외부적으로는 역할분담론이 나와 있지만. 직선제를 받는 것은 야당과 언론의 급소를 찌르자는 거야.
얽히고설킨 것, 원한 많은 사람들한테, 누가 권력을 잡든, 어떤 정권이 잡든지 간에 맺힌 원한을 모두 풀어주겠다, 그래서 모두가 깨끗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나라의 백년대계를 향해서 출발하자는 거지. 내가 그 뚜렷한 명분과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 직선으로 다음 정권을 창출해내야 돼. 대통령 후보는 노태우 아닌가. 노 대표가 부각되도록 하는 것이 제일의 목표다. 노 대표 이름으로 해야 돼. 나는 국민으로부터 정치는 무능하구나 하는 소리를 듣더라도 노 대표가 부각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다. 사실은 내가 노 대표한테 직선제를 받도록 시킨 것이다. 2주일 전에 그랬는데 노 대표가 펄쩍 뛰었어.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그래서 내가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라고 했다. 그쪽에 팀이 있는 모양인데 극비리에 작업을 해왔다. 더 이상 보안을 하기도 어려운 모양이야. 괜히 질질 끌어서 미루면 담화 발표의 참뜻이 없어진다.”
전두환 대통령은 6월 18일 부산에서 시위대가 시청을 포위하는 것을 보고 다음 날 군 출동 준비 명령을 내렸으나 오후에 취소했다. 계엄령 선포 소문이 퍼지도록 하여 자제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면 서울올림픽은 날아간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중산층이다’는 이들이 70%나 되었다. 그들은 시위 격화로 서울올림픽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올림픽은 정권과 시위대 양쪽에 다 브레이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혈(無血) 민주화의 길을 연 6·29 선언은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다.
“김대중이 열세, 김영삼을 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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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1987년 6·29 선언 다음 날 박세직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과 함께 미사리 올림픽 조정경기장을 둘러보았다. 사진=조선DB |
“앞으로 공략 목표를 김대중보다는 김영삼에 두라고 하시오. 김대중이 열세야. 이 사람은 구속학생 모임, 서대협, 대구학생 모임 등에 나가는데 2·12 총선 때 학생들이 일어나서 야당 붐을 조성하듯이 이번에도 학생들을 최후 보루로 쓰는 것 같아. 조직의 핵심을 학생에 두고 있어요. 김대중이 열세가 되면 야당 후보가 단일화되거나 김영삼으로 집중될 우려가 있어요.”
1987년 12월 대선(大選)의 가장 큰 쟁점은 전두환 정권의 치부인 12·12 사건이었다. 그해 9월호 《월간조선》에 정승화(鄭昇和)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기사가 실린 직후 김영삼은 그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 군사반란 세력 단죄를 다짐하니 정권 측은 긴장하게 되었고 선거판이 살벌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김영삼이 주적(主敵)으로 되고 김대중을 전략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계산이 이뤄진 것이다.
1987년 12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은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들을 불러 점심을 대접하면서 9일 전에 있었던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에 대하여 올림픽 방해 책동이라고 설명한다.
“KAL기가 공중 폭파된 게 틀림없다고 나는 봐요. 상당히 센 폭탄인 것 같아요. 해상에 떨어진 부상물(浮上物)이 거의 없어요. 범인을 잡아낸 게 우리 국력입니다. 이북은 두 가지를 목표로 한다고 봐요. 첫째는 대통령 선거가 있으니 이북에서는 이 기간에 최대한 혼란을 조성해서 선거가 안 되게 해야겠다 하는 것과, 둘째는 전 세계에서 올림픽에 참가하려는데 다 죽을 위험성이 있다고 겁을 주어서 참가를 안 하도록 하는 것으로 봅니다. 북한의 계획적인 테러인 것만은 분명해 보여요. 다른 나라는 이런 짓을 할 나라가 없고 할 이유도 없어요. 시체와 범인 여자를 인수해보면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전모를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가 지금 신경 쓰는 게 이북이 대통령 후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해칠까 봐 걱정입니다.”
KAL기 폭파 사건이 난 것은 11월 29일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테러 때와 마찬가지로 즉각 북한의 계획적인 범행이라고 추정했다. 폭파범 ‘마유미’는 12월 15일 서울로 이송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12월 10일 오전 제5공화국 경제치적 보고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정을 다지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허무는 것은 삽시간입니다. 건물 짓는 데는 5년에서 7년이 걸리지만 불을 싸지르면 하루 만에 다 타요. 이번 KAL 사건도 보세요. 그 뜨거운 중동에 어려운 사람들이 가서 일을 끝내고 손에 몇 푼씩 쥐고 희망에 차서 귀국하는데 폭발시키는 참사가 났어요.
이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외면하고 김일성을 순화해서 평화 공존시킨다고 하는데 김일성이 순화될 인물입니까. 그 얘기 하고 나서 며칠 안 돼 총격을 가해왔고 이런 참사가 일어났어요. 모스크바에서 얘기를 해도 말 안 듣는 김일성을 우리 대통령이 순화하고 타일러서 한반도에 평화 정착을 시키려 하는 것은 얼마나 소견머리 없는 일입니까.”
1988년 12월 18일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김대중-김영삼 분열구도 덕분에 3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6·29 선언을 결심할 때의 계산이 적중했던 것이다.
“감정이 북받쳐서 순순히 내놓을 기분이 아닐 때도 있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1월 7일 저녁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송별만찬을 가졌다. 인간적인 토로 속에서 또 올림픽 이야기가 나온다. 한 기자가 “집권 연장의 유혹을 느낀 적은 없으신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유혹을 느꼈다기보다 유혹한 사람들이 내외국인 중에 많았어요. 내가 85년에 미국에 갔었는데 민주당 상원의원 한 사람이 한국이 유치한 올림픽이 얼마나 중요한 거냐,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계속해야 되지 않느냐고 진지하게 얘기했어요. IOC 조직위에서는 수차, 대통령을 보고 서울올림픽을 결정했는데 바뀌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어요. 국내에서도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한 임기 더 하는 게 좋지 않으냐고 노골적으로 얘기한 전직 국회의원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나 같은 사람이 대통령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느냐, 나보다 훌륭한 분이 줄을 서 있다. 우리 국민은 우수하기 때문에 누가 후임 대통령이 되든 훌륭한 지도자로 양성해줄 거고 어려울 때 단합하는 힘이 있으니 절대 걱정 말라고 했어요. 작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이래서 정권을 이양할 수 없었겠구나, 이해가 갔어요. 내가 정권을 내놓는다고 하면 내가 잘못이 있더라도 덮어주고 보호해주려고 해야 하는데 내놓는다니까 까뒤집고 해요. 박건석(朴健碩)인가 하는 사람이 떨어져 죽은 사고가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 꼴도 잘 몰라요. 그런데 정부가 그 사람 돈을 먹었다고 공격하고.
사사건건 그런 식으로 물고 늘어지면 정치가 안 되고 투쟁이 돼요. 권투 선수를 뽑아서 권투를 하는 게 낫지. 사람이 감정의 동물입니다. 나가는 사람, 가만있는 사람 약을 올리면 이성을 잃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맞아 죽는 게 창피 안 당하고 더 행복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어요. 감정이 북받쳐서 순순히 내놓을 기분이 아닐 때도 있었어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어요.”
“겨우 잡은 선진국 문고리 삐끗하면 다시 닫혀”
다른 기자가 “재임 7년간 남기고 싶었던 게 뭐냐고 한다면 선진국의 문고리를 잡게 된 것이라고 말씀한 일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우리가 문고리는 열어놓았는데 이게 잘못하면 닫힌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국민이 조금만 합심하면 선진국이라고 하는 안방을 차지하게 돼요. 그래서 앞으로 4~5년이 정말 중요해요. 소련과 중공을 자유스럽게 여행할 수 있는 환경 변화가 올 것이고 이북과도 동·서독 정도로 교류가 트일 것으로 나는 봐요. 나는 우리 국민의 우수성을 실감했어요. 똑똑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비판도 많고 말도 많아요. 둔한 사람들이 많으면 통치하기는 쉽겠지만 발전은 없어요.”
또 다른 기자가 “대통령으로서의 경험을 후임 정부와 협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이라고 물었다.
“후임자는 나와 친한 사이니까 고통 스럽고 고민스러운 일이 있으면 자문을 해달라든지 요청이 있지 않겠나 봐요. 그러면 내가 그분을 위해 다소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요. 친하다고 해서 요청도 없는데 나서면 상호 불편해져요. 부자지간에도 자기 철학과 원칙에 따라서 하는 거니까.”
김성익 통치사료 비서관은 이런 메모를 남겼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 무렵 송별모임에서 자신의 심경을 말하는 일이 많아졌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한 데서 나오는 착잡한 느낌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 후임자 측의 분위기가 전해지면서 청와대 분위기는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전 대통령 역시 뭔가 섭섭한 느낌을 털어놓을 때가 있었으며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1월 14일 언론사 편집국장들과 가진 오찬 석상에서 “어떤 수모라도 참고 견디겠다는 각오가 없으면 대통령을 내놓을 수가 없다” “노태우가 모든 것을 잘 봐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섭섭한 꼴을 따지면 대통령 못 내놓아요. 요다음 사람이 잘해주면 대통령을 임기 동안 끝마친 전임 대통령이 한 사람 있다 하는 것으로 내외적으로 민주주의 의식이 달라지지 않겠느냐 봐요.”
레이건 대통령의 善意
이 무렵 서울올림픽의 성공에 선의를 가지고 신경을 써주고 있었던 이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었다.
《레이건 일기》의 567페이지에는 1988년 1월 14일 목요일에 쓴 내용이 실려 있다.
〈백악관 안보회의를 열었다. 한국의 스파이 이야기가 보고되었다. 바레인에서 잡힌 24세의 여성은 대한항공 폭파 용의자인데 자신이 북한 공작원이며 올해 열리는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자백을 했다고 한다.〉
이 일기는 당일 안기부의 김현희 수사보고를 인용한 것이다. 미국이 서울올림픽이 안전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소련을 통하여 북한 정권에 압력을 넣은 일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레이건 대통령, 슐츠 국무장관, 칼루치 국방장관까지 나서서 소련을 움직였다. 이런 사실은 1988년 6월 8일 청와대로 노태우 대통령을 예방한 프랭크 칼루치 미 국방장관의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칼루치 장관은 크라우 합참의장 등을 대동했다. 그는 그 직전에 있었던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에 대해서 보고하면서 서울올림픽의 안전 문제에 대해 거론했음을 밝혔다.
〈북한 문제와 올림픽 안전에 관해서는 수차 소련 측에 의견을 개진하였는 바, 셰바르드나제 외상은 오찬 시 레이건 대통령께 북한은 도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대하여 미국 측에서는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나, 분명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슐츠 장관은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소련 측에 북한이 최근 SA-5 미사일을 전방배치 한 것을 지적한 바 있고, 본인도 만찬석상에서 옆에 앉은 그로미코 의장(과거 25년간 외상을 지냄)에게 촉구하였던 바, “그는 북한에 알아본 바, 올림픽을 방해할 하등의 의사가 없다고 하더라”고 하였으며, 본인이 한국 측에 그렇게 전달해도 되겠냐고 문의한 데 대해서 좋다고 확답을 하였습니다.〉
“살아서 청와대를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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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2월 25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후 손자를 안고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사진=조선DB |
“친구지만 노태우도 인간 전두환은 잘 알아도 대통령 전두환은 이해 못 합니다. 그동안 나한테 와서 자기 얘기하고 내 얘기만 듣고 갔지 대통령의 고충을 알 길이 없어요. 앉아보면 ‘권위주의 청산’ ‘보통 사람’ 며칠 후에 없어질 겁니다. 인기만 끌다가는 1~2년 안에 나라 망칩니다.
나는 2월 24일까지 가차 없이 할 겁니다. 사람이 인기 먹고 삽니까. 지금 권위주의 배격 운운하는데 여러분이 전공하는 분야에서는 권위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면 해요. 교육계에 대가(大家)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옆의 사람 좋은 말하면 깎고 서로 치고받다 보니 대가라는 이름 듣는 사람이 없어요. 대가가 아니라도 추대해서 만들어야 됩니다. 군사독재라고 떠들어도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된 건 틀림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정통성의 시비가 있을 수 없게 되었으니 여러분이 교육을 하는 데에도 명분이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2월 19일 자신의 재임 중에 청와대를 출입한 언론인들과 청와대 출입기자단을 점심에 초대한 자리에서 “청와대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흉가입니다”라고 했다.
“보통 집으로 말하면 재수 없는 집이지. 이기붕 일가가 몰살하고 이승만 박사 쫓겨나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와서 육 여사가 시해되고 박 대통령이 또 시해되었어요. 여기 와서 대통령으로 일한 사람치고 제대로 살아나간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개인 집으로 치면 이런 흉가가 없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이런 느낌을 몰라요. 단임을 아무리 떠들어도 내가 버마에서 죽었다고 해봐요. 내가 살아야 단임이라는 것을 사실로서 입증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내가 지금은 죽어도 괜찮아요. 후임 대통령이 있으니. 내가 죽으면 정말 청와대가 흉가가 돼요. 그래서 내가 내 손주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해요. 총독부 이래 여기서 죽어만 나갔지 태어난 일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새 생명도 탄생한다는 사실로서 청와대를 바꾸어놓은 겁니다.”
올림픽 개회식 불참
올림픽 개회식을 일주일 앞둔 1988년 9월 10일 박세직 조직위원장이 초청장을 가지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을 찾았다. 전두환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참관하느냐 않느냐로 잡음이 일고 있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개회식 참석 요청을 정중히 사양한다.”
박 위원장은 붉어진 눈시울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바쁜 일이 많을 텐데 어서 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TV를 통해서 개회식 광경을 지켜봤다. 단상 로열박스에는 노태우 대통령은 물론 서울올림픽을 히틀러의 베를린올림픽에 빗대며 빈정거렸던 김영삼씨 모습도 보였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북한의 테러가 있을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행사가 무사히 끝나서 기뻤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찾아와서 감사를 표했다. 서울올림픽은 참가국 수와 선수단 규모에서 가장 큰 대회였고 가장 성공적인 대회였다는 치하도 했다. 16일간의 대회가 끝나자 검찰 중수부도 5공 비리 의혹 가운데 내사를 끝낸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소환 조사에 착수했다.〉(회고록)
서울올림픽에 순정을 바치고 이제 힘없는 한 시민으로 돌아온 전두환은 11월 23일 백담사로 떠났다. 6·25로 폐허가 된 나라가 한 세대 만에 세계 앞에서 만들어 보여준 화려한 가을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