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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의 시각

이병호 전 국정원장의 《좌파정권은 왜 국정원을 무력화시켰을까》를 읽고

李炳浩 전 국정원장의 질문: “왜 문재인 정권은 국정원을 조준했나”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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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 투사가 된 정보맨의 회고록 讀後記

⊙ “국정원을 조준한 것은, 그들의 정체와 비리와 무능을 가장 잘 아는 조직이기 때문”
⊙ “惡役 자임했던 정보부는, 조국 근대화의 功過를 박정희와 나눠 가져야”
⊙ 4대 실수: 동백림 사건 수사, 김대중 납치 사건, 박동선 로비 스캔들, 아웅산 테러 막지 못한 것
⊙ “국정원처럼 박해받은 정보기관은 문명국가에선 없다”
이병호 전 국정원장. 사진=조선DB
  이병호(李炳浩·84) 전 국정원장이 문재인 정권 때 이른바 적폐수사 광풍에 걸려 2년여 감옥 생활을 하고 나와서 작심하고 쓴 회고록 《좌파정권은 왜 국정원을 무력화시켰을까》(기파랑, 366쪽, 1만8000원)는 최고급 수필집이다. 음지(陰地)의 전사(戰士)가 쓴 역사, 권력, 인간, 철학, 그리고 문학적 교양이 단단한 문장력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자신을 “21세기 정치범”이라고 부르며 고통 속에서 이 책이 탄생했다고 적었다.
 
  〈나에게 감옥이란 새로운 눈으로 내 삶을 되돌아본 진정한 발견의 광야였다. 은혜와 감사를 발견한 연단(鍊鍛)의 시간이었다. 내 삶 속에서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 능력으로 이룩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은혜가 내 삶 속에서 역사하여 오늘날의 나 됨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형 집행 5분 전에 극적으로 사면된 바 있는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썼다. 나는 이제 감히 이렇게 쓸 수 있다. 지난 6년간의 내 고난은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 소중한 연단의 시기를 보냈다고.〉
 
 
  식민지 관료형 판사·검사들
 
  저자(著者)는 책 제목을 통하여 이렇게 묻는다.
 
  “좌파정권은 왜 국정원을 무력화(無力化)시켰을까.”
 
  그러고 이렇게 답한다.
 
  〈왜 국정원을 조준했을까. 민주화 세력으로 위장한 운동권 세력의 사상과 정체, 그리고 비리와 무능을 가장 잘 아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세계 정보기관 역사상 우리나라 국정원처럼 박해받은 정보기관은 없다. 자해적 폭거이고 명백한 반(反)국가 행위였다. 해외담당 국장의 부인이 댓글 썼다고 기소, 벌금형까지 받게 했다.〉
 
  저자는 이들 운동권 세력이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나 민주사회주의 또는 유로코뮤니즘의 가치와 전통을 유지하는 진정한 의미의 좌파 세력이 아니다”고 단정한다. 그들은 오로지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자신들을 추종하는 일반시민들을, 권력 쟁취를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며, 자신들 세력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상식을 외면하는 “북한을 추종하는 변형된 사이비(似而非) 좌파 세력”일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던지는 거대한 질문은, 어떻게 한국의 엘리트 집단이란 검사·판사들이 이런 김일성 세력과 반역 세력의 주구(走狗)가 되어 자유민주주의 수호기관인 국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설 수 있었는가이다. 이병호 전 원장은 그들이 ‘법률 기능공’ 역할을 하면서 국가정보기관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수사와 재판을 농단했다고 본다. 이런 법 기술자들은 영혼도 심장도 없는 식민지 관료형 엘리트로서 김정은 치하에서도 출세할 인간형일 것이다.
 
  국정원장과 대통령을 묶어서 감옥에 보내는 과정에서 국정원장이 회계직원이란 엉터리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된다. 로스쿨 학생도 알 수 있는 이런 오판(誤判)을 만들어내는 데 10여 명의 검사·판사들이 협력했다. 그들의 이름을 화강암에 새겨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란 울분이 치솟는다. 국정원 수사 피해자들은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고민하다가 선택의 여지가 없자 “피눈물을 흘리면서 윤석열을 찍기로 했다”는데 이 정권은 이런 심정을 알고 있을까?
 
 
  “정보부는 박정희 집중화 전략의 핵심적 도구”
 
2015년 3월 18일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이병호 전 국정원장. 두 사람 모두 문재인 정권 시절 ‘적폐’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사진=뉴시스
  이 책은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달라지면서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기관의 역사를 체험적으로 정리한다. 30년 이상 이곳에서 근무했던 최고 권위자에 의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저자는 “정보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국강병 정책을 보좌하여 그 성공 스토리의 공(功)과 과(過)를 공유하는 한 축이 되었다”고 말한다.
 
  〈정보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집중화 전략의 핵심적 도구였다. 수천 년간 우리를 옥죈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시대적 소명임을 공감하고 최선을 다했다. 국정원은 대한민국의 기적과 같은 성공 스토리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다. 그 시대가 오늘의 성공시대를 열었다면 중앙정보부도 성공의 공과(功過)를 공유하는 것이 마땅하다.〉
 
  세계적 성공 사례인 한국 근대화의 세 주인공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세 군인 출신 대통령이었고 이들의 성공과 실패를 나눠 가져야 할 조직이 그들을 뒷받침했던 정보부, 안기부란 것이다.
 
  저자는 “운동권에 대한 박해 주장은 10배, 20배 부풀려져 있고 당시 군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던 폭력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약했다”(민경우, 《조선일보》 인터뷰)는 증언을 소개한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교사, 군인, 혁명가, CEO의 네 얼굴을 가진 분이었지만 품성의 바탕은 교사였다. 최악의 조건에서 최단기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남기는 격동의 과정에서 그는 한 번도 발포나 암살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18년간 격렬한 반(反)정부 시위에 직면하여 총 한 번 쏜 적이 없고 따라서 단 한 명의 생명도 희생시키지 않고 거대한 진보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성인군자(聖人君子)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부마사태 때도 사망자가 없었음은 현장에 있었던 내가 증명할 수 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한 惡役 감수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세 대통령이 국가정보기관을, 정권의 고삐로 삼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국가 발전 단계가 비슷하고 전시(戰時) 상태였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과도한 인권탄압이 있었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오히려 후한 점수가 나올 것이다.
 
  저자는 명언(名言)을 인용하고 있다.
 
  “독재는 원칙적으로 나쁜 것이다. 그러나 원칙을 핑계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더 나쁘다.”
 
  이는 공산당과 싸우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하는 나라의 정보기관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기도 할 것이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CIA를 “고약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조직”이라고 했다고 한다. 세계 최고 민주국가의 정보기관도 이러한데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가장 위험한 테러집단을 상대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의 작동을 포기할 수 없는 조건에서 정보부가 져야 할 부담과 한계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런데 음지의 전사들은, 국민국가 건설과 조국 근대화를 위한 악역(惡役)을 감수하면서 변명도 해명도 할 수 없었다. 민주화가 대세로 된 이후 안기부와 국정원은 시대 발전에 따라 민주적 정보기관으로 진화하는 노력을 계속해왔고 이병호 원장이 지휘하던 국정원은 세계적 수준의 정보기관이 되어 있었다.
 
 
  아웅산 사건은 막을 수 있었다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1983년 아웅산 테러를 막지 못한 것을 정보부·안기부의 ‘4대 실수’ 중 하나로 꼽았다. 사진=조선DB
  육사 출신인 저자(著者)는 월남전 전투 경험, 정보부 워싱턴 파견관, 안기부 해외담당 차장, 말레이시아 대사, 70대에 국정원장, 80대에 감옥 생활, 그리고 집필 등 정보맨으로서의 빛과 그림자를 두루 체험했고 이것이 이 책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정보 실패는 크게 다뤄지고 성공 사례는 알려지지 않는 음지에서 “익명(匿名)으로의 정열(情熱)”을 불태워야 하는 요원들 이야기는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저자는 과거를 회고하면서 정보부·안기부의 4대 실수를 지적한다. 김형욱 부장의 정보부가 저지른 난폭한 동백림 사건 수사, 김대중 납치 사건, 박동선 로비 사건, 그리고 아웅산 테러를 막지 못한 점이다(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수사는 성공적이었다).
 
  이상연(李相淵) 전 안기부장은 생전(生前)에 김대중 납치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실패로 보았다. 납치를 하지 않았으면 김대중은 해외에서 고립되었을 것이고 북한 정권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져 정치적 생명이 끝났을 것인데 이후락(李厚洛) 당시 정보부장의 무리한 공작이 역효과를 불렀다는 취지였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버마) 양곤의 아웅산 묘소에 참배하는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죽이려고 잠입했던 북한 공작원들은 나팔소리를 듣고 대통령이 도착했다고 오판(誤判), 원격조종 폭탄을 터트려 17명의 장·차관급 요인들을 죽였다. 저자는 사후(事後) 미얀마를 담당하는 지역과에서 오고 간 전문(電文)을 살피다가 현지에서 사건 직전에 북한 화물선 동건애국호가 양곤항에 도착, 머물고 있다는 보고를 한 것을 확인했다. 본부 데스크는 이 보고를 무시했다. 상부에 올리지도, 추적 조사 지시도 하지 않았다. 정보요원의 ‘상상력의 빈곤’이었다. 북한 공작원들은 그 배를 타고 들어와 폭탄을 설치했던 것이다. 사소한 정보 누락처럼 보이지만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을 정도의 세기적 테러의 단초였다.
 
  당시 외무부 안보과장이었던 권순대(權純大) 전 스위스 대사는 회고록 《한 외교관의 도전》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 계획을 만류해달라고 서남아과장에게 권했으나 “일개 과장이 대통령의 외국 방문을 중단시킬 수는 없다”는 답을 듣고 물러섰다고 했다. 파키스탄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그는 북한과 미얀마 외교관들이 너무나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았기에 직감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권 대사는 “국가정보기관이 방대한 해외조직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이 사태를 막지 못한 것과 책임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병호 전 원장도 “사건 이후 안기부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한 바가 없다”고 했다.
 
 
  국정원, 대북송금 하며 영혼이 사라져
 
국정원은 2002년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대북송금 창구 역할을 하면서 ‘조직의 영혼’이 사라졌다. 사진=조선DB
  물론 정보부의 가장 큰 실패 사례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를 살해한 사건에 일부 조직이 가담한 사건일 것이다. 김재규(金載圭) 정보부장은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부하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식당으로 들어가면서 “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렸다. 그가 말한 민주주의는 박정희가 심혈을 기울인 한국적 민주주의(유신체제)가 아닌 야당이 말하는 민주주의였다.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그해 10월 27일 오전 군·검·경·정 책임자 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한 첫마디는 “범인은 정보부입니다”였다. 이후 대통령에 이어 정보부마저 무력화된 권력의 진공(眞空) 상태를 메우고 들어온 것이 전두환 그룹이었고, 12·12 사건은 그 요식 절차이기도 했다.
 
  나는 국가정보기관의 가장 큰 실패는 김대중 정부 시절 임동원 원장이 지휘하던 국정원의 대북(對北)송금 연루라고 생각한다. 간첩 잡는 국정원이 간첩단 두목에게 4억5000만 달러를 보내는 송금책 역할을 하다가 송금 실수로 대통령 방북(訪北)이 하루 연기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고 그 순간 조직의 영혼이 사라진 것이다. 문재인 정권 때 김일성주의자 신영복의 글씨로 원훈(院訓)을 새긴 것은 좌익 정권이 연장될 경우 국정원이 반국가조직화될 위험을 전망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병호 전 원장은 책을 통해 국정원의 북한 분석관이 영변 원자로에서 새어 나오는 물웅덩이의 미세한 변화를 추적, 원자로 가동 사실을 파악, 수백 명의 미국 분석관들을 압도한 사례, 아웅산 테러 직후 박세직 차장이 조사단장으로 미얀마로 향하기 전 미얀마 전문 요원의 결정적 충고 사례 등을 소개하며 국정원의 대북 및 사이버 정보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랑했다. 그런데 남북한 사이의 새로운 격전장인 그 사이버 세상에서 댓글로 싸운 요원들을 범죄자로 몬 검사가 그 뒤 출세하여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이른바 보수 궤멸의 첨병 노릇을 하였고, 대통령까지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에게 국가정보기관의 재건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한국적 현실이란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황장엽 탈북은 양심에 따른 것
 
  이병호 전 원장이 해외담당 차장 시절 다룬 사건 중에서 1997년 황장엽 비서 탈출 사건이 있다.
 
  〈민족적 양심에 따른 탈북이라는 그의 설명은 거짓 없는 진정한 탈북 동기였다. 정의와 양심에 따라 자신을 희생하면서 행동하는 보기 드문 선비형 인물이었다. 가족에겐 참으로 못할 짓이었다. 그의 부인, 아들, 손자, 손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는 “황장엽이야말로 북한 정보의 보고 그 자체였다”고 했다. 그의 탈출을 계기로 북한 지배층 안에서 양심적 각성이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말년에는 그가 지닌 정보와 지혜도 모두 무시되었다. 4억5000만 달러가 제공되면서 시작된 햇볕 정책은 깊은 수렁에 빠진 김정일에겐 구원이었다. 저자는 “만일 이 구원이 없었더라면 김정일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우리는 역사의 기회를 날려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했다.
 
  2015년에 박근혜 대통령에 의하여 국정원장으로 임명된 저자는 그해 여름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이 고사포로 처형된 사건에 대하여 국정원이 가장 빨리 확정적 정보를 입수했으나 중국 정보기관은 늦었다고 기록했다. 한중 간의 정보 협력은 박근혜 정부의 사드 배치로 시들해졌다. “시진핑 주석이 중국 안보 이익을 해친다고 판단한 이상 진실 추구는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실증(實證)되었듯이 독재자의 정보 판단 실수는 부하들이나 정보기관이 바로잡기가 힘들다. 독재자가 내린 판단에 정보의 해석이 종속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버리시지는 않으실 것”
 
  2017년 2월 김정은은 이복형 김정남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기발한 방법으로 암살하는데 국정원 요원들이 말레이시아 수사팀을 도왔다. 저자는 북한 암살 공작의 놀라운 상상력과 치밀함에 놀랐다고 적고 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태 때의 무력감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촛불시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경험한 박근혜 대통령은 공인(公人)정신이 강했고 영민했으며 대통령다운 기품을 지닌 자존감이 뚜렷한 지도자였다. 남에게 휘둘릴 성향의 사람이 아니었다.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결벽증을 지녔다고 할 정도로 철저했다. 국정원은 지극히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이즈음 잠시 만난 박근혜 대통령은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버리시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고 한다. 이 원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퇴임사에서 “북한 체제와의 라스트 배틀은 정보전의 형태로 전개될 것이다”면서 ‘북한 주민 구출 전쟁’에서의 분투를 부탁하고 30여 년에 걸친 정보부·안기부·국정원의 여정을 일단 마감했다. 이후 2017년 11월 1일 새벽, 검찰이 집으로 들이닥쳐 압수수색에 착수, 2022년 12월 사면 복권될 때까지 6년의 악몽이 시작된다.
 
  저자는 “정보기관이 자체 기밀을 임의로 검찰에 제출한 것은 세계정보기관 역사상 어디에도 없다”며 개탄했다.
 
  국정원 직원들이 감옥에 간 것은 거의가 그간 국정원이 해오던 통상적인 정보 활동 범주에 속한 것들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이게 범죄가 된 것이다. 역대 국정원장들은 통상적으로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건넸는데 검찰은 이 예산 전용을 범죄로 보았다. 80대 나이에 그는 졸지에 정치범이 된 것이다.
 
 
  “국정원을 대북 교섭에 이용한 것도 불법”
 
  문재인 정권의 국정원 무차별 수사는 전쟁 중인 나라에서 국가정보기관의 업무 범위는 어디이고 이를 수사·재판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냐란 중대한 문제를 던졌다.
 
  〈선진국들은 정보기관의 직무를 법으로 세세히 정해놓고 있지 않다. 정보기관의 역할을, 국가안보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 그리고 필요시 동원되어 비밀업무를 수행하는 국가안보 수단이라고 상식적으로 인식한다. 김대중이 국정원을 시켜 4억5000만 달러를 북한으로 보낸 것은 국정원의 지휘관인 대통령이 지시한 일이 국정원의 직무가 된 사례이다. 부시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초기 작전을 CIA에 맡겼는데 한국은 현재와 같은 국정원법으로 그런 작전이 불가능하다.〉
 
  국정원법이 명시하는 것만 해야 된다고 하면 정보기관의 존재가치가 없다. 청와대에 대한 예산 지원이 국정원법에 나와 있는 직무인 국내외 정보수집 이외에 쓰인 것이라 불법이란 검사의 주장에 대하여 저자는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국정원을 대북 교섭에 동원하고 있는 것도 불법이다. 거기에 쓴 예산도 국고손실죄에 해당한다. 국정원법에 그 일을 하라고 적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반박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돈을 착복하지도, 사익(私益)을 위해 국정원 지원 자금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국정원 예산을 잘못 사용해서 국고손실을 했다니 이는 어떤 문명국에서도 있을 수 없는 가당치 않은 범죄 혐의이다.〉
 

  저자는 국정원을 폐허로 만든 수사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른바 적폐청산이란 미명 아래 500여 명의 전·현직 직원이 검찰 조사를 받도록 하고 세 명의 국정원장 등 46명을 감옥에 보냈다. 국정원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존재론적 위기였고 정체성과 직업정신을 훼손한 치명적 위기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은 국가정보기관의 비밀공작을 공개수사와 공개재판의 대상으로 삼은 유일한 문명국가가 되었다. 그 본질은, 김일성주의로 무장한 집단, 즉 김일성주의자 신영복을 숭배하는 반국가 세력이 검사·판사 등 법률 기술자를 조종하여 대한민국 수호기관을 공격한 것이다.
 
 
  “김정일이 제 명에 죽도록 한 것은 한국인의 수치”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이병호 전 원장. 이 전 원장은 옥고를 치르면서 ‘투사’가 되었다.
  〈정보업무는 국가안보를 최고의 가치로 두고 전개되는 특수 업무이다. 국가안보에 도움이 된다면 마피아에도 돈을 준다. 미국은 정보업무 관련 혐의를 일반 법정에서 재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선진국들은 사법적 잣대로 이를 재단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김대중의 미국 내 비자금 의혹을 조사하던 국정원 간부들이 기소된 사건 재판에서 판사가 한 말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비자금의 실체에 대해선 관심이 없고 국정원 예산이 적법하게 집행되었는지만 따지겠습니다.”
 
  살인사건 재판에서 판사가 “나는 범인이 사람을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그 칼을 살 때 값을 제대로 치렀는지 여부만 따지겠다”는 식이었다.
 
  이병호 전 원장은 재판을 받으면서 투사가 되었다. 그의 긴 최후진술은 과거 운동권 인사들이 법정을 투쟁의 장소로 활용하던 경우를 연상시켰다. 이 책은 그가 진정한 민주투사가 되었다는 증명이다. 진짜 민주투사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운 경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정보기관을 떠난 뒤에도 80대의 한 시민으로서 빨갱이들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출판이야말로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싸우는 진정한 자유투사 이병호의 라스트 배틀이고 아마도 최고의 순간일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2009년 12월 김정일 사망 때의 《이코노미스트》 사설 첫 문장을 인용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제 명에 죽도록 한 것은 한국인의 수치이다.”
 
  김정은까지 제 명에 죽도록 한다면 한국인들은 세계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게 될 것이다.
 
 
  老투사의 끝나지 않은 싸움
 
  자주국방 하는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행복한 나라 랭킹 5등이고, 자주국방을 포기하고 웰빙의 길을 선택한 한국은 행복랭킹 52등이다. 야윈 늑대와 살찐 돼지의 싸움판에서 돼지들을 지켜주려고 야윈 늑대가 되어 싸우다가 크게 다쳤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에 힘입어 다시 일어난 노(老)투사의 끝나지 않은 싸움에 감동한다. 비록 월남전 무공훈장은 박탈당했으나 대한민국은 이병호에게 많은 신세를 졌고, 이 책으로 해서 그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남게 될 것이며, 오히려 국정원을 지우려 했던 자들의 이름은 목욕탕의 물 젖은 타일 위에 사인펜으로 쓴 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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