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6 정치인들, 무능하고, 사람들 힘들게 해… 전두환보다 못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 들을 수 있어”
⊙ “윤석열, 호탕한 보스형… 문재인, 민정수석 역할조차 제대로 못한 사람”
⊙ “열심히 살아온 송영길, 왜 이재명 수하가 됐는지 이해 안 가”
⊙ “이재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 그런 사람이 대통령 된다면 끔찍할 것”
⊙ “우리나라 민주화는 군부가 양보하고 민주투사 김영삼·김대중이 타협해 만들어진 것”
⊙ “오랜 벗 김의겸, ‘절대 정치 안 한다’더니… 많이 실망”
咸雲炅
1964년생.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 서울대 삼민투 위원장,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부회장, 한국정치발전포럼 대표, 군산미래발전연구소 소장, 노무현재단 기획위원 역임
⊙ “윤석열, 호탕한 보스형… 문재인, 민정수석 역할조차 제대로 못한 사람”
⊙ “열심히 살아온 송영길, 왜 이재명 수하가 됐는지 이해 안 가”
⊙ “이재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 그런 사람이 대통령 된다면 끔찍할 것”
⊙ “우리나라 민주화는 군부가 양보하고 민주투사 김영삼·김대중이 타협해 만들어진 것”
⊙ “오랜 벗 김의겸, ‘절대 정치 안 한다’더니… 많이 실망”
咸雲炅
1964년생.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 서울대 삼민투 위원장,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부회장, 한국정치발전포럼 대표, 군산미래발전연구소 소장, 노무현재단 기획위원 역임
동료였지만, 적으로 만나게 되는 관계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다. 당장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조별리그 3차전 우리 대표팀에 맞서 3대3 무승부를 거둔 말레이시아의 감독이 한국인 김판곤이다. 김판곤 감독은 한국에서 대한축구협회 전력강화위원장,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장을 지냈다.
이런 관점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청산 대상으로 꼽은 86 운동권 세력에게 가장 껄끄러울 수 있는 인물은 함운경(咸雲炅·60)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일 것이다.
함 회장은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85년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일으켜 수감된 학생운동권 핵심 세력이었다. 현재 그는 전북 군산에서 횟집을 운영하고 있다.
무엇이 그를 “우리가 만든 쓰레기는 우리가 치우겠다”는 반성문을 쓰며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향해 “무능한 사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란 비판을 하게 만들었을까.
지난 2월 6일 오전 일찍 함 회장을 만났다. 서글서글한 인상, 과거 반미(反美)를 외쳤던 운동권 투사의 모습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사파, 민주화운동 사취”
― 《공화주의 솔루션》이란 책을 썼더군요.
“이재명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다면 이 나라는 확실히 망하는 길로 들어섰을 겁니다. 이재명의 민주당 정부를 막은 윤석열 정부의 성공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생각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란 부제로 책을 썼습니다.”
― 책에서 윤석열 정권을 최약체 정권으로 평가했던데요.
“민주당이 집권하는 것을 막았을 뿐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막혀 있기 때문이죠. 지금 우리나라는 한 단계 더 높은 도약을 해야 할 시점입니다. 노동개혁, 연금개혁, 교육개혁이 절실하지요. 그런데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입법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민주당은 반수를 뛰어넘는 의석을 동원할 수 있지 않습니까.”
― 민주당 내부에서는 어마어마한 의석수를 앞세워 윤석열 대통령 탄핵 목소리도 나옵니다.
“저는 민주당 의원 중 선진화된 사회경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앞장서서 입법 활동을 한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입만 열면 검사독재, 김건희 여사 타령만 하지요. 수시로 막말을 쏟아내는 이런 저질 정치들을 보면서 쓰레기들을 청소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망할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작년 8월 15일 민주화운동동지회를 결성한 겁니다.”
― 민주화운동동지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저희는 주사파(主思派)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하거나 애착심이 없는 운동까지 모두 민주화운동으로 포장하여 민주화운동을 사취(詐取)하는 것에 반대해왔습니다. 사실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란 거죠. 반미통일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 강변하고 자신의 진영을 위해 상대를 친일 세력, 미국의 꼭두각시로 악마화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모두 청소해야 할 쓰레기란 겁니다. 평소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 단체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역사적인 정리 작업을 위해 증언이나 기록을 모으고 공개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86 운동권 시절 민주당 김한정 의원이 가장 힘세”
― 민주당에 예전 운동권 동료들이 많지요?
“자칭 진보 인사이고 민주투사이면서 입만 열면 인권을 말하는 사람들이 김건희 여사에 대해서는 입에 담기 어려운 말로 공격하면서 히히덕거립니다. 또 청담동에서 장관과 대통령이 밤새 술을 마셨다는 거짓 뉴스로 선동하고, 한마디로 저질 정치를 하고 있지요. 이재명의 민주당은 많은 국민이 반대해도 한일협정이 필요하다고 찬성한 김대중의 민주당, 통상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두려움 없이 한미FTA를 추진한 노무현의 민주당과는 거리가 멉니다.”
― 민주당 국회의원 중 소위 운동권 시절 가장 힘이 셌던 사람은 누굽니까.
“지금 국회의원 중에는 김한정 의원이 힘이 셌지요. 제가 1985년 학생운동할 때는 지하지도부가 있었습니다. 총 4명이었는데, 그중 1명이 김한정 의원이었죠.”
―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가장 근거리서 보좌한 인물이죠.
“김한정 의원은 일찌감치 DJ 비서로 합류했습니다. 설훈 선배 조카(김한정 의원은 설훈 의원 이종사촌 누나의 아들)잖아요. 일찌감치 픽업됐죠. DJ가 굉장히 총애(寵愛)했습니다. 학생운동할 때 말도 잘하고, 분석도 잘하고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요새 말로 한동훈 비대위원장한테 밀리더라고요.(웃음)”
정치권에서 김한정 의원은 DJ 그림자로 불렸다. 1989년 평민당 총재 공보비서로 출발,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지냈고, DJ 퇴임 후에도 비서실을 이끌어왔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남양주을 지역 재선(再選)이다.
“김민석, 한동훈한텐 안 되더라”
―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도 실제로는 지하지도부의 명령이었습니까.
“1985년 서울 공대생 홍성영이 점거 농성 아이디어를 냈고 같이 준비한 공대팀이 다 한 것입니다. 운동권 지하지도부는 이 계획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당시 투쟁위원장으로 내정된 간부가 못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제가 갑자기 서울대 삼민투위원장이 되었고 위원장이 되면서 책임자가 된 것이죠. 감옥 갈 순번을 이미 정해놓은 상태여서 점거 농성 책임자가 된 것일 뿐입니다. 운명이죠.”
―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운동권 대표 격인 김민석 민주당 의원과 동기던데요.
“동기죠. 투쟁위원회 출범 문제로 당시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다만 그 친구는 학교 다닐 때 말도 뛰어나고 순발력도 뛰어났는데 거기도 한동훈한텐 안 되더라고.”
― 선거에 많이 출마하셨던데 ‘민주당’ 간판은 한 번도 단 적이 없더군요. 서울대 출신의 운동권이라면 ‘민주당’ 내에서는 성골(聖骨) 아닙니까.
“제가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을 주도해서 감옥에 갔다가 나온 게 88년입니다. 나오니 양김(YS·DJ)에서 모두 같이 일하자고 했어요. 비서로 들어오라고. 그런데 제가 안 한다고 했습니다.”
― 왜죠?
“제가 당시 부모님께 ‘두 사람(YS·DJ)은 지는 태양이고 우리가 떠오르는 태양이다’고 표현했습니다. 제가 당시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 틀을 벗어나지 못한 거죠. 자유주의 세력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인 힘으로 새로운 세상(사회주의)을 열어젖힐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언제 생각이 바뀐 겁니까.
“일단 88년도에 나와 보니 학생운동가 대부분이 주사파가 돼 있더군요. 사실 징역 중일 때 징역 온 후배들이 ‘선배는 사상 개조 대상’이라고 했을 때 짐작은 했었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주체사상이 접수가 안 되더군요.”
“학원 강사로 年 1억 벌기도”
― 출소 후 학원 강사를 했던데, ‘돈’ 좀 벌었나요.
“1991년부터 3년 정도를 학원 강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993년에 그만뒀는데 연(年) 수입이 1억 정도 됐었습니다.”
― 수익이 상당한데 다시 운동권으로 복귀했습니다.
“주체사상 때문에 운동권이 망해가고 있을 때였는데, 문익환 목사님이 종북적(從北的)인 통일운동이 아닌 다른 통일운동을 생각하고 계셔서 이 뜻에 동감해서 새로운 통일운동을 하기 위해 복귀를 했죠. ‘나는 어차피 이걸(운동)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 1996년 15대 총선부터 2016년 20대 총선까지 국회의원 선거만 4번 출마했는데, 모두 무소속이었습니다. 사실 민주당에서는 성골이 될 수 있는 커리어 아닌가요.
“운동권으로 돌아왔을 때 (운동권의) 실력 자체가 너무 떨어져 있었습니다. 조직력도 상당히 약화한 상태였고요. 재야의 통일운동이던 민중운동이 힘을 받으려면 정치권에 진출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정치권 진입을 시도하던 때였는데 15대 총선에서 실험적으로 정치권 진출을 시도하기로 결의했죠. 그래서 1996년 15대 총선에 전국연합의 이름을 빌려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입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전국연합에서 저를 무소속으로 출마시킨 것이죠.”
― 문재인 정권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인영 민주당 의원도 전국연합에서 활동하지 않았나요.
“전국연합 정치위원회에서 활동(정치국 부국장, 조직국장)했죠. 15대 총선 방침과 이후 민주노동당으로 결론이 나는 정당 건설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주 담당자였다고 보면 맞습니다.”
DJ 눈 밖에 나다
― 이인영 의원은 1999년에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전신) 발기인으로 참여한 후 민주당에서 4선이나 됐습니다.
“전국연합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천영세(전 민주노동당 의원)와 이창복 두 분이었는데, 천영세 의장은 민주노동당, 이창복 의장은 민주당으로 갔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전국연합의 정치실험이라면 대표적인 이분들이 나섰어야 한다고 봅니다. 15대 때 실험 대상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무책임했다고 봅니다.”
― 민주당 간판으로 선거에 나가지 못한 이유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일이 꼬였어요. 우선 1996년도 15대 총선 때 제가 관악갑에 출마했습니다. 그때 민주당 후보가 한광옥 의원이었습니다. 한광옥 의원이 낙선했는데, 이후 DJ 비서실장으로 갔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 의원이 DJ에게 ‘함운경 때문에 떨어졌다’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이에 DJ가 ‘함운경이가 거기 있었어?’라고 했다는 거예요.”
15대 총선에서 3선에 도전하던 한광옥 의원은 신한국당 이상현 후보에게 3.9%포인트 차이로 밀렸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함 대표는 8.82%를 득표했다.
― DJ의 눈 밖에 났겠네요.
“정확히는 15대 총선 무소속 출마 때문은 아니고, 1997년도 대선에서 DJ가 아닌 권영길 선배를 도왔습니다. 권영길 선배가 걱정을 많이 해줬어요. 군산에서 민주당 공천 못 받으면 당선되기 힘들 거라고. 제가 그랬습니다. ‘한 다섯 번 떨어지면 한 번은 되지 않겠어요?’라고요.”
“김민석과 정균환의 반대”
― 그런데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진 않았네요.
“대선 이후에 민주노동당 창당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선 과정에서 권영길의 국민승리 21을 지지했는데 솔직히 잘될 것이란 생각을 안 했습니다. 나 홀로 무소속으로 해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군산에서 민주노동당으로 같이 하자고 했는데 제가 안 한다고 했습니다. 일단 생각이 후지고 사람이 후지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선이 낡았고 창당하는 사람 중에 주사파들이 있었는데,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 민주당과는 인연이 없었나요.
“1999년 6·3 보궐선거 인천 계양갑 선거에 송영길 대표가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 전신) 후보였습니다. 제가 송영길 캠프 자원봉사단 단장이었습니다. 열심히 했죠. 당시 동교동계 핵심인 최재승 의원이 저를 좋게 본 것 같더군요. 저에게 한나라당 이부영과 맞붙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1999년 옷 로비 사건 당시 DJ는 ‘마녀사냥’이라며 버텼는데, 이로 인해 6월 보궐선거에서 DJ 정당이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인천 강화·계양갑에서 13.1%포인트 차로 완패했다. 당시 민주당 후보가 송영길 전 대표였다.
― 최재승 전 의원은 조직위원장으로서 ‘젊은 피 수혈’에 앞장섰던 인물인데요. 왜 ‘젊은 피’ 대상이 안 된 겁니까.
“16대 총선을 앞두고 운동권 출신 젊은 인사들을 대거 공천했는데 그 작업을 최재승 의원이 했습니다. 그런데 당내에 ‘젊은 피 수혈론’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정균환 의원과 당시 초선이었던 김민석 의원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들은 젊은 피로는 총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 결국 군산에서 출마했죠.
“어쨌든 그래도 최재승 의원이 밀어붙였죠. 기자회견을 열어 구로갑에 이인영, 성동갑에 임종석, 동대문을에 허인회, 서대문갑에 우상호, 동작갑에 함운경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해버린 것이죠. 저는 당시 군산에서 출마를 준비 중이었는데 갑자기 동작갑에 나가는 것으로 돼버린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 최재승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했습니다. (16대 총선에서 최재승 의원은 전북 익산 지역구를 이협 의원에게 내주고 전국구로 옮기는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저를 영입하려 했던 분조차 공천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동작갑에 나가는 걸 밀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군산에서 출마했죠.”
“송영길, 이재명 수하로 들어갈 사람 아닌데…”
― 당시 자료를 보니, 새천년민주당 공천은 신한국당 소속이었던 강현욱 의원이 받았던데요.
“저를 군산에 공천 줄 수도 있었는데, 민석(김민석 의원)이나 최재승 의원에 반대하는 정균환은 제가 싫었었나 봐요. 신한국당 강현욱 의원을 받아들이고 공천을 주더군요. 절차가 틀렸어요. 공천 신청할 때 당원도 아닌 사람을 공천했죠. 제가 너무 화가 나서 법원에 공천효력 정지 가처분신청을 냈습니다. 법원이 받아들였어요. 총선 후보자의 공천효력을 법원에서 정지시킨 건 처음이었죠. 당시 총재가 DJ였습니다. 민주당은 강현욱 의원 공천을 취소하고 딱 하루 공모 신청을 받은 뒤 다시 강 의원을 공천했죠.”
― 그때부터 DJ에게 미운털이 박힌 건가요.
“뭐 악연이 생긴 계기가 됐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걸로 미워했겠어요?”
― 아까 1999년 6·3 보궐선거에서 송영길 전 대표를 도왔다고 했잖아요.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으로 구속된 송 전 대표가 옥중에서 ‘정치검찰해체당’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송영길 전 대표가 이재명 대표를 돕는 것부터가 이해가 안 갑니다. 솔직히 송 전 대표는 가장 열심히 공부도 하고, 노력도 많이 하는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경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이재명 수하로 들어갈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송영길 전 대표가 노력을 많이 하는 정치인이었네요.
“어학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한국 방통대학교에서 오래 공부했어요. 당대표였으니까 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재명 대표를 도와준 건 그럴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서울시장 선거를 무리해서 나가고, 자기 지역구 마저 이재명 대표에게 물려주고, 옥중에서 정치검찰해체당을 만들고…. 아니 무슨 검찰독재입니까. 검찰이 기소는 할 수 있지만, 판단은 판사가 하잖아요. 안타깝지만 이제 ‘망가졌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재명은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인물”
― 이재명 대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재명 대표는 2007년 대선 경선 때는 정동영 캠프 핵심 공격수로 참여한 인물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의 전언에 따르면 이 대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선 때 보니 정말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더군요. 자기가 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바꾸잖아요.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끈다고 생각해보세요. 저는 끔찍할 것 같습니다.”
― 저서 《공화주의 솔루션》을 보면 이재명 대표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이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처럼 될 것이라 썼습니다.
“저는 이재명의 민주당을 좌파 포퓰리스트라고 규정합니다. 민족주의를 숙주(宿主)로 활용하면서 개딸들의 테러를 수수방관하는 좌파 포퓰리스트들이죠.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민주공화국을 위협하는 적입니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헌법 안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정책과 노선을 밝히고 경쟁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위협하는 적이란 이야기입니다. 좌파 포퓰리스트들이 원하는 대로 방치하면 대한민국 앞길은 불 보듯 뻔합니다. 베네수엘라가 우리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였던 건 잘 아시죠? 차베스라는 잘못된 지도자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다가 나라가 망하고 고꾸라져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된 겁니다. 좌파 포퓰리스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간다면 우리도 당연히 베네수엘라처럼 될 수 있죠.”
― 2021년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께 제가 말씀드렸어요. 몇 년을 더 살지는 모르지만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는 전쟁이 필요하고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공감하시더라고요.”
당시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소주성)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함 대표는 “최저임금을 늘려서 소득을 늘려주면 경제가 선순환한다고 하는데, 현실하고는 완전 다르다”고 했다.
― 윤석열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던가요.
“호탕하더라고요. 보스형 인간이라고 할까요.”
노무현과 문재인
― 보니까 2006년 군산시장 선거 때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자기 몸을 던져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벽을 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노무현 아닐까?라는 판단을 했던 것이죠. 노무현 캠프에서 조직 관련 조력자로 활동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 문재인 전 대통령을 ‘노무현의 아바타’라고도 했는데요.
“아니요, 문재인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민정수석 역할조차 제대로 못 한 사람이죠.”
― 민정수석 역할을 못 했다는 객관적 근거가 있나요?
“노무현 정부가 탄생하고 좀 있다가 일일주점이 있었습니다. 서울 종로에서 했었는데 천호선 선배가 왔더군요. 그래서 제가 민정수석실에 대해서 한마디 했어요. 권력기관을 잡고 정권을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호철(전 민정비서관)은 내부 군기반장만 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네가 청와대 사람들한테 이야기 좀 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선배, 청와대에 있는 사람들이 얘기해야지. 나한테 하라 그럼 되느냐’고 한 적이 있습니다. 민정수석 일을 그렇게 했으니 대통령이 되고 스타일리스트인 조국 교수를 민정수석을 시키죠. 민정수석 역할이 정확히 뭔지를 모르니까….”
― 19대 대선 때 문재인 전 대통령 지지 안 했나요?
“안 했어요. 무능하다고 생각해서 지지하지 않았는데, 대통령 되고 보니 역시 맞더라고요.”
‘군산에서 절대 출마 안 한다’던 김의겸
― 《한겨레》 기자 출신 더불어민주당 김의겸 의원과 고등학교 친구더군요.
“군산제일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죠. 의겸이는 문과고 저는 이과였는데 친했습니다. 하영춘이라고 《한국경제》 대표를 지낸 친구랑도 가깝게 지냈습니다. 하영춘이 누나 집에서 신문 기자 시험공부를 했는데, 의겸이도 같이 공부를 했죠. 거기서 가끔 만났어요.”
― 고등학교 때 김의겸 의원은 어땠습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졸업하기 전에 학교 교지를 만들었는데 배포하기 직전에 다 잘라서 배포했어요. 의겸이 글도 잘렸죠. ‘우리가 세상을 뒤집자’ 이런 내용을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 지금의 김의겸 의원은 어떻습니까.
“작년에 우리 가게에 한 번 왔었어요. 그때 저한테 출마 이야기를 안 하던데, (군산에) 출마를 하더라고요.”
― 서운했습니까.
“제가 2016년 20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나서 의겸이를 만났습니다. 청와대에 가서요. 제가 ‘의겸아, 나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이제 출마를 못 해. 아마 죽을 때까지 (경제적으로) 재기하기가 힘들 거야. 마음 편하게 먹고 군산에 와서 출마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도 ‘절대 안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맨날 농담으로 그랬어요. ‘난 정치 안 할 거니까 네가 군산에서 성공하면 나 시장(市長)이나 시켜달라’고. 오히려 저를 격려하는 편이었죠.”
―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20대 총선에서 떨어지고 만났을 때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진짜 싫다. 정말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너는 친구니까 국회의원 출마한다면 내가 힘닿는 대로 도울게’라고 했죠. 횟집에 왔을 때 도와달라고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 말 안 하더라고요. 내가 문재인을 너무 심하게 비판하고 조국도 비판하고 이재명은 큰일 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지금은 가는 길이 너무 다르죠. 정치인으로서도 의겸이한테는 실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조갑제, 미 문화원 사건을 가장 객관적으로 보도”
여러 주제로 긴 인터뷰를 하던 중 함 대표가 의외일 수 있는 이야기를 했다. “민주당 성향의 정치인들이 《월간조선》을 적대시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DJ는 그렇지 않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더니, 함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을 가장 객관적으로 보도한 게 《조선일보》였습니다. 제 기억으로 조갑제 기자가 그 기사를 썼는데, 미 문화원 점거 20주년 행사 때 초청하기도 했죠.”
― 조갑제 대표는 간첩 관련 기사도 많이 썼는데, 지금도 간첩이 있다고 보나요.
“요즘은 북에서 직접 내려오지 않아도 잘 돌아가잖아요. 자생(自生) 간첩이 많으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여전히 북과 선이 닿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북한이 자기를 불러주면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저와 함께한 사람 중에 간첩 사건에 연관됐던 이가 있습니다. 최근에 또 보안법 위반 혐의로 문제가 되긴 했던데…. 어쨌든 이 사람한테 후배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 뭐라고 합니까.
“‘형님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 건 인정하겠는데 회합, 통신만은 하지 마세요. 그것만 안 하면 우리가 변론도 해줄 수 있는데, 그걸 하면 빼박이라 어쩔 수 없다’고요. 그런데 후배들의 조언을 듣지 않아요. 종교와 비슷합니다. 김일성 주체사상은.”
― 운동권 세력은 자신들이 있었기에 독재 정권을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고 생각합니다.
“1987년 6월 항쟁 전까지 학생운동은 파쇼 타도와 미제(美帝) 축출을 위해 황당한 일을 벌이다가 87년에야 직선제로 방향을 틀어 동참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화는 군부가 양보하고 민주투사 김영삼과 김대중이 타협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민주화를 얘기하면 모든 행적을 덮을 수 있고 면죄부(免罪符)를 받을 거란 생각은 착각입니다.”
“김정은의 광기는 최후의 발악”
― 586 정치인들이 전두환보다 안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586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독재 정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능하고,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에 빠트리지요. 그러니 전두환보다 못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586 운동권들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는 게 정상입니다. 20대에 가졌던 사회주의 사상, 공산주의 사상을 아직도 갖고 있다면 더 이상 내가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남한이 북한보다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성취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생각을 바꿔보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주변으로부터 왕따 될까 두려워하지 말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고, 후손을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 북한 김정은의 광기(狂氣)에 찬 발언으로 한반도의 긴장감이 높아졌습니다.
“원래 열세(劣勢)에 있는 쪽이 그런 반응을 보입니다. 김정은이 열세를 인정한 셈이죠. 최후의 발악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김일성 때만 해도 자기네들이 실제 우리보다 앞선다고 생각했기에 저렇게 안 했죠.”
― 민주당은 말로는 인권과 정의를 내세우며 진보를 자처하나 정작 김정은 치하에서 노예처럼 생활하는 북한 주민은 모른 척합니다.
“민족을 우선시하면 눈이 멉니다. ‘우리 민족끼리’라면서 북한에 대해서 온정적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인류 사회에는 인권에 대해 보편적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준으로 북한을 봐야 합니다. 전두환 정권을 독재 정권으로 부른다면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북한에 민주화가 필요하면 그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남과 북에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지요.”⊙
이런 관점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청산 대상으로 꼽은 86 운동권 세력에게 가장 껄끄러울 수 있는 인물은 함운경(咸雲炅·60)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일 것이다.
함 회장은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85년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일으켜 수감된 학생운동권 핵심 세력이었다. 현재 그는 전북 군산에서 횟집을 운영하고 있다.
무엇이 그를 “우리가 만든 쓰레기는 우리가 치우겠다”는 반성문을 쓰며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향해 “무능한 사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란 비판을 하게 만들었을까.
지난 2월 6일 오전 일찍 함 회장을 만났다. 서글서글한 인상, 과거 반미(反美)를 외쳤던 운동권 투사의 모습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사파, 민주화운동 사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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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중 성명서를 발표하는 함운경 민주화운동동지회 회장. 사진=연합뉴스 |
“이재명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다면 이 나라는 확실히 망하는 길로 들어섰을 겁니다. 이재명의 민주당 정부를 막은 윤석열 정부의 성공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생각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란 부제로 책을 썼습니다.”
― 책에서 윤석열 정권을 최약체 정권으로 평가했던데요.
“민주당이 집권하는 것을 막았을 뿐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막혀 있기 때문이죠. 지금 우리나라는 한 단계 더 높은 도약을 해야 할 시점입니다. 노동개혁, 연금개혁, 교육개혁이 절실하지요. 그런데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입법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민주당은 반수를 뛰어넘는 의석을 동원할 수 있지 않습니까.”
― 민주당 내부에서는 어마어마한 의석수를 앞세워 윤석열 대통령 탄핵 목소리도 나옵니다.
“저는 민주당 의원 중 선진화된 사회경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앞장서서 입법 활동을 한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봤습니다. 입만 열면 검사독재, 김건희 여사 타령만 하지요. 수시로 막말을 쏟아내는 이런 저질 정치들을 보면서 쓰레기들을 청소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망할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작년 8월 15일 민주화운동동지회를 결성한 겁니다.”
― 민주화운동동지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저희는 주사파(主思派)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하거나 애착심이 없는 운동까지 모두 민주화운동으로 포장하여 민주화운동을 사취(詐取)하는 것에 반대해왔습니다. 사실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란 거죠. 반미통일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 강변하고 자신의 진영을 위해 상대를 친일 세력, 미국의 꼭두각시로 악마화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모두 청소해야 할 쓰레기란 겁니다. 평소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 단체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역사적인 정리 작업을 위해 증언이나 기록을 모으고 공개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86 운동권 시절 민주당 김한정 의원이 가장 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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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진=뉴시스 |
“자칭 진보 인사이고 민주투사이면서 입만 열면 인권을 말하는 사람들이 김건희 여사에 대해서는 입에 담기 어려운 말로 공격하면서 히히덕거립니다. 또 청담동에서 장관과 대통령이 밤새 술을 마셨다는 거짓 뉴스로 선동하고, 한마디로 저질 정치를 하고 있지요. 이재명의 민주당은 많은 국민이 반대해도 한일협정이 필요하다고 찬성한 김대중의 민주당, 통상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두려움 없이 한미FTA를 추진한 노무현의 민주당과는 거리가 멉니다.”
― 민주당 국회의원 중 소위 운동권 시절 가장 힘이 셌던 사람은 누굽니까.
“지금 국회의원 중에는 김한정 의원이 힘이 셌지요. 제가 1985년 학생운동할 때는 지하지도부가 있었습니다. 총 4명이었는데, 그중 1명이 김한정 의원이었죠.”
―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가장 근거리서 보좌한 인물이죠.
“김한정 의원은 일찌감치 DJ 비서로 합류했습니다. 설훈 선배 조카(김한정 의원은 설훈 의원 이종사촌 누나의 아들)잖아요. 일찌감치 픽업됐죠. DJ가 굉장히 총애(寵愛)했습니다. 학생운동할 때 말도 잘하고, 분석도 잘하고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요새 말로 한동훈 비대위원장한테 밀리더라고요.(웃음)”
정치권에서 김한정 의원은 DJ 그림자로 불렸다. 1989년 평민당 총재 공보비서로 출발,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지냈고, DJ 퇴임 후에도 비서실을 이끌어왔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남양주을 지역 재선(再選)이다.
“김민석, 한동훈한텐 안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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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의원. 사진=뉴시스 |
“1985년 서울 공대생 홍성영이 점거 농성 아이디어를 냈고 같이 준비한 공대팀이 다 한 것입니다. 운동권 지하지도부는 이 계획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당시 투쟁위원장으로 내정된 간부가 못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제가 갑자기 서울대 삼민투위원장이 되었고 위원장이 되면서 책임자가 된 것이죠. 감옥 갈 순번을 이미 정해놓은 상태여서 점거 농성 책임자가 된 것일 뿐입니다. 운명이죠.”
―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운동권 대표 격인 김민석 민주당 의원과 동기던데요.
“동기죠. 투쟁위원회 출범 문제로 당시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다만 그 친구는 학교 다닐 때 말도 뛰어나고 순발력도 뛰어났는데 거기도 한동훈한텐 안 되더라고.”
― 선거에 많이 출마하셨던데 ‘민주당’ 간판은 한 번도 단 적이 없더군요. 서울대 출신의 운동권이라면 ‘민주당’ 내에서는 성골(聖骨) 아닙니까.
“제가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을 주도해서 감옥에 갔다가 나온 게 88년입니다. 나오니 양김(YS·DJ)에서 모두 같이 일하자고 했어요. 비서로 들어오라고. 그런데 제가 안 한다고 했습니다.”
― 왜죠?
“제가 당시 부모님께 ‘두 사람(YS·DJ)은 지는 태양이고 우리가 떠오르는 태양이다’고 표현했습니다. 제가 당시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 틀을 벗어나지 못한 거죠. 자유주의 세력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인 힘으로 새로운 세상(사회주의)을 열어젖힐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언제 생각이 바뀐 겁니까.
“일단 88년도에 나와 보니 학생운동가 대부분이 주사파가 돼 있더군요. 사실 징역 중일 때 징역 온 후배들이 ‘선배는 사상 개조 대상’이라고 했을 때 짐작은 했었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주체사상이 접수가 안 되더군요.”
“학원 강사로 年 1억 벌기도”
― 출소 후 학원 강사를 했던데, ‘돈’ 좀 벌었나요.
“1991년부터 3년 정도를 학원 강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993년에 그만뒀는데 연(年) 수입이 1억 정도 됐었습니다.”
― 수익이 상당한데 다시 운동권으로 복귀했습니다.
“주체사상 때문에 운동권이 망해가고 있을 때였는데, 문익환 목사님이 종북적(從北的)인 통일운동이 아닌 다른 통일운동을 생각하고 계셔서 이 뜻에 동감해서 새로운 통일운동을 하기 위해 복귀를 했죠. ‘나는 어차피 이걸(운동)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 1996년 15대 총선부터 2016년 20대 총선까지 국회의원 선거만 4번 출마했는데, 모두 무소속이었습니다. 사실 민주당에서는 성골이 될 수 있는 커리어 아닌가요.
“운동권으로 돌아왔을 때 (운동권의) 실력 자체가 너무 떨어져 있었습니다. 조직력도 상당히 약화한 상태였고요. 재야의 통일운동이던 민중운동이 힘을 받으려면 정치권에 진출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정치권 진입을 시도하던 때였는데 15대 총선에서 실험적으로 정치권 진출을 시도하기로 결의했죠. 그래서 1996년 15대 총선에 전국연합의 이름을 빌려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입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전국연합에서 저를 무소속으로 출마시킨 것이죠.”
― 문재인 정권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인영 민주당 의원도 전국연합에서 활동하지 않았나요.
“전국연합 정치위원회에서 활동(정치국 부국장, 조직국장)했죠. 15대 총선 방침과 이후 민주노동당으로 결론이 나는 정당 건설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주 담당자였다고 보면 맞습니다.”
DJ 눈 밖에 나다
― 이인영 의원은 1999년에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전신) 발기인으로 참여한 후 민주당에서 4선이나 됐습니다.
“전국연합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천영세(전 민주노동당 의원)와 이창복 두 분이었는데, 천영세 의장은 민주노동당, 이창복 의장은 민주당으로 갔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전국연합의 정치실험이라면 대표적인 이분들이 나섰어야 한다고 봅니다. 15대 때 실험 대상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무책임했다고 봅니다.”
― 민주당 간판으로 선거에 나가지 못한 이유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일이 꼬였어요. 우선 1996년도 15대 총선 때 제가 관악갑에 출마했습니다. 그때 민주당 후보가 한광옥 의원이었습니다. 한광옥 의원이 낙선했는데, 이후 DJ 비서실장으로 갔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 의원이 DJ에게 ‘함운경 때문에 떨어졌다’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이에 DJ가 ‘함운경이가 거기 있었어?’라고 했다는 거예요.”
15대 총선에서 3선에 도전하던 한광옥 의원은 신한국당 이상현 후보에게 3.9%포인트 차이로 밀렸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함 대표는 8.82%를 득표했다.
― DJ의 눈 밖에 났겠네요.
“정확히는 15대 총선 무소속 출마 때문은 아니고, 1997년도 대선에서 DJ가 아닌 권영길 선배를 도왔습니다. 권영길 선배가 걱정을 많이 해줬어요. 군산에서 민주당 공천 못 받으면 당선되기 힘들 거라고. 제가 그랬습니다. ‘한 다섯 번 떨어지면 한 번은 되지 않겠어요?’라고요.”
“김민석과 정균환의 반대”
― 그런데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진 않았네요.
“대선 이후에 민주노동당 창당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선 과정에서 권영길의 국민승리 21을 지지했는데 솔직히 잘될 것이란 생각을 안 했습니다. 나 홀로 무소속으로 해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군산에서 민주노동당으로 같이 하자고 했는데 제가 안 한다고 했습니다. 일단 생각이 후지고 사람이 후지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선이 낡았고 창당하는 사람 중에 주사파들이 있었는데,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 민주당과는 인연이 없었나요.
“1999년 6·3 보궐선거 인천 계양갑 선거에 송영길 대표가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 전신) 후보였습니다. 제가 송영길 캠프 자원봉사단 단장이었습니다. 열심히 했죠. 당시 동교동계 핵심인 최재승 의원이 저를 좋게 본 것 같더군요. 저에게 한나라당 이부영과 맞붙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1999년 옷 로비 사건 당시 DJ는 ‘마녀사냥’이라며 버텼는데, 이로 인해 6월 보궐선거에서 DJ 정당이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인천 강화·계양갑에서 13.1%포인트 차로 완패했다. 당시 민주당 후보가 송영길 전 대표였다.
― 최재승 전 의원은 조직위원장으로서 ‘젊은 피 수혈’에 앞장섰던 인물인데요. 왜 ‘젊은 피’ 대상이 안 된 겁니까.
“16대 총선을 앞두고 운동권 출신 젊은 인사들을 대거 공천했는데 그 작업을 최재승 의원이 했습니다. 그런데 당내에 ‘젊은 피 수혈론’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정균환 의원과 당시 초선이었던 김민석 의원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들은 젊은 피로는 총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 결국 군산에서 출마했죠.
“어쨌든 그래도 최재승 의원이 밀어붙였죠. 기자회견을 열어 구로갑에 이인영, 성동갑에 임종석, 동대문을에 허인회, 서대문갑에 우상호, 동작갑에 함운경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해버린 것이죠. 저는 당시 군산에서 출마를 준비 중이었는데 갑자기 동작갑에 나가는 것으로 돼버린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 최재승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했습니다. (16대 총선에서 최재승 의원은 전북 익산 지역구를 이협 의원에게 내주고 전국구로 옮기는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저를 영입하려 했던 분조차 공천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동작갑에 나가는 걸 밀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군산에서 출마했죠.”
“송영길, 이재명 수하로 들어갈 사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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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받는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작년 12월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대기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저를 군산에 공천 줄 수도 있었는데, 민석(김민석 의원)이나 최재승 의원에 반대하는 정균환은 제가 싫었었나 봐요. 신한국당 강현욱 의원을 받아들이고 공천을 주더군요. 절차가 틀렸어요. 공천 신청할 때 당원도 아닌 사람을 공천했죠. 제가 너무 화가 나서 법원에 공천효력 정지 가처분신청을 냈습니다. 법원이 받아들였어요. 총선 후보자의 공천효력을 법원에서 정지시킨 건 처음이었죠. 당시 총재가 DJ였습니다. 민주당은 강현욱 의원 공천을 취소하고 딱 하루 공모 신청을 받은 뒤 다시 강 의원을 공천했죠.”
― 그때부터 DJ에게 미운털이 박힌 건가요.
“뭐 악연이 생긴 계기가 됐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걸로 미워했겠어요?”
― 아까 1999년 6·3 보궐선거에서 송영길 전 대표를 도왔다고 했잖아요.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으로 구속된 송 전 대표가 옥중에서 ‘정치검찰해체당’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송영길 전 대표가 이재명 대표를 돕는 것부터가 이해가 안 갑니다. 솔직히 송 전 대표는 가장 열심히 공부도 하고, 노력도 많이 하는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경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이재명 수하로 들어갈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송영길 전 대표가 노력을 많이 하는 정치인이었네요.
“어학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한국 방통대학교에서 오래 공부했어요. 당대표였으니까 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재명 대표를 도와준 건 그럴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서울시장 선거를 무리해서 나가고, 자기 지역구 마저 이재명 대표에게 물려주고, 옥중에서 정치검찰해체당을 만들고…. 아니 무슨 검찰독재입니까. 검찰이 기소는 할 수 있지만, 판단은 판사가 하잖아요. 안타깝지만 이제 ‘망가졌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재명은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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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월 4일 경남 양산시 평산마을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를 찾아 문 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더불어민주당 |
“이재명 대표는 2007년 대선 경선 때는 정동영 캠프 핵심 공격수로 참여한 인물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의 전언에 따르면 이 대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선 때 보니 정말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더군요. 자기가 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바꾸잖아요.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끈다고 생각해보세요. 저는 끔찍할 것 같습니다.”
― 저서 《공화주의 솔루션》을 보면 이재명 대표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이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처럼 될 것이라 썼습니다.
“저는 이재명의 민주당을 좌파 포퓰리스트라고 규정합니다. 민족주의를 숙주(宿主)로 활용하면서 개딸들의 테러를 수수방관하는 좌파 포퓰리스트들이죠.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민주공화국을 위협하는 적입니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헌법 안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정책과 노선을 밝히고 경쟁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위협하는 적이란 이야기입니다. 좌파 포퓰리스트들이 원하는 대로 방치하면 대한민국 앞길은 불 보듯 뻔합니다. 베네수엘라가 우리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였던 건 잘 아시죠? 차베스라는 잘못된 지도자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다가 나라가 망하고 고꾸라져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된 겁니다. 좌파 포퓰리스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간다면 우리도 당연히 베네수엘라처럼 될 수 있죠.”
― 2021년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께 제가 말씀드렸어요. 몇 년을 더 살지는 모르지만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는 전쟁이 필요하고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공감하시더라고요.”
당시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소주성)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함 대표는 “최저임금을 늘려서 소득을 늘려주면 경제가 선순환한다고 하는데, 현실하고는 완전 다르다”고 했다.
― 윤석열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던가요.
“호탕하더라고요. 보스형 인간이라고 할까요.”
노무현과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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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과 함운경 회장이 2021년 11월 22일 전북 군산에 위치한 함 회장이 운영하는 횟집에서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사진 |
“자기 몸을 던져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벽을 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노무현 아닐까?라는 판단을 했던 것이죠. 노무현 캠프에서 조직 관련 조력자로 활동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 문재인 전 대통령을 ‘노무현의 아바타’라고도 했는데요.
“아니요, 문재인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민정수석 역할조차 제대로 못 한 사람이죠.”
― 민정수석 역할을 못 했다는 객관적 근거가 있나요?
“노무현 정부가 탄생하고 좀 있다가 일일주점이 있었습니다. 서울 종로에서 했었는데 천호선 선배가 왔더군요. 그래서 제가 민정수석실에 대해서 한마디 했어요. 권력기관을 잡고 정권을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호철(전 민정비서관)은 내부 군기반장만 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네가 청와대 사람들한테 이야기 좀 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선배, 청와대에 있는 사람들이 얘기해야지. 나한테 하라 그럼 되느냐’고 한 적이 있습니다. 민정수석 일을 그렇게 했으니 대통령이 되고 스타일리스트인 조국 교수를 민정수석을 시키죠. 민정수석 역할이 정확히 뭔지를 모르니까….”
― 19대 대선 때 문재인 전 대통령 지지 안 했나요?
“안 했어요. 무능하다고 생각해서 지지하지 않았는데, 대통령 되고 보니 역시 맞더라고요.”
‘군산에서 절대 출마 안 한다’던 김의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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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진=뉴시스 |
“군산제일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죠. 의겸이는 문과고 저는 이과였는데 친했습니다. 하영춘이라고 《한국경제》 대표를 지낸 친구랑도 가깝게 지냈습니다. 하영춘이 누나 집에서 신문 기자 시험공부를 했는데, 의겸이도 같이 공부를 했죠. 거기서 가끔 만났어요.”
― 고등학교 때 김의겸 의원은 어땠습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졸업하기 전에 학교 교지를 만들었는데 배포하기 직전에 다 잘라서 배포했어요. 의겸이 글도 잘렸죠. ‘우리가 세상을 뒤집자’ 이런 내용을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 지금의 김의겸 의원은 어떻습니까.
“작년에 우리 가게에 한 번 왔었어요. 그때 저한테 출마 이야기를 안 하던데, (군산에) 출마를 하더라고요.”
― 서운했습니까.
“제가 2016년 20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나서 의겸이를 만났습니다. 청와대에 가서요. 제가 ‘의겸아, 나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이제 출마를 못 해. 아마 죽을 때까지 (경제적으로) 재기하기가 힘들 거야. 마음 편하게 먹고 군산에 와서 출마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도 ‘절대 안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맨날 농담으로 그랬어요. ‘난 정치 안 할 거니까 네가 군산에서 성공하면 나 시장(市長)이나 시켜달라’고. 오히려 저를 격려하는 편이었죠.”
―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20대 총선에서 떨어지고 만났을 때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진짜 싫다. 정말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너는 친구니까 국회의원 출마한다면 내가 힘닿는 대로 도울게’라고 했죠. 횟집에 왔을 때 도와달라고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 말 안 하더라고요. 내가 문재인을 너무 심하게 비판하고 조국도 비판하고 이재명은 큰일 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지금은 가는 길이 너무 다르죠. 정치인으로서도 의겸이한테는 실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조갑제, 미 문화원 사건을 가장 객관적으로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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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동지회가 주최한 ‘반칙과 특권의 청산 위한 운동권 정치 세력의 역사적 평가’ 토론회가 지난 1월 31일 열렸다. 사진=조선DB |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을 가장 객관적으로 보도한 게 《조선일보》였습니다. 제 기억으로 조갑제 기자가 그 기사를 썼는데, 미 문화원 점거 20주년 행사 때 초청하기도 했죠.”
― 조갑제 대표는 간첩 관련 기사도 많이 썼는데, 지금도 간첩이 있다고 보나요.
“요즘은 북에서 직접 내려오지 않아도 잘 돌아가잖아요. 자생(自生) 간첩이 많으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여전히 북과 선이 닿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북한이 자기를 불러주면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저와 함께한 사람 중에 간첩 사건에 연관됐던 이가 있습니다. 최근에 또 보안법 위반 혐의로 문제가 되긴 했던데…. 어쨌든 이 사람한테 후배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 뭐라고 합니까.
“‘형님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 건 인정하겠는데 회합, 통신만은 하지 마세요. 그것만 안 하면 우리가 변론도 해줄 수 있는데, 그걸 하면 빼박이라 어쩔 수 없다’고요. 그런데 후배들의 조언을 듣지 않아요. 종교와 비슷합니다. 김일성 주체사상은.”
― 운동권 세력은 자신들이 있었기에 독재 정권을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고 생각합니다.
“1987년 6월 항쟁 전까지 학생운동은 파쇼 타도와 미제(美帝) 축출을 위해 황당한 일을 벌이다가 87년에야 직선제로 방향을 틀어 동참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화는 군부가 양보하고 민주투사 김영삼과 김대중이 타협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민주화를 얘기하면 모든 행적을 덮을 수 있고 면죄부(免罪符)를 받을 거란 생각은 착각입니다.”
“김정은의 광기는 최후의 발악”
― 586 정치인들이 전두환보다 안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586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독재 정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능하고,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에 빠트리지요. 그러니 전두환보다 못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586 운동권들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는 게 정상입니다. 20대에 가졌던 사회주의 사상, 공산주의 사상을 아직도 갖고 있다면 더 이상 내가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남한이 북한보다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성취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생각을 바꿔보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주변으로부터 왕따 될까 두려워하지 말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고, 후손을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 북한 김정은의 광기(狂氣)에 찬 발언으로 한반도의 긴장감이 높아졌습니다.
“원래 열세(劣勢)에 있는 쪽이 그런 반응을 보입니다. 김정은이 열세를 인정한 셈이죠. 최후의 발악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김일성 때만 해도 자기네들이 실제 우리보다 앞선다고 생각했기에 저렇게 안 했죠.”
― 민주당은 말로는 인권과 정의를 내세우며 진보를 자처하나 정작 김정은 치하에서 노예처럼 생활하는 북한 주민은 모른 척합니다.
“민족을 우선시하면 눈이 멉니다. ‘우리 민족끼리’라면서 북한에 대해서 온정적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인류 사회에는 인권에 대해 보편적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준으로 북한을 봐야 합니다. 전두환 정권을 독재 정권으로 부른다면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북한에 민주화가 필요하면 그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남과 북에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