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코스카 기지의 미군 함정은 100% 일본인 기술자들이 수리… 이들이 없으면 한반도를 지키는 미군 함정은 존재할 수 없다”
⊙ “한·미·일 3국 협력은 세계 평화와 안보, 인도·태평양과 세계 전역의 법치를 촉진하는 데 필수적”(2021년 3월 美 국무부)
⊙ “일본은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윤석열 대통령의 삼일절 경축사)
⊙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신뢰관계를 지금보다 더 두텁게 만들어야”(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
李河遠
1968년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 졸업 / 《조선일보》 워싱턴·도쿄 특파원, 국제부장, TV조선 정치부장·메인뉴스 앵커 역임. 現 《조선일보》 논설위원 / 저서 《남북한과 미국, 변화하는 3각관계》 《조용한 열정, 반기문》(공저) 《세계를 알려면 워싱턴을 읽어라》 《시진핑과 오바마》 《사무라이와 양키의 퀀텀점프》
⊙ “한·미·일 3국 협력은 세계 평화와 안보, 인도·태평양과 세계 전역의 법치를 촉진하는 데 필수적”(2021년 3월 美 국무부)
⊙ “일본은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윤석열 대통령의 삼일절 경축사)
⊙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신뢰관계를 지금보다 더 두텁게 만들어야”(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
李河遠
1968년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 졸업 / 《조선일보》 워싱턴·도쿄 특파원, 국제부장, TV조선 정치부장·메인뉴스 앵커 역임. 現 《조선일보》 논설위원 / 저서 《남북한과 미국, 변화하는 3각관계》 《조용한 열정, 반기문》(공저) 《세계를 알려면 워싱턴을 읽어라》 《시진핑과 오바마》 《사무라이와 양키의 퀀텀점프》
- 일본 요코스카 해군 기지에 정박 중인 미 해군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 동북아 미 해군력은 여기서 일하는 일본인 기술자, 노동자들에게 크게 의지한다. 사진=미 해군
미·중(美中) 간의 갈등이 갈수록 격화되는 가운데, 최근 국제정세 변화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필리핀에 미군 기지가 4곳 더 늘어나는 것이다.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필리핀에 기지 4곳을 추가, 총 9개의 미군 기지를 운영하기로 한 사실이 4월 초 로이터 통신 등의 보도로 알려졌다.
특히 추가되는 미군 기지 중 3곳은 대만과 약 40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필리핀 카가얀주(州)의 랄로 공항, 카밀로 오시아스 해군 기지와 이사벨라주의 멜커 델라 크루즈 캠프에 위치하게 된다. 이에 앞서 올 초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필리핀을 방문, 필리핀 내 미군 기지를 확대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작년 취임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전임자인 두테르테 대통령의 친중(親中) 정책을 폐기했다. 취임 직후인 작년 9월 미국을 방문,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회담하며 양국 간 ‘관계 정상화’를 선언했다.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왜 필리핀이 중국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며 미군 기지를 두 배 가까이 늘리기로 했느냐다. 한마디로 중국이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주석 3연임(連任) 전후로 1인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안보 위협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필리핀은 미국이 일본 열도-대만-필리핀을 잇는 방어선을 더 촘촘하게 구축하게 함으로써 중국의 해양굴기(海洋崛起)에 더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각해지는 미·중 갈등 상황에서 필리핀의 선택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고도화되는 北의 핵 무력
최근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은 어떤가. 중국의 위협이 잠재적이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북한의 연속 도발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수의 안보전문가가 “한반도 안보 환경을 뒤흔드는 중대 사안”이라고 평가하는 일들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일만 살펴보자. 북한은 3월 22일 모의 핵(核)탄두를 탑재한 전략순항미사일을 지상으로부터 600m 상공에서 폭발시키는 시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틀 후인 3월 24일 수중공격정(수중 핵 드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모의 핵탄두가 탑재된 수중공격정 ‘해일’이 목표를 정확히 명중시켰다는 것이다. 지난 2년간 50여 차례의 각종 최종 단계 실험을 거쳤다고도 했다.
북한의 주장이 사실일 경우, 한국군이 발사 원점을 파악해 선제(先制)타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한국형 3축 체계(킬 체인)는 수정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북한은 3월 28일엔 KN-24, KN-25 등 8종의 공중·해상 미사일에 탑재할 전술핵탄두를 사상 처음으로 공개했다. ‘화산-31’이라는 명칭의 규격화된 전술핵탄두는 직경 약 50cm 미만인데, 마치 총알을 갈아 끼우듯 8종의 미사일에 탑재해 위협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바이든, 한일 간 ‘이혼 카운슬러’ 자처
여러 설명할 필요 없이 중국의 잠재적 위협과 북한의 직접적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의 안전보장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한미(韓美)동맹과 이를 기반으로 한 한·미·일(韓美日) 3각 협력은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 유지는 필수적이라는 삼단논법이 성립한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안보의 주축인 한미동맹의 당사자인 미국이 한일 간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21년 1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직후 두 달 만인 같은 해 3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한국, 일본을 잇달아 방문할 때였다. 미 국무부는 블링컨 장관의 일본 방문을 설명하면서 한·미·일 3국 협력을 “세계 평화와 안보, 인도·태평양과 세계 전역의 법치를 촉진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했다. 아예 ‘미국·일본·한국의 협력 강화’를 별도 항목으로 만들어 공개했다. 이 문서는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과 우리 동맹들의 관계, 그리고 그 동맹 간의 관계(한일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관계도 일본과 한국의 관계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한·미·일 3국 협력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바이든은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지자 매우 기뻐하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는 2016년 미국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신조 당시 총리의 요청으로 박근혜(朴槿惠) 당시 대통령과 통화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나는 (위안부) 합의를 만드는 협상을 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과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고 그들이 나를 신뢰했기 때문에 중재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부부관계를 복원시키는 ‘이혼 카운슬러’ 같았다”고 했다. 그는 2017년 문재인(文在寅) 당시 대통령에 의해 위안부 합의가 사실상 파기되자 크게 실망감을 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일 차관협의회에서 연설했던 바이든
바이든이 2016년 7월 하와이 방문 당시 한·미·일 3국 차관협의회에 참석한 것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자주 거론된다. 바이든은 당시 오바마 정부의 부통령으로 환태평양 군사훈련(RIMPAC) 참관 후 호주로 향하게 돼 있었다. 그는 하와이 출장 직전 이곳에서 제4차 한·미·일 3국 차관협의회가 열리는 것을 알게 됐다. 즉각 회의를 주재하는 토니 블링컨 국무부 부장관에게 연락해 “3국 협의회에 참석해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이 회의에 나타난 바이든은 기조연설을 통해 “미국·한국·일본 3국은 기본적인 가치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미래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 이 가치를 계속 지켜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미 부통령이 한·미·일 3국 회의에 참석해 연설한 것은 전례 없었다.
당시 차관협의회를 주도한 이가 현 블링컨 국무장관이다. 그가 2015년 국무부 부장관 당시 가장 먼저 구상한 것이 2000년대 초반 활발했던 한·미·일 3국 대북정책조정그룹(TCOG)의 부활이었다. 그는 위안부 문제로 다투던 한국·일본을 화해시키고 중·북 문제에 협력·대응하기 위해 차관협의회를 신설했다.
2015년 제1차 워싱턴 회의에 외교부 1차관으로 참석했던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존 케리 장관은 중동 문제를 맡고, 블링컨은 아시아를 담당하기로 역할 분담을 한 후 차관협의회가 만들어졌는데 블링컨이 매우 적극적이었다.”
3국 정책 조율에 효율적이었던 이 협의회는 트럼프·문재인 정권이 발족한 2017년 7차 서울 회의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트럼프는 이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문재인 정권은 중국·북한이 문제 삼는다는 이유로 적폐시했다. 이후 한·미·일 3국 협의는 문재인 정부에서 금기어(禁忌語)에 속했다. 문 대통령 주변 인사들은 대법원 징용 배상 판결에 반발하는 일본을 빌미 삼아 3국 협의를 기피했다.
한국을 지키는 주일 유엔사 후방 기지
문재인 정권이 무시했던 한·미·일 3국 협력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곳이 주일 유엔사 후방 기지다. 1951년 2차 세계대전을 법적으로 종결지은 샌프란시스코 협정 이후, 미국 주도의 유엔사령부는 일본 내 7개 미군 기지를 한반도 방어에 활용하고 있다. 일본 본토에 요코다 공군 기지, 요코스카·사세보 해군 기지, 자마 육군 기지 등 4곳이, 오키나와에 가데나 공군 기지와 화이트비치 해군 기지, 후텐마 해병대 기지 등 3곳이 있다.
이들 유엔사 후방 기지는 약 70년간 가공할 만한 전력(戰力)을 유지하며 전쟁억지력을 발휘하고 있다. 요코스카 기지엔 웬만한 국가의 국방력과 맞먹는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가 상주한다. 이 기지에 비축 중인 디젤유가 1억 갤런, 폭약이 500만 파운드다. 한반도 유사시 주한미군보다 많은 규모의 미군과 유엔국가 병력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증원된다. 오키나와의 미 공군 기지에는 언제든 북한을 향해 출격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대기 중이다.
필자는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2018년 일본 본토의 요코스카, 요코다 기지와 오키나와의 후텐마 기지 등 유엔 후방사 기지를 취재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요코스카 기지의 드라이 독(Dry Dock·큰 배를 만들거나 수리할 때에 배가 드나들 수 있게 땅을 파서 만든 구조물)이었다. 당시 약 30m 깊이의 드라이 독 속엔 충돌 사고가 난 후 이곳으로 옮겨져 수리 중인 미군 이지스 구축함이 있었다. 헬멧을 쓴 30여 명의 기술자가 수리 중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들이 미국인 같지 않았다. 그때 요코스카 기지를 안내해주던 한국계 미군 대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했다.
“이곳의 미군 함정은 100% 일본인 기술자들이 수리하고 있습니다. 일본 기술자들의 지원이 없으면 한반도를 지키는 미군 함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머리를 둔기로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코스카 기지에 근무 중인 1만 명의 일본인 기술자와 근로자들은 모두 일본 정부로부터 임금을 받고 있다. 일본인 기술자, 근로자들에 의해 정비, 수리받은 미군 함정들이 한국을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한국인의 몇 %가 알고 있을까.
도쿄 서쪽에 위치한 요코다 미군 기지는 활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이 활주로 위에 C-130 수송기 10여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유사시 언제든 한반도로 출격 가능한 편대였다. 미군은 2018년부터 이곳에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오스프리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오스프리는 한반도 비상사태 발생 시 특수부대를 태우고 가서 내려놓는 역할을 하는 항공기다. 미국과 일본은 요코다 기지 인근 일본 주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스프리 배치를 결정했다.
윤 대통령의 ‘미래를 위한 한일관계 결단’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흔들렸던 한·미·일 3각 협력은 지난해 5월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전기를 맞았다. 윤 대통령은 끊임없이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일본 측 인사들의 면담 요청을 모두 수용해 만났다. 문재인 정부가 방치한 징용 문제에 대해서도 수습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윤 대통령은 올해 104주년 삼일절 기념식 기념사에서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共有)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
매번 삼일절이 되면 한국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비판이 관례였는데, 일본에 대한 비판 한마디 없이 ‘협력 파트너’라고 칭한 것이다. 그는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北核)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어 3월 7일 국무회의에서 ‘제3자 변제(辨濟)’를 핵심으로 한 일제(日帝) 강제동원 배상 해법에 대해 “미래를 위한 결단”이라고 강조했다. “피해자 입장을 존중하면서 한일 양국의 공동 이익과 미래 발전에 부합하는 방안을 모색해온 결과”라며 “한일 간의 미래지향적 협력은 한일 양국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전체의 자유, 평화, 번영을 지켜줄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한일관계 개선이 필요한 이유로 경제·안보 위기를 거론하고, 미래지향적 양국 협력이 세계 평화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3월 16~17일 일본 방문에서 치밀하지 못한 회담 준비와 미숙한 대응으로 오점을 남겼다. 이리저리 얽혀 있는 매듭을 하나씩 풀기보다 단칼에 끊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비판받을 점도 있다. 그러나 그 결단의 취지와 방향성에 대해서는 전례 없는 복합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의 존립과 번영의 측면에서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大法 판결, 무조건 따라야 한다?
그동안 한일관계를 가로막았던 징용 문제와 관련해 크게 볼 때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2018년 10월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문재인 전 대통령은 “삼권(三權) 분립 정신에 비춰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대법원 판결이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반일 시민단체들도 제3자 변제 결정이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에 위배되니 대통령이 이를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헌법에서 정한 대통령의 역할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66조는 대통령과 관련한 규정이다. 이 중 제66조 1항은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元首)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고 돼 있다. 66조 4항은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고 돼 있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에 앞서 국가의 원수로 국가를 대표한다고 돼 있다.
만약 헌법에 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의 역할만 하도록 규정돼 있다면 문재인 전 대통령의 말대로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서 한일관계가 악화되든 말든 신경 쓸 바 아니다. 하지만 헌법에 의해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원수로서 국가를 대표하기에 대법원의 판결이 있다 해도 국익(國益)에 저해되면 외교적 갈등을 피하며 국익을 위하는 방향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책임 또한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윤 대통령의 제3자 변제 방식은 원고들에게 물적(物的) 위로를 조기(早期)에 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100점짜리는 아니지만 나쁜 차선책 또한 아니다.
한국, 징용 피해자에게 이미 배상
대한민국 정부가 징용 피해자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1974년 특별법을 제정, 8만3519건에 대해 청구권 자금 3억 달러의 9.7%에 해당하는 92억원을 배상했다. 이어 노무현(盧武鉉) 정부에서는 2007년 당시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도 참가한 위원회의 결정으로 7만8000여 명에 대해 약 6500억원을 다시 배상했다. 윤석열 정부가 일본 피고 기업 대신 행정안전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배상금을 변제하기로 한 것은 보수·진보 정부 가릴 것 없이 계속 징용 피해자를 도우려고 한 이런 흐름 속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와 관련해 여러 미숙한 점에도 불구하고 양국 관계의 근간(根幹)과 같은 1965년 체제를 지키려고 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2018년 대법원 배상 판결, 2019년 일본의 반도체 부품 등 수출규제 이후 관계 악화로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국가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 1965년 체제는 위기에 처했었다.
이로 인해 한국에 투자한 일본 기업, 일본에 투자한 한국 기업이 적잖게 불안해했으나, 이젠 양국 간 과거사 갈등으로 인한 걱정거리가 줄어들었다. 한·미·일 3각 협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또한 다시 살아났다. 코로나19 사태가 완화된 후, 양국의 여행객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오갈 수 있게 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갓끈 전술’
윤석열 정부에서 한·미·일 3국 협력의 발판이 되는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북한의 소위 ‘갓끈 전술’은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졌다.
갓끈 전술은 대한민국이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갓끈에 의해 유지되기에 이 중 하나만 잘라내도 머리에서 갓이 땅으로 떨어지듯이 한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한일 청구권 협정 이후 한·미·일 3각 협력이 시작되자 1965년 이 체제를 무력화(無力化)하기 위해 ‘갓끈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갓끈 전술은 북한의 대남(對南) 핵심 전략인데, 지난해 10월 북한 외교관 출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판할 때 언급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그는 이 대표가 한·미·일 3국 군사 훈련에 대해 ‘극단적 친일 행위’라고 발언하자 “이재명 대표의 ‘친일 몰이’는 북한 김일성의 ‘갓끈 전술’”이라고 비판했다.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의 주장은 반일(反日) 프레임으로 한·미·일 공조에 균열을 내야 한다던 김일성의 ‘갓끈 전술’을 그대로 따르는 것 같다. 이 대표의 주장이 어쩌면 이렇게도 북한 노동당의 주장과 완벽히 부합하나”라고 지적했다.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가 2020년 펴낸 《조선반도와 일본의 미래》는 지난 문재인 정권이 일관된 반일 정책으로 북한의 갓끈 전술에 철저히 이용당했음을 잘 보여준다.(이 책은 당시 일본 미디어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포스트 아베’ 1순위로 떠오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방위상이 자신의 독서 목록 중의 하나로 꼽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강 교수는 재일동포 2세 정치학자로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사망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초청받아 강연할 정도로 진보 성향이다. 이런 강 교수가 문재인 대통령의 친북반일(親北反日) 정책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문 대통령과 그 정권에 결여돼 있는 것은 남북 접근과 화해 진전을 도모할 때 일·한(日韓) 간의 의사소통을 깊게 하는 것, 양자(남북관계와 한일관계)를 평행하게 진행해가는 복안(複眼)적인 외교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신뢰관계를 지금보다 더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문재인 정권, 日韓 갈등에 정치적 자원 낭비”
그는 2020년 당시 한일관계를 ‘복합골절’ 상황이라고 규정, 문 전 대통령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비교해가며 비판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남북화해를 진전시키기 위해 한국의 모든 과거 정권은 특히 일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다대한 외교적 리소스와 에너지를 할애해왔다”며 “김대중의 햇볕 정책은 남북통일의 프로세스가 주변 나라, 특히 일본에 바람직한 영향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지침을 명확히 했다”고 했다. 그는 “문재인 정권은 김대중 정권에 비해서 일본과 강한 관계 구축의 이니셔티브를 발휘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불신감과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일·한 갈등에 정치적 자원을 낭비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이 책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지일(知日)’”이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을 읽어보면 일본에 특정한 평가를 동반하는 언급은 거의 없다”며 “문 대통령에게 있어서 일본에 관한 평가는 사실상 ‘백지(白紙) 상태’”라고도 했다.⊙
특히 추가되는 미군 기지 중 3곳은 대만과 약 40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필리핀 카가얀주(州)의 랄로 공항, 카밀로 오시아스 해군 기지와 이사벨라주의 멜커 델라 크루즈 캠프에 위치하게 된다. 이에 앞서 올 초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필리핀을 방문, 필리핀 내 미군 기지를 확대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작년 취임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전임자인 두테르테 대통령의 친중(親中) 정책을 폐기했다. 취임 직후인 작년 9월 미국을 방문,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회담하며 양국 간 ‘관계 정상화’를 선언했다.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왜 필리핀이 중국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며 미군 기지를 두 배 가까이 늘리기로 했느냐다. 한마디로 중국이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주석 3연임(連任) 전후로 1인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안보 위협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필리핀은 미국이 일본 열도-대만-필리핀을 잇는 방어선을 더 촘촘하게 구축하게 함으로써 중국의 해양굴기(海洋崛起)에 더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각해지는 미·중 갈등 상황에서 필리핀의 선택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고도화되는 北의 핵 무력
최근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은 어떤가. 중국의 위협이 잠재적이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북한의 연속 도발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수의 안보전문가가 “한반도 안보 환경을 뒤흔드는 중대 사안”이라고 평가하는 일들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일만 살펴보자. 북한은 3월 22일 모의 핵(核)탄두를 탑재한 전략순항미사일을 지상으로부터 600m 상공에서 폭발시키는 시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틀 후인 3월 24일 수중공격정(수중 핵 드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모의 핵탄두가 탑재된 수중공격정 ‘해일’이 목표를 정확히 명중시켰다는 것이다. 지난 2년간 50여 차례의 각종 최종 단계 실험을 거쳤다고도 했다.
북한의 주장이 사실일 경우, 한국군이 발사 원점을 파악해 선제(先制)타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한국형 3축 체계(킬 체인)는 수정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북한은 3월 28일엔 KN-24, KN-25 등 8종의 공중·해상 미사일에 탑재할 전술핵탄두를 사상 처음으로 공개했다. ‘화산-31’이라는 명칭의 규격화된 전술핵탄두는 직경 약 50cm 미만인데, 마치 총알을 갈아 끼우듯 8종의 미사일에 탑재해 위협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바이든, 한일 간 ‘이혼 카운슬러’ 자처
여러 설명할 필요 없이 중국의 잠재적 위협과 북한의 직접적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의 안전보장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한미(韓美)동맹과 이를 기반으로 한 한·미·일(韓美日) 3각 협력은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 유지는 필수적이라는 삼단논법이 성립한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안보의 주축인 한미동맹의 당사자인 미국이 한일 간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21년 1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직후 두 달 만인 같은 해 3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한국, 일본을 잇달아 방문할 때였다. 미 국무부는 블링컨 장관의 일본 방문을 설명하면서 한·미·일 3국 협력을 “세계 평화와 안보, 인도·태평양과 세계 전역의 법치를 촉진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했다. 아예 ‘미국·일본·한국의 협력 강화’를 별도 항목으로 만들어 공개했다. 이 문서는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과 우리 동맹들의 관계, 그리고 그 동맹 간의 관계(한일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관계도 일본과 한국의 관계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한·미·일 3국 협력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바이든은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지자 매우 기뻐하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는 2016년 미국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신조 당시 총리의 요청으로 박근혜(朴槿惠) 당시 대통령과 통화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나는 (위안부) 합의를 만드는 협상을 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과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고 그들이 나를 신뢰했기 때문에 중재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부부관계를 복원시키는 ‘이혼 카운슬러’ 같았다”고 했다. 그는 2017년 문재인(文在寅) 당시 대통령에 의해 위안부 합의가 사실상 파기되자 크게 실망감을 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일 차관협의회에서 연설했던 바이든
바이든이 2016년 7월 하와이 방문 당시 한·미·일 3국 차관협의회에 참석한 것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자주 거론된다. 바이든은 당시 오바마 정부의 부통령으로 환태평양 군사훈련(RIMPAC) 참관 후 호주로 향하게 돼 있었다. 그는 하와이 출장 직전 이곳에서 제4차 한·미·일 3국 차관협의회가 열리는 것을 알게 됐다. 즉각 회의를 주재하는 토니 블링컨 국무부 부장관에게 연락해 “3국 협의회에 참석해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이 회의에 나타난 바이든은 기조연설을 통해 “미국·한국·일본 3국은 기본적인 가치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미래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 이 가치를 계속 지켜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미 부통령이 한·미·일 3국 회의에 참석해 연설한 것은 전례 없었다.
당시 차관협의회를 주도한 이가 현 블링컨 국무장관이다. 그가 2015년 국무부 부장관 당시 가장 먼저 구상한 것이 2000년대 초반 활발했던 한·미·일 3국 대북정책조정그룹(TCOG)의 부활이었다. 그는 위안부 문제로 다투던 한국·일본을 화해시키고 중·북 문제에 협력·대응하기 위해 차관협의회를 신설했다.
2015년 제1차 워싱턴 회의에 외교부 1차관으로 참석했던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존 케리 장관은 중동 문제를 맡고, 블링컨은 아시아를 담당하기로 역할 분담을 한 후 차관협의회가 만들어졌는데 블링컨이 매우 적극적이었다.”
3국 정책 조율에 효율적이었던 이 협의회는 트럼프·문재인 정권이 발족한 2017년 7차 서울 회의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트럼프는 이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문재인 정권은 중국·북한이 문제 삼는다는 이유로 적폐시했다. 이후 한·미·일 3국 협의는 문재인 정부에서 금기어(禁忌語)에 속했다. 문 대통령 주변 인사들은 대법원 징용 배상 판결에 반발하는 일본을 빌미 삼아 3국 협의를 기피했다.
문재인 정권이 무시했던 한·미·일 3국 협력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곳이 주일 유엔사 후방 기지다. 1951년 2차 세계대전을 법적으로 종결지은 샌프란시스코 협정 이후, 미국 주도의 유엔사령부는 일본 내 7개 미군 기지를 한반도 방어에 활용하고 있다. 일본 본토에 요코다 공군 기지, 요코스카·사세보 해군 기지, 자마 육군 기지 등 4곳이, 오키나와에 가데나 공군 기지와 화이트비치 해군 기지, 후텐마 해병대 기지 등 3곳이 있다.
이들 유엔사 후방 기지는 약 70년간 가공할 만한 전력(戰力)을 유지하며 전쟁억지력을 발휘하고 있다. 요코스카 기지엔 웬만한 국가의 국방력과 맞먹는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가 상주한다. 이 기지에 비축 중인 디젤유가 1억 갤런, 폭약이 500만 파운드다. 한반도 유사시 주한미군보다 많은 규모의 미군과 유엔국가 병력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증원된다. 오키나와의 미 공군 기지에는 언제든 북한을 향해 출격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대기 중이다.
필자는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2018년 일본 본토의 요코스카, 요코다 기지와 오키나와의 후텐마 기지 등 유엔 후방사 기지를 취재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요코스카 기지의 드라이 독(Dry Dock·큰 배를 만들거나 수리할 때에 배가 드나들 수 있게 땅을 파서 만든 구조물)이었다. 당시 약 30m 깊이의 드라이 독 속엔 충돌 사고가 난 후 이곳으로 옮겨져 수리 중인 미군 이지스 구축함이 있었다. 헬멧을 쓴 30여 명의 기술자가 수리 중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들이 미국인 같지 않았다. 그때 요코스카 기지를 안내해주던 한국계 미군 대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했다.
“이곳의 미군 함정은 100% 일본인 기술자들이 수리하고 있습니다. 일본 기술자들의 지원이 없으면 한반도를 지키는 미군 함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머리를 둔기로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코스카 기지에 근무 중인 1만 명의 일본인 기술자와 근로자들은 모두 일본 정부로부터 임금을 받고 있다. 일본인 기술자, 근로자들에 의해 정비, 수리받은 미군 함정들이 한국을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한국인의 몇 %가 알고 있을까.
도쿄 서쪽에 위치한 요코다 미군 기지는 활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이 활주로 위에 C-130 수송기 10여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유사시 언제든 한반도로 출격 가능한 편대였다. 미군은 2018년부터 이곳에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오스프리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오스프리는 한반도 비상사태 발생 시 특수부대를 태우고 가서 내려놓는 역할을 하는 항공기다. 미국과 일본은 요코다 기지 인근 일본 주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스프리 배치를 결정했다.
윤 대통령의 ‘미래를 위한 한일관계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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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일본을 방문, 한일관계 개선의 물꼬를 텄다. 사진=대통령실 |
윤 대통령은 올해 104주년 삼일절 기념식 기념사에서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共有)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
매번 삼일절이 되면 한국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비판이 관례였는데, 일본에 대한 비판 한마디 없이 ‘협력 파트너’라고 칭한 것이다. 그는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北核)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어 3월 7일 국무회의에서 ‘제3자 변제(辨濟)’를 핵심으로 한 일제(日帝) 강제동원 배상 해법에 대해 “미래를 위한 결단”이라고 강조했다. “피해자 입장을 존중하면서 한일 양국의 공동 이익과 미래 발전에 부합하는 방안을 모색해온 결과”라며 “한일 간의 미래지향적 협력은 한일 양국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전체의 자유, 평화, 번영을 지켜줄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한일관계 개선이 필요한 이유로 경제·안보 위기를 거론하고, 미래지향적 양국 협력이 세계 평화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3월 16~17일 일본 방문에서 치밀하지 못한 회담 준비와 미숙한 대응으로 오점을 남겼다. 이리저리 얽혀 있는 매듭을 하나씩 풀기보다 단칼에 끊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비판받을 점도 있다. 그러나 그 결단의 취지와 방향성에 대해서는 전례 없는 복합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의 존립과 번영의 측면에서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大法 판결, 무조건 따라야 한다?
그동안 한일관계를 가로막았던 징용 문제와 관련해 크게 볼 때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2018년 10월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문재인 전 대통령은 “삼권(三權) 분립 정신에 비춰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대법원 판결이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반일 시민단체들도 제3자 변제 결정이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에 위배되니 대통령이 이를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헌법에서 정한 대통령의 역할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66조는 대통령과 관련한 규정이다. 이 중 제66조 1항은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元首)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고 돼 있다. 66조 4항은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한다”고 돼 있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에 앞서 국가의 원수로 국가를 대표한다고 돼 있다.
만약 헌법에 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의 역할만 하도록 규정돼 있다면 문재인 전 대통령의 말대로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서 한일관계가 악화되든 말든 신경 쓸 바 아니다. 하지만 헌법에 의해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원수로서 국가를 대표하기에 대법원의 판결이 있다 해도 국익(國益)에 저해되면 외교적 갈등을 피하며 국익을 위하는 방향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책임 또한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윤 대통령의 제3자 변제 방식은 원고들에게 물적(物的) 위로를 조기(早期)에 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100점짜리는 아니지만 나쁜 차선책 또한 아니다.
한국, 징용 피해자에게 이미 배상
대한민국 정부가 징용 피해자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1974년 특별법을 제정, 8만3519건에 대해 청구권 자금 3억 달러의 9.7%에 해당하는 92억원을 배상했다. 이어 노무현(盧武鉉) 정부에서는 2007년 당시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도 참가한 위원회의 결정으로 7만8000여 명에 대해 약 6500억원을 다시 배상했다. 윤석열 정부가 일본 피고 기업 대신 행정안전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배상금을 변제하기로 한 것은 보수·진보 정부 가릴 것 없이 계속 징용 피해자를 도우려고 한 이런 흐름 속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와 관련해 여러 미숙한 점에도 불구하고 양국 관계의 근간(根幹)과 같은 1965년 체제를 지키려고 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2018년 대법원 배상 판결, 2019년 일본의 반도체 부품 등 수출규제 이후 관계 악화로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국가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 1965년 체제는 위기에 처했었다.
이로 인해 한국에 투자한 일본 기업, 일본에 투자한 한국 기업이 적잖게 불안해했으나, 이젠 양국 간 과거사 갈등으로 인한 걱정거리가 줄어들었다. 한·미·일 3각 협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또한 다시 살아났다. 코로나19 사태가 완화된 후, 양국의 여행객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오갈 수 있게 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갓끈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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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사진은 1998년 10월 7일 천황 초청 만찬에서 아키히토 천황과 건배하는 김대중 대통령. 사진=조선DB |
갓끈 전술은 대한민국이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갓끈에 의해 유지되기에 이 중 하나만 잘라내도 머리에서 갓이 땅으로 떨어지듯이 한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한일 청구권 협정 이후 한·미·일 3각 협력이 시작되자 1965년 이 체제를 무력화(無力化)하기 위해 ‘갓끈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갓끈 전술은 북한의 대남(對南) 핵심 전략인데, 지난해 10월 북한 외교관 출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판할 때 언급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그는 이 대표가 한·미·일 3국 군사 훈련에 대해 ‘극단적 친일 행위’라고 발언하자 “이재명 대표의 ‘친일 몰이’는 북한 김일성의 ‘갓끈 전술’”이라고 비판했다.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의 주장은 반일(反日) 프레임으로 한·미·일 공조에 균열을 내야 한다던 김일성의 ‘갓끈 전술’을 그대로 따르는 것 같다. 이 대표의 주장이 어쩌면 이렇게도 북한 노동당의 주장과 완벽히 부합하나”라고 지적했다.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가 2020년 펴낸 《조선반도와 일본의 미래》는 지난 문재인 정권이 일관된 반일 정책으로 북한의 갓끈 전술에 철저히 이용당했음을 잘 보여준다.(이 책은 당시 일본 미디어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포스트 아베’ 1순위로 떠오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방위상이 자신의 독서 목록 중의 하나로 꼽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강 교수는 재일동포 2세 정치학자로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사망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초청받아 강연할 정도로 진보 성향이다. 이런 강 교수가 문재인 대통령의 친북반일(親北反日) 정책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문 대통령과 그 정권에 결여돼 있는 것은 남북 접근과 화해 진전을 도모할 때 일·한(日韓) 간의 의사소통을 깊게 하는 것, 양자(남북관계와 한일관계)를 평행하게 진행해가는 복안(複眼)적인 외교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신뢰관계를 지금보다 더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문재인 정권, 日韓 갈등에 정치적 자원 낭비”
그는 2020년 당시 한일관계를 ‘복합골절’ 상황이라고 규정, 문 전 대통령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비교해가며 비판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남북화해를 진전시키기 위해 한국의 모든 과거 정권은 특히 일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다대한 외교적 리소스와 에너지를 할애해왔다”며 “김대중의 햇볕 정책은 남북통일의 프로세스가 주변 나라, 특히 일본에 바람직한 영향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지침을 명확히 했다”고 했다. 그는 “문재인 정권은 김대중 정권에 비해서 일본과 강한 관계 구축의 이니셔티브를 발휘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불신감과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일·한 갈등에 정치적 자원을 낭비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이 책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지일(知日)’”이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을 읽어보면 일본에 특정한 평가를 동반하는 언급은 거의 없다”며 “문 대통령에게 있어서 일본에 관한 평가는 사실상 ‘백지(白紙) 상태’”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