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全 ‘물가 한 자릿수 이야기 꺼내자 삼성은 코웃음 쳤다’
⊙ 全 “일본의 경제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 盧 ‘북방정책 통해 追從 외교에서 自主 외교로 전환’
⊙ 盧 ‘경부고속전철과 인천국제공항, 한국인의 삶 바꿨다’
⊙ 전두환이 말하는 ‘6·29’, 노태우가 말하는 ‘6·29’
⊙ 우정과 배신, 그리고 권력의 비정함
⊙ 全 “일본의 경제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 盧 ‘북방정책 통해 追從 외교에서 自主 외교로 전환’
⊙ 盧 ‘경부고속전철과 인천국제공항, 한국인의 삶 바꿨다’
⊙ 전두환이 말하는 ‘6·29’, 노태우가 말하는 ‘6·29’
⊙ 우정과 배신, 그리고 권력의 비정함
-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날 민정당은 노태우 대표위원을 13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후보가 손을 잡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있다. 사진=조선DB
상반된 평가를 받아온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하 직함 생략)이 약 한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기자 생활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각종 문헌(文獻)을 통해 전두환·노태우를 나름 간접적으로 연구해왔다. 전두환에 대한 개인의 평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정통성의 취약점을 경제발전과 평화적 정권교체로 만회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는 ‘초인적인 인내(忍耐)를 거듭하며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한 대통령’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 그들의 과(過)보다 공(功)에 좀 더 점수를 줬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가는 두 사람의 ‘정치적 멍에’에 가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대한민국만큼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나라는 없다고 하지만, 특히 전두환·노태우에 대해서는 가혹하기 짝이 없다. 이들의 인간됨을 잘 알지도 못한 채 대번에 평가절하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이룬 성과를 ‘시대상황 덕분’이라며 손쉽게 깎아내리기도 한다.
우리는 그간 11명의 전직 대통령과 호흡해왔다. 그중엔 ‘독재자’라는 혹평을 받은 이도 있고, ‘유약한 지도자’란 평가를 받은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전직 대통령들은 ‘친북좌파’라는 비판 속에 임기를 마쳤던 경우도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객관적인 시각과 총체적인 방식으로 11명의 대통령을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사(史)는 특정 개인의 판단만으로 재단(裁斷)할 수 없는 엄숙한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입체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전두환·노태우
전두환·노태우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을 ‘독재자’ ‘학살자’ ‘부정축재자’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본다면 1차원적이고 편협한 틀 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독재자라 해도 1년 365일 독재를 한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전두환을 겨냥한 ‘학살자’라는 평가도, 노태우에 대한 ‘부정축재자’라는 인식도 좀 더 정치(精緻)하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입체적인 평가는 다른 전직 대통령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보수층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친북좌파적인 대통령’이라고 비판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이 임기 5년 내내 친북좌파적인 행보만 걸은 것은 분명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임기 5년을 총체적으로 분석한다면, 과도 있지만 공도 있기 마련이다.
만약 ‘전두환·노태우식’ 비판 논리를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이들 세 사람 역시 전두환·노태우가 받은 ‘비난의 화살’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제 남은 전직 대통령은 수감돼 있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뿐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얼마 안 있으면 전직 대통령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조만간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을 갖게 되지만, 새 전직 대통령이 또 어떤 운명과 마주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벌한 한(恨)이 서린 한국 정치가 갖고 있는 비극적 속성 탓이다.
5년마다 편리하게 ‘고용’하는 대통령이기에 국민은 대통령을 종 부리듯 대해온 게 사실이다. 정파적(政派的) 이해관계에 따라 상대 진영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폄훼하기도 해왔다. 그러다 효용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내팽개쳐온 게 우리 자신이다.
사실 대통령이 수행하는 업무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대통령은 국정(國政) 최고 책임자이기 때문에 누군가 그들의 일을 대신할 수 없다. 그래서 욕먹기 쉬운 자리, 더 정확히 말하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리다. 국외자는 대통령이 매 순간 겪는 심리적 고통을 알 도리가 없다. 그렇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통령을 비판하며 쾌감을 느낀다. 이제 입장을 바꿔보자. 우리는 11명의 전직 대통령이 겪은 인간적 고뇌와 고충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해봤을까.
全 “이병철 회장이 죄송하다고 했다”
전두환은 12·12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집권 콤플렉스’를 딛고 많은 성과를 냈다. 전두환은 대통령 재임 중 물가 안정을 통한 경제 성장과 서울올림픽 유치, 그리고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그가 세간의 평가대로 독재자에 불과했다면 헌정사상 최초로 스스로 권좌(權座)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도 포퓰리즘에 기반한 정책으로 일관했을지 모른다. 그는 국민에게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긴축 재정을 통한 경제 안정화 정책의 고삐를 일관되게 부여잡았다. 전두환 정권이 이룬 경제성과는 인기영합이 아닌 욕을 먹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얻어낸 산물인 셈이다.
1986년 11월 29일, 전두환은 민주정의당 총재 자격으로 민정당 간부들과 국회 상임위원장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1992년 《월간조선》이 발간한 《전두환 육성증언》에 따르면, 이날 전두환은 정부가 이룬 경제성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금년도 성장이 12%, 오늘 현재 도매 물가 상승률이 -3.5%,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3.3%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정부에서 발표하는 물가와 피부로 느끼는 물가가 다르다고 했는데 여러분들, 요즘에 그런 소리 들어봤습니까. 작년부터 그런 소리가 없어졌다고 해요. 또 한 가지, 작년까지 맨날 야당에서 말하는 외채(外債)에 대한 말이 현재는 한마디도 안 나오고 있어요. 이것은 세계에 우리뿐입니다.〉
전두환은 “내가 1982년부터 물가 한 자릿수를 주장했는데 웃는 사람이 더 많았다”며 “무식한 소리를 해서 망신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나마 좋게 하는 소리였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전두환의 설명이다.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무덤을 판다고 좋아했어요. 한 자리 숫자가 안 되면 언론이나 야당, 재야(在野)가 나를 막 들고 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되더라고. 6개월 만에 소비자 물가가 4.7%로 떨어졌습니다. 지금 세계 어떤 선진국과도 비슷하게 소비자 물가가 2% 선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과거에는 소비자 물가가 도매 물가보다 더 높을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82년부터 86년까지 만 5년 동안 완전한 안정을 이룩했습니다.〉《전두환 육성증언》
전두환은 같은 해 9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1982년 물가 한 자릿수 이야기를 꺼내며 “그때 삼성에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병철) 회장이 (내게) 죄송하다고 했다”는 말도 자랑스럽게 꺼냈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1980년의 한국 경제는 오일쇼크와 흉년이 겹쳐 대내외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6%,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28.7%에 달했다. 경상수지는 적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실업률은 5.2%에 달했다.
全 “9% 정도 성장하면 경제혁명”
이때 전두환은 ‘경제 안정론자’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은 물론 실무자 등을 불러 매일같이 경제 공부를 했다. 전두환의 회고다.
〈80년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 경제기획원 차관보, 국세청 과장까지 토요일, 일요일에 불러서 배웠다. 김재익 경제수석한테 장관 보고만 아니고 실무자의 전망과 정책 방향도 보고토록 했다. 그 사람들한테서 하루 3~4시간씩 보고를 받았다. 80년 말까지 경제 교수를 아침 7시에도 부르고 일과 끝나자마자 뒷방으로도 부르고. 3~4개월을 계속하니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끌고 나갈 방향과 시책(施策)이 나 나름대로 정립이 되었다.〉《전두환 육성증언》
전두환은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이뤄냈다. 성장과 물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란 쉽지 않은데 성장을 추구하자면 물가 상승을 용인해야 하고, 물가를 잡으려면 성장을 우선순위에서 배제해야 한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성장 대신에 물가부터 잡는 안정화를 택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는 김재익 수석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전두환은 안정론자 김재익 수석에게 경제 전권(全權)을 주며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 결과 1인당 GDP는 1980년 1714.1달러에서 1988년 4754.5달러로 2.8배나 늘었다. 만성적 무역적자도 흑자 구조로 바뀌었다. 한국 경제는 지속 성장궤도로 접어들었고, 중산층도 두꺼워졌다. 자동차·전자·반도체 같은 첨단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경제 관련 통계상으로는 전두환의 업적이 박정희를 능가한다는 평가도 있다.
전두환은 1986년 들어 경제에 있어 완전한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는 그해 6월 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현재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1.7%, 도매 물가 상승률이 -3%인데 이 추세로 가서 금년 전체로 보아 2% 내지 2.5% 이내로 물가가 안정되면서 9% 정도 성장하면 이거야말로 경제혁명”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지는 전두환의 발언이다.
〈경제가 잘되면 사회 안정으로 파급이 되고 그것은 정치 안정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다시 사회 안정, 경제 안정으로 순환되는 겁니다. 아무리 떠들어도 경제가 잘되니까, 모든 근로자들이 느끼니 사회 안정이 되고 있는 거야. 별의별 소리 다 해도 비상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사회가 흡수, 수렴하는 것은 경제가 잘되기 때문입니다.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노사 분규를 일으키려고 설쳐도 근로자들한테 명분이 안 서고 안 먹히기 때문이야.〉《전두환 육성증언》
對日 강경 자세 全
“이런 피 토할 일이 어디 있나”
전두환의 경제 관련 발언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바로 대일(對日) 강경 기조다. 전두환의 일본에 대한 강경한 입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986년 8월 22일 대일 무역 역조(逆潮) 개선 방안 회의에서 “우리가 일본의 경제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개발하는 데에는 기술에 한계가 있으니 개발이 어려운 것은 미국이나 EC(유럽공동체·현재의 EU)에서 들여오도록 해요.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오는 품목 가운데서 규모가 큰 것이 있을 텐데 일본이 기술을 안 가르쳐주는 것은 미국이나 EC와 합작으로 하도록 해보시오. 일본에서 사 오던 것을 이들 나라에서 사 오면 우리 기업이 기술 축적도 되고 수입선(輸入先) 다변화도 되고 하니 이것을 강력하게 추진합시다…. 일본에서 사 오는 업체에는 책임지고 그만큼을 일본에다 팔라고 하시오. 우리가 일본한테 맥을 못 추고 다부지게 하지 못하는 것은 일본에 잡혀서 그래.〉《전두환 육성증언》
전두환은 또 “일본한테 이래저래 영향을 받아서 말도 잘 통하고 상거래 관습이 같고 거리가 가깝고 하니 일본에 매달리는데 우리 경제의 전체 무역 역조에서 72%를 일본에 지고 있으니 이런 피 토할 일이 어디 있나”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같은 해 8월 28일 경제 관련 회의에서도 “내가 신병현 부총리에게 우리가 일본 제품을 하나도 안 사 오면 어떻게 되나 연구해보라고 했더니 3개월을 못 넘긴다고 했다”며 일본 다나카 통산장관과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일본 다나카 통산장관이 5공화국 출범 후 처음 한일각료회담을 했을 때 한국에 왔어요. 이 사람이 두 가지 못된 소리를 하더라고. 내가 기분이 아주 나빴지만 웃고 넘어갔는데 “한국이 일본한테 경제 협력하자면서 손발을 묶고 미국을 시켜서 협력해주라고 하니 이게 무슨 협력이냐. 또 한국이 안보의 최일선이라고 하는데 일본은 태평양 최일선 아니냐. 협력을 일방적으로 하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거였어요. 내가 다나카 통산장관 말 가운데서 또 한 가지 기분이 나빴던 것은 “한국이 일본보고 무역적자, 무역적자 하는데 한국이 일본에서 안 사가면 되지 않느냐”고 급소를 찌르는 거였어요. 얼마나 아픈 말이냐 이거야. 그게 일본인의 본심(本心)이라고 나는 봐요.〉《전두환 육성증언》
세계 속 한국의 무대를 넓힌 노태우
노태우는 1980년대 말까지 닫혀 있던 동구 공산권 국가와 잇달아 수교(修交)를 맺으며 북방외교의 길을 개척한 주역(主役)이다. 노태우는 1988년 7월, 남북한 자유왕래 및 북한과 서방, 남한과 사회주의권의 관계개선 협력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7·7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북방경제교류 촉진을 확인하고 10월 7일 ‘대(對) 북한 경제개방 7개 조치’를 발표했다. 나아가 국제적으로 사회주의권의 개혁과 개방이 대세임을 확인한 정부는 7·7선언 이후 북방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1988년 3월 24일 헝가리가 서울무역사무소를 설치함으로써 북방외교는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이듬해 2월 1일에는 동구 공산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정식 수교했으며, 1989년 7월까지 유고슬라비아, 소련, 폴란드, 불가리아 등 동구권의 무역사무소가 차례로 설치됐다.
1990년 2월 9일 노태우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북방외교를 전담하기 위해 북방외교추진본부를 외무부에 설치, ‘정경(政經)분리’ 차원이 아닌 ‘정경연계방식’을 천명했다. 이를 토대로 19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와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의 한소(韓蘇) 정상회담에 이어 9월 30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최호중 외무부 장관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 장관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정식으로 한소 수교를 맺었다.
한중(韓中) 관계도 이 무렵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았다. 1991년 1월 30일 대한무역진흥공사 주(駐) 베이징 대표부의 개설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이상옥 외무부 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한중 간의 정식 수교가 이루어졌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기간 동안 새로 수교한 나라는 45개국, 그 인구는 17억 명을 상회했다.
북방정책 덕분에 서방 세계에 한정돼 있던 우리의 교역(交易) 무대가 동구권으로 한층 넓어졌다. ‘세계 속의 코리아’가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 데에도 북방정책의 역할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2011년 《월간조선》이 펴낸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노태우는 “내가 추진한 북방정책의 특징과 의미를 몇 가지 밝혀두고 싶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북방정책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철학과 전략을 갖고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교섭과 진행을 절차를 밟아서 했다. 초기에는 한두 사람 특정인을 통해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했지만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공개적·합법적인 채널을 이용했다. 대소(對蘇) 경협 역시 공개적으로 추진했다. 나는 국민적인 동의를 얻어가면서 북방정책을 펼쳤다고 생각한다. 국회에서도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나의 북방정책은 우리뿐만 아니라 상대국들에도 상호이익이 되었다. 소련의 대(對) 북한 무기 및 경협 중단은 북한의 전쟁 위험성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노태우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이지 않았다”며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상태를 해결하고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큰 틀을 설정해놓고 그에 맞는 전략을 구사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나는 한국 외교를 종래의 추종(追從) 외교에서 자주(自主) 외교로 전환시켰다”며 “제6공화국은 핵문제, 대북(對北) 협상 등 모든 외교관계에서 이니셔티브를 다른 나라에 준 적이 없었다”고도 했다.
‘주택 200만 호 공급’과 ‘국가 기간시설’ 확충한 盧
‘주택 200만 호(戶) 공급’과 ‘국가 기간시설 확충’도 노태우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나 자신이 신혼 때부터 달동네에 살면서 서민들의 고통 가운데 가장 뼈저린 것이 무주택이라는 사실을 절감해온 터라 대통령에 취임하면 반드시 무주택자들의 설움을 해소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적었다.
당시 우리나라 주택 건설 능력은 연간 20만~30만 호 정도였다. 200만 호를 임기 5년 내에 짓는다는 건 엄청난 대역사(大役事)였다. 일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1988년 3월 경기도 평촌과 산본을 시작으로 200만 호 공급이 첫발을 뗐다. 이어 분당과 일산, 의정부, 중동에도 신도시가 개발됐다. 그렇게 10년도 안 되는 새에 5대 신도시(평촌·산본·분당·일산·중동)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라고 한다.
노태우는 주택 200만 호 건설 관련 여론조사를 언급하며 “국민들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일부 반대파들이 관계자들을 모함하고 협박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초지일관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결국 아파트값은 떨어져 10년 이상 안정세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누리는 사회간접자본(SOC) 역시 노태우 정부가 입안(立案)한 것들이 많다. KTX라 불리는 고속철도, 인천국제공항, 서해안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확장이 그것이다.
1991년 7월, 노태우 정부가 SOC 관련 3조6000억원 규모의 추경예산을 집행하려 하자 당정(黨政)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청와대에서도 경제수석실만 찬성하는 모양새였다. 노태우는 “내 임기 중에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일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3조6000억원을 도로와 항만, 철도에 투자하라고 당정에 지시했다.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장기적인 SOC 투자로 서해안고속도로, 경부고속전철 및 영종도(인천) 국제공항 등을 착공했다. 이런 기반시설들은 10여 년이 흐른 오늘날 한국인들의 삶을 바꿔놓고 경제가 돌아가는 데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 야권에서는 이것을 정책 프로젝트로 인식해 우리가 마치 정치자금이나 조달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 같았다. 국회에서 야당이 영종도 신공항과 경부고속전철 예산을 무조건 깎겠다고 해서 상당히 애를 먹었다.〉
만약 노태우가 야당의 반대에 굴복했다면, 지금 우리가 마음껏 향유하고 있는 최첨단 공항과 KTX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우정의 상징 ‘6·29선언’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同期)인 전두환·노태우의 우정은 아주 유명하다. 두 사람의 우정은 그들이 인수인계한 공직에서 잘 드러난다.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1970년),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1978년), 국군보안사령관(1980년), 민주정의당 총재(1987년), 그리고 마지막이 대통령이다. 이 중 대통령은 직선제로 국민이 뽑은 자리라 인수인계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 당선은 전두환의 후보 지명을 통해 이뤄졌으므로, 사실상 전두환이 만들어준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한 1987년 6·29선언도 사실 ‘전두환 연출, 노태우 주연’으로 일군 극적인 드라마였다. 당초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에 반대했으나, 전두환이 노태우를 설득했다. 노태우가 가까스로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자 전두환은 표면상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자신에게 건의하는 형식을 취했다. 6·29선언을 기획한 자신은 뒤로 빠지고 노태우를 6·29선언의 주역(主役)으로 만든 것이다. 6·29선언은 전두환·노태우의 우정이 곁들여진 최고의 콤비 플레이인 동시에 대한민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사건이다.
1987년 6월 2일, 민정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당시 민정당 대표위원)를 비롯해 민정당 중앙집행위원을 청와대 상춘재로 불러모았다. 당 총재가 차기 대통령 후보를 공식 지명하는 자리였다.
〈앞으로 2~3년은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여건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남북 긴장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는 이 어려운 시기에 제1의 과제는 우리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 안보입니다.… 특히 남북이 사생결단으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특수상황에서 군부(軍部)의 신뢰와 존경, 그리고 군사(軍事) 지식은 매우 필요한 조건입니다.… 오늘의 국가 상황을 감안할 때 그동안 우리와 함께 개혁의 선봉에 섰던 구국(救國)의 동지이자 조국 선진화 과업을 함께 추진해온 이념적·실천적 평생 동지인 노태우 대표위원이 가장 적임자라는 판단에 이르러 이 자리를 통해 추천하는 바입니다.〉
전두환이 미리 준비한 20여 분간의 말씀 자료 낭독을 끝내자 노태우는 눈시울을 붉혔다. 노태우는 “두려움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각하, 끝까지 지도해주십시오. 동지 여러분, 지도해주십시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부족한 이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해주신 각하와 여러 당무위원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여러분들의 뜻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위 장면은 전두환·노태우 ‘40년 우정’이 대통령직 인수인계 직전으로 이어지는 극적인 순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6·29선언 이전으로,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있었다. 즉 국민이 뽑은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이었기에 집권여당 후보가 매우 유리한 구조였다. 따라서 전두환의 노태우 ‘대통령 후보 지명’은 곧 ‘대통령 당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전두환은 ‘흑자경제 달성’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내세웠다. 경제야 전두환 특유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끌어갈 수 있었지만, 평화적 정권교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두환의 굳은 단임 의지
사실 전두환 재임 중 일부 측근 그룹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1988년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해야 한다고 건의한 적이 있다. 일부에서도 ‘전두환이 과연 제 발로 물러날까’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전두환이 마음만 먹는다면 정권 연장은 손쉬운 일이었지만, 그는 더도 덜도 아닌 7년 단임 약속을 지켰다.
전두환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제 발로 청와대를 걸어 나간 대통령이다. 전두환 이전의 대통령들은 모두 ‘하야(下野)’ ‘암살’ 등으로 불명예스럽게 임기를 끝마쳤다. 전두환의 이러한 단임 의지는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나라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 평화적인 정부 이양을 하자는 거지 나라를 그릇되게 하기 위해서 그걸 하는 게 아니에요.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임기를 정해놓았으면 반드시 나가야 하고 이유를 달아서 더 연장하지 않는 게 필요해요.” 1986년 6월 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내가 임기를 정해놓고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내 나이 지금 쉰다섯인데 쉰일곱에 임기가 끝나지만 나이로도 어중간한 나이예요. 쉰일곱부터 대통령을 하면 좋은 나이입니다. 나는 한 번 약속한 것은 지키겠어요.” 1986년 11월 27일 중앙 언론사 사장단들과의 오찬에서.
▲“그동안 IOC 위원장이 만나자고 해서 두서너 번 만났는데 ‘각하가 물러나면 새로 들어서는 정부가 전무후무한 올림픽을 치를 수 있겠느냐’고 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이 계실 때 나라는 사람은 정치인 말단의 명단에도 안 들어 있는 군인에 불과했다’고 했다.” 1987년 1월 5일 새해 국정연설문을 다듬는 자리에서.〉《전두환 육성증언》
전두환의 단임 의지는 친구 노태우를 ‘기필코 대통령에 당선시켜야 한다’는 의지로 이어졌다. 그는 음(陰)으로 양(陽)으로 노태우 당선을 위해 뛰었다.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지 한 달 후인 1987년 7월, 전두환은 민정당 총재직을 노태우에게 물려줬다. 집권여당 총재인 대통령이 여당 총재직을 차기 대통령 후보에게 이양(移讓)한 것 역시 헌정사상 최초였다. 그 직후인 8월 1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전두환이 한 말이다.
〈내가 노태우를 총재로 시킨 것도 6·29를 노 총재로 하여금 선언하게 해서 노태우 후보가 부각되어야겠다. 나야 부각되어봤자 뭐 하나…. 내가 노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줘야 하는데 노 후보가 당 총재를 맡아야 정치적으로 위치가 확고히 강화된다. 당도 자꾸 후보 눈치, 내 눈치를 보게 하면 내부 갈등이 생긴다고 해서 총재를 준 거야. 우리가 노 총재 체제를 지원해주고 정부는 계속 당정(黨政) 협조를 통해서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줘야 돼요.〉《전두환 육성증언》
“(노태우를) 내가 남모르게 키웠다”
전두환은 노태우의 연희동 집을 직접 찾아가 격려도 해줬다. 대통령 선거를 12일 남겨둔 같은 해 12월 4일,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열린 민정당 경인 지역 지구당 위원장 만찬 석상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요새 보니 우리 노 총재 얼굴이, 관상이 좋더군. 처음에도 총재 자리도 찌붓찌붓하고 혹시 나한테 결례되지 않을까 신경 쓰고 해서 내가 광주 갔다 와서 몇 번 노 총재 집에 찾아갔어요. 우선 자세가 자신만만해야 하겠기에 내가 격려해주러 갔어요. 노 총재가 청와대에 오는 건 다른 당 후보가 있으니까 적절치 않아요. 내가 개인적으로 집을 찾아가는 것은 내 마음이지. 다른 후보는 내가 찾아가기 싫어서 안 가는 거지. 노 총재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뭐든지 하라고 했어요. 내가 열 번 스무 번 죽어도 관계없으니 신경 쓰지 마라. 나를 죽여서 당신이 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라. 그게 내가 당신 도와주는 것이라고 했어요.〉《전두환 육성증언》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내 친척 문제를 유세장에서 쳐버려라”는 당부도 했다. 친구 노태우가 대통령이 될 수만 있다면 가장 민감한 대통령 친인척 문제, 더 나아가 전두환 자신까지 비판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다.
노태우 당선 후, 그러니까 전두환이 권좌(權座)에서 물러나자 이른바 ‘5공 청산’ 여론이 들끓었다. 노태우 정권은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5공 청산 대열에 합류, 전두환과 그의 친인척을 겨냥한 수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육사 생도 시절부터 이어온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전두환으로선 착잡한 심경을 가눌 수 없었다. 1988년 4월 3일 방미(訪美) 중이던 전두환은 김성익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에게 이런 구술(口述)을 남겼다.
〈노 대통령과 나와의 관계는 친형제보다도 소중한 관계이다. 지금까지 그런 관계가 지속되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내가 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많은 친구가 있었지만 노 대통령과는 뜻이 맞았고 성장해서는 정치노선과 이념이 딱 맞는다. 서로 우정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에 군에 있을 때도 상부상조하며 살아왔고, 내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누구보다 노 대통령을 대통령 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내가 남모르게 키운 것이다. 키웠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내가 아는 노태우는 대권(大權)이 아니라 천하 없는 것을 잡아도 변할 수 없는 사람이야.〉《전두환 육성증언》
이처럼 전두환은 노태우를 자신의 가족보다 더 믿었다. 그러나 권력 앞에서는 40년 우정도 별반 소용이 없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배신(背信)으로 여길 소지가 다분했지만, 노태우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전두환의 단임 의지 의심한 노태우
전두환은 자신의 육성증언을 남겨놓았기에 권력 전환기에 있어 그가 노태우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노태우 회고록》을 보면, 노태우가 전두환에게 가졌던 감정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처음엔 전두환의 단임 의지를 의심하지 않다가 시간이 흘러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는 식의 술회를 했다. 《노태우 회고록》의 일부다.
〈나는 처음부터 전(全) 대통령이 단임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12·12사건 당시 내가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정권에 대한 욕심이 분명히 없었기 때문이다. 전 대통령은 나와 단둘이 있을 때 “팔자에도 없는 대통령을 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심중(心中)을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 대통령의 생각이 달라지는 듯했다. ‘대통령은 그만두되 물러난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여러 가지 말과 행동으로 보아 그런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에 따르면, 전두환은 1986년 4월 유럽 4개국(영국·서독·프랑스·벨기에)을 순방하고 돌아온 뒤 자신을 찾았다고 한다. 전두환은 민정당 대표위원이던 노태우에게 “우리도 내각제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정부·여당은 현행 헌법대로 1987년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호헌(護憲)’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내각제로 선회하면 국민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게 노태우의 생각이었다. 전두환의 내각제 제안에 노태우는 ‘검토하겠습니다’라는 대답만 하고 그 자리를 나왔다고 한다.
전두환이 내각제를 제안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관제(官製) 야당인 민주한국당(민한당)이 제2야당으로 주저앉고, 선명 야당인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신민당은 간선제 대통령제를 철폐하고 개헌(改憲)에 나설 것을 전제로 정부·여당을 압박하고 있었다. 전두환이 절충안으로 내놓은 게 바로 내각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직선제는 ‘지역감정 악화 등 과열 요소가 많고 비용도 많이 든다’는 이유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노태우 입장에서는 전두환이 꺼낸 내각제 개헌 카드가 썩 달갑지 않았다. 전두환은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손쉽게 당선됐다. 그런 마당에 ‘후계자’로 발돋움하고 있던 노태우로선 ‘전두환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전두환 정권 말기 들어 ‘민간인 출신 차기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권부(權府)에 나돌며 노태우를 긴장시킨 적도 있다.
盧 “(1987년) 6월 10일 이후부터 직선제 생각 확고”
6·29선언과 관련해서도 노태우는 전두환과는 조금 다른 입장을 보였다. 앞서 본 바와 마찬가지로 전두환이 6·29선언을 기획하고, 그 공(功)을 노태우에게 돌렸다는 게 그간의 정설(定說)이다. 노태우는 6·29선언 직전 상황을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6월 18일과 19일 이틀 동안 당 집무실에 머물면서 당직자 등 수십 명의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의견을 들었다.… 6월 20일 이날 하루 국회 귀빈식당에서 이만섭 국민당 총재, 이민우 신민당 총재, 김수환 추기경을 잇따라 만났다.… 이만섭 총재는 “국민들의 저항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직선제밖에 없는데, 노 대표는 직선제로 나가도 당당히 이길 수 있지 않겠소?”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현행 헌법은 물론 당론(黨論)이자 전 대통령의 강한 의지이므로 꺾을 수 없다”고 답했다. 이 총재는 “그렇다면 전 대통령을 만나 설득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이민우 신민당 총재를 만났다. 이 총재도 “야당뿐 아니라 국민 절대다수가 직선제를 원하고 있으니 노 대표가 마음을 비워 직선제를 당당히 받고 김대중씨를 사면·복권시켜주시오”라면서 “노 대표가 하면야, 안 이기겠나”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직선제를 해야만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고 돌릴 수 있을 것”이라며 “노 대표, 마음을 비우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福)을 주십니다”라고 말했다.〉
노태우는 “1987년 들어서서 나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건의를 받으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갖가지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다”며 “(1987년) 6월 10일 이후부터는 ‘직선제’와 ‘김대중씨 사면·복권’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즉 대통령 직선제는 전두환 아이디어가 아닌 노태우 자신이 줄곧 염두에 두고 있던 카드였다는 것이다. 참고로 1987년 6월 10일은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린 날로, 이날 노태우는 민정당 13대 대통령 후보로 최종 선출됐다.
1987년 6월 24일 전두환의 부름을 받아 청와대로 올라갔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당의 신뢰도나 노 대표가 쌓아 올린 이미지로 보아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소?”라고 반문했다. 이어지는 《노태우 회고록》 내용이다.
〈나는 선뜻 수긍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 당원들을 데리고 국민들에게 내각제를 해야 된다고 얘기하고 다녔는데 갑자기 직선제로 바꾸면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반문했다. 전 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 왔으므로 이번에도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하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 대통령의 생각을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생각에서 “그게 되겠느냐”는 식으로 반어법을 쓴 것인데 후에 이 대목으로 해서 내가 직선제를 반대한 것으로 오해를 사게 된 듯하다.〉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이왕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니 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앞으로 모든 책임은 다 제가 지겠다”며 “각하의 뜻을 알았으니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 모든 것을 제게 맡기고 관여하지 말아 달라”는 입장도 밝혔다.
全 “직선제 얘기했더니 노태우 펄쩍 뛰어”
노태우 회고에 따르면, 그는 6월 24일부터 6·29선언이 있던 6월 29일까지 청와대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전두환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기자들이 집을 둘러싸고 진을 치고 있어 갈 수 없다. 애당초 (내 책임하에 추진하고 관여하지 않는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나”고 말했다고 한다. 전두환도 이에 동의했다는 게 노태우의 설명이다. 그동안 노태우는 연희동 집에서 칩거하며 6·29선언 문안(文案)을 다듬었다. 6·29선언 문안을 청와대에 보낸 적은 없다고 한다.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6·29선언과 관련해 청와대와의 관계는 이것이 전부였다”고 덧붙였다.
노태우는 6·29선언이 자신의 업적임을 강조하려는 듯 ‘전두환 역할론’에 선을 긋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두환의 이야기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전두환은 1987년 6월 28일 김성익 비서관과 아들 재국씨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털어놨다.
〈내가 뚜렷한 명분과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 직선으로 다음 정권을 창출해야 돼. 대통령 후보는 노태우 대표 아니냐.… 노 대표가 부각되도록 하는 것이 제일의 목표다. 노 대표 이름으로 해야 돼.… 노 대표가 부각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다. 사실은 내가 노 대표한테 직선제를 받도록 시킨 것이다. 2주일 전에 그랬는데 노 대표가 펄쩍 뛰어.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그래서 내가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산다)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모든 원리가 백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에 있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노 대표가 말을 못 하나, 얼굴이 못생겼나. 김영삼, 김대중 누가 나와도 자신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해주었는데 어제 노 대표를 만났더니 극비리에 연구해서 나온 것을 가져왔는데 그것이다.… 노 대표 개인이 단안(斷案)을 내린 것으로 내일 쇼크 요법을 쓰자.〉《전두환 육성증언》
이것이 전두환·노태우가 말하는 6·29선언의 전모(全貌)다. 권력 이양기였던 1987년, 두 사람 사이엔 이렇듯 직선제 개헌을 둘러싼 숨 가쁜 줄다리기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던 사이였다. 권력 1인자와 2인자라는 관계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우정은 영원히 빛이 났을지 모른다. 결국 권력이 그들의 우정을 갈라놓은 셈이다.
육사 생도 全·盧의 ‘진지한 토론’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52년 1월 1일 경남 진해에서 이뤄졌다. 6·25전쟁 와중이라 육군사관학교는 진해에 있었다. 이날 육사 11기 가(假)입교생 자격으로 두 사람은 한 내무반(지금의 생활관)을 썼다. 당시 가입교생 수는 모두 228명이었다. 이 중 28명을 20일간의 기초 군사훈련 과정을 통해 무조건 탈락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은 그 과정에서 우정을 키워나갔다. 동기생 최성택(전 석유개발공사 사장)씨의 회고다.
“가입교생 시절 같은 내무반에 배치된 동기 중 전두환·노태우·김복동·백운택·박병하와 나는 특히 친했다.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은 모두 대구가 고향이었다. 우리는 육사에 같이 입교(入校)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똘똘 뭉쳐 다녔다.”
여기에 손영길·정호용·권익현·노정기씨 등 네 명이 새로 참여하면서 육사 11기 주축 멤버가 구성됐다. 이 멤버들이 훗날 논란이 된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모태(母胎)라고 할 수 있다. 하나회의 실질적인 보스는 가장 리더십이 뛰어났던 전두환이었다.
이들 육사 11기 하나회원들은 ‘정치군인’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20대 시절의 그들은 다른 면모를 보였다. 노태우에게 육사 진학을 권유했던 김용희(전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상임감사)씨의 말이다.
“노 대통령이 육사 3학년 생도 시절입니다. 육사는 경남 진해에서 서울 태릉으로 학교를 옮겼는데, 노 대통령은 주말 외박을 나오면 전두환·김복동·손영길·권익현씨를 끌고 을지로 저희 집에 왔습니다. 이들은 모였다 하면 진지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내일의 한국을 위해 우리가 할 역할은 무엇인가, 1·2차 대전은 왜 발발했나 하는 것 등이 기억납니다.… 토론의 열기는 엄청났습니다.… 책에서 읽은 지식을 총동원해 누가 더 똑똑한지 뽐내기도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두환·노태우 모두 군인으로서 성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이들이었다. 전두환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 이후 그에게 정치를 권유했지만,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당시 혁명 주체들이 군복을 벗고 정계에 진출한 것과 비교하면 다소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軍 후배 끔찍이 챙긴 전두환
박정희는 그런 전두환을 총애했다. 그런 이유로 전두환은 ‘정치군인’이라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본인 스스로도 굳이 대통령의 총애를 숨기지 않았다. 대신 상관의 애정을 독점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베풀었다.
잘 알려진 대로 전두환은 군 후배들을 물심양면으로 챙겼다. 그래서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전두환은 박 대통령이나 군 선배들로부터 일종의 ‘하사금’을 받으면, 그것을 후배들에게 뿌렸다. 경제적으로 궁핍하다 싶은 후배가 있으면 못 참는 성격이었다.
육군 특수전사령관을 지낸 민병돈(육사 15기·예비역 육군 중장)씨는 과거 “1973년 서울 목동에 처음 내 집을 마련했을 때의 이야기”라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새집을 마련하고 얼마 안 있다가 전두환 장군 부부가 우리 집에 왔었습니다. 집 장만을 축하해주기 위한 것이었죠. 전두환 장군 부부가 돌아가고 얼마 안 있다가 냉장고 하나를 보내왔어요. 우리 집에 냉장고가 없는 것을 안 전두환 부부가 자신들이 쓰던 소형 냉장고를 보낸 거더라고요.”
국군보안사령관을 지낸 서완수(육사 19기·예비역 육군 중장)씨는 전두환이 대대장으로 있을 때 그 밑에서 중대장을, 전두환이 1공수여단장으로 있을 때 작전참모와 대대장을 했다. 서완수씨 신원 조회 과정에서 인척(姻戚) 중 한 명이 6·25 때 공산당에 부역(附逆)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있던 전두환 준장은 “서완수는 훌륭한 군인이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겠다”며 그의 신원보증을 해줬다. 그 덕에 서씨는 군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렇듯 전두환은 후배들의 안살림과 민원을 해결해주는 ‘의리 있는 선배’로 통했다.
사조직 ‘하나회’도 이런 동류의식 속에서 조직됐다. 하나회는 전두환 리더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전두환은 육사 시절, 학업성적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유한 군인도 아니었다. ‘날고 긴다 하는’ 육사 후배들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 데에는 위와 같은 사례가 한몫을 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전두환은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군 출신뿐 아니라 민간인 등 많은 측근 그룹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1988년 ‘5공 청산’ 당시 백담사에 유폐되었을 때에도, 1995년 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하며 김영삼 정권을 비판한 뒤 경남 합천으로 낙향했을 때에도 많은 측근이 그를 수행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전두환은 사석에서 ‘대통령이 될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자주 말했다. 그의 꿈은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군의 최정상에 오르기 위해 매진했을 뿐, 대통령은 그에게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가 대통령이란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 계기는 1979년 10·26사태와 12·12사태였다. 공교롭게 그 시기 전두환은 군부정권 권력의 핵(核)이라 불리던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있었다. 그로 인해 박정희 시해사건 수사를 담당하게 됐다. 이때 그의 얼굴이 처음 텔레비전 전파를 탔다. 10·26사태 수사 과정에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의 주범 김재규와 결탁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 12월 12일 그를 강제 연행하고야 말았다.
초인적인 인내력 발휘한 노태우
여기엔 노태우 9사단장도 한몫을 했다. 노태우는 12·12 당시 9사단 휘하의 실병력을 서울로 진주시킨 장본인이다. 전두환을 도와 12·12를 성공시킨 주역이었다. 노태우는 군에서도 정계(政界)에 진출해서도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며 오직 전두환만이 빛을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런 자세는 그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노태우는 군인임에도 감성이 충만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운동에 능했지만, 그와 반대로 음악에도 소질이 있었다. 여단장과 사단장 시절 부대가를 직접 작사·작곡할 정도였다. 피아노와 퉁소 실력은 물론 특히 노래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노태우가 멋들어지게 부르는 ‘베사메무초’는 아주 유명하다.
그런 섬세함 탓인지 대통령 재임 시절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노태우의 우유부단함을 혹평하는 별명이다. 측근들의 평가는 다르다. 그들의 평가를 요약하면 ‘권위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과도기적 민주화 시대를 관통한 대통령으로서 그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다. 실제로 노태우는 인내(忍耐)하는 대통령이었다. 여소야대(與小野大)로 정국 주도권을 야당에 빼앗겼을 때에도, 극심한 노사분규가 곳곳에서 일어났을 때에도, 전임 대통령과 후임 대통령 사이에 무수한 갈등이 빚어졌을 때에도 그는 참고 또 참았다.
그런 무던한 성격 덕분에 노태우 정부는 큰 대과(大過) 없이 5년을 보냈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민주화를 꽃피웠다. 안타깝게도 노태우의 이런 업적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제 두 사람은 가고 없다. 지난 30여 년간 온갖 조리돌림을 당해온 전두환·노태우다. 죽은 사람에게까지 손가락질할 필요는 없다. 이제라도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역사의 두 주역을 총체적으로 평가해보는 건 어떨까?⊙
필자는 기자 생활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각종 문헌(文獻)을 통해 전두환·노태우를 나름 간접적으로 연구해왔다. 전두환에 대한 개인의 평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정통성의 취약점을 경제발전과 평화적 정권교체로 만회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는 ‘초인적인 인내(忍耐)를 거듭하며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한 대통령’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 그들의 과(過)보다 공(功)에 좀 더 점수를 줬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가는 두 사람의 ‘정치적 멍에’에 가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대한민국만큼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나라는 없다고 하지만, 특히 전두환·노태우에 대해서는 가혹하기 짝이 없다. 이들의 인간됨을 잘 알지도 못한 채 대번에 평가절하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이룬 성과를 ‘시대상황 덕분’이라며 손쉽게 깎아내리기도 한다.
우리는 그간 11명의 전직 대통령과 호흡해왔다. 그중엔 ‘독재자’라는 혹평을 받은 이도 있고, ‘유약한 지도자’란 평가를 받은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전직 대통령들은 ‘친북좌파’라는 비판 속에 임기를 마쳤던 경우도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객관적인 시각과 총체적인 방식으로 11명의 대통령을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사(史)는 특정 개인의 판단만으로 재단(裁斷)할 수 없는 엄숙한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입체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전두환·노태우
전두환·노태우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을 ‘독재자’ ‘학살자’ ‘부정축재자’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본다면 1차원적이고 편협한 틀 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독재자라 해도 1년 365일 독재를 한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전두환을 겨냥한 ‘학살자’라는 평가도, 노태우에 대한 ‘부정축재자’라는 인식도 좀 더 정치(精緻)하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입체적인 평가는 다른 전직 대통령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보수층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친북좌파적인 대통령’이라고 비판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이 임기 5년 내내 친북좌파적인 행보만 걸은 것은 분명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임기 5년을 총체적으로 분석한다면, 과도 있지만 공도 있기 마련이다.
만약 ‘전두환·노태우식’ 비판 논리를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이들 세 사람 역시 전두환·노태우가 받은 ‘비난의 화살’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제 남은 전직 대통령은 수감돼 있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뿐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얼마 안 있으면 전직 대통령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조만간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을 갖게 되지만, 새 전직 대통령이 또 어떤 운명과 마주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벌한 한(恨)이 서린 한국 정치가 갖고 있는 비극적 속성 탓이다.
5년마다 편리하게 ‘고용’하는 대통령이기에 국민은 대통령을 종 부리듯 대해온 게 사실이다. 정파적(政派的) 이해관계에 따라 상대 진영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폄훼하기도 해왔다. 그러다 효용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내팽개쳐온 게 우리 자신이다.
사실 대통령이 수행하는 업무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대통령은 국정(國政) 최고 책임자이기 때문에 누군가 그들의 일을 대신할 수 없다. 그래서 욕먹기 쉬운 자리, 더 정확히 말하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리다. 국외자는 대통령이 매 순간 겪는 심리적 고통을 알 도리가 없다. 그렇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통령을 비판하며 쾌감을 느낀다. 이제 입장을 바꿔보자. 우리는 11명의 전직 대통령이 겪은 인간적 고뇌와 고충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해봤을까.
全 “이병철 회장이 죄송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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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12·12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멍에를 안은 채 집권하는 한편, 대통령도 간선제를 통해 선출됐다. 정통성에 있어 취약점을 안고 임기를 시작한 것이다. 사진은 1981년 3월 3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설치된 전두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홍보 아치. 사진=조선DB |
1986년 11월 29일, 전두환은 민주정의당 총재 자격으로 민정당 간부들과 국회 상임위원장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1992년 《월간조선》이 발간한 《전두환 육성증언》에 따르면, 이날 전두환은 정부가 이룬 경제성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금년도 성장이 12%, 오늘 현재 도매 물가 상승률이 -3.5%,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3.3%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정부에서 발표하는 물가와 피부로 느끼는 물가가 다르다고 했는데 여러분들, 요즘에 그런 소리 들어봤습니까. 작년부터 그런 소리가 없어졌다고 해요. 또 한 가지, 작년까지 맨날 야당에서 말하는 외채(外債)에 대한 말이 현재는 한마디도 안 나오고 있어요. 이것은 세계에 우리뿐입니다.〉
전두환은 “내가 1982년부터 물가 한 자릿수를 주장했는데 웃는 사람이 더 많았다”며 “무식한 소리를 해서 망신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나마 좋게 하는 소리였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전두환의 설명이다.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무덤을 판다고 좋아했어요. 한 자리 숫자가 안 되면 언론이나 야당, 재야(在野)가 나를 막 들고 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되더라고. 6개월 만에 소비자 물가가 4.7%로 떨어졌습니다. 지금 세계 어떤 선진국과도 비슷하게 소비자 물가가 2% 선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과거에는 소비자 물가가 도매 물가보다 더 높을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82년부터 86년까지 만 5년 동안 완전한 안정을 이룩했습니다.〉《전두환 육성증언》
전두환은 같은 해 9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1982년 물가 한 자릿수 이야기를 꺼내며 “그때 삼성에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병철) 회장이 (내게) 죄송하다고 했다”는 말도 자랑스럽게 꺼냈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1980년의 한국 경제는 오일쇼크와 흉년이 겹쳐 대내외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6%,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28.7%에 달했다. 경상수지는 적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실업률은 5.2%에 달했다.
全 “9% 정도 성장하면 경제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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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신임을 받은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왼쪽)과 부인 이순자(전 숙명여대 교수)씨. 김재익 수석은 전두환 정권 당시 금융실명제, 물가안정화, 수입자유화 정책 등을 입안한 인물이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소 테러사건으로 순국했다. 사진=조선DB |
〈80년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 경제기획원 차관보, 국세청 과장까지 토요일, 일요일에 불러서 배웠다. 김재익 경제수석한테 장관 보고만 아니고 실무자의 전망과 정책 방향도 보고토록 했다. 그 사람들한테서 하루 3~4시간씩 보고를 받았다. 80년 말까지 경제 교수를 아침 7시에도 부르고 일과 끝나자마자 뒷방으로도 부르고. 3~4개월을 계속하니 우리 경제의 문제점과 끌고 나갈 방향과 시책(施策)이 나 나름대로 정립이 되었다.〉《전두환 육성증언》
전두환은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이뤄냈다. 성장과 물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란 쉽지 않은데 성장을 추구하자면 물가 상승을 용인해야 하고, 물가를 잡으려면 성장을 우선순위에서 배제해야 한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성장 대신에 물가부터 잡는 안정화를 택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는 김재익 수석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전두환은 안정론자 김재익 수석에게 경제 전권(全權)을 주며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 결과 1인당 GDP는 1980년 1714.1달러에서 1988년 4754.5달러로 2.8배나 늘었다. 만성적 무역적자도 흑자 구조로 바뀌었다. 한국 경제는 지속 성장궤도로 접어들었고, 중산층도 두꺼워졌다. 자동차·전자·반도체 같은 첨단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경제 관련 통계상으로는 전두환의 업적이 박정희를 능가한다는 평가도 있다.
전두환은 1986년 들어 경제에 있어 완전한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는 그해 6월 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현재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1.7%, 도매 물가 상승률이 -3%인데 이 추세로 가서 금년 전체로 보아 2% 내지 2.5% 이내로 물가가 안정되면서 9% 정도 성장하면 이거야말로 경제혁명”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지는 전두환의 발언이다.
〈경제가 잘되면 사회 안정으로 파급이 되고 그것은 정치 안정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다시 사회 안정, 경제 안정으로 순환되는 겁니다. 아무리 떠들어도 경제가 잘되니까, 모든 근로자들이 느끼니 사회 안정이 되고 있는 거야. 별의별 소리 다 해도 비상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사회가 흡수, 수렴하는 것은 경제가 잘되기 때문입니다.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노사 분규를 일으키려고 설쳐도 근로자들한테 명분이 안 서고 안 먹히기 때문이야.〉《전두환 육성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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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28일,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전두환. 사진=조선DB |
〈우리가 개발하는 데에는 기술에 한계가 있으니 개발이 어려운 것은 미국이나 EC(유럽공동체·현재의 EU)에서 들여오도록 해요.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오는 품목 가운데서 규모가 큰 것이 있을 텐데 일본이 기술을 안 가르쳐주는 것은 미국이나 EC와 합작으로 하도록 해보시오. 일본에서 사 오던 것을 이들 나라에서 사 오면 우리 기업이 기술 축적도 되고 수입선(輸入先) 다변화도 되고 하니 이것을 강력하게 추진합시다…. 일본에서 사 오는 업체에는 책임지고 그만큼을 일본에다 팔라고 하시오. 우리가 일본한테 맥을 못 추고 다부지게 하지 못하는 것은 일본에 잡혀서 그래.〉《전두환 육성증언》
전두환은 또 “일본한테 이래저래 영향을 받아서 말도 잘 통하고 상거래 관습이 같고 거리가 가깝고 하니 일본에 매달리는데 우리 경제의 전체 무역 역조에서 72%를 일본에 지고 있으니 이런 피 토할 일이 어디 있나”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같은 해 8월 28일 경제 관련 회의에서도 “내가 신병현 부총리에게 우리가 일본 제품을 하나도 안 사 오면 어떻게 되나 연구해보라고 했더니 3개월을 못 넘긴다고 했다”며 일본 다나카 통산장관과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일본 다나카 통산장관이 5공화국 출범 후 처음 한일각료회담을 했을 때 한국에 왔어요. 이 사람이 두 가지 못된 소리를 하더라고. 내가 기분이 아주 나빴지만 웃고 넘어갔는데 “한국이 일본한테 경제 협력하자면서 손발을 묶고 미국을 시켜서 협력해주라고 하니 이게 무슨 협력이냐. 또 한국이 안보의 최일선이라고 하는데 일본은 태평양 최일선 아니냐. 협력을 일방적으로 하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거였어요. 내가 다나카 통산장관 말 가운데서 또 한 가지 기분이 나빴던 것은 “한국이 일본보고 무역적자, 무역적자 하는데 한국이 일본에서 안 사가면 되지 않느냐”고 급소를 찌르는 거였어요. 얼마나 아픈 말이냐 이거야. 그게 일본인의 본심(本心)이라고 나는 봐요.〉《전두환 육성증언》
세계 속 한국의 무대를 넓힌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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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 14일,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대한민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간 관계의 일반 원칙에 관한 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월간조선》 |
1988년 3월 24일 헝가리가 서울무역사무소를 설치함으로써 북방외교는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이듬해 2월 1일에는 동구 공산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정식 수교했으며, 1989년 7월까지 유고슬라비아, 소련, 폴란드, 불가리아 등 동구권의 무역사무소가 차례로 설치됐다.
1990년 2월 9일 노태우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북방외교를 전담하기 위해 북방외교추진본부를 외무부에 설치, ‘정경(政經)분리’ 차원이 아닌 ‘정경연계방식’을 천명했다. 이를 토대로 19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와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의 한소(韓蘇) 정상회담에 이어 9월 30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최호중 외무부 장관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 장관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정식으로 한소 수교를 맺었다.
한중(韓中) 관계도 이 무렵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았다. 1991년 1월 30일 대한무역진흥공사 주(駐) 베이징 대표부의 개설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이상옥 외무부 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한중 간의 정식 수교가 이루어졌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기간 동안 새로 수교한 나라는 45개국, 그 인구는 17억 명을 상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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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 부부가 1989년 11월 18일 유럽 순방 길에 기착한 알래스카의 설원(雪原)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월간조선》 |
2011년 《월간조선》이 펴낸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노태우는 “내가 추진한 북방정책의 특징과 의미를 몇 가지 밝혀두고 싶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북방정책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철학과 전략을 갖고 추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교섭과 진행을 절차를 밟아서 했다. 초기에는 한두 사람 특정인을 통해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했지만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는 공개적·합법적인 채널을 이용했다. 대소(對蘇) 경협 역시 공개적으로 추진했다. 나는 국민적인 동의를 얻어가면서 북방정책을 펼쳤다고 생각한다. 국회에서도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나의 북방정책은 우리뿐만 아니라 상대국들에도 상호이익이 되었다. 소련의 대(對) 북한 무기 및 경협 중단은 북한의 전쟁 위험성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노태우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이지 않았다”며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상태를 해결하고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큰 틀을 설정해놓고 그에 맞는 전략을 구사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나는 한국 외교를 종래의 추종(追從) 외교에서 자주(自主) 외교로 전환시켰다”며 “제6공화국은 핵문제, 대북(對北) 협상 등 모든 외교관계에서 이니셔티브를 다른 나라에 준 적이 없었다”고도 했다.
‘주택 200만 호 공급’과 ‘국가 기간시설’ 확충한 盧
‘주택 200만 호(戶) 공급’과 ‘국가 기간시설 확충’도 노태우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나 자신이 신혼 때부터 달동네에 살면서 서민들의 고통 가운데 가장 뼈저린 것이 무주택이라는 사실을 절감해온 터라 대통령에 취임하면 반드시 무주택자들의 설움을 해소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적었다.
당시 우리나라 주택 건설 능력은 연간 20만~30만 호 정도였다. 200만 호를 임기 5년 내에 짓는다는 건 엄청난 대역사(大役事)였다. 일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1988년 3월 경기도 평촌과 산본을 시작으로 200만 호 공급이 첫발을 뗐다. 이어 분당과 일산, 의정부, 중동에도 신도시가 개발됐다. 그렇게 10년도 안 되는 새에 5대 신도시(평촌·산본·분당·일산·중동)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라고 한다.
노태우는 주택 200만 호 건설 관련 여론조사를 언급하며 “국민들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일부 반대파들이 관계자들을 모함하고 협박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초지일관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결국 아파트값은 떨어져 10년 이상 안정세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누리는 사회간접자본(SOC) 역시 노태우 정부가 입안(立案)한 것들이 많다. KTX라 불리는 고속철도, 인천국제공항, 서해안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확장이 그것이다.
1991년 7월, 노태우 정부가 SOC 관련 3조6000억원 규모의 추경예산을 집행하려 하자 당정(黨政)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청와대에서도 경제수석실만 찬성하는 모양새였다. 노태우는 “내 임기 중에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일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3조6000억원을 도로와 항만, 철도에 투자하라고 당정에 지시했다.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장기적인 SOC 투자로 서해안고속도로, 경부고속전철 및 영종도(인천) 국제공항 등을 착공했다. 이런 기반시설들은 10여 년이 흐른 오늘날 한국인들의 삶을 바꿔놓고 경제가 돌아가는 데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 야권에서는 이것을 정책 프로젝트로 인식해 우리가 마치 정치자금이나 조달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 같았다. 국회에서 야당이 영종도 신공항과 경부고속전철 예산을 무조건 깎겠다고 해서 상당히 애를 먹었다.〉
만약 노태우가 야당의 반대에 굴복했다면, 지금 우리가 마음껏 향유하고 있는 최첨단 공항과 KTX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우정의 상징 ‘6·29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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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한 1987년 6·29선언도 사실 ‘전두환 연출, 노태우 주연’으로 일군 극적인 드라마였다. 당초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에 반대했으나, 전두환이 노태우를 설득했다. 노태우가 가까스로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자 전두환은 표면상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자신에게 건의하는 형식을 취했다. 6·29선언을 기획한 자신은 뒤로 빠지고 노태우를 6·29선언의 주역(主役)으로 만든 것이다. 6·29선언은 전두환·노태우의 우정이 곁들여진 최고의 콤비 플레이인 동시에 대한민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사건이다.
1987년 6월 2일, 민정당 총재인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당시 민정당 대표위원)를 비롯해 민정당 중앙집행위원을 청와대 상춘재로 불러모았다. 당 총재가 차기 대통령 후보를 공식 지명하는 자리였다.
〈앞으로 2~3년은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여건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남북 긴장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는 이 어려운 시기에 제1의 과제는 우리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 안보입니다.… 특히 남북이 사생결단으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특수상황에서 군부(軍部)의 신뢰와 존경, 그리고 군사(軍事) 지식은 매우 필요한 조건입니다.… 오늘의 국가 상황을 감안할 때 그동안 우리와 함께 개혁의 선봉에 섰던 구국(救國)의 동지이자 조국 선진화 과업을 함께 추진해온 이념적·실천적 평생 동지인 노태우 대표위원이 가장 적임자라는 판단에 이르러 이 자리를 통해 추천하는 바입니다.〉
전두환이 미리 준비한 20여 분간의 말씀 자료 낭독을 끝내자 노태우는 눈시울을 붉혔다. 노태우는 “두려움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각하, 끝까지 지도해주십시오. 동지 여러분, 지도해주십시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부족한 이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해주신 각하와 여러 당무위원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여러분들의 뜻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위 장면은 전두환·노태우 ‘40년 우정’이 대통령직 인수인계 직전으로 이어지는 극적인 순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6·29선언 이전으로,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있었다. 즉 국민이 뽑은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이었기에 집권여당 후보가 매우 유리한 구조였다. 따라서 전두환의 노태우 ‘대통령 후보 지명’은 곧 ‘대통령 당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전두환은 ‘흑자경제 달성’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내세웠다. 경제야 전두환 특유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끌어갈 수 있었지만, 평화적 정권교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전두환 재임 중 일부 측근 그룹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1988년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해야 한다고 건의한 적이 있다. 일부에서도 ‘전두환이 과연 제 발로 물러날까’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전두환이 마음만 먹는다면 정권 연장은 손쉬운 일이었지만, 그는 더도 덜도 아닌 7년 단임 약속을 지켰다.
전두환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제 발로 청와대를 걸어 나간 대통령이다. 전두환 이전의 대통령들은 모두 ‘하야(下野)’ ‘암살’ 등으로 불명예스럽게 임기를 끝마쳤다. 전두환의 이러한 단임 의지는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나라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 평화적인 정부 이양을 하자는 거지 나라를 그릇되게 하기 위해서 그걸 하는 게 아니에요.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임기를 정해놓았으면 반드시 나가야 하고 이유를 달아서 더 연장하지 않는 게 필요해요.” 1986년 6월 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내가 임기를 정해놓고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내 나이 지금 쉰다섯인데 쉰일곱에 임기가 끝나지만 나이로도 어중간한 나이예요. 쉰일곱부터 대통령을 하면 좋은 나이입니다. 나는 한 번 약속한 것은 지키겠어요.” 1986년 11월 27일 중앙 언론사 사장단들과의 오찬에서.
▲“그동안 IOC 위원장이 만나자고 해서 두서너 번 만났는데 ‘각하가 물러나면 새로 들어서는 정부가 전무후무한 올림픽을 치를 수 있겠느냐’고 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이 계실 때 나라는 사람은 정치인 말단의 명단에도 안 들어 있는 군인에 불과했다’고 했다.” 1987년 1월 5일 새해 국정연설문을 다듬는 자리에서.〉《전두환 육성증언》
전두환의 단임 의지는 친구 노태우를 ‘기필코 대통령에 당선시켜야 한다’는 의지로 이어졌다. 그는 음(陰)으로 양(陽)으로 노태우 당선을 위해 뛰었다.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지 한 달 후인 1987년 7월, 전두환은 민정당 총재직을 노태우에게 물려줬다. 집권여당 총재인 대통령이 여당 총재직을 차기 대통령 후보에게 이양(移讓)한 것 역시 헌정사상 최초였다. 그 직후인 8월 1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전두환이 한 말이다.
〈내가 노태우를 총재로 시킨 것도 6·29를 노 총재로 하여금 선언하게 해서 노태우 후보가 부각되어야겠다. 나야 부각되어봤자 뭐 하나…. 내가 노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줘야 하는데 노 후보가 당 총재를 맡아야 정치적으로 위치가 확고히 강화된다. 당도 자꾸 후보 눈치, 내 눈치를 보게 하면 내부 갈등이 생긴다고 해서 총재를 준 거야. 우리가 노 총재 체제를 지원해주고 정부는 계속 당정(黨政) 협조를 통해서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줘야 돼요.〉《전두환 육성증언》
“(노태우를) 내가 남모르게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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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부부가 1995년 10월 7일,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11기 임관 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 사이엔 앙금이 남아 있었다. 사진=조선DB |
〈요새 보니 우리 노 총재 얼굴이, 관상이 좋더군. 처음에도 총재 자리도 찌붓찌붓하고 혹시 나한테 결례되지 않을까 신경 쓰고 해서 내가 광주 갔다 와서 몇 번 노 총재 집에 찾아갔어요. 우선 자세가 자신만만해야 하겠기에 내가 격려해주러 갔어요. 노 총재가 청와대에 오는 건 다른 당 후보가 있으니까 적절치 않아요. 내가 개인적으로 집을 찾아가는 것은 내 마음이지. 다른 후보는 내가 찾아가기 싫어서 안 가는 거지. 노 총재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뭐든지 하라고 했어요. 내가 열 번 스무 번 죽어도 관계없으니 신경 쓰지 마라. 나를 죽여서 당신이 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라. 그게 내가 당신 도와주는 것이라고 했어요.〉《전두환 육성증언》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내 친척 문제를 유세장에서 쳐버려라”는 당부도 했다. 친구 노태우가 대통령이 될 수만 있다면 가장 민감한 대통령 친인척 문제, 더 나아가 전두환 자신까지 비판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다.
노태우 당선 후, 그러니까 전두환이 권좌(權座)에서 물러나자 이른바 ‘5공 청산’ 여론이 들끓었다. 노태우 정권은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5공 청산 대열에 합류, 전두환과 그의 친인척을 겨냥한 수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육사 생도 시절부터 이어온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전두환으로선 착잡한 심경을 가눌 수 없었다. 1988년 4월 3일 방미(訪美) 중이던 전두환은 김성익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에게 이런 구술(口述)을 남겼다.
〈노 대통령과 나와의 관계는 친형제보다도 소중한 관계이다. 지금까지 그런 관계가 지속되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내가 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많은 친구가 있었지만 노 대통령과는 뜻이 맞았고 성장해서는 정치노선과 이념이 딱 맞는다. 서로 우정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에 군에 있을 때도 상부상조하며 살아왔고, 내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누구보다 노 대통령을 대통령 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내가 남모르게 키운 것이다. 키웠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내가 아는 노태우는 대권(大權)이 아니라 천하 없는 것을 잡아도 변할 수 없는 사람이야.〉《전두환 육성증언》
이처럼 전두환은 노태우를 자신의 가족보다 더 믿었다. 그러나 권력 앞에서는 40년 우정도 별반 소용이 없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배신(背信)으로 여길 소지가 다분했지만, 노태우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전두환의 단임 의지 의심한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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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4월 5일, 식목일을 맞아 강원도청을 순시 중인 전두환 대통령. 맨 왼쪽이 내무부 장관 노태우다. 사진=조선DB |
《노태우 회고록》을 보면, 노태우가 전두환에게 가졌던 감정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처음엔 전두환의 단임 의지를 의심하지 않다가 시간이 흘러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는 식의 술회를 했다. 《노태우 회고록》의 일부다.
〈나는 처음부터 전(全) 대통령이 단임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12·12사건 당시 내가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정권에 대한 욕심이 분명히 없었기 때문이다. 전 대통령은 나와 단둘이 있을 때 “팔자에도 없는 대통령을 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심중(心中)을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 대통령의 생각이 달라지는 듯했다. ‘대통령은 그만두되 물러난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여러 가지 말과 행동으로 보아 그런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에 따르면, 전두환은 1986년 4월 유럽 4개국(영국·서독·프랑스·벨기에)을 순방하고 돌아온 뒤 자신을 찾았다고 한다. 전두환은 민정당 대표위원이던 노태우에게 “우리도 내각제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정부·여당은 현행 헌법대로 1987년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호헌(護憲)’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내각제로 선회하면 국민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게 노태우의 생각이었다. 전두환의 내각제 제안에 노태우는 ‘검토하겠습니다’라는 대답만 하고 그 자리를 나왔다고 한다.
전두환이 내각제를 제안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관제(官製) 야당인 민주한국당(민한당)이 제2야당으로 주저앉고, 선명 야당인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신민당은 간선제 대통령제를 철폐하고 개헌(改憲)에 나설 것을 전제로 정부·여당을 압박하고 있었다. 전두환이 절충안으로 내놓은 게 바로 내각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직선제는 ‘지역감정 악화 등 과열 요소가 많고 비용도 많이 든다’는 이유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노태우 입장에서는 전두환이 꺼낸 내각제 개헌 카드가 썩 달갑지 않았다. 전두환은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손쉽게 당선됐다. 그런 마당에 ‘후계자’로 발돋움하고 있던 노태우로선 ‘전두환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전두환 정권 말기 들어 ‘민간인 출신 차기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권부(權府)에 나돌며 노태우를 긴장시킨 적도 있다.
盧 “(1987년) 6월 10일 이후부터 직선제 생각 확고”
6·29선언과 관련해서도 노태우는 전두환과는 조금 다른 입장을 보였다. 앞서 본 바와 마찬가지로 전두환이 6·29선언을 기획하고, 그 공(功)을 노태우에게 돌렸다는 게 그간의 정설(定說)이다. 노태우는 6·29선언 직전 상황을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6월 18일과 19일 이틀 동안 당 집무실에 머물면서 당직자 등 수십 명의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의견을 들었다.… 6월 20일 이날 하루 국회 귀빈식당에서 이만섭 국민당 총재, 이민우 신민당 총재, 김수환 추기경을 잇따라 만났다.… 이만섭 총재는 “국민들의 저항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직선제밖에 없는데, 노 대표는 직선제로 나가도 당당히 이길 수 있지 않겠소?”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현행 헌법은 물론 당론(黨論)이자 전 대통령의 강한 의지이므로 꺾을 수 없다”고 답했다. 이 총재는 “그렇다면 전 대통령을 만나 설득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이민우 신민당 총재를 만났다. 이 총재도 “야당뿐 아니라 국민 절대다수가 직선제를 원하고 있으니 노 대표가 마음을 비워 직선제를 당당히 받고 김대중씨를 사면·복권시켜주시오”라면서 “노 대표가 하면야, 안 이기겠나”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직선제를 해야만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고 돌릴 수 있을 것”이라며 “노 대표, 마음을 비우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福)을 주십니다”라고 말했다.〉
노태우는 “1987년 들어서서 나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건의를 받으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갖가지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다”며 “(1987년) 6월 10일 이후부터는 ‘직선제’와 ‘김대중씨 사면·복권’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즉 대통령 직선제는 전두환 아이디어가 아닌 노태우 자신이 줄곧 염두에 두고 있던 카드였다는 것이다. 참고로 1987년 6월 10일은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린 날로, 이날 노태우는 민정당 13대 대통령 후보로 최종 선출됐다.
1987년 6월 24일 전두환의 부름을 받아 청와대로 올라갔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당의 신뢰도나 노 대표가 쌓아 올린 이미지로 보아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소?”라고 반문했다. 이어지는 《노태우 회고록》 내용이다.
〈나는 선뜻 수긍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 당원들을 데리고 국민들에게 내각제를 해야 된다고 얘기하고 다녔는데 갑자기 직선제로 바꾸면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반문했다. 전 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 왔으므로 이번에도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하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 대통령의 생각을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생각에서 “그게 되겠느냐”는 식으로 반어법을 쓴 것인데 후에 이 대목으로 해서 내가 직선제를 반대한 것으로 오해를 사게 된 듯하다.〉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이왕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니 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앞으로 모든 책임은 다 제가 지겠다”며 “각하의 뜻을 알았으니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 모든 것을 제게 맡기고 관여하지 말아 달라”는 입장도 밝혔다.
全 “직선제 얘기했더니 노태우 펄쩍 뛰어”
노태우 회고에 따르면, 그는 6월 24일부터 6·29선언이 있던 6월 29일까지 청와대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전두환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기자들이 집을 둘러싸고 진을 치고 있어 갈 수 없다. 애당초 (내 책임하에 추진하고 관여하지 않는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나”고 말했다고 한다. 전두환도 이에 동의했다는 게 노태우의 설명이다. 그동안 노태우는 연희동 집에서 칩거하며 6·29선언 문안(文案)을 다듬었다. 6·29선언 문안을 청와대에 보낸 적은 없다고 한다.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6·29선언과 관련해 청와대와의 관계는 이것이 전부였다”고 덧붙였다.
노태우는 6·29선언이 자신의 업적임을 강조하려는 듯 ‘전두환 역할론’에 선을 긋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두환의 이야기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전두환은 1987년 6월 28일 김성익 비서관과 아들 재국씨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털어놨다.
〈내가 뚜렷한 명분과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 직선으로 다음 정권을 창출해야 돼. 대통령 후보는 노태우 대표 아니냐.… 노 대표가 부각되도록 하는 것이 제일의 목표다. 노 대표 이름으로 해야 돼.… 노 대표가 부각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다. 사실은 내가 노 대표한테 직선제를 받도록 시킨 것이다. 2주일 전에 그랬는데 노 대표가 펄쩍 뛰어.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그래서 내가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산다)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모든 원리가 백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에 있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노 대표가 말을 못 하나, 얼굴이 못생겼나. 김영삼, 김대중 누가 나와도 자신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해주었는데 어제 노 대표를 만났더니 극비리에 연구해서 나온 것을 가져왔는데 그것이다.… 노 대표 개인이 단안(斷案)을 내린 것으로 내일 쇼크 요법을 쓰자.〉《전두환 육성증언》
이것이 전두환·노태우가 말하는 6·29선언의 전모(全貌)다. 권력 이양기였던 1987년, 두 사람 사이엔 이렇듯 직선제 개헌을 둘러싼 숨 가쁜 줄다리기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던 사이였다. 권력 1인자와 2인자라는 관계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우정은 영원히 빛이 났을지 모른다. 결국 권력이 그들의 우정을 갈라놓은 셈이다.
육사 생도 全·盧의 ‘진지한 토론’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52년 1월 1일 경남 진해에서 이뤄졌다. 6·25전쟁 와중이라 육군사관학교는 진해에 있었다. 이날 육사 11기 가(假)입교생 자격으로 두 사람은 한 내무반(지금의 생활관)을 썼다. 당시 가입교생 수는 모두 228명이었다. 이 중 28명을 20일간의 기초 군사훈련 과정을 통해 무조건 탈락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은 그 과정에서 우정을 키워나갔다. 동기생 최성택(전 석유개발공사 사장)씨의 회고다.
“가입교생 시절 같은 내무반에 배치된 동기 중 전두환·노태우·김복동·백운택·박병하와 나는 특히 친했다.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은 모두 대구가 고향이었다. 우리는 육사에 같이 입교(入校)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똘똘 뭉쳐 다녔다.”
여기에 손영길·정호용·권익현·노정기씨 등 네 명이 새로 참여하면서 육사 11기 주축 멤버가 구성됐다. 이 멤버들이 훗날 논란이 된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모태(母胎)라고 할 수 있다. 하나회의 실질적인 보스는 가장 리더십이 뛰어났던 전두환이었다.
이들 육사 11기 하나회원들은 ‘정치군인’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20대 시절의 그들은 다른 면모를 보였다. 노태우에게 육사 진학을 권유했던 김용희(전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상임감사)씨의 말이다.
“노 대통령이 육사 3학년 생도 시절입니다. 육사는 경남 진해에서 서울 태릉으로 학교를 옮겼는데, 노 대통령은 주말 외박을 나오면 전두환·김복동·손영길·권익현씨를 끌고 을지로 저희 집에 왔습니다. 이들은 모였다 하면 진지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내일의 한국을 위해 우리가 할 역할은 무엇인가, 1·2차 대전은 왜 발발했나 하는 것 등이 기억납니다.… 토론의 열기는 엄청났습니다.… 책에서 읽은 지식을 총동원해 누가 더 똑똑한지 뽐내기도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두환·노태우 모두 군인으로서 성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이들이었다. 전두환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 이후 그에게 정치를 권유했지만,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당시 혁명 주체들이 군복을 벗고 정계에 진출한 것과 비교하면 다소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軍 후배 끔찍이 챙긴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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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이 1995년 12월 2일,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김영삼 정부가 소급 입법한 ‘5·18 특별법’을 비판하는 대국민 성명(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잘 알려진 대로 전두환은 군 후배들을 물심양면으로 챙겼다. 그래서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전두환은 박 대통령이나 군 선배들로부터 일종의 ‘하사금’을 받으면, 그것을 후배들에게 뿌렸다. 경제적으로 궁핍하다 싶은 후배가 있으면 못 참는 성격이었다.
육군 특수전사령관을 지낸 민병돈(육사 15기·예비역 육군 중장)씨는 과거 “1973년 서울 목동에 처음 내 집을 마련했을 때의 이야기”라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새집을 마련하고 얼마 안 있다가 전두환 장군 부부가 우리 집에 왔었습니다. 집 장만을 축하해주기 위한 것이었죠. 전두환 장군 부부가 돌아가고 얼마 안 있다가 냉장고 하나를 보내왔어요. 우리 집에 냉장고가 없는 것을 안 전두환 부부가 자신들이 쓰던 소형 냉장고를 보낸 거더라고요.”
국군보안사령관을 지낸 서완수(육사 19기·예비역 육군 중장)씨는 전두환이 대대장으로 있을 때 그 밑에서 중대장을, 전두환이 1공수여단장으로 있을 때 작전참모와 대대장을 했다. 서완수씨 신원 조회 과정에서 인척(姻戚) 중 한 명이 6·25 때 공산당에 부역(附逆)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있던 전두환 준장은 “서완수는 훌륭한 군인이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겠다”며 그의 신원보증을 해줬다. 그 덕에 서씨는 군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렇듯 전두환은 후배들의 안살림과 민원을 해결해주는 ‘의리 있는 선배’로 통했다.
사조직 ‘하나회’도 이런 동류의식 속에서 조직됐다. 하나회는 전두환 리더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전두환은 육사 시절, 학업성적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유한 군인도 아니었다. ‘날고 긴다 하는’ 육사 후배들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 데에는 위와 같은 사례가 한몫을 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전두환은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군 출신뿐 아니라 민간인 등 많은 측근 그룹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1988년 ‘5공 청산’ 당시 백담사에 유폐되었을 때에도, 1995년 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하며 김영삼 정권을 비판한 뒤 경남 합천으로 낙향했을 때에도 많은 측근이 그를 수행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전두환은 사석에서 ‘대통령이 될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자주 말했다. 그의 꿈은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군의 최정상에 오르기 위해 매진했을 뿐, 대통령은 그에게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가 대통령이란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 계기는 1979년 10·26사태와 12·12사태였다. 공교롭게 그 시기 전두환은 군부정권 권력의 핵(核)이라 불리던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있었다. 그로 인해 박정희 시해사건 수사를 담당하게 됐다. 이때 그의 얼굴이 처음 텔레비전 전파를 탔다. 10·26사태 수사 과정에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의 주범 김재규와 결탁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 12월 12일 그를 강제 연행하고야 말았다.
초인적인 인내력 발휘한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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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정당 대표위원 시절 노래를 부르는 노태우. 사진=조선DB |
이런 자세는 그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노태우는 군인임에도 감성이 충만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운동에 능했지만, 그와 반대로 음악에도 소질이 있었다. 여단장과 사단장 시절 부대가를 직접 작사·작곡할 정도였다. 피아노와 퉁소 실력은 물론 특히 노래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노태우가 멋들어지게 부르는 ‘베사메무초’는 아주 유명하다.
그런 섬세함 탓인지 대통령 재임 시절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노태우의 우유부단함을 혹평하는 별명이다. 측근들의 평가는 다르다. 그들의 평가를 요약하면 ‘권위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과도기적 민주화 시대를 관통한 대통령으로서 그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다. 실제로 노태우는 인내(忍耐)하는 대통령이었다. 여소야대(與小野大)로 정국 주도권을 야당에 빼앗겼을 때에도, 극심한 노사분규가 곳곳에서 일어났을 때에도, 전임 대통령과 후임 대통령 사이에 무수한 갈등이 빚어졌을 때에도 그는 참고 또 참았다.
그런 무던한 성격 덕분에 노태우 정부는 큰 대과(大過) 없이 5년을 보냈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민주화를 꽃피웠다. 안타깝게도 노태우의 이런 업적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제 두 사람은 가고 없다. 지난 30여 년간 온갖 조리돌림을 당해온 전두환·노태우다. 죽은 사람에게까지 손가락질할 필요는 없다. 이제라도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역사의 두 주역을 총체적으로 평가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