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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양아치 데모크라시 - 정치를 빙자한 범죄의 결말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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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天使가 아니라고 해서 악마여도 되는 건 아니다
⊙ 플라톤, “통치자는 법률에 대한 봉사자”
⊙ 理想국가와 哲人王에 대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폭압국가와 僞善的 폭군을 나오게 한다
⊙ 정치적 현실성이라는 게 惡을 용인하는 것일 수는 없다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 플라톤의 손가락은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손바닥은 땅을 향하고 있다.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점에서 법(法)은 소시지와 같다.”
 
  19세기 독일의 재상(宰相) 비스마르크가 한 말이라고 전해진다. 법률 제정 과정에 지저분한 뒷거래와 협잡(挾雜)이 난무하는 실상을 소시지 제조 과정에 비유한 것이라 한다.
 
  사람에 따라 취향이 다르겠지만 소시지는 오늘날 대중적 사랑을 받는 음식이다. 그러나 그 본토인 서구(西歐)에서는 그리 대중적 음식은 아니었다. 도축업자들이 내장과 머리 고기 등 고기를 가공하고 남은 부산물 등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그 제조 과정이 상당히 지저분했다. 그래도 정상적인 고기를 제대로 구하기 힘들었던 사람들에겐 대용으로 꽤 유용했던 음식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굳이 상기하면 누구든 입맛이 떨어질 것이다.
 

  단순히 법률 제정만이 아니라 정치 자체가 좀 그렇다. 국민을 위한다며 갖은 명분을 내걸고 심지어 정의(正義)를 앞세우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토가 나오게’ 만들곤 한다. 철혈재상(鐵血宰相)이라 불리던 비스마르크조차 한마디를 남길 만큼이다.
 
  오늘날, 그리고 우리의 경우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19세기 ‘비스마르크의 소시지’보다 더하다. 차라리 소시지는 약과다. 굳이 비유하자면 ‘중국산 김치’ 제조 공정이랄까. 오늘날 소시지 제조 과정은 더 이상 비스마르크가 빗댄 소시지 제조 과정 같지는 않다. 엄격하게 관리된다. 소비자들도 어느 정도 신뢰가 있다. 그러나 ‘중국산 김치’에 대해선 아니다. 지금 한국 정치는 거의 그런 꼴이다.
 
 
  아수라
 
  대장동 게이트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등장하는 이름마저 매우 중국스럽다. ‘화천대유, 천화동인’이다. 대법관 출신까지 등장한다. 그 외에도 온갖 인물이 거론된다. 가히 ‘아수라’의 경지다. 단순히 지저분하다거나 부정부패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냥 일탈(逸脫)이 아니다. 조직적인 범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아수라 범죄의 궁극적 책임자로 지목되는 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우겨댄다. 급기야 여당의 대선(大選) 후보로 최종 선출이 됐다. 물론 마지막 경선(競選)에서는 62.37% 대 28.30%로 대패(大敗)를 했다. 정상적인 여론이 반영된 상식적인 결과다.
 
  그런데 기괴한 여론조사 결과가 뒤따랐다. ‘대장동 의혹’에 ‘이재명(李在明)의 책임이 56.5%, 국민의힘 책임이 34.2%’라는 것이다. 사업의 최종결재권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추진한 최대 업적이라며 자랑까지 했던 당사자에게 책임이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비록(?) 34.2%라고 하지만 국민의힘 쪽에 책임이 있다는 여론 수치의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국민의힘 쪽 한 인물의 관련이 불거지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연결된 부패이지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재명 지사가 강변했던 논리대로 국민의힘 쪽에 책임이 있다는 데 동조하는 여론 수치가 나왔다. 그들은 진짜로 그렇게 여기는 것일까 아니면 우기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정상이 아니다.
 
 
  양아치 데모크라시
 
조제프 드 메스트르
  민주주의는 소중한 제도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순기능을 발휘하려면 그 담당자들의 양식이 전제가 돼야 한다. 히틀러와 나치스가 민주주의가 없어서 등장한 게 아니다. 히틀러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민주적 과정을 밟아 집권을 했다.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다. 질(質) 낮은 부류들의 손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나라를 진흙탕에 빠뜨리고 파국(破局)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게 민주주의다.
 
  국가의 제도와 권력은 정당성(합법성·Legitimacy)과 안정성 두 가지 모두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국가의 계속성이 유지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언제나 출렁거리기 마련이다.
 
  오늘날, 그리고 대한민국도 민주주의 없이 레지티머시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주어졌다고 하루아침에 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숙해가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리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1948년 건국 이후부터며, 1987년 민주화 이후부터라면 이제 34세다. 그 30여 년, 나름 의미 있게 시작됐다 여겼지만 온갖 우여곡절(迂餘曲折)과 파행(跛行)의 얼룩 또한 적지 않다.
 
  한편으로는 민주화의 그늘에서 이 자유민주 체제 자체를 유린하려는 독초(毒草)가 자라났고, 또 한편으로는 건달도 못 되는 ‘정치 양아치’들이 민주를 빙자해 활개 치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틀을 갖추었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조잡함과 저열(低劣)함으로 가득 차 있는 ‘양아치 데모크라시’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에는 신사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 정치인의 저열함 탓일까 아니면 국민들의 수준 탓일까?
 
  “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
 
  프랑스의 보수주의 정치사상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 1753~1821)가 1811년 한 말이다. 메스트르는 프랑스혁명에 반대하고 군주정(君主政)을 옹호한 사람이다. 때문에 오늘날의 민주정치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인용할 만하진 않다. 그러나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뼈를 때리는 힐난으로 다가온다.
 
  지금의 문재인(文在寅) 정부는 그리고 혹여 맞게 될지도 모르는 이재명 정부는 어떤 것일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정치를 겪고 있는데 그보다 더한 희대(稀代)의 엽기적(獵奇的) 정치의 도래(到來)가 어른거린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인가?
 
 
  “인간이 天使라면 정치는 불필요”(매디슨)
 
제임스 매디슨
  정치와 정치가에 대해 이상적인 수준을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사실 정치는 그 함의(含意) 자체가 이상(理想)이기보다는 현실의 문제다. 물론 서구 정치철학의 원점에 해당하는 플라톤의 경우에서 보자면 정치라는 게 이상적 차원에서 다뤄지긴 했다. 하지만 사실은 플라톤조차도 이상적 정치를 논하기는 했지만 그 현실적 실현과 관련해선 일반적인 오해와는 다른 논지도 제시했다. 이점에 대해선 후술(後述)하기로 하고 우선 보다 현대에 가까운 근대 민주정치의 선구자의 말을 들어보자.
 
  “만약 인간이 천사(天使)라면 정부는 불필요할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미국의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제임스 매디슨이 《연방주의자 논고》에서 언급한 얘기다.
 
  정치 자체가 그렇다. 정치는 천사들의 대화가 아니다. 정치는 전혀 천사일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인간들끼리의 것이다. 현실의 인간은 불가피한 욕망의 범벅이다. 생존을 위하여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인간은 분투를 하게 된다. 그 같은 분투는 결코 악(惡)이 아니다. 그러나 타자(他者)와의 관계에 놓이게 될 때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바로 거기에 정치가 있다.
 
  절대적으로 고립돼 있는 ‘나 홀로’의 개인이라면 타자와의 관계도 갈등도 없다. 그러나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 자체가 타자를 전제한다. 자신을 의식하는 것과 타자를 인식하는 것은 동일한 의식의 양면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다. 갈등이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갈등을 풀어나가야 한다. 그게 정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폴리스(polis)적 동물”이라고 한 말의 함의는 그런 것이다. 폴리스는 본래는 도시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폴리스는 국가의 원형으로서의 정치체(body politic)이다. 그래서 폴리스적 동물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로 번역돼 통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폴리스적 동물을 말할 때 폴리스는 이상적이라든가 정의롭다든가 하는 차원 이전에 존재하는 현실 자체를 뜻했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는 다른 관점이었다.
 
  플라톤에게는 ‘이상적인 국가’가 전제돼 있었다. 정의가 실현되는 폴리스였다. 《국가(Politeia)》(Politeia는 정확히는 정체(政體), 즉 정치체제다)에서 대화는 ‘정의란 무엇인가?’와 그 ‘정의가 실현되는 이상적인 폴리스가 되기 위해선 어떠해야 하는가’가 주제로 펼쳐진다. 《국가》에서 제시된 표면적인 논리적 결론은 철인왕(哲人王)이었다.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든가 철학자가 통치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의 《국가》에서의 논리와는 달리 정치인이 철학자가 되든가 철학자가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스승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이성(理性)과 이성적 판단에 입각한 정의의 실현을 소홀히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은 현실적이었다. 그는 사실상 모두가 타락한 정치체제에서 살고 있다는 전제하에 정치의 핵심은 정부가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가능하면 점진적으로 나아지도록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플라톤의 《국가》와는 달리 ‘이상 국가’가 아니라 실현 가능한 ‘최선 국가’에 대해 말한다.
 
  16세기 초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는 유명한 그림의 한가운데에 스승 플라톤과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함께 서 있다.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향해 손바닥을 펼치는 모습이다. 이데아적 이상론을 추구한 플라톤과 현실세계를 중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플라톤도 결국은 法治 주장
 
  칼 포퍼(Karl Popper)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유토피아적 이상 국가와 철인왕을 논한 플라톤을 매섭게 비판했다. 플라톤식의 정치철학은 결국 전체주의적 닫힌 사회와 독재자의 등장으로 귀결될 뿐이라는 것이다. 포퍼에 있어 플라톤은 마르크스의 원조(元祖)나 마찬가지였다.
 
  포퍼의 지적은 일리가 있는 경고다. 그러나 플라톤의 논지에 대해선 약간의 변호가 필요하다. 사실 플라톤의 《국가》를 엄밀하게 읽어보면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눈에 띈다.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국가를 위해 통치계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요건을 말하는데 그에 대해 누군가가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반론을 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타당한 지적’이라고 답한다.
 
  플라톤의 《국가》는 그저 이상 국가와 철인왕을 ‘주장’한 것으로 읽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표면적으로는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좀 더 엄밀하게 읽으면 《국가》에서 진행되는 대화는 일종의 사고(思考)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정의와 정의로운 국가의 이데아(idea)적 면모에 대한 사고 실험적 고찰(考察)이다.
 
  이를 헤아리기 위해선 플라톤의 철학적 방법론인 이데아론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이데아는 추상적(抽象的) 이상형이다. 플라톤은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데아의 반영이라 했지만 아무튼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이데아적 존재 자체는 아니다. 이것은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적 저작에는 《국가》만 있는 게 아니다. 그 후기 저작인 《정치가》와 《법률》도 있다. 《정치가》에서는 철인왕의 통치가 가장 바람직하지만 정치가들이 신뢰할 만한 덕을 완비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이들을 법치(法治)로 제한하는 차선(次善)의 체제를 대비시킨다. 이론상으로는 최선(最善)의 이상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처음부터 차선의 체제를 직접적인 목표로 해야 최악(最惡)의 체제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선의 철인 통치는 논리적으로 보자면 법의 구속(拘束)을 받지 않는다. 반면 통치자가 법에 의해 구속되는 차선의 체제는 철인 통치처럼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최악의 폭정이라는 ‘재앙’은 막을 수 있는 게 된다. 즉 《정치가》에선 이제 ‘법의 지배(rule of law)’가 필요함을 명확히 한다. 그리고 마지막 원숙한 저작인 《법률》에선 철인왕에 의한 이상 국가가 아니라 법치를 강조한다. 최선의 철인왕이 아닌 차선의 정치가가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실재의 세계에서 그나마 바람직한 정치는 결국 법치가 아니고선 안 된다는 결론이다.
 
  이때의 법치는 결코 ‘법을 수단으로 하는 통치(rule by law)’가 아니다. 통치자가 법을 자의적 전제권력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지배하는 ‘법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통치자도 법 아래에 놓여야 ‘법의 지배’일 수 있다. 고대 중국식의 율령(律令)체제는 ‘법의 지배’로 나아가지 못했다. 군주가 반포(頒布)하는 ‘법에 의한 지배’였다. 결국은 전제적(專制的) 통치였다. 하지만 플라톤의 《법률》에선 법 위에 있는 초월적 군주는 없다. 플라톤은 통치자를 법률에 대한 봉사자로 규정했다.
 
 
  市民들의 소양과 자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점(傍點)은 달랐다. 하지만 상반(相反)되는 것이기보다는 접근의 방법론에 따른 강조점의 차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적 이상형을 먼저 논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존재하는 형상이라는 현 실태가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현실을 중요시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에서 또 다른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있다. 《윤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정치학은 윤리학과 분리되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윤리학의 연장에 있다. 폴리스는 선(善)을 추구하고 또 그 구현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만 그것은 플라톤적인 이상형의 지상에서의 구현이 아니라 공동선(共同善)의 추구가 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겐 통치자만이 아니라 폴리스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소양과 자질도 중요한 것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한 것은 이렇게 하여 완결적 의미를 갖게 된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논리를 다른 잣대로 언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에 대해 갖은 신랄한 논지를 전개한 마키아벨리조차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중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권력 기반을 파괴할 법한 악덕(惡德)으로 악명(惡名)을 떨치는 것을 피하고, 또 정치적으로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악덕들도 가급적 피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정치철학의 고전적(古典的) 대가(大家)들의 논점에 비추어 오늘날의 한국 정치의 상황을 짚어보는 게 어떤 점에선 가당찮게 여겨지기도 한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는 고사하고 아예 마키아벨리도 벗어났다. 그저 악덕이 아니다. 정치를 빙자하지만 그냥 범죄다. 이것은 정치의 이상과 현실의 차원도 넘어선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 국가가 지상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 “이상향(理想鄕)의 본보기는 천상(天上)에 있고 정의로운 사람은 천상의 도시를 기준으로 삼아 살 것이다”고 말한다. 정치를 최고선(最高善)의 실현을 위한 것으로 여기게 되면 실수가 나온다. 이상 국가와 철인왕에 대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폭압 국가와 위선적(僞善的) 폭군을 나오게 한다. 따라서 정치는 언제나 현실적이어야 한다.
 
 
  상대주의에 따른 가치판단의 포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지지자들. 지지자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서 ‘르상티망(원한)적’ 恨의 정치의 감정이 엿보인다. 사진=조선DB
  그러나 정치적 현실성이라는 게 악(惡)을 용인하는 것일 수는 없다. 정치는 그 자체로 이상의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어선 안 되지만 명백한 악에 대해선 맞서야 한다. 이 같은 관점은 플라톤주의자임과 동시에 기독교 교부(敎父)철학의 원점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지에선 매우 중요하게 짚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자이지만 그의 신학(神學)은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정치철학적 고찰도 담고 있다. 그는 인간을 한계를 가진 존재로 보고 그 한계의 존재에 의한 ‘지상의 나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가치 지향의 포기를 말하는 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계를 말함과 동시에 올바름의 추구를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친구들과 함께 과수원에서 배를 훔친 경험을 회고한다. 그는 몇 개 먹지도 않고 돼지에게 던져주면 어떨까 얘기했다고 하며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단지 금지된 행위를 하는 것을 즐겼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서 악행이 나왔음을 깨달았다. ‘철인왕’이라고 해서 그런 한계가 없을 것인가?
 
  인간의 근본적인 이런 한계를 도외시한 이상 국가 혹은 이상적 정치에 대한 집착은 착오와 극단주의를 부르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올바름의 추구가 포기돼도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철인왕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올바름을 지키는 책임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지상의 나라’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이 그러하다.
 
  현실은 헤아려야 하는 것이지 핑계가 돼선 안 된다. 현실이 핑계가 되어 올바름의 가치를 놓아버리게 되면 가치부재(價値不在)의 정치가 된다. 현대 리버럴 정치는 상대주의적(相對主義的) 경향이 심화되면서 가치부재로 치달았다. 상대주의에 따른 가치판단의 포기가 되레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으로 행세했다. 그 결과 지금 서구문명은 가치붕괴의 위기에 허덕이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우파(右派) 진영은 실용주의(實用主義)와 중도론(中道論)에 몰두했다. 가치지향의 포기였다. 이 같은 포기는 좌익(左翼)의 몰(沒)가치성과 폭주(暴走)에 단호히 맞서지 못하게 했다. 무원칙하게 타협적인 정치공학으로 확장을 꾀했다. 그러나 그 같은 가치부재의 정치는 설득력을 오히려 약화시킬 뿐이었다.
 
  독선(獨善)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러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아예 놓아버리면 무기력하게 된다. 교만과 독선은 언제나 위험하다. 하지만 상대주의와 실용주의적 태도로 가치판단을 포기하는 것은 위선에 빠지게 만들 뿐만 아니라 허약하게 만든다. 가치부재의 기능주의적(機能主義的) 정치는 결국 힘도 잃는다. 정당성의 주장을 포기한 정치는 결국 그 반대편의 독선적 주장으로 무장한 정치에 무력(無力)하게 된다.
 
  그런 무기력함이 정치타락을 극한으로 치닫게 했다. 패거리 범죄집단이 정치로 치장하여 나설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범죄적 정치 패거리들에 선동된 ‘르상티망(원한)’적 ‘한(恨)의 정치’의 감성이 무리를 이루면서 최소한의 시민적 양식(良識)조차 집어삼키고 있다. 이 같은 양상이 계속되면 민주주의는 물론 정치 자체가 파멸로 치닫게 한다.
 
 
  문제는 계몽주의 이래의 착각에 의한 폭주
 
  근대성(近代性)이 본래 반고대(反古代)인 것은 아니다. 중세(中世)에서 벗어나는 근대적 탄생을 상징하는 것의 하나인 르네상스의 본래 의미는 오히려 고전적 가치의 부흥(復興)이다. 서구 중세인들은 그리스-로마 고전문명을 결코 능가할 수 없다고 여겼다. 고전-고대 문명의 성취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으며 상실한 그 문명의 진면목을 학습하고 회복하는 것이 발전이라 여겼다. 그 같은 발상은 나중에 계몽주의 이후 근대적 발전의 독자성이 인식되고 강조되면서 달라졌다.
 
  하지만 르네상스로 상징되는 그 같은 고전적 가치의 회복·부흥이라는 생각은 결코 잘못된 게 아니다. 단순히 시대의 문제, 시간 경과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 가치에 대한 태도 문제다. 고전-고대의 문제의식 그리고 그 답을 구하는 노력은 결코 평가절하될 것이 아니다. 그 같은 것을 인정하고 소중히 하는 태도는 올바른 것이었다.
 
  오히려 문제는 계몽주의 이래의 착각에 의한 폭주라 할 수 있다. 근대 이래의 폭주는 진보라는 관념에 도취되어 본질적 가치와 덕목을 상대화시켜버렸다. 문제 자체를 상대화시켜버렸으며 그 답도 상대화시켰다. 그 결과 가치부재, 가치상실로 치달았다.
 
 
  惡에 투항한 都城은 멸망으로 향한다
 
  정부는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제임스 매디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 천사가 아니기 때문에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천사가 아니라고 해서 악마여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점을 빌리자면 천상의 나라 ‘신국(神國)’이 아닌 ‘지상의 나라’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지상에서의 정치가 분명하게 그어야 되는 선이 있다. ‘명백한 현실적인 악인(惡人)에 대해, 그 분명한 악행에 대해선 선을 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한계를 갖는 정도가 아니라 지옥의 입구가 된다.
 
  정부가 직접적으로 시민의 도덕적 덕목을 함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명백한 악행에 대해 맞서고 벌하는 기능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런 정부는 아예 존재가치 자체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식으로 말하자면 악에 투항한 도성(都城)은 멸망으로 향한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현상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나라 자체가 존망(存亡)의 궁극적 시험대에 올랐다고 한다면 과한 우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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