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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 한나라당 대표 강재섭

“어떻게 당 運命을 외부인에게 맡깁니까. 졸병도 아니고 대장 자리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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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한국 보수당의 ‘젊은 기수’던 그가 말하는 ‘젊은 보수’의 길
⊙ 1990년대 英 총리 토니 블레어에 빗대어 한때 ‘토니 姜’으로 보수당의 젊은 기수
⊙ “유승민, 홍준표까지 당에 다 들어와서 조기 전당대회 열어야”
⊙ “좌고우면 말고 지킬 것은 확실히 지키며 당을 확 바꿔야지…”
⊙ “빨간색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색깔… 보수당이 헷갈리는 걸 내세우면 안 돼”

姜在涉
1948년 출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 서울지검 검사, 대통령비서실 정무·법무비서관, 국회의원(13~17대), 민주자유당 대변인,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신한국당 원내총무, 한나라당 부총재· 최고위원·원내대표·대표최고위원 역임
  강재섭(姜在涉·72) 전 한나라당 대표는 흐르는 물과 같은 성격이다.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막힘이, 거침이 없다. 후회하거나 뒤를 되돌아보는 성격이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경구(警句)처럼 삶을 무겁게 철학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부탁받지 않은 충고는 굳이 하려 하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사석에서 만날 때마다 인터뷰를 청했지만 “(정계를) 떠났으니 할 말 없다”고 거절했다. 지난 5월 13일 저녁, 그가 사는 경기도 분당에서 조우했다.
 
  “내가 먼저 연락해볼까 하다가도 그냥 살았어. 솔직히 회한(悔恨)이 왜 없겠나.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하늘이 이 정도로 베풀었구나 생각하지요. 믿는 교인은 아니나 그렇게 생각하고 즐겁게,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아가는 것도 모범이 될 수 있겠다고 여겼어요.”
 
  2012년 정계를 떠났다. 2011년 4·27 경기 성남 분당을 보궐선거에서 손학규(전 바른미래당 대표)에게 패한 뒤 정치를 그만뒀다. 지금 생각하면 보기 드문 젊은 나이였다. 당시 “앞으로 뭘 할지는 모르지만 유쾌하게 떠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불과 얼마 전 일인 것 같은데 벌써 8년 전이다.
 
  최근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부친상을 당했다. 고(故) 주구원 옹은 지난 5월 9일 별세하기 하루 전 아들의 원내대표 당선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날 늦은 밤부터 기력이 떨어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강재섭 전 대표의 부친상이 떠오른다. 2008년 4월 11일 강성무(姜聲武) 옹은 18대 총선 다음 날 영면(永眠)했다. 향년 88세. 당시 한나라당 총선 사령탑인 강재섭 대표가 과반 의석 확보를 매듭짓고서다. 평생 교편(구룡포수산고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잡다가 10여 년간 중풍을 앓아온 고인은 “더는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며 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전국을 돌며 유세하고서 밤늦게 대구에 투표하러 내려갔어요. 선거일 아침, 아버지가 저를 부르시더니 ‘니하고 내하고 이제 이별하자’는 거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냐’고 하니 ‘살 만큼 살았고 세상 볼 만큼 봤고 이제 힘도 부친다. 구질구질하게 살기 싫고 이제 이별하고 싶다. 그리 알고 가라’는 겁니다.
 
  제가 ‘안 됩니다’ 하니까, ‘됐다. 한번 끌어안아도(다오)’ 하셔서 안아드렸어요. ‘내가 내일 즈음 죽을 끼다(것이다)’는 겁니다.
 
  집 현관을 나서며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돌아서려는데, 아내가 ‘뵈면 가슴만 더 아프니 투표하러 갑시다’ 그래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하고 아내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눴나 봐요.
 
  투표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당사에서 개표과정을 지켜봤어요. 과반에 1석이 남느냐 안 남느냐로 설왕설래(說往說來)했어요. 이튿날 선거 결과가 발표되고 최고위원 회의를 막 시작하는데 비서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쪽지를 전해줬어요. 급히 집으로 가니 어머니(崔香伊·작고)는 ‘너그(너희)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를 아는 신선(神仙)인가 보다’ 그러셨어요.”
 
 
  강재섭의 思父曲
 
한나라당 강재섭 전 대표가 2008년 4월 11일 대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부친 강성무 옹(翁)의 빈소에 조문 온 박근혜 의원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당시 대구·경북의 유력지인 《매일신문》에 ‘강재섭의 사부곡’이란 기사가 실렸다.
 
  〈강 대표의 부친 고 강성무(88)씨는 지난 3월 말 “더 이상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며 치료를 거부했다.
 
  이에 강 대표의 모친이 “전국을 순회유세하고 있는 아들을 생각해야지, 아들 선거를 망치려고 하느냐”며 말리고 나섰고, 부친은 “그럼 선거가 끝난 후 헤어지자”며 다시 링거를 맞는 등 치료를 받았다.〉
 
  강 전 대표의 말이다.
 
  “선친은 건강하셨는데 평소 술·담배를 즐기셨어요. 돌아가시기 10여 년 전에 쓰러져서 오른쪽 몸을 못 쓰셨어요. 재활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동네공원에 마누라 손 잡고 빌빌 돌아다니는 놈이 제일 불쌍코(하고) 처량하더라’며 ‘난 그런 것 안 한다. 적당히 살다가 갈란다’고 말씀하셨어요. 와병 중에도 ‘야! 나하고 담배 같이 피우는 게 효도다. 내 명령이다. 같이 피우자’ 하셔서 할 수 없이 맞담배를 폈어요.”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물처럼 뒤돌아보지 않는 성격은 부자가 모두 마찬가지인 셈이다. 아니, 아버지 성격을 아들이 빼닮았다.
 
  “당신은 6남매 학비 대느라 늘 쪼들리며 살던 집을 줄여나갔지만, 자식들에게 내색 한번 안 하셨어요. 공부하라는 잔소리조차 평생 안 하셨죠. 스스로 하도록 맡기셨어요. 내가 서울대 법대 다닐 때 가끔 서울 출장 오시면 우리는 무교동에서 만나 술 마시고 어깨동무하며 종로 골목을 누볐어요. 그 시절, 시골서 올라온 학생은 아르바이트 입주 과외를 했는데, 아버지는 ‘남의 집 눈치 보고 살지 말라’셨죠. 당신도 어려웠을 텐데 넉넉하게 용돈을 보내주셨어요.”
 
  강 전 대표는 법대 4학년이던 만 22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최연소 합격이었다. 지금은 ‘최연소’ 타이틀에서 밀려났다. 우병우(만 20세), 고승덕(만 21세)에 이어 세 번째다. 그는 선친의 마지막을 담담하게 말했다.
 
  “아내의 전언에 따르면 돌아가시던 날 아침, 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마루에 나오더니 방마다 돌아보고 벽에 걸린 가족사진도 보셨다고 해요. 그러더니 아내에게 ‘니 고생 참 많았데이. 잘했데이’ 하셨답니다. 아내는 평소처럼 주현미 노래를 틀어드리고 주방에 갔는데 30분 뒤 의자에 앉아 꼿꼿하게 돌아가셨어요.”
 
  고인은 자신이 돌아가실 때를 정확히 안 모양이었다.
 
  “사실 아버지도 법학을 공부하셨어요. 당신은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교편을 잡다가 서울대 상대 전신인 경성경제전문학교에 들어가셨는데, 학생들이 좌우익으로 편을 갈라 싸우는 모습에 실망해 다시 낙향하셨죠. 허주(虛舟·故 김윤환 의원)의 선친이 운영하던 오상 중·고교에서 영어교사를 하셨고, 당시 야간 과정의 대구대 법대도 다니셨어요. 가끔 아버지는 ‘내가 백남억(白南檍)이 제자’라고 말씀하셨어요.”
 
  3공화국에서 공화당 정책위의장과 당의장을 지낸 백남억은 대구대 법학 교수로 재직하다 1960년 정계에 입문했다. 공화당 내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등 ‘바른말 잘하는’ 소신파로 불렸다.
 
 
  강재섭과 토니 블레어
 
1990년대 영국의 40대 총리를 표방한 강재섭 의원은 한나라당 내에서 ‘토니 강’으로 불렸다. 사진은 2003년 7월 20일 내한한 블레어 총리 부부.
  본격적으로 정치 이야기를 시작했다.
 
  ― 원내대표에 당선된 주호영 의원이 잘할 수 있겠습니까.
 
  “힘들어… 힘들어. 대여(對與) 협상전략으로 가야 할지, 투쟁전략을 펴야 할지 잘 판단해야겠죠. 사실 지금은 협상이고 뭐고 할 게 있나?
 
  어쨌든, 지금 미래통합당 내부에서 외부 인사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데려오려고 하는데 나는 반대야. 외부인이 당 정체성이나 가치관과 맞아야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특히나 정치 기술자를 데려와서는 곤란하지. 왜 이회창(李會昌) 시절에도 당 안팎에서 훈수를 둔다며 여기 왔다, 저기 기웃거리던 사람이 있었잖아.”
 
  1988년 민정당 전국구 의원(13대)으로 정치권에 입문한 강재섭 전 대표는 40대에 영국 총리가 된 토니 블레어에 빗댄 ‘토니 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8년 무렵, 토니 블레어 바람을 타고 8·31 전당대회에서 총재 경선에 나서 파란을 일으켰다.
 
  “20세기 영국의 최연소 총리이자, 현대 영국 정치사에 ‘제3의 길’을 처음 내세운 정치인이 토니 블레어입니다. 전후(戰後) 영국 총리를 10년 넘게 역임한 역대 노동당 최장수 내각을 꾸렸죠. 이제 우리 야당도 토니 블레어 같은 사람이 등장할 때가 되었고,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된 거지.
 
  영국 노동당이 보수당과 양대 정당이 된 건 우연이 아닙니다. 대처(총리)에게 밀려 집권에 실패하자 ‘신노동당(New Labour)’이라는 기치로 당 노선과 이미지, 강령까지 확 바꾸고 몸부림쳤어요. 생산적 복지 체계를 확립하고 (복지)수당을 줄이는 대신 일자리 확충, 노동 유연성 제고, 낡은 제조업에서 금융·문화 중심의 산업 재편이 주효했어요.
 
  야당도 못 하라는 법이 없어요. 좌고우면 말고 지킬 것은 확실히 지키며 당을 확 바꿔야….”
 
 
  “이번 총선은 코로나 선거, 합법적으로 돈 푼 선거”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7월 3일 오후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이임하는 강재섭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 이번 21대 총선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코로나 선거였어요. 다른 이슈들, 그러니까 정권 심판이나 경제 실정(失政) 같은 이슈가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돈 선거였어요. 합법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돈을 푼 거죠. ‘재난 긴급생활비’라며 서울시장이 풀고 경기도지사가 풀고, 청와대와 여권도 전 국민에게 주겠다고 했잖아요.
 
  야당은 반대면 반대, 이럴 때는 차라리 찬성으로 가자고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대처해버렸어. 우리 국민은 위기에 빠지면 ‘와~’ 하고 일어서잖아요. ‘금 모으기’ 때처럼 말이지. 이 정권은 아무것도 잘한 게 없는데 재수가 좋은 거지…. 박정희 시대부터 쌓아올린 의료시스템의 우수성과 소셜미디어(SNS)의 IT 기술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죠.”
 
  그는 야당의 공천 과정을 아쉬워했다.
 
  “보수세력을 살리는 공천이어야 했는데… 아쉬워요. 예를 들어 장기표씨를 정치적으로 배려한다면 비례의석을 줘야 했어요. 재야에서 고생한 분이 기성 정치권에 들어오면 정치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굳이 고향에 보낸답시고 그런 험지에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이해가 안 돼. 태영호씨도 비례를 주면 되지 왜 그런 공천을 했을까요. 강남 사람들이 억지로 찍어주기는 했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 지금 야당 내에 대안이 없다며 김종인씨를 비대위원장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요.
 
  “대안이 왜 없노. 아니, 경선을 붙여야지. 경선을 붙여서 사람을 띄우고….”
 
  ― 조기 전당대회가 비대위보다 더 낫나요.
 
  “백번 더 낫죠. 왜냐면 정당이라는 게 위기에서 성장하고 사람도 위기에서 큽니다. ‘다음 보수정권이 집권하는 데 앞장설 사람, 좌고우면하지 않는 사람, 자기 희생할 수 있는 사람 여기 다 나오라’고 해서 한판 붙어야지.
 
  유승민, 홍준표. 이런 사람들까지 당에 다 들어와서 조기 전대를 해야 합니다. 대선후보 경선 때까지, 경선을 몇 번이라도 해서 새 인물을 띄워야 해요.
 
  선거는 표를 먹고삽니다. 민주주의는 표를 많이 먹는 이가 최고야. 몇 번이라도 당내 경선을 해서 표를 잘 먹는 이를 뽑아 ‘굳히기’를 해야 합니다. 시대착오적인 사람, 구시대적으로 삭발하고 이미지 정치를 하려는 사람, 막말로 정치를 희화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걸러내는 장치를 당내 선거로 만들어야지.
 
  시험도 모의고사를 자꾸 쳐봐야 실력이 늡니다. 시험이 없으면 공부를 합니까. 외부 인사를 불러서 편안하게 관리형으로 가보겠다?”
 
  미래통합당은 한나라당 시절인 2010년 김무성 비대위를 시작으로, 2011년 정의화 비대위, 2011년 박근혜 비대위, 2014년 이완구 비대위, 2016년 김희옥 비대위, 2016년 말 인명진 비대위, 2018년 김병준 비대위 등을 거쳤다. 아직은 불투명하나 김종인 비대위가 출범하면 10년 사이 여덟 번째 비대위가 된다.
 
  하지만 역대 비대위를 보면 실패가 많았다. 김희옥·인명진·김병준 비대위는 당 쇄신을 위해 외부 인사를 영입한 사례다. 김희옥 비대위는 2개월, 인명진 비대위는 3개월 만에 중도하차했다. 김병준 비대위는 특별한 인상을 못 남겼다. 강 전 대표의 말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용병이 무슨 애국심이 있어 싸웁니까. 고대 카르타고 때부터 용병을 썼지만 안 망한 나라가 없어요. 외부인이 남의 집이 무너질 때 서까래를 바치고 기둥을 붙잡고 있겠어요?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겠어요? 난 어렵다고 봅니다.
 
  어떻게 당 운명을 외부인에게 맡깁니까. 졸병도 아니고 그것도 대장 자리를…. (미래통합당은) 걸핏하면 비대위를 가동합니다. 아무 소용이 없어요.”
 
 
  “시대가 새로운 인물을 원한다. 초선들이여, 지금이 그런 때”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취임 1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2007년 7월 10일 국회 대표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섭 전 대표는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민자당 후보로 대구 서구을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민자당 대변인과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신한국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당시 TK에서 자민련 ‘녹색 태풍’이 불어 그와 김석원·이상득 의원 등 몇몇을 제외하고 모두 낙선할 만큼 무지 어려운 선거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거쳤고, 16·17대 총선에서 모두 당선돼 5선 고지에 올랐다. 2005년 한나라당 원내대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한나라당 대표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2008년 18대 총선에서 이명박(李明博)-박근혜(朴槿惠)계 간 친이-친박 싸움에 반발해 불출마를 택했다.
 
  ― 정치할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나요.
 
  “음… 정치적 기본 소양은 있었다고 생각해요. 정치 처음 할 때 대통령이라는 큰 꿈을 갖고 시작했어요. 삼덕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반장을 했고, 전교 어린이회장이었어요. 경북대 사대부중에 다닐 때도 1~3학년까지 반장과 총학생회장을 했고 경북고 시절에도 쭉 그랬어요. 서울대 법대 다닐 때는 1학년 때 4명의 대의원 중 한 명이었죠.
 
  친화력이 있고 늘 모임을 주도하는 성격이라 정치가 체질에 맞았는데, 안 맞는 게 딱 하나가 있었어. 자랑 같지만 비위가 좀 약해요. 남 속이고 손 문지르고(비비고)… 후안무치(厚顔無恥)를 못 해요.
 
  정치를 그만두니 기업에서 찾아와 고문을 맡아달라 해. 연봉을 얼마 주겠다고 해도 안 갔어. 남한테 구부리기 싫었어요. 정말 안 했어요. 변호사 개업도 안 했습니다. 나름 기준에 맞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그러다 보니 지금은 유동성 위기에 봉착했어요. 하하하.”
 
  ― 유승민 의원이 평소 존경하는 것으로 아는데, 향후 유 의원이 TK에서 정치할 수 있을까요.
 
  “…통합된 야당에 뛰어들어 큰 싸움을 해야 합니다.”
 
  유승민 의원은 2000년 2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영입으로 여의도연구소(현 여의도연구원) 소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2004년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배지를 달았다. 이후 20대 총선까지 내리 4선에 성공했다.
 
  “이회창 총재가 전화를 걸어와 유 의원의 비례대표 앞자리를 박근혜 대표에게 말해달라고 한 일이 있어요. 박 대표는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유념하겠습니다’ 했어요.”
 
  2005년 10월 대구 동을(東乙)에서 박창달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당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는데, 이른바 ‘왕수석’(文在寅)과 함께 ‘왕특보’로 불리던 청와대 이강철 시민사회수석이 출마한 상태였다. 당시 원내대표인 강 전 대표는 “보궐선거 원인을 제공했으니 후보를 내지 말자”는 소신이었다.
 
  “그때 박근혜 대표가 나를 불러서 ‘그 얘기 그만하실 수 없습니까’ 하더군요. ‘유 의원을 (보궐선거에) 보내고 싶다’는 겁니다.”
 
  유 의원은 박 대표의 구상대로 비례대표직을 그만두고 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박근혜·유승민,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박 대통령은 굉장히 바르고 순수하며 신데렐라적인 면이 있어요. 그러나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닫아버려요. 상대가 상처 줄 의도가 없었는데도 말이죠. 유 의원도 상처를 속으로 못 삭이는 스타일이야.”
 
  ― 초선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정치를 떠나 그런지 몰라도 지금 초선을 보면 개성이랄까, 줏대·소신 같은 게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평검사 시절에는 검사장이나 차장 검사가 부전지를 붙이면 ‘검사장님도 검사 하셨으니까, 하고 싶으면 직접 구속영장을 청구하세요’라고 결재판을 뒤집어 올리는 소신파가 많았어.
 
  당 외부 인사에게 자신 운명을 맡기지 말고 스스로 개척하면 좋겠어요.”
 
  ― 어떻게요.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상황이 초선들에게 억쑤로 좋아. ‘내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이렇게 만들겠다’고 결심이 선다면, 이번 대표 경선에 나가야 해. 시대가 새로운 인물을 원하고 있어요. 지금이 바로 그런 때야.”
 
 
  “당명은 자유당, 당색은 파란색으로!”
 
서구 정당사에서 파랑은 보수정당의 색깔이다.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은 파란색을 버리고 빨간색을 채택했다. 그러자 더불어민주당은 보수정당의 상징처럼 인식됐던 파란색을 선택했다.
  모든 정당은 그들 정당이 지닌 고유의 색깔이 있다. 상징색은 정당명, 로고와 더불어 ‘정당 정체성(party identity)’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매개체다. 한국 정당사를 보면 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정당명과 정당색을 재정의해왔다. 강 전 대표는 지금 미래통합당의 당색과 당명이 마뜩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당 색깔부터 바꿔야 합니다. 황건적·홍건적 같은 색깔은 원래 체제를 뒤엎자는 세력들의 전유물이지요. 중국 마오쩌둥도 홍위병을 내세워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았나요? 빨간색, 분홍색은 깊이 없는 이벤트 전문가들의 얄팍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결과지요. 보수당은 파란색으로 다시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서구 정당사에서 파랑은 보수정당의 색깔이다. 더불어민주당이 파란색을 정당색으로 정하기 전에 파랑은 줄곧 민정당(1981년 창당), 민자당(1988년), 신한국당(1996년), 한나라당(1997년)의 상징색이었다. 31년간 한국 보수당이 파랑을 선점했다.
 
  그러나 2012년 대선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은 파란색을 버리고 정반대 색인 빨간색을 채택했다. 공산혁명의 상징색인 빨간색이 자유진영에선 기피증이 있지만, ‘금기’로 여기던 색을 수용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강 전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그때 분위기는 누가 나와도 될 때니까 찍어준 것이죠. 빨간색과 보수 이념이 맞아서 찍어줬겠어요? 빨간색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색깔이니 보수당이 그런 헷갈리는 걸 내세우면 기회주의적 자세밖에 안 되지요. 푸른색은 (보수 이념의) 태반이나 마찬가지인데 적에게 갖다 바치니 그때 볼 일 다 본 거지요. 영혼을 팔아먹었다고 할까.
 
  평화와 자유의 색깔이 파란색입니다. (당색을) 무조건 파란색으로 바꿔야 합니다.”
 
  사실 노랑(열린우리당)과 녹색(민주통합당)을 가졌던 민주당은 2013년 보수정당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파란색을 선택했다. 고정관념에 비춰본다면 여야가 겉옷을 바꿔 입은 듯한 시각적 착각을 불러일으킨 셈이었다.
 
  ― 파란색은 지금 민주당이 쓰고 있는데….
 
  “도로 가져오면 되죠. 여당이 쓰고 있어도 관계없어. 더 진한 것을 쓰면 되지. 그런 것을 보면 민주당이 머리가 좋은 겁니다. 우리가 파랑을 버리니까 대번에 가져갔으니까.”
 
  ― 당명은 어떻게 보세요.
 
  “나는 민정당으로 정치를 시작했는데, 당명이 수없이 바뀌었어요. 한 번도 당을 옮긴 적이 없는데도 말이죠. 정당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해요. 미래? 미래를 생각 안 하는 사람이 어딨나요. 통합? 정치의 목적이 통합인걸요. 민주? 북한도 쓰는 용어여서 이젠 식상해요.
 
  과거 이승만 정권 당시를 떠올릴 수 있지만 보수 이념과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는 한 단어가 ‘자유당’입니다. 내가 당대표라면 지금의 당을 완전 해체해 푸른색의 자유당 기치 아래 새로운 스타를 발굴할 겁니다.”
 
 
  “큰 판에서 놀 수 있는 젊은 인물이 나와야”
 
신한국당 원내총무 시절 강재섭. 1997년 8월 11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원내총무 인준을 받은 뒤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경청을 하고 있는 이회창 대표.
  정계은퇴 후 그는 자신만의 즐거움을 향유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사, 일본사, 고대 로마사와 관련된 역사책을 즐겨 읽는다. 기회가 되면 역사 강연도 하고 싶단다. 역사물을 좋아하면서 중화TV 드라마를 즐겨 본다. “진시황, 삼국지, 명나라 태조 주원장 등 시대별 역사 드라마가 ‘중드(중국 드라마)’에 다 나온다”고 했다. 골프와 당구도 열심히 친다. 재경 고교 당구모임(慶脈Q)까지 만들었을 정도다.
 
  “반드시 하루 한 번씩 일정을 만들어요. 어제는 손녀, 손자들과 서울랜드에 다녀왔어요.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놀아주고 사진도 찍어줬어요. ‘할아버지 목말라요, 배 고파’ 하고 다가오는 게 너무 즐겁고 재미난 거지. 지난번에는 며느리가 극구 반대했지만 아이들과 영화관에 갔지 뭐예요. 아이들과 데이트하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지요.”
 
  이 대목에서 다시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 다시 정치할 마음은 안 드세요.
 
  “나 같은 늙은 놈이 나서면 당을 망치는 거야. 누가 나를 기대하겠노.
 
  누가 나보고 하라카는(정치를 하라는) 놈도 없는데, 안 하지. 내가 정치에 미련 없다는 것을 다 아니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이제는.
 
  당장은 희망이 없더라도, 안 보이더라도 어중이떠중이까지 다 나오는 경선을 해서 사람을 자꾸 키우는 수밖에 없어요. 당대표에서 최고위원까지 선수·나이와 상관없이 같은 눈높이, 같은 위치에서 격의 없이 당 운명을 논할 수 있어야 정치가 건강해집니다.”
 

  그러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뭐해야 하나? 경험이 많아야 하잖아요. 당내 경험…. 정치이론 백날 말하면 뭐하나. 당내 경선에 막 나오게 해서 싸움을 붙여야지.
 
  미국의 버락 오바마가 어떻게 해서 대통령이 됐나요. 전당대회를 통해 컸다고요. 전대에서 지원 유세를 잘해서 컸어요. 우리도 정치 유망주에게 ‘스피치’를 시켜서 성장시켜야 합니다. TV토론보다 정치 현장에서 표를 먹고 큰 판에서 놀 수 있는 젊은 인물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돕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뿌리인 미래통합당에 실망하고 있지만 늘, 지금도 마음이 가는 모양이다.
 
  “행여 내 걱정은 하지 마이소. 간혹 어느 자리에서 국회의원들과 마주치곤 하지만 떳떳하게 가슴 펴고 오지 못하고 비실비실 피해버려. 그런 정치인처럼 구질구질하게 살기 싫어요.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살면 되는데 말이죠.”
 
  그와 만나 오래 대화하다 보니 20여 년 전 기자가 초년병 시절 만났던 ‘토니 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느낀 열정과 솔직함 말이다. 그에게 다시 기회가 있을까. “매사가 하늘의 손에 달려 있는데, 왜 세상이 마치 제 손에 있는 듯 걱정하는가”라는 카를로 카레토(Carlo Caretto)의 말이 떠올랐다. 헤어지면서 한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사람들에게 ‘물처럼 살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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