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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부정선거와 권력

부정선거로 무너진 정권들

부정선거, 민심 폭발의 뇌관이 되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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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 모랄레스, 大選에서 개표 중단·조작… 대통령궁 경비대까지 등 돌리자 망명(볼리비아)
⊙ 2004년 선거에서 親러시아 세력이 부정선거 자행… 시민봉기로 여당 후보 당선 無效化시키고 야당 집권(우크라이나)
⊙ 族閥 통치 꿈꾸던 독재자, 총선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봉기로 축출돼(키르기스스탄)
⊙ ‘개혁의 기수’였던 후지모리, 유권자 명부 조작으로 3選 성공했지만, 야당 의원 매수 들통나는 바람에 결국 퇴진
2019년 11월 모랄레스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관들까지도 동조했다. 사진=뉴시스/AP
  부정선거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저열한 공격이다. 집권 세력이 그런 파렴치한 범죄를 자행하는 것은 대개 장기집권과 독재, 실정(失政), 그리고 지역 간이나 계층 간 갈등으로 민심이 이반(離反)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계속 정권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치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은 대개 선거에 앞서 헌법이나 선거법 등 정치 관련 법률들을 변칙적으로 개정하고, 언론의 자유나 집회・시위의 자유를 규제하는 입법을 감행한다. 선거 시에는 관권 선거, 야당 후보 등록 저지, 유권자 명부 조작 등의 방법을 동원한다. 그래도 안 되면 개표를 중단하고 투표함을 바꿔치는 등 극단적 수단도 불사한다. 1960년 3・15부정선거가 그 전형(典型)이었다.
 
  외국, 특히 민주주의 경험이 일천한 신생국에서 그와 비슷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그런 야바위 짓은 반드시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4・19가 그랬고, 마르코스의 21년 장기집권을 끝장낸 1986년 필리핀 ‘피플 파워’ 봉기가 그랬다.
 
  그럼에도 독재자들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다. 지난 20여 년 사이에도 부정선거를 획책하다가 몰락한 사례가 여럿 있었다. 주로 옛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들이나 남미(南美) 국가들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처음에는 ‘개혁의 기수(旗手)’로서 국민의 박수를 받으며 정계(政界)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입맛을 쓰게 한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볼리비아
  부정선거로 몰락한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
 
2009년 1월 사회주의 개헌안 통과를 호소하는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사진=뉴시스/신화
  2019년 11월 11일, 14년간 집권했던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전격 사임을 선언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볼리비아 역사상 최초의 원주민(인디오) 출신 대통령으로서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그를 망명객으로 만든 것은 대선(大選)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볼리비아는 그해 10월 20일 대선을 치렀다. 볼리비아 법률상 대선 1차 투표에서 한 후보가 50% 이상 득표하거나, 40% 이상 득표하고 2위와의 격차가 10%포인트 이상이면 결선(決選)투표 없이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다. 최고선거재판소(선거관리위원회)가 투표 마감 4시간 후에 발표한 중간개표 결과에 의하면, 83.76%가 개표된 상황에서 모랄레스 대통령과 야당 후보 카를로스 메사 간 격차는 7.12%포인트(45.28% 대 38.16%)였다. 그대로 가면 모랄레스가 1차 투표에서 1위를 하더라도 결선투표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다. 이 경우 야권 지지자들이 야당 후보 메사를 중심으로 결집하면 모랄레스는 2차 투표에서 패할 수도 있었다.
 
  최고선거재판소의 중간개표 결과가 나온 직후, 돌연 개표가 중단됐다. 개표 중단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24시간 뒤 최고선거재판소는 96%가량 개표된 상태에서 “모랄레스 대통령이 46.85% 표를 획득해 메사를 10.11%포인트 차로 앞서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대로 가면 모랄레스의 승리였다.
 
  그러자 야당 지지자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정부가 결선투표 없이 모랄레스 당선을 확정짓기 위해 개표를 중단하고 개표 조작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볼리비아 전역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은 발포로 맞섰다. 3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개표 과정을 조사한 미주기구(OAS·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선거감시단은 “불공정과 부정사례가 분명히 산적해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볼리비아 법무부는 선거재판소 판사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정권으로부터 혜택을 받아온 원주민 등 소외계층이 모랄레스 지지 시위에 나서기는 했지만, 이미 민심은 돌아섰다. 경찰과 군(軍), 심지어 대통령궁 경비대까지 모랄레스 퇴진 요구 시위에 합세했다. 군중은 이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윌리엄스 칼리만 볼리비아군 총사령관은 “민주주의와 법적 원칙에 따라, 군은 우리 국민의 통합을 보장할 것”이라면서 “군은 시위 군중에 맞서지 않겠다”고 밝혔다.
 
  모랄레스는 이에 대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며 지지 세력을 선동했으나, 결국 11월 11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아야 할 부통령, 상・하원 의장, 주요 각료들도 줄줄이 사임했다. 국가 지도부가 공석(空席)이 된 상태에서 결국 자니네 아녜스 상원 부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連任 금지 규정에 대해 헌법소원 제기
 
  모랄레스의 사임에도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멕시코를 경유해 아르헨티나로 간 모랄레스 전 대통령은 “살아 있는 한 정치를 계속하겠다” “나는 볼리비아의 리튬 자원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음모에 희생된 것”이라면서 자신이 여전히 볼리비아의 합법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국내 좌파 세력들 역시 모랄레스의 퇴진을 ‘미국과 자본가들이 결탁한 쿠데타’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도정부는 이에 맞서 지난 1월 8일 모랄레스를 비롯한 구(舊)정권 인사들과 그들의 가족 592명에 대한 ‘적폐수사’에 착수한다고 발표하는 한편, 모랄레스에 대해 ‘테러선동’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모랄레스는 원래 코카 재배 농부였다. 미국이 마약 코카인의 원료가 되는 코카 재배를 금지하도록 볼리비아 정부에 압력을 넣자, 모랄레스는 이에 반대하는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97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 그는 2005년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독립 이래 200년 가까이 스페인계 백인이나 메스티소(스페인계 이주민과 인디오 간의 혼혈) 출신이 권력을 독점해오던 나라에서는 천지개벽할 만한 사변(事變)이었다. 이후 모랄레스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에너지 산업 등을 국유화(國有化)하고, 원주민 등 소외계층에게 복지 혜택을 베푸는 한편,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남미 ‘핑크 타이드(pink tide)’ 주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11년간이나 주미대사를 보내지 않을 정도로 반미(反美) 노선을 견지하면서 사회주의·포퓰리즘을 추구한 결과, 도시 중산층 이상의 반발을 샀다.
 
  모랄레스는 2009년, 2014년 대선에서 계속 승리했다. 그는 2019년 4선에 도전하기 위한 사전(事前) 정지 작업으로 2016년 헌법에 있는 연임(連任) 제한 규정을 고치기 위한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치지만 부결됐다. 그러자 모랄레스는 헌법재판소에 연임 제한 규정에 대한 헌법소원(訴願)을 제기했다. 친(親)모랄레스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헌법재판소는 “연임 제한 규정이 ‘자연인으로서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이유로 모랄레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4선에 나섰지만, 무리한 욕심은 결국 그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우크라이나
  ‘북한식 선거’로 ‘오렌지혁명’ 촉발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은 2004년 11월 대선 당시 유셴코 지지자들이 오렌지색 깃발을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사진=뉴시스/AP
  볼리비아 경우처럼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욕심에서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가 그것이 대중의 항의를 유발하고, 결국 정권이 무너진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옛 소련이 붕괴한 후 분리 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는 2004년 11~12월, 대선 부정에 항의하는 시민봉기가 일어났다.
 
  그해 11월 21일 실시된 대선 2차 결선투표에서 여당 후보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총리가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를 누르고 당선됐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개표가 98.23% 진행된 상황에서 야누코비치가 49.57%, 유셴코가 46.57%를 얻어 사실상 야누코비치의 당선이 확정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야당은 물론 미국・EU 같은 국제사회 또한 즉각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유럽의회 선거참관인단을 이끌고 있는 마렉 시위치 위원장은 “우크라이나 대선 결선투표는 (대규모 동원이 판치는) 북한식으로 진행됐다”며 “야누코비치 총리 지지 기반인 동부 지역에서 대규모 유권자 동원이 이뤄졌다”고 비난했다. 그는 “1차 투표 당시 75%였던 대선 투표율이 2차 결선투표에서 80%로 높아졌다”며 “늘어난 5%포인트는 대부분 야누코비치 총리의 텃밭인 동부 지역에서 왔으며, 이것은 유럽 방식이 아닌 북한 스타일 선거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파견한 수석선거참관인 리처드 루가 상원의원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야누코비치 총리를 위한 투표 조작을 주도하거나 협조한 것이 명백하다”며 “레오니트 쿠치마 현 대통령은 이제라도 공정한 선거 결과를 내놓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러시아·중국은 서방 국가들의 선거 부정 주장을 일축하면서 쿠치마 대통령과 야누코비치를 지지했다.
 
 
  선관위 직원, “1000만 표 조작” 증언
 
빅토르 유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뉴시스/신화
  야당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했고, 수도 키예프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항의시위가 발생했다. 수만명의 시위대가 정부청사 등을 포위했다. 야당은 그해 11월 25일 대법원에 선거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는 선거 결과를 공식화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같은 달 27일에는 국회가 대선 무효(無效)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부정선거 항의 시위는 우크라이나를 내전(內戰) 위기로 몰고 갔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러시아 정교를 믿고 오랫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온 동부 지역과, 가톨릭을 믿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과 폴란드의 통치를 받아온 서부 간에 알력이 심했다. 전자(前者)는 친(親)러시아, 후자(後者)는 친서방 성향이었다. 야누코비치는 친러시아 세력을, 유셴코는 친서방 세력을 대변하고 있었다. 특히 옛 소련 시절 스탈린 치하 집단농장화 과정에서 있었던 대기근(大饑饉)과 농민에 대한 탄압으로 1100만명이 사망(홀로도모르)한 것을 기억하는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에 생래적 반감을 갖고 있었다.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야당 후보 유셴코는 대선 두 달 전 다이옥신 중독으로 꽃미남이던 얼굴이 유자껍질처럼 바뀌는 참극을 겪었다. 이는 러시아 정보요원의 소행으로 추정되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친러시아 성향의 레오니트 쿠치마 대통령과 그의 후계자 야누코비치는 인기가 없었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자,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그해 11월 29일 “국가 분열을 막기 위해 재(再)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했다.
 
  이 무렵 대선 관련 대법원 재판 과정에서 “이번 대선은 조작됐으며, 그 규모는 약 1000만 표에 이를 것으로 믿는다”는 우크라이나 중앙선관위 관리의 증언이 나왔다. 결국 우크라이나 대법원은 12월 3일 대선 결선투표 결과가 무효라면서 결선투표를 다시 실시하라고 판결했다. 12월 8일 의회는 비상총회를 열고 대통령 권한을 약화시키는 개헌안과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그해 12월 26일 실시된 대선 재선거에서 유셴코는 야누코비치를 300만 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것이 우크라이나의 ‘제1차 오렌지혁명’이다. 오렌지색이 당시 야당의 상징색이었다.
 
 
  포퓰리즘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드라마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셴코가 승리는 했지만, 친러시아 세력과 친서방 세력 간의 갈등은 치유되지 않았다. 여기에다 ‘오렌지혁명’을 함께 이끌었던 대통령 유셴코와 총리 율리아 티모셴코 간의 알력으로 국정은 표류했다.
 
  여기에 더해 여야(與野) 할 것 없이 포퓰리즘 경쟁을 벌였다. 최저임금 인상, 세금 인하, 무상 의료를 넘어 ‘20년 근속 공무원에게 아파트 제공’ ‘연금 300% 증액’ 같은 공약(公約)들이 난무했다. 10년간 월(月) 최저연금은 10배, 월 최저임금은 5.6배가 올랐다.
 
  ‘공짜 정치’는 경제 붕괴로 이어졌다. 재정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5%까지 불어났다. 결국 2008년 우크라이나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이 틈을 타서 2004년 ‘오렌지혁명’의 패자(敗者)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는 2010년 대선에서 ‘경제성장’을 내걸고 율리아 티모셴코에게 승리,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야누코비치 역시 연금 생활자·빈곤층 등의 지지를 의식해 연금 인상, 세금 인하 등 포퓰리즘 정책을 폈다.
 
  경제성장률이 0%대로 떨어지자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EU) 가입을 통해 활로(活路)를 모색했다. 중산층과 서부 지역 주민들이 이를 지지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서방 진영으로 편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제적 압력을 가하고, 또 한편으로는 막대한 경제 지원 약속으로 회유했다. 결국 야누코비치는 2013년 11월 EU 가입 논의를 중단하고 친러시아 노선으로 회귀한다고 선언했다.
 
 
  ‘제2차 오렌지혁명’과 內戰
 
2014년 2월 야누코비치 정권 타도에 성공한 시민들은 軍 장갑차에 올라 수도 키예프를 달리며 환호했다. 사진=뉴시스/AP
  그러자 중산층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해 11월 21일부터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수도 키예프에서는 35만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시위는 100여 명의 사망자와 50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유혈사태로 번졌다. 미국의 평론잡지 《포린 어페어스》는 “야누코비치가 중산층의 개혁 요구를 배신하면서 궁지에 몰렸다”며 “중산층이 정권 퇴진 시위에 나서는 건 포퓰리즘이 자신과 자녀들에게 더 좋은 미래를 가져다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부패 혐의로 투옥된 정적(政敵) 티모셴코 전 총리 석방과 조기(早期) 대선을 약속하는 등 유화 제스처를 썼으나 소용없었다. 2014년 2월 22일 의회는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했고,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탈출했다. 그가 도망친 후 그의 호화 별장이 공개됐다. 별장 총면적이 여의도의 절반에 달했다. 동물원에 헬기장까지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내부는 제정러시아의 황궁을 연상케 할 정도로 번쩍이는 황금빛 집기들로 가득했다. 우크라이나 검찰은 야누코비치와 그 측근들을 공금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은 이듬해 인터폴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이 ‘제2차 오렌지혁명’으로 우크라이나는 다시 한 번 친서방 노선으로 회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1차 때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동부 지역 등지에서 친러시아 세력이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 무장 세력에게 무기와 병력을 제공했다. 더 나아가 러시아는 그해 3월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우크라이나는 지금도 키예프의 중앙정부가 통치하는 지역과 친러시아 세력이 장악한 동부 지역으로 분단되어 있다.
 
 
  키르기스스탄
  총선 부정 때문에 쫓겨난 族閥 통치자
 
부정선거로 쫓겨난 아카예프 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우크라이나에서 ‘오렌지혁명’이 일어난 이듬해인 2005년 3월,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레몬혁명’이 일어났다. 그해 2월 27일 총선 1차 투표와 3월 13일 총선 결선투표의 부정에 대해 항의해 일어난 혁명이다.
 
  총선에서 야당은 전체 75석 중 6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야당은 15년간 집권해온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EU도 ‘심각한 부정’이 있었다며 이들의 주장을 지지했다.
 
  3월 21일에는 몽둥이로 무장한 1000여 명의 시위대가 제2의 도시 오슈의 지방정부청사를 점령했다. 야당 인사인 오메르베크 테케바예프는 “오늘은 우리 역사의 새날”이라면서 “야당이 전국적으로 대안(代案)정부를 만들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카예프 대통령은 “당국에 선거 부정 의혹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면서 “언제든지 야당과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전날인 3월 20일에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인근 잘랄아바트 지방에서 경찰과 충돌해 10여 명이 숨졌다.
 
  3월 24일 1만여 명의 시위대가 수도 비슈케크의 정부청사를 장악하자 아카예프 대통령은 헬기로 대통령궁을 탈출해 인근 카자흐스탄으로 망명했다.
 
  키르기스스탄 시민혁명의 배경에는 정권의 족벌(族閥)정치와 부패, 지역 차별이 자리하고 있었다. 학자 출신인 아카예프는 옛 소련 붕괴 직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15년간 권력을 유지했다. 초기에는 부드러운 이미지와 온건한 개혁, 미국-러시아 간 등거리 외교로 좋은 점수를 받았으나 점차 독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경제개발의 과실은 아카예프의 친위(親衛) 세력과 그를 지지하는 북부 지방이 주로 차지했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가운데 소외된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민심이 이반(離反)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카예프는 2003년에는 헌법을 개정해 자신에게 종신 불소추(不訴追)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자 아카예프가 장차 총선 후 개헌을 통해 종신(終身)집권으로 갈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2005년 총선에서는 그의 아들과 딸까지 출마해 당선됐다. 이런 뻔뻔스러운 행태가 자행된데다가, 총선에서 반(反)아카예프 정서가 만연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남부 지역에서마저 여당이 압승한 것으로 나타나자 누적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이 혁명은 키르기스스탄의 상징을 따서 ‘레몬혁명’ 혹은 ‘튤립혁명’이라고 한다.
 
 
  페루
  ‘개혁 스타’, 大選 부정과 의원 매수로 몰락
 
  부정선거 의혹 때문에 바로 실각(失脚)하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 통치의 정당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결국 하야(下野)한 경우도 있다. 일본 이민자의 아들로 1990~2000년 페루 대통령을 지낸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바로 그이다.
 
  대학교수 출신인 후지모리는 1990년 ‘캄비오(변화) 90’이라는 신생 정당을 결성해 대선에 도전했다. 당시 그의 상대는 페루 출신의 세계적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요사였다. 하지만 바르가스요사는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듯한 신(新)자유주의 정책과 지나친 친미(親美) 이미지로 점수를 잃었다. 반면에 일본계인 후지모리는 부패한 기성 정치권과는 무관한 신선한 이미지로 어필했다. 후지모리는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정계(政界)의 스타였고, 개혁의 기수였다.
 
  집권 초 후지모리는 초(超)긴축정책과 외자(外資)유치를 통해 8000%에 달하던 인플레이션을 잡고, 30년간 나라를 혼돈으로 몰아넣었던 공산 게릴라들을 소탕하는 데 성공해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1992년 4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고, 이듬해 12월에는 헌법을 개정해 장기집권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 무렵 그는 조기성 주(駐)페루 한국대사를 만나면 종종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독재와 장기집권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후지모리는 1996년 8월에는 ‘헌법 해석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변칙 개헌을 통해 3선 도전의 길을 열었다.
 
 
  부정선거의 백화점
 
2011년 4월 대선 유세를 벌이는 알레한드로 톨레도 전 페루 대통령. 민주화의 상징이던 그는 퇴임 후 부패 혐의로 체포됐다. 사진=뉴시스/AP
  2000년 4월 9일 있을 대선을 앞두고 원주민(인디오) 출신 야당 후보인 알레한드로 톨레도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톨레도는 구두닦이에서 미국 스탠퍼드대학 박사 학위를 따고 세계은행에서 근무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후지모리의 장기집권과 독재, 공산 게릴라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 유린, 부정부패 등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페루 국민들, 특히 인디오들은 톨레도의 등장에 열광했다. 국제 선거감시단은 선거 유세 과정에서 각종 부정이 있었으며, 결선투표가 실시될 경우 후지모리가 3선 당선을 위해 부정선거를 감행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대선 투표 직후 나온 출구조사 결과들은 ‘후지모리 당선’과 ‘톨레도 승리’를 점치는 것으로 엇갈렸다. 톨레도의 승리를 알리는 출구조사 결과에 이어 후지모리가 톨레도를 48.7% 대 41.0%로 눌렀다는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자, 톨레도 지지자들은 ‘부정선거’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톨레도는 “그들이 국민의 의지를 왜곡하려 든다면, 나는 앞장서서 우리의 권리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1차 투표 결과 후지모리는 49.87%를 획득해, 불과 2만여 표 차이로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후지모리 지지자들은 개표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국제사회가 선거 부정을 비판하고 나섰다고 볼멘소리를 냈지만, 각종 선거 감시 기구들은 후지모리 측이 선거인 명부 조작, 사전 대리 투표, 기표 용지의 타(他) 후보 이름 위에 밀랍 칠하기, 감시단의 개표 컴퓨터 접근 불허(不許), 공권력 동원 유권자 위협, 투표함 운송과 개표 지연 등 다양한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고 고발했다. 그야말로 부정선거의 백화점이었다. 제임스 루빈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최종 개표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선거 부정의 확실한 증거가 있으며 결선투표를 기대한다”고 천명해, 미리 추가 개표 부정 가능성에 쐐기를 박았다.
 
 
  “후지모리는 반 년을 견디지 못할 것”
 
  대선 결선투표를 앞두고 톨레도는 오차 범위 내이기는 하지만 후지모리를 2%가량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톨레도는 1차 투표 당시의 선거 부정 사례들을 상기시키면서, 국제선거감시단 주관 아래 선관위 컴퓨터를 일제히 점검하거나 재설치할 수 있도록 투표를 연기하지 않으면 결선 출마를 보이콧하겠다고 수차례 공언했다. 대선 결선투표를 6일 앞둔 5월 22일 미주기구(OAS) 선거감시단은 “개표 집계 소프트웨어를 점검하기 위해 결선투표를 최소한 10일 이상 미뤄야 한다”며 “이런 상황이라면 국제 기준에 따른 최소 인력만 남기고 감시단원을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몇 시간 후 톨레도는 “선거의 투명성과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한 결선은 무의미하다”면서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선거관리위원회는 그의 사퇴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5월 26일 “자유·공정·투명 선거는 민주사회의 근간”이라면서 “선거가 그대로 치러질 경우 리마-워싱턴 간 외교 관계에 반드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후지모리는 “어떠한 선거 부정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5월 28일 사실상 단독출마한 결선투표에서 후지모리는 51.2%를 획득해 3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는 즉각 “선거를 유효하다고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스페인·영국·프랑스 등도 이 선거를 부정선거라고 비난했다. OAS는 페루 사태를 논의할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후지모리 당선이 확정된 직후 톨레도는 이렇게 공언했다.
 
  “나는 내 조국을 안다. 후지모리는 반 년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7월 28일 후지모리는 세 번째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그날 수도 리마에서는 3만여 명의 시위대가 대통령궁 주변에 집결해, “독재자는 몰락하고 만다” “민주주의가 승리할 것이다”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이들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6명이 사망했다. 군부가 후지모리에게 충성을 다짐했지만, 이미 후지모리 정권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후지모리, ‘의원 매수 비디오’ 폭로로 결국 사임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은 2009년 재임 중 인권유린, 살인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5년을 선고받았다. 사진=뉴시스/AP
  ‘후지모리는 반 년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던 톨레도의 예언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2000년 8월 15일에는 후지모리의 전처(前妻)로 당시 야당 의원이던 수사나 히구치가 “후지모리가 동생을 돕기 위해 편법으로 자동차 수입 관세를 내렸다”고 폭로했다. 후지모리는 즉각 이를 부인했지만, 그의 체면은 다시 한 번 구겨졌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9월 16일, ‘폭탄’이 터졌다.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페루 국가정보부장이 야당 의원을 돈으로 매수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된 것이다. 몬테시노스는 야당 의원 알베르토 쿠오리에게 “우린 지금 페루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우려하고 있다. 강력한 의회와 견고하고 양식 있는 절대다수 의석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다. 단순 과반수보다는 절대다수 의석이 필요하다”면서 이적료(移籍料)로 1만 달러를 제안했다. 쿠오리는 1만5000~2만 달러를 요구했고, 몬테시노스는 그 자리에서 5000달러를 더 내놓았다.
 
  저잣거리에서 흥정하듯 야당 의원을 매수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공개되자 민심은 다시 폭발했다. 수도 리마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후지모리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후지모리는 총선과 대선을 다시 실시하고, 자신은 불출마하겠다며 성난 민심을 달래보려 했다. 하지만 일부 군 병력마저 반(反)후지모리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정국은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후지모리는 그해 11월 22일 국회에 대통령직 사퇴서를 제출하고, 부모의 나라인 일본으로 망명했다. 후지모리 퇴진의 직접적 계기는 ‘의원 매수 비디오테이프’ 사건이었지만, 그 이전에 부정선거 시비로 권력의 정당성이 크게 흔들리면서 정권의 내구성(耐久性)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후지모리가 사임한 후, 그가 사실은 페루가 아니라 일본 구마모토 태생이어서 페루 대통령 출마 자격이 당초부터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페루 국민들을 허탈하게 했다. 후지모리는 2007년에 일본 참의원(상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칠레에 머물다가 같은 해 9월 페루로 송환됐다. 페루 대법원은 2009년 재임 중 군 특수부대의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책임을 물어 후지모리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그는 7년간 복역한 후 2017년 12월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사면됐다.
 
  후지모리가 사임한 후 정권을 잡은 톨레도는 2006년까지 페루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퇴임 후 재직 중 브라질 건설 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2017년 미국에서 잠적했다가 작년 7월 미국에서 체포됐다. 한편 후지모리의 딸 게이코는 ‘힘 2011’(나중에 ‘민중의 힘’으로 개칭)이라는 정당을 창당, 2011년과 2016년 대선에 출마했다. 게이코는 2016년 대선에서 2차 투표까지 갔으나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후보에게 0.2% 차이로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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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수    (2020-02-11) 찬성 : 6   반대 : 0
문재인도 곧 골로 갈것 같다.

2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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