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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부정선거와 권력

판결문으로 다시 보는 3·15부정선거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정부와 선거캠프의 공모, 경찰 동원 등에서 흡사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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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부정선거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 공무원들에게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당 후보자가 기필코 당선토록 선거운동 하라”
⊙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놓고 보아야 한다.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던 최인규, 결국 사형 당해
⊙ 1990년대 이후 이지문 중위의 軍 부재자 투표 부정 폭로, 연기군수의 관권 개입 폭로, 노무현 탄핵 등 거치면서 관행처럼 이어지던 官權선거 등 사라져
⊙ 문재인은 신년사에서 ‘4·19혁명 60주년’ 강조… 청와대는 선거 개입 관련 압수수색 거부
1960년 자유당 정권이 자행한 3·15부정선거는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는 전국적 항의시위로 이어졌다. 사진=조선DB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70년 역사에 일대 오점(汚點)을 남겼다. 자유당 정권은 선거 승리를 위해 경찰력과 지방 행정력을 총동원했으며, ‘3인조 투표’ ‘9인조 투표’ 등의 공개투표, 그리고 4할 사전(事前) 투표 등 온갖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그 결과 경남 마산을 시작으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데모가 시작됐고, 이는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경찰의 발포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했다. 결국 그해 4월 26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하야(下野)하면서,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렸다. 정권 연장을 위해 자행했던 부정선거가 정권의 종말을 앞당긴 셈이다.
 
  3・15부정선거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최인규(崔仁圭)를 비롯한 당시 각료, 이강학 내무부 치안국장,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 등은 4・19 후 재판에 회부됐다. 결국 이들은 5・16군사혁명 뒤 혁명재판소에서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및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유죄(有罪)를 선고받았다. 선거 담당인 내무부 장관으로 부정선거를 기획・지휘했던 최인규는 사형 선고를 받고 1961년 12월 교수형을 당했다.
 
 
  3・15부정선거로 가는 길
 
  사실 1960년 3・15부정선거 당시 네 번째로 대선(大選)에 도전하는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당선을 위해 그런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었다. 야당 민주당 후보인 조병옥(趙炳玉)이 대선을 꼭 한 달 앞둔 2월 15일 미국 월터리드육군병원에서 신병(身病)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당, 특히 자유당 강경파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84세의 고령(高齡)이었다. 언제 세상을 떠나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였다. 당시 헌법은 부통령제를 두고 있으면서도 미국식 정-부통령 러닝메이트제는 채택하지 않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가 따로 실시되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대통령과 부통령에 서로 다른 정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상존(尙存)했다.
 
  실제로 1956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는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당선됐지만, 부통령으로는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張勉) 후보가 자유당의 이기붕(李起鵬)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야당 출신 부통령은 국정운영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다. 훗날 3・15부정선거의 주범(主犯)인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이 옥중(獄中) 회고록에서 술회한 것처럼 ‘대통령은 부통령을 상대도 안 하고, 부통령은 노(老)대통령이 속히 돌아가셔서 자기가 대통령 되기만 기다리는 불안한 4년’을 보냈다.
 
  1960년 3・15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4년 전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를 위해 자유당은 1958년 12월 무술경위(武術警衛)들을 동원해 국회 회의장에서 저항하는 야당 의원들을 몰아낸 후,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국가보안법 개정안은 야당을 지지하는 언론들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것으로, 시・읍・면장 선거를 폐지하고 정부가 이들을 임명하도록 한 지방자치법 개정안은 지방공무원들을 장악해 관권(官權)선거를 행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확신범’ 최인규
 
최인규(맨 오른쪽)는 1959년 3월 개각에서 내무부 장관이 됐다. 왼쪽에서 두 번째는 후일 국무총리를 지낸 신현확 부흥부 장관이다. 사진=조선DB
  3・15부정선거를 기획・지휘했던 최인규 당시 내무부 장관은 어떻게 보면 불운한 사람이었다.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해방 후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苦學)으로 미국 뉴욕대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그는 대한교역공사 이사장,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 상무 등으로 일하다가 1954년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했다. 그가 택한 지역구는 고향인 경기도 광주, 국회의장을 역임한 신익희(申翼熙)의 아성(牙城)이었다. 비록 낙선하기는 했지만, 35세에 야당 거물에게 당차게 도전했다는 점 때문에 그는 자유당의 주목을 받게 됐다. 덕분에 그는 1956년 외자청장(外資廳長), 1958년 교통부 장관으로 승승장구했다. 1958년 5・2총선 때에는 경기도 광주에서 소원하던 금배지도 달았다.
 
  1959년 3월 최인규는 교통부 장관 재직 6개월 만에 선거 주무(主務)장관인 내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4대 대선을 1년 앞두고 내무부 장관은 정권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는 핵심 요직이었다. 자유당 강경파와 온건파는 이 자리를 놓고 다투었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던 최인규에게 그 자리가 돌아간 것이다. 경제학도 출신으로 재무부 장관을 꿈꾸고 있던 최인규는 뜻밖의 인사에 당황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든 나의 생명을 거둬주소서”라며 통성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하자, 그는 주저 없이 3・15부정선거를 추진했다. 그는 옥중 회고록에서도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으면 한국은 공산화될 수밖에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3・15선거에 임한 것이 결과적으로 국가・민족에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확신범(確信犯)’이었다.
 
  최인규가 이런 외곬의 신념을 갖게 된 데에는 1956년 5・15대선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다. 그는 당시 ‘전향한 공산주의자’ 조봉암(曺奉岩)이 전체 유권자 표의 23.8%, 유효표의 30%에 해당하는 216만여 표를 얻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옥중 회고록에서 최인규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싸움은 같은 반공(反共)보수주의 진영의 당파 싸움이었다. 그러나 조봉암씨 경우에 있어서는 그 성질이 다르다”면서 “대한민국은 국군과 유엔군이 피 흘려 찾은 나라이다. 이것을 선거라는 방법을 통하여 공산당에게 넘겨줄 수 있는가”라고 주장했다.
 
  최인규는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공산당이나 야당이 무슨 선동을 하여도 이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길이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최선의 길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사실은 최인규에 대한 혁명재판소의 판결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피고인 최인규는 평소부터 이승만의 과거 독립투쟁 경력과 정치이념을 숭앙하여 오던바,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하여서는 이승만 및 그가 신임하는 이기붕을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으로 반드시 당선시켜야겠다는 굳은 신념하에 서기 1959년 3월 21일 선거관리장인 내무부 장관직에 취임하자 공무원 및 법정(法定)선거운동원이 아닌 그들의 가족들은 법령에 의하여 선거운동에의 참여가 금지되어 있음을 지실(知悉・모든 형편이나 사정을 자세히 앎-기자 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에 충실한 공무원의 충성심을 고양시키고 공무원 및 그 가족들을 선거운동에 동원함으로써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에 자유당이 승리하도록 해야겠다고 결의하고…〉
 
 
  혁명재판소 판결문에 나타난 3·15부정선거
 
1961년 8월 4일 열린 최인규 등 전 내무부 간부 4명에 대한 재판. 사진 오른쪽부터 최인규 전 장관, 이성우 전 차관, 이강학 전 치안국장, 최병환 전 지방국장. 사진=조선DB
  혁명재판소 판결문에 나타난 최인규의 부정선거 행태는 ▲ 공무원 및 그 가족들에게 이승만 지지 지시 ▲ 경찰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상대로 부정선거 모의 ▲ 자유당으로부터 부정선거 실행 자금 수령 ▲ 3・15선거 당일 투표 조작 지휘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판결문에 나타난 구체적 내용을 보기로 하자.
 
 
  공무원 및 그 가족들에게 이승만 지지 지시
 
  1959년 3월 21일 내무부 장관 취임 연설에서 내무부 전체 공무원에 대하여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 있어서는 자유당 후보자가 기필코 당선토록 선거운동을 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한 최인규는 이를 위해 먼저 내무부 산하 공무원들에 대한 ‘정신교육’에 들어갔다.
 
  혁명재판소 판결문에 의하면 최인규는 1959년 4월~1960년 3월 월초(月初)에 1회씩 거행되는 내무부 월례(月例)조회 석상에서 내무부 전체 공무원에게 앞과 동일한 내용의 지시를 되풀이했다.
 
  최인규는 또 1959년 6월경~11월경 서울, 인천, 수원, 광주(廣州), 대전, 청주, 춘천, 인제, 전주, 광주(光州), 담양, 대구, 부산, 진주, 산청, 함양, 제주 등지를 순회하면서 각 시・도・군청 회의실 또는 공설운동장 및 극장 등에서 각기 군・시 공무원 50명 내지 6000명을 집합시켜놓고 30분~1시간30분에 걸쳐 앞과 동일한 내용의 지시를 했다.
 
  더 나아가 최인규는 동료 국무위원들과 모의, 공무원친목회 및 공무원가족친목회를 만들어 공무원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자유당을 위한 선거운동에 동원하려 획책했다. 판결문은 당시 정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59년 3월 말 내지 4월 초경 오전 중 중앙청 내 국무회의 석상에서 당시 국무위원인 법무부 장관 홍진기, 농림부 장관 이근직, 국방부 장관 김정렬, 체신부 장관 곽의영, 교통부 장관 김일환 및 내무부 장관인 피고인(최인규-기자 주) 등 6인으로 구성되었던 소위 8인 위원회에 전체 공무원 및 그 가족들을 선거에 동원할 것을 제의하여 동인(同人) 등의 합의를 얻은 후 같은 장소에서 개최된 전체 국무회의에서 최종적인 합의를 얻어 국무위원 전원과 공동으로 전국적으로 각 동・시・읍・면 단위로 같은 해 4, 5월 중에 공무원친목회를, 같은 해 10월경에 공무원가족친목회를 조직게 하여 매월 1회씩 회합도록 하고, 각 관할 경찰서 사찰계(지금의 정보계-기자 주) 형사 및 동・시・읍・면장 등이 주동이 되어 전국 각지의 각급 공무원 10여만 명 및 그 가족에 대하여 자유당 입후보자의 당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하게 하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공무원 이외의 유권자에 대하여 각종 방법으로 자유당 입후보자를 위한 선거운동을 하게 하고…〉
 
 
  경찰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상대로 부정선거 모의
 
  3・15선거가 다가오면서 최인규는 전국 경찰 간부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직접 장관실로 불러 부정선거를 독려했다. 판결문을 보자.
 
  〈1959년 11월 28일경부터 같은 해 12월 20일경까지, 1960년 1월 초순경부터 같은 해 2월 하순경까지 사이에 거의 매일같이 오전 8시경부터 오전 11시경까지 전국 각 시・도 경찰국장, 사찰과장, 경찰서장 및 군수・시장・구청장 등을 지역적으로 구분하여 30, 40회에 걸쳐 매일 10명 내지 20명 정도씩 내무부에 소환하여 동일 군(시 또는 구) 내의 경찰서장과 군수(시장 또는 구청장)를 동시에 2명씩 또는 당일 소환된 전원을 일시에 내무부 장관실에 초치하여 대체로 피고인 이성우(내무부 차관-기자 주), 이강학(치안국장), 최병환(지방국장) 및 당시의 특정(特情)과장 이상국 입회하에 “여하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놓고 보아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국가대업 수행을 위하여 지시하는 것이니 군수・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전제한 다음 (가) 전출자(轉出者)・자연 기권자・매수(買收) 기권자들의 표(票)의 활용 (나) 3인조・9인조를 이용한 공개투표 (다) 완장부대의 동원 (라) 민주당 참관인의 매수 등 부정선거의 기본요강을 지시한 다음, 그 방법의 세부에 대하여서는 치안국장 및 지방국장의 지시를 받으라고 명하고…〉
 
  최인규는 이와 함께 경찰 간부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확실하게 장악해 부정선거에 동원하기 위해 이들에게 미리 사표를 받았다.
 
  〈전기(前記) 지령의 실행을 확보하기 위하여 부정선거지령을 계획대로 실천하지 못할 때에는 언제든지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할 목적으로 앞의 지령을 할 때에 각 도 지사・경찰국장・군수・시장・구청장・경찰서장・사찰과장 등의 사표를 제출할 것을 명하고, 그 명에 의하여 이성우(내무차관)・이강학(치안국장)・최병환(지방국장)은 앞의 지위에 있는 자들로부터 사표를 받음으로써 앞의 지위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부정선거 지령을 이천(履踐・실천)하게 하고…〉
 
 
  자유당으로부터 부정선거 실행 자금 수령
 
  부정선거에는 돈이 필요했다. 이 부정선거 실행자금은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이 산업은행을 동원해 마련했다. 판결문에 의하면 최인규는 1960년 2월 24일 이강학 치안국장과 함께 자유당 총무위원장 박용익과 만나 전국 경찰서를 자유당 입후보자의 선거운동에 이용할 목적으로 선거자금 11억1000만환(圜)을 경찰에 교부하기로 합의했다. 그다음 날 내무차관 이성우와 치안국장 이강학은 김영찬 산업은행 총재로부터 해당 자금을 받아 전국 경찰에 분배했다.
 
 
  3·15선거 당일 투표 조작 지휘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3・15부정선거 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기상천외한 부정을 저질렀다. 그 결과 판결문에 의하면, 중간개표 결과 경북 대구(당시는 대구가 경북에 속해 있었음)의 한 개표구(開票區)에서는 자유당 후보 이기붕이 5000표를 얻은 반면, 민주당 후보 장면은 32표밖에 나오지 않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그와 같은 득표율로 자유당 입후보자가 승리하게 될 경우 부정선거가 감행됐다는 것을 국내외에 폭로하는 결과가 될 것’을 우려한 자유당은 부랴부랴 자당(自黨) 후보자의 ‘득표율 삭감’에 나섰다.
 
  자유당 선거대책위원장 한희석으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은 최인규는 경비전화로 직접 경북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유당 입후보자의 득표율을 이승만 80%,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삭감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내렸다. 이강학 치안국장, 최병환 지방국장도 최인규로부터 지시를 받아 다른 지역에 하달했다.
 
 
  최인규의 최후
 
  3・15선거가 끝난 후 최인규는 사표를 내고 내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당초부터 3・15선거만 끝나면 사퇴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후임 내무부 장관은 법무부 장관이던 홍진기가 맡았다. 하지만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결국 4・19로 이어졌다.
 
  최인규는 일본으로 밀항(密航)하라는 지인(知人)과 가족들의 요청을 뿌리쳤다. “남자가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에 책임을 져야지 어디를 도망가느냐”면서….
 
  4・19로 상황이 악화되자 자택을 떠나 지인들 집을 전전하던 최인규는 1960년 5월 초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최인규는 민주당 정권하에서 진행된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및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 사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61년 5・16이 일어난 후 설치된 혁명재판소도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형(刑)이 확정된 후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최인규에게 중앙정보부 관계자가 ‘회고록’을 써보라고 권했다. 최인규는 20여 일간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3・15부정선거 직전까지의 상황을 단숨에 써 내려갔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군사정부는 그가 회고록을 완성하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1961년 12월 21일 최인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미완(未完)의 회고록은 부인 강인화씨에 의해 1984년 《최인규 옥중자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1990년대 이후 官權 개입도 거의 사라져
 
1992년 3월 22일 9사단 소대장이었던 이지문(오른쪽, 당시 24세) 중위는 “부대 내 부재자 투표에서 부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사진=조선DB
  4·19라는 ‘혁명’을 겪고 부정선거의 주범을 처단했지만, 이후에도 관권(官權)선거의 관행(?)은 계속됐다. 3·15부정선거와 같은 전국적인 부정선거는 되풀이되지 않았지만, 경찰이나 공무원, 정보기관 등이 알게 모르게 개입하는 관권선거는 198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여당이 선거를 앞두고 정부 혹은 지역기관장들과 대책을 논의하거나, 군(軍) 부재자(不在者) 투표 시 장병들에게 여당 지지를 강요하는 것 정도는 ‘여당 프리미엄’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왜곡된 관행들도 1990년대 이후에는 점차 사라져갔다. 1992년 제14대 총선 당시 이지문 중위의 군 부재자 투표 부정 폭로 및 한준수 연기군수의 관권 개입 폭로, 같은 해 제14대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부산 초원복집 사건 등은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은 최고위 정무직 공무원인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선거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헌법재판소는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기각하면서도 “여당을 지지하는 발언은 공직선거법상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으며 대한민국 선거법을 폄하한 것과 국민투표를 언급한 것은 각각 헌법을 위반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3·15부정선거와 같은 노골적인 관권 개입이나 공개투표, 개표 부정은 물론이고, 과거에는 관행으로 여겨지던 군 부재자 투표 시 여당 지지 유도나 부정, 공무원들의 선거 개입이나 여당과의 선거대책 협의 등이 사라지고, 심지어 대통령의 여당 지지 발언조차 금지되는 나라가 됐다.
 
 
  3・15부정선거와 울산시장 선거 개입의 닮은 점
 
2018년 울산지방경찰청장 재직 당시 ‘하명수사’로 야당 김기현 후보를 낙선하게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황운하 전 대전지방경찰청장은 4·15총선에 출마하겠다며 북콘서트까지 열었다. 사진=조선DB
  그런데 이렇게 지난(至難)한 과정을 거치면서 거의 사라졌던 선거에서의 공무원·경찰의 관권 개입 행위가 말끝마다 ‘적폐청산’을 외치는 문재인 정권 들어 슬그머니 되살아나고 있다. 2018년 지방선거 당시 송철호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청와대 관계자들이 광범위하게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아직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데다가, 정권이 수사를 막기 위해 담당 검찰 수사책임자들을 좌천시키고 검찰 조직 자체를 망가뜨리는 초강수를 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사건의 실체적(實體的) 진실이 과연 밝혀질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되었던 내용들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정황만 놓고 보면, 3・15부정선거와 흡사한 점이 많다.
 
  첫째, 입후보자가 최고 권력자의 최측근이다.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 출신으로 그의 총애를 받아 서울시장・국방부 장관・국회의장・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무척 가까웠다.
 
  송철호 울산시장은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현 대통령과 함께 부산・울산・경남 지역 ‘인권변호사 3인방’으로 불렸던 사람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4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송철호 후보를 위한 토크콘서트 자리에서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송철호 당선”이라고 할 정도로 송철호 후보를 아꼈다.
 
  둘째, 입후보자를 위한 선거캠프와 정부가 밀접하게 협력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최인규는 내무부 장관 취임 직후부터 공무원들에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충성과 자유당 후보 당선을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을 요구했다. 최인규는 자유당으로부터 경찰에 살포할 부정선거 실행자금을 수령했으며, 자유당은 이 자금을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통해 조달했다.
 
  울산시 공무원 출신으로 송철호 캠프에 몸담았던 송병기 현 울산시 경제부시장은 당시 새누리당 후보였던 김기현 울산시장 관련 비리를 문 모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행정관에게 제보했다. 백원우 민정비서관은 이를 경찰에 넘겼고, 이에 따라 ‘청와대 하명(下命)수사’가 시작됐다.
 
  셋째, 경찰이 하수인으로 동원됐다.
 
  최인규는 취임 직후 치안국장과 전국 지방경찰국장・경찰서장 인사를 단행해 경찰을 장악했고, 수시로 경찰 간부들을 소집해 ‘정신교육’을 하고, 부정선거를 독려했다. 선거를 앞두고는 지방경찰국장・사찰과장・경찰서장 등의 사표를 미리 받아 그들의 목줄을 쥐고 부정선거로 내몰았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하명수사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황운하 전 울산지방경찰청장은 물론 이용표 전 경남지방경찰청장(현 서울지방경찰청장)도 선거 직전 갑작스럽게 해당 지역으로 부임했으며, 부임 직후 야당 후보에 대한 수사를 벌여 선거 결과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황운하 전 울산지방경찰청장은 선거 전 여당 후보인 송철호 후보와 두 차례 만나기도 했다.
 
  만일 청와대가 선거에 개입할 목적으로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과 모의해 제보를 받은 후 이를 경찰에 내려보내 야당 후보를 수사하게 했다면, 조국 당시 민정수석비서관, 백원우 민정비서관 등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규정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피할 수 없다. 공직선거법은 공무원이 지위를 이용해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황운하 전 울산지방경찰청장・이용표 전 경남지방경찰청장도 청와대나 여당과 공모해 야당 후보 수사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마찬가지 처벌을 받을 수 있다.
 
 
  ‘4·19혁명 60주년’
 
  3・15부정선거를 저지른 최인규는 사형을 당했다. 당시 치안국장 이강학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무기(無期)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석방되어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이성우 내무차관은 징역 10년, 최병환 지방국장은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비록 소급입법에 의해, 그리고 군사정부하의 혁명재판소라는 비상법원에 의해 처단된 것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민주공화국의 선거제도를 파괴한 데 대해 준엄한 처벌을 받았다.
 
  반면에 지금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황운하 전 울산지방경찰청장은 대전지방경찰청장으로 영전되었다가 이번 4・15총선에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송병기 울산 경제부시장도 총선에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은 지난 1월 10일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청와대 자치발전비서관실(옛 균형발전비서관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도했으나, 청와대의 거부로 좌절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7일 신년사에서 “올해 ‘4·19혁명 60주년’과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으며 3년 전, 촛불을 들어 민주공화국을 지켜냈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긴다”고 한 것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이 정권 사람들은 석 달 후 무슨 낯으로 4・19 영령(英靈)들을 보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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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현    (2020-02-11) 찬성 : 1   반대 : 1
최인규 다시봤다. 이 사람 완전 상남자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과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애국심에 저지른 잘못이지만 비겁하지 않았고 책임질줄 알았던 그런면에서는 존경받을 사람이었네. 그런데 3.15 선거후에 사직했고 홍진기가 내무장관이 됐다면 4.19 발포명령을 최인규가 안한거 아닌가? 판결이 잘못된것 같다. 발포명령 한 자는 사형받아 마땅하지만 부정선거 주범은 사형감은 아닌데.

2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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