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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좌익의 ‘야만의 정치학’

좌익은 필연적으로 야만일 수밖에 없다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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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정권의 ‘적폐몰이’로 5명 자살… 부패 수사받아 자살한 노회찬에게는 훈장 수여
⊙ 죽음에 대한 黨派的 의미 부여는 자기 편이 아닌 쪽을 향한 적대적 공격성 내포
⊙ 원시에 대한 낭만적 향수는 야만에 대한 향수 동반… 공포정치·학살로 귀결
⊙ 탄핵 당시 박근혜 인형 목 자르더니, ‘미국대사 斬首 경연대회’까지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 《미래한국》 편집위원,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친북단체들은 2019년 12월 13일 서울 광화문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해리스 참수 경연대회’를 열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한 시인의 일갈이다. 거의 30년 전이다.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시인 김지하가 이 같은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그 얼마 전인 4월 26일 시위를 벌이던 명지대 학생 중 강경대가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규탄 집회가 이어지던 중 분신(焚身)자살이 잇따르기 시작하자 그 행태를 개탄한 것이었다. 김지하는 서두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게!”
 
  그리고 그는 그 ‘죽음의 굿판’ 본질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열사 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 생명말살에 환각적 명성을 들씌워주고 있다.”
 
  김지하가 누구인가? 그는 ‘386세대’에게는 민주화운동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끊임없이 맞서 7년여의 감옥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그가 지은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는 민주화의 열망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어 끊임없이 불렸다. 386세대라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고 노래 부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시를 노래 부르던 운동권에게 매서운 질타를 보낸 것이다.
 
 
  김지하의 외면당한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인. 사진=조선DB
  질타였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어 ‘깨달음’을 갖게 된 사람이 또 다른 의미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보내는 애끓는 호소였다.
 
  그러나 김지하 시인의 호소는 ‘그들’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 김기설의 분신자살이 있었고, 5월 10일에는 노동자 윤용하의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김기설의 분신자살 사건과 관련해서는 유서대필 의혹이 일었다. 그럼에도 ‘열사’ 호칭과 비장한 장례식은 빠지지 않고 이어졌다.
 
  그것을 예감하고 지적한 김지하에게 그들 진영으로부터 돌아온 응답은 쏟아지는 비난이었다. 그것으로 그들과 그는 인연이 끊어졌다. 이후 그에게는 ‘변절(變節)’이라는 낙인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낙인을 찍은 그들에게는 ‘죽음의 굿판’이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원했든 아니든, 의도했든 아니든 그러했다.
 
  2014년 세월호 사건, 거슬러 올라 2002년 미군 훈련 장갑차로 인한 여중생 사망 사건 등이 있었다. 그 사이 2009년에는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자살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성격은 다 달랐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여하튼 저들에겐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함의(含意)를 갖게 되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자신의 진영을 핍박받는 피해자로 정하고 정치적 상대방에 대한 공격에 정당성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세월호 사건과 여중생 사망 사건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고였다. 노무현의 자살은 자신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으로 인한 극단적 선택이었다. 그런데 저들은 전후 사정이 어떻든 그 모든 일을 자신의 적대적 상대방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몰아갔다. 지금의 문재인 정권은 그 행태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했다. 그런 만큼 그 면모는 과연 어떨 것인가?
 
 
  내재화돼버린 ‘죽음의 굿판’
 
  2019년 12월 1일 문재인 정권의 청와대 백원우 민정비서실 행정관이었던 특감반 수사관 1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자살이라 했다. 2018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기현 당시 울산시장에 대한 ‘청와대의 하명(下命) 수사’ 의혹에 연루돼 검찰 출석 조사를 몇 시간 앞둔 상황이었다. 상식선에서 짐작 가는 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 들어 이런 정치적 사망 사건은 이게 처음이 아니다. 이미 변창훈 검사,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 조진래 전 의원을 비롯해 5명의 인사가 자살했다. 문재인 정권의 적폐청산몰이 탓이었다.
 
  죽음의 행렬이다. 역대 어느 정권 시대에도 이렇게 짧은 기간에 정치적 사망 사건이 줄을 이은 적은 없었다. 줄을 잇는 연속은 결코 우발일 수 없다. 최소한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연이은 자살에도 그 몰이를 중단하지 않았다. 전혀 거리낌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마치 이 정권에는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가 씌워져 있는 듯하다. 어느새 속성으로 내재화(內在化)돼버린 ‘죽음의 굿판’이 드리운 그림자다. 그 그림자가 죽음의 행렬을 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자책감도 삼켜버린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경우도 있다. 죽음의 행렬에 그들 기준의 적폐가 아닌 한 인물도 더해졌다. 노회찬이다. 그는 2018년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투신 사망 상태’로 발견됐다. 역시 자살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정권의 응대는 소위 적폐 인물에 대한 경우와는 달랐다. 노회찬은 명백한 부패 혐의자였지만 대대적 추모와 함께 훈장까지 추서했다. 노회찬은 자기들 편이었기 때문이다.
 
  자살이든 사고든 죽음에 대한 당파적(黨派的) 의미 부여는 자기 편이 아닌 쪽을 향한 적대적 공격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가치 있는 죽음은 자기 편인 경우뿐이며 그렇지 않은 쪽은 그런 범주에 들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죽음의 진영(陣營)논리’다. 죽음이 진영에 갇히면 생명도 그렇게 된다. 죽음에 대해 보편적 엄숙함의 자세를 잃으면 생명도 경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인간성의 자리는 없다. 악마성이 고개를 내밀게 된다.
 
 
  反動으로 가는 赤色 파시즘
 
  “당신들 주변에는 검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그 유령의 이름을 분명히 말한다. 네크로필리아 시체선호증이다. 싹쓸이 충동, 자살특공대,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이다.”
 
  김지하 시인이 예의 칼럼에서 한 지적이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런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폭주가 계속되고 있다. 무능에 더해 갖은 부패와 사악한 정치적 부정행위가 드러나고 죽음이 줄을 이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좌익독재 체제의 구축(構築)을 위해서다.
 
  이 정권의 사람들, 특히 ‘386세대’들은 늘 ‘민주’와 ‘진보’를 자처했다. 그러나 그 민주의 깃발은 사기(詐欺)가 된 지 오래다. 그에 더해 아예 민주를 살해하고 있다. 진보도 아니다. 오히려 반동(反動)이다. 대한민국이 건국 이래 이룩한 모든 역사적 성취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그러면서 좌익 전체주의를 향해 가고 있다. 적색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피 냄새의 야만을 동반한다. 이들은 이미 그러했다. 일견 아이러니다. 그러나 이들 세력은 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386세대 운동권들은 자신들이 ‘진보(進步)’라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이 정의의 사도일 뿐만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낡은 것을 타파하는 진보 세력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믿음, 그것도 잘못된 믿음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믿음에는 독선(獨善)의 위험이 있다. 올바른 믿음이라 해도 그렇다. 그래서 끊임없는 자기 검증과 절제가 있어야 한다. 그래도 오판(誤判)과 과오는 피하지 못한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한계다. 그런데 잘못된 믿음이라면 그 독소는 치명적이다.
 
  ‘386’ 운동권 출신들은 오랫동안 양심과 정의(正義)의 화신(化身)인 양 행세했다. 그러나 30여 년이 흘러 ‘586’이 된 지금 이들은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됐음을 스스로 다 드러내고 있다. 그저 세월이 흐르면서 나타난 피하지 못한 쇠락이 아니다. 예정된 결말이다. 그들이 지금 보이는 타락상은 잘못된 믿음이 맞게 되는 예정된 추락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한국에만 있는 특이한 경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이런 상황은 사실은 반복이다. 지난 100여 년 동안, 더 거슬러 오르자면 근대 이래 동서 세계의 모든 근현대사가 보여준 역사적 증명의 반복이다. 바로 좌익이념의 문제다.
 
 
  공산주의는 ‘문명에서 벗어나는 길’
 
장 자크 루소.
  좌익은 늘 ‘진보’를 내세웠다. 근대적 좌익이 처음 등장할 때부터 그랬다. 역사상 최초로 ‘좌익(Left)’이라는 명명을 갖게 된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부터 그랬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는 등장할 때부터 더욱 그렇게 자처했다. 하지만 그 모든 진보 운운의 언설은 단지 그들의 주장이며, 그것을 따르던 이들의 헛된 믿음에 지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을 공상적 사회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과학적 사회주의라 했다. 과학이어야 진보일 수 있다는 함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과학과 진보를 자처했지만 사실은 과거에 대한 퇴행적(退行的) 향수(鄕愁)가 바탕에 있었다.
 
  계몽주의 이래 서구(西歐) 사조(思潮)에는 루소를 필두로 그런 믿음이 하나의 강력한 흐름을 형성했다.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고귀한 야만인’이었으며 문명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영원히 그런 황금기에 살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욕구는 일부일처와 사유재산 같은 부자유스러운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더 쉽고 평화롭게 충족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어떠한 폭력적 성향도 없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홉스는 “인간은 자연 상태에선 ‘만인(萬人) 대 만인’의 투쟁 상태에 처하게 되며, 《리바이어던》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했다. 그러나 루소는 홉스와는 반대로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고귀한 야만인’이었으며, 문명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영원히 그런 황금기에 살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루소에겐 문명은 타락이고 오염이었다. 그래서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좌익적 사조, 특히 마르크스주의는 그런 루소적 계보의 연장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사적(私的) 유물론(唯物論)의 ‘원시(原始) 공산제’는 루소적 의미에서의 상실된 황금향(黃金鄕)의 번안(飜案)된 설정이었다. ‘역사의 진보’라는 것을 내세우지만 마르크스주의와 그 아류(亞流)들에서 ‘사적 소유와 국가’라는 문명의 발생은 그 황금시대를 깨뜨린 죄악의 시작이며,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그 문명을 벗어나는 길’뿐이었다. 그게 공산주의다.
 
 
  ‘고귀한 야만’은 없다
 
  그러나 ‘고귀한 야만’은 없다. 원시적 자연 상태에 대한 아름다운 믿음은 정치적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역사적 증거, 수많은 고고학적 발견과 미개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은 문명 이전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보여준다.
 
  그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저서가 있다. 《원시전쟁(War before Civilization)》이라는 책이다. 저자는 미국의 고고학자 로렌스 H. 킬리(Lawrence H. Keeley)다. 1995년 미국 고고학협회에서 석기시대 연구상을 수상한 바 있는 고고학계 권위자다. 그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로 얻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원시전쟁의 빈번함과 잔혹함을 보여주며, 평화로운 원시의 모습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다. 원시적 황금향에 대한 동경(憧憬)의 심리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시간이 지나고 거리가 멀어지면 향수로 변하는 현상”일 뿐이다.
 
  저자는 선사(先史)시대의 유럽과 근대 유럽에서부터 세계 도처의 미개사회와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부족사회에 이르기까지를 치밀하게 비교 검토하며, 그 막연한 동경과는 다른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원시시대야말로 현대보다 전쟁이 훨씬 잦았으며, 더욱 잔인하고 치명적이었다는 것이다. 집단학살의 흔적이 역력한 수많은 고고학적 유적, 그리고 현대의 미개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은 문명 이전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인간이 그런 예측불허의 위태로움과 불확실성에서 벗어난 것은 질서와 제도라는 문명의 정치적 기재, 즉 국가가 등장하면서였다고 말한다.
 
  문명이 등장한 이후에도 인류 역사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인류는 멀지 않은 과거에 양차 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문명이 원시적 야만보다는 더 넓은 범위의 더 많은 수의 인간들에게 생존과 안전의 확률을 높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인구가 이렇게 많이 늘어난 것 아닌가?
 
  문명 그리고 국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시하면서 오히려 그 고마움을 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21세기라는 이 지구 문명의 시대에도 지구상 모든 인간이 문명과 국가라는 제도의 혜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도처에서 아직도 최소한의 국가 만들기에도 성공하지 못하거나 북한·베네수엘라 등과 같은 실패국가의 사례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문명 그리고 그 문명의 정치적 기재로서의 국가는 당연히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생존확률을 좀 더 높이기 위해 지난하게 노력한 결과다.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을 내세우며 문명적 진보의 선구(先驅)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문명적 성취에 대한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 다가올 미래의 황금향의 핵심이 사적 소유 없는 공산적(共産的) 관계로 설정되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생산력은 낮았지만, 어떻든 평등한 공산제를 가졌던 것으로 간주되는 상실된 과거가 향수의 대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오손도손한 공동체’에 대한 갈망은 아무리 미래로 설정해도 결국에는 ‘잃어버린 에덴’에 대한 향수가 된다. 그래서 그것은 진보가 아니라 정서적으로는 회귀(回歸)다.
 
  회귀적 정서는 반동의 씨를 품는다. 결국 진보가 아니라 반동이다. 그런데 문명에 대한 회의를 품은 반동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윤리적으로도 반문명적 파탄을 예약하게 된다. 윤리는 원시적 자연 상태의 산물이 아니라 문명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無도덕은 좌익의 본성
 
  마르크스주의는 표면적으로는 이성과 합리를 앞세운 계몽주의의 적장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그 안에 역설적이게도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반대편에 있던 낭만주의를 안고 있다. 그 뿌리에 문명이 아닌 원시에 대한 향수가 있기 때문이다.
 
  원시에 대한 낭만적 향수는 온건할 때는 자연과 목가적(牧歌的) 삶에 대한 찬양에서 멈춘다. 현대의 환경운동도 어떤 점에선 좌익적 낭만이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낭만은 적절한 선에서 멈추는 법이 없다. 원시에 대한 낭만적 향수는 야만에 대해서도 향수를 동반하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한번 격화되기 시작하면 행동에서 야만성에 대한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 야만에 대한 향수가 야만을 다시 부르는 것이다.
 
  특수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랬고, 계속 반복되었다.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는 계몽주의적 진보를 위해서라며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자코뱅의 돌격대 역할을 했던 ‘상퀼로트’의 야만적 폭력도 혁명을 위한 것으로 합리화되었다.
 
  그 이래로 좌익운동은 항상 폭력적 대중행동을 전통으로 이어갔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폭력혁명론을 아예 공식화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모든 좌익혁명에선 폭력적 대중행동의 선동과 공포정치가 당연한 게 돼버렸다.
 
  야만이었다. 그러나 좌익은 야만을 야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혁명적 열정으로 간주했다. 윤리적 파탄이었다. 그러나 좌익은 그런 윤리 따위는 소(小)부르주아적 감상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무(無)도덕은 그렇게 좌익의 본성이 돼버렸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합리화해도 된다는 생각이 경계의 고삐를 풀어버렸다. 여기에 이르면 야만을 넘어 악마적이다. 좌익은 이 괴물이 언제든 풀려날 수 있게 해버렸다.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 그리고…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앞세운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야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러시아혁명 이래 모든 좌익혁명은 그런 야만적 악마성의 난장을 보여주었다. 스탈린의 만행은 소련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수천만명을 굶어 죽게 만든 대약진운동의 대실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문화대혁명(문혁)이라는 홍위병(紅衛兵) 소동을 벌여 중국을 10년 대동란의 수렁에 빠뜨렸다. 그 마오쩌둥을 추종한 캄보디아의 폴 포트는 자국민 4분의 1을 학살하는 ‘킬링 필드’를 자행했다. 이 모든 것이 소위 사회주의 낙원을 향한 ‘진보’라는 기치 아래 행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비(非)사회주의권 서구 사회에선 그것을 부인하고 좌익이념을 찬양하는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쓸모 있는 바보들’의 행렬이 계속 이어졌다. 저명한 역사가로 일컬어지는 E. H. 카도 끝끝내 스탈린의 만행을 부인했다. 사르트르는 홍위병의 난동에 지나지 않았던 마오쩌둥의 문혁을 찬양했다. 그 외에도 이런 예는 줄을 잇는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야만에 지나지 않던 문혁과 홍위병에 대해 찬양을 늘어놓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리영희의 책을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했다.
 
  그런데 리영희만도 아니었다. 수많은 소위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좌익적 논리로 기울었다. 386세대 운동권 패거리들은 진보를 떠들며 짐짓 행세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야만적 악마성에 대한 경계를 상실한 위험한 좌익적 낭만이었다. 그래도 비중이 적을 때는 어설픈 겉멋일 수 있다. 하지만 세력이 되면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된다.
 
  이 정권은 그 위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 세력은 끊임없이 ‘죽음의 굿판’을 이어왔다. 그러더니 이제는 수많은 이를 정치적 죽음으로 몰고도 거리낌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난동 당시 목을 자른 인형을 내걸고 설치더니 마침내는 종북(從北) 좌익단체가 ‘미국대사 참수(斬首) 경연대회’를 열겠다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정권은 수수방관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터지기 시작한 문제였지만 이제는 더욱 적나라해지고 있다. 수많은 좌익혁명의 난장에서 나타난 야만적 악마성의 폭주가 한국에서도 고삐가 완전히 풀려가는 양상이다.
 
 
  인간성을 집어삼키는 야만적 악마성
 
2018년 11월 22일 충남 아산에 있는 유성기업에서는 이 회사 노무 담당 상무가 민노총 금속노조 조합원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
  지난 세월 무능한 자들의 반독재 민주의 깃발 이면에서 ‘죽음의 굿판’을 마다하지 않는 불순한 자들이 세력을 키웠다. 그러더니 그들은 드디어는 그 민주의 깃발도 탈취했다. 그렇게 민주의 깃발을 뺏은 자들이 자신을 진보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반문명적 반동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좌익이 본질적으로 그렇듯 하나의 야만이다.
 
  좌익의 야만적 폭주는 결코 어쩌다 나타나는 돌출적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좌익의 본성이자 숙명이다. 이상주의를 내걸고 그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품고, 그것을 위해 분투하는 것은 짐짓 매우 인간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야만적 악마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마다하지 않는 태도는 결국 야만적 악마성이 인간성을 집어삼키게 만든다.
 
  동서의 지난 현대사는 좌익적 야만이 결국 어떻게 몰락하는지 보여주었다. 지금 한국의 이들 패거리도 그 운명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의 몰락은 예정된 숙명이다. 하지만 그 마침표를 찍는 것은 그들 자신일 수는 없다. 마무리는 그 야만적 악마성의 퇴행과 난장에 맞서는 이들의 몫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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