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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0·26 40주년 - 朴正熙, 오해와 진실

박정희 시대의 안보위협은 허구였나?

‘한반도의 베트남化’ 위기를 국가발전의 기회로 만들다

글 :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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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소련 견제 위해 중국에 접근하면서 닉슨독트린 발표, 주한미군 철수
⊙ 北, 1·21사태, 울진·삼척 공비침투 등 감행… 통혁당 등 지하당 구축
⊙ 유신은 나라 안팎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대응… 중화학공업, 자주국방 이룩

金光東
1963년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정치학 석·박사 / 한국발전연구원 부원장, 자유민주연구학회장,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現 나라정책연구원장 / 저서 《4·19와 5·16》 《국가전략산업에 대한 국가의 정책과 역할의 변화》 《박정희 새로 보기》(공저) 등
1968년 1·21사태 당시 생포된 무장공비 김신조. 북한은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을 모델로 삼아 게릴라투쟁을 강화했다.
  한국 현대사에 1969년은 안보질서의 대전환이 진행되는 시기였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軍)이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믿기 어려운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더 이상 아시아에 군사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제부터 아시아 국가들은 스스로를 방위해나가야 한다”는 이른바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내놓은 것이다. 닉슨은 1967년 선거운동 때부터 베트남의 미군은 물론이고 한국 등 아시아에서 미군을 철수시킨다는 정책을 명확히 밝혔다. 공산제국(共産帝國)의 군사도발과 침략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미군 없이 각국이 스스로 지키라고 하는 것은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상 중국·북베트남·북한 등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대만과 남베트남, 한국을 존망의 기로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주한미군은 휴전선과 수도 서울 사이에 보병 2개 사단을 배치해 중국과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는 보루 역할을 해왔다. 6·25전쟁에서는 3만4000명의 미군이 희생됐다. 그런데 이제 한국 안보의 중심축이던 미군 없이 국제공산주의의 도전에 스스로 맞서라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연이어 닉슨 정부는 서울 북방에 주둔하던 미 제7사단과 제2사단을 철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소련·중국의 지원을 받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간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고, 중공(공산중국)은 대만에 포격을 계속하는 상황이었지만, 미국은 1971년 2월 미 제7사단 철수를 완료했다. 그 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하야(下野)하면서 제2사단 철수는 일시 중단됐다. 하지만 1976년 미국 대선(大選)에서 지미 카터 후보는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발표했고, 당선되자마자 1982년까지 한국의 모든 미군 지상군 철수를 완료 짓겠다고 발표했다.
 
 
  닉슨독트린과 미국의 세계 전략
 
1978년 12월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에 따라 미2사단 9연대 2대대가 철수했다.
  닉슨과 카터의 미군 철수 계획은 6·25 직전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는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했던 애치슨라인(Acheson Line) 발표와 유사했다. 실제로 닉슨독트린에 따라 베트남에서 미군이 떠나가자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전면 침략전쟁을 벌여 결국 남베트남을 붕괴시켰다. 미군 철수는 대한민국을 공산제국과 북한의 침략전쟁 제물(祭物)로 내모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1969년 미국이 아시아 철군을 결정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제1의 적(敵)인 소련에 맞서기 위해 중국을 활용해야 한다는 전략 변화 때문이다. 둘째, 반전(反戰) 여론에 밀려 베트남전에서 그나마 명분을 차리면서 출구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과 중국은 심한 갈등관계에 있었다. 50년 전의 중국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결코 미국에 직접적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소련을 포위하고 압박하는 차원에서 닉슨 정부는 중국과 데탕트를 조성하고 아시아에서 중국의 역할 확대를 용인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그에 따라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키신저와 닉슨의 중국 방문이 이어졌다. 미국은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고 중국공산당 정부와의 국교 수립(1978)으로 나아갔다. 중국은 대만을 대신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됐다.
 
  미국의 전략은 약 20년 뒤인 1991년 소련과 동구공산권이 해체된 것을 보면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다시 본다면 중국이라는 새로운 위협을 키운 셈이 되고 말았다.
 
  당시 중국은 선거가 반복되는 민주주의 국가를 유린하는 방법을 꿰뚫고 있었다. 전쟁에 대한 염증으로 군사적 위협과 도발 앞에 미국이 취약하다는 것을 읽어낸 중국은, 북한을 내세워 1968년 내내 미국을 압박하는 군사도발을 감행했다. 지속적 군사충돌로 미국을 위협하는 한편, 미군이 철수할 때만 아시아에서 평화가 정착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하여 보냈다. 북한도 ‘아시아에서 미군이 빠져나가게 되면 북한 주도의 공산통일을 완수할 수 있다’는 전략에 따라 노골적 군사도발을 자행하는 한편, 미군 철수를 목표로 한 ‘평화협정’ 공세를 폈다. 북한은 남북한이 각각 군인 수를 10만명 이하로 축소하자고 제안하는 한편,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평화체제가 구축될 수 있다는 선동에 박차를 가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이 된 중국은 유엔군 사령부 해체를 내용으로 한 결의안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게릴라 침투와 지하당 공작
 
재판정에 선 통혁당 관계자들. 제일 왼쪽이 당시 육사교관이던 신영복이다.
  일방적 미군 철수를 보며 박정희 정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박정희 정부는 번영사회의 토대를 만들고자, 1965년을 ‘일하고 전진하는 해’로 정했다. 1966년은 ‘또 일하는 해’, 다시 1967년은 ‘조국 근대화의 해’, 1968년은 ‘건설의 해’로 정했다. 미군 철수는 번영사회의 기반이 와해될 수 있는 청천벽력과 같았다.
 
  주한미군 철수를 유도하기 위한 북한의 대남 군사공세는 날로 격렬해졌다. 베트남에서의 전쟁처럼 한반도에서도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대규모 도발의 첫 시작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 부대의 청와대 습격이었다. 청와대 습격 이틀 뒤인 1월 23일, 북한군은 4척의 초계함과 2대의 미그기를 동원해 동해 공해상에서 정보수집 중이던 미 함정 푸에블로(Pueblo)호를 납치했다. 그때 승선한 83명은 11개월이나 억류되었다. 미국은 북한과 송환협상을 계속해야 했다. 세 번째 도발은 그해 10월 울진·삼척 지역 일원에서 게릴라전으로 펼친 북한군의 유격전으로 나타났다. 북한군 124부대 특수부대 120명이 울진과 삼척, 정선 지역에 침투했다. 두 달여 동안 지역민이 학살되고 군경(軍警) 49명이 전사했다.
 
  1968년을 전후해 휴전 후 10여 년 동안 숨을 죽이며 세력을 키워오던 공산주의자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기회가 도래했다고 본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통일혁명당 사건이다. 북한 대남사업총국으로부터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활동하던 통혁당의 김종태·김질락 등 주요 멤버는 북한에 4회에 걸쳐 밀입북해 밀봉교육을 받고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후 반정부·반미투쟁에 나섰다. 신영복·박성준 등 158명이 여기에 가담했다. 북한은 통혁당의 공로를 인정하여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를 부여했고, 그의 이름을 따 해주사범학교를 김종태사범학교로 개칭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존경한다는 신영복은 당시 육군사관학교 강사로 육사생을 교육 중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 국무총리를 지낸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도 통혁당의 중심인물이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
 
  한국이 중공이나 북한 같은 체제로 떨어지고 베트남 같은 운명으로 내몰린다는 것은 어렵게 출범해 6·25전쟁까지 겪으며 지켜낸 자유사회의 종식을 의미했다. 국제사회로부터 격리된 전체주의 사회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안보가 항상적(恒常的) 위험에 있는 나라에서는 당연히 10년, 20년을 내다보고 저축·투자하는 사람이나 기업을 만드는 사람도 나올 수 없다. 이제 막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경제발전도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따라서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부에 떨어진 절체절명의 당면과제란 바로 미군 없이도 나라를 지켜낼 수 있는 확고한 안보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것은 박정희 정부의 확고한 방침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안보 강화는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군사적 안보 역량의 강화였다. 둘째는 중화학공업을 비롯한 산업 역량의 강화였다. 마지막으로는 10월 유신 체제를 통한 정치 안정의 확립이었다.
 
  먼저 박정희 정부는 1·21 청와대 습격과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을 계기로 250만명 규모의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1975년에는 1960년도부터 폐지된 학도호국단 제도를 부활시켜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와 함께 박정희 정부는 병기(兵器)산업을 포함한 산업 역량의 확충에 나섰다. 이는 근본적으로 중화학공업 기반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73년 1월의 중화학공업 선언이었다. 1978년에는 세계 7번째로 지대지(地對地) 탄도미사일인 백곰의 개발을 성공시켰다. 궁극적으로는 핵무기 보유 역량까지 추진했다.
 
  이렇게 방위산업을 육성했지만, 결코 무기산업에 집중한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들 역량도 갖추면서 세계시장에서 비교우위를 갖춘 기계·전자·석유화학 등의 중화학공업 역량을 키워가는 것을 지향했다.
 
 
  유신, 국가 생존을 위한 대응
 
  흔히들 장기집권 체제의 구축으로만 거론되는 1972년의 ‘10·17특별선언’, 즉 유신체제 수립도 기본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바꿔치기’적 타협에 대응하여 확고한 안보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10·17선언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긴장완화가 아직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긴장완화라는 이름 밑에 이른바 열강들이 제3국이나 중소국가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는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면서 미중(美中)의 접근에 대해 “아시아의 기존 질서를 뒤바꾸는 것이며, 지금까지 이곳의 평화를 유지해온 안보체제마저 변질시키려는 커다란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10월유신’은 분명 대통령 권한의 강화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장기집권 문제를 넘어서는 국가 차원의 대응이었다. 민주주의라는 잣대를 기준으로 이를 비판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민주공화제가 막 출범하고 또 공산주의라는 폭풍 앞에 촛불처럼 내몰린 1970년 전후의 위기상황을 보지 않은 결과이다.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던 다른 어느 나라도 박정희 정부만큼 민주주의를 유지하지 못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북한·베트남·홍콩 등 동아시아나 중동(中東)국가에는 아직 의회도 없고, 복수(複數)정당제적 자유선거도 없다.
 
  당시 대한민국의 당면 문제는 민주주의 문제도 권위주의 문제도 아니었다. 공산주의의 확장이란 격랑 앞에서 국가의 생존 자체가 문제였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안보 강화를 넘어서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해, 대한민국을 비슷한 처지에 있던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차원이 다른 나라로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닉슨과 카터 대통령이 추진한 미군 철수, 중국·북한 등 공산전체주의국가의 위협이라는 위기에 맞서는 과정은 대한민국의 ‘예외적 성공’을 만드는 결정적 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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