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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10·26 40주년 - 朴正熙, 오해와 진실

박정희는 환경을 파괴했나?

‘세계 최초로 산업발전과 환경보호정책을 동시에 실시’한 지도자

글 :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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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경제개발5개년계획 착수 다음 해에 ‘공해방지법’ 제정… 일본보다 4년 앞서
⊙ “한국전쟁 30년 만에 남한은 황무지(wasteland)에서 산림국가(woodland)로 변모” -《뉴욕타임스》
⊙ “지금은 경제건설부터 먼저 할 때… 공해방지 시설은 앞으로 공장들이 번 돈으로 하면 돼”(김학렬)

全相仁
1958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미국 브라운대학 사회학 석·박사 /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한국미래학회장 역임 / 저서 《공간 디자이너 박정희》 《공간으로 세상 읽기: 집·터·길의 인문사회학》 《아파트에 미치다》 《편의점사회학》
1972년 식목일에 조림관계 전시장을 돌아보며 산림녹화와 관련한 지시를 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산업화와 산림녹화를 동시에 달성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대해 적잖은 국민이 갖고 있는 오해 가운데 하나는 급속한 경제개발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이 크게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한국사에서 ‘환경문제’의 중요성을 처음 인식하고 이에 대한 처방과 해결을 위해 노력한 최초의 지도자였다.
 
  박정희를 반(反)환경론자로 치부하는 데는 두 가지 잘못된 전제가 있다.
 
  첫째는 환경파괴가 산업화(産業化)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인류 환경사(環境史) 전체를 조망해보면 농업혁명이 자연생태계에 끼친 폐해가 더 컸다.
 
  둘째는 개발과 환경의 공존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선입관(先入觀)이다. 이러한 ‘환경근본주의’는 비현실적 수사학(修辭學)일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구래(舊來)의 가난에서 구조적으로 벗어나는 유일한 계기는 농업사회에서 벗어나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것에 있다고 믿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환경에 부담이 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정확히 예견했다. 서구(西歐)의 근대화 과정을 보면 어느 시점에 ‘인구문제’가 발생하고 ‘도시문제’가 대두한 것처럼, 환경문제 등장 역시 하나의 보편적 법칙이었다. 박 대통령의 탁월한 역량 가운데 하나는 이를 미리 알고 대비했다는 점이다. 환경문제에 관한 한 그는 한편으로는 선진국의 경험을 배운 ‘학습자’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 능동적으로 적용한 ‘실천가’였다.
 
 
  일본보다 4년 앞서 공해방지법 제정
 
공해방지법 공포안. 박정희 정부는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 착수와 거의 동시에 공해방지법을 제정했다.
  우리나라에서 환경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제기된 것은 1960년대 초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한 이후부터다. 그 이전에는 환경문제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라기보다 그것의 원인제공자에 해당하는 산업화가 부재(不在)했기 때문이다. 196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 관련 법률이라 할 수 있는 ‘공해방지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 바로 이듬해였다. 말하자면 경제개발과 환경정책은 우리나라의 경우 거의 동시에 출발한 셈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환경법인 공해방지법은 “공장이나 사업장 또는 기계·기구의 제조업으로 발생하는 대기오염, 하천오염, 소음·진동으로 인한 보건위생상의 피해를 방지해 국민보건을 향상”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4년 뒤에 공해법이 제정됐다. 물론 공해방지법은 선언적인 성격이 강했다. 규율 내용이 미흡했을 뿐 아니라 1967년에야 시행규칙이 제정되고 보건사회부에 담당 환경위생과(環境衛生課) 공해계(公害係)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공해방지법이 1968년 ‘로마클럽’이 결성되기 5년 전에 제정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1972년 로마클럽은 환경오염과 자원고갈 등을 이유로 인류의 경제성장 추세가 100년 내에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측한 《성장의 한계》를 출간했다. 같은 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 인간환경회의에서 역사상 최초로 환경문제가 의제로 채택되었고, 유엔 환경프로그램도 설립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와 같은 선진국 주도의 지구적 환경사와 한국의 환경사 사이에 두드러진 격차나 시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개발 진도에 비례해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1971년 새로운 공해방지법이 발효되어 오염물질 배출 시설의 경우 사전에 보건사회부 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등 사전(事前)규제에 중점을 두기 시작한 것이 그 근거이다.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
 
울산의 상징 공업탑에는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가는 그날’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럼에도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서 우리나라의 환경정책이 대체로 ‘약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환경정책은 우선순위에서 국토정책, 교통정책, 도시정책에 밀리던 측면이 있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기세가 당시 사회 분위기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도시 울산에 세워진 ‘공업탑’에는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을 염원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에서 했던 박 대통령의 치사(致辭) 가운데 일부이다. 비(非)환경 정부 부처들의 환경의식도 낮은 편이었고, 환경문제에 대한 기업이나 일반 국민들의 인식도 높지 않았다. 게다가 환경단체들의 전문지식도 부족했고, 환경운동 자체가 박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반대 목적일 때가 많았다.
 
  우리나라가 고도경제성장 과정에서 몇 건의 환경 관련 사건·사고를 경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과거 선진국의 경험에 비교하여 결코 재앙적 수준이 아니었고, 오히려 환경정책의 선진화를 모색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경제개발 초기부터 환경 마인드가 도입된 데다가 지식인이나 시민단체에서 환경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함으로써 환경을 일방적으로 파괴하는 성장 위주 경제정책은 설 땅이 좁았다.
 
  박 대통령은 개발과 환경을 조화시키는 데 있어서 후발(後發) 산업화 국가로서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예컨대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공해 발생 요인이 없는 전자산업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단을 바닷가로 옮겼다. 또한 제철과 석유화학 등 대규모 공해 배출 업체는 따로 분리시키는 반면, 비철금속·제련 등 상대적으로 공해 배출이 작은 업체는 한곳에 모아놓고 집중관리하도록 했다.
 
  1977년 12월, 박정희 정부는 종전의 공해방지법만으로는 전반적인 환경 보전이 어렵다고 보고, 좀 더 종합적인 환경오염방지 제도를 수립하고자 환경보전법을 제정하였다. 이는 1963년 집권 초기에 공포한 공해방지법을 대체한 것이다. 이 두 개 법률은 경제개발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선방한’ 우리나라의 환경정책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박정희 시대의 환경정책은 1980년 이후 우리나라가 ‘환경선진국’이 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었다. 환경영향평가 제도의 도입, 환경보호의 사전 예방적 접근, 미래 세대의 환경권 보장 등 환경문제에 대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선진국과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1980년 보건사회부 내 환경청 설치와 헌법상 환경권 조항 신설, 1990년 환경처 독립·승격 및 환경보전 원년 선포 등이 있었다.
 
 
  “‘대한민국 산’ 세계는 기적이라 부른다”
 
  박정희 시대 환경정책은 비단 산업화에 대한 대응으로서만 구상된 것은 아니었다. 환경정책과 관련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탁월한 업적으로서 산림녹화와 그린벨트를 결코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산림은 조선조 말기에 이미 황폐화되어 있었다. 인구성장에다 특히 온돌 보급에 따른 연료수요 증가 때문이었다. 일제(日帝)는 산림조성과 산림수탈을 병행하였으나 태평양전쟁을 치르며 송진 채취 등 수탈 쪽을 강화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체 산림면적의 30% 이상이 피해를 입었으며,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난방과 취사용 연료 대부분을 산에서 구했다.
 
  1960년대 초만 해도 ‘헐벗은 민둥산 천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경관(?)이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이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은 있었다. 1946년 미군정(美軍政) 당국은 4월 5일을 식목일로 제정하고 1949년부터 그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산림녹화정책이 본격화된 것은 역시 박정희 정부에서였다. 1962년 산림을 보호·육성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하여 ‘산림법’이 제정된 것이다. 이어서 1967년에는 농림부 외청(外廳)으로 산림청을 발족하였다. 경제개발계획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산림정책의 기조도 소극적 산림보호에서 적극적 산림산업으로 변화했다.
 
  1973년 박 대통령이 발표한 ‘치산녹화10개년계획’(1973~1983)은 그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는 산림정책을 국토종합개발계획과 연계한 것으로, 산림청 소속이 농림부에서 내무부로 바뀐 것이 가장 눈에 띄었다. 이는 산림녹화사업에 내무부 산하 행정력을 총동원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또한 이는 당시 새마을운동과 병행되어 국가 주도라기보다 ‘국민식수운동’의 성격을 가졌다. 치산녹화10개년계획은 목표를 4년 앞당겨 1978년 완료되었다. 2006년에 식목일이 국가공휴일에서 제외가 되고, 2005년에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기존 ‘산림법’이 폐지된 것은 산림녹화사업의 대성공을 웅변하는 훗날의 방증이다.
 
  1985년 7월7일자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한국전쟁 30년 만에 남한은 황무지(wasteland)에서 산림국가(woodland)로 변모”하였다고 보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006년 산림청은 개청 4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산’ 세계는 기적이라 부른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하지만 산림녹화에 대한 박 대통령의 공헌은 이념적인 잣대를 통해 의도적으로 외면·무시되기 일쑤였다. 예컨대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리영희는 자서전 《역정》에서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체험에 입각하여 “치산치수에 성공한” 북한에 높은 점수를 주면서도 박정희 정부의 산림녹화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의 산림 파괴는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린벨트 개념 아는 사람 거의 없었다
 
  산림정책과 무관하지 않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또 하나의 환경정책 걸작은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다. 그린벨트 정책은 19세기 영국의 도시계획가 에버니저 하워드(Ebenezer Howard)가 제안한 것으로서 도시 성장을 제한하기 위해 도시를 둘러싼 농업지역을 보존하는 것이 목적이다.
 
  박 대통령은 일찍이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그린벨트가 갖고 있는 공간적 가치에 눈을 떴다. 여기에 추가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그린벨트를 자신의 산림녹화정책과 연계시켰다. 그가 볼 때 당시 우리나라 도시 주변 산에는 나무가 없어 홍수나 가뭄, 산사태 등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만 해도 그린벨트는 행정·법률 용어가 아닌 학술 용어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린벨트라는 개념을 박 대통령 지근(至近) 중 아는 이도 거의 없었다. 한국의 그린벨트 정책은 이런 점에서 그의 독창적 작품이었다.
 
  1971년 7월, 건설부는 서울 외곽을 그린벨트로 전격 지정하였다. 그것은 서울 중심부에서 반경 15km 밖 2~10km 둘레(467km2, 1억4126만 평)를 묶은 것으로 당시 서울 면적(605km2)의 77%에 달했다. 그 이후 그린벨트는 계속 확장하여 첫해에는 수도권 지역에 1557.5km2가 지정되었고, 1977년까지 전 국토의 5.4%인 5397.11km2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였다. 박 대통령 생존 시 그린벨트는 ‘신성(神聖) 불가침’ 영역이었다. 5공(共), 6공 때까지만 해도 그것은 성역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원주민들의 반발과 도시개발 압력에 밀려 그린벨트의 틀은 하루가 다르게 흔들리고 있다.
 
 
  “환경 파괴의 핵심 요인은 빈곤”
 
  현재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의 환경 선진국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환경문제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능력을 망각하거나 객관적 위치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무엇보다 ‘세계 최초로 산업발전과 환경보호정책을 동시에 실시’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박창근, 《환경보호대통령 박정희》)
 
  “우리나라는 서구 산업국가들과 비교해 환경오염 심화의 기간이 짧았으며, 산업화 초기부터 오염 배출이 적은 첨단기술과 시설에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심각한 환경오염의 발생을 상당 부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홍욱희 역자 후기, J.R.맥닐, 《20세기 환경의 역사》). 요컨대 박정희 대통령은 환경과 개발은 결코 둘이 아니라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박정희 시대가 이룩한 경제성장이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 열쇠가 되기도 한다. “환경파괴와 환경오염의 핵심 요인은 (산업화가 아니라) 전쟁과 빈곤”이라 말하는 맥닐은 이런 점에서 한국이 왜 환경문제 해결에 있어서 모범국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한국은 1960년대만 해도 아프리카 가나보다 가난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생태적 혼란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가나보다 훨씬 더 좋은 위치에 있다. 대한민국이 가나보다 훨씬 더 부유하기 때문이다.
 
  이는 1971년 8월, 공해방지법 시행령이 경제장관회의에 처음 상정되었을 때 당시 김학렬 부총리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공해문제가 중요한지는 나도 알아. 그러나 지금은 경제건설부터 먼저 할 때야. 공해방지 시설은 앞으로 공장들이 번 돈으로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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