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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民族’을 다시 생각한다

근대 이전에 ‘韓民族’이란 인식이 있었는가

철저한 신분제 사회… ‘하나의 민족’ 의식 성립 어려워

글 :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이승만학당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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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민족주의는 동일 혈연이라는 종족적 특질에 바탕,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사례
⊙ 신라의 骨品制, 고려의 8祖 世系 증명 요구 이어 조선시대 들어와 신분에 따른 차별 보편화
⊙ 15~16세기 노비의 인구 비중 30~40%에 달해

李榮薰
1951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 /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한국고문서학회 회장, 한국경제사학회 회장 역임. 현 이승만학당 교장 / 저서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대한민국 이야기》 《한국 경제사》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 수상 하성학술상(1989), 청람상(1990), 경암학술상(2013), 월봉저작상(2017)
한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단군. 단군에 대한 기록이 나온 것은 고려 중기 이후의 일이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신기욱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 in Korea)》에서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혈연에 기인하는 단일 민족주의 의식”이며 “한국처럼 아직도 강력한 단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가나 민족은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라고 강조하였다. 사실 그대로이다. 오늘날 한국인은 “우리 모두는 단군(檀君) 할아버지의 자손으로서 같은 피붙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한글학자 최현배(崔鉉培)는 ‘민족’이라는 말이 일본에서 수입되자 그에 대항해서 ‘겨레’라는 말을 만들어냈는데, 그 어원은 ‘피붙이’라고 한다. 30년 전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이래 ‘한겨레’라는 신조어가 널리 퍼졌다. 정확한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 말을 우리 한국인은 ‘하나의 피붙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피붙이 의식은 북한 주민에게까지 어렵지 않게 확장되어 ‘우리 민족끼리’라는 통일의 구호로 외쳐지고 있다. 그렇게 한국 민족주의는 동일 혈연이라는 종족적 특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신기욱 교수의 주장처럼 그것은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현상이다.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원은?
 
조선왕조에서는 단군을 사직단에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사진은 2016년 개천절에 사직단에서 열린 개천대제의 모습. 사진=조선DB
  15~19세기 조선시대에도 ‘민족’ 내지 ‘민족주의’가 있었는가.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원은 언제부터인가. 이런 질문이 제기되면 역사학자들은 대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민족주의라 할 만한 공동체 의식이 원형(原型)으로 성립했다고 대답한다. 고구려・백제・신라는 말이 같지 않았다. 특히 고구려와 신라가 그러하여 통역을 둘 정도였다. 통일 이후 신라의 방언이 국어로서 일반화하였다. 신라는 삼한(三韓)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는데, 이는 고려의 삼한일통(三韓一統)이라는 역사의식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모두는 동일의 언어・역사・문화에 바탕을 둔 공동체(共同體)”라는 의식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고려가 원(元) 제국에 복속한 시기에 그때까지 구전(口傳)되어 온 단군신화가 문자로 채집된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였다. 이후 조선왕조도 단군신화를 계승하여 단군을 사직단(社稷壇)에서 올리는 제사의 한 대상으로 받들었다. 이상이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모범 답안이다.
 
  나는 신라・고려・조선의 지배계층이 원형으로서 민족주의라 할 만한 공동체 의식을 보유했다는 주장을 죄다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일 터이다. 내가 불만인 점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각 시대의 지배계층이 소유한 공동체 의식에는 단군신화로 상징되는 것 이외의 다른 종류도 있었다. 예컨대 조선의 양반 관료는 그들의 나라를 ‘소중화(小中華)’라고 간주하였다. 그것도 일종의 공동체 의식인데, 그 함의는 단군신화와 대척적(對蹠的)이다. 다시 말해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공동체 의식도 내용과 역할을 달리하면서 변화해 왔는데, 그 점이 전체적으로 해명되고 있지 않다.
 
  둘째, 지배계층의 공동체 의식이 포괄한 범위에 관한 문제이다. 신라・고려・조선은 신분제 사회였다. 지배신분은 과연 하층 서민을 그들과 동류(同類)로 의식하였을까. 하층민에 대해 지배신분이 보유한 비천(卑賤) 감각을 능가할 만큼의 공동체 의식이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해명은 아직 시도된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셋째, 한국 민족주의가 지니는 종족적 특질과의 관련성이 추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기욱 교수의 지적대로 세계적으로 희귀한 현상인 만큼,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적 전개는 “우리 모두는 하나의 피붙이”라는 종족주의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기존의 통설은 언어나 역사의식과 같은 문화의 요소를 중시했을 뿐이며, 그 점에서 공허하게도 핵심을 놓쳐왔다. 이하 이 세 번째의 관점에서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적 계보를 간략하게 소묘한다.
 
 
  骨品과 8祖 世系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혈통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혈통이 고귀하면 사회적 지위도 고귀하고, 혈통이 비천하면 사회적 지위도 비천하였다. 고귀한 혈통이라도 거기엔 등급이 있었다. 6~7세기에 성립한 신라의 골품제(骨品制)는 혈통과 신분의 관계를 묶은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다. 골품제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논의는 한결같지 않다. 어쨌든 신라인들은 성골(聖骨), 진골(眞骨), 6~4두품(頭品), 3~1두품으로 신분을 구분하고 차별하였다. 법흥왕에서 진덕왕에 이르는 성골 왕족은 피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사촌 간에 또는 숙질(叔姪) 간에 근친혼(近親婚)을 하였다. 성골이 소멸하자 왕위 계승권은 진골로 확장되었다. 진골은 왕위뿐 아니라 주요 관직(官職)과 군직(軍職)을 독점하였다. 6두품 이하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관직의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3~1두품은 평민인데, 천한 신분으로서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신라 골품제의 혈통 원리는 고려로 이어졌다. 고려왕조에서 고위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8조(祖) 세계(世系)를 증명해야 했다. 8조란 아버지 쪽으로 조부, 조모, 증조모, 고조모, 어머니 쪽으로 외조부, 외조모, 처 쪽으로 처부, 처모를 말한다. 세계라 함은 이들 8조의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로 올라가는 남계(男系) 조상을 말한다. 따라서 8조 세계라 함은 부, 모, 처 3변으로 올라가는 32명의 조상을 가리킨다. 그 안에 천한 신분이 없어야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기껏해야 하급 서리나 군인의 지위에 그쳤다. 현재 전하는 문서 가운데 8조 세계를 완벽하게 기록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증조의 6대조까지 또는 증조모의 4대조까지 밝힌 호적이 전하여 고려인들이 실제로 8조 세계를 증명했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 신분 차별 보편화
 
  이 같은 세계의 전통은 조선으로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17년(1435) 당시 2품 이상의 관료는 8조를, 6품 이상은 6조를, 7~9품은 4조를 증명해야 했다. 그와 별도로 태종14년(1414)에 전국의 모든 신분을 대상으로 호주와 처의 4조, 곧 부, 조, 증조, 외조의 신분을 호적에 등록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전까지 혈통과 신분의 관계는 왕경(王京)에 집거하는 지배세력을 주요 대상으로 하였다. 대조적으로 조선왕조는 전국의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혈통과 신분의 관계를 증명하도록 강요하였다. 이 방면에 관한 연구는 참으로 부족하여 단언하기 힘들다. 나는 혈통에 따라 사람의 신분을 차별하는 원리는 조선에 들어와 저변으로 보편화했다고 생각한다.
 
  4조를 증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4세기까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도는 인구가 적지 않았다. 정착 농민이라도 흉년이 들면 양식을 찾아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하층 서민은 4조는커녕 아버지와 어머니도 잘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런 사람들에게 4조의 증명을 요구했으니 실은 호적에 등록되지 말라고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결과 대량의 노비가 생겨났다.
 
  현재 전하는 조선시대의 호적을 보면 양반은 어김없이 4조를 다 밝혔다. 상민은 4조를 밝히나 증조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 아래의 노비는 부모 양쪽이나 어느 한쪽만 밝히는 것이 보통이다. 아예 양쪽 다 모른다는 노비도 적지 않다. 조선시대에 들어 노비가 전체 인구의 30~40%까지 확장한 데에는 태종14년의 호적법이 큰 영향을 미쳤다. 다시 말해 혈통에 따라 신분을 차별하는 원리는 15세기 이후 전 국토와 전 인구를 대상으로 했으며, 그에 따라 혈통을 증명할 수 없는 천민(賤民)이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조선은 노예제 사회
 
  15~16세기 조선의 양반 관료는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100명의 노비는 소유하였다. 3품 이상의 고위 관료면 1000명은 보통이었다. 왕족으로 올라가면 그 수가 1만명을 넘기도 하였다. 농촌 품관의 경우는 대개 60~80명이었다. 고대 로마나 19세기 남부 농장에서도 노예 규모는 100명을 넘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노비의 인구 비중이 30~ 40%에 달하였다. 절반을 넘는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것은 과장이다. 지역별 분포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양반 신분이 발달하지 않은 평안도나 함경도로 올라가면 아무래도 10% 미만이었다.
 
  노비는 주인의 재산으로서 상속·증여·매매의 대상이었다. 상업경제가 낮은 수준이어서 노비를 매매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예외적이지는 않았다. 노비에게는 주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 능력이 없었다. 그로 인해 주인은 노비를 죽여도 큰 죄가 되지 않았다.
 
  노비에겐 두 부류가 있었다. 주인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주인이 시키는 온갖 일을 하고 주인이 먹이고 입히는 부류가 있었다. 다른 한 부류는 주인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서 몸값을 정기적으로 바치는 자들이었다. 어쨌든 조선의 노비가 세계사적으로 노예라는 주장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다. 한국사에 정통한 외국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왕조를 노예제 사회로 분류하고 있다.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은 노비의 존재를 두 가지 근거로 정당화하였다. 하나는 중국에서 건너온 성인(聖人) 기자(箕子)가 동방의 문명을 열 때 8조금법(八條禁法)을 내렸는데, 거기에 도둑질을 한 죄인을 노비로 삼도록 한 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두말할 여지 없이 ‘만들어진 신화’이다. 8조금법 어디에도 ‘한 번 노비면 영원히 노비’라는 법은 없다.
 
  다른 한 가지 근거는 노비는 고려 양수척(楊水尺)의 자손이라는 것인데, 이는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 양수척은 호적에 등록되지 않고 떠돌아다니면서 사냥을 하고 고리짝을 만들어 파는 일을 생업으로 하였다. 이들은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자 그에 붙어서 길 안내를 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재인(才人)이나 화척(禾尺)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소와 돼지의 도살업이나 도둑질에 종사하였다. 한마디로 이들은 고려의 백성이 아니었다. 고려인의 입장에서는 이류(異類)로서 다른 종족이었다. 조선왕조는 재인과 화척의 이동을 금하고 정착을 강요하였다. 그러고선 그들을 신백정(新白丁)이라고 불렀다. 군현(郡縣)에 따라선 그 인구 비중이 적지 않아 30%에 달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는 노비가 양인(良人)과 결혼하면 그 자손은 모두 노비가 된다는 신분 세습의 법을 만들었다. 천한 쪽을 따른다 하여 종천법(從賤法)이라 하였다. 노비의 피는 더러워서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양인의 피도 더럽게 된다는 논리였다. 다름 아닌 혈통의 논리였다. 종천법이 만들어진 데에는 신백정과 기존 노비의 결혼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류인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자손도 이류로서 노비가 되었다.
 
  노비에 대한 비천 감각은 더욱 깊어졌다. 고려의 노비들은 그리 천시되지 않았다. 반면 조선의 노비들은 가축이나 가축의 똥오줌으로 천시되어 누른개, 암캐, 마당쇠, 개똥, 소똥과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요컨대 조선의 노비들은 오랜 혈통의 전통과 여말선초의 사회적 변동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생겨난 새로운 부류의 천민으로서 다른 종족의 후예로서 감각되고 차별되었다.
 
 
  班常 신분제의 강화
 
김득신의 〈노상알현도〉. 나귀를 탄 양반 앞에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상민의 모습에서 조선 후기 반상제의 엄격함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 이후 노비제는 쇠퇴하였다. 1744년 노(奴)와 양인 여자가 결혼할 경우 그 자식을 양인 신분으로 돌리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종량법(從良法)이라 하였다. 그에 따라 19세기에 이르러 노비의 인구 비중은 10% 미만으로 줄었다. 종량법의 제정은 혈통의 고귀함이나 순수함에 따라 인간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골품제 이래의 오랜 전통으로부터 한국인이 해방되어 가는 역사의 진보를 의미하였다.
 
  그렇지만 변화의 속도는 느렸다. 변화의 정도를 과장해서는 곤란하다. 조선왕조 말기까지 혈통에 따라 인격을 차별하는 신분제 원리는 여전히 강고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 질서의 수준을 넘어 사회와 문화의 질서로서 내면화(內面化)하였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혈통의 원리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여성이 친족(親族)집단에서 배제된 것이다. 친족은 동성(同姓) 남계(男系)의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도처에서 주민의 절반 이상이 동성(同姓)친족으로 구성되는 촌락이 발달하였다. 동성촌의 비중은 19세기 말까지 남부 지방의 경우 전체 동리의 근 3분의 1을 차지하였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같은 역사적 추세가 1960년대까지도 면면하게 이어졌다.
 
  서로 인접한 동성촌의 친족집단을 가리켜 보통 당내(堂內)라 하였다. 당내는 고조-증조-조-부로 이어지는 대종(大宗)을 중심으로 결속하였다. 당내의 본질적 기능은 제사였다. 당내에 속하여 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 향촌 사회는 그 사람을 양반으로 대우하였다. 당내에 속하지 못한 사람은 상놈으로 천시되었다. 노비제가 쇠퇴하면서 당내의 유무를 지표로 인간을 양반과 상놈으로 가르는 반상(班常) 신분제가 발달하였다. 그 역시 혈통의 논리였다.
 
 
  우리 모두 단군의 자손?
 
  이제 마무리한다. “우리 모두는 단군의 자손으로 하나의 피붙이”라는 현대 한국 민족주의의 종족적 특질은 20세기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신분의 원리로서 혈통을 매우 중시하였다. 신라의 골품제, 고려의 8조 세계, 조선의 4조 세계로 이어진 혈통 중시의 전통은 한국사 2000년의 가장 중요한 특질이다. 그 혈통의 원리는 인간을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는 것이었다. 신라와 고려까지는 왕경인(王京人)과 지방민을 차별하였다. 조선 17세기까지는 양반과 노비를 차별하였다. 18세기 이후는 양반과 상놈을 차별하였다. 이러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는 단군의 자손으로 하나의 피붙이”라는 논리는 설 땅이 없다.
 
  그 혈통의 원리가 20세기에 들어 “우리 모두는 하나의 피붙이”라는 민족주의의 논리로 승화하고, 종당에는 북한에서 “우리 모두는 수령(首領)을 뇌수(腦髓)로 하는 유기체(有機體)”라는 주체사상으로 정립하고, 심지어 남한에서마저 그에 동조하는 정치세력이 성장해 왔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아직 착수도 안 된 상태이다.
 
  서두에서 소개한 대로 한국 민족주의의 종족적 특질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현상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만큼 혈통을 중시해 온 나라가 없다. 15~19세기 중국과 일본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을 4조까지 추적한 호적이 작성된 적은 없다. 4조는커녕 1조도 추적하지 않았다. 한국 문명사에 어떠한 심리적·종족적·자연적 요인이 작용하였기에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혈통을 추구하였을까. 한국 민족주의에 관한 연구의 출발점은 이 같은 역사적 시좌(視座)에서 길게 올바로 설정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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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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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초    (2018-10-18)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저건 세상을 철저하게 중화vs오랑캐로 구분하는 중국인들 사고방식이고 유목하는 사람은 인종 혈통 지역을 초월하여 어떤길로 왔느냐로 깊은 공동체 의식을 가진다고 하더이다 그리고 지방사람들이 표준말 하시니깐 소통하는거지 지금도 지역별로 대화가 불가능 합니다. 신라 고려 조선은 지들도 별볼일 없는 혈통들이 고조선 귀족출신 부여계와 동급으로 놀려고 극단적인 신분제를 만든거니 이런 남성중심적 저급한 신분제로 동족의식이 없었다고 볼수 없죠 애초에 한민족은 반만년 모계사회라 부계사회 개념으로 해석할 수 없어요
  .밝 누 리.    (2018-09-26)     수정   삭제 찬성 : 5   반대 : 4
.
이영훈의 글이 오류 투성이지만 특히 다음 두 가지는 무식과 매국 수준입니다.

1. 한민족
한민족을 하나의 민족 정도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단군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만 벌리면 단군의 자손이라던 자들로서 할말인지 모르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이고, 매국이나 다름 없는 말입니다.

한민족에서 한韓은 한님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한민족이란 하나님의 자손 즉 천손민족이란 뜻입니다.

2. 민족
이영훈은 1617세기 이전에는 민족이란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도 무식이며 매국적인 언사입니다.

우리 겨레는 예로 부터 겨레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겨레 케레이트란 말은 범 알타이 나라와 종족들이 넓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더 들어가 보면 삼족오 까마귀 까마귀의 겨레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3. 노예제 신분차별
대한의 노예제가 서구의 농노나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다름을 애써 감추고 있습니다,
팔조금법을 말하였는데 조선시대에도 중죄를 지으면 노비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세습 되지만 드물게 면천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이는 노예 노비가 본질적으로 인종이나 종족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신분이 달랐고 그 신분간의 이동이 어렵도록 만들었으나 아주 이동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고구려 시대에도 대부분의 백성은 말갈족이었고, 지배계급도 말갈족 가운데 신분이 우월한자들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나 신분 때문에 핏줄이 다르다고 한 것은 오류입니다.
이상, 한韓을 모르고, 삼족오케레이트 겨레를 모르고 쓴 저런 엉터리 글에 현혹될 대한의 민초들이 대한민조대중들이 많을 것이니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상설 바른역사교실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현재 처럼 여러 단체들이 세미나나 역사교육 형태의 여러 교육장을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고, 상생방송과 같이 북콘서트를 열고 여러 강의를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상설 바른역사교실을 열어 1주일 20시간 수강하고, 수료증을 주도록 하는 것이 상아탑을 떠나 사회에 진출한 대한대중민초들에게 바른대한역사를 알려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의견입니다.

1. 바른역사교실 개설운영에는 큰 예산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2. 국가예산 지원은 당연히 받을 수 있습니다.
3. 일자리.. 적어도 1만 개 정도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현 정부의 현안과 맞고, 바른역사학계와 맞는 상설 바른역사교실을 한시바삐 추진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추진하면 2020년 부터는 국가예산을 받아서 운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밝 누 리.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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