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현대사 비록

기무사령관 列傳

해체 수순 돌입한 機務司를 거쳐 간 사령관들의 面面… 대부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거나 대통령과 同鄕 출신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chosh760@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두 명의 대통령과 두 명의 집권여당 총재, 12명의 육군 대장 배출한 권부의 핵심 요직… 군사정권 시절 기무사령관은 대통령에게 直報
⊙ 이승만의 총애받다가 암살당한 김창룡, 박정희의 오랜 부하였던 김재규와 윤필용
⊙ ‘윤필용 사건’ 수사로 인해 신군부로부터 정치 보복 당한 강창성
⊙ 보안사령관직 인수인계한 절친 전두환과 노태우
⊙ 5·6공 보안사령관은 ‘하나회 일색’… 5공은 보안사 정권 그 자체, 6공은 9·9인맥이 보안사 장악
⊙ YS 정부 기무사령관은 ‘파격 일색’… 최초의 학군(ROTC) 출신 기무사령관 등장
⊙ DJ 정부 기무사령관은 ‘호남 일색’… 군부와 대립했던 DJ도 기무사의 중요성 모르지 않아
⊙ 노무현 정부 기무사령관은 지역색 옅었지만, MB 정부 기무사령관은 모두 TK 출신
⊙ 논란에 휘말렸던 박근혜 정부 기무사령관 3인
⊙ ‘계엄 문건’ 파동으로 解編 수순 밟는 文 정부 기무사를 바라보는 우려의 시선
청와대 옆 서울 소격동에 있던 구 보안사령부 청사. 현재의 기무사령부 청사는 경기도 과천에 위치해 있고, 이 구 청사는 리모델링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사진=문화재청
  기무사 ‘계엄 문건’ 파동으로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각을 세우던 이석구 기무사령관이 경질되고, 후임에 남영신 특수전사령관이 임명됐다. 남영신 사령관의 부임과 함께 국군 기무사령부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그 권한과 기능도 상당 부분 조정되고 부대명도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기무사는 1950년 특무부대로 출발해 방첩부대, 육군 보안사령부, 국군 보안사령부로 이어져 오다가 1990년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했다. 이번에 또다시 부대명이 바뀐다면 여섯 번째 변경인 셈이다.
 
 
  軍內의 ‘국가정보원’… 과거 기무사령관은 대통령과 獨對도
 
  기무사령부는 군(軍) 및 군 관련 보안대책의 수립·개선을 지원하고, 군사보안에 관련된 인원에 대한 신원조사와 보안조사 등 제반 보안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대간첩·대테러 작전 지원 등 방첩활동을 한다. 국내외 방위산업에 관한 첩보를 수집하고 북한의 움직임을 파악함으로써 군이 국제정세 변화와 북한의 도발에 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도 있다. 기무사는 한마디로 국군 내부의 ‘국가정보원’인 셈이다.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절 기무사령관은 두 명의 대통령과 두 명의 집권여당 총재, 12명의 육군 대장을 배출한 명실상부한 권부의 핵심 요직이었다. 장관과 외청장(外廳長), 국회의원으로 범위를 넓히면 그 숫자는 더 많아진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당시 기무사령관은 대통령에게 독대(이른바 지참보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성 중 한 명이었다. 기무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올리는 보고서는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의 그것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고 한다.
 
  중정(中情) 보고서는 정보에 대한 해설과 함께 기관장의 의견도 간혹 덧붙여졌지만, 기무사 보고서는 정보를 가감·윤색하지 않고 팩트만 나열했다. 결재 단계도 짧아 청와대에 보고되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빨랐다. 군인들이 작성한 보고서라 전문성은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신속성과 팩트 위주라 대통령이 다른 정보와 크로스 체크하는 데 적합했다. 이런 이유로 군 출신 대통령들은 특정 사안에 대해선 중정(안기부) 보고서보다 기무사(보안사) 보고서를 더 신뢰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두 기관은 서로 권력 암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막강한 자리이기에 역대 기무사령관들의 흥망(興亡)은 다른 어떤 자리보다도 뚜렷하다. 이들의 행적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당시 권력의 암투가 판화처럼 찍혀 나온다.
 
 
  암살당한 ‘김창룡’, 사기사건의 주범 ‘이철희’
 

  특무부대장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단연 김창룡(金昌龍)이다. 김창룡은 1940년부터 만주에서 관동군 헌병보조원과 헌병 이등병으로 근무하며 일본군에 중국 공산당의 정보를 넘기는 일종의 정보원 역할을 했다. 해방 후인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군 내 공산 세력을 소탕하는 데 앞장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무리한 숙청과 월권으로 군부의 반발을 샀고, 1956년 암살당하고 만다.
 
  방첩부대장 시절 유명한 인물은 이철희(李哲熙), 정승화(鄭昇和), 윤필용(尹泌鏞)이다. 이철희는 전두환(全斗煥) 정권 때인 1982년, 건국 이래 최대의 사기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사기사건의 주범이다.
 
  일본 육군정보학교 출신인 이철희는 박정희(朴正熙) 정부 시절 현역 군인 신분으로 중앙정보부 차장보와 차장 등을 역임했다. 워낙 오랫동안 정보를 다뤄 매사 깐깐하면서 성정도 불같았다고 전해진다. 이철희의 부인이었던 장영자는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장영자 사건 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으로 있다가 이 사건에 연루돼 구속)의 처제였다. 이·장 부부 사건으로 전두환 정권은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비운의 군인 ‘정승화’, 권력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윤필용’
 
  정승화는 ‘비운의 군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6·25전쟁 당시 3사단 대대장이었던 그는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적도 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 아래 7사단장, 3군단장, 1군사령관 등 군 내 주요 요직을 역임하다가 1979년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전두환 신군부가 자행한 12·12사건으로 이등병으로 강등돼 불명예 전역하고 말았다. 군사정권 시절의 군인들이 대체로 정치적이었던 데 반해 정승화는 정치와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성품 역시 얌전하고 국가관도 투철해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성우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반대 입장을 표하기도 했다.
 
  그에 반해 윤필용은 권력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박정희 육군 소장이 5·16혁명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리에 오르자 그전부터 박정희를 줄곧 모셨던 윤필용도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수직상승한다. 이후 방첩부대장을 거쳐 요직인 수도경비사령관에 올랐다. 당시 수경사는 지금의 서울 필동 남산 한옥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세간에선 수경사를 ‘필동 육본(육군본부)’ ‘청와대 밖의 청와대’로 불렀다. 윤필용보다 계급이 높은 중·대장급이 그에게 세배를 하러 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렇듯 잘나가던 윤필용은 1973년 박정희에 의해 거세된다. 외견상 윤필용은 수재의연금 횡령 등의 혐의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불경스러운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잘려나갔다는 설이 우세하다.
 
 
 
신군부로부터 정치 보복 당한 ‘강창성’과 신군부 수장 ‘전두환’

 

  보안사령관 중에서 눈여겨볼 인물은 3~4공화국 시절의 김재규(金載圭)와 강창성(姜昌成), 그리고 전두환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강창성은 보안사령관으로서 박 대통령의 하명(下命)을 받아 ‘윤필용 사건’을 수사했던 인물이다. 강창성과 윤필용 두 사람은 육사 8기 동기다.
 
  강창성은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당시 전두환을 필두로 한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까지 수사선상에 올렸다. 그러나 하나회는 은밀하게 박 대통령의 후원을 받고 있었고, 강창성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수사를 밀어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강창성은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된다. 강창성의 손을 빌려 윤필용을 거세한 박 대통령은 강창성마저 ‘토사구팽’한 셈이다. 강창성의 ‘하나회 토벌 작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전두환 그룹은 훗날 권력을 잡은 뒤, 그를 삼청교육대로 보내는 정치 보복을 가했다. 물론 신군부는 정치 보복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육군 1사단장으로 1년 정도 있다가 보안사령관에 부임한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의 ‘양아들’로 불렸다. 정규 육사 1기(실제론 육사 11기) 리더이자 하나회의 수장이었던 전두환은 숫기 좋고, 리더십이 뛰어나 육사 후배들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정규 육사 출신을 중심으로 하나회가 결성되고 전두환이 그 정점에 오른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두환은 박정희 권력의 핵심이었던 윤필용을 비롯해 박종규·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의 신임도 얻었다. 전두환을 제외한 이들 세 사람이 서로 반목하고 불신한 점을 감안하면 그의 친화력과 사교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정희 정권 말, 차지철 경호실장의 월권이 도를 넘어서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에 의해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등 권부의 위계질서가 흐트러졌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으로서 권부 개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보고가 이뤄지기 직전 10·26이 터지고 만다.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사건을 수사하고, 그렇게 권력의 공백을 장악해 나갔다. 본의든 타의든 전두환은 권력을 향해 질주했고, 80년 ‘서울의 봄’ 당시 공석이었던 중정부장 서리까지 겸임, 국가의 양대 정보기관을 한 손에 쥐었다. 그런 배경으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 하야(下野) 후 권좌에까지 오른다.
 
  전두환 사령관 시절 보안사는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보안사는 이를 ‘부대 정화작업’이라고 불렀다. 보안사를 배경으로 인사 청탁이나 이권 개입을 하던 일부 요원들을 잘라낸 것이다. 보안부대원들이 일선 부대 지휘관들과 결탁해 부대 운용비를 빼돌리는 등의 부정도 일소(一掃)했다. 이런 개혁 과정을 거친 뒤 전(全) 사령관이 합수본부장으로 10·26사건 수사까지 도맡자 당시 정치 업무를 담당했던 보안사의 고참 준위 한 명은 “다음 대통령은 전 사령관이다. 내 말은 틀림없다”고 호언장담,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1979년 1월 19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보안사에 개입, 보안사의 핵심 업무 중 하나인 ‘대민 정보 활동’을 없앴다. 이를 ‘1·19 조치’라고 부르는데, 이때 보안사 인력 70여 명이 일선 부대로 쫓겨나거나 아예 예편되고 말았다. 육군보안사령관 출신이었던 김재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보부장으로 있으면서 보안사를 낮춰봤다고 한다. 그 직후 전두환이 사령관에 취임하고, 10·26으로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으로 전락하자 전두환이 이끄는 보안사는 김재규가 이끌었던 중앙정보부를 초토화시켰다. 전체 정보부 부서장급의 80% 가까이를 자른 것이다. 1·19 조치 이후 ‘전두환’의 보안사가 ‘김재규’의 정보부에 완벽한 반격을 가한 셈이다.
 
 
  전두환의 절친 ‘노태우’가 접한 뜻밖의 예편 조치
 
  4공화국에서 5공화국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보안사령관은 ‘전두환의 절친’ 노태우(盧泰愚)다. 전두환 정권의 창업공신인 노태우는 전두환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 있던 시기에 보안사를 맡았기에 권한은 그리 세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전두환 시절 다져놓은 권력이 워낙 강했고, 전두환이 가장 신뢰하던 친구였기에 노태우라는 존재만으로도 보안사의 위상은 공고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1년여 후인 1981년 여름, 노태우 사령관은 대장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라는 뜻밖의 지시를 받는다. 5공화국의 2인자이자 차기 대권 주자 반열에 오른 노태우 입장에서 예편은 달갑지 않은 지시였다고 한다. 2인자 처신을 하기에도 군에 있는 편이 낫고, 보안사령관 자리를 한동안 유지해야 정보도 수집할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노태우의 전격적인 예편은 2인자를 용인하지 않는 전두환 대통령의 권력 운용 방침 때문이란 설이 유력하다. 그를 예편시키지 않으면 결국 ‘군의 최고 요직’인 육군참모총장으로 보낼 수밖에 없어 권력누수 방지 차원에서 예편시켰다는 것이다.
 
  5공화국은 보안사 정권 그 자체였다.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해 5공 창업공신인 노태우,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이 모두 보안사 출신이었기에 보안사는 청와대와 비견되는 권부의 핵심이었다.
 
  노태우 후임으로 사령관에 오른 박준병(朴俊炳)은 보안사령관치고는 다소 인기가 없는 인물이었다.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었음에도 청와대를 의식해 그 권한을 거의 쓰지 않아 부하들이 대체로 답답해했다고 한다. 가령 ‘사령부 신청사를 지어주겠다’고 해도 ‘지금으로 만족한다’는 식으로 반응한 것이다. 부하들 입장에선 나름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박준병은 대장 진급과 동시에 예편, 12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안필준’의 무리한 시도, 하나회 적장자 ‘이종구’의 등장

 

  이후 부임한 안필준(安弼濬) 사령관은 하나회이면서도 일종의 ‘서자’ 취급을 받아 주변의 불편한 시선을 느끼며 사령관에 올랐다. 안필준은 권력의 신임을 극대화하고자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고자 안간힘을 썼다. 일선 보안부대에 사병들의 민정당 지지를 유도하란 취지의 명령을 내린 것이다.
 
  안필준의 이러한 시도는 엉뚱하게도 정통 하나회 회원들의 반발을 샀다. 전두환 대통령이 아끼고 아껴 정계(政界)로 차출하지 않고 군에서 키우던 김진영 수도기계화사단장, 민병돈 20사단장 등이 안 사령관의 지시에 강력 반발한 것이다. 이들은 예하 연대장들에게 ‘보안부대장의 지침에 따르지 마라. 군이 선거에 개입해선 안 된다’고 엄중 지시했다. 선거 결과 수기사와 20사단의 민정당 지지율은 타 부대보다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한다. 안필준은 하나회에 의해 상처를 입었지만, 전 대통령은, 그의 충성심을 높게 사 안 사령관은 1군사령관으로 대장에 진급했고 노태우 정부에서는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이종구(李鍾九) 보안사령관은 하나회의 ‘적장자’이다. 육사 14기이자 TK 출신에 리더십도 뛰어나 일찌감치 차기 육군참모총장 물망에 올랐다. 이종구 사령관 시절 5공 정권의 실세는 단연 장세동 안기부장이었다. 장세동은 잘 알려진 대로 전두환의 오른팔이자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인물로, 수경사·특전사 등에서 오래 근무하고 청와대 경호실장까지 지낸 터라 군 내에서도 장세동 부장의 입김은 셌다. 5공 정권의 권력누수 방지를 위해 강력한 권한을 휘둘렀다.
 
  그런 장세동도 이종구 사령관에겐 깍듯했다고 한다. 육사 선배일 뿐만 아니라 이 사령관도 장세동 못지않게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령관은 사령관 부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간첩 30여 명을 소탕,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 사령관의 역할 공간은 민간 영역에까지 넘나들었다. 서울 지하철의 경로 우대가 버스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안 이종구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국가가 운영하는 지하철이 버스보다 경로 우대가 못해선 안 된다’고 건의, 이를 관철시켰다고 한다. 이종구는 6공에서 육군참모총장에 올랐고, 국방부 장관까지 지냈다.
 
 
  전두환에게 신임받은 힘 못 쓴 ‘고명승’, 노태우에게 버림받은 ‘최평욱’
 

  이종구 사령관 후임인 고명승(高明昇) 사령관은 호남 출신이면서도 하나회의 주축이자 전두환맨이었다. 고명승은 전두환 정권 내내 육본 인사참모부장, 9사단장 등 요직을 지냈고, 브리핑 솜씨가 뛰어나 ‘브리핑의 귀재’로 불렸다. 그러나 그가 보안사령관에 올랐을 때인 1987년은 민주화 열풍이 거세게 일던 시기라 사령관으로서 큰 힘은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사 한 기수 후배인 장세동의 안기부에 밀렸다는 얘기도 있다. 전두환 정권 말 그는 3군사령관에 발탁돼 육군 대장에 올랐다. 2011년 국군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회장에 선출되는 등 전역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활발한 대외활동을 이어나갔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대선 직후 군 인사를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이때 최세창 3군사령관이 합참의장에, 고명승 보안사령관이 3군사령관에, 김진영 3사관학교장이 수도방위사령관에 올랐다.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는 이 같은 군 인사에 격노(激怒)했다고 한다. 군 요직에 전두환 측근들이 일제히 발탁된 것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노태우 당선자는 취임 후 약 1년간 군 인사에 손도 못 댈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때 고명승의 후임으로 보안사령관에 오른 최평욱(崔枰旭)도 장세동에 필적할 만한 전두환의 측근이었다. 최평욱은 전두환이 1사단장이던 시절 그 밑에서 참모장, 연대장을 지냈다. 이때 그 유명한 제3땅굴을 발견했는데, 최평욱의 공이 매우 컸다고 한다. 전두환은 그런 그를 몹시 아낀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전 대통령은 아끼던 군 후배들을 정계로 차출하지 않았는데, 최평욱 역시 그런 케이스였다.
 
  최평욱이 1사단 연대장을 할 때 사병 월북 사건이 발생, 최평욱은 경기도 용인에 주둔하고 있는 예비군 연대장으로 좌천되는 일이 있었다. 전두환은 대통령에 오른 후 최평욱에게 ‘명예회복을 하라’며 보안사 핵심 요직인 보안처장을 비롯해 1사단장, 육군 인사참모부장 등을 맡겼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은 그런 그를 경계, 최평욱을 보안사령관에서 교육사령관으로 밀어내고, 나중엔 예편까지 시켜버렸다. 5·6공 시절 보안사령관 대부분이 대장으로 진급해 나갔지만 최평욱은 이들 중 최초로 대장 진급에 실패한 사례다. 사실 최평욱은 노 대통령이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보안처장이었다. 이런 인연도 권력 앞에선 아무 의미가 없었다.
 
 
  9·9인맥 ‘조남풍’과 ‘구창회’
 
  최평욱 이후의 보안사령관은 노태우의 인맥으로 채워진다. 전두환-노태우 모두 하나회지만, 그 안에서도 두 사람과의 인연에 따라 또 다른 파벌이 형성됐다. 예컨대 전두환이 지휘관으로 있던 1공수여단장-1사단장 시절 그 밑에서 참모를 지낸 인맥을 1·1인맥, 노태우가 9공수여단장-9사단장으로 있을 때 휘하 참모들을 9·9인맥이라 불렀다.
 
  최평욱을 날려버린 노태우 대통령은 권력의 핵인 보안사령관에 자신의 충복이자 9·9인맥인 조남풍(趙南豊)을 앉혔다. 조남풍은 야전 군인으로 죽 복무해 와 보안사 업무를 익히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고 한다. 조남풍 사령관 시절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윤석양 이병 사건’이다. 1990년 10월 4일 보안사에서 복무하던 윤석양 이병(당시 24세)은 보안사가 정치계, 노동계, 종교계, 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 1303명을 상대로 정치 사찰을 벌였다고 폭로했다. 이 민간인 사찰 의혹은 노태우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줬다.
 
  결국 노 대통령은 이상훈 국방부 장관과 함께 조남풍 사령관을 경질, 교육사령관으로 전보시켰다. 보안사령부도 기무사령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조 사령관은 1992년 가까스로 대장으로 진급, 전방을 지키는 1군사령관에 임명됐지만 이듬해 출범한 김영삼 정권에 의해 전역 조치됐다. 2015년 재향군인회 회장으로 다시 공식석상에 나섰지만,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되는 불운을 겪었다.
 
  조남풍의 후임은 9·9인맥인 구창회(具昌會)다. 구창회 기무사령관은 《월간조선》이 1995년 9월호에 발매한 ‘12·12 장군들의 육성 녹음테이프’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12·12 당시 노태우 9사단장 휘하의 참모장(당시 대령)이던 구창회는 병력 출동 여부를 묻는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연대 출동 안 합니다”라고 사실상 허위 보고를 했다. 이 육성이 고스란히 담긴 녹음이 《월간조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구창회 사령관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이진삼 육군참모총장, 이필섭 합참의장, 조남풍 사령관과 함께 9·9인맥의 핵심인 구 사령관은 6공 출범 이후, 수방사령관, 보안사령관을 거쳐 육군 최다(最多) 실병력을 거느리는 3군사령관(대장)에까지 오른다. 그 역시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조남풍 1군사령관과 함께 전역한다.
 
 
  노태우가 기용한 전두환맨 ‘서완수’, YS가 전격 경질
 
서완수
  구창회 사령관의 후임인 서완수(徐完秀) 사령관은 9·9인맥이 아니다. 노태우 대통령보다는 전두환 대통령과 인연이 더 깊다. 전 대통령이 대대장으로 있을 때 중대장을, 1공수여단장으로 있을 때 작전참모와 대대장을 했기 때문이다. 서완수 사령관은 전 대통령에게 일종의 빚까지 졌다. 속사정은 이렇다. 그의 인척 중 한 명이 6·25 때 공산당에 부역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신원조회 결과 드러났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있던 전두환 준장은 “서완수는 훌륭한 군인이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겠다”며 그의 신원보증을 해줬다. 그 덕에 서완수는 군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서 사령관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사회정화위원, 3공수여단장, 20사단장, 특전사령관을 지냈다. 노 대통령이 ‘전두환맨’이라 할 수 있는 그를 기무사령관에 중용한 것은 임기 말 권력누수를 막기 위해 TK 출신이자 하나회 실세를 앉혀야겠다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서완수는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더불어 ‘하나회 숙청’ 1호로 지목돼 그야말로 한 방에 날아갔다. 김 대통령이 김진영-서완수를 전격 경질한 뒤 “모두 깜짝 놀랐제”라고 참모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만큼 두 사람은 하나회 실세로, 군 내에 따르는 장성들이 많아 그들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 군 출신 인사는 “김영삼 대통령이 군을 잘 알고 있었다면 김진영-서완수를 경질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사실 서완수는 일종의 ‘괘씸죄’ 혐의도 있었다. 6공 말 노 대통령에게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라는 취지의 건의를 자주 올렸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 대통령은 1992년 9월 여당인 민자당을 탈당, 중립내각을 구성해 김영삼 당선에 한 발 빼는 듯한 인상을 줬다.
 
  김영삼 정부는 군을 개혁의 대상으로 봤다. 5·6공을 거치면서 하나회 출신이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한 거부감을 가진 것이다. 그 거부감이 가장 먼저 표출된 게 김진영-서완수의 경질이다. 그리고 전광석화와 같이 군 핵심 요직에 박혀 있는 하나회 인맥들을 잘라냈다. 당시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하나회 숙청으로 날아간 별의 숫자가 40여 개에 달했다고 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학살’이라고 표현했다.
 
 
  8개월 만에 경질된 ‘김도윤’, 최초의 학군 출신 사령관 ‘임재문’
 

  기무사도 그 숙청 바람을 피할 순 없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기무사에서는 수백여 명의 장교와 준사관, 군무원 등이 전역 조치되거나 원대 복귀했다. 그 과정에서 서완수의 후임으로 기무사령관에 부임한 김도윤(金度閏)의 역할 공간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김도윤은 최초의 기무사 내부 승진 케이스다. 기무사 참모장으로 있던 김도윤은 사령관엔 올랐지만, 그 권한은 전임자들에 한참 못 미쳤다.
 
  원래 기무사령관은 중장 계급이지만, 김도윤은 소장 계급으로 사령관에 임명됐다. 기무사 힘 빼기의 일환이었다. 시작부터 삐걱거린 김도윤은 사령관에 임명된 지 8개월 만에 대통령과 제대로 된 독대(獨對)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교체된다. 표면적으로는 ‘군 개혁에 부적합하다’는 이유였지만, 김영삼이 군을 친정체제로 운영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김도윤의 후임자도 파격이었다. 기무사 참모장으로 있던 임재문(林載文)인데, 그는 학군 3기(건국대) 출신이었다. ‘육사 출신·하나회’가 공식으로 여겨졌던 기무사령관 자리에 학군 출신이 임명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임재문은 김영삼 대통령이 퇴임하던 1998년까지 5년간 기무사령관으로 재임했다. 원래 준장 계급으로 사령관에 임명된 임재문은, 재임 기간 준장 → 소장 → 중장으로 두 번이나 진급하는 희귀한 사례를 남겼다.
 
  임재문은 정통 보안사맨이다. 중위 때부터 보안사 정보장교, 보안사 감찰실장, 1군사령부 보안부대장을 지냈다. 1군 보안부대장 시절, 당시 사령관은 9·9인맥의 핵심이자 6공에서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이진삼 대장이었다. 당시 이진삼 사령관은 임재문 보안부대장에게 전화해 “4성 장군의 전화를 도청하는 건 아니지 않으냐”고 따지듯이 물었다고 한다. 이때 임재문은 “당연히 한다. 그게 우리의 임무”라고 당당히 밝혔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서 임재문은 강단과 논리적인 모습을 보였고, 이를 본 김 대통령은 ‘안심하고’ 그를 발탁했다고 전해진다. 임재문은 하나회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던 기무사를 특유의 리더십으로 장악, 과도기를 무리 없이 넘겼다.
 
 
  DJ 정부 기무사령관은 ‘호남 일색’
 
이남신
  김대중 정부 시절의 기무사령관은 ‘호남 일색’이라고 표현하는 게 그나마 가장 정확하다. 김대중 정부 초대 기무사령관인 이남신(李南信)을 비롯해 김필수(金佖洙), 문두식(文荳植) 세 명의 사령관 모두 호남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남신 사령관은 전북 익산(전주라는 얘기도 있음), 김필수 사령관은 전북 고창, 문두식 사령관은 전남 화순이 고향이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 역시 기무사의 중요성을 인식, 당시 정부와 맥을 같이하는 지역의 인사들을 앉혔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눈여겨볼 인물은 이남신 사령관이다. 기무사령관 발탁 전, 이남신은 강원도 동해안과 동부전선을 지키는 8군단장으로 있었다. 김영삼 정부 때 이남신이 중장으로 진급해 군단장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1996년 발생한 ‘강릉 무장간첩사건’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8군단장이 문책을 당하자 비주류이자 호남 출신인 그를 기용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남신은 9군단 부군단장, 국군의날 제병지휘관, 육본 감찰감 등 육군의 핵심인 작전 계통이 아닌 비교적 한직을 맴돌고 있었다.
 
  이남신의 기무사령관 기용은, 1987년 고명승 사령관에 이어 11년 만에 호남 출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남신 사령관은 기무사령관을 마치고 1999년 10월 대장으로 진급, 3군사령관에 보임됐다.
 
  당초 김영삼 정부는 군 인사법 시행령(25조 2항)에 기무사령관 직위를 ‘임기제 진급(직위 진급)’ 자리로 명시했다. 그동안 순수 기무 출신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은 기무사 참모장(소장)이었다. 기무사는 권한이 강력했지만, 정작 순수 기무 출신은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무사령관을 포함한 기무사 주요 직책을 직위 진급 보직으로 정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상위 계급으로 진급할 수 있는 일반 장교가 기무부대의 장(長)으로 오는 게 차단된다. 순수 기무 출신들을 사령관에 보임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이렇듯 문민정부 시절부터 기무사령관은 기무사령관을 끝으로 전역을 하는 게 관례였지만, 이남신 사령관이 진급을 함으로써 이 관례가 깨진 것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이남신 사령관은 중장(8군단장)인 상태에서 기무사령관으로 보직만 바뀌었기 때문에 직위 진급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대장으로 진급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기무사령관에 순수 기무 출신을 임명하고 그 자리에서 전역시키기 위해 기무사령관을 직위 진급 보직으로 정하지 않았느냐. 그런 면에서 이 사령관이 기무사령관에서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기무사령관직을 직위 진급 직위로 지정한 법 정신을 깬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남신 사령관은 3군사령관을 마친 뒤인 2001년엔 ‘국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까지 올랐다.
 
  이남신 사령관 후임으로 임명된 김필수 사령관은 8사단장과 합참 작전기획부장을 역임한 야전 작전통이었다. 영관 장교 시절부터 군의 전략 체계를 개선하는 실무를 맡아 전략 및 정책기획통으로 꼽혀왔다. 기무사 경험이 없음에도 사령관에 발탁됐지만, 김필수 사령관 재임 시 기무사는 별다른 잡음이 없었다. 김 사령관 스스로가 대인관계에 원만하고 특별히 지역색을 드러내는 편이 아니라 무리 없이 조직을 이끌었다는 후문이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그런 그를 매우 신임했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 말기 임명된 문두식 사령관은 정통 기무사맨으로, 핵심 요직인 기무사 1, 2처장을 역임하고 기무사 참모장으로 있다가 김필수 사령관 후임으로 임명됐다. 주미 무관을 역임해 영어 실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옷을 벗은 문 사령관은 이듬해 고향(나주·화순)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정치색과 지역색 옅어진 노무현 정부 기무사령관
 

  노무현 정부부터 기무사령관의 정치색과 지역색이 옅어졌다. 노(盧) 정부 초대 기무사령관은 송영근(宋泳勤)이다. 경기도 출신의 송영근 사령관은 육군본부 인사운영처장, 1사단장, 3사관학교장, 한미연합사 부참모장을 지냈다. 송 사령관은 2년 임기를 마치고 기무사령관직에서 비교적 무탈하게 내려왔다. 이후 송 사령관은 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새누리당 비례대표를 받아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2012년 대선 직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무사령관 재임 당시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자신에게) 국가보안법 폐지에 총대를 메달라고 했다’는 취지의 폭로를 한 바 있다.
 
  송영근 사령관 후임은 김영한(金榮漢)이다. 경북 영주 출신으로 강릉고를 졸업한 김영한 사령관은 육군본부 전력계획과장을 비롯해 국방부 획득정책관실 차장, 합참 전력기획차장 등을 역임, 군 전력 증강의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2006년 국회 국정감사 당시 국방위에 출석한 김 사령관은 이적(利敵)활동을 하다가 군에 들어온 현역이 수백 명가량 된다고 밝혀 주목을 받았다. 당시 김 사령관은 “이적단체 가입 경력자들도 군에 들어오고 있다. 이들에 대해 평소에도 감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군내에서 (이적) 활동을 하는 사람은 소수다. 이들은 검찰에 넘기고 있는데 2000년부터 지금까지 20여 명 정도”라고도 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기무사령관은 경남 진주 출신의 허평환(許坪桓)이다. 허평환은 과거 최평욱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을 지내 전임자들과 비교해 기무사 업무에 비교적 밝다는 평가를 받았다. 허평환은 국방부 감사관실 근무 당시, 이른바 ‘맹물 전투기’ 사건의 실체를 파헤쳐 군 수뇌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전략·전술에도 해박해 조성태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허평환은 2003년 2월 국방부 인사복지국 차장으로 있다가 6사단장에 부임했다. 그가 사단장으로 나간 계기는 해당 사단의 잇따른 불미스러운 사고 때문이었다. 그의 전임 사단장과 전전 사단장이 각각 총기 강도사건과 성추문 사건으로 연달아 보직 해임을 당한 것이다. 국방부는 안정적 부대 관리를 위한 일종의 구원투수로 그를 사단장으로 내보낸 셈이다. 사단장으로서 그는 매우 혹독하게 부대 관리를 했는데, 참모들과 매주 20~30km의 행군을 함께하며 ‘강한 군인상’을 강조했다. 또 전투 임무 위주로의 사고를 부하들에게 늘 주문했다.
 
  허평환 사단장의 교육훈련은 유명했다. 특히 장병 체력 단련에 관심이 많았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 있었던 전투체육을 강화하고, 동절기 형식에만 그쳤던 ‘알통구보’를 일상화했다. 사단장 시절 교육훈련을 강화한 덕분인지 그는 사단장 임기를 마치고 ‘정병(精兵) 육성’의 산실인 육군훈련소장에 부임했다. 부임하자마자 일명 ‘인분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경고 조치를 받았고, 그 후 교육사 전력발전부장, 육군 전투발전단장을 전전했다.
 
  ‘진급이 어려울 것’이라는 주위의 예상을 깨고 2006년 말 중장 진급과 함께 기무사령관에 올랐다. 기무사령관으로서 그는 ‘국방 정보보호 콘퍼런스’를 개최하는 등 사이버 전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전역한 그는 2012년 ‘국민행복당’을 창당, 돌연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후에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후보 사퇴). 2016~2017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구속되자 태극기 집회를 주도하고, 대한애국당 창당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TK 출신이었던 ‘김종태’와 ‘배득식’
 
  이명박 정부 시절의 기무사령관은 김종태(金鍾泰), 배득식(裵得植) 두 명으로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TK(대구·경북) 출신이다. 이 중 김종태 사령관은 최초의 3사관학교 출신 기무사령관이다. 김 사령관은 15사단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공병대대장 금품수수 의혹에 휘말려 사단장직에서 보직 해임돼 자칫 군복을 벗을 뻔했다. 이후 교육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밀려났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기무사령관으로 기사회생한 것이다. 임명 당시 김종태 사령관은 이명박 정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인 류우익(훗날 통일부 장관 역임)씨와 내외종(內外從)간이란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2012년 고향인 경북 상주에서 국회의원(새누리당)에 당선됐고,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부인이 선거법을 위반한 사실이 적발돼 의원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지난 6·13지방선거에서 상주시장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김종태 사령관의 후임은 경북 달성 출신의 배득식 중장이다. 육군본부 기획총괄장교, 전력기획장교, 전략기획처장, 전력기획참모부장에 이어 방위사업청 사업관리본부장을 지냈다. 배득식 사령관 역시 노무현 정부 시절의 김영한 사령관과 마찬가지로 군내 전력·획득·방위력 분야의 전문가란 평가를 받았다. 이명박 정부 중반기에 임명돼 정권과 운명을 같이한 그는 문재인 정부 들어 기무사 불법 댓글 공작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6개월 만에 교체된 ‘장경욱’과 박지만과 친한 것으로 알려진 ‘이재수’
 

  박근혜 정부 초대 기무사령관인 장경욱은 한때 미묘한 파장을 낳은 인물이다. 임명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교체됐기 때문이다. 장 사령관의 석연치 않은 경질은 많은 뒷말을 낳았다. 특히 장 사령관이 김관진 국방부 장관의 군 인사를 비판한 청와대 직보(直報) 때문에 ‘보복성 경질’을 당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경질된 지 열흘 정도가 지난 2013년 11월 초, 장 사령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4월 인사 때 김 장관의 인사 절차와 방식에 대한 군 내부 불만과 비판 여론을 (청와대에) 여러 차례 보고했다”며 “이런 식으로 교체하는 것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인격 모독적”이라고 밝혀 소문이 일부 사실임을 인정했다. 반면 김관진 장관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장 전 사령관이 대리 근무 체제였는데, 관찰해 보니 여러 가지 능력이나 자질 등이 기무사를 개혁하고 발전시킬 만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진급 심사에서 누락돼 교체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김관진 장관은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도 유임돼 실력자로 부상했다. 특히 독일 육사를 나온 김 장관이 독일 육사 후배들을 군내 요직에 배치했다는 의혹을 낳기도 했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씨의 육사 37기 동기이자 박씨의 절친인 이재수가 후임 기무사령관에 임명돼 논란은 더욱 증폭됐다.
 
  박지만씨가 육사를 졸업한 뒤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돼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을 때 이 사령관만이 거의 유일하게 박씨를 챙겼다고 한다. 심지어 이 사령관이 사석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누나’라고 불렀다고 하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 사령관은 제2작전사령부 인사처장, 육군본부 인적자원개발처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육군 인사사령관 등 인사 계통에서 주로 근무했다. 이재수 중장이 기무사령관에 발탁되자 일각에선 그를 대장으로 진급시키기 위해 일종의 경력 관리 차원에서 기무사령관에 발탁했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재수 사령관은 기무사령관을 끝으로 군복을 벗었기 때문이다.
 
  이재수 사령관의 후임 조현천 기무사령관은 최근 기무사 계엄 문건 파동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하나회’의 후신 격인 ‘알자회’ 소속으로 알려져 있다. 육군본부 인사운영처장, 인사기획처장, 8사단장, 국군사이버사령관을 지낸 조현천 사령관은 TK(경북 예천) 출신이다. 그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그가 ‘최순실’ 또는 ‘우병우’ 라인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설이 나돌았다. 현재 미국에 체류하고 있으며 조만간 귀국해 계엄 문건의 진상을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남영신 신임 기무사령관에게 쏠리는 시선
 
남영신
  문재인 정부 계엄 문건 파동을 수습하고, 기무사 개혁을 위해 임명된 남영신 사령관은 임재문 사령관에 이어 학군 출신으론 역대 두 번째 사령관이다. 군 안팎에선 계엄 문건 파동으로 흐트러진 기무사 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해 비육사 출신이자 문재인 대통령과 같은 PK(부산·경남) 출신인 남 사령관을 기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복수의 보도에 따르면 남영신 사령관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기무사의 해편(解編) 작업을 주도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사실상의 기무사 해체이자 새로운 사령부의 창설을 의미한다. 지난 8월 5일 군 관계자는 그 1차 작업의 일환으로 인적 개혁을 단행, 기무사 부대원 4200여 명이 육해공군으로 소속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그가 주도하는 기무사 해편 작업이 얼마나 지지를 얻을지 속단할 수 없지만, 그에 따른 우려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기무사가 정치에 간여해선 안 되지만, 대공(對共)과 방첩(防諜) 업무를 한다는 점에서 그 기능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우리나라처럼 남북이 체제 대결을 하는 상황에서 이는 숙명과도 같다. 그런 상황에서 기무사를 무력화하려는 듯한 시도는 자칫 북한과 북한 체제를 옹호하는 반(反)국가 세력에 오판의 빌미를 줄 수 있다. 현 정부의 기무사 해편이 우려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기무사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 점에서 기무사는 이미 기존 정치 세력보다 더 자주, 더 많이 개혁을 해온 셈이다. 그런데도 또다시 기무사를 개혁의 ‘제물’로 삼는다면 이는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기무사의 무력화 시도를 가장 반길 세력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의구심은 지우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1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국제그룹 해체    (2018-08-24) 찬성 : 157   반대 : 44
크게바라보면 죽여야지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