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위기의 우파

잔인한 보복의 되풀이, 집권초기 사정(司正)의 역사

“권력과 검찰이 서로 긴장할 때 권력이 탈선하지 않아”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문재인, 적폐청산 명목으로 박근혜·이명박 정권 전방위 수사
⊙ 박근혜, MB의 ‘사자방(4대강, 자원외교, 방위사업)’ 비리 수사
⊙ MB, 노무현의 후원회장 ‘박연차 게이트’ 수사
⊙ 노무현, 대북송금 특검 수용 … 박지원 등 DJ 측근 구속
⊙ DJ, YS 환란(換亂) 수사+북풍·총풍·세풍 수사
⊙ YS,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역사바로세우기’로 구속
⊙ 노태우, ‘5공 청산’으로 전두환 일가와 친인척 구속
⊙ 전두환, 박정희 추도식 막아 … 유신(惟新) 지우기로 박근혜와 앙금
지난 11월 12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바레인으로 출국하기 전 인천국제공항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 6개월간 적폐청산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개혁이냐, 감정풀이냐, 정치보복이냐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아니, 힘센 권력이라도 5년을 버티기 어렵다. 문재인 정권 초기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난다. 전(前) 정권의 적폐를 청산하겠다며 13개 부처에 ‘적폐청산위’가 꾸려졌다. 이미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영어의 몸이다.
 
  검찰의 칼끝은 전전(前前) 대통령인 이명박 전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기무사가 ‘스파르타’라는 조직을 만들어 행한 댓글활동을 문제 삼는다. BBK 재수사 가능성도 거론된다. 지난 11월 12일 바레인으로 출국하기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새 정부의 적폐청산은) 국론을 분열시킬 뿐 아니라 안보 외교에도 도움이 안 된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어쩌면 보수 세력이 완전 괴멸될 때까지 ‘적폐청산’이란 칼바람이 휘몰아칠지 모른다. 검찰은 이전 정부 때도 그랬지만 정권비리를 캐는 칼잡이 역을 떠맡고 있다.
 
  시계를 10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검찰은 지금처럼 ‘물 만난 고기’와 같았다. 당시 수사를 지휘한 대검 중수부장은 이인규, 검찰총장은 임채진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대검 중수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검찰총장의 직할부대였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회장인 박연차씨의 비자금을 수사하며 노 전 대통령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했다. 그 무렵 노무현 일가의 640만 달러 수수 의혹이 불거져 나왔다. 그러나 수사는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파국을 맞았다. 고인이 자살을 택한 것이 수사과정에서 겪은 모욕 때문인지, 아니면 확대 진행되던 수사의 압박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이명박 정부 시절 거셌던 사정(司正)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이명박 정부 초기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무관용의 원칙’을 천명하며 사정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었다. 그러나 당시 야당과 시민단체의 평가는 무척 인색했다. 2010년 초 참여연대는 ‘MB 검찰 2년’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 이명박 정부 1년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나서서 대통령의 뜻을 받들며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허물어뜨렸다면, 이명박 정부 2년의 검찰은 스스로 살아있는 권력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온몸을 던진 해라고 볼 수 있다. 죽은 권력에 대해서는 한없이 가혹하고 살아있는 권력에는 더없이 관대했던 검찰, 과잉 형사범죄화 시도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데 권한을 남용했던 검찰이었다. …〉
 
  10년 전과 지금의 검찰수사 행태를 두고 “살아있는 권력에는 한없이 약하고 죽은 권력에 대해서는 가차 없다”는 말이 나온다. 최근 정권 실세인 전병헌 정무수석 측근의 뇌물 수수 의혹이 흘러나왔다. 이제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메스를 들 태세다.
 
 
  박근혜, MB의 측근 원세훈 국정원장 구속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마치고 2009년 5월 1일 오전 5시 55분경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사택으로 돌아와 측근들과 함께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있다. 맨 위가 노무현 전 대통령.
  새 정부는 집권 초기 자신의 권력을 떨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역대 정부마다 그랬다. 박근혜 정권 때도 ‘칼바람’이 분 것은 마찬가지였다. 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3년 6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극히 편애했던 국정원장 원세훈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했다. 또 이명박 정부 때 추진됐던 이른바 ‘사자방(4대강, 자원외교, 방위사업)’ 비리를 수사했다.
 
  박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부터 4대강 사업의 검증을 얘기했다. “예산 낭비와 국민적 의혹이 없도록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3년 5월 4대강 비리를 캔다며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감사원 등 국가기관을 총동원, 대대적인 감사를 벌였다. 그 결과, 공정거래위는 4대강 건설사들에 역대 최고의 과징금(2014년 8044억원)을 때렸다. 또 검사와 수사관 200여 명과 대검 특수부까지 투입, 4대강 건설에 참여한 건설회사 16곳과 설계회사 9곳의 본사와 지사 30곳을 압수수색했고 입찰가를 담합한 혐의로 11개 건설사 임원 22명을 기소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4대강 사업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미 지난 6월부터 감사원은 4대강 사업에 대한 4번째 감사에 착수한 상태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에선 전 정권인 김대중 정권에 대한 ‘단죄’가 없었을까.
 
  노무현 정권 초기인 2003년 노 대통령은 당시 야당이 요구한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했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2003년 1월 말 감사원은 ‘현대상선 측이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4000억원 가운데 2240억원을 북한에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감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국회는 그해 2월 26일 민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본회의를 열어 ‘대북송금 사건 특검법’ 처리를 강행, 찬성 158표(반대 1표, 기권 3표)로 특검법을 통과시켰다. 노 대통령은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뜻밖에도 특검법을 수용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이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당 박지원 전 대표에 따르면 당시 대북송금 특검은 민주당에서 모두 반대했다. 당 대표였던 정대철, 사무총장 이상수 의원은 물론 노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이라던 김원기 고문도 청와대를 방문해 반대 뜻을 전했다. 그러나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이 야당의 요구, DJ와의 차별화를 위해” 특검을 강행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와 관련, 문 대통령은 지난 2011년 6월 펴낸 회고록 《문재인의 운명》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검찰에도 수사해선 안 된다는 ‘특별지시’를 내리는 방안을 검토했었다. 노 대통령도 그렇게 하기로 했었다. 그러려면 대북송금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치행위’였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이런 계획을 모른) 김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대북송금을) 사전에 몰랐다’고 말해 특검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로 김 전 대통령 측이 꽤 오래 서운해했다. …〉
 
  대북송금 특검수사로 김대중 정권의 핵심권력이었던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구속됐다.
 
  자신의 측근들이 모두 구속되자 화가 난 DJ는 “특검 수사본부에 가겠다”며 동교동 사저를 나서기도 했다. 이를 말리던 비서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때부터 DJ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2003년 5월 10일 구급차에 실려 갔다. 심장 혈관이 막혀 피가 돌지 않아 곧바로 심혈관 확장 수술을 받았고 심장 혈액 투석도 받았다. 그러나 체력이 악화되어 혼수상태가 계속됐다고 한다. 대북송금 특검은 DJ의 사망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DJ, 대북송금 특검으로 충격 받아
 
2004년 5월 17일 대북 불법송금 관련 항소심 결심공판에 출석하고 있는 당시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하지만 DJ 정권도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촉발된 외환위기를 두고 전 정권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충돌한 일이 있다. IMF 당시 경제정책 책임자였던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을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하는 소위 ‘환란 수사’를 진행하면서부터다. YS는 “환란 수사가 표적 수사”라며 강력 반발하기도 했다.
 
  강 부총리와 김 수석은 그러나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았다.
 
  DJ 정권은 또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소위 ‘북풍 사건’으로 구속했다. 권영해 부장이 안기부 정보원을 시켜서 김대중 후보 측의 대북 비밀 접촉을 폭로하게 했다는 것이 북풍 사건의 핵심. 곧이어 총풍 사건도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은 이회창 후보 측에서 북한 측과 접촉해 휴전선에서 총격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민감한 내용이 담겼었다.
 
  DJ는 총풍 수사가 진행 중이던 1998년 11월 3일 전국 검사장 회의를 청와대에서 열고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은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검찰이 수고했지만 국가기강과 안보를 위해 밝혀 달라고 강력히 요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종의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하명(下命)수사였다.
 
  그 후 재판 과정에서 안기부와 검찰의 총풍 주장이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에 대한 총격 요청이 없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이어 세풍 사건이 다시 터졌다. 국세청 차장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위해 기업을 상대로 선거자금을 거두었다는 내용이었다.
 
  DJ 정권 초기 터진 북풍·총풍·세풍 등 3풍 수사는 대선에서 패배한 경쟁자를 표적으로 삼은 수사라는 점에서 정치보복 시비가 일었다. 또한 북풍·총풍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의 대북 기능과 조직, 인력이 노출되는 등 국가 정보기관의 속살이 허무하게 드러나 버렸다.
 
  김영삼 대통령 역시 취임 초기 강력한 사정으로 전임 정권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YS는 일찌감치 슬롯머신 비위와 관련해 6공 황태자이자 노태우 전 대통령의 처남인 박철언 전 장관을 구속했다.
 
  그리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차례로 구속시켰다. YS는 3당 합당으로 정권을 창출했지만 “군부와 야합했다”는 민주화 세력들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YS는 결국 ‘역사바로세우기’로 1995년 11월에 노태우를 구속한 데 이어 그해 12월 전두환까지 구속시켰다. 전·노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1995년 10월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이 담긴 은행 예금 계좌 조회표를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검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폭로 다음 날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 수사는 처음에 비자금에 대한 수사로 한정했으나, ‘12·12 사태와 5·18 내란’까지 수사를 확대했고 국회가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검찰은 형법상 내란죄에 대해서까지 수사를 확대, 두 전직 대통령을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 혐의로 기소했고, 이어 5·18 내란 사건에 대해서도 1996년 1월 추가 기소해 재판에 넘겼다.
 
  YS는 그러나 집권 말기인 1997년 12월 전·노 전 대통령을 ‘국민대통합’의 명분으로 특별 사면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전두환과 박근혜의 악연
 
1996년 9월 5일 12·12 및 5·18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먼저 피고인석에 와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 때는 어땠을까. 그 역시 검찰 권력을 총동원, ‘5공 청산’을 명분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한 지 불과 두 달 만인 1988년 3월 친동생 전경환씨를 ‘새마을 비리’로 구속했다.
 
  그 무렵 국회 5공비리특위와 광주특위가 마련돼 5공 비리를 뒤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전두환의 친인척 8명을 줄줄이 구속했다.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거액을 챙긴 사촌동생 전순환씨, 노량진 수산시장 영업권 불법인수와 관련된 친형 전기환씨, 공금을 횡령한 처남 이창석씨 등이 수감됐다. 또 전두환의 오른팔이었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 차기헌 전 교통부 장관, 김종호 전 건설부 장관, 이학봉 의원 등 5공 비리 관련 구속자 수가 50명에 육박했다.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8년 11월 23일 대국민 사과와 함께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로 떠나야 했고 1년 넘게 은둔하다 이듬해 12월 31일 국회 증언대에 서야 했다.
 
  그렇다면 전두환 정권은 전임 박정희 정권과 어떤 관계였을까.
 
  1979년 12·12를 통해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집권 초기 ‘박정희 유신(惟新) 세력’과 선을 그었다. 또 “청와대 금고에서 발견했다”며 6억원을 ‘박근혜 영애’에게 전달한 일도 있다.
 
  이후 6억원은 박근혜에게 오래도록 멍에로 남았다. 2012년 대선 당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는 TV토론회에서 “전두환 정권에서 6억원을 받았다. 비자금 아닌가. 왜 세금을 안 내나”며 박근혜 후보를 압박했다.
 
  전두환은 1980년 박근혜가 이끌던 ‘새마음봉사단’(옛 구국여성봉사단)을 강제 해산했고, 또 새마음봉사단이 운영하던 골목유치원도 모두 폐쇄해 버렸다. 그해 4월 박근혜는 영남대 3대 이사장에 취임했지만 7개월 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양친의 추도식은 집안 제사로 대신해야 했다. 추도식이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것은 10·26 이후 7년 만인 1987년에야 가능해졌다. 5공의 신군부는 박정희 추도식을 강제로 막았던 것이다.
 
  기자와 만난 5공 초기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허화평씨의 말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제가 직접 박근혜 영애를 찾아간 일이 있어요. 신당동 자택으로 찾아가 그가 이끌던 ‘새마음봉사단’을 해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하게 말씀드렸어요.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지 않는 봉사사업은 결국 돈 가진 사람의 도움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어요. 반유신 바람이 거센 마당에 재야 투쟁의 빌미가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金正濂)씨는 “박정희 추도식을 6년간 하지 못한 것은 전두환 대통령 측이 못하게 막았기 때문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심지어 신군부는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한 모든 자료마저 없애 버렸습니다. 제가 한국경제사를 쓰려고 박 대통령 시절 관련 자료를 찾았더니 중앙 부처는 물론 지방까지 대통령 보고 자료가 사라졌더군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아예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군부의 지시로 없애 버린 것 같아요. 추도식을 국립묘지에서 못하니 박근혜씨의 집에서 친지들만 몇 명 모여 조촐하게 제사를 올렸어요.”
 
  박근혜는 1988년 11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떠들던 분이 10·26 이후 아버지를 비난하고 유신을 비난했다”고 토로한 일이 있다.
 
  그런 섭섭함이 마음에 남아서였을까. 그는 18대 대선 후보가 됐을 때 권양숙 여사나 이희호 여사 등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섰던 전직 대통령의 부인들을 찾아가 인사했지만 전두환의 연희동 사저를 찾진 않았다.
 
  그리고 집권 초기인 2013년 7월 검찰은 ‘추징금 특별환수팀’을 꾸려 전두환의 연희동 사저와 전씨 일가의 주택, 회사 등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당시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의 직접 지시는 없었겠지만 검찰의 압수수색 배경에 박 대통령의 의지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는 “박정희의 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섭섭함을 털어놨다.
 
 
  “검찰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했다”(심재륜)
 
  새 정부의 전 정권에 대한 하명수사가 ‘전가의 보도’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5년 단임 대통령제의 비극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드라이브가 과거 정부의 집권 초기보다 더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수사는 아무리 공정하게 진행돼도 당하는 쪽에선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동의를 모두 얻기도 어렵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은 늘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문제는 정권의 하명을 받은 검찰이 거악(巨惡)을 일소한다면서 살아있는 권력 대신 죽어 가는 권력의 치부를 들춘다는 점이다. 한때 존경받는 검사였던 심재륜(沈在淪) 전 부산고검장은 “검찰이 노골적으로 권력의 시녀 노릇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검찰의 과도한 권력과 정치적 편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느 정권이든 권력을 잡게 되면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검찰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국가를 통제할 수 있는 유혹에 빠진다.
 
  역대 정권마다 검찰개혁을 부르짖었지만 번번이 실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몇 해 전 기자는 서울대 한인섭(韓寅燮) 교수(법학전문대학원)를 취재한 일이 있다. 그는 권력과 검찰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권력과 검찰의 유착이 이뤄지면 검찰 내부에서 계속 문제가 터지게 됩니다. 권력과 검찰이 서로 긴장하며 견제할 때, 권력도 탈선을 하지 않게 됩니다.”
 
  한 교수는 현 정부에서 ‘법무·검찰개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의 말처럼 권력과 검찰이 얼마나 긴장하며 견제할지 지켜볼 일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7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정기구독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