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K 민심, 4개월 사이 1위 후보 5차례 바꿔… 유승민은 2~4% 저조한 지지율
⊙ 아버지 유수호는 반(反)박정희·반유신… 아들 유승민은 반박근혜로 탄핵 주도
⊙ 유승민이 외치는 ‘경제민주화’, 1992년 아버지 유수호가 먼저 주장
⊙ 유수호, 민자당 탈당 후 새한국당→국민당→신민당→자민련으로 당적 옮기다 정계 은퇴
⊙ 유승민, 대선보다 대선 이후의 행보에 더 관심 가
⊙ 아버지 유수호는 반(反)박정희·반유신… 아들 유승민은 반박근혜로 탄핵 주도
⊙ 유승민이 외치는 ‘경제민주화’, 1992년 아버지 유수호가 먼저 주장
⊙ 유수호, 민자당 탈당 후 새한국당→국민당→신민당→자민련으로 당적 옮기다 정계 은퇴
⊙ 유승민, 대선보다 대선 이후의 행보에 더 관심 가
- 지난 4월 7일 오전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 5층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바른정당 부산 필승결의대회’에서 유승민 후보가 대선 필승을 다짐하고 있다.
바른정당 유승민(劉承旼) 대선 후보가 과연 대선 레이스를 완주할까. 4월 10일 발표된 《조선일보》·칸타퍼블릭 여론조사에서 유 후보 지지율은 1.9%. 그의 고향인 대구·경북에서도 4%였다. (조사일시 4월 7~8일. 그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TK에서조차 외면당한 채 ‘마이 웨이’를 걸을지 미지수다. 막대한 대선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지 바른정당 내부에서조차 계산이 안 선다는 얘기가 나온다.
선거 때마다 보수 표심을 택해온 TK 민심은 지난해 4·13총선에서 뜻밖의 선택을 했다. ‘배신자 프레임’에도 유 후보를 당선시켰고 김부겸(더불어민주), 주호영(바른정당), 홍의락(무소속) 의원에게 금배지를 안겼다. 경북은 몰라도 대구만큼은 보수 대신 중도 표심이 작동했다.(경북은 새누리당의 싹쓸이였다.)
대통령 탄핵 이후 TK 민심이 급속히흔들리는 양상이다. 보수(반기문·황교안)→진보(안희정·문재인)→중도(안철수) 후보로 지지 후보가 요동치며 지난 4개월 동안 1위 후보가 5차례나 바뀌는 롤러코스트 민심을 보였다. 1위 후보의 지지율 변화 양상은 이렇다.
반기문 24.5%(《조선일보》 ‘차기 대통령 적합도’ 2016년 12월 30~31일 조사)→황교안 20.3%(《조선일보》 3월 3~4일)→안희정 26%(한국갤럽 ‘대선 후보 지지도’ 3월 14~16일)→문재인 25%(한국갤럽 3월 28~30일)→안철수 40%(《조선일보》 4월 7~8일)로 요동쳤다.
반면 같은 기간 유 후보는 2.5%→3.1%→기타 후보로 분류(이름 없음)→2%→4%로 지지율 변화가 미미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지지율도 정체되긴 마찬가지. 이념보다 ‘될 사람’을 밀자는 전략적 선택이 작동한 것일까.
바른정당 선대위조직본부장인 김성태 의원은 유 후보의 지지율 답보를 두고 “연구대상이다. 저희도 속이 터지고 답답해 죽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 후보는 안철수·홍준표 후보와의 단일화 가능성을 일축, 완주의 뜻을 밝혔다. 4월 10일 대전 지역 언론과의 간담회에서 유 후보는 “안철수 후보는 진보 후보이기 때문에 단일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고 홍준표 후보는 재판을 받는 무자격 후보라서 단일화할 수 없다. 저는 ‘제 갈 길’을 가겠다”고 했다.
유 후보의 ‘제 갈 길’ 선언이 아버지인 고(故) 유수호(劉守鎬) 전 의원을 떠올리게 한다. 유 후보는 한 인터뷰에서 “형제 중에선 용모나 성격 측면에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13대(1988년)·14대(1992년) 국회의원을 지낸 유 전 의원 역시 ‘황소 고집’으로 유명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아버지는 아들이 정계에 나서려 할 때 두 마디의 덕담을 전했다고 한다. “의협심을 가져라. 절대 비굴하지 마라.”
‘반(反)유신’ ‘양심수 석방’ 주장한 민정당 초선
유수호(직함 생략)는 부산지법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43세 때(1973년) 판사 재임용에 탈락된 인물이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법조계 주변에서는 그가 반(反)박정희 대통령 시위를 주도한 학생을 석방시켜 정권에 밉보였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유 후보는 2015년 《월간중앙》 12월호 인터뷰에서 선친이 겪은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선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울산 지역 개표 결과를 조작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산지법 부장판사였던 아버지께서는 그해 8월 17일 조작을 주도한 당시 울산시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27일 시위를 주도했던 부산대 총학생회장의 구속적부심에서는 그에게 석방을 허가했습니다.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보신 거죠. 그 총학생회장이 나중 노무현 정부에서 행자부 장관을 지낸 김정길씨입니다.”
유 후보는 “선친께서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 두 사건이 (판사) 재임용 탈락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며 “제가 경북고에 갓 입학한 무렵이었는데 재임용 탈락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법복을 벗은 유수호 변호사는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선후배 위계질서가 엄한 대구 법조계를 감안하면 무척 이른 나이에 회장에 선출됐다고 한다)과 대한변협 부회장을 거쳐 5공 시절인 1985년 민정당 대구 제1지구당 위원장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노태우·정호용·김윤환 등과 경북고 동기(32회)다.
‘로열패밀리’였던 유수호는 여당 초선답지 않았다. 민정당이 반대 당론으로 정한 야당의 양심수 석방에 가담했고 유신 시절의 긴급조치법을 “위정자 구미에 맞는 법”이라 비판했다.
1988년 7월 20일 국회 법사위의 법무부 업무현황 보고 때였다. 민정당 초선 유수호 의원은 정해창 법무장관에게 진땀 나는 질문을 던졌다.
“동료 의원들의 주장은 620명의 양심수가 있다고 하고 본회의에서 본 의원이 듣기에는 661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또 우리 법무장관의 답변은 41명입니다. (중략)
본 의원은 양심수 석방결의안에 대해 당론에 좇아 일응 반대했습니다만, 적어도 입법부에서 이런 석방결의안이 나왔으면 법무장관은 진정 화해하고 민주(주의를) 발전하는 그러한 정치를 창출하는 이 마당에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통치권자에게 석방을 건의하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통치권자’는 유수호의 친구인 노태우 대통령이다.
유수호는 1988년 《월간조선》 8월호 ‘민주정부로 가는 길’ 좌담회에 참석해 “긴급조치법 따위는 위정자 구미에 맞는 법이다. 국민은 진심으로 그 법을 거부했다”고 했다. 야당이나 재야인사가 할 법한 말이었다. 다음은 당시 《월간조선》에 실린 그의 발언 일부다.
“지나간 3, 4공화국 때 만든 긴급조치법 따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한마디로 위정자가 자기네들의 구미에만 맞는 법을 제정한 것이지, 국민을 위한 법을 제정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유신 시절 긴급조치로 재판받은 피의자에게 7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하곤 했지만 국민은 진심으로 그 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5대 총선 앞두고 유수호 돌연 정계 은퇴
유수호는 13대 때 민정당, 14대 때는 민자당 간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의외의 선택을 한다. 1992년 민자당을 탈당, 새한국당에 합류한 것이다. 이후 이종찬 의원 진영에 서면서 정치인생이 180도 달라진다.
새한국당은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민정계 이종찬이 민주계 김영삼에게 패하자 유수호·박철언·이영일·장경우 의원 등과 동반 탈당, 대선을 두 달여 앞두고 생긴 급조 정당이다.
새한국당은 이후 대선 후보로 이종찬을 추대했으나 좀처럼 지지율이 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유수호는 박철언·김용환 등과 함께 다시 탈당,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종찬 후보도 12월 13일 국민당 정주영 후보의 지지를 선언한다.
국민당은 1994년 박찬종 의원의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며 당명이 신민당으로 바뀐다. 이듬해 신민당이 자민련과 합당하면서 유수호의 당적 역시 자민련으로 변한다. 그러나 1995년 9월 24일 그는 15대 총선 직전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떠나버렸다.
당시 유수호는 불출마 변으로 “더 이상 정치를 해야 할 명분과 사명을 찾기 어렵다. 법조인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정치권 주변에서는 “1992년 반YS 진영에 선 뒤 민자당을 탈당, 국민당과 신민당을 거쳐 자민련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심각한 회의에 빠졌고 몇 번씩 그만두겠다는 말을 해왔다”고 입을 모았었다.
유수호 의원이 1992년 민자당을 떠날 당시 대구는 반YS의 야도(野都)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때 잘나가던 TK가 YS 내각에서 희귀 존재가 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일보》 1993년 4월 3일 자 2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 지금 서울의 정가엔 대구는 야도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있다. 부산·경남의 부상과 대구·경북의 퇴조, 영남 양대 축 사이의 이 뚜렷한 대비가 그 근거다. (중략) 청와대 비서실장 이하 수석비서관 9명 중 4명이 부산중고 동문, 이른바 PK이다. 반면 한때 사회 엘리트층을 지배했던 TK는 내각에서 희귀 존재가 됐다.…〉
1992년 14대 총선 당시 대구 지역 의석은 민자 8, 국민 2, 무소속 1석 구도였으나 그해 12월 치러진 대선 당시엔 민자 6, 국민 5석으로 바뀌었다. TK가 YS 찬반으로 갈라진 결과였다. 대선 후엔 민자 5, 국민 3, 무소속 3석으로 또 바뀌었다. 민자당 의석 수가 반토막, 대구는 반YS 태풍의 진원지였다.
그 태풍의 한 갈래였던 유수호는 자민련으로 당적이 바뀐 뒤 돌연 15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떠났다. 당시 대구에 자민련 ‘녹색바람’이 불 때여서 그의 선택은 의외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후 그는 일절 여의도 쪽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TK 민심, 유수호를 떠올리며 유승민 바라봐
아들은 민정당→민자당→새한국당→국민당→신민당→자민련으로 이어진 아버지의 선택이 불가피했거나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을까. 또 아버지는 민자당의 뿌리인 새누리당을 무너뜨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딸을 탄핵시킨 아들의 선택에 어떤 평가를 내릴까.
어쩌면 아들은 아버지의 정치행로를 떠올리며 새누리당을 떠나는 순간, 자신이 택해야 할 경우의 수가 의외로 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아버지가 반박정희에 섰던 것처럼 아들 역시 반박근혜에 설 수밖에 없는 사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유 후보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평행선을 걸었다. 한때 지근에서 보좌했지만 그 기간이 오래가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이 소통에 인색하고 ‘궁정적(宮廷的)’인 것도 사실이지만 집권당 원내대표 시절, 유 후보의 공격이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대통령 탄핵도 사실상 유 후보의 결심이 있어 가능했다.
유 후보는 풍찬노숙을 각오하고 바른정당을 만들었다. 선친이 남긴 “의협심을 가져라. 절대 비굴하지 마라”는 유훈을 가슴 깊이 새겼는지 모른다.
그는 대선보다 대선 이후의 행보에 더 관심이 가지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정치적 야심도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 영원히 배신자의 프레임에 갇힌 채 정계를 떠날지 모른다. 지금 TK 민심은 아버지 유수호를 떠올리며 아들 유승민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다.⊙
선거 때마다 보수 표심을 택해온 TK 민심은 지난해 4·13총선에서 뜻밖의 선택을 했다. ‘배신자 프레임’에도 유 후보를 당선시켰고 김부겸(더불어민주), 주호영(바른정당), 홍의락(무소속) 의원에게 금배지를 안겼다. 경북은 몰라도 대구만큼은 보수 대신 중도 표심이 작동했다.(경북은 새누리당의 싹쓸이였다.)
대통령 탄핵 이후 TK 민심이 급속히흔들리는 양상이다. 보수(반기문·황교안)→진보(안희정·문재인)→중도(안철수) 후보로 지지 후보가 요동치며 지난 4개월 동안 1위 후보가 5차례나 바뀌는 롤러코스트 민심을 보였다. 1위 후보의 지지율 변화 양상은 이렇다.
반기문 24.5%(《조선일보》 ‘차기 대통령 적합도’ 2016년 12월 30~31일 조사)→황교안 20.3%(《조선일보》 3월 3~4일)→안희정 26%(한국갤럽 ‘대선 후보 지지도’ 3월 14~16일)→문재인 25%(한국갤럽 3월 28~30일)→안철수 40%(《조선일보》 4월 7~8일)로 요동쳤다.
반면 같은 기간 유 후보는 2.5%→3.1%→기타 후보로 분류(이름 없음)→2%→4%로 지지율 변화가 미미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지지율도 정체되긴 마찬가지. 이념보다 ‘될 사람’을 밀자는 전략적 선택이 작동한 것일까.
바른정당 선대위조직본부장인 김성태 의원은 유 후보의 지지율 답보를 두고 “연구대상이다. 저희도 속이 터지고 답답해 죽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 후보는 안철수·홍준표 후보와의 단일화 가능성을 일축, 완주의 뜻을 밝혔다. 4월 10일 대전 지역 언론과의 간담회에서 유 후보는 “안철수 후보는 진보 후보이기 때문에 단일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고 홍준표 후보는 재판을 받는 무자격 후보라서 단일화할 수 없다. 저는 ‘제 갈 길’을 가겠다”고 했다.
유 후보의 ‘제 갈 길’ 선언이 아버지인 고(故) 유수호(劉守鎬) 전 의원을 떠올리게 한다. 유 후보는 한 인터뷰에서 “형제 중에선 용모나 성격 측면에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13대(1988년)·14대(1992년) 국회의원을 지낸 유 전 의원 역시 ‘황소 고집’으로 유명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아버지는 아들이 정계에 나서려 할 때 두 마디의 덕담을 전했다고 한다. “의협심을 가져라. 절대 비굴하지 마라.”
‘반(反)유신’ ‘양심수 석방’ 주장한 민정당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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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11월 8일 유수호 전 의원 빈소가 마련된 대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유승민 후보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는 모습. 곁에 황교안 국무총리,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보낸 조화가 세워져 있다. 사진=뉴시스 |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선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울산 지역 개표 결과를 조작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산지법 부장판사였던 아버지께서는 그해 8월 17일 조작을 주도한 당시 울산시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27일 시위를 주도했던 부산대 총학생회장의 구속적부심에서는 그에게 석방을 허가했습니다.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보신 거죠. 그 총학생회장이 나중 노무현 정부에서 행자부 장관을 지낸 김정길씨입니다.”
유 후보는 “선친께서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 두 사건이 (판사) 재임용 탈락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며 “제가 경북고에 갓 입학한 무렵이었는데 재임용 탈락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법복을 벗은 유수호 변호사는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선후배 위계질서가 엄한 대구 법조계를 감안하면 무척 이른 나이에 회장에 선출됐다고 한다)과 대한변협 부회장을 거쳐 5공 시절인 1985년 민정당 대구 제1지구당 위원장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노태우·정호용·김윤환 등과 경북고 동기(32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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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8월 《월간조선》 좌담회에 참석한 유수호 의원(왼쪽)과 서울대 법대 안경환 교수. |
1988년 7월 20일 국회 법사위의 법무부 업무현황 보고 때였다. 민정당 초선 유수호 의원은 정해창 법무장관에게 진땀 나는 질문을 던졌다.
“동료 의원들의 주장은 620명의 양심수가 있다고 하고 본회의에서 본 의원이 듣기에는 661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또 우리 법무장관의 답변은 41명입니다. (중략)
본 의원은 양심수 석방결의안에 대해 당론에 좇아 일응 반대했습니다만, 적어도 입법부에서 이런 석방결의안이 나왔으면 법무장관은 진정 화해하고 민주(주의를) 발전하는 그러한 정치를 창출하는 이 마당에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통치권자에게 석방을 건의하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통치권자’는 유수호의 친구인 노태우 대통령이다.
유수호는 1988년 《월간조선》 8월호 ‘민주정부로 가는 길’ 좌담회에 참석해 “긴급조치법 따위는 위정자 구미에 맞는 법이다. 국민은 진심으로 그 법을 거부했다”고 했다. 야당이나 재야인사가 할 법한 말이었다. 다음은 당시 《월간조선》에 실린 그의 발언 일부다.
“지나간 3, 4공화국 때 만든 긴급조치법 따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한마디로 위정자가 자기네들의 구미에만 맞는 법을 제정한 것이지, 국민을 위한 법을 제정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유신 시절 긴급조치로 재판받은 피의자에게 7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하곤 했지만 국민은 진심으로 그 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5대 총선 앞두고 유수호 돌연 정계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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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22일 대구 남구의 유승민 후보 본가 모습. 작년 4·13총선을 앞두고 빚어진 공천파동 당시 유승민 후보가 언론을 피해 잠적했을 때다. 평소 아들 유 후보는 고민이 있을 때 본가 2층의 선친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뉴시스 |
새한국당은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민정계 이종찬이 민주계 김영삼에게 패하자 유수호·박철언·이영일·장경우 의원 등과 동반 탈당, 대선을 두 달여 앞두고 생긴 급조 정당이다.
새한국당은 이후 대선 후보로 이종찬을 추대했으나 좀처럼 지지율이 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유수호는 박철언·김용환 등과 함께 다시 탈당,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종찬 후보도 12월 13일 국민당 정주영 후보의 지지를 선언한다.
국민당은 1994년 박찬종 의원의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며 당명이 신민당으로 바뀐다. 이듬해 신민당이 자민련과 합당하면서 유수호의 당적 역시 자민련으로 변한다. 그러나 1995년 9월 24일 그는 15대 총선 직전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떠나버렸다.
당시 유수호는 불출마 변으로 “더 이상 정치를 해야 할 명분과 사명을 찾기 어렵다. 법조인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정치권 주변에서는 “1992년 반YS 진영에 선 뒤 민자당을 탈당, 국민당과 신민당을 거쳐 자민련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심각한 회의에 빠졌고 몇 번씩 그만두겠다는 말을 해왔다”고 입을 모았었다.
유수호 의원이 1992년 민자당을 떠날 당시 대구는 반YS의 야도(野都)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때 잘나가던 TK가 YS 내각에서 희귀 존재가 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일보》 1993년 4월 3일 자 2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 지금 서울의 정가엔 대구는 야도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있다. 부산·경남의 부상과 대구·경북의 퇴조, 영남 양대 축 사이의 이 뚜렷한 대비가 그 근거다. (중략) 청와대 비서실장 이하 수석비서관 9명 중 4명이 부산중고 동문, 이른바 PK이다. 반면 한때 사회 엘리트층을 지배했던 TK는 내각에서 희귀 존재가 됐다.…〉
1992년 14대 총선 당시 대구 지역 의석은 민자 8, 국민 2, 무소속 1석 구도였으나 그해 12월 치러진 대선 당시엔 민자 6, 국민 5석으로 바뀌었다. TK가 YS 찬반으로 갈라진 결과였다. 대선 후엔 민자 5, 국민 3, 무소속 3석으로 또 바뀌었다. 민자당 의석 수가 반토막, 대구는 반YS 태풍의 진원지였다.
그 태풍의 한 갈래였던 유수호는 자민련으로 당적이 바뀐 뒤 돌연 15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떠났다. 당시 대구에 자민련 ‘녹색바람’이 불 때여서 그의 선택은 의외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후 그는 일절 여의도 쪽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TK 민심, 유수호를 떠올리며 유승민 바라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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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4·13 총선을 앞둔 3월 28일 유승민 후보의 대구 동구을 선거사무실에 당시 박근혜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당시 새누리당은 유 후보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않았고 그는 무소속 당선됐다. 이후 20대 국회에서 박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데 앞장섰다. |
어쩌면 아들은 아버지의 정치행로를 떠올리며 새누리당을 떠나는 순간, 자신이 택해야 할 경우의 수가 의외로 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아버지가 반박정희에 섰던 것처럼 아들 역시 반박근혜에 설 수밖에 없는 사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유 후보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평행선을 걸었다. 한때 지근에서 보좌했지만 그 기간이 오래가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이 소통에 인색하고 ‘궁정적(宮廷的)’인 것도 사실이지만 집권당 원내대표 시절, 유 후보의 공격이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대통령 탄핵도 사실상 유 후보의 결심이 있어 가능했다.
유 후보는 풍찬노숙을 각오하고 바른정당을 만들었다. 선친이 남긴 “의협심을 가져라. 절대 비굴하지 마라”는 유훈을 가슴 깊이 새겼는지 모른다.
그는 대선보다 대선 이후의 행보에 더 관심이 가지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정치적 야심도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 영원히 배신자의 프레임에 갇힌 채 정계를 떠날지 모른다. 지금 TK 민심은 아버지 유수호를 떠올리며 아들 유승민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다.⊙
경제민주화, 아버지 유수호가 먼저 주장 유승민 후보의 경제공약은 ‘경제민주화’가 골자다. 대기업 부당 거래를 손질하는 내용을 담은 대선공약을 지난 2월 내놓았다. 경제공약에는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 회사 설립 방지와 그룹 내 내부거래 금지를 담았다. 유 후보는 “경제 정의가 살아 있는 공정한 시장경제를 만들겠다”는 주장을 여러 차례 했었다. 유 후보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는 누구에게 영향 받은 것일까. 기자는 1992년 《국회보》 1월호에 실린 유수호 의원의 〈정치민주화와 경제민주화〉라는 에세이를 찾았다. 《국회보》는 국회사무처가 발간하는 월간지다. ‘경제민주화’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 그는 “빈부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는 한 모든 사람이 경제적으로 평등할 수는 없으며 그만큼 경제적 정의는 손상될 수밖에 없다”고 썼다. 유 의원은 “우리 사회의 경쟁은 공정하고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는가?” 반문하며 “경쟁의 과정이 자유롭고 공정하지 못할 때 승리의 대가로 획득한 부는 정당성을 잃게 되고 경제민주화가 손상된다”고 했다. 또 “과거 경제력의 세습이 아무런 저항 없이 진행돼 왔다”며 “부가 후대의 노력 없이 계승된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며,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심리학에서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안정, 혹은 좌절과 갈등을 겪게 된다고 말한다. 어쩌면 유 후보는 아버지가 걸었던 정치인의 길을 답습하고 있는지 모른다. 당적을 옮기며 결국 정계를 떠났던 그 길마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