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위 반란에 대해 “문재인이 양산에서 버튼을 눌렀다”고 생각
⊙ 중앙위에서 친노·운동권들의 비례대표 선정 결과 공격에 침묵하는 비대위원들에 분노
⊙ “조부(김병로)가 터를 닦은 야당 재건하겠다는 생각 강했다”(측근)
⊙ 중앙위에서 친노·운동권들의 비례대표 선정 결과 공격에 침묵하는 비대위원들에 분노
⊙ “조부(김병로)가 터를 닦은 야당 재건하겠다는 생각 강했다”(측근)
- 2016년 3월 22일 오후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자택에서 나와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지난 3월 20일 밤 10시경. 김종인(金鍾仁) 더불어민주당(더민주) 비상대책위 대표는 정치권 밖에서 자신에게 각종 정치 현안과 관련해 조언을 하는 지인에게 전화를 했다. 이 지인은 김종인 대표의 더민주 비대위 대표 취임 후 김 대표의 속마음을 언론에 전해 주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이를테면 김 대표가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맡기로 했다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부 언론이 “김 대표 부부가 오래 전부터 문재인 부부와 깊은 관계였다”고 보도한데 대해 “김 대표와 문 전 대표는 부부끼리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고 팩트를 바로잡아 주는 일도 그의 일이었다. 평소 이른 아침에 주로 전화 통화를 했었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 김 대표의 전화를 받은 적이 없는 이 지인은 “무언가 급한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 대표의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김 대표는 이 지인에게 “내일부터 당사에 나가지 않겠다”며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려도 좋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실제 이튿날인 21일 더민주 당사에 출근하지 않고 광화문에 있는 개인 사무실로 출근했다.
김 대표가 당무를 거부하기 전인 20일 오전 더민주 김성수 대변인은 전날 심야에 비대위가 결정한 비례대표 명단을 발표했다. 당선 가능권인 20위까지 발표했는데 과거와 달리 운동권 출신 대신 전문가들의 비중이 높은 비례대표 선정이었다.
비대위가 작성한 전문가 중심의 비례대표 명단은 이날 오후에 열린 중앙위에서 거부됐다. 더민주 중앙위는 현역 의원과 지역위원장 등 487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친노(親盧)와 운동권 출신이 다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비례대표 선정 방식, 선정 권한, 비례대표 후보 자격, 김종인 2번 등에 이의를 제기하며 비대위가 결정한 비례대표 명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광진 의원은 이날 중앙위에서 김 대표를 향해 “김종인 대표는 2번이 아니라 17번을 받고 배수진을 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김병관 후보 사무실 개소식 참석을 이유로 중앙위 도중 자리를 떴다.
김 대표는 이날 저녁 일부 언론에 “국민들 보기에 야당이 과거와 똑같다는 인상을 줘서는 수권 정당이 될 수 없다. 중앙위가 비례대표 명단을 끝까지 거부한다면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판단할 것이다. 자기들끼리 비례대표 선발하고 선거 치르면 된다”는 입장을 전했다. 김 대표는 이날 밤 심야 지도부 회의에서 “비례대표 명단을 수정하면 대표직을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화난 상태에서 지인에게 밤늦게 전화
이튿날인 21일 아침, 비대위원들은 일찍부터 국회와 여의도 메리어트 호텔을 오가며 대책을 논의했다. 비례대표 2번인 김 대표를 14번으로 내리고 당선 안정권의 20%선인 7명을 대표 전략공천 몫으로 하되 10명 단위 세 그룹으로 나눈 비례대표 후보군의 칸막이를 없애자는 안을 마련했다. 김 대표는 이 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김 대표는 기자들에게 “사람을 인격적으로, 그따위로 대접하는 정당에 가서 일해 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말도 했다. 그는 또 ‘비례대표’ 파동의 핵심은 “정체성 문제 때문”이라면서 ‘셀프 공천’ 운운 등 자신이 비례대표에 욕심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데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김 대표가 대표직을 사퇴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날부터다. 같은 날 저녁, 전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난 중앙위가 다시 열렸다. 중앙위는 새벽까지 가는 토론 끝에 전략공천 후보 8명을 비례대표 당선 안정권에 배치하는 내용의 수정안을 마련하고 나머지 인원에 대해서는 칸막이를 없애고 투표로 순번을 정했다.
중앙위가 새벽에 수정안과 함께 비례대표 순번을 정한 3월 22일 오후 경남 양산에 머물고 있던 문재인(文在寅) 대표가 급거 상경했다. 전날 일부 언론에 보도된 ‘김종인 사퇴’ 소식을 듣고 김종인 대표를 만나러 온 것이다.
문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 구기동 김 대표의 집을 찾아가 50분간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는 문 전 대표에게 “총선 승리와 나아가서는 정권교체를 위해서도 당의 확장성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비례대표 명단을 짠 것”이라고 말했고, 문 전 대표는 중앙위에서 비대위가 제시한 비례대표 후보 명단이 중앙위에서 뒤집어진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전 대표의 방문이 있은 후 김 대표는 오후 늦게 비대위 회의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더민주 비대위원들은 “잘 모시지 못해 송구하다”고 했지만 김 대표는 자신의 거취에 대해 “좀 더 고민의 시간을 갖겠다”며 구기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우윤근, 박영선, 표창원, 김병관 등 비대위원 4명은 심야에 김 대표를 찾아갔다. 김 대표의 사퇴를 만류하기 위해서였다. 2시간가량을 기다린 후 이들은 10시30분부터 김 대표를 한 시간가량 면담했다. 김 대표는 다음 날인 23일 오후 2시경 “고민 끝에 당에 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대표직 유지 의사를 밝혔다. 중앙위의 비례대표 후보 선정도 받아들였다. 자신은 원래대로 비례대표 2번을 배정 받았다. 다음은 김 대표 주변에서 비례대표 파동 등 저간의 사정을 지켜본 김 대표 지인과의 문답이다.
— 20일 밤 전화했을 때는 김 대표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나 있었나.
“당 정체성과 관련한 부분이었다. 평소에도 ‘더민주 사람들이 정체성, 정체성 하는데 ‘도대체 그 정체성이 뭐냐’고 물으면 제대로 답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날 중앙위가 비례대표 선정 방식에 시비를 건 이유가 자신들이 말하는 정체성을 핑계로 운동권 출신을 더 넣고 싶다는 것임을 간파했다. 게다가 전날 비례대표 선정 때 칸막이식 등의 후보 선정이 당헌·당규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던 비대위원들이 정작 중앙위에서 그 문제가 제기되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거나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은 행태에 분노했다.”
김종인 대표가 호남이 자신의 뿌리임을 강조한 이유
— 그날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나.
“그런 말은 없었다. 거취와 관련해서는 다음 날 당사에 나가지 않겠다는 말만 있었다.”
— 문재인 대표에 대한 언급은 없었나.
“그날인가, 그다음 통화였는가는 시점이 정확하지 않은데 김 대표가 ‘중앙위에서 정체성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뒤에 누가 있기 때문 아닌가’고 해서 내가 ‘양산에서 버튼 눌렀다는 얘기냐(문 대표의 의중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냐)’ 하고 물었더니 ‘그거야 말 안 해도 아는 이야기 아니냐’고 했다. 문 대표에 대한 불신이 표출된 것이다. ‘셀프 공천’이라는 말에도 상당히 격분했다.”
— 그렇다면 김 대표는 그 파동 후 더민주가 ‘도로 문재인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본인이 그걸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상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더민주가 사실상 문재인당이라는 현실을 부인하기는 어렵게 됐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민주의 당 대표로서 잔류하기로 했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딱 한 단어로 표현하면 책임감이다. 80을 바라보는 노(老) 정객이 야당을 살리겠다고 나선 데는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신 조부(김병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내 스스로 짐작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그 터전을 잡은 한국 야당을 손주가 재건하겠다는 소명감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분의 성품상 자존심이 상한다고 해서 물러나면 무책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 더민주 대표로 갈 때 주변 사람을 한 명도 데려가지 않았는데.
“내가 옆에서 일을 보좌할 사람을 데려가지 않을 거면 바깥에다가 팀을 꾸려서 두면 어떻겠느냐는 건의도 했었다. 마침 광화문에 사무실이 있으니까 서너 명 팀을 짜서 일종이 상황실처럼 정책도 판단하고 대안도 제시하고 하는 식으로 운용하면서 보좌를 받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를 했었다. 김 대표는 단박에 거절했다.”
— 거절한 이유가 뭐라고 보는가.
“김 대표가 ‘내가 그런 식으로 하면 마치 내 욕심이 있어서 뭘 도모하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아서 시끄러워진다’고 했다. 그런 것까지 조심했다.”
— 더민주에 당 대표로 갈 때부터 비례대표는 염두에 뒀던 건가.
“나는 그랬다고 본다. 그분에게 잠시 임시로 가서 선거만 치러 주고 물러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일 것이다. 야당을 똑바로 세우겠다는 생각은 승부를 길게 보고 갔다고 봐야 한다. 당연히 당에 남아서 계속해서 활동을 하려고 하면 의원직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 방법으로 비례대표밖에 더 있었겠나.”
— 그렇더라도 굳이 비례대표 2번을 고집할 필요가 있었나. 과거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처럼 비례대표를 받더라도 당선 가능권의 끝 번호를 받아 배수의 진을 치는 게 옳은 일 아니었나.
“그게 김 대표 스타일이다. 김 대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멋을 부리고 쇼하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스타일리스트들이다. 그분은 JP 같은 정치인들을 전형적인 스타일리스트로 봤다. 그분은 자기가 당 대표이고 자기 책임하에 선거를 끌고 가야 하는 것이면 제일 앞 번호를 받고 나서 표를 달라고 하는 게 정도(正道)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 DJ처럼 뒷번호를 받고 하는 것은 쇼로 봤다. 자기는 그런 쇼를 안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 그래도 정치는 현실인데.
“그런 스타일이 정치공학적으로는 세련되지 못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맞다. 정치는 대중과 호흡하는 건데 자기 스타일만 고집하려면 정치를 왜 하나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원칙에서 한걸음 후퇴하는 것도 필요했다고 본다.”
그러면서 이 지인은 “김 대표가 비례대표 파동 후 총선 첫 일정으로 광주와 전남 지역을 방문해 자신의 뿌리가 호남인 사실을 강조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이유를 그는 “우리 정치 현실상 대통령이 되려면 확실한 지역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호남은 현재 무주공산이다. 4·13 총선 이후에도 호남을 상징하는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호남인들은 호남이 뿌리임을 강조한 김 대표의 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 지금까지 자신의 뿌리가 호남임을 밝히지 않다가 이제 와서 그 사실을 강조한다는 것은 정치 지도자로서 문제 아닌가.
“김 대표가 일부러 자신이 호남 출신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 대표는 지역감정을 굉장히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번에 자신의 뿌리가 호남이고 호남의 대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밝힌 점이 흥미롭다.”
— 흥미롭다?
“나는 그 발언이 앞을 길게 보고 던진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바둑으로 치면 화점(花點)을 놓은 것이다. 그의 정치적 역량이 담겨 있는 발언이다. 기댈 만한 사람이 없을 때 결국은 호남이 자신을 찾게 되리라는 희망과 예측이 함께 담긴 발언이라고 나는 본다.”
성공했다면 대선까지 갔을 것
— 김 대표 본인이 대권 도전 의사를 피력한 적은 없나.
“그런 적은 없다. 대표 취임 후 김 대표가 과감하게 야당의 변화를 이끌어갈 때 주변의 분위기가 괜찮아 넌지시 의중을 떠본 적이 있지만 대답은 없었다.”
— 그런 욕심이 전혀 없었다는 건가.
“큰 욕심을 가진 사람은 절대 티를 안 낸다.”
— 비례대표 파동이 김 대표에게는 큰 데미지를 안겨준 것 같다.
“지금 이 시점에서 선거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비례대표 파동 이전에는 분위기가 괜찮았다. 더민주가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호남에서도 전세를 바꿀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 정체성 운운하며 벌인 훼방이 상승세의 분위기를 꺾어 버렸다. 안타깝다.”
— 비례대표 파동 없이 김 대표의 야당 개혁이 성공했다면?
“성공했다면 김 대표는 대선 도전까지 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국민들의 민심이 그렇게 작용했을 것이다. 국민들로서는 김종인의 리더십이 그동안 못 보던 과감한 리더십이었기 때문이다. 답답함을 보이는 박근혜 리더십과는 크게 구별됐을 것이다.”
기자는 김 대표가 비례대표 파동 후 당 잔류를 밝힌 3월 23일 오후에 이 지인과 함께 있었다. 그는 김 대표의 사퇴를 원하는 쪽이었고 그렇게 조언했다고 했다. 김 대표의 당 잔류 입장이 속보로 알려지자 그는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에게 “김 대표가 사퇴하면 그다음 계획이 마련돼 있나”라고 물었다. 그 지인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총선 후 새누리당이 친박과 비박으로 분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지금 김종인 대표가 사퇴하면 훗날 김무성의 비박 측과 더민주의 김종인 추종 인사 등 온건 보수파들이 결합한 새로운 정치 결사체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사퇴하면 그때에 가서 김종인이 이 새로운 정치 결사체를 탄생시키는 축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김종인 대표의 또다른 측근도 김 대표의 당 잔류를 상당히 아쉬워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도 쉴 새 없이 김 대표에게 사퇴를 권하는 문자를 보냈지만 김 대표의 답은 당 잔류 의사를 밝힐 때까지 오지 않았다.⊙
이를테면 김 대표가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맡기로 했다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부 언론이 “김 대표 부부가 오래 전부터 문재인 부부와 깊은 관계였다”고 보도한데 대해 “김 대표와 문 전 대표는 부부끼리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고 팩트를 바로잡아 주는 일도 그의 일이었다. 평소 이른 아침에 주로 전화 통화를 했었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 김 대표의 전화를 받은 적이 없는 이 지인은 “무언가 급한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 대표의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김 대표는 이 지인에게 “내일부터 당사에 나가지 않겠다”며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려도 좋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실제 이튿날인 21일 더민주 당사에 출근하지 않고 광화문에 있는 개인 사무실로 출근했다.
김 대표가 당무를 거부하기 전인 20일 오전 더민주 김성수 대변인은 전날 심야에 비대위가 결정한 비례대표 명단을 발표했다. 당선 가능권인 20위까지 발표했는데 과거와 달리 운동권 출신 대신 전문가들의 비중이 높은 비례대표 선정이었다.
비대위가 작성한 전문가 중심의 비례대표 명단은 이날 오후에 열린 중앙위에서 거부됐다. 더민주 중앙위는 현역 의원과 지역위원장 등 487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친노(親盧)와 운동권 출신이 다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비례대표 선정 방식, 선정 권한, 비례대표 후보 자격, 김종인 2번 등에 이의를 제기하며 비대위가 결정한 비례대표 명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광진 의원은 이날 중앙위에서 김 대표를 향해 “김종인 대표는 2번이 아니라 17번을 받고 배수진을 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김병관 후보 사무실 개소식 참석을 이유로 중앙위 도중 자리를 떴다.
김 대표는 이날 저녁 일부 언론에 “국민들 보기에 야당이 과거와 똑같다는 인상을 줘서는 수권 정당이 될 수 없다. 중앙위가 비례대표 명단을 끝까지 거부한다면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판단할 것이다. 자기들끼리 비례대표 선발하고 선거 치르면 된다”는 입장을 전했다. 김 대표는 이날 밤 심야 지도부 회의에서 “비례대표 명단을 수정하면 대표직을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화난 상태에서 지인에게 밤늦게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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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3월 22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자택을 찾은 문재인 전 대표가 김 대표의 자택을 떠나고 있다. |
이날 김 대표는 기자들에게 “사람을 인격적으로, 그따위로 대접하는 정당에 가서 일해 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말도 했다. 그는 또 ‘비례대표’ 파동의 핵심은 “정체성 문제 때문”이라면서 ‘셀프 공천’ 운운 등 자신이 비례대표에 욕심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데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김 대표가 대표직을 사퇴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날부터다. 같은 날 저녁, 전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난 중앙위가 다시 열렸다. 중앙위는 새벽까지 가는 토론 끝에 전략공천 후보 8명을 비례대표 당선 안정권에 배치하는 내용의 수정안을 마련하고 나머지 인원에 대해서는 칸막이를 없애고 투표로 순번을 정했다.
중앙위가 새벽에 수정안과 함께 비례대표 순번을 정한 3월 22일 오후 경남 양산에 머물고 있던 문재인(文在寅) 대표가 급거 상경했다. 전날 일부 언론에 보도된 ‘김종인 사퇴’ 소식을 듣고 김종인 대표를 만나러 온 것이다.
문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 구기동 김 대표의 집을 찾아가 50분간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는 문 전 대표에게 “총선 승리와 나아가서는 정권교체를 위해서도 당의 확장성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비례대표 명단을 짠 것”이라고 말했고, 문 전 대표는 중앙위에서 비대위가 제시한 비례대표 후보 명단이 중앙위에서 뒤집어진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전 대표의 방문이 있은 후 김 대표는 오후 늦게 비대위 회의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더민주 비대위원들은 “잘 모시지 못해 송구하다”고 했지만 김 대표는 자신의 거취에 대해 “좀 더 고민의 시간을 갖겠다”며 구기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우윤근, 박영선, 표창원, 김병관 등 비대위원 4명은 심야에 김 대표를 찾아갔다. 김 대표의 사퇴를 만류하기 위해서였다. 2시간가량을 기다린 후 이들은 10시30분부터 김 대표를 한 시간가량 면담했다. 김 대표는 다음 날인 23일 오후 2시경 “고민 끝에 당에 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대표직 유지 의사를 밝혔다. 중앙위의 비례대표 후보 선정도 받아들였다. 자신은 원래대로 비례대표 2번을 배정 받았다. 다음은 김 대표 주변에서 비례대표 파동 등 저간의 사정을 지켜본 김 대표 지인과의 문답이다.
— 20일 밤 전화했을 때는 김 대표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나 있었나.
“당 정체성과 관련한 부분이었다. 평소에도 ‘더민주 사람들이 정체성, 정체성 하는데 ‘도대체 그 정체성이 뭐냐’고 물으면 제대로 답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날 중앙위가 비례대표 선정 방식에 시비를 건 이유가 자신들이 말하는 정체성을 핑계로 운동권 출신을 더 넣고 싶다는 것임을 간파했다. 게다가 전날 비례대표 선정 때 칸막이식 등의 후보 선정이 당헌·당규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던 비대위원들이 정작 중앙위에서 그 문제가 제기되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거나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은 행태에 분노했다.”
김종인 대표가 호남이 자신의 뿌리임을 강조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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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3월 22일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가 국회 당 대표실에서 비공개 비대위 회의를 마치고 국회를 나서고 있다. |
“그런 말은 없었다. 거취와 관련해서는 다음 날 당사에 나가지 않겠다는 말만 있었다.”
— 문재인 대표에 대한 언급은 없었나.
“그날인가, 그다음 통화였는가는 시점이 정확하지 않은데 김 대표가 ‘중앙위에서 정체성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뒤에 누가 있기 때문 아닌가’고 해서 내가 ‘양산에서 버튼 눌렀다는 얘기냐(문 대표의 의중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냐)’ 하고 물었더니 ‘그거야 말 안 해도 아는 이야기 아니냐’고 했다. 문 대표에 대한 불신이 표출된 것이다. ‘셀프 공천’이라는 말에도 상당히 격분했다.”
— 그렇다면 김 대표는 그 파동 후 더민주가 ‘도로 문재인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본인이 그걸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상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더민주가 사실상 문재인당이라는 현실을 부인하기는 어렵게 됐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민주의 당 대표로서 잔류하기로 했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딱 한 단어로 표현하면 책임감이다. 80을 바라보는 노(老) 정객이 야당을 살리겠다고 나선 데는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신 조부(김병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내 스스로 짐작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그 터전을 잡은 한국 야당을 손주가 재건하겠다는 소명감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분의 성품상 자존심이 상한다고 해서 물러나면 무책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 더민주 대표로 갈 때 주변 사람을 한 명도 데려가지 않았는데.
“내가 옆에서 일을 보좌할 사람을 데려가지 않을 거면 바깥에다가 팀을 꾸려서 두면 어떻겠느냐는 건의도 했었다. 마침 광화문에 사무실이 있으니까 서너 명 팀을 짜서 일종이 상황실처럼 정책도 판단하고 대안도 제시하고 하는 식으로 운용하면서 보좌를 받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를 했었다. 김 대표는 단박에 거절했다.”
— 거절한 이유가 뭐라고 보는가.
“김 대표가 ‘내가 그런 식으로 하면 마치 내 욕심이 있어서 뭘 도모하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아서 시끄러워진다’고 했다. 그런 것까지 조심했다.”
— 더민주에 당 대표로 갈 때부터 비례대표는 염두에 뒀던 건가.
“나는 그랬다고 본다. 그분에게 잠시 임시로 가서 선거만 치러 주고 물러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일 것이다. 야당을 똑바로 세우겠다는 생각은 승부를 길게 보고 갔다고 봐야 한다. 당연히 당에 남아서 계속해서 활동을 하려고 하면 의원직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 방법으로 비례대표밖에 더 있었겠나.”
— 그렇더라도 굳이 비례대표 2번을 고집할 필요가 있었나. 과거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처럼 비례대표를 받더라도 당선 가능권의 끝 번호를 받아 배수의 진을 치는 게 옳은 일 아니었나.
“그게 김 대표 스타일이다. 김 대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멋을 부리고 쇼하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스타일리스트들이다. 그분은 JP 같은 정치인들을 전형적인 스타일리스트로 봤다. 그분은 자기가 당 대표이고 자기 책임하에 선거를 끌고 가야 하는 것이면 제일 앞 번호를 받고 나서 표를 달라고 하는 게 정도(正道)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 DJ처럼 뒷번호를 받고 하는 것은 쇼로 봤다. 자기는 그런 쇼를 안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 그래도 정치는 현실인데.
“그런 스타일이 정치공학적으로는 세련되지 못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맞다. 정치는 대중과 호흡하는 건데 자기 스타일만 고집하려면 정치를 왜 하나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원칙에서 한걸음 후퇴하는 것도 필요했다고 본다.”
그러면서 이 지인은 “김 대표가 비례대표 파동 후 총선 첫 일정으로 광주와 전남 지역을 방문해 자신의 뿌리가 호남인 사실을 강조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이유를 그는 “우리 정치 현실상 대통령이 되려면 확실한 지역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호남은 현재 무주공산이다. 4·13 총선 이후에도 호남을 상징하는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호남인들은 호남이 뿌리임을 강조한 김 대표의 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 지금까지 자신의 뿌리가 호남임을 밝히지 않다가 이제 와서 그 사실을 강조한다는 것은 정치 지도자로서 문제 아닌가.
“김 대표가 일부러 자신이 호남 출신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 대표는 지역감정을 굉장히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번에 자신의 뿌리가 호남이고 호남의 대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밝힌 점이 흥미롭다.”
— 흥미롭다?
“나는 그 발언이 앞을 길게 보고 던진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바둑으로 치면 화점(花點)을 놓은 것이다. 그의 정치적 역량이 담겨 있는 발언이다. 기댈 만한 사람이 없을 때 결국은 호남이 자신을 찾게 되리라는 희망과 예측이 함께 담긴 발언이라고 나는 본다.”
성공했다면 대선까지 갔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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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3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중앙위에 참석한 비례대표 후보자들이 정회가 되자 걸어 나오고 있다. |
“그런 적은 없다. 대표 취임 후 김 대표가 과감하게 야당의 변화를 이끌어갈 때 주변의 분위기가 괜찮아 넌지시 의중을 떠본 적이 있지만 대답은 없었다.”
— 그런 욕심이 전혀 없었다는 건가.
“큰 욕심을 가진 사람은 절대 티를 안 낸다.”
— 비례대표 파동이 김 대표에게는 큰 데미지를 안겨준 것 같다.
“지금 이 시점에서 선거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비례대표 파동 이전에는 분위기가 괜찮았다. 더민주가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호남에서도 전세를 바꿀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 정체성 운운하며 벌인 훼방이 상승세의 분위기를 꺾어 버렸다. 안타깝다.”
— 비례대표 파동 없이 김 대표의 야당 개혁이 성공했다면?
“성공했다면 김 대표는 대선 도전까지 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국민들의 민심이 그렇게 작용했을 것이다. 국민들로서는 김종인의 리더십이 그동안 못 보던 과감한 리더십이었기 때문이다. 답답함을 보이는 박근혜 리더십과는 크게 구별됐을 것이다.”
기자는 김 대표가 비례대표 파동 후 당 잔류를 밝힌 3월 23일 오후에 이 지인과 함께 있었다. 그는 김 대표의 사퇴를 원하는 쪽이었고 그렇게 조언했다고 했다. 김 대표의 당 잔류 입장이 속보로 알려지자 그는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에게 “김 대표가 사퇴하면 그다음 계획이 마련돼 있나”라고 물었다. 그 지인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총선 후 새누리당이 친박과 비박으로 분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지금 김종인 대표가 사퇴하면 훗날 김무성의 비박 측과 더민주의 김종인 추종 인사 등 온건 보수파들이 결합한 새로운 정치 결사체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사퇴하면 그때에 가서 김종인이 이 새로운 정치 결사체를 탄생시키는 축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김종인 대표의 또다른 측근도 김 대표의 당 잔류를 상당히 아쉬워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도 쉴 새 없이 김 대표에게 사퇴를 권하는 문자를 보냈지만 김 대표의 답은 당 잔류 의사를 밝힐 때까지 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