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 무산 보고받은 MB, “박근혜 전 대표의 속을 알 수 없다”며 아쉬움
⊙ 세종시 수정안 처리 당시 靑, 박근혜 대통령 반대토론 나설지 예상 못해
⊙ MB,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결정 발목잡기에 大怒
⊙ “김윤옥 여사 당부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 많이 참았다”
⊙ ‘강도론’ 파문 강력 대응 요구에 MB 고개 끄덕
⊙ 정운찬, 김태호, 김황식 총리 임명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견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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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결정 발목잡기에 大怒
⊙ “김윤옥 여사 당부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 많이 참았다”
⊙ ‘강도론’ 파문 강력 대응 요구에 MB 고개 끄덕
⊙ 정운찬, 김태호, 김황식 총리 임명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견제 의미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지난 6월 25일 위헌(違憲) 논란에 휘말린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정치권에 대한 ‘작심 비판’을 쏟아냈다. 국무회의 당시 박 대통령이 원고를 읽는 데 16분 정도 걸렸는데, 그중 국회와 여당 비판이 12분 정도를 차지했다. 정치권의 행태를 비난하는 대목에서는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저의(底意)’ ‘배신의 정치’ ‘심판’ ‘도덕적 공허감’ 등 섬뜩한 단어들까지 동원했다. 200자 원고지 22장 분량의 발언 원고는 사실상 대부분을 박 대통령이 직접 쓴 것이라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전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가까운 자리에서 발언을 들었던 한 참석자는 “서늘했다. 대통령의 기(氣)에 앉아 있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고 했다. ‘말 폭탄’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만큼 강도가 셌던 것이다.
여권에서는 박 대통령의 이 발언을 ‘유승민(劉承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게 사퇴를 요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여당의 원내사령탑도 정부·여당의 ‘경제 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한 대목 때문이었다. 유승민 원내대표도 그렇게 생각했다. 6월 25일과 26일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대통령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사죄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은 유승민이 본인과의 차별화를 통해 대구·경북(TK)의 차세대 위상을 굳힌 뒤 차기 대선 출마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소위 ‘자기 정치’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랜 기간 지켜보고 참으면서 내린 결론”이라고 했다. 이후 유승민 의원은 새누리당 원내대표 직을 사퇴했다. 박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이 있은 지 꼭 13일(7월 8일) 만이었다.
유승민 의원이 사퇴함에 따라 국회법 개정안 통과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과정에서 일촉즉발 상황까지 갔던 당·청 갈등은 일단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유사 사태는 언제든 재발할 우려가 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유승민 한 사람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란 분석 때문이다.
朴槿惠 발언의 의미
정치권은 이번 사태를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의 갈등으로 본다. 쉽게 설명하자면 비박의 좌장 격인 김무성(金武星) 새누리당 대표까지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것이다. 일리(一理)가 있는 분석이다. 박 대통령은 집권 절반을 넘어서면서 여당의 협조를 이끌어 내야 하지만 ‘김무성 대세론’을 용인할 경우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 김무성 대표가 지난해(2014년) 10월 중국 상하이에서 “정기국회가 끝나면 개헌 논의가 봇물 터질 것”이라는 이른바 ‘개헌 봇물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청와대가 곧장 “우리는 당 대표 되시는 분이 실수로 언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불쾌감을 드러낸 것도 이런 이유로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김무성 대표의 상하이 개헌 발언 전 “개헌은 국정 블랙홀”이라고 규정했다. 이후 여권에서는 개헌 관련 논의 자체가 금기시돼 왔다. 김 대표는 “대통령께 죄송하다”고 한 발 물러섰지만 ‘앙금’은 남았다.
이영작(李英作) 전 한양대 석좌교수의 이야기다.
“잘 생각해 보세요. 박근혜 대통령이 ‘여당의 원내사령탑도 정부·여당의 경제 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원내사령탑이’가 아니라 ‘원내사령탑도’라고 했어요. 원내사령탑을 포함한다는 의미 아닙니까. 그러니까 원내사령탑 외 다른 대상도 겨냥했다고 해석할 수 있지요.”
한때 ‘박근혜의 책사’로 불렸던 이상돈(李相敦) 중앙대 명예교수도 “(박 대통령의 발언은) 김무성・유승민 체제에 대한 불신이 (배경에) 있다”고 했다.
여권(與圈)의 분열을 노리고 만든 자료일 가능성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이 지난 7월 1일 내놓은 보고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겼다.
“이번 새누리당의 내분 사태는 그들만의 공천권 전쟁이다. 박근혜의 최종 목표는 유승민이 아닌 김무성 교체이며, 새누리당을 완전한 ‘박근혜 정당’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실 오랜 역사에서 가장 큰 정치적 이슈 중 하나가 일인자(一人者)에 의한 이인자(二人者) 견제다.
천영준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따지고 보면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이후 로마 황제들이 자주 교체되었던 것도 ‘일인자와 이인자 간의 갈등’이 본격화한 것에서 비롯됐습니다. 클라우디우스, 네로, 갈바 황제 같은 일인자들은 자신의 임기 내에 차기 권력이 부상하는 것을 막으려고 부단히 애쓰던 사람이었지요. 리더는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이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권력 집단으로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인자와 이인자의 갈등은 불가피합니다.”
일인자와 이인자의 갈등 불가피
일인자와 이인자의 갈등이 불가피한 만큼 친박 일각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장 김무성 대표도 찍어 낼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 김무성 대표를 끌어안고 서청원(徐淸源)・이정현(李貞鉉) 최고위원 등이 사퇴하는 ‘자폭 작전’으로 지도부를 붕괴시키자니 그다음 치러질 전당대회에서 친박계가 당권을 잡는다는 보장이 없다. 게다가 김무성 대표는 ‘자폭 작전’을 한다고 해도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측근들에게 수차례 밝혔다고 한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완패와 당시 일부 의원 보좌진의 중앙선관위 디도스(DDoS) 공격 연루 파문에 휩싸이자 당시 유승민·남경필·원희룡은 최고위원 직을 사퇴했다. 이후 홍준표 대표가 백기를 들고 사퇴해 ‘홍준표 체제’가 붕괴됐는데 당시와 지금은 다르다. 절대 사퇴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 박 대통령이 당장 김무성 대표를 찍어 낼 것이라는 의견은 설득력이 작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미래권력에 대한 견제를 시작한 만큼 향후 어떤 식으로든 김 대표에게 압박을 가할 수는 있다. 이미 유승민 사태에서 보았듯이 청와대와 당의 힘의 균형은 깨진 상태다. 박 대통령이 중요사항을 당에 요구할 경우 김무성 대표가 거부하기 어려운 구조다.
박 대통령이 어떤 방법으로 김 대표를 견제할지는 예단하기 어려우나, 이명박 정부 때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참고가 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때는 당내에 박근혜라는 유력한 대선주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의 다툼이 잦았다. 당시의 상황을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참여한 핵심 관계자 다수의 증언을 사안별로 재구성했다(호칭은 이명박 정부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 무산되자 MB의 반응
2009년 4월 29일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5대0으로 참패했다. 곤경에 처한 박희태(朴熺太) 한나라당 대표는 재·보궐 선거 다음 날인 4월 30일 김효재(金孝在) 비서실장과 최구식(崔球植) 의원(現 경상남도 정무부지사) 등 측근들과 함께 자신과 당의 진로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 김효재 실장이 이야기했다.
“대표님, 친박을 끌어안지 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친이)가 조금 마음을 비운다면 친박하고도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김무성 의원을 원내대표로 추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은 이전부터 이상득(李相得) 전 국회부의장 등 친이 핵심부에서 은밀히 논의돼 왔던 사안이다.
당시 박희태 대표는 대표이긴 했지만 원외(院外)였다. 친이의 반발을 의식한 박희태 대표는 이 의견에 미온적(微溫的)이었다. 김효재 실장이 다시 설득했다.
“(18대) 총선 때 탈당했다가 당선된 친박계 의원들도 일괄 복당시켜 주지 않았습니까. 반대가 있더라도 정치는 어떤 것이 더 이익인지 비교 계측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고(長考)를 거듭하던 박희태 대표는 김효재 실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2009년 5월 6일 박희태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과의 조찬회동에서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을 제안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찬성했다.
이동관(李東官) 전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의 설명이다. “김무성이라는 인물이 친박은 물론, 친이 쪽에도 인망(人望)이 있었기 때문에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사실 원내대표라는 것이 야당과 잘 지내야 하는 자리 아닙니까. 그런데 김무성 대표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출신으로 야당에도 인맥이 넓었습니다. 최적임자라고 생각한 이유죠.”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청와대 관계자는 이같이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이 김무성 대표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 금방 허락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머릿속에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김무성 대표가 기업가 집안 아닙니까. 형님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을 오래 지낸 김창성 전방 회장(현 명예회장)이고, 그 위의 누님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인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이고요. 전남방직 창업자인 부친 김용주씨도 1970, 80년대에 경총회장과 전경련 부회장을 지냈습니다. 가계도를 보면 현대건설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환경이지요. 고향도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경북 포항이고요.”
하지만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은 무산됐다. 박근혜 전 대표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김효재 실장은 박근혜 전 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2009년 5월 7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날아갔지만 싸늘한 이야기만 듣고 돌아왔다.
그의 이야기다.
“오인사격이 없었어야 했는데…. 사실 박근혜 전 대표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오해가 가능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자기 사람을 뽑아 가서 본인의 세력을 와해시키려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오해가 없도록 사전 정지(整地)작업을 했어야 했는데 곧장 언론에 조찬회동 내용이 공개되는 바람에 모양새가 안 좋게 됐습니다. 박 전 대표는 이 소식을, 2007년의 경선 패배를 딛고 2012년 대선을 향해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자리(샌프란시스코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들었으니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저랑 말을 섞고 싶었겠습니까.”
화해의 제스처를 단칼에 거절한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2009년 8월경 이명박 대통령은 김무성 의원을 특임장관 직에도 앉히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같았다.
당시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그때 상황을 이같이 기억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분 나빴을 겁니다. 김무성 의원에게 원내대표에 이어 특임장관 직도 제안했었는데, 박근혜 전 대표의 반대로 무산됐거든요.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티는 안 냈어요. 그냥 ‘(박근혜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며 답답해했습니다. 다만 우리는(핵심 측근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김무성 이 사람, 참 답답하다. 이런 제안을 받았으면 박근혜 전 대표한테 ‘하겠다’고 통보를 해야지, ‘해도 되느냐’고 물어보면 가뜩이나 본인에 대한 감정도 안 좋은데 ‘하라’고 하겠느냐. 참 안타깝다. 어떻게 친박의 이인자라는 사람이 박근혜라는 사람의 성격을 모르느냐’고요. 확실치 않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괘씸하다는 기류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2월 2일 한나라당 중진 23명과 함께한 청와대 오찬에서 “올해 말 경제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지, 국민에게 희망의 싹을 보여줄 수 있는지 우리가 무한 책임을 진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며 2월 국회 운영에서 당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날 문을 연 임시국회엔 미디어 법안, 장관 인사청문회, 용산 참사 등 쟁점 현안이 20여 건 쌓여 있었다. 이날 오찬에서 박근혜 전 대표는 “쟁점 법안일수록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공감대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정부가 바라보는 쟁점 법안에 대한 관점과 야당과 국민이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다”고도 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은 박 전 대표가 미디어법 처리에 ‘변수’가 될까 노심초사했다.
여야가 미디어법을 놓고 대립하고 있던 시점인 2009년 3월 2일 오전 10시45분쯤 박 전 대표는 당 의원들이 농성 중인 국회 본회의장 앞을 찾았다. 그는 전날 밤을 새운 의원들과 일일이 악수한 뒤 이같이 이야기했다.
“한나라당이 미흡한 부분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양보를 했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충분히 노력했다. 미디어 법안의 처리 시기를 못 박는 정도는 야당이 받아 줄 수 있는데도 거부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그간 쟁점법안에 대해 ‘공감대 형성 후 처리’라는 입장을 밝혀 ‘속도전’을 주문하는 청와대나 당 지도부와는 엇박자를 냈었다. 그래서 이날 박 전 대표의 출현과 발언은 뜻밖이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미디어법 처리가 순조로워 보였다.
당시 미디어법 소관 상임위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의 기억이다.
“그때 저희 상임위에 소위 말하는 친박계가 많았습니다. 홍사덕・이경재・한선교・이정현 의원이 모두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이었습니다. 이분들은 한나라당이 발의한 신문법 개정안 등 7건의 미디어 관련 법률 개정안에 전혀 이의가 없었습니다. 모두들 이 안으로 가자고 ‘오케이’가 된 상태였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2009년 7월 15일 박근혜 전 대표가 “(신문·방송 겸영에 따른 여론) 독과점 문제도 해소돼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라며 “매체 합산 시장점유율 30% 이하를 방송 참여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신문사의 방송사 지분 소유를 허가할 때 ‘신문+방송’의 시장점유율이 30%가 넘으면 허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또 신문·기업의 방송사 소유지분 상한선(지분율)에 대해 “지상파 방송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크니 20% 정도로 규제하고, 종합편성채널과 보도채널은 둘 다 30% 정도로 하면 적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한나라당이 (야당에) 상당히 많은 양보를 했다”며 당 지도부의 처리 방침에 힘을 실어 준 지 4개월 만에 사실상 입장을 바꾼 셈이다.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다시 당시 미디어법 소관 상임위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의 이야기다.
“갑자기 박근혜 전 대표가 미디어법에 대한 입장을 내놓으니까 친박들도 황당해하더군요. 그래서 친박 중진 한 분이 ‘제가 박근혜 전 대표에게 말씀드리고 오겠다’며 나갔습니다. ‘우리도 기존 안에 합의했으니 도와달라’고 이야기하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의원이 안 오는 겁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박근혜 전 대표가 그 의원의 전화를 안 받아 줬다더군요. 들은 이야기라 ‘팩트’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이후 친박 의원들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박근혜 안(案)’ 아니면 찬성할 수 없다고요. 갑자기 이렇게 돌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180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한나라당은 2009년 7월 21일 박근혜 전 대표가 제시한 대안(보도전문PP 30%)과 야당의 주장(신문·대기업의 방송 지분 소유 상한을 당초 원안보다 지상파 20%→10%로 낮춤)을 수용한 수정안을 발표했다. 야당과 박근혜 전 대표의 주장을 대폭 반영한 미디어법은 다음 날인 7월 22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날 미디어법 통과 순간 박근혜 전 대표는 “사전·사후 규제도 있고, 여론 독과점을 해소하는 장치도 도입돼 있다. 이 정도면 국민이 공감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당시 청와대 고위직에 있던 관계자는 “야당이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당내 분란까지 생기면 곤란하다는 판단에 봉합하고 넘어가긴 했는데 청와대 내부에서는 솔직히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너무하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괘씸하다’는 기류가 강했다”고 했다.
“다 이야기해 버릴까 보다”
이명박 대통령 2007년 대선 공약으로 동남권 신공항 건설을 내놓았다. 동남권 신공항 건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6년 검토를 지시하면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동남권 신공항 건설은 영남권 분열의 씨앗이 됐다. 부산시는 부산 가덕도가, 대구·울산·경북·경남은 경남 밀양이 최적지라며 감정싸움까지 벌인 것이다. 이 대립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도 계속됐다.
2009년 12월 동남권 신공항의 타당성·입지조사 연구 결과 경제적 타당성에서 가덕도의 비용 대비 편익비율(B/C)이 0.7, 밀양은 0.73으로 두 곳 모두 1.0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나오자 청와대 내부에서는 10조원 내외의 막대한 예산이 드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이 실제 필요한 것인가 하는 회의론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1.0이 경제적 타당성 기준이고, 보통 0.8은 넘어야 정책적 판단(AHP)에서 가중치를 부여해 사업을 추진한다.
2010년 청와대와 정부 일각에서는 “대통령 공약사항이지만 과연 그 지역에 신공항이 필요한지 원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섣불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무산될 경우 영남권에서 불어올 후폭풍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룬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2월경 동남권 신공항 입지평가 결과를 보고 동남권 신공항 건설을 결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여권 핵심 관계자의 증언이다.
“신공항 입지로 (부산 인근) 가덕도를 주장하는 부산과 밀양을 주장하는 대구·경북·울산·경남 등 4개 지자체 간 경쟁이 아주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부 분위기는 꼭 필요하지도 않은 신공항을 굳이 서둘러 착공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동남권 신공항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도 있다는 의견이 상당히 있었으며 그런 분위기가 힘을 얻었지요.”
2011년 3월 30일 동남권 신공항 부지의 입지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가덕도와 밀양이 모두 100점 만점에서 공항건설의 적합성 기준인 50점을 넘지 못해 탈락했다. 공항을 지어 봐야 고객이 별로 없어 적자(赤字)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결론난 셈이다. 동남권 신공항 계획이 백지화하는 순간이었다. 발표 전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남권 신공항 계획을 백지화할 겁니다. 욕은 제가 먹겠습니다. 박 전 대표께서도 대선 치러야 할 것 아닙니까. 대선 치를 때 동남권 신공항 건설이 굉장히 부담될 것입니다.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결정을 모른 척 덮고 가세요.”
이명박 대통령의 제안에 박근혜 전 대표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명박 대통령 측근 다수는 전화 통화 당시 박근혜 전 대표가 별다른 반응이 없어 이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했다”고 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4월 1일 영남권 신공항 건설이라는 자신의 대선 공약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기자회견을 계획했다. 그러면서 당시 정무라인 관계자에게 물었다.
“박 전 대표가 3월 31일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에서 열린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원장 취임식에 참석하는데 여기서 신공항에 대해 언급한다고 하던데 알아봤어?”
이 관계자는 이렇게 답했다.
“친박 측에 따르면 박 전 대표가 대구는 가지만 특별히 문제 있는 발언은 안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답변을 옆에서 듣고 있던 핵심 참모는 “과연 박 전 대표가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의 피해 지역인 대구에 가서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을까요?”라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그냥 넘어갔다.
핵심 참모의 예상은 맞았다. 31일 대구를 방문한 박근혜 전 대표는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에 대해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라 유감스럽다”며 “정부나 정치권이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아야 우리나라가 예측 가능한 국가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대선 공약을 거둬들인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로(大怒)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표가 특별히 문제 있는 발언을 안 할 것이라고 보고한 정무라인 인사를 질책했다.
“아니, 이 사람아! 이런 걸 왜 미리 파악 못하는가?”
이 인사는 “친박계 의원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너무 의미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냥 원론적인 내용’이라고…”라고 변명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핵심 인사는 “아니, 사람을 칼로 찔러 놓고 별거 아니라고 하면 다입니까. 당장 내일 대통령께서 사과 기자회견을 하는데 완전히 김을 빼 놓은 것 아닙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이명박 대통령은 “내가(전화 통화도 미리 했다고) 기자회견 때 다 이야기해 버릴까”라고 역정을 냈다. 이명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인사는 “그러지 마십시오. 원래 예상했던 일 아니었습니까”라며 말렸다.
이명박 대통령은 4월 1일 기자회견에서 “결과적으로 ‘동남권 신공항’ 공약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이어 전날 박근혜 전 대표에게 한 이야기에 대한 질문에 대해 “지역구인 고향에 내려가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입장도 나는 이해를 한다. 그러나 또 내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도 (박 전 대표가) 아마 이해를 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과 ‘지역구 의원’은 “입장에 따라서 조금 견해를 달리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전날 박근혜 전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격앙된 반응을 보인 것에 비춰 봤을 때 상당히 순화한 답변이었다.
기자회견 직후 측근들이 “잘 넘어가셨네요”라고 하자 이명박 대통령은 “뭐, 그래(좋게 이야기해) 주는 거지”라고 했다.
세종시 수정하려면 박근혜 설득이 먼저
2008년 4월 쇠고기 협상이 타결됐다. 그리고 4월 29일 MBC PD수첩 ‘광우병 편’이 방영됐다. 이는 두 달 이상 지속한 ‘촛불집회’의 도화선이 됐다. PD수첩 방영 이후 10대 청소년들까지 거리로 나와 “나는 죽기 싫다”고 외쳤다. 충격적인 영상 앞에 과학은 설 자리를 잃었고, 정체불명의 광우병 괴담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후에 대법원은 MBC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보도와 관련, 형사상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보도의 주요 내용은 허위라고 판시했다. 광우병 ‘촛불집회’로 인해 정권 초기 큰 타격을 받은 이명박 정부는 2008년 6월 20일 새 정부 출범 117일 만에 신임 대통령실장(정정길)을 임명하고 수석비서관 7명을 교체했다. 이때 정무수석에서 국정기획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박재완(朴宰完) 수석비서관은 ‘세종시 수정’에 관심을 보였다. 박재완 수석은 이명박 정권이 출범할 당시 인수위에서 정부혁신·규제개혁팀장을 맡으면서도 “세종시 계획은 꼭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며 정무수석 때도 “언젠가는 세종시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박재완 수석의 세종시 수정이란 소신은 그의 ‘사부(師父)’라고 할 수 있는 박세일(朴世逸)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과도 관련이 있다. 박재완 수석은 지난 2004년 총선에서 ‘박세일 사단’의 일원으로 박 이사장의 추천을 업고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에 진출했다. 세종시법 제정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었던 박 이사장은 법 통과 이후 당직은 물론 국회의원 직까지 던져 버렸던 인물이다. 박재완 수석은 박 이사장이 90년대 김영삼 정부 청와대에서 정책기획수석으로 일할 당시부터 함께 일하며 ‘신념’을 공유했다.
2009년 2월 초 박재완 수석이 세종시법(행정중심복합도시법) 수정안 마련을 발표하려 한다는 소식이 김두우(金斗宇) 당시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에게 들렸다.
김두우 비서관은 세종시 수정안을 발의할 경우 정권 기반이 다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장다사로(당시 민정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박재완 수석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해 달라고 했다. 둘에게 박재완 수석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세종시법은 수도권 인구분산, 국가균형발전, 해당 지역 발전의 목적을 이루는 데 족쇄가 되고 있기 때문에 손대는 것이 불가피하다. 세종시의 자족 기능에 대해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중심으로 연구가 이뤄져 왔는데, 현재 법에 주어진 장치로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9년 3월 말에 이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깜짝 놀란 둘은 박재완 수석에게 “박근혜 전 대표에게 동의를 얻었느냐”고 물었다. 박재완 수석은 “아니다”고 했다.
김두우 비서관은 “박근혜 전 대표의 동의를 얻지 않고 세종시 수정안을 처리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라며 반문했다. 이에 박재완 수석은 웃으며 “그런가요?”라고 답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원래 박재완 수석은 온순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고집이 있었다. 박재완 수석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2009년 3월 말에 세종시 수정안을 내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김두우・장다사로 비서관은 세종시 수정안을 반대한다고 전했다.
2009년 3월 초,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에서 세종시 수정안 회의를 소집했다. 국토부장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몇 개 부처 장관, 몇몇 수석이 모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 세종시 수정안을 반대하는 김두우 비서관도 불렀다. 한창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김두우 비서관에게 물었다. “당신은 (세종시 수정안을) 어떻게 생각해?”
김두우 비서관은 이렇게 답했다.
“제가 보기에 이 문제가 제기되면 박근혜 대표가 당장 ‘어떻게 국민과의 약속을 바꿀 수 있느냐’고 반대하고 나설 것입니다. 정 세종시 수정안을 발의하고 싶으시다면 박 전 대표의 동의를 얻는 것이 우선입니다. 만약 말만 꺼내고 무산된다면 저희가 입는 피해가 엄청날 것입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이명박 대통령은 “박재완 국정기획수석하고 맹형규 정무수석, 박형준 홍보기획관이 역할을 분담해서 박근혜 전 대표한테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反轉의 강수에 경악
이후 2009년 4월 29일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5대0으로 참패했다. 그런데 박재완 수석은 세종시 수정안을 5월에 발표하겠다고 했다. 몇몇 참모들은 결사반대했다. 박재완・박형준・맹형규 등이 박근혜 전 대표에게 세종시 수정안을 설명했지만, 반응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밑에서 추진된 세종시 수정안이 공개된 것은 정운찬(鄭雲燦) 전 총리 때문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9월 3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로 지명했는데 이날 그는 기자들에게 세종시와 관련 “행정복합도시는 경제학자의 눈으로 봐선 아주 효율적인 플랜은 아니다. 원점으로 돌리기는 어렵지만, 원안대로 다 한다는 것도 쉽지는 않다고 본다. 수정되지 않을까 한다. 복합도시를 부분적으로 하되 대신 충청도 분들이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나머지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세종시 수정 추진론’을 공론화해 버린 것이다.
당장 세종시 수정안은 정국의 쟁점으로 부상했다. 정치권은 아주 오랫동안 세종시 수정 여부를 두고 다퉜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는 이명박을 향해 세종시는 원안대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1월 11일 정운찬을 통해 세종시 건설계획 원안(原案)의 정부부처(9부2처2청) 이전을 백지화하는 대신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와 삼성, 한화, 고려대, KAIST 등을 유치해 세종시를 ‘교육·과학 중심의 경제도시’로 변경하는 ‘신(新) 세종시 플랜’을 공식 발표했다.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은 2010년 6월 22일 국회 국토해양위원회에 상정됐지만 찬성 12, 반대 18, 기권 1표로 부결됐다. 한나라당 친박과 야당 의원들이 일제히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상임위에서 부결된 법안도 의원 30명이 요구하면 본회의에서 다시 논의할 수 있다’는 국회법 87조 1항에 따라 세종시 수정법안을 본회의에 부의(附議)했다. 전체의 찬반 ‘기록’을 역사적으로 남겨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6월 29일 본회의에 상정된 세종시 수정안은 예상대로 부결됐다.
재적의원 291명 가운데 275명이 참석한 표결에서 수정안 찬성은 105명, 반대 164명, 기권 6명이었다.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의석(168석)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출석한 157명 가운데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한 친박계 의원 42명과 중립 성향 6명, 친이계 의원 2명(권영진·배영식) 등 50명이 반대했다. 야당에서는 민주당 82명, 자유선진당 15명, 미래희망연대(옛 친박연대) 8명 등 모두 114명이 반대했다. 각 당이나 당내 계파에서 이탈표는 1~2표에 불과했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청와대가 충격을 받은 것은 박근혜 전 대표의 반대토론 때문이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이날 의정활동 사상 처음으로 본회의 반대토론에 나섰다. 그는 “세종시는 수도권 과밀해소와 국토균형발전이란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봐야 한다. 세종시 문제는 미래의 문제로,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청와대의 핵심 관계자는 “표결에서 잘 안 될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일말의 기대는 가지고 있었다. 김무성 의원이 세종시 수정안을 찬성하는 등 이탈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표가직접 반대토론을 함으로써 계파 의원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우리 분위기는 ‘우와, 정말 저렇게까지 해야 했나’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박근혜 전 대표가 반대토론에 나선다는 사실을 우리는 파악하지 못했다. 반전(反轉)의 강수를 던진 것에 대해 경악했다”며 “애써 표정관리는 했지만, 박형준 수석 등 핵심 참모 입에서는 ‘오늘부터 이명박 정부가 레임덕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MB
그 유명한 ‘강도론’은 2010년 2월 9일 이명박 대통령의 충북 발언에서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업무보고를 받기 위해 충청북도를 찾았다.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발표 후 대통령의 첫 충청 방문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가장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 강도가 왔는데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면 둘 다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 측에 따르면 이 발언은 당시 충북지사였던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을 격려하기 위한 발언으로 위기 극복을 위해 모두가 힘을 모으고 의견을 합쳐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이명박 대통령의 ‘강도 발언’을 ‘한나라당 주류와 친박계 간 갈등을 언급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박근혜 전 대표는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강도 발언에 대해 “백번, 천번 맞는 얘기다. 그런데 집 안에 있던 사람이 마음이 변해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언급한 ‘강도’는 이명박 대통령을 지칭한 것으로 들렸다. ‘전국을 혼란스럽게 만든 세종시 갈등의 시작이 결국 대통령 때문에 비롯됐다’는 ‘항의’의 뜻이 함축된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역(逆)강도론’에 청와대는 발칵 뒤집혔다. 이동관 수석은 박근혜 전 대표의 발언을 평소에 갖고 있던 감정적인 앙금이 튀어나온 것으로 해석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거론한 강도가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동관 수석은 이명박에게 “이 사태를 방치하면 대통령의 권위가 무시되고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힘들어집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대응해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기분이 어땠을까. 이동관 수석의 이야기다.
“(이 대통령은) 솔직히, 화가 나셨겠죠. 그래서였을까요. 제가 대응한다고 하니까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하고 나와서 비판 성명을 발표했지요.”
이동관 수석은 박근혜 전 대표를 ‘박근혜 의원’이라고 지칭하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박근혜 의원의 적절한 해명과 공식적인 조치를 요구한다. 본인이 직접 사과해야 한다.”
이에 박근혜 전 대표는 “그 말에 문제가 있으면 문제가 있는 대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는 입장을, 대변인 역할을 하는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을 통해 밝히며, 사실상 사과 요구를 거부했다. 이동관 수석은 다시 한 번 사과 요구를 하려고 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말렸다. 더는 강도론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기억이다.
“청와대에서는 ‘그 말에 문제가 있으면 문제가 있는 대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는 박근혜 전 대표의 이야기는 ‘문제가 있으면 조치하면 되지 왜 사과 요구를 하는 것이냐’ ‘잘못한 것이면 어쩔 것이냐’는 식의 막무가내 자세라고 판단했습니다.”
MB, 정동기 낙마 소식에 정진석에 호통
2010년 10월 초,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들에게 4개월간 공석이었던 감사원장 직에는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때 청와대 참모들은 목영준(睦榮埈) 전 헌법재판관을 추천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당사자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목 재판관은 사실상 거절 의사를 밝혔다. 목영준 카드를 접은 청와대는 다른 후보를 물색했다. ‘정동기 전 민정수석 카드’가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 또는 임태희 전 비서실장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동기 카드’에 대해 굉장히 흡족해했다. 김두우 전 비서관의 전언이다.
“정동기 전 민정수석이 2010년 7월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落馬)하자 후보자 선정 및 검증과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민정수석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동기 전 민정수석의 책임은 아니었어요. 천성관을 추천하지 않았거든요. 그만두는 게 상식이긴 하지만 대통령은 그 점을 고마워했습니다.”
결국 정 전 수석은 2010년 12월 31일 개각 발표에서 감사원장 후보자가 된다. 언론의 반응은 별로였다. 1963년 감사원 설립 이후 청와대 참모가 원장으로 임명된 것은 거의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1976년 신두영 원장이 유일)는 이유에서였다. 아무리 봐도 감사원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 내기에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야당은 ‘정동기 낙마’를 목표로 달려들었다. 이후 2007년 11월 대검 차장에서 퇴직하고 옮겨간 모 법무법인에서 2008년 6월 청와대 민정수석에 발탁되기까지 7개월간 모두 7억여 원을 받은 것,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있으면서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보고받았다는 의혹 등이 나오면서 부적격 논란에 휩싸였다.
2011년 1월 10일에는 급기야 여당(한나라당)에서도 ‘정동기 사퇴’ 목소리가 나왔다. 이날 안상수(安商守)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한 최고위원들은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에 대한 자진사퇴를 공식 요구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정동기 사퇴’를 요구한 한나라당과 그 지도부에 대해 청와대는 “대통령이 탈당이라도 하라는 말이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명박 대통령도 이 보고를 듣고 크게 분노했다. 김두우 전 비서관의 기억이다.
“보고를 듣고 대통령이 굉장히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정무수석이었던 정진석씨가 ‘제가 정동기 후보자를 만나 소주 한잔하며 위로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대통령이 흥분했습니다. 언론에 보도돼 잘 알려졌듯이 ‘뭐? 당신 혼자 인간적인 척하지 마! 가슴이 아파도 내가 더 아프고, 정동기를 알아도 내가 더 잘 알아!’라고 소리를 지르셨어요.
지금부터는 새로운 이야기인데, 정진석 수석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임태희 비서실장을 찾아갔어요. 임 실장과 거취를 이야기하는데 임태희 실장이 자기가 사표를 내야겠다고 했대요. 그러니까 정진석 수석도 ‘나도 사표를 내겠다’고 했나 봐요. 그러니까 홍상표 홍보수석, 권재진 민정수석이 줄줄이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내겠다고 한 것이죠.
그런데 당이 청와대에 칼을 들이민 일로 청와대 핵심 참모가 사표를 내게 되면 앞으로 청와대는 당의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이 컸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통령을 찾아가서 ‘지금 참모들을 문책하시면 당에서 청와대를 치고 들어오는 게 성공하게 됩니다. 문제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대통령이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임 실장 방을 한번 방문해서 어깨 한번 두들겨 주십시오. 힘을 실어 주는 모습을 보이라고 건의했습니다. 다음 날(1월 11일) 대통령이 임 실장 방을 방문해서 격려를 해 주시더군요. 우리 청와대는 흔들리지 않고 단결한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죠.”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대통령이 ‘정동기 낙마’에 크게 낙담한 것은 뒤에 친박 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며 “정진석 수석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당신이 친박이면 그런 상황을 잘 파악했어야지. 그것도 못하면서 어떻게 정무수석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강한 질책이었다”고 전했다.
김윤옥 여사의 당부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갈등은 축적됐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 직접 얼굴을 붉히는 일만큼은 애써 삼갔던 것이 사실이다.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 친박 복당, 미디어법 처리, 세종시 수정안,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문제 등 여러 사안(事案)을 두고 박근혜 전 대표가 이명박과 반대노선을 탔음에도 이명박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거의 직공(直攻)에 나서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표의 측근을 대거 입각시키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당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박근혜 전 대표와 각을 세워 봤자 이득보다는 손해가 크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껴안아야 한다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취재에 응한 핵심 측근은 여러 분석을 내놨다.
이동관 수석은 “이명박 대통령이 CEO 출신이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판을 깨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했다.
“기업 경영에서는 최선(最善)의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고 최적(最適)의 선택을 합니다. 오랫동안 기업 경영이 몸에 배어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도 초강수라든지 극단적인 대책을 세우기보다는 절충점을 찾으려 노력했지요. 결과적으로 상당한 절제와 인내를 가지고 당시 박근혜 전 대표와 친박 진영을 대한 것입니다.”
김두우 비서관은 이명박 대통령의 묘한 민주주의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그의 이야기다.
“1995년 6월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당시 국회의원)이 민자당 서울시장 경선에 단독 출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YS가 소속의원들과 비공식 만찬 자리에서 서울시장 선거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취소하고 정원식 전 총리를 추대하겠다고요. 그 뒤에 청와대 관계자가 이 대통령을 불러 서울시장 사퇴하라고 했답니다. 그때 이명박 대통령은 ‘당무회의를 열어 경선을 취소하고 그 사실을 국민에게 발표하면 깨끗이 물러나겠다’고 했습니다. 국민에게 발표하지 않는 이상 사퇴는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지요. 이 대통령이 뜻을 굽히지 않으니까 YS가 1995년 5월 2일 이 대통령을 불러 설득했지요. 사퇴하면 다른 자리를 주겠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받지 않았습니다. 이 얘기를 왜 하느냐면, 이 대통령은 이런 식의 행태를 ‘구태(舊態)’로 본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CEO를 하는 동안 선진국의 정치 지도자를 만나면서 생긴 마인드였던 것 같습니다.”
김효재 전 수석은 정권 재창출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했다고 밝혔다.
“DJ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등의 성과가 있었음에도 YS가 처절히 당한 것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정권 후기의 목표는 당연히 정권 재창출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였고요.”
이상휘(李尙徽)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색다를 분석을 내놨다. 이명박이 김윤옥(金潤玉) 여사의 충고를 염두에 두고 움직였기 때문에 박근혜와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윤옥 여사님께서 경선 때부터 이런 말씀을 대통령께 많이 하셨습니다. ‘남녀를 차별해서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는 느끼는 감성이 다르기 때문에, 유력 정치인이라고 박근혜 전 대표를 남자 대하듯이 하면 마찰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마음을 열고 많이 받아 주세요. 여자와 싸워서 이기려 하지 마세요.’ 여사님의 이런 당부 때문에 이 대통령이 많이 누른 겁니다. 여사님의 내조가 참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부터 이명박 대통령을 보좌한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다.
“이 대통령은 1977년 36세의 나이에 현대건설 사장으로 승진했는데 현대건설은 그해 9월부터 국빈(國賓)을 영접하는 장소인 영빈관의 설계와 시공을 맡았습니다. 1978년 말 완공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 이 대통령은 청와대를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좀 알았나 봐요. 원칙이 강하다는 것을요. 게다가 그때 박 대통령께서 20대였으니 이 대통령 의식 속에는 ‘정치인 박근혜’가 아닌 ‘순수한 박근혜’가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를 힘으로 누르거나 하는 것을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모들한테도 박 전 대표나 친박계와 가능하면 맞서지 말라고 당부를 많이 하셨죠.”
MB의 반격
하지만 그렇다고 이명박 대통령이 가만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2009년 9월 정운찬 총리를 시작으로, 총리 직에 ‘여의도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막강한 이인자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할 수 있는 기대주를 내세운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국가원수와 행정부 수반을 맡은 권력구조에서 총리의 역할과 권한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홀로 설 수도, 특정 요인에 좌우되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역대 총리의 궤적이 이회창 전 총재처럼 ‘넘버 투’인 경우도 있었다. 본인 하기에 따라 대선주자 반열에 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당시 청와대 인사검증 파트에서 근무했던 관계자는 “정운찬, 김태호, 김황식 총리 기용은 박근혜 견제 차원의 의미도 있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관계자의 이야기다.
“박근혜 전 대표가 혼자 독주해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혹독하고 치열한 경쟁을 해야 본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청와대 내에 박근혜 대표와 맞설 수 있는 인물을 키워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정운찬, 김태호, 김황식을 내세운 것도 이런 연장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한 것입니까.
“2009년도부터일 겁니다. 왜냐면 2009년도 때 박근혜 전 대표와 겨룰 만큼 성장 가능성이 있는 차기 주자 그룹으로 검토한 사람들과 이명박 대통령이 1대1로 면담을 했거든요.”
—차기 주자 그룹으로 검토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정몽준 전 의원, 원희룡 제주도지사, 남경필 경기도지사, 김태호 의원, 홍준표 경남도지사 등을 포함해서 한 10명쯤 됐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들 중 한 명이라도 ‘박근혜의 대항마’가 되기를 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은 “총리 역할만 하라고 임명한 것은 아니었다. 대선주자군(群)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정운찬 전 총리는 세종시 수정안 처리에 실패했고, 김태호 의원은 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했다. 김황식 전 총리는 최장수 총리로서 여야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인지도 면에서 박근혜 전 대표와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와 관련, 당시 친이계 핵심 의원은 흥미 있는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기억을 전한다.
“솔직히 정운찬・김태호 지명자에게는 기대를 많이 했었습니다. 친이계 구심점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임명되고 나서 행동하는 것을 보니 ‘아, 박근혜 전 대표의 상대는 절대 될 수 없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운찬 전 총리의 경우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답변자로 섰는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더라고요. 여당 의원들이 본인을 띄워 주려고 질문을 하는데도 자기 정치철학을 내놓지 못하는 겁니다. 그때 여당 의원 사이에서 ‘뭐 하는 사람이야. 왜 이상한 소리만 하고 있어’ 이런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그 이후 아무도 이 사람을 따르지 않는 거예요. 청와대에서는 정 전 총리가 국회 내 친이계뿐만이 아니라 경기고, 서울대 인맥도 좀 아우르기를 원했는데 아무것도 못하게 된 것이죠.
김태호 의원 경우는 총리후보로 지명됐으니까 청문회 통과를 시켜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친이계 의원이 돕겠다고 한 것이죠. 그랬더니 김 의원이 뭐라는 줄 아십니까. ‘아니, 제가 도의회에서 몇 년을 했는데요. 크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이러더라는 겁니다. ‘아, 그래? 국회를 도의회 수준으로 생각하는구나. 혼자서 잘해 봐라’라고 의원들이 돌아섰습니다. 그 다음 결과는 아시죠?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게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여권에서는 박 대통령의 이 발언을 ‘유승민(劉承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게 사퇴를 요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여당의 원내사령탑도 정부·여당의 ‘경제 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한 대목 때문이었다. 유승민 원내대표도 그렇게 생각했다. 6월 25일과 26일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대통령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사죄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은 유승민이 본인과의 차별화를 통해 대구·경북(TK)의 차세대 위상을 굳힌 뒤 차기 대선 출마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소위 ‘자기 정치’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랜 기간 지켜보고 참으면서 내린 결론”이라고 했다. 이후 유승민 의원은 새누리당 원내대표 직을 사퇴했다. 박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이 있은 지 꼭 13일(7월 8일) 만이었다.
유승민 의원이 사퇴함에 따라 국회법 개정안 통과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과정에서 일촉즉발 상황까지 갔던 당·청 갈등은 일단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유사 사태는 언제든 재발할 우려가 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유승민 한 사람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란 분석 때문이다.
朴槿惠 발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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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7월 8일 오후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국회정론관에서 의원총회의 뜻에 따라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영작(李英作) 전 한양대 석좌교수의 이야기다.
“잘 생각해 보세요. 박근혜 대통령이 ‘여당의 원내사령탑도 정부·여당의 경제 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원내사령탑이’가 아니라 ‘원내사령탑도’라고 했어요. 원내사령탑을 포함한다는 의미 아닙니까. 그러니까 원내사령탑 외 다른 대상도 겨냥했다고 해석할 수 있지요.”
한때 ‘박근혜의 책사’로 불렸던 이상돈(李相敦) 중앙대 명예교수도 “(박 대통령의 발언은) 김무성・유승민 체제에 대한 불신이 (배경에) 있다”고 했다.
여권(與圈)의 분열을 노리고 만든 자료일 가능성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이 지난 7월 1일 내놓은 보고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겼다.
“이번 새누리당의 내분 사태는 그들만의 공천권 전쟁이다. 박근혜의 최종 목표는 유승민이 아닌 김무성 교체이며, 새누리당을 완전한 ‘박근혜 정당’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실 오랜 역사에서 가장 큰 정치적 이슈 중 하나가 일인자(一人者)에 의한 이인자(二人者) 견제다.
천영준 연세대 기술경영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따지고 보면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이후 로마 황제들이 자주 교체되었던 것도 ‘일인자와 이인자 간의 갈등’이 본격화한 것에서 비롯됐습니다. 클라우디우스, 네로, 갈바 황제 같은 일인자들은 자신의 임기 내에 차기 권력이 부상하는 것을 막으려고 부단히 애쓰던 사람이었지요. 리더는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이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권력 집단으로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인자와 이인자의 갈등은 불가피합니다.”
일인자와 이인자의 갈등 불가피
일인자와 이인자의 갈등이 불가피한 만큼 친박 일각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장 김무성 대표도 찍어 낼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 김무성 대표를 끌어안고 서청원(徐淸源)・이정현(李貞鉉) 최고위원 등이 사퇴하는 ‘자폭 작전’으로 지도부를 붕괴시키자니 그다음 치러질 전당대회에서 친박계가 당권을 잡는다는 보장이 없다. 게다가 김무성 대표는 ‘자폭 작전’을 한다고 해도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측근들에게 수차례 밝혔다고 한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완패와 당시 일부 의원 보좌진의 중앙선관위 디도스(DDoS) 공격 연루 파문에 휩싸이자 당시 유승민·남경필·원희룡은 최고위원 직을 사퇴했다. 이후 홍준표 대표가 백기를 들고 사퇴해 ‘홍준표 체제’가 붕괴됐는데 당시와 지금은 다르다. 절대 사퇴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 박 대통령이 당장 김무성 대표를 찍어 낼 것이라는 의견은 설득력이 작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미래권력에 대한 견제를 시작한 만큼 향후 어떤 식으로든 김 대표에게 압박을 가할 수는 있다. 이미 유승민 사태에서 보았듯이 청와대와 당의 힘의 균형은 깨진 상태다. 박 대통령이 중요사항을 당에 요구할 경우 김무성 대표가 거부하기 어려운 구조다.
박 대통령이 어떤 방법으로 김 대표를 견제할지는 예단하기 어려우나, 이명박 정부 때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참고가 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때는 당내에 박근혜라는 유력한 대선주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의 다툼이 잦았다. 당시의 상황을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참여한 핵심 관계자 다수의 증언을 사안별로 재구성했다(호칭은 이명박 정부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 무산되자 MB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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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2015년 7월 8일 비공개 의원총회를 마치고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무실로 사퇴를 권고하기 위해 들어가고 있다. |
“대표님, 친박을 끌어안지 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친이)가 조금 마음을 비운다면 친박하고도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김무성 의원을 원내대표로 추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은 이전부터 이상득(李相得) 전 국회부의장 등 친이 핵심부에서 은밀히 논의돼 왔던 사안이다.
당시 박희태 대표는 대표이긴 했지만 원외(院外)였다. 친이의 반발을 의식한 박희태 대표는 이 의견에 미온적(微溫的)이었다. 김효재 실장이 다시 설득했다.
“(18대) 총선 때 탈당했다가 당선된 친박계 의원들도 일괄 복당시켜 주지 않았습니까. 반대가 있더라도 정치는 어떤 것이 더 이익인지 비교 계측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고(長考)를 거듭하던 박희태 대표는 김효재 실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2009년 5월 6일 박희태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과의 조찬회동에서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을 제안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찬성했다.
이동관(李東官) 전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의 설명이다. “김무성이라는 인물이 친박은 물론, 친이 쪽에도 인망(人望)이 있었기 때문에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사실 원내대표라는 것이 야당과 잘 지내야 하는 자리 아닙니까. 그런데 김무성 대표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출신으로 야당에도 인맥이 넓었습니다. 최적임자라고 생각한 이유죠.”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청와대 관계자는 이같이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이 김무성 대표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 금방 허락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머릿속에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김무성 대표가 기업가 집안 아닙니까. 형님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을 오래 지낸 김창성 전방 회장(현 명예회장)이고, 그 위의 누님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인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이고요. 전남방직 창업자인 부친 김용주씨도 1970, 80년대에 경총회장과 전경련 부회장을 지냈습니다. 가계도를 보면 현대건설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환경이지요. 고향도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경북 포항이고요.”
하지만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은 무산됐다. 박근혜 전 대표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김효재 실장은 박근혜 전 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2009년 5월 7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날아갔지만 싸늘한 이야기만 듣고 돌아왔다.
그의 이야기다.
“오인사격이 없었어야 했는데…. 사실 박근혜 전 대표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오해가 가능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자기 사람을 뽑아 가서 본인의 세력을 와해시키려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오해가 없도록 사전 정지(整地)작업을 했어야 했는데 곧장 언론에 조찬회동 내용이 공개되는 바람에 모양새가 안 좋게 됐습니다. 박 전 대표는 이 소식을, 2007년의 경선 패배를 딛고 2012년 대선을 향해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자리(샌프란시스코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들었으니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저랑 말을 섞고 싶었겠습니까.”
화해의 제스처를 단칼에 거절한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2009년 8월경 이명박 대통령은 김무성 의원을 특임장관 직에도 앉히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같았다.
당시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그때 상황을 이같이 기억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분 나빴을 겁니다. 김무성 의원에게 원내대표에 이어 특임장관 직도 제안했었는데, 박근혜 전 대표의 반대로 무산됐거든요.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티는 안 냈어요. 그냥 ‘(박근혜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며 답답해했습니다. 다만 우리는(핵심 측근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김무성 이 사람, 참 답답하다. 이런 제안을 받았으면 박근혜 전 대표한테 ‘하겠다’고 통보를 해야지, ‘해도 되느냐’고 물어보면 가뜩이나 본인에 대한 감정도 안 좋은데 ‘하라’고 하겠느냐. 참 안타깝다. 어떻게 친박의 이인자라는 사람이 박근혜라는 사람의 성격을 모르느냐’고요. 확실치 않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괘씸하다는 기류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2월 2일 한나라당 중진 23명과 함께한 청와대 오찬에서 “올해 말 경제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지, 국민에게 희망의 싹을 보여줄 수 있는지 우리가 무한 책임을 진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며 2월 국회 운영에서 당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날 문을 연 임시국회엔 미디어 법안, 장관 인사청문회, 용산 참사 등 쟁점 현안이 20여 건 쌓여 있었다. 이날 오찬에서 박근혜 전 대표는 “쟁점 법안일수록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공감대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정부가 바라보는 쟁점 법안에 대한 관점과 야당과 국민이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다”고도 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은 박 전 대표가 미디어법 처리에 ‘변수’가 될까 노심초사했다.
여야가 미디어법을 놓고 대립하고 있던 시점인 2009년 3월 2일 오전 10시45분쯤 박 전 대표는 당 의원들이 농성 중인 국회 본회의장 앞을 찾았다. 그는 전날 밤을 새운 의원들과 일일이 악수한 뒤 이같이 이야기했다.
“한나라당이 미흡한 부분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양보를 했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충분히 노력했다. 미디어 법안의 처리 시기를 못 박는 정도는 야당이 받아 줄 수 있는데도 거부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그간 쟁점법안에 대해 ‘공감대 형성 후 처리’라는 입장을 밝혀 ‘속도전’을 주문하는 청와대나 당 지도부와는 엇박자를 냈었다. 그래서 이날 박 전 대표의 출현과 발언은 뜻밖이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미디어법 처리가 순조로워 보였다.
당시 미디어법 소관 상임위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의 기억이다.
“그때 저희 상임위에 소위 말하는 친박계가 많았습니다. 홍사덕・이경재・한선교・이정현 의원이 모두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이었습니다. 이분들은 한나라당이 발의한 신문법 개정안 등 7건의 미디어 관련 법률 개정안에 전혀 이의가 없었습니다. 모두들 이 안으로 가자고 ‘오케이’가 된 상태였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2009년 7월 15일 박근혜 전 대표가 “(신문·방송 겸영에 따른 여론) 독과점 문제도 해소돼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라며 “매체 합산 시장점유율 30% 이하를 방송 참여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신문사의 방송사 지분 소유를 허가할 때 ‘신문+방송’의 시장점유율이 30%가 넘으면 허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또 신문·기업의 방송사 소유지분 상한선(지분율)에 대해 “지상파 방송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크니 20% 정도로 규제하고, 종합편성채널과 보도채널은 둘 다 30% 정도로 하면 적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한나라당이 (야당에) 상당히 많은 양보를 했다”며 당 지도부의 처리 방침에 힘을 실어 준 지 4개월 만에 사실상 입장을 바꾼 셈이다.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다시 당시 미디어법 소관 상임위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의 이야기다.
“갑자기 박근혜 전 대표가 미디어법에 대한 입장을 내놓으니까 친박들도 황당해하더군요. 그래서 친박 중진 한 분이 ‘제가 박근혜 전 대표에게 말씀드리고 오겠다’며 나갔습니다. ‘우리도 기존 안에 합의했으니 도와달라’고 이야기하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의원이 안 오는 겁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박근혜 전 대표가 그 의원의 전화를 안 받아 줬다더군요. 들은 이야기라 ‘팩트’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이후 친박 의원들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박근혜 안(案)’ 아니면 찬성할 수 없다고요. 갑자기 이렇게 돌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180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한나라당은 2009년 7월 21일 박근혜 전 대표가 제시한 대안(보도전문PP 30%)과 야당의 주장(신문·대기업의 방송 지분 소유 상한을 당초 원안보다 지상파 20%→10%로 낮춤)을 수용한 수정안을 발표했다. 야당과 박근혜 전 대표의 주장을 대폭 반영한 미디어법은 다음 날인 7월 22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날 미디어법 통과 순간 박근혜 전 대표는 “사전·사후 규제도 있고, 여론 독과점을 해소하는 장치도 도입돼 있다. 이 정도면 국민이 공감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당시 청와대 고위직에 있던 관계자는 “야당이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당내 분란까지 생기면 곤란하다는 판단에 봉합하고 넘어가긴 했는데 청와대 내부에서는 솔직히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너무하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괘씸하다’는 기류가 강했다”고 했다.
발의한 개정안 내용 —신문법 개정안은 일간신문과 뉴스통신의 상호 겸영 금지를 폐지하고, 일간신문, 뉴스통신 또는 방송사업 소유자의 일간신문, 뉴스통신의 주식 및 지분취득 규제를 폐지토록 함. —인터넷 포털의 책임 강화 차원에서 인터넷 포털의 뉴스서비스를 ‘인터넷 뉴스서비스’로 분류하고, 그 사업자에게 기사배열의 기본방침과 기사배열 책임자 공개하도록 규정. —방송법 개정안은 신문(뉴스통신 포함)과 대기업이 지상파 방송은 20%, 종합편성채널과 보도전문채널은 49%까지 지분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고, 외국 자본의 경우 지상파 진입은 현행대로 금지하되 종합편성 및 보도전문채널의 경우 20%까지 지분을 가질 수 있도록 함. |
“다 이야기해 버릴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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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4월 1일 이명박 대통령이 동남권 신공항백지화 관련 특별기자회견을 청와대 춘추관에서 하고 있는 모습. |
2009년 12월 동남권 신공항의 타당성·입지조사 연구 결과 경제적 타당성에서 가덕도의 비용 대비 편익비율(B/C)이 0.7, 밀양은 0.73으로 두 곳 모두 1.0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나오자 청와대 내부에서는 10조원 내외의 막대한 예산이 드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이 실제 필요한 것인가 하는 회의론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1.0이 경제적 타당성 기준이고, 보통 0.8은 넘어야 정책적 판단(AHP)에서 가중치를 부여해 사업을 추진한다.
2010년 청와대와 정부 일각에서는 “대통령 공약사항이지만 과연 그 지역에 신공항이 필요한지 원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섣불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무산될 경우 영남권에서 불어올 후폭풍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룬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2월경 동남권 신공항 입지평가 결과를 보고 동남권 신공항 건설을 결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여권 핵심 관계자의 증언이다.
“신공항 입지로 (부산 인근) 가덕도를 주장하는 부산과 밀양을 주장하는 대구·경북·울산·경남 등 4개 지자체 간 경쟁이 아주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부 분위기는 꼭 필요하지도 않은 신공항을 굳이 서둘러 착공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동남권 신공항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도 있다는 의견이 상당히 있었으며 그런 분위기가 힘을 얻었지요.”
2011년 3월 30일 동남권 신공항 부지의 입지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가덕도와 밀양이 모두 100점 만점에서 공항건설의 적합성 기준인 50점을 넘지 못해 탈락했다. 공항을 지어 봐야 고객이 별로 없어 적자(赤字)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결론난 셈이다. 동남권 신공항 계획이 백지화하는 순간이었다. 발표 전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남권 신공항 계획을 백지화할 겁니다. 욕은 제가 먹겠습니다. 박 전 대표께서도 대선 치러야 할 것 아닙니까. 대선 치를 때 동남권 신공항 건설이 굉장히 부담될 것입니다.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결정을 모른 척 덮고 가세요.”
이명박 대통령의 제안에 박근혜 전 대표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명박 대통령 측근 다수는 전화 통화 당시 박근혜 전 대표가 별다른 반응이 없어 이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했다”고 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4월 1일 영남권 신공항 건설이라는 자신의 대선 공약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기자회견을 계획했다. 그러면서 당시 정무라인 관계자에게 물었다.
“박 전 대표가 3월 31일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에서 열린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원장 취임식에 참석하는데 여기서 신공항에 대해 언급한다고 하던데 알아봤어?”
이 관계자는 이렇게 답했다.
“친박 측에 따르면 박 전 대표가 대구는 가지만 특별히 문제 있는 발언은 안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답변을 옆에서 듣고 있던 핵심 참모는 “과연 박 전 대표가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의 피해 지역인 대구에 가서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을까요?”라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그냥 넘어갔다.
핵심 참모의 예상은 맞았다. 31일 대구를 방문한 박근혜 전 대표는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에 대해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라 유감스럽다”며 “정부나 정치권이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아야 우리나라가 예측 가능한 국가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대선 공약을 거둬들인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로(大怒)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표가 특별히 문제 있는 발언을 안 할 것이라고 보고한 정무라인 인사를 질책했다.
“아니, 이 사람아! 이런 걸 왜 미리 파악 못하는가?”
이 인사는 “친박계 의원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너무 의미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냥 원론적인 내용’이라고…”라고 변명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핵심 인사는 “아니, 사람을 칼로 찔러 놓고 별거 아니라고 하면 다입니까. 당장 내일 대통령께서 사과 기자회견을 하는데 완전히 김을 빼 놓은 것 아닙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이명박 대통령은 “내가(전화 통화도 미리 했다고) 기자회견 때 다 이야기해 버릴까”라고 역정을 냈다. 이명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인사는 “그러지 마십시오. 원래 예상했던 일 아니었습니까”라며 말렸다.
이명박 대통령은 4월 1일 기자회견에서 “결과적으로 ‘동남권 신공항’ 공약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이어 전날 박근혜 전 대표에게 한 이야기에 대한 질문에 대해 “지역구인 고향에 내려가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입장도 나는 이해를 한다. 그러나 또 내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도 (박 전 대표가) 아마 이해를 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과 ‘지역구 의원’은 “입장에 따라서 조금 견해를 달리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전날 박근혜 전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격앙된 반응을 보인 것에 비춰 봤을 때 상당히 순화한 답변이었다.
기자회견 직후 측근들이 “잘 넘어가셨네요”라고 하자 이명박 대통령은 “뭐, 그래(좋게 이야기해) 주는 거지”라고 했다.
세종시 수정하려면 박근혜 설득이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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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6월 29일 오후 4시쯤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찬반투표가 진행되었다.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반대토론을 하고 있다. |
박재완 수석의 세종시 수정이란 소신은 그의 ‘사부(師父)’라고 할 수 있는 박세일(朴世逸)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과도 관련이 있다. 박재완 수석은 지난 2004년 총선에서 ‘박세일 사단’의 일원으로 박 이사장의 추천을 업고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에 진출했다. 세종시법 제정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었던 박 이사장은 법 통과 이후 당직은 물론 국회의원 직까지 던져 버렸던 인물이다. 박재완 수석은 박 이사장이 90년대 김영삼 정부 청와대에서 정책기획수석으로 일할 당시부터 함께 일하며 ‘신념’을 공유했다.
2009년 2월 초 박재완 수석이 세종시법(행정중심복합도시법) 수정안 마련을 발표하려 한다는 소식이 김두우(金斗宇) 당시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에게 들렸다.
김두우 비서관은 세종시 수정안을 발의할 경우 정권 기반이 다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장다사로(당시 민정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박재완 수석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해 달라고 했다. 둘에게 박재완 수석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세종시법은 수도권 인구분산, 국가균형발전, 해당 지역 발전의 목적을 이루는 데 족쇄가 되고 있기 때문에 손대는 것이 불가피하다. 세종시의 자족 기능에 대해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중심으로 연구가 이뤄져 왔는데, 현재 법에 주어진 장치로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9년 3월 말에 이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깜짝 놀란 둘은 박재완 수석에게 “박근혜 전 대표에게 동의를 얻었느냐”고 물었다. 박재완 수석은 “아니다”고 했다.
김두우 비서관은 “박근혜 전 대표의 동의를 얻지 않고 세종시 수정안을 처리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라며 반문했다. 이에 박재완 수석은 웃으며 “그런가요?”라고 답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원래 박재완 수석은 온순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고집이 있었다. 박재완 수석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2009년 3월 말에 세종시 수정안을 내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김두우・장다사로 비서관은 세종시 수정안을 반대한다고 전했다.
2009년 3월 초,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에서 세종시 수정안 회의를 소집했다. 국토부장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몇 개 부처 장관, 몇몇 수석이 모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 세종시 수정안을 반대하는 김두우 비서관도 불렀다. 한창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김두우 비서관에게 물었다. “당신은 (세종시 수정안을) 어떻게 생각해?”
김두우 비서관은 이렇게 답했다.
“제가 보기에 이 문제가 제기되면 박근혜 대표가 당장 ‘어떻게 국민과의 약속을 바꿀 수 있느냐’고 반대하고 나설 것입니다. 정 세종시 수정안을 발의하고 싶으시다면 박 전 대표의 동의를 얻는 것이 우선입니다. 만약 말만 꺼내고 무산된다면 저희가 입는 피해가 엄청날 것입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이명박 대통령은 “박재완 국정기획수석하고 맹형규 정무수석, 박형준 홍보기획관이 역할을 분담해서 박근혜 전 대표한테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反轉의 강수에 경악
이후 2009년 4월 29일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5대0으로 참패했다. 그런데 박재완 수석은 세종시 수정안을 5월에 발표하겠다고 했다. 몇몇 참모들은 결사반대했다. 박재완・박형준・맹형규 등이 박근혜 전 대표에게 세종시 수정안을 설명했지만, 반응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밑에서 추진된 세종시 수정안이 공개된 것은 정운찬(鄭雲燦) 전 총리 때문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9월 3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로 지명했는데 이날 그는 기자들에게 세종시와 관련 “행정복합도시는 경제학자의 눈으로 봐선 아주 효율적인 플랜은 아니다. 원점으로 돌리기는 어렵지만, 원안대로 다 한다는 것도 쉽지는 않다고 본다. 수정되지 않을까 한다. 복합도시를 부분적으로 하되 대신 충청도 분들이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나머지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세종시 수정 추진론’을 공론화해 버린 것이다.
당장 세종시 수정안은 정국의 쟁점으로 부상했다. 정치권은 아주 오랫동안 세종시 수정 여부를 두고 다퉜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는 이명박을 향해 세종시는 원안대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1월 11일 정운찬을 통해 세종시 건설계획 원안(原案)의 정부부처(9부2처2청) 이전을 백지화하는 대신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와 삼성, 한화, 고려대, KAIST 등을 유치해 세종시를 ‘교육·과학 중심의 경제도시’로 변경하는 ‘신(新) 세종시 플랜’을 공식 발표했다.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은 2010년 6월 22일 국회 국토해양위원회에 상정됐지만 찬성 12, 반대 18, 기권 1표로 부결됐다. 한나라당 친박과 야당 의원들이 일제히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상임위에서 부결된 법안도 의원 30명이 요구하면 본회의에서 다시 논의할 수 있다’는 국회법 87조 1항에 따라 세종시 수정법안을 본회의에 부의(附議)했다. 전체의 찬반 ‘기록’을 역사적으로 남겨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6월 29일 본회의에 상정된 세종시 수정안은 예상대로 부결됐다.
재적의원 291명 가운데 275명이 참석한 표결에서 수정안 찬성은 105명, 반대 164명, 기권 6명이었다.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의석(168석)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출석한 157명 가운데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한 친박계 의원 42명과 중립 성향 6명, 친이계 의원 2명(권영진·배영식) 등 50명이 반대했다. 야당에서는 민주당 82명, 자유선진당 15명, 미래희망연대(옛 친박연대) 8명 등 모두 114명이 반대했다. 각 당이나 당내 계파에서 이탈표는 1~2표에 불과했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청와대가 충격을 받은 것은 박근혜 전 대표의 반대토론 때문이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이날 의정활동 사상 처음으로 본회의 반대토론에 나섰다. 그는 “세종시는 수도권 과밀해소와 국토균형발전이란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봐야 한다. 세종시 문제는 미래의 문제로,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청와대의 핵심 관계자는 “표결에서 잘 안 될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일말의 기대는 가지고 있었다. 김무성 의원이 세종시 수정안을 찬성하는 등 이탈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표가직접 반대토론을 함으로써 계파 의원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우리 분위기는 ‘우와, 정말 저렇게까지 해야 했나’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박근혜 전 대표가 반대토론에 나선다는 사실을 우리는 파악하지 못했다. 반전(反轉)의 강수를 던진 것에 대해 경악했다”며 “애써 표정관리는 했지만, 박형준 수석 등 핵심 참모 입에서는 ‘오늘부터 이명박 정부가 레임덕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MB
그 유명한 ‘강도론’은 2010년 2월 9일 이명박 대통령의 충북 발언에서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업무보고를 받기 위해 충청북도를 찾았다.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발표 후 대통령의 첫 충청 방문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가장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 강도가 왔는데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면 둘 다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 측에 따르면 이 발언은 당시 충북지사였던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을 격려하기 위한 발언으로 위기 극복을 위해 모두가 힘을 모으고 의견을 합쳐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이명박 대통령의 ‘강도 발언’을 ‘한나라당 주류와 친박계 간 갈등을 언급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박근혜 전 대표는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강도 발언에 대해 “백번, 천번 맞는 얘기다. 그런데 집 안에 있던 사람이 마음이 변해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언급한 ‘강도’는 이명박 대통령을 지칭한 것으로 들렸다. ‘전국을 혼란스럽게 만든 세종시 갈등의 시작이 결국 대통령 때문에 비롯됐다’는 ‘항의’의 뜻이 함축된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역(逆)강도론’에 청와대는 발칵 뒤집혔다. 이동관 수석은 박근혜 전 대표의 발언을 평소에 갖고 있던 감정적인 앙금이 튀어나온 것으로 해석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거론한 강도가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동관 수석은 이명박에게 “이 사태를 방치하면 대통령의 권위가 무시되고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힘들어집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대응해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기분이 어땠을까. 이동관 수석의 이야기다.
“(이 대통령은) 솔직히, 화가 나셨겠죠. 그래서였을까요. 제가 대응한다고 하니까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하고 나와서 비판 성명을 발표했지요.”
이동관 수석은 박근혜 전 대표를 ‘박근혜 의원’이라고 지칭하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박근혜 의원의 적절한 해명과 공식적인 조치를 요구한다. 본인이 직접 사과해야 한다.”
이에 박근혜 전 대표는 “그 말에 문제가 있으면 문제가 있는 대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는 입장을, 대변인 역할을 하는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을 통해 밝히며, 사실상 사과 요구를 거부했다. 이동관 수석은 다시 한 번 사과 요구를 하려고 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말렸다. 더는 강도론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기억이다.
“청와대에서는 ‘그 말에 문제가 있으면 문제가 있는 대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는 박근혜 전 대표의 이야기는 ‘문제가 있으면 조치하면 되지 왜 사과 요구를 하는 것이냐’ ‘잘못한 것이면 어쩔 것이냐’는 식의 막무가내 자세라고 판단했습니다.”
MB, 정동기 낙마 소식에 정진석에 호통
2010년 10월 초,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들에게 4개월간 공석이었던 감사원장 직에는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때 청와대 참모들은 목영준(睦榮埈) 전 헌법재판관을 추천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당사자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목 재판관은 사실상 거절 의사를 밝혔다. 목영준 카드를 접은 청와대는 다른 후보를 물색했다. ‘정동기 전 민정수석 카드’가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 또는 임태희 전 비서실장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동기 카드’에 대해 굉장히 흡족해했다. 김두우 전 비서관의 전언이다.
“정동기 전 민정수석이 2010년 7월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落馬)하자 후보자 선정 및 검증과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민정수석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동기 전 민정수석의 책임은 아니었어요. 천성관을 추천하지 않았거든요. 그만두는 게 상식이긴 하지만 대통령은 그 점을 고마워했습니다.”
결국 정 전 수석은 2010년 12월 31일 개각 발표에서 감사원장 후보자가 된다. 언론의 반응은 별로였다. 1963년 감사원 설립 이후 청와대 참모가 원장으로 임명된 것은 거의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1976년 신두영 원장이 유일)는 이유에서였다. 아무리 봐도 감사원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 내기에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야당은 ‘정동기 낙마’를 목표로 달려들었다. 이후 2007년 11월 대검 차장에서 퇴직하고 옮겨간 모 법무법인에서 2008년 6월 청와대 민정수석에 발탁되기까지 7개월간 모두 7억여 원을 받은 것,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있으면서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보고받았다는 의혹 등이 나오면서 부적격 논란에 휩싸였다.
2011년 1월 10일에는 급기야 여당(한나라당)에서도 ‘정동기 사퇴’ 목소리가 나왔다. 이날 안상수(安商守)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한 최고위원들은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에 대한 자진사퇴를 공식 요구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정동기 사퇴’를 요구한 한나라당과 그 지도부에 대해 청와대는 “대통령이 탈당이라도 하라는 말이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명박 대통령도 이 보고를 듣고 크게 분노했다. 김두우 전 비서관의 기억이다.
“보고를 듣고 대통령이 굉장히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정무수석이었던 정진석씨가 ‘제가 정동기 후보자를 만나 소주 한잔하며 위로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대통령이 흥분했습니다. 언론에 보도돼 잘 알려졌듯이 ‘뭐? 당신 혼자 인간적인 척하지 마! 가슴이 아파도 내가 더 아프고, 정동기를 알아도 내가 더 잘 알아!’라고 소리를 지르셨어요.
지금부터는 새로운 이야기인데, 정진석 수석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임태희 비서실장을 찾아갔어요. 임 실장과 거취를 이야기하는데 임태희 실장이 자기가 사표를 내야겠다고 했대요. 그러니까 정진석 수석도 ‘나도 사표를 내겠다’고 했나 봐요. 그러니까 홍상표 홍보수석, 권재진 민정수석이 줄줄이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내겠다고 한 것이죠.
그런데 당이 청와대에 칼을 들이민 일로 청와대 핵심 참모가 사표를 내게 되면 앞으로 청와대는 당의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이 컸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통령을 찾아가서 ‘지금 참모들을 문책하시면 당에서 청와대를 치고 들어오는 게 성공하게 됩니다. 문제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대통령이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임 실장 방을 한번 방문해서 어깨 한번 두들겨 주십시오. 힘을 실어 주는 모습을 보이라고 건의했습니다. 다음 날(1월 11일) 대통령이 임 실장 방을 방문해서 격려를 해 주시더군요. 우리 청와대는 흔들리지 않고 단결한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죠.”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대통령이 ‘정동기 낙마’에 크게 낙담한 것은 뒤에 친박 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며 “정진석 수석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당신이 친박이면 그런 상황을 잘 파악했어야지. 그것도 못하면서 어떻게 정무수석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강한 질책이었다”고 전했다.
김윤옥 여사의 당부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갈등은 축적됐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 직접 얼굴을 붉히는 일만큼은 애써 삼갔던 것이 사실이다.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론, 친박 복당, 미디어법 처리, 세종시 수정안,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문제 등 여러 사안(事案)을 두고 박근혜 전 대표가 이명박과 반대노선을 탔음에도 이명박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거의 직공(直攻)에 나서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표의 측근을 대거 입각시키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당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박근혜 전 대표와 각을 세워 봤자 이득보다는 손해가 크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껴안아야 한다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취재에 응한 핵심 측근은 여러 분석을 내놨다.
이동관 수석은 “이명박 대통령이 CEO 출신이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판을 깨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했다.
“기업 경영에서는 최선(最善)의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고 최적(最適)의 선택을 합니다. 오랫동안 기업 경영이 몸에 배어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도 초강수라든지 극단적인 대책을 세우기보다는 절충점을 찾으려 노력했지요. 결과적으로 상당한 절제와 인내를 가지고 당시 박근혜 전 대표와 친박 진영을 대한 것입니다.”
김두우 비서관은 이명박 대통령의 묘한 민주주의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그의 이야기다.
“1995년 6월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당시 국회의원)이 민자당 서울시장 경선에 단독 출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YS가 소속의원들과 비공식 만찬 자리에서 서울시장 선거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취소하고 정원식 전 총리를 추대하겠다고요. 그 뒤에 청와대 관계자가 이 대통령을 불러 서울시장 사퇴하라고 했답니다. 그때 이명박 대통령은 ‘당무회의를 열어 경선을 취소하고 그 사실을 국민에게 발표하면 깨끗이 물러나겠다’고 했습니다. 국민에게 발표하지 않는 이상 사퇴는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지요. 이 대통령이 뜻을 굽히지 않으니까 YS가 1995년 5월 2일 이 대통령을 불러 설득했지요. 사퇴하면 다른 자리를 주겠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받지 않았습니다. 이 얘기를 왜 하느냐면, 이 대통령은 이런 식의 행태를 ‘구태(舊態)’로 본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CEO를 하는 동안 선진국의 정치 지도자를 만나면서 생긴 마인드였던 것 같습니다.”
김효재 전 수석은 정권 재창출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했다고 밝혔다.
“DJ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등의 성과가 있었음에도 YS가 처절히 당한 것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정권 후기의 목표는 당연히 정권 재창출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였고요.”
이상휘(李尙徽)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색다를 분석을 내놨다. 이명박이 김윤옥(金潤玉) 여사의 충고를 염두에 두고 움직였기 때문에 박근혜와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윤옥 여사님께서 경선 때부터 이런 말씀을 대통령께 많이 하셨습니다. ‘남녀를 차별해서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는 느끼는 감성이 다르기 때문에, 유력 정치인이라고 박근혜 전 대표를 남자 대하듯이 하면 마찰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마음을 열고 많이 받아 주세요. 여자와 싸워서 이기려 하지 마세요.’ 여사님의 이런 당부 때문에 이 대통령이 많이 누른 겁니다. 여사님의 내조가 참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부터 이명박 대통령을 보좌한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다.
“이 대통령은 1977년 36세의 나이에 현대건설 사장으로 승진했는데 현대건설은 그해 9월부터 국빈(國賓)을 영접하는 장소인 영빈관의 설계와 시공을 맡았습니다. 1978년 말 완공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 이 대통령은 청와대를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좀 알았나 봐요. 원칙이 강하다는 것을요. 게다가 그때 박 대통령께서 20대였으니 이 대통령 의식 속에는 ‘정치인 박근혜’가 아닌 ‘순수한 박근혜’가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를 힘으로 누르거나 하는 것을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모들한테도 박 전 대표나 친박계와 가능하면 맞서지 말라고 당부를 많이 하셨죠.”
MB의 반격
하지만 그렇다고 이명박 대통령이 가만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2009년 9월 정운찬 총리를 시작으로, 총리 직에 ‘여의도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막강한 이인자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할 수 있는 기대주를 내세운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국가원수와 행정부 수반을 맡은 권력구조에서 총리의 역할과 권한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홀로 설 수도, 특정 요인에 좌우되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역대 총리의 궤적이 이회창 전 총재처럼 ‘넘버 투’인 경우도 있었다. 본인 하기에 따라 대선주자 반열에 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당시 청와대 인사검증 파트에서 근무했던 관계자는 “정운찬, 김태호, 김황식 총리 기용은 박근혜 견제 차원의 의미도 있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관계자의 이야기다.
“박근혜 전 대표가 혼자 독주해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혹독하고 치열한 경쟁을 해야 본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청와대 내에 박근혜 대표와 맞설 수 있는 인물을 키워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정운찬, 김태호, 김황식을 내세운 것도 이런 연장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한 것입니까.
“2009년도부터일 겁니다. 왜냐면 2009년도 때 박근혜 전 대표와 겨룰 만큼 성장 가능성이 있는 차기 주자 그룹으로 검토한 사람들과 이명박 대통령이 1대1로 면담을 했거든요.”
—차기 주자 그룹으로 검토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정몽준 전 의원, 원희룡 제주도지사, 남경필 경기도지사, 김태호 의원, 홍준표 경남도지사 등을 포함해서 한 10명쯤 됐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들 중 한 명이라도 ‘박근혜의 대항마’가 되기를 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은 “총리 역할만 하라고 임명한 것은 아니었다. 대선주자군(群)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정운찬 전 총리는 세종시 수정안 처리에 실패했고, 김태호 의원은 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했다. 김황식 전 총리는 최장수 총리로서 여야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인지도 면에서 박근혜 전 대표와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와 관련, 당시 친이계 핵심 의원은 흥미 있는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기억을 전한다.
“솔직히 정운찬・김태호 지명자에게는 기대를 많이 했었습니다. 친이계 구심점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임명되고 나서 행동하는 것을 보니 ‘아, 박근혜 전 대표의 상대는 절대 될 수 없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운찬 전 총리의 경우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답변자로 섰는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더라고요. 여당 의원들이 본인을 띄워 주려고 질문을 하는데도 자기 정치철학을 내놓지 못하는 겁니다. 그때 여당 의원 사이에서 ‘뭐 하는 사람이야. 왜 이상한 소리만 하고 있어’ 이런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그 이후 아무도 이 사람을 따르지 않는 거예요. 청와대에서는 정 전 총리가 국회 내 친이계뿐만이 아니라 경기고, 서울대 인맥도 좀 아우르기를 원했는데 아무것도 못하게 된 것이죠.
김태호 의원 경우는 총리후보로 지명됐으니까 청문회 통과를 시켜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친이계 의원이 돕겠다고 한 것이죠. 그랬더니 김 의원이 뭐라는 줄 아십니까. ‘아니, 제가 도의회에서 몇 년을 했는데요. 크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이러더라는 겁니다. ‘아, 그래? 국회를 도의회 수준으로 생각하는구나. 혼자서 잘해 봐라’라고 의원들이 돌아섰습니다. 그 다음 결과는 아시죠?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게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