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청와대엔 대통령도, 측근도, 관료도 안 보인다”
“‘노무현 청와대’가 대통령이 정책 메시지를 제시하면 생산적 의제로 발전하지 않고 반목과 갈등으로 갈라졌다면 ‘박근혜와 청와대’는 의제나 메시지 자체가 없고 국민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게 문제입니다. 관료들도 엎드려 태업을 하는지, 소외되고 있는지 안 보입니다”
⊙ 우왕좌왕하는 관료들을 보고 ‘集團怠業 중’이라 비꼬아
⊙ ‘박근혜 청와대’의 위기는 위기관리를 보좌할 전문가와 참모의 不在가 낳은 결과
⊙ “위기관리 매뉴얼을 지자체·정부부처 등에서 그냥 우후죽순식으로 막 만들었다”
“‘노무현 청와대’가 대통령이 정책 메시지를 제시하면 생산적 의제로 발전하지 않고 반목과 갈등으로 갈라졌다면 ‘박근혜와 청와대’는 의제나 메시지 자체가 없고 국민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게 문제입니다. 관료들도 엎드려 태업을 하는지, 소외되고 있는지 안 보입니다”
⊙ 우왕좌왕하는 관료들을 보고 ‘集團怠業 중’이라 비꼬아
⊙ ‘박근혜 청와대’의 위기는 위기관리를 보좌할 전문가와 참모의 不在가 낳은 결과
⊙ “위기관리 매뉴얼을 지자체·정부부처 등에서 그냥 우후죽순식으로 막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 때 드러난 정부의 총체적 무기력증이 14개월 만에 재발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로 재차 무능력을 드러낸 것이다. 박근혜(朴槿惠) 정부 출범 이후 여론이 가장 나빠졌다. 초동대응 실패와 혼란, 정보공개 판단 착오와 오만, 정부와 지자체 간 갈등과 협업붕괴 등 하나하나가 참혹하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이 심각한 수준”이란 얘기가 나온다.
대통령이 아니라면 총리, 부총리라도 나서야 하는데 곁에 아무도 없다는 말도 들린다. 심지어 우왕좌왕하는 관료들을 보고 ‘집단태업(集團怠業) 중’이라 비꼬는 이가 있고,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관료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웃 국가에서 먼저 유행해 대비기간이 충분했던 2003년 사스(SARS) 사태 때와 단순 비교하긴 어렵다. 그러나 당시 고건(高建) 총리가 돋보인 이유는 그가 행정에 정통한 내무(內務)관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지방행정은 일종의 종합행정인데 방역·보건·의료 같은 개념이 다 포함돼 있다. 행정가의 덕목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나눈 뒤 속도감 있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결단력과 상황판단 능력에 있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의 가장 유능한 집단이 관료들이다. 사실, 그들의 철제 캐비닛 안에 오만 가지 위기 대처방안과 매뉴얼이 다 있다.
김병준(金秉準)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런 말을 했다. “관료조직은 절대권력 아래에서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절대권력이 사라진 지금 관료사회는 그야말로 복지부동이다. 꼬이고 꼬인 법령과 지침, 그리고 왜곡된 조직문화 등이 온통 지뢰밭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대통령과 청와대가 상황에 끌려가고 관료조직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을까. 또 ‘위기관리’ 담론으로서의 대통령 메시지는 세월호 때와 마찬가지로 왜 그렇게 공허할까. 대통령의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국민 요구와 기대에 대한 성실한 답변이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전면에 나서 위기를 포괄적이고 유기적으로 관리하는 데 실패했다. 박 대통령의 말에는 ‘메시지’가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박원순(朴元淳) 서울시장이다. 그는 중앙정부와 삼성서울병원에다 메르스 정보공개를 요구했고, 확진 권한을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에 달라고 요구했다. 전염병예방법에 따르면, 지자체는 전염병에 대해 많은 권한(방역에 나서야 할 의무, 격리 치료 병원 지정, 환자 격리, 퍼진 장소 폐쇄 등)을 갖고 있다. 박 시장은 당연히 갖고 있는 권한에 따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중앙정부에 공세적인 요구를 한 셈이 됐다.
어찌됐든 여론은 박 시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서울시청에 출입하는 한 기자에게 물어보니 “정부와 차별화되는 모습을 부각시켰다는 점에 놀랐다. 문재인에 잠시 잊혔던 박원순이 다시 돌아왔다고 할까. 이 기회에 뭔가 치고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누군가의 무능이 다른 이에게는 기회가 된다는 의미일까.
‘위기관리 매뉴얼’로 본 노무현·이명박·박근혜의 청와대
국민대 교수인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기자에게 ‘위기관리 매뉴얼’ 얘기부터 꺼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때 만들어놓은 각종 매뉴얼이 이명박(李明博)·박근혜 정부에서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다. “위기관리와 관련해 유형별로 33가지의 표준 매뉴얼을 완성했고, 이를 세부화해 당시 276권의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을 만들었다”고 했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매뉴얼의 실체를 알고 있었을까. 자기 손으로 매뉴얼을 만들었던 공무원들은 매뉴얼의 실체를 알렸을까. 김 전 실장의 말이다.
“각 부처마다 다양한 위기상황을 상정해 매뉴얼을 만들도록 했어요.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경험이 최대한 반영되도록 했죠. 각 부처에서 만든 매뉴얼은 청와대에 모두 보고됐습니다. 당시 청와대 지하 벙커의 벽에 각종 위기관리 매뉴얼이 빼곡히 붙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매뉴얼은 계속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메르스 사태를 보면 매뉴얼을 전혀 참고하지 않은 것 같아요. 유사(類似) 사례인 사스와 관련한 경험과 기록 등을 참조했더라면 이런 혼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청와대 참모들은 그렇다 치고, 관료들이 왜 대처를 못 했을까요?
“다 그렇지(유능하지) 않아요. 관료 개개인이 가진 개별적 지식과 경험을 조직적 정보와 제도적 지식으로 전환시키려 한 것이 매뉴얼 작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직사회란 게 인사이동으로 담당자가 바뀌면 정보나 지식이 다 없어집니다. 할 수 없이 새 담당자가 전임(前任)에게 전화로 물어보는 식이죠. 묻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매뉴얼이었어요.”
위기는 예상했거나 예상하지 못했거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꼭 대비했던 그 위기가 아니더라도 준용할 수 있게 ‘유사 사례’로 남겨둬야 한다는 것이 매뉴얼의 작성 이유였다. 그는 “매달, 매년 기술적(記述的), 제도적 요인이 변하는데, 그런 기록을 관리하고 체크하는 부서가 노무현 정부 때는 청와대였다.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위기관리비서관이 프로세스를 관리하고 매뉴얼을 다듬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그런 기능이나 부서가 다 사라진 게 아닌가 싶다”고도 했다.
또 “참여정부 때는 현장을 중시했다. 청와대에서 현장 지휘자를 신속히 임명하고, 모든 기관이 그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힘을 실어줬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미국 9·11테러가 났을 때, 상황을 수습하던 사령탑이 지역 소방서장이었습니다. 미국 국토안전부 장관이나 뉴욕시장이 아니고 말이죠. 그 소방서장이 전권을 행사했어요. 그 사람이 장관과 시장에게 명령을 내렸죠. 메르스 사태도 어찌 보면 질병관리본부장이 더 잘 파악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잘 아는 사람에게 안 시키고 자꾸 위로 올라가서 부총리가 누구며, 대통령은 뭐하느냐고 해서 일이 복잡하게 됐어요. 이 과정에서 정보가 왜곡되고 결정이 지연되면서 대처가 엉망이 돼 버렸습니다. 대통령은 ‘장수(將帥)’만 잘 보호하면 되는데 모두가 책임을 위쪽으로 돌리니 복잡하게 됐던 게 아닐까요? 청와대가 위기관리 시스템을 몰라 문제가 커진 것입니다.”
국민안전처, “총 5301개의 매뉴얼 존재. 막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관료들이 작성한 각종 재난(혹은 위기관리) 매뉴얼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왜 없던 일이 됐을까. 그 많던 매뉴얼은 실제로 사문서가 됐을까. 아예 폐기했을까.
국민안전처에 문의했다. 국민안전처는 국가적 재난관리를 위한 재난안전 총괄부서로 세월호 참사 이후인 작년 11월 19일 신설됐다.
국민안전처 고위 관계자는 “총 5301개의 매뉴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서랍 안에 있던 매뉴얼을 다시 꺼내 털면서 ‘국회 재난매뉴얼심사소위원회’라는 임시기구도 만들었다. 소위원장은 야당인 노웅래 의원.
그러나 국민안전처는 매뉴얼을 크게 줄이겠다는 입장이다. “현장 활용성이 미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관료의 말이다.
“재난 발생 시, 실제 활용해야 하는 것은 ‘대응’ 단계임에도 현행 매뉴얼은 예방·대비·대응·복구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많은 분량으로 구성돼 있어요. 각 부서마다 막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또 서술식 형태와 표들로 구성돼 사용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숙지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여기다 일반적 사항만 나열돼 누가 어떻게 어느 부처와 연계할지가 모호하고 기존 업무 추진과 매뉴얼 교육훈련이 분리되어 실시돼 형식적인 교육훈련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관료들이 자기 손으로 매뉴얼을 만들어놓고, 부실하게 막 만들었다고 실토한 셈이다. 이 관계자는 “현재 1만3000개가 넘는 많은 재난안전 기준과 이런 기준들이 또 법령과 그런 훈련, 이런 많은 다양한 제도 속에 담겨 있으나 앞으로 통일적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기준을 개선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위기관리 매뉴얼, 450개로 줄이겠다”
부실하게 만든 매뉴얼을 제대로 만들겠다는 관료들의 ‘각오’를 믿어도 될까. 이 과정에서 대통령과 청와대, 국회가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5301개나 되는 재난관리 매뉴얼을 얼마나 줄일지도 궁금하다. 이 관계자는 “5301개의 매뉴얼을 450여 개로 정비코자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국민안전처는 ‘재난관리 기본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대해 김병준 전 청와대 실장은 “매뉴얼을 정비한다는 것은 카테고리 수를 조정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느냐”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컨트롤 타워에서 현장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해야 할 판단과 역할이 있어요. 국(局) 단위의 과업과 과(課) 단위의 업무가 다를 겁니다. 그럴 경우 매뉴얼이 다양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노무현 정부가 만든 매뉴얼이 사문화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지만 어떻게 손질할 것인지 지켜보지 않을 수 없어요.”
지난 5월 6일 국민안전처 이성호 차관은 국회에 출석, “(이전 정부 때 매뉴얼을) 막 만들었다”고 실토했다. 속기록 내용은 이렇다.
“(매뉴얼에 나오는) ‘표준’ 재난 유형이 30여 개나 되는데 이것을 각 지자체 또 관련 정부부처 또 책임기관 등에서 그냥 우후죽순식으로 막 만들었습니다. 기준도 없이. (중략) 단계별로 해야 할 업무만 이렇게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해 놔가지고 실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사용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차관은 또 이런 말도 했다.
“세월호 같은 사고가 일어나, 바로 구조를 해야 할 때 함장이 뭘 해야 되느냐, 또 갑판에 올라가 어떤 일을 시작해야 되느냐, 원전사고가 났을 때 소개(疏開)하는 것을 누가 통제하고 어떻게 소개하느냐와 같은 구체적인 것을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기자는 노무현 정부 당시 NSC에 근무했던 한 실무자와 전화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위기 매뉴얼은 평시에 무용지물일지 몰라도 위기상황일 때는 효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매뉴얼만 만든 것이 아니라 2006년부터 ‘위기대응 통합훈련’을 을지연습 때 했고, 이 과정에서 매뉴얼을 계속 수정했어요. 직접 훈련을 참관한 일도 있습니다.”
매뉴얼의 수정, 보완작업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정권 내내 계속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작 관료들은 매뉴얼을 “막 만들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작성된 매뉴얼이 관료들에게 생산적 과업이 못 된 것은 한국 사회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2009년 신종플루와 2015년 메르스
이명박 정부 당시 재난과 위기관리 매뉴얼은 어떻게 관리했을까. 언론인 출신으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김효재(金孝在) 전 의원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인 2010년 천안함 사태가 일어나자 ‘국가 위기관리의 위기’란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한 일도 있다.
사실 이명박 정부 시절 크고 작은 위기가 적지 않았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과 미국발 금융위기가 도래했고 2009년 5월 신종(新種) 인플루엔자(줄여서 신종플루)가 발생했었다. 그해 9월 1일 4294명의 신종플루 확진 환자가 발생할 정도로 파장이 어마어마했다. 2010년 천안함 침몰사건, 연평도 포격도 MB 정부 때 일어났다.
김 전 의원은 “MB 정부 당시 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위기에 잘 대처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권한을 위임하고 관료들과 협업을 잘 이뤄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메시지는 크게 달랐다. 노 대통령은 ‘정부’가 아닌 대통령 ‘개인’의 메시지를 정책에 담아 이념과 도덕성 논란을 야기, 국정운영의 흐름이 파행된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 구상 메시지에 권위와 책임을 실어주는 방식을 주로 택했다.
“권위를 실무자에게 대폭 위임하고, 그 메시지의 효과를 최적화시킨 것은 ‘정부’였어요. 노 대통령과 달리 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나서 듣고 답변하지 않고 ‘정부’에 최적화시켰다는 점입니다. 이는 대통령 개인 중심의 소모적 논란을 불식시키며 효율적인 정책 의제화와 추진을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이명박의 청와대’라면 이번 메르스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보건복지부 장관이 메르스 발병 6일 만에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보건복지부는 사회부총리가 관할토록 돼 있으니 청와대 담당수석실에서 그렇게 지휘체계를 내리라고 대통령에게 권유했다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겁니다.
질병통제본부가 메르스 대책을 세우고 조정할 수 있지만, 감염자가 시도 간 이동을 못 하게 한다든지 하는 ‘방역망’ 구축은 중앙정부에 기능이 없고 지자체만이 할 수 있어요. 특히 정부가 강제력을 필요로 할 때는 경찰력과 군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경찰과 군, 행정부처, 지자체를 총괄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총리가 없으니 황우여 부총리가 나섰어야 했어요.”
—2009년 신종플루 때는 어떻게 했나요?
“위기가 도래하면 처음엔 다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어요. 혼란을 다잡는 것이 시스템입니다. 신종플루 때도 처음엔 당황했어요. 하지만 그 일을 총괄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찾았고 그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었어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순차적인 백신접종과 백신공급을 최대한 앞당길 수 있는 조치를 마련토록 관계부처에 지시하면서 국민 불안감도 잦아들었다고 기억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구 20% 수준의 항바이러스제 비축, 검사시설의 확대, 지정격리병상 확보, 100개 병원에 ‘격리 외래시설’ 및 30개 병원 ‘격리 중환자실’ 확보 등의 대책도 세울 수 있었죠.”
—노무현 정부 때 만든 재난 매뉴얼을 이명박 정부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매뉴얼이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든 게 아니라, 이전부터 쭉 내려오던 것이죠. 그것을 갑자기 만들고 갑자기 없애버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매뉴얼은 어느 부처에나 있는 것이고 모든 경우의 수를 가정할 수 없는 것이니 그때그때 상황 판단에 따라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부처가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죠. 신종플루 때 백신을 마련하고 방역에 나선 것도 그 후론 일종의 매뉴얼이 된 겁니다.
관료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실력 있는 집단입니다. 조진다고 해서 말을 듣습니까. 청와대는 관료들을 조정하고 지휘 시스템을 가동하면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해요. 박근혜의 청와대에서 이 시스템이 정상가동했는지 의문입니다.”
各樣各色 노무현·이명박·박근혜의 청와대
김효재 전 수석 주장대로 이명박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이명박의 청와대’는 “신속하고 실용적인 대응”이라는 ‘작은 정부’의 기조에 따라 노무현 정부 당시 막강했던 NSC 사무처를 없애버렸다. 대신 청와대 내 ‘국가위기상황팀’을 운영해 왔다. ‘처(處)’가 하루아침에 ‘팀’으로 반토막났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천안함·연평도 사태를 잇달아 겪으며 위기상황팀을 ‘국가위기관리센터’로 슬그머니 격상시키더니 수석비서관급을 실장으로 하는 ‘국가위기관리실’을 만들었다. 우왕좌왕 끝에 NSC 사무처 형태로 복귀한 셈이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 출범 직후 NSC 사무처를 다시 신설하고 말았다.
“MB는 측근에게 권한 위임했다가 손해봐”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와 업무조율을 했던 한 전직 고위 관료를 설득해 전화 통화할 수 있었다.
“북한의 핵(核)실험과 천안함·연평도 사태 등 군사적 위기상황이 계속되면서 NSC 회의체와 사무처의 복원, 국가위기관리실에 대한 기능 강화에 대한 요구가 안팎에서 많았어요.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내에서도 그런 말들이 많았어요.”
—‘이명박의 청와대’는 ‘노무현의 청와대’와 어떻게 달랐나요?
“MB는 대통령 개인의 소모적 논란을 불식시키려고 애를 썼다고 할까요? 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나서 듣고 답변하지 않았기에 청와대 ‘측근’과 참모들의 비중이 높아졌습니다. 노 대통령 때는 ‘동북아시대’ ‘자주국방’ ‘과거사 청산’ 등 정책 메시지가 사회갈등도 촉발시켰고, 메시지의 발화(發話)도 정부가 아닌 그분의 ‘입’이 중심이었다고 할까요? 그런 시행착오를 지켜본 MB와 청와대는 ‘공정사회’ ‘친서민 중도실용’ ‘저탄소 녹색성장’ 같은 갈등을 최소화한 정책 메시지에 주력했어요. 하지만 정책 메시지에 힘이 안 실렸고 파괴력이 크지 않았어요. 반대로 ‘4대강 살리기’ 사업은 많은 비판에도 국정을 돌파해 내려 했지만 공감대를 확보하지 못해 두고두고 애를 먹었어요.
또 ‘MB의 청와대’는 측근 인사의 비중이 커져 버렸는데 그 측근이 MB와 국민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제대로 못 했어요. 측근들로 인해 MB의 이미지가 더 훼손됐습니다.”
—‘박근혜의 청와대’는 어떤가요?
“지금 청와대엔 대통령도 안 보이고 측근도 안 보인다는 겁니다. 메르스 사태에서 보듯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할까요? 그러다 보니 일관된 국정운영이 뭔지 국민이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청와대 참모들이 정책방향을 세울 생산적 논쟁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도록 방향을 끌어야 하는데 참모들이 전혀 구실을 못 하고 있어요. 대표적 예가 창조경제입니다. ‘노무현의 청와대’는 대통령이 정책 메시지를 제시하면 생산적 의제로 발전하지 않고 반목과 갈등으로 갈라졌다면 ‘박근혜와 청와대’는 의제나 메시지 자체가 없고 국민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게 문제입니다. 관료들도 엎드려 태업을 하는지, 소외되고 있는지 안 보입니다.”
YS·DJ·盧의 위기관리 리더십과 박근혜
기자는 한국위기관리연구소 정찬권(鄭燦權) 연구위원에게 역대 대통령의 위기관리 리더십에 대해 물어보았다. 정찬권 박사는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 과업 지향적이고 성취욕이 강해 국정운영에 적극적이었으나 즉흥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체계적인 국가위기관리가 미흡했다”고 평가했다.
예를 들어 1996년 9월 18일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이 터졌을 당시 “북한 도발에 대처한다”면서, 원칙적인 조치만 내리고 군사 제재나 국제사회를 통한 강압외교 같은 위기관리 정책은 실천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 박사의 말이다.
“YS는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하는 불안정한 국가위기관리 리더십을 발휘했어요. 이러한 배경은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국가위기관리 정책의 부재와 법규에 명시되지 않은 임시회의체를 통한 위기관리를 한 결과로 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선 “정치적 이유에서, 국가위기 발생 시 전면에 나서 위기를 관리하기보다 국방장관에게 위임하고 최종의사만 결정하는 식의 간접적 국가위기관리 리더십을 택했다”고 했다.
“1999년 6월 연평해전 당시 DJ는 위기 발생 시 최고통수권자의 고유 직무인 위기관리를 국방장관 등에 권한을 위임하는 소극적 리더십을 보였어요. 그 결과, 국가위기관리 과정에서 대통령이 강력하고 단호하게 응징하겠다는 결의를 국내외에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임기 내내 북한의 도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혼선을 빚었고 금강산 관광객의 안전을 담보로 북한에 흥정의 기회를 제공, 대북협상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원인 제공을 하고 말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위기관리 리더십은 “신속한 상황판단과 의사결정, 적극적 대응 측면에서 아쉬운 국가위기관리 리더십을 발휘했다”며 2006년 10월 1차 북핵 실험 당시를 예로 들었다.
“그해 10월 3일 오후 6시 북한 외무성의 핵실험 공식발표 이후 노 대통령은 5분 뒤인 6시 5분에 보고를 받았으나 아무런 공개언급을 하지 않았어요. 또 이튿날 4일 오전 7시 안보정책조정회의를 열고도 성명을 청와대가 아닌 외교부 명의로 발표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첫 언급도 오전 9시30분 국무회의에서였어요.
반면 일본은 3일 오후 6시48분에 아베 신조 총리가 직접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상황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어 오후 7시에 아소 다로 외상은 북한 핵실험의 가능성과 심각성을 공개하고 7시30분에 아베 총리는 ‘북한 핵실험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발표했죠. 또 4일 오전 11시 아베 총리는 국회에서 북 핵실험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등 신속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는 “국가적 위기상황이 전개됐음에도 안이한 자세와 지연 대처로 그야말로 ‘국가위기관리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안보 불감증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강조했다.
메르스 사태와 박 대통령의 위기관리 리더십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과거 중국 쓰촨성 대지진, 미국의 허리케인 및 에볼라 사태 당시 그 나라 정치지도자들이 보여준 모습과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란 얘기다.
“정치지도자의 책무는 평소 위기를 예측하고 대비하며, 위기 발생 시 국가자원 동원과 국민통합을 통해 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것에 있어요. 무기력한 ‘박근혜와 청와대’의 위기는 대통령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그들을 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전문가와 참모의 부재(不在)가 초래한 결과라고 판단되는데 향후 시급하게 보완이 요구되는 과제라고 할 수 있어요.”
속내를 알기 힘든 박근혜의 ‘위기담론 커뮤니케이션’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을, 내향적·이성적이며 비공개적인 활동을 선호하는 정적(靜的)인 ‘마이너스형 리더십’이라 표현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소수의 참여와 일방적 통보(지시), 무언의 압박을 동원해 정책 메시지를 달성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갈등과 위기관리 능력이 낮아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는 대중에게 비치는 언행과 수사(修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때 보인 박 대통령의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은 정치학자나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주제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월 9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국민 여러분의 협조도 매우 중요하다. 메르스 환자와 접촉한 분들은 방역당국에서 정한 행동요령을 반드시 지켜주셔야 본인과 가족, 이웃들의 건강을 보호할 수 있다”고 대국민 협조를 당부했다. 지금까지 정부 무능에 대한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고 한다.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김영욱(金暎郁) 교수는 IMF 경제 환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위기 커뮤니케이션’을 분석한 일이 있다. 환난 초기(1997.11.22~98.1.29) YS는 ‘사과’ ‘수정행위’(사태 이전의 상태로 사고를 수정하는 것) ‘부인’ ‘책임회피’ 등의 4가지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많이 썼다. 그러나 사과 수준이 관념적 도덕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사과는 사과인데 책임을 전가하거나 책임성을 의도적으로 축소하려는 모습을 보여, 결국 국민이 YS의 사과를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YS의 위기 커뮤니케이션은, 사과를 하더라도 항상 다른 이미지 회복 메시지를 혼용해 커뮤니케이션의 일관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솔직한 사과에 인색한 것은 아무리 잘못을 했다고 해도 자신의 현재 위치나 사회적 위치에 맞는 ‘체면 유지 커뮤니케이션’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가 책임성을 부인하는 변명 전략이나 자신을 방어하려는 정당화 전략은 오히려 위기상황에서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과거 대통령의 사과 표현은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더는 문제의 본질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봉쇄하는 기능을 가졌다. 그땐 대통령의 사과 한마디에 언론도 입을 닫았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솔직함이 묻어나지 않는 대통령의 간접적 표현의 사과나 진정성이 없는 위기담론 커뮤니케이션은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아니라면 총리, 부총리라도 나서야 하는데 곁에 아무도 없다는 말도 들린다. 심지어 우왕좌왕하는 관료들을 보고 ‘집단태업(集團怠業) 중’이라 비꼬는 이가 있고,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관료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웃 국가에서 먼저 유행해 대비기간이 충분했던 2003년 사스(SARS) 사태 때와 단순 비교하긴 어렵다. 그러나 당시 고건(高建) 총리가 돋보인 이유는 그가 행정에 정통한 내무(內務)관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지방행정은 일종의 종합행정인데 방역·보건·의료 같은 개념이 다 포함돼 있다. 행정가의 덕목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나눈 뒤 속도감 있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결단력과 상황판단 능력에 있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의 가장 유능한 집단이 관료들이다. 사실, 그들의 철제 캐비닛 안에 오만 가지 위기 대처방안과 매뉴얼이 다 있다.
김병준(金秉準)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런 말을 했다. “관료조직은 절대권력 아래에서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절대권력이 사라진 지금 관료사회는 그야말로 복지부동이다. 꼬이고 꼬인 법령과 지침, 그리고 왜곡된 조직문화 등이 온통 지뢰밭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대통령과 청와대가 상황에 끌려가고 관료조직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을까. 또 ‘위기관리’ 담론으로서의 대통령 메시지는 세월호 때와 마찬가지로 왜 그렇게 공허할까. 대통령의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국민 요구와 기대에 대한 성실한 답변이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전면에 나서 위기를 포괄적이고 유기적으로 관리하는 데 실패했다. 박 대통령의 말에는 ‘메시지’가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박원순(朴元淳) 서울시장이다. 그는 중앙정부와 삼성서울병원에다 메르스 정보공개를 요구했고, 확진 권한을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에 달라고 요구했다. 전염병예방법에 따르면, 지자체는 전염병에 대해 많은 권한(방역에 나서야 할 의무, 격리 치료 병원 지정, 환자 격리, 퍼진 장소 폐쇄 등)을 갖고 있다. 박 시장은 당연히 갖고 있는 권한에 따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중앙정부에 공세적인 요구를 한 셈이 됐다.
어찌됐든 여론은 박 시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서울시청에 출입하는 한 기자에게 물어보니 “정부와 차별화되는 모습을 부각시켰다는 점에 놀랐다. 문재인에 잠시 잊혔던 박원순이 다시 돌아왔다고 할까. 이 기회에 뭔가 치고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누군가의 무능이 다른 이에게는 기회가 된다는 의미일까.
‘위기관리 매뉴얼’로 본 노무현·이명박·박근혜의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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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준 국민대 교수. |
“노무현(盧武鉉) 정부 때 만들어놓은 각종 매뉴얼이 이명박(李明博)·박근혜 정부에서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다. “위기관리와 관련해 유형별로 33가지의 표준 매뉴얼을 완성했고, 이를 세부화해 당시 276권의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을 만들었다”고 했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매뉴얼의 실체를 알고 있었을까. 자기 손으로 매뉴얼을 만들었던 공무원들은 매뉴얼의 실체를 알렸을까. 김 전 실장의 말이다.
“각 부처마다 다양한 위기상황을 상정해 매뉴얼을 만들도록 했어요.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경험이 최대한 반영되도록 했죠. 각 부처에서 만든 매뉴얼은 청와대에 모두 보고됐습니다. 당시 청와대 지하 벙커의 벽에 각종 위기관리 매뉴얼이 빼곡히 붙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매뉴얼은 계속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메르스 사태를 보면 매뉴얼을 전혀 참고하지 않은 것 같아요. 유사(類似) 사례인 사스와 관련한 경험과 기록 등을 참조했더라면 이런 혼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청와대 참모들은 그렇다 치고, 관료들이 왜 대처를 못 했을까요?
“다 그렇지(유능하지) 않아요. 관료 개개인이 가진 개별적 지식과 경험을 조직적 정보와 제도적 지식으로 전환시키려 한 것이 매뉴얼 작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직사회란 게 인사이동으로 담당자가 바뀌면 정보나 지식이 다 없어집니다. 할 수 없이 새 담당자가 전임(前任)에게 전화로 물어보는 식이죠. 묻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매뉴얼이었어요.”
위기는 예상했거나 예상하지 못했거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꼭 대비했던 그 위기가 아니더라도 준용할 수 있게 ‘유사 사례’로 남겨둬야 한다는 것이 매뉴얼의 작성 이유였다. 그는 “매달, 매년 기술적(記述的), 제도적 요인이 변하는데, 그런 기록을 관리하고 체크하는 부서가 노무현 정부 때는 청와대였다.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위기관리비서관이 프로세스를 관리하고 매뉴얼을 다듬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그런 기능이나 부서가 다 사라진 게 아닌가 싶다”고도 했다.
또 “참여정부 때는 현장을 중시했다. 청와대에서 현장 지휘자를 신속히 임명하고, 모든 기관이 그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힘을 실어줬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미국 9·11테러가 났을 때, 상황을 수습하던 사령탑이 지역 소방서장이었습니다. 미국 국토안전부 장관이나 뉴욕시장이 아니고 말이죠. 그 소방서장이 전권을 행사했어요. 그 사람이 장관과 시장에게 명령을 내렸죠. 메르스 사태도 어찌 보면 질병관리본부장이 더 잘 파악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잘 아는 사람에게 안 시키고 자꾸 위로 올라가서 부총리가 누구며, 대통령은 뭐하느냐고 해서 일이 복잡하게 됐어요. 이 과정에서 정보가 왜곡되고 결정이 지연되면서 대처가 엉망이 돼 버렸습니다. 대통령은 ‘장수(將帥)’만 잘 보호하면 되는데 모두가 책임을 위쪽으로 돌리니 복잡하게 됐던 게 아닐까요? 청와대가 위기관리 시스템을 몰라 문제가 커진 것입니다.”
국민안전처, “총 5301개의 매뉴얼 존재. 막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관료들이 작성한 각종 재난(혹은 위기관리) 매뉴얼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왜 없던 일이 됐을까. 그 많던 매뉴얼은 실제로 사문서가 됐을까. 아예 폐기했을까.
국민안전처에 문의했다. 국민안전처는 국가적 재난관리를 위한 재난안전 총괄부서로 세월호 참사 이후인 작년 11월 19일 신설됐다.
국민안전처 고위 관계자는 “총 5301개의 매뉴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서랍 안에 있던 매뉴얼을 다시 꺼내 털면서 ‘국회 재난매뉴얼심사소위원회’라는 임시기구도 만들었다. 소위원장은 야당인 노웅래 의원.
그러나 국민안전처는 매뉴얼을 크게 줄이겠다는 입장이다. “현장 활용성이 미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관료의 말이다.
“재난 발생 시, 실제 활용해야 하는 것은 ‘대응’ 단계임에도 현행 매뉴얼은 예방·대비·대응·복구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많은 분량으로 구성돼 있어요. 각 부서마다 막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또 서술식 형태와 표들로 구성돼 사용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숙지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여기다 일반적 사항만 나열돼 누가 어떻게 어느 부처와 연계할지가 모호하고 기존 업무 추진과 매뉴얼 교육훈련이 분리되어 실시돼 형식적인 교육훈련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관료들이 자기 손으로 매뉴얼을 만들어놓고, 부실하게 막 만들었다고 실토한 셈이다. 이 관계자는 “현재 1만3000개가 넘는 많은 재난안전 기준과 이런 기준들이 또 법령과 그런 훈련, 이런 많은 다양한 제도 속에 담겨 있으나 앞으로 통일적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기준을 개선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위기관리 매뉴얼, 450개로 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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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11월 29일 청와대에서 NSC(국가안전보장회의)의 ‘위기대응 실무매뉴얼’에 대해 김영근 NSC 위기관리센터 국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
5301개나 되는 재난관리 매뉴얼을 얼마나 줄일지도 궁금하다. 이 관계자는 “5301개의 매뉴얼을 450여 개로 정비코자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국민안전처는 ‘재난관리 기본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대해 김병준 전 청와대 실장은 “매뉴얼을 정비한다는 것은 카테고리 수를 조정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느냐”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컨트롤 타워에서 현장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해야 할 판단과 역할이 있어요. 국(局) 단위의 과업과 과(課) 단위의 업무가 다를 겁니다. 그럴 경우 매뉴얼이 다양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노무현 정부가 만든 매뉴얼이 사문화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지만 어떻게 손질할 것인지 지켜보지 않을 수 없어요.”
지난 5월 6일 국민안전처 이성호 차관은 국회에 출석, “(이전 정부 때 매뉴얼을) 막 만들었다”고 실토했다. 속기록 내용은 이렇다.
“(매뉴얼에 나오는) ‘표준’ 재난 유형이 30여 개나 되는데 이것을 각 지자체 또 관련 정부부처 또 책임기관 등에서 그냥 우후죽순식으로 막 만들었습니다. 기준도 없이. (중략) 단계별로 해야 할 업무만 이렇게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해 놔가지고 실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사용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차관은 또 이런 말도 했다.
“세월호 같은 사고가 일어나, 바로 구조를 해야 할 때 함장이 뭘 해야 되느냐, 또 갑판에 올라가 어떤 일을 시작해야 되느냐, 원전사고가 났을 때 소개(疏開)하는 것을 누가 통제하고 어떻게 소개하느냐와 같은 구체적인 것을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기자는 노무현 정부 당시 NSC에 근무했던 한 실무자와 전화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위기 매뉴얼은 평시에 무용지물일지 몰라도 위기상황일 때는 효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매뉴얼만 만든 것이 아니라 2006년부터 ‘위기대응 통합훈련’을 을지연습 때 했고, 이 과정에서 매뉴얼을 계속 수정했어요. 직접 훈련을 참관한 일도 있습니다.”
매뉴얼의 수정, 보완작업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정권 내내 계속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작 관료들은 매뉴얼을 “막 만들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작성된 매뉴얼이 관료들에게 생산적 과업이 못 된 것은 한국 사회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2009년 신종플루와 2015년 메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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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9월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고위 당정협의회에 참석한 청와대 김효재 정무수석(가운데), 임태희 대통령 비서실장(왼쪽). |
사실 이명박 정부 시절 크고 작은 위기가 적지 않았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과 미국발 금융위기가 도래했고 2009년 5월 신종(新種) 인플루엔자(줄여서 신종플루)가 발생했었다. 그해 9월 1일 4294명의 신종플루 확진 환자가 발생할 정도로 파장이 어마어마했다. 2010년 천안함 침몰사건, 연평도 포격도 MB 정부 때 일어났다.
김 전 의원은 “MB 정부 당시 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위기에 잘 대처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권한을 위임하고 관료들과 협업을 잘 이뤄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메시지는 크게 달랐다. 노 대통령은 ‘정부’가 아닌 대통령 ‘개인’의 메시지를 정책에 담아 이념과 도덕성 논란을 야기, 국정운영의 흐름이 파행된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 구상 메시지에 권위와 책임을 실어주는 방식을 주로 택했다.
“권위를 실무자에게 대폭 위임하고, 그 메시지의 효과를 최적화시킨 것은 ‘정부’였어요. 노 대통령과 달리 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나서 듣고 답변하지 않고 ‘정부’에 최적화시켰다는 점입니다. 이는 대통령 개인 중심의 소모적 논란을 불식시키며 효율적인 정책 의제화와 추진을 가능하게 만들었어요.”
—‘이명박의 청와대’라면 이번 메르스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보건복지부 장관이 메르스 발병 6일 만에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보건복지부는 사회부총리가 관할토록 돼 있으니 청와대 담당수석실에서 그렇게 지휘체계를 내리라고 대통령에게 권유했다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겁니다.
질병통제본부가 메르스 대책을 세우고 조정할 수 있지만, 감염자가 시도 간 이동을 못 하게 한다든지 하는 ‘방역망’ 구축은 중앙정부에 기능이 없고 지자체만이 할 수 있어요. 특히 정부가 강제력을 필요로 할 때는 경찰력과 군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경찰과 군, 행정부처, 지자체를 총괄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총리가 없으니 황우여 부총리가 나섰어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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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10월 28일 신종플루 대책 현장 점검을 위해 서울 중구 국립의료원을 방문, 의료진과 악수하고 있다. |
“위기가 도래하면 처음엔 다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어요. 혼란을 다잡는 것이 시스템입니다. 신종플루 때도 처음엔 당황했어요. 하지만 그 일을 총괄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찾았고 그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었어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순차적인 백신접종과 백신공급을 최대한 앞당길 수 있는 조치를 마련토록 관계부처에 지시하면서 국민 불안감도 잦아들었다고 기억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구 20% 수준의 항바이러스제 비축, 검사시설의 확대, 지정격리병상 확보, 100개 병원에 ‘격리 외래시설’ 및 30개 병원 ‘격리 중환자실’ 확보 등의 대책도 세울 수 있었죠.”
—노무현 정부 때 만든 재난 매뉴얼을 이명박 정부에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매뉴얼이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든 게 아니라, 이전부터 쭉 내려오던 것이죠. 그것을 갑자기 만들고 갑자기 없애버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매뉴얼은 어느 부처에나 있는 것이고 모든 경우의 수를 가정할 수 없는 것이니 그때그때 상황 판단에 따라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부처가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죠. 신종플루 때 백신을 마련하고 방역에 나선 것도 그 후론 일종의 매뉴얼이 된 겁니다.
관료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실력 있는 집단입니다. 조진다고 해서 말을 듣습니까. 청와대는 관료들을 조정하고 지휘 시스템을 가동하면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해요. 박근혜의 청와대에서 이 시스템이 정상가동했는지 의문입니다.”
各樣各色 노무현·이명박·박근혜의 청와대
김효재 전 수석 주장대로 이명박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이명박의 청와대’는 “신속하고 실용적인 대응”이라는 ‘작은 정부’의 기조에 따라 노무현 정부 당시 막강했던 NSC 사무처를 없애버렸다. 대신 청와대 내 ‘국가위기상황팀’을 운영해 왔다. ‘처(處)’가 하루아침에 ‘팀’으로 반토막났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천안함·연평도 사태를 잇달아 겪으며 위기상황팀을 ‘국가위기관리센터’로 슬그머니 격상시키더니 수석비서관급을 실장으로 하는 ‘국가위기관리실’을 만들었다. 우왕좌왕 끝에 NSC 사무처 형태로 복귀한 셈이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 출범 직후 NSC 사무처를 다시 신설하고 말았다.
“MB는 측근에게 권한 위임했다가 손해봐”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와 업무조율을 했던 한 전직 고위 관료를 설득해 전화 통화할 수 있었다.
“북한의 핵(核)실험과 천안함·연평도 사태 등 군사적 위기상황이 계속되면서 NSC 회의체와 사무처의 복원, 국가위기관리실에 대한 기능 강화에 대한 요구가 안팎에서 많았어요.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내에서도 그런 말들이 많았어요.”
—‘이명박의 청와대’는 ‘노무현의 청와대’와 어떻게 달랐나요?
“MB는 대통령 개인의 소모적 논란을 불식시키려고 애를 썼다고 할까요? 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나서 듣고 답변하지 않았기에 청와대 ‘측근’과 참모들의 비중이 높아졌습니다. 노 대통령 때는 ‘동북아시대’ ‘자주국방’ ‘과거사 청산’ 등 정책 메시지가 사회갈등도 촉발시켰고, 메시지의 발화(發話)도 정부가 아닌 그분의 ‘입’이 중심이었다고 할까요? 그런 시행착오를 지켜본 MB와 청와대는 ‘공정사회’ ‘친서민 중도실용’ ‘저탄소 녹색성장’ 같은 갈등을 최소화한 정책 메시지에 주력했어요. 하지만 정책 메시지에 힘이 안 실렸고 파괴력이 크지 않았어요. 반대로 ‘4대강 살리기’ 사업은 많은 비판에도 국정을 돌파해 내려 했지만 공감대를 확보하지 못해 두고두고 애를 먹었어요.
또 ‘MB의 청와대’는 측근 인사의 비중이 커져 버렸는데 그 측근이 MB와 국민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제대로 못 했어요. 측근들로 인해 MB의 이미지가 더 훼손됐습니다.”
—‘박근혜의 청와대’는 어떤가요?
“지금 청와대엔 대통령도 안 보이고 측근도 안 보인다는 겁니다. 메르스 사태에서 보듯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할까요? 그러다 보니 일관된 국정운영이 뭔지 국민이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청와대 참모들이 정책방향을 세울 생산적 논쟁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도록 방향을 끌어야 하는데 참모들이 전혀 구실을 못 하고 있어요. 대표적 예가 창조경제입니다. ‘노무현의 청와대’는 대통령이 정책 메시지를 제시하면 생산적 의제로 발전하지 않고 반목과 갈등으로 갈라졌다면 ‘박근혜와 청와대’는 의제나 메시지 자체가 없고 국민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게 문제입니다. 관료들도 엎드려 태업을 하는지, 소외되고 있는지 안 보입니다.”
YS·DJ·盧의 위기관리 리더십과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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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위기관리연구소 정찬권 박사. |
예를 들어 1996년 9월 18일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이 터졌을 당시 “북한 도발에 대처한다”면서, 원칙적인 조치만 내리고 군사 제재나 국제사회를 통한 강압외교 같은 위기관리 정책은 실천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 박사의 말이다.
“YS는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하는 불안정한 국가위기관리 리더십을 발휘했어요. 이러한 배경은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국가위기관리 정책의 부재와 법규에 명시되지 않은 임시회의체를 통한 위기관리를 한 결과로 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선 “정치적 이유에서, 국가위기 발생 시 전면에 나서 위기를 관리하기보다 국방장관에게 위임하고 최종의사만 결정하는 식의 간접적 국가위기관리 리더십을 택했다”고 했다.
“1999년 6월 연평해전 당시 DJ는 위기 발생 시 최고통수권자의 고유 직무인 위기관리를 국방장관 등에 권한을 위임하는 소극적 리더십을 보였어요. 그 결과, 국가위기관리 과정에서 대통령이 강력하고 단호하게 응징하겠다는 결의를 국내외에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임기 내내 북한의 도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혼선을 빚었고 금강산 관광객의 안전을 담보로 북한에 흥정의 기회를 제공, 대북협상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원인 제공을 하고 말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위기관리 리더십은 “신속한 상황판단과 의사결정, 적극적 대응 측면에서 아쉬운 국가위기관리 리더십을 발휘했다”며 2006년 10월 1차 북핵 실험 당시를 예로 들었다.
“그해 10월 3일 오후 6시 북한 외무성의 핵실험 공식발표 이후 노 대통령은 5분 뒤인 6시 5분에 보고를 받았으나 아무런 공개언급을 하지 않았어요. 또 이튿날 4일 오전 7시 안보정책조정회의를 열고도 성명을 청와대가 아닌 외교부 명의로 발표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첫 언급도 오전 9시30분 국무회의에서였어요.
반면 일본은 3일 오후 6시48분에 아베 신조 총리가 직접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상황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어 오후 7시에 아소 다로 외상은 북한 핵실험의 가능성과 심각성을 공개하고 7시30분에 아베 총리는 ‘북한 핵실험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발표했죠. 또 4일 오전 11시 아베 총리는 국회에서 북 핵실험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등 신속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는 “국가적 위기상황이 전개됐음에도 안이한 자세와 지연 대처로 그야말로 ‘국가위기관리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안보 불감증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강조했다.
메르스 사태와 박 대통령의 위기관리 리더십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과거 중국 쓰촨성 대지진, 미국의 허리케인 및 에볼라 사태 당시 그 나라 정치지도자들이 보여준 모습과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란 얘기다.
“정치지도자의 책무는 평소 위기를 예측하고 대비하며, 위기 발생 시 국가자원 동원과 국민통합을 통해 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것에 있어요. 무기력한 ‘박근혜와 청와대’의 위기는 대통령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그들을 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전문가와 참모의 부재(不在)가 초래한 결과라고 판단되는데 향후 시급하게 보완이 요구되는 과제라고 할 수 있어요.”
속내를 알기 힘든 박근혜의 ‘위기담론 커뮤니케이션’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을, 내향적·이성적이며 비공개적인 활동을 선호하는 정적(靜的)인 ‘마이너스형 리더십’이라 표현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소수의 참여와 일방적 통보(지시), 무언의 압박을 동원해 정책 메시지를 달성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갈등과 위기관리 능력이 낮아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는 대중에게 비치는 언행과 수사(修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때 보인 박 대통령의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은 정치학자나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주제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월 9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국민 여러분의 협조도 매우 중요하다. 메르스 환자와 접촉한 분들은 방역당국에서 정한 행동요령을 반드시 지켜주셔야 본인과 가족, 이웃들의 건강을 보호할 수 있다”고 대국민 협조를 당부했다. 지금까지 정부 무능에 대한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고 한다.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김영욱(金暎郁) 교수는 IMF 경제 환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위기 커뮤니케이션’을 분석한 일이 있다. 환난 초기(1997.11.22~98.1.29) YS는 ‘사과’ ‘수정행위’(사태 이전의 상태로 사고를 수정하는 것) ‘부인’ ‘책임회피’ 등의 4가지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많이 썼다. 그러나 사과 수준이 관념적 도덕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사과는 사과인데 책임을 전가하거나 책임성을 의도적으로 축소하려는 모습을 보여, 결국 국민이 YS의 사과를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YS의 위기 커뮤니케이션은, 사과를 하더라도 항상 다른 이미지 회복 메시지를 혼용해 커뮤니케이션의 일관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솔직한 사과에 인색한 것은 아무리 잘못을 했다고 해도 자신의 현재 위치나 사회적 위치에 맞는 ‘체면 유지 커뮤니케이션’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가 책임성을 부인하는 변명 전략이나 자신을 방어하려는 정당화 전략은 오히려 위기상황에서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과거 대통령의 사과 표현은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더는 문제의 본질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봉쇄하는 기능을 가졌다. 그땐 대통령의 사과 한마디에 언론도 입을 닫았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솔직함이 묻어나지 않는 대통령의 간접적 표현의 사과나 진정성이 없는 위기담론 커뮤니케이션은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