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유착 정치 스캔들 ‘리스트’… 대부분 실체규명 못 하고 龍頭蛇尾격으로 막 내려
⊙ 과거 공식과는 다른 ‘성완종 리스트’… 정권 중반, 돈 제공자가 직접 작성했다는 점에서
과거 리스트와 차이
⊙ 과거 공식과는 다른 ‘성완종 리스트’… 정권 중반, 돈 제공자가 직접 작성했다는 점에서
과거 리스트와 차이
지난 4월 13일 ‘성완종 리스트’ 검찰 특별수사팀(팀장 문무일 검사장)은 경남기업 비리 수사팀으로부터 자료 일체를 넘겨받고 공식 수사에 돌입했다. ‘성완종 리스트’는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 직전 정치권에 제공했다며 대상자와 액수를 적어놓은 메모를 말한다. 정치권은 ‘성완종 리스트’의 최종 칼끝이 정치권 인사에 치명상을 입힐 것인지, 입힌다면 누가 그 대상이 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권 인맥을 폭넓게 관리해 온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9일 오전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 나타나지 않은 성 회장은 당일 오후 3시32분쯤 북한산 형제봉 매표소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성 전 회장은 자살 직전 금품 제공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남겼다.
우선 금품 제공의 정황이 담긴 메모이다. 성 전 회장 시신 상의에서 발견된 ‘성완종 리스트’라 불리는 메모에는 사람, 액수가 적혀 있다.
‘허태열 7억, 홍문종 2억, 유정복 3억, 홍준표 1억, 부산시장 2억, 김기춘 10만불, 이병기, 이완구’라는 글자와 ‘김기춘 10만불’이라는 글자 옆에 ‘2006. 9. 26日 독일 벨기에 조선일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검찰은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필적 감정을 이미 마무리했다. 검찰 수사팀을 이끌고 있는 문 검사장은 “(필적) 감정 결과가 상당히 신빙성 있다고 들었다”고 말해, 해당 리스트의 작성자가 성 전 회장 본인인 것을 확인했다. 만일 리스트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현직 총리와 청와대 전·현직 비서실장 모두가 비리에 연루된, 단군 이래 최대 권력형 스캔들이 될 것이다.
우선 리스트 메모가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받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형사소송법 313조는 피고인이 아닌 사람이 수사기관 이외에서 작성한 진술서나 진술을 기재한 서류는 작성자가 직접 법정에 나와 자신이 그 문서를 작성했다고 진술했을 때 증거로 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다만, 이번 경우와 같이 작성자가 사망했을 경우, 예외조항으로 외부의 강요나 압박 없이 작성했다면 증거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성 회장의 경우는 숨지기 전날 비슷한 취지로 기자회견까지 했기 때문에 증거 능력을 인정받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증거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대로 법원이 진실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아니다. 검찰이 좀 더 구체적인 증거로 돈을 준 정황과 대가성을 입증해야 죄를 물을 수 있다.
‘장부’ 등 구체적 물증 관심 집중
성 전 회장은 친필 메모(성완종 리스트)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증언까지 남겼다. 그는 자살 직전 《경향신문》에 전화를 걸어, 자금 전달 내용을 진술했다. 녹취록에 따르면, 그는 “세상에 알려달라” “꼭 보도해 달라”며 수차례 당부했다.
친필 메모와 녹취록을 동시에 남긴 것으로 보아, 충동적인 자살이라기보다 자살 이후 상황에 대해 치밀하게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성 전 회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돈을 전달한 장소를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우선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게 돈을 전달한 것과 관련해, “김 전 실장이 2006년 9월 VIP(박근혜 대통령) 모시고 독일 갈 때 10만 달러를 바꿔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전달했다”고 했다. 또 허태열 전 비서실장과 관련해서는, “2007년 당시 허 본부장을 강남 리베라호텔에서 만나 7억원을 서너 차례 나눠서 현금으로 줬다. 돈은 심부름한 사람이 갖고 가고 내가 직접 주었다. 그렇게 경선을 치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준표 경남지사의 경우에는 중간 전달자인 윤승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을 찾아가 돈을 전달한 시기, 전달 여부 등을 직접 확인했다.
자살을 염두에 두고 ‘폭로’ 내용을 치밀하게 검토한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그런 만큼 이 리스트가 단순히 구명(救命)을 해주지 않는 데 대한 보복성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방증도 된다. 이 때문에 드러난 리스트 외에 보다 구체적인 ‘뇌물 장부’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검찰도 그 자료를 성 전 회장의 아들이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리스트’는 정경유착의 산물
최근 ‘리스트’가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지만, 사실 ‘리스트’가 떠돈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 권력형 비리에서 ‘리스트’는 단골 메뉴였다. 보통 ‘○○ 리스트’라는 작명(作名)은 정경유착(政經癒着)을 바탕으로 독버섯처럼 퍼진 정치 스캔들(scandal)을 뜻한다.
금품 수수 리스트가 아닌, ‘부적절한 관계’가 문제가 된 리스트도 있었다. 2010년 10월 린다 김 스캔들은 의혹이 주로 ‘돈’에 맞춰진 다른 사건과 달랐다. 당시 무기 로비스트 린다 김은 ‘백두·금강 사업’(음성·영상 정보 시스템 탑재 정찰기 도입 사업)과 관련해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됐다가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미모의 재미(在美) 로비스트 린다 김은 이양호 전 국방장관 등 정부 고위 관계자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 당시 ‘사랑하는 린다’로 시작하는 이 전 장관과 사이의 핑크빛 연서(戀書)가 발견되면서, 대중의 호기심이 커졌다. 이런 가운데, 린다 김이 전직 장관, 국회 국방위원장 등 정권 최고위층과 접촉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린다 김과 접촉한 리스트가 관심을 끌었다. 방산비리에서 ‘섹스 스캔들’로 번진 린다 김 사건은 김영삼 정부 도덕성에 치명상을 안겼다.
이러한 정치 스캔들에 대한 국민적 반발은 크지만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한 수사는 그리 쉽지 않았다.
‘정태수(전 한보그룹 회장) 리스트’ 등 수많은 정경유착 사건을 진두지휘했던, 심재륜 전 부산 고검장은 “일단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명단에서 빠지려고 노력했다”며 “나의 경우 리스트를 수사 시작부터 못을 박아 수사팀도 뺄 수 없도록 하고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 입장에서 여론에 떠밀려 하는 수사가 반가울 리 없다. 정치 스캔들 사건에 대해, 심 전 고검장은 “대체로 (검찰이 수사를) 하기 싫어 한다”며 “정치적 문제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꺼리는 분위기가 있다”고 덧붙였다.
여야 무차별 로비, ‘정태수 리스트’
1997년 건국 이래 최대 권력형 금융 부정 및 특혜 대출 사건으로 불렸던 ‘정태수 리스트’는 ‘성완종 리스트’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건설 회사를 운영하면서 정치권에 로비자금을 뿌렸고, 검찰로부터 회사의 회계부정, 횡령·배임 등의 혐의를 조사받는 과정에서 소위 ‘리스트’가 터져 나왔다.
당시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무차별로 로비자금을 뿌렸다는 ‘정태수 리스트’ 의혹으로 15대 국회는 한보사태 국정조사특위를 꾸렸다. 청문회에서 정 회장은 김덕룡 신한국당 의원, 김상현 국민회의 의원 등 여야의 거물급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준 의혹에 대해 부인하지 않아 정치권의 핵폭탄으로 부상했다. 당시 언론 보도이다.
〈정태수 리스트 정치인 20명 확인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정계 인사들의 명단인 ‘정태수 리스트’의 일부가 밝혀졌다.
한보특혜대출비리사건을 수사 중인 대검중수부는 지난 2월 1차 수사 당시 정 총회장으로부터 지난해 4·11총선과 95년 지방선거 직전에 여야 정치인 20여 명에게 수천만 원씩 주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검찰은 정 총회장이 진술한 ‘정태수 리스트’에는 ▲이미 구속된 홍인길, 황병태, 정재철 의원 이외에 신한국당 의원 10여 명 ▲구속된 권노갑 의원과 김상현 의원 등 국민회의 의원 2명 ▲김용환 사무총장과 김현욱 의원 등 자민련 의원 2명이 포함돼 있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구속된 3명 이외의 나머지 신한국당 의원들의 명단은 확인되지 않았다. 《동아일보》 1997년 4월 7일〉
여야를 가리지 않고, 권력의 핵심 실세를 포괄하는 금품 로비였다. 이러한 의혹에 국민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폭발했던 국민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처벌은 용두사미(龍頭蛇尾)였다. 정치인 30여 명이 검찰 조사를 받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전직 은행장 등 10여 명이 구속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대부분 결말은 허무함 그 자체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다수 ‘리스트’ 파문의 끝은 허무했다. 대표적으로 1998년 옷 로비 리스트 사건이 있다. 1998년 10월부터 그해 12월까지 신동아그룹 최순영 전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사회 고위층과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씨에게 로비를 시도했다는 의혹이었다. 당시 연정희씨가 호피무늬 반코트를 받았다가 반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사회적 분노가 일어났다. 옷 로비 사건은 로비 대상자가 검찰총장 부인뿐 아니라 사회 고위층 부인들이 망라된 리스트가 있다는 의혹이 커지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특검으로 간 옷 로비 사건은 법원에서 허무하게 마무리됐다. 2000년 11월 법원은 국회 청문회 등에서 위증한 혐의로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로비 당사자 이형자 전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은 무죄였다. 가장 허무한 결론은 김태정 전 장관이었다. 2002년 12월 옷 로비 사건과 관련해 사직동팀 내사보고서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김 전 장관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특검까지 했지만, 큰 소득이 없었던 사건으로 2004년 노무현 측근 비리 사건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이 돈을 받거나 이권과 연결되었다는 의혹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폭로로 시작됐으며, 대선자금 등 정치자금과 관련한 의혹이라는 점에서 최근의 ‘성완종 리스트’와 비슷한 점이 많다.
노무현 측근 비리 사건은 2004년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부산 지역 기업으로부터 300억원을 수수했다는 의혹, 썬앤문그룹이 노무현 대선캠프에 96억원을 제공했다는 의혹, 청주 나이트클럽 소유주 수사 외압 의혹 등 눈덩이같이 커졌다. 결국 특검까지 가야 했다.
그러나 정치인 리스트가 끝없이 이어졌던 사건 초기와 비교할 때 결론은 초라했다. 2004년 11월 대법원은 47억여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거둬들인 혐의로 안희정 현 충남지사에 대해 징역 1년에 추징금 4억9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또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의 경우, 기업들로부터 22억원의 불법정치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징역 1년6개월을 받았다. 수사를 제대로 못 한 것인지, 당초의 의혹이 과장된 것인지 모르게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단죄(斷罪)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눈덩이처럼 커진 장영자 사기 사건
대부분의 권력형 비리 사건은 떠들썩하게 세상을 뒤집어놓으면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시작은 작았으나 검찰 수사 등을 통해, 점차 사건의 크기가 커진 경우도 있다.
1982년 5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이철희·장영자 부부를 구속했다. 처음 혐의는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명동 암달러상과 캘리포니아에서 80만 달러를 끌어왔다는 혐의였다.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작게 시작한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져,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 사건으로 확대됐다. 사채 시장의 큰손이었던 장영자(당시 38세)씨는 자금 압박에 시달리는 회사에 접촉해 몇 배의 약속어음을 받아내는 수법을 썼다. 이러한 사기 행각에 장씨의 남편 이철희(당시 58세)씨가 큰 역할을 했다. 이씨는 전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이었다.
사건의 파장은 컸다. 청와대 배후설이 퍼지면서 은행장 2명, 기업체 간부, 대통령 처삼촌에 이르기까지 30여 명이 구속됐다. 사기 사건에 연루된 리스트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당연했다. 세간의 관심이 커지면서, 이철희·장영자 부부 결혼식 참석자 명단까지 관심을 받았다. 당시 관련 기사다.
〈국회 법사위는 간사회의를 열고 정부 측으로부터 제출받은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사파리클럽 결혼식에 참석했던 하객 120명의 명단을 검토했다.
이날 회의는 이 명단을 통해 민한당 측 주장대로 李·張의 사기 행각에 배후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는 인물을 찾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참석인사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법사위 소속 의원들에게만 보인 뒤 정부가 다시 회수하기로 합의했다.
법사위원장은 정부로부터 이 명단에는 현역 국회의원 7명, 전직 의원 2명, 전직 장관 1명, 은행장 등 사회지도급 인사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다고 밝혔으나… 《경향신문》 1982년 6월 1일〉
끝없는 ‘기획수사’ 논란
대부분의 ‘리스트’는 검찰 수사와 엉켜 있다는 특징이 있다. 결국 검찰의 칼날이 향하는 곳이 리스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검찰 수사를 통해, 소위 리스트가 추려지면 의혹의 대상자들은 하나같이 기획수사, 표적수사 등으로 당했다고 하소연하는 공통점이 있다.
2008년 7월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시작됐다.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은 대규모 직원을 파견해, 노무현 전 대통령 후원자로 알려진 박연차 회장이 경영하는 태광실업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로까지 이어졌던 ‘박연차 리스트’ 사건의 시작이다. 국세청은 2008년 11월 박 회장을 탈세 혐의로 고발했고, 결국 대검중수부가 사건을 맡아 수사에 착수했다.
성완종 전 회장은 죽기 직전,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비판했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로 피해를 봤다는 주장은 2008년 박연차 회장도 비슷했다. 즉 정권에 밉보여 ‘표적수사’ 혹은 ‘기획수사’를 당했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PK(부산·경남) 정관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유착 고리를 바탕으로 전방위로 금품을 살포한 혐의를 받았다. 수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친노(친노무현)계 인사가 주된 대상이었지만 수사망이 넓혀지면서 박진 전 의원을 포함한 여권 인사들까지 확대됐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검찰이 가지고 있던 ‘박연차 리스트’에 올라, 수사 대상에 오른 정·관계 인사가 70여 명에 이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리스트가 증권가 찌라시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정치권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수사는 사실상 중단됐다.
가족을 통한 압박에 반발
당시 박연차 회장 측은 검찰의 표적수사를 주장하는 근거로, 가족을 통한 압박을 들었다. 박 회장이 입을 열지 않자, 검찰이 유학 중이던 박 회장의 아들까지 조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 회장 측은 아들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던 박 회장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였다며 검찰을 비판했다.
성완종 전 회장 역시 자살 직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자원(비리) 하다 없으니까, 가족관계다 압력이다 분식이다 비자금이다 생긴 것 다 하잖아요”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원외교 수사를 통해 나오는 것이 없으니까 가족까지 수사 범위를 확대해 압박한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이 가족 수사를 통해 압박하면서, 자원외교 관련 증언을 유도하는 일종의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유죄 협상제도, 우리나라에선 제도적으로 도입하지 않고 있음)을 했다는 주장이었다.
실제 검찰 수사는 성 전 회장의 부인과 아들 등까지 전방위로 이뤄졌다. 검찰은 부인 소유인 코어베이스에서 11억원을 빼돌리고 아들이 회사 법인카드를 개인적으로 사용해 1억6000만원가량을 횡령한 사실을 구속영장에 적시했다.
수사 관행상, 남편과 아내 혹은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구속하지는 않는다. 성 전 회장 입장에서는 ‘가족의 사법처리를 피하려면 당신이 뒤집어쓰라’는 메시지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검찰은 범죄 혐의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상관없는 사건을 함께 다루면서 피의자를 압박하는 별건수사(別件搜査)를 하지 않겠다고 항상 말해왔고, 특히 김진태 검찰총장도 취임 일성으로 그 같은 약속을 했으나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성 전 회장이 스스로 리스트를 공개하며 자살한 것은, 자신이 정권 차원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는 확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 회장이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3월 17일 국무회의에서 “국방 분야뿐 아니라 우리 사회 각 부문에서 켜켜이 쌓여온 고질적인 부정부패에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이번에야말로 비리의 뿌리를 찾아내서 그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비리의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강도 높은 비리척결 의지를 보인 것이다.
검찰 역시 지난 2월 정기인사를 마무리한 직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한국석유공사, 광물자원공사, 가스공사 등을 겨냥한 자원외교 비리 사건을 재배당했다.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자원비리 사건은 과거 MB정권을 겨냥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배경에서 광물공사 등 공기업이 첫 타깃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대통령의 비리척결 발표 바로 다음날인 지난 3월 18일 검찰은 전격적으로 경남기업 압수수색에 나섰다. 검찰은 해외자원개발에 들어간 융자금 횡령 혐의를 잡기 위해, 경남기업을 압박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성 회장은 지난 4월 8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시위성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허태열 의원의 소개로 박근혜 후보를 만났고 그 후 박 후보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는 MB(이명박 전 대통령)맨이 아니다. 어떻게 MB정부 피해자가 MB맨이 될 수 있느냐”며 반발했다. 성 회장 입장에서는 대통령 발표 직후, 압수수색이 들어오니 청와대와 검찰 사이에 교감이 있었다고 의심한 것이다.
주요 의혹에 대해서도 적극 해명했다. 공사진행률 조작 등을 통한 9532억원 회계분식 혐의는 ‘건설업 회계 처리의 특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신은 전문 경영인에게 일임해 회계분식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해명했다. 해외자원개발 사업 관련 융자금 127억원 편취 혐의는 ‘융자금 편취 의도는 없었으며 융자금은 전액 사업비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수출입은행 대출금 350억원 편취 혐의는 ‘금융기관을 속이지 않았고, 속일 의사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대여금 명목 건설 계열사 자금 182억원 횡령 혐의는 ‘통상적인 대여계약에 비춰 공정했고 건설 계열사에 특별한 손해가 발생할 위험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마지막으로 현장 전도금 명목 자금 33억원 횡령과 성 전 회장 가족이 31억원을 횡령한 혐의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는 입장이다. 정리하자면, 건설업계 관행상 어쩔 수 없는 회계상의 잘못을 가지고 사법처리하려 한다는 주장이다. 성 회장 입장에서는 승복할 수 없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공식과는 다른 ‘성완종 리스트’
보통의 경우 ‘리스트’ 작성의 주체(主體)는 검찰 등 사정기관이다. 부정한 청탁을 받고 돈을 받으면 범죄이지만, 돈을 준 사람 역시 형(刑)을 피할 수는 없다. 나아가 사업가가 금품 전달 내역을 언론 혹은 검찰에 공개할 경우, 비록 형은 조금 감면될 수 있겠지만 배신자로 낙인 찍혀 더 이상 사업을 지속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자기 입으로 누구에게 뇌물을 건넸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사회 곳곳에서 부정한 돈이 오가지만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이다. 자연스럽게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이다.
‘성완종 리스트’는 바로 이 점이 과거 스캔들과 차이가 있다. 리스트를 작성한 사람이 바로 금품을 건넨 성 전 회장 자신이기 때문이다. ‘성완종 리스트’는 이런 점에서 과거 정권의 다른 리스트와는 다르다.
검찰 떡값 폭로 김용철 리스트
물론 성 전 회장과 비슷하게 폭로를 통해 리스트가 공개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07년 삼성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잇단 폭로로 촉발된 ‘김용철 리스트’는 김 변호사가 자발적으로 폭로한 것이다. 주로 돈을 건넨 기업인 등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폭로되는 다른 리스트와 차별화됐다.
김용철 변호사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과 함께 삼성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떡값 등의 명목으로 돈을 받은 전·현직 검찰 고위간부 등의 실명을 공개했다. 수사의 주체인 검찰이 돈을 받았다는 의혹이 퍼지자, 결국 삼성 비자금 특검팀이 꾸려져 의혹 수사에 나섰다. 당시 수사팀은 삼성의 2000억원대 비자금 조성과 7조원대 분식회계 여부, 정·관·법조계 로비 의혹, 에버랜드 주식 편법 증여를 통한 경영권 불법승계 등의 의혹을 다뤘다. 최근 ‘성완종 리스트’가 2012년 대선자금 의혹 수사로 번지는 것처럼 김용철 리스트 역시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 축하금 제공 등에 대한 의혹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김용철 리스트’는 엄청난 의혹으로 시작됐으나, 그 끝은 허무했다. 2008년 4월 특검 수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우선 리스트에 등장하며 삼성 떡값을 받았다는 것으로 거명된 전·현직 검찰 간부 5명에 대해서는 사실무근, 내사종결 처분을 내렸다.
또한 세금을 포탈한 금액이 1000억원이 넘고 회사에 끼친 손실 금액이 2000억원에 달했지만 전원 불구속 처분으로 결론 내렸다. 한편 2009년 8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최종 선고받은 이건희 회장은 그해 12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등을 명분으로 정부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았다. 이 회장은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했다.
1991년 수서지구 택지분양 특혜 사건은 당시 노태우 정권에 레임덕(lame duck)을 안겼다. 사건은 1989년 3월 수서·대치 일원 택지개발 예정 지구를 한보건설과 특정조합에 특혜 공급을 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당시 기사를 보면, 사건의 리스트에 올랐던 인물들을 알 수 있다.
〈수서 비리 의원 구속사태
수서 사건은 정(政) 경(經) 관(官)이 복잡하게 얽힌 구조적인 권력형 비리였다. 지난 2월 여론에 떠밀려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오용운, 김동주, 이태섭, 이원배, 김태식 의원, 장병조 전 청와대 비서관 등 9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의혹의 초점이었던 청와대의 개입 여부는 밝혀지지 않은 채 용두사미식으로 검찰 수사는 끝났다. 《동아일보》 1991년 12월 27일자〉
원래 해당 택지는 무주택 서민들에게 분양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주요 공공기관 등에 특혜 분양돼 국민들의 분노가 높아졌다.
한보그룹은 분양 과정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한 청와대, 국회 건설위원회 소속 의원, 건설부 공무원 등에게 뇌물을 건넸다. 대통령까지 포함된 대규모 정경유착 사건이었다.
권력형 부패, 정권 레임덕으로 이어져
수서 사건은 권력형 부패 사건이 권력 누수 현상, 즉 레임덕으로 향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대통령 직선제 이후 역대 정권은 집권 중반기가 넘어서면서, 어김없이 부패 스캔들이 터졌다. 1991년 노태우 정권은 수서지구 택지분양 사건으로 민심을 잃었다. 결국 노태우 대통령은 집권 4년 차인 1992년 여당 요구에 떠밀려 민자당을 탈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1997년 차남 현철씨가 연루된 한보 게이트를 만난 김영삼 정권은 급속하게 국정 장악력을 잃었다. 2001년 집권 4년 차를 맞은 김대중 정권은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게이트로 알려진 3대 게이트가 터지면서, 도덕성에 타격을 받았다. 2005년 집권 3년 차 노무현 정권은 러시아 유전 개발, 행담도 개발 비리 등 여러 스캔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지면서 2006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이명박 정권은 집권 4년 차에 함바집 비리, 저축은행 비리 등의 직격탄을 맞았다.
부패 스캔들이 공개되면서 식물 정권이 된 과거 사례를 볼 때, ‘성완종 리스트’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박근혜 정부 레임덕의 신호탄이 될 것은 명백하다.
지난 4월 13일 문무일 ‘성완종 리스트’ 특별 수사팀장은 “국민적 의혹이 집중된 이 사건에 대해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새누리당 대선자금 역시 수사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수사 범위에 대해 전혀 제한이 없이 자료를 검토하겠다”고 대답했다. ‘대상·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성역 없이 수사’는 검찰의 누구나가 항상 공언해 왔던 모범답안이다. 그러나 실제 수사를 진행하면서, 또는 수사가 끝난 뒤 후일담을 들어보면 ‘대상·범위가 한정’된 경우가 많고, ‘성역은 여전히 존재’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살아 있는 권력’일 경우 한계가 뚜렷했다. 여기에다 ‘성완종 리스트’는 대상이 살아 있는 권력일 뿐만 아니라 리스트 작성자가 사망한 경우다. 피의자들이 망자(亡者)에게 책임을 미룬다면 수사 기술적으로도 쉽지 않다.
박근혜 정부의 검찰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니면 과거와 같은 초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인가. ‘성완종 리스트’의 진위 여부와 결말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지난 4월 9일 오전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 나타나지 않은 성 회장은 당일 오후 3시32분쯤 북한산 형제봉 매표소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성 전 회장은 자살 직전 금품 제공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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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완종 메모. |
‘허태열 7억, 홍문종 2억, 유정복 3억, 홍준표 1억, 부산시장 2억, 김기춘 10만불, 이병기, 이완구’라는 글자와 ‘김기춘 10만불’이라는 글자 옆에 ‘2006. 9. 26日 독일 벨기에 조선일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검찰은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필적 감정을 이미 마무리했다. 검찰 수사팀을 이끌고 있는 문 검사장은 “(필적) 감정 결과가 상당히 신빙성 있다고 들었다”고 말해, 해당 리스트의 작성자가 성 전 회장 본인인 것을 확인했다. 만일 리스트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현직 총리와 청와대 전·현직 비서실장 모두가 비리에 연루된, 단군 이래 최대 권력형 스캔들이 될 것이다.
우선 리스트 메모가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받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형사소송법 313조는 피고인이 아닌 사람이 수사기관 이외에서 작성한 진술서나 진술을 기재한 서류는 작성자가 직접 법정에 나와 자신이 그 문서를 작성했다고 진술했을 때 증거로 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다만, 이번 경우와 같이 작성자가 사망했을 경우, 예외조항으로 외부의 강요나 압박 없이 작성했다면 증거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성 회장의 경우는 숨지기 전날 비슷한 취지로 기자회견까지 했기 때문에 증거 능력을 인정받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증거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대로 법원이 진실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아니다. 검찰이 좀 더 구체적인 증거로 돈을 준 정황과 대가성을 입증해야 죄를 물을 수 있다.
‘장부’ 등 구체적 물증 관심 집중
성 전 회장은 친필 메모(성완종 리스트)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증언까지 남겼다. 그는 자살 직전 《경향신문》에 전화를 걸어, 자금 전달 내용을 진술했다. 녹취록에 따르면, 그는 “세상에 알려달라” “꼭 보도해 달라”며 수차례 당부했다.
친필 메모와 녹취록을 동시에 남긴 것으로 보아, 충동적인 자살이라기보다 자살 이후 상황에 대해 치밀하게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성 전 회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돈을 전달한 장소를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우선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게 돈을 전달한 것과 관련해, “김 전 실장이 2006년 9월 VIP(박근혜 대통령) 모시고 독일 갈 때 10만 달러를 바꿔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전달했다”고 했다. 또 허태열 전 비서실장과 관련해서는, “2007년 당시 허 본부장을 강남 리베라호텔에서 만나 7억원을 서너 차례 나눠서 현금으로 줬다. 돈은 심부름한 사람이 갖고 가고 내가 직접 주었다. 그렇게 경선을 치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준표 경남지사의 경우에는 중간 전달자인 윤승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을 찾아가 돈을 전달한 시기, 전달 여부 등을 직접 확인했다.
자살을 염두에 두고 ‘폭로’ 내용을 치밀하게 검토한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그런 만큼 이 리스트가 단순히 구명(救命)을 해주지 않는 데 대한 보복성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방증도 된다. 이 때문에 드러난 리스트 외에 보다 구체적인 ‘뇌물 장부’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검찰도 그 자료를 성 전 회장의 아들이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리스트’는 정경유착의 산물
최근 ‘리스트’가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지만, 사실 ‘리스트’가 떠돈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 권력형 비리에서 ‘리스트’는 단골 메뉴였다. 보통 ‘○○ 리스트’라는 작명(作名)은 정경유착(政經癒着)을 바탕으로 독버섯처럼 퍼진 정치 스캔들(scandal)을 뜻한다.
금품 수수 리스트가 아닌, ‘부적절한 관계’가 문제가 된 리스트도 있었다. 2010년 10월 린다 김 스캔들은 의혹이 주로 ‘돈’에 맞춰진 다른 사건과 달랐다. 당시 무기 로비스트 린다 김은 ‘백두·금강 사업’(음성·영상 정보 시스템 탑재 정찰기 도입 사업)과 관련해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됐다가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미모의 재미(在美) 로비스트 린다 김은 이양호 전 국방장관 등 정부 고위 관계자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 당시 ‘사랑하는 린다’로 시작하는 이 전 장관과 사이의 핑크빛 연서(戀書)가 발견되면서, 대중의 호기심이 커졌다. 이런 가운데, 린다 김이 전직 장관, 국회 국방위원장 등 정권 최고위층과 접촉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린다 김과 접촉한 리스트가 관심을 끌었다. 방산비리에서 ‘섹스 스캔들’로 번진 린다 김 사건은 김영삼 정부 도덕성에 치명상을 안겼다.
이러한 정치 스캔들에 대한 국민적 반발은 크지만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한 수사는 그리 쉽지 않았다.
‘정태수(전 한보그룹 회장) 리스트’ 등 수많은 정경유착 사건을 진두지휘했던, 심재륜 전 부산 고검장은 “일단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명단에서 빠지려고 노력했다”며 “나의 경우 리스트를 수사 시작부터 못을 박아 수사팀도 뺄 수 없도록 하고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 입장에서 여론에 떠밀려 하는 수사가 반가울 리 없다. 정치 스캔들 사건에 대해, 심 전 고검장은 “대체로 (검찰이 수사를) 하기 싫어 한다”며 “정치적 문제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꺼리는 분위기가 있다”고 덧붙였다.
여야 무차별 로비, ‘정태수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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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월 구속영장이 발부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수감장소인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 구치소로 가기 위해 검찰청을 나서고 있다. |
당시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무차별로 로비자금을 뿌렸다는 ‘정태수 리스트’ 의혹으로 15대 국회는 한보사태 국정조사특위를 꾸렸다. 청문회에서 정 회장은 김덕룡 신한국당 의원, 김상현 국민회의 의원 등 여야의 거물급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준 의혹에 대해 부인하지 않아 정치권의 핵폭탄으로 부상했다. 당시 언론 보도이다.
〈정태수 리스트 정치인 20명 확인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정계 인사들의 명단인 ‘정태수 리스트’의 일부가 밝혀졌다.
한보특혜대출비리사건을 수사 중인 대검중수부는 지난 2월 1차 수사 당시 정 총회장으로부터 지난해 4·11총선과 95년 지방선거 직전에 여야 정치인 20여 명에게 수천만 원씩 주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검찰은 정 총회장이 진술한 ‘정태수 리스트’에는 ▲이미 구속된 홍인길, 황병태, 정재철 의원 이외에 신한국당 의원 10여 명 ▲구속된 권노갑 의원과 김상현 의원 등 국민회의 의원 2명 ▲김용환 사무총장과 김현욱 의원 등 자민련 의원 2명이 포함돼 있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구속된 3명 이외의 나머지 신한국당 의원들의 명단은 확인되지 않았다. 《동아일보》 1997년 4월 7일〉
여야를 가리지 않고, 권력의 핵심 실세를 포괄하는 금품 로비였다. 이러한 의혹에 국민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폭발했던 국민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처벌은 용두사미(龍頭蛇尾)였다. 정치인 30여 명이 검찰 조사를 받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전직 은행장 등 10여 명이 구속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대부분 결말은 허무함 그 자체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다수 ‘리스트’ 파문의 끝은 허무했다. 대표적으로 1998년 옷 로비 리스트 사건이 있다. 1998년 10월부터 그해 12월까지 신동아그룹 최순영 전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사회 고위층과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씨에게 로비를 시도했다는 의혹이었다. 당시 연정희씨가 호피무늬 반코트를 받았다가 반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사회적 분노가 일어났다. 옷 로비 사건은 로비 대상자가 검찰총장 부인뿐 아니라 사회 고위층 부인들이 망라된 리스트가 있다는 의혹이 커지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특검으로 간 옷 로비 사건은 법원에서 허무하게 마무리됐다. 2000년 11월 법원은 국회 청문회 등에서 위증한 혐의로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로비 당사자 이형자 전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은 무죄였다. 가장 허무한 결론은 김태정 전 장관이었다. 2002년 12월 옷 로비 사건과 관련해 사직동팀 내사보고서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김 전 장관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특검까지 했지만, 큰 소득이 없었던 사건으로 2004년 노무현 측근 비리 사건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이 돈을 받거나 이권과 연결되었다는 의혹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폭로로 시작됐으며, 대선자금 등 정치자금과 관련한 의혹이라는 점에서 최근의 ‘성완종 리스트’와 비슷한 점이 많다.
노무현 측근 비리 사건은 2004년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부산 지역 기업으로부터 300억원을 수수했다는 의혹, 썬앤문그룹이 노무현 대선캠프에 96억원을 제공했다는 의혹, 청주 나이트클럽 소유주 수사 외압 의혹 등 눈덩이같이 커졌다. 결국 특검까지 가야 했다.
그러나 정치인 리스트가 끝없이 이어졌던 사건 초기와 비교할 때 결론은 초라했다. 2004년 11월 대법원은 47억여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거둬들인 혐의로 안희정 현 충남지사에 대해 징역 1년에 추징금 4억9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또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의 경우, 기업들로부터 22억원의 불법정치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징역 1년6개월을 받았다. 수사를 제대로 못 한 것인지, 당초의 의혹이 과장된 것인지 모르게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단죄(斷罪)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눈덩이처럼 커진 장영자 사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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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5월 대형 금융비리로 구속된 장영자씨. |
1982년 5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이철희·장영자 부부를 구속했다. 처음 혐의는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명동 암달러상과 캘리포니아에서 80만 달러를 끌어왔다는 혐의였다.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작게 시작한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져,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 사건으로 확대됐다. 사채 시장의 큰손이었던 장영자(당시 38세)씨는 자금 압박에 시달리는 회사에 접촉해 몇 배의 약속어음을 받아내는 수법을 썼다. 이러한 사기 행각에 장씨의 남편 이철희(당시 58세)씨가 큰 역할을 했다. 이씨는 전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이었다.
사건의 파장은 컸다. 청와대 배후설이 퍼지면서 은행장 2명, 기업체 간부, 대통령 처삼촌에 이르기까지 30여 명이 구속됐다. 사기 사건에 연루된 리스트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당연했다. 세간의 관심이 커지면서, 이철희·장영자 부부 결혼식 참석자 명단까지 관심을 받았다. 당시 관련 기사다.
〈국회 법사위는 간사회의를 열고 정부 측으로부터 제출받은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사파리클럽 결혼식에 참석했던 하객 120명의 명단을 검토했다.
이날 회의는 이 명단을 통해 민한당 측 주장대로 李·張의 사기 행각에 배후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는 인물을 찾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참석인사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법사위 소속 의원들에게만 보인 뒤 정부가 다시 회수하기로 합의했다.
법사위원장은 정부로부터 이 명단에는 현역 국회의원 7명, 전직 의원 2명, 전직 장관 1명, 은행장 등 사회지도급 인사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다고 밝혔으나… 《경향신문》 1982년 6월 1일〉
끝없는 ‘기획수사’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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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2월 서울 서초동 서울지법에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나오면서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
2008년 7월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시작됐다.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은 대규모 직원을 파견해, 노무현 전 대통령 후원자로 알려진 박연차 회장이 경영하는 태광실업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로까지 이어졌던 ‘박연차 리스트’ 사건의 시작이다. 국세청은 2008년 11월 박 회장을 탈세 혐의로 고발했고, 결국 대검중수부가 사건을 맡아 수사에 착수했다.
성완종 전 회장은 죽기 직전,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비판했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로 피해를 봤다는 주장은 2008년 박연차 회장도 비슷했다. 즉 정권에 밉보여 ‘표적수사’ 혹은 ‘기획수사’를 당했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PK(부산·경남) 정관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유착 고리를 바탕으로 전방위로 금품을 살포한 혐의를 받았다. 수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친노(친노무현)계 인사가 주된 대상이었지만 수사망이 넓혀지면서 박진 전 의원을 포함한 여권 인사들까지 확대됐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검찰이 가지고 있던 ‘박연차 리스트’에 올라, 수사 대상에 오른 정·관계 인사가 70여 명에 이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리스트가 증권가 찌라시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정치권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수사는 사실상 중단됐다.
가족을 통한 압박에 반발
당시 박연차 회장 측은 검찰의 표적수사를 주장하는 근거로, 가족을 통한 압박을 들었다. 박 회장이 입을 열지 않자, 검찰이 유학 중이던 박 회장의 아들까지 조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 회장 측은 아들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던 박 회장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였다며 검찰을 비판했다.
성완종 전 회장 역시 자살 직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자원(비리) 하다 없으니까, 가족관계다 압력이다 분식이다 비자금이다 생긴 것 다 하잖아요”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원외교 수사를 통해 나오는 것이 없으니까 가족까지 수사 범위를 확대해 압박한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이 가족 수사를 통해 압박하면서, 자원외교 관련 증언을 유도하는 일종의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유죄 협상제도, 우리나라에선 제도적으로 도입하지 않고 있음)을 했다는 주장이었다.
실제 검찰 수사는 성 전 회장의 부인과 아들 등까지 전방위로 이뤄졌다. 검찰은 부인 소유인 코어베이스에서 11억원을 빼돌리고 아들이 회사 법인카드를 개인적으로 사용해 1억6000만원가량을 횡령한 사실을 구속영장에 적시했다.
수사 관행상, 남편과 아내 혹은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구속하지는 않는다. 성 전 회장 입장에서는 ‘가족의 사법처리를 피하려면 당신이 뒤집어쓰라’는 메시지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검찰은 범죄 혐의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상관없는 사건을 함께 다루면서 피의자를 압박하는 별건수사(別件搜査)를 하지 않겠다고 항상 말해왔고, 특히 김진태 검찰총장도 취임 일성으로 그 같은 약속을 했으나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성 전 회장이 스스로 리스트를 공개하며 자살한 것은, 자신이 정권 차원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는 확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 회장이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3월 17일 국무회의에서 “국방 분야뿐 아니라 우리 사회 각 부문에서 켜켜이 쌓여온 고질적인 부정부패에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이번에야말로 비리의 뿌리를 찾아내서 그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비리의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강도 높은 비리척결 의지를 보인 것이다.
검찰 역시 지난 2월 정기인사를 마무리한 직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한국석유공사, 광물자원공사, 가스공사 등을 겨냥한 자원외교 비리 사건을 재배당했다.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자원비리 사건은 과거 MB정권을 겨냥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배경에서 광물공사 등 공기업이 첫 타깃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대통령의 비리척결 발표 바로 다음날인 지난 3월 18일 검찰은 전격적으로 경남기업 압수수색에 나섰다. 검찰은 해외자원개발에 들어간 융자금 횡령 혐의를 잡기 위해, 경남기업을 압박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성 회장은 지난 4월 8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시위성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허태열 의원의 소개로 박근혜 후보를 만났고 그 후 박 후보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는 MB(이명박 전 대통령)맨이 아니다. 어떻게 MB정부 피해자가 MB맨이 될 수 있느냐”며 반발했다. 성 회장 입장에서는 대통령 발표 직후, 압수수색이 들어오니 청와대와 검찰 사이에 교감이 있었다고 의심한 것이다.
주요 의혹에 대해서도 적극 해명했다. 공사진행률 조작 등을 통한 9532억원 회계분식 혐의는 ‘건설업 회계 처리의 특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신은 전문 경영인에게 일임해 회계분식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해명했다. 해외자원개발 사업 관련 융자금 127억원 편취 혐의는 ‘융자금 편취 의도는 없었으며 융자금은 전액 사업비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수출입은행 대출금 350억원 편취 혐의는 ‘금융기관을 속이지 않았고, 속일 의사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대여금 명목 건설 계열사 자금 182억원 횡령 혐의는 ‘통상적인 대여계약에 비춰 공정했고 건설 계열사에 특별한 손해가 발생할 위험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마지막으로 현장 전도금 명목 자금 33억원 횡령과 성 전 회장 가족이 31억원을 횡령한 혐의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는 입장이다. 정리하자면, 건설업계 관행상 어쩔 수 없는 회계상의 잘못을 가지고 사법처리하려 한다는 주장이다. 성 회장 입장에서는 승복할 수 없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공식과는 다른 ‘성완종 리스트’
보통의 경우 ‘리스트’ 작성의 주체(主體)는 검찰 등 사정기관이다. 부정한 청탁을 받고 돈을 받으면 범죄이지만, 돈을 준 사람 역시 형(刑)을 피할 수는 없다. 나아가 사업가가 금품 전달 내역을 언론 혹은 검찰에 공개할 경우, 비록 형은 조금 감면될 수 있겠지만 배신자로 낙인 찍혀 더 이상 사업을 지속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자기 입으로 누구에게 뇌물을 건넸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사회 곳곳에서 부정한 돈이 오가지만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이다. 자연스럽게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이다.
‘성완종 리스트’는 바로 이 점이 과거 스캔들과 차이가 있다. 리스트를 작성한 사람이 바로 금품을 건넨 성 전 회장 자신이기 때문이다. ‘성완종 리스트’는 이런 점에서 과거 정권의 다른 리스트와는 다르다.
검찰 떡값 폭로 김용철 리스트
물론 성 전 회장과 비슷하게 폭로를 통해 리스트가 공개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07년 삼성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잇단 폭로로 촉발된 ‘김용철 리스트’는 김 변호사가 자발적으로 폭로한 것이다. 주로 돈을 건넨 기업인 등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폭로되는 다른 리스트와 차별화됐다.
김용철 변호사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과 함께 삼성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떡값 등의 명목으로 돈을 받은 전·현직 검찰 고위간부 등의 실명을 공개했다. 수사의 주체인 검찰이 돈을 받았다는 의혹이 퍼지자, 결국 삼성 비자금 특검팀이 꾸려져 의혹 수사에 나섰다. 당시 수사팀은 삼성의 2000억원대 비자금 조성과 7조원대 분식회계 여부, 정·관·법조계 로비 의혹, 에버랜드 주식 편법 증여를 통한 경영권 불법승계 등의 의혹을 다뤘다. 최근 ‘성완종 리스트’가 2012년 대선자금 의혹 수사로 번지는 것처럼 김용철 리스트 역시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 축하금 제공 등에 대한 의혹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김용철 리스트’는 엄청난 의혹으로 시작됐으나, 그 끝은 허무했다. 2008년 4월 특검 수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우선 리스트에 등장하며 삼성 떡값을 받았다는 것으로 거명된 전·현직 검찰 간부 5명에 대해서는 사실무근, 내사종결 처분을 내렸다.
또한 세금을 포탈한 금액이 1000억원이 넘고 회사에 끼친 손실 금액이 2000억원에 달했지만 전원 불구속 처분으로 결론 내렸다. 한편 2009년 8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최종 선고받은 이건희 회장은 그해 12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등을 명분으로 정부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았다. 이 회장은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했다.
1991년 수서지구 택지분양 특혜 사건은 당시 노태우 정권에 레임덕(lame duck)을 안겼다. 사건은 1989년 3월 수서·대치 일원 택지개발 예정 지구를 한보건설과 특정조합에 특혜 공급을 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당시 기사를 보면, 사건의 리스트에 올랐던 인물들을 알 수 있다.
〈수서 비리 의원 구속사태
수서 사건은 정(政) 경(經) 관(官)이 복잡하게 얽힌 구조적인 권력형 비리였다. 지난 2월 여론에 떠밀려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오용운, 김동주, 이태섭, 이원배, 김태식 의원, 장병조 전 청와대 비서관 등 9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의혹의 초점이었던 청와대의 개입 여부는 밝혀지지 않은 채 용두사미식으로 검찰 수사는 끝났다. 《동아일보》 1991년 12월 27일자〉
원래 해당 택지는 무주택 서민들에게 분양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주요 공공기관 등에 특혜 분양돼 국민들의 분노가 높아졌다.
한보그룹은 분양 과정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한 청와대, 국회 건설위원회 소속 의원, 건설부 공무원 등에게 뇌물을 건넸다. 대통령까지 포함된 대규모 정경유착 사건이었다.
권력형 부패, 정권 레임덕으로 이어져
수서 사건은 권력형 부패 사건이 권력 누수 현상, 즉 레임덕으로 향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대통령 직선제 이후 역대 정권은 집권 중반기가 넘어서면서, 어김없이 부패 스캔들이 터졌다. 1991년 노태우 정권은 수서지구 택지분양 사건으로 민심을 잃었다. 결국 노태우 대통령은 집권 4년 차인 1992년 여당 요구에 떠밀려 민자당을 탈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1997년 차남 현철씨가 연루된 한보 게이트를 만난 김영삼 정권은 급속하게 국정 장악력을 잃었다. 2001년 집권 4년 차를 맞은 김대중 정권은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게이트로 알려진 3대 게이트가 터지면서, 도덕성에 타격을 받았다. 2005년 집권 3년 차 노무현 정권은 러시아 유전 개발, 행담도 개발 비리 등 여러 스캔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지면서 2006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이명박 정권은 집권 4년 차에 함바집 비리, 저축은행 비리 등의 직격탄을 맞았다.
부패 스캔들이 공개되면서 식물 정권이 된 과거 사례를 볼 때, ‘성완종 리스트’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박근혜 정부 레임덕의 신호탄이 될 것은 명백하다.
지난 4월 13일 문무일 ‘성완종 리스트’ 특별 수사팀장은 “국민적 의혹이 집중된 이 사건에 대해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새누리당 대선자금 역시 수사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수사 범위에 대해 전혀 제한이 없이 자료를 검토하겠다”고 대답했다. ‘대상·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성역 없이 수사’는 검찰의 누구나가 항상 공언해 왔던 모범답안이다. 그러나 실제 수사를 진행하면서, 또는 수사가 끝난 뒤 후일담을 들어보면 ‘대상·범위가 한정’된 경우가 많고, ‘성역은 여전히 존재’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살아 있는 권력’일 경우 한계가 뚜렷했다. 여기에다 ‘성완종 리스트’는 대상이 살아 있는 권력일 뿐만 아니라 리스트 작성자가 사망한 경우다. 피의자들이 망자(亡者)에게 책임을 미룬다면 수사 기술적으로도 쉽지 않다.
박근혜 정부의 검찰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니면 과거와 같은 초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인가. ‘성완종 리스트’의 진위 여부와 결말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