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는 낯을 가리는 오바마, 아베는 참모 활용하는 레이건과 비슷
⊙ 아베는 ‘2인자’ 스가 관방장관 적극 활용, 박근혜는 ‘2인자’ 없이 자기만 바라보게 하는
‘해바라기 스타일’
⊙ 아베는 퇴근 후 평기자까지 만나, 박근혜는 혼자서 시간 보내
⊙ 아베는 실패를 극복, 박근혜는 시련을 극복
劉敏鎬
⊙ 53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 現 워싱턴 ‘Pacific, Inc’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 아베는 ‘2인자’ 스가 관방장관 적극 활용, 박근혜는 ‘2인자’ 없이 자기만 바라보게 하는
‘해바라기 스타일’
⊙ 아베는 퇴근 후 평기자까지 만나, 박근혜는 혼자서 시간 보내
⊙ 아베는 실패를 극복, 박근혜는 시련을 극복
劉敏鎬
⊙ 53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 現 워싱턴 ‘Pacific, Inc’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지난 7월 초 워싱턴 내 일본인 ‘벤쿄카이(勉強會)’에서 발표를 한 적이 있다. 벤쿄카이는 ‘포럼’이나 ‘연구회’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 일본 특유의 공부모임이다. 참가자들이 돌아가면서 발제(發題)를 하고 의견을 교환한다. 정보는 물론, 다른 분야 사람들과의 인맥도 넓혀 간다.
한국에도 비슷한 모임들이 있지만, 큰 차이가 있다. 1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규모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장소는 근사한 곳이 아니라, 벤쿄카이 참가자가 사용하는 사무실 내 회의실이다. 자기 몫의 식사는 스스로 가지고 와서 해결한다. 워싱턴에는 정치·경제·안보·외교를 공부하는 벤쿄카이가 10여 개 있다.
필자가 발표한 것은 ‘괴담(怪談)을 통해 본 한일(韓日)정서 분석’이다. <장화홍련전>과 일본의 <요쓰야(四谷) 괴담>을 비교하면서 ‘관(官)’을 대하는 자세가 두 나라 사이에 얼마나 다른지를 살펴봤다. 한국인은 관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공분(公憤)의 대상으로 삼는 데 익숙하다. 이에 반해 일본인은 절대 관을 건드리지 않는다.
장화와 홍련을 만난 신임 사또들이 기겁을 하면서 죽는다는 것은 관에 대한 원망이나 한(恨)으로 볼 수 있다. 요쓰야 괴담의 경우 부인을 살해한 사무라이 남편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전부이다. 사무라이를 통제하는 관에 대한 불만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요쓰야 괴담>의 여자귀신보다 관에 대한 공포가 더 큰 것처럼 느껴진다.
감히 관에 반기를 들었다가는 본인만이 아니라, 주변사람 모두가 참수(斬首)를 면할 수 없다. 북한의 5호 감시제는 에도시대의 ‘고닌구미(五人組)’와 태평양전쟁 당시의 ‘도나리구미(隣組)’를 철저히 모방한 것이다. 문제가 생길 경우 5가구, 바로 옆의 가구 모두가 책임을 지는 연좌(連坐)체제이다. 3·11 동일본 대지진에서 보듯 일본인은 관을 공분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마음속으로야 분노가 치밀겠지만, 데모를 하거나 시청으로 몰려가 멱살을 잡는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시청으로 몰려간다 해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한다.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협력해서 실리를 찾는 데 익숙하다. 일본을 관료국가라 부르는 것은 수백 년 지속된 유전자(DNA)와 관련돼 있다.
“일본 총리는 재난 사과 안 해”
30분 정도 발표가 끝나자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들이 가장 궁금해한 것은 최근의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두 가지 부분이다.
“왜 세월호 침몰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수차례 사과를 행하는가. 사과를 하면서 왜 대통령이 눈물까지 흘리는가.”
관을 건드리지 않는 일본의 정치문화에 비춰 볼 때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나는 한국적 정서,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관에 대한 부정적 태도, 대통령책임제에 따른 정치구도라는 관점에서 설명했다. 그러자 바로 옆자리에 있던, 두 차례에 걸쳐 전부 6년간 서울에서 근무했다는 한 경제관료가 조금 다른 각도의 분석을 내놓았다.
“한국적 정치문화도 있지만, 박 대통령 특유의 리더십에 따른 결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박 대통령이기에 사과를 되풀이하면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다른 대통령이었다면 대통령이 나서기 전에 일찍 진화됐을 것입니다. 김영삼,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 한국에서 일했지만, 만약 비슷한 사건이 터졌더라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식으로 대응했을 것입니다.”
벤쿄카이가 끝나고 20여 명의 참가자와 함께 근처 맥주집에 들렀다. 한국을 경험한 경제관료에게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라면 세월호 사건에 어떻게 대응했을지 물어봤다.
“3·11 동일본 대지진의 희생자가 세월호 피해자의 50배인 10만여 명에 달합니다. 당시 총리 간 나오토(菅直人)는 사고경위를 발표했을 뿐입니다. 총리가 텔레비전에 등장해 사과성명을 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정치가가 눈물을 보이는 일도 흔치 않습니다. 눈물을 통해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치문화를 고려할 때 아베가 직접 나설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설령 있다 해도 다른 인물이 아베를 대신해 사건을 마무리지었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청와대=박 대통령’으로 받아들입니다. 한국적 정치문화로 보면 ‘내각=아베’로 보기 쉽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내각=아베와 그의 참모들’이 일본정치의 본모습이죠.”
日각료 중 인기 1위는?
집에 돌아와 ‘내각=아베와 그의 참모들’의 실상이 어떤지 자세히 알아봤다. 5월 19일 후지텔레비전(FNN)과 《산케이(産經)신문》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필자의 궁금증을 풀어 줬다.
‘아베 내각 구성원 가운데 가장 높게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은?’
놀랍게도 1위에 오른 인물은 관방(官房)장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이다. 응답자의 7.9%가 스가를 최고 인기의 내각 멤버로 평가했다. 아베는 스가의 뒤를 이어, 7.5%의 인기도로 2위에 그쳤다. 3위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교섭책임자인 경제재생담당 장관 아마리 아키라(甘利明)로 5.5%의 인기도였다.
아무리 내각제의 나라라고 하지만, 총리를 제치고 관방장관이 인기 1위라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내각의 얼굴인 아베가 아니라, 아베를 받쳐 주는 장관이 총리를 넘어선 것이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아베 입장에서 볼 때 장차, 아니 지금 당장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가상적(假想敵)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사실 하극상(下剋上)이 가장 빈발한 나라가 일본이다.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그대로 치고 올라온다. 한국에서 대통령의 지지율을 넘어서는 장관이 있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대통령의 빛을 가리는 장애물 정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필자의 그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은 도쿄(東京)대학 법학부 구보 후미아키(久保文明)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풀 수 있었다. 구보 교수는 워싱턴에 6개월간 머물면서 미·일(美日) 외교문제를 다루고 있는 정치학자이다. 특히 ‘미·일관계와 미 의회 및 공화당 정책’에 관한 한, 일본 제1의 전문가에 해당된다. 그와 동북아(東北亞) 정세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던 중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리더십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戀人 같은 오바마와 박근혜”
“오바마는 낯을 가리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유명하다고 해도 기용하지 않습니다. 밖에서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면식 있는 인사를 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찬밥 더운밥 안 가리고 모두를 포용했던 빌 클린턴 대통령과 크게 다른 부분이지요. 외교문제에 관해 오바마가 갈피를 못 잡는 이유는 백전노장(百戰老將) 군사·외교 전문가를 활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알고 지내던 평화주의자 아마추어들이 군사·외교 문제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밖의 의견이 백악관 안으로 들어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좋게 보면 참신하고 새로운 기회를 준다는 것이지만, 나쁘게 보면 살벌한 외교무대를 실험장 수준으로 여기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 유형에 대해 물어봤다.
“용병술이란 관점에서 볼 때,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과 비슷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은 누구입니까?”
“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현재의 오바마와 많이 닮은 듯합니다. 오바마는 사람을 피하고 혼자 지내는 대통령으로 유명합니다.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골프를 치고, 민주당 중진들과 별로 만나지도 않습니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도 적습니다. 박 대통령의 경우도 혼자 식사하고, 혼자 일하는 스타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워싱턴의 아시아전문가 대부분이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사이의 특별한 ‘케미컬(화학반응)’에 관해 인정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2013년 5월 7일이다.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을 가까이서 지켜본 미국인의 말이다. “현재 백악관 내 복도에 보면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대화를 하는 장면인데, 누가 보더라도 연인(戀人)처럼 느껴지는 사진입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밝은 것은 물론, 박 대통령에 대한 오바마의 남다른 배려를 사진만 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국가이익을 앞세우려는 외교정상들이 케미컬을 느낄 정도로 가깝다는 것은 극히 예외적(例外的)입니다. 정치외교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신뢰가 가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인물이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스타 참모가 없는 오바마
아베의 리더십은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누구와 비견할 수 있을지 물어봤다.
“레이건 대통령과 가장 흡사할 듯합니다.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주변 사람을 통해 정치를 하는 스타일입니다. 레이건은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을 통해 정치를 했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기보다 베이커의 충고와 정보를 갖고 쿠션을 한 번 넣는 정치입니다. 한국에서는 아베가 일본 우익(右翼)의 대표로 모든 일을 전부 하는 듯 보겠지만, 최근에 이뤄진 일련의 변화는 아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베이커를 통해 일을 했던 레이건처럼, 참모를 통한 수합형(收合型) 정치가 아베의 리더십입니다. 관방장관 스가는 베이커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입니다.”
스가가 왜 아베보다 인기가 높은지, 배보다 배꼽이 크다 해도 아베가 스가를 적으로 여기지 않을 근거를 구보 교수의 분석을 통해 이해하게 됐다. 아베가 스가를 앞세운다는 점에서, ‘스가의 인기=아베의 인기’라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한국의 청와대에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오바마의 백악관에는 눈에 띄는 인물이 극히 드물다. 레이건은 물론, 클린턴 때의 백악관은 수많은 스타들을 양산(量産)해 냈다. 이렇게 탄생한 스타들은 퇴임 후에도 그 인기를 바탕으로 정치분석가·정책전문가로 미국 중심에서 활동했다.
‘백악관=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란 이미지가 오바마 행정부에는 없다. ‘강렬한 오바마’라는 태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둠 속에 빠진 상태이다. 워싱턴에서 유행하는 조크가 있다. “오바마의 참모들은 백악관에서 나가는 순간 모두 실업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것이다. ‘백악관=오바마’일 뿐, ‘백악관=오바마와 그의 참모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방장관 스가라는 존재를 곁에 둔 아베와 그런 스타 참모를 갖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 여기서 두 사람의 리더십은 극적으로 차이가 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박근혜 대통령은 2인자를 안 두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버지의 죽음이 2인자 자리를 노리는 측근들의 암투(暗鬪)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에서 아예 오른팔, 나아가 왼팔과 다리 전부를 잘랐다고도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주변 참모 모두 자신을 향하도록 만드는, ‘해바라기 스타일’의 정치를 하고 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을 얘기할 때 등장하는 ‘가신(家臣)’이란 말과 무관한 대통령이다.
2인자가 없다는 말은 호가호위(狐假虎威) 정치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부패가 생길 염려가 없고, 대통령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 쓸데없는 일에 연루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같은 상황은 세월호 침몰 이전의, 60%가 넘는 지지율을 자랑할 때의 상황이다. 오른팔이 없기 때문에, 청와대 안에까지 밀려오는 급물살에 살아남기 어렵다. ‘해바라기 정치’답게 주변 참모들 모두 대통령에게 초점을 맞추는 사이에 시기를 놓치게 된다. 도망가듯 적극적으로 피하는 참모도 있겠지만, 대개는 ‘누군가 나서서 대통령을 구하겠지’라는 수동적인 자세로 대처한다. 그러는 사이에 대통령은 물에 떠내려간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은 ‘청와대=박 대통령’으로 보는 데 익숙하다. ‘청와대=박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로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문 듯하다. 레이건 시절의 베이커와 같은 사람이 있기는 한지, 설령 있다고 할 때 어느 수준에서 쿠션을 주고받는지 궁금해진다.
‘官房장관’이라는 자리
스가는 일본 정치권력의 넘버 투(No.2)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아베의 평생 동지이자, 아베의 생각을 구현하는 오른팔이다. 한국 외교부 성명이나 언론 보도를 보면 아베를 겨냥한 것이 대부분이다. 스가에 대한 언급은 극히 드물다.
구보 교수가 말했듯이, 현재 벌어지는 일본의 엄청난 변화는 아베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다. 아베 주변에 포진한 수많은 참모들의 머리가 합쳐진 결과이다. 스가는 아베 주변의 머리들을 하나로 묶어 정책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따라서 스가를 보면 아베가 구상하는 정책방향을 잡아낼 수 있다. ‘아베 없이 스가 없고, 스가 없이 아베 없다’는 것이 현재 일본정치의 기본구도이다.
한국인이 볼 때 스가가 담당하고 있는 관방장관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자리이다.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일단 국민들이 거의 매일 접하는 ‘얼굴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내각 내 인물이라 보면 된다. 내각 수반인 총리보다도 국민과 만나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관방장관이 정부 대변인(代辯人)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임명직인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청와대의 입장을 발표하지만, 일본은 관방장관이 직접 나서서 내각의 생각을 외부에 알린다. 텔레비전·신문·인터넷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거의 매일 정부의 입장을 외부에 알린다. 사무실이 도쿄 나가타초(永田町) 총리관저 5층에 있기 때문에, 같은 층 바로 옆 15초 거리에 있는 아베와 만나 수시로 생각을 다듬는다.
관방장관은 ‘입(口)’만이 아니라, ‘머리(頭)’로서의 영향력이 한층 더 강하다. 관방장관이 ‘2인자’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내각의 조정(調停)역할에 있다. ‘조정’이란 명분하에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다. 현안이 있으면 여당 내 계파(系派) 지도자와 관료·기업가·언론인 등을 직접 만나 자신의 생각을 요청하면서 합일점을 찾아낸다.
총리가 리더십을 ‘확실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관방장관의 협조와 정보가 필수적이다. 대통령도 그렇지만, 내각책임제 국가의 총리란 자리는 빡빡한 일정의 공식행사로 날과 밤을 새운다. 집안 단속, 즉 내부 정치에 나설 시간이 극히 드물다.
末席에 선 ‘2인자’
2인자인 관방장관이 그 같은 역할을 맡게 된다. 따라서 관방장관은 각 분야 수많은 실세(實勢)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향력과 권위를 키울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관방장관은 가까운 시일 내에 총리에 오를 차세대 주자로 인정받는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 당시의 관방장관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도 얼마 후에 총리가 됐다.
차세대 총리로 인정받는다고 해도 가만히 앉아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 무슨 암초를 만날지 모른다. 관방장관은 언젠가 총리가 될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 난관에 부딪히면, 총리와 운명을 같이하기보다는 혼자 살기 위해 독자노선을 취할 가능성도 높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스가는 오직 아베를 위해 일하는, ‘영원한 2인자’로 보인다. 자신이 총리 자리에 오르려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베를 돕다가 ‘장렬히’ 전사(戰死)할 듯한 인물이 스가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의 정치가·언론·국민들이 모두 인정한다. 아베가 성공하지 못할 경우, 총리 자리에 오를 의지도, 가능성도 없는 것이 스가의 운명이다.
2인자로서 스가의 모습은 2012년 12월 26일 아베 내각 출범 당시 찍은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내각 기념사진을 찍을 때에는 총리가 가장 아래 계단 중간에, 그 오른쪽에 관방장관이, 왼쪽에 여성이 서는 것이 관례(慣例)다. 2년 전 아베 내각 출범 기념사진에서 스가는 가운데줄 끝 부분에서 얼굴이 보일락 말락한 모습으로 서 있다. 필자의 친구인 일본 텔레비전의 한 여성기자는 이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넘버투가 말석(末席) 계단 뒤쪽에 서 있어요. 그의 ‘겸손한 자세’를 통해 아베 정권에서는 자기사람 심기나, 정상을 향한 권력투쟁 같은 것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방장관의 협력을 바탕으로, 오랜만에 장기집권도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立志傳的 정치인 스가
아베는 스가를 절대 신임한다고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6선 의원으로 항상 아베를 지지한 정치인이라는 점과, 2012년 가을 자민당 총재 경선(競選) 당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던 아베가 결단을 하도록 만든 주역이기 때문이다. 총재 경선 당시 아베는 차기(次期)에 나서자는 신중론으로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스가는 당시 신중론자들 앞에서 책상을 두드리면서 “지금 당장!”이라고 고함을 쳤다. 그리고 자민당 사람들을 만나 아베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했다. 아베를 다시 총리 자리에 오르게 한 1등공신인 셈이다.
아베 입장에서 볼 때 스가는 자신이 갖지 못한 장점을 가진 인물이다. 스가는 고생이 몸에 밴 듯한,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세상사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인 아키타(秋田)현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도쿄로 올라왔다. ‘슈단슈쇼쿠(集團就職)’의 일원으로 상경한다. 슈단슈쇼쿠란 시골 출신 청년들이 한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막노동에 종사하는 일용직(日傭職) 노동자집단을 말한다. 스가는 이후 종이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주오(中央)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졸업과 함께 중의원(衆議員) 비서로 일하다가 1989년 요코하마(橫浜) 시(市)의원에 당선됐고, 1996년 자민당 공천을 받아 중의원에 입후보해 당선됐다.
아베가 가문(家門)과 경력을 자랑하는 ‘귀족정치인’이라면, 스가는 입지전적(立志傳的) 정치인이다.
스가는 ‘귀공자 2세 정치가’ 아베를 위한 ‘장식물’에 그치지 않는다. 스가 자신이 아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비슷하지만, 일본에서는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한 조건으로 ‘삼반(三バン)’이란 것이 있다. ‘기반(基盤)·간판(看板)·가방(カバン)’이다. 발음이 전부 ‘반(バン)’으로 끝나면서 만들어진 말이다.
‘기반’은 출신지나 지역구, ‘간판’은 학력이나 얼굴, ‘가방’은 돈다발을 넣는 곳을 의미한다. 스가는 ‘삼반’ 가운데 제대로 갖춘 것이 하나도 없는 정치가이다. 아베는 그 같은 결점을 보완해 주는 최고의 후원자이다. 아베는 자신의 엄청난 정치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스가를 보호할 수 있고, 선거를 위한 정치자금도 지원할 수 있다. 아베가 스가를 필요로 하는 것만큼, 스가도 아베를 필요로 한다. 공생공사(共生共死) 천생연분(天生緣分) 공동운명체가 두 사람의 관계이다.
아베는 퇴근 후에 무얼 하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일요일 일정은 하루 종일 골프이다. 대통령 경호팀들은 골프장 동선(動線)이 테러리스트에 알려질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한다. 체력이 대단한 오바마는 18홀을 하루에 두 번 도는 날도 있다고 한다.
한국 언론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도 오바마와 비슷한 것 같다. 본인이 들으면 억울할지 모르겠지만, 식사는 애완견과 함께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아베는 어떨까. 아베는 2007년 건강 때문에 1년 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때마침 개발된 신약(新藥) 덕분에 병은 완치됐다고 하지만, 이 때문에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쓴다. 저녁 6시쯤 총리 관저에서의 일과가 끝나면 곧바로 퇴근해서 자기 시간을 갖는다. 아베가 자기 시간에 주로 하는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아베는 일본 총리 중에서는 드물게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는 인물이다. 한국 언론을 보면 ‘극우적(極右的)’ 행보 때문에 일본 언론이나 국민들의 배척을 받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아베는 현재 50%대의 지지율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청년층의 지지율이 엄청나다. 박근혜 대통령은 출발 당시 아베보다 훨씬 높았지만, 7월 현재 아베보다 낮은 지지율에 머물러 있다. 특히 2030세대 청년층의 지지율은 한 자리 수에 머물러 있다. 아베 역시 지지율이 낮아지기는 하지만, 취임 초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베 지지율 저하를 요란스럽게 보도하는 곳은 리버럴 성향이 강한 《아사히(朝日)신문》 《마이니치(每日)신문》과 일부 주간지들뿐이다.
스가, 괴벨스에 비견되기도
다른 신문, 특히 텔레비전의 경우 아베에 대한 평가가 사뭇 다르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경우, 국민들의 인기는 높았지만, 거의 모든 신문·방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었다.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이벤트 식의 ‘극장정치’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아베의 경우, 비난의 목소리가 극히 드물다. 일본 정치학자들은 “1945년 이후 아베만큼 미디어로부터 비난의 화살에서 벗어난 총리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베와 미디어의 밀월관계는 퇴근 후 아베의 일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퇴근 후 아베가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은 미디어 관계자다. 텔레비전·신문·잡지 등 닥치는 대로 만난다고 한다. 간부뿐 아니라 평기자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적극 알린다는 것이다. 아베는 원래 술을 못 마셨지만, 최근에는 미디어 관계자들과 저녁식사를 할 때 와인을 한 잔 정도 곁들인다고 한다.
정치인이 신문·방송 종사자와 만나는 것은 한국 정치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총리가 일과 후 기자를 만나는 것은 극히 드물다. 총리가 되기 위해 기자를 만나는 것이지, 일단 총리가 되고 나면 필요할 때만 간헐적으로 상대한다. ‘극장정치’의 대명사인 고이즈미조차 총리 재임 동안에는 미디어와의 접촉을 멀리했다고 한다.
미디어와의 관계강화는 아베의 오른팔 스가 관방장관의 주요 임무이기도 하다. 언론에 우호적으로 접근하는 아베와 달리 스가는 ‘채찍’의 역할을 맡고 있다. 《아사히》 《마이니치》 같은 반(反)아베 신문들은 스가를 히틀러의 선전상(宣傳相) 요제프 괴벨스에 비견한다. 스가는 언론사 최고 책임자와 식사를 하면서 은연중에 압력을 가해 아베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유도해 낸다고 한다.
反아베 평론가는 밀려나는 분위기
일본의 모든 텔레비전들은 ‘와이드 쇼’란 이름의 백화점식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오락+정치+문화’에 관한 수시간짜리 방송이다. 중간중간에 평론가란 타이틀은 단 전문가들이 나와, 나름대로의 분석과 평가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최근 아베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평론가는 곧바로 자리에서 쫓겨나는 추세이다. 주간지들이 거의 매주 지적하고 있지만, 반아베 평론가는 방송국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공기(분위기)’가 정착되고 있다.
이런 풍조가 가장 심한 곳은 공영방송인 NHK이다. 아베를 적극 지지하는 모미이 자쓰도(籾井勝人)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반아베 성향 기자나 제작자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관방장관 스가는 그 같은 미디어 정책을 총괄하는 인물이다. 시골 출신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스가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지만 NHK는 파업을 벌이지 않는다. 걸핏하면 정치성 파업을 벌이는 한국의 KBS나 MBC와는 다르다. 왜 그럴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모두(冒頭)에서 분석했듯이 관을 적으로 돌리지 못하는 일본인의 DNA 때문이다. 이런 DNA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NHK는 물론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 대부분이 파업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일본 전체의 ‘공기’가 아베로 나가면서 감히 앞서서 대항해 나갈 사람이나 세력이 없다.
젊은 시절 천황제에 반대하며 언론자유를 외쳤던 60년대 말의 단카이(團塊) 세대만이 ‘불온한 공기’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동력(動力)이다. 한국에 비치는 반아베 데모 영상을 자세히 살펴보길 바란다. 대부분 백발이 성성한 60대, 70대이다. 이들이 정년(停年)을 맞아 사회에서 사라지면서 NHK발(發) 공기가 사회 저변에 퍼져 나가고 있다.
둘째, 경제이다. 아베가 집권하던 19개월 전의 닛케이(日經) 평균주가지수는 1만엔 정도였다. 지난 7월 8일의 지수는 1만5314엔이다. 50% 정도 오른 셈이다. 어린이가 투자해도 확실하게 돈을 버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일자리도 넘친다. 6월 26일 일본정부 발표 통계에 따르면 5월 실업률은 3.5%에 그쳤다. 이 정도면 완전고용 수준이다. 실제로 직장을 원하는 사람과 직원을 구하려는 회사와의 비율인 유효구인비율은 1.09로 상승했다. 109개의 일자리가 있는데 비해,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100명에 불과하다는 얘기이다.
이는 지난 21년간의 경제성적표 중 최고의 것이다. 현재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탁월한 성적이다.
아베 정부는 소비세를 8%로 올렸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경기를 위축시키지 않고 있다. 아파트값이 오르고 곳곳에서 건설붐이다. 구조개혁은 아베가 활용한 아베노믹스(アベノミクス) 세 가지 화살 중 마지막 남은 방안이다. 공적기금을 통한 경기부양과 소비세 인상을 통해 19개월 전보다 경제를 50% 업그레이드한 현장이 2014년 여름의 일본이다. ‘모처럼 경제가 상승곡선을 그리는데, 굳이 아베에 반대하면서 파국으로 몰고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 보통 일본 사람들의 정서다. 과거사 문제나 집단적 자위권 등을 밀어붙일 수 있는 아베의 힘도 여기서 나온다.
‘실패의 성공학’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는 비슷하면서 다른 배경을 갖고 있다.
우선 한 사람은 ‘공주’, 다른 한 사람은 ‘왕자’라는 점이 비슷하다. 한국에서 ‘공주’라는 표현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편견을 담은 용어다. 하지만 입헌군주제 국가인 일본에서는 아베를 ‘왕자 정치인’이라 부르는 데 익숙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의 딸, 퍼스트레이디 대리(代理)로 18년간 청와대에서 생활했다.
아베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일본 최고의 정치명문가 출신이다. 아버지는 외무장관을 지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어머니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딸이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총리는 아베의 작은할아버지다. 기시 노부스케의 양자(養子)로 들어간, 현재 참의원(參議員)인 기시 노부오(岸信夫)는 아베의 친동생이다. 기시 노부오는 지난 6월 말에도 워싱턴을 방문하는 등 미·일 외교창구를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비슷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집권 이후 두 사람의 리더십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실패의 성공학’이라는 말은 아베가 다시 총리가 된 후 유행하는 말 중 하나다. 아베를 위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아베가 첫 번째 총리 재임시보다 두 번째로 총리가 된 후에 정치적으로 성공하게 된 이유가 ‘실패의 성공학’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다.
2006년 9월 26일부터 366일간 계속된 아베의 첫 번째 임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아름다운 나라(美しい国)’라는 슬로건과 함께 출발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비리와 관련해 현직 농수산장관이 의원회관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총력을 기울인 납치자 문제도 북한의 핵실험으로 무산됐다. 연금·교육 문제도 시동만 걸다가 중단했다. 지지율 최하라는 악조건 속에서 참의원 선거에 나서지만 대패(大敗)했다. 거기에 건강까지 나빠지면서 아베는 선거 패배 후 2개월 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베 6년 장기집권 프로젝트’
아베는 1기 재임 때의 실패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고 있다고 한다. 우선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서부터, 1기 때 서둘러 처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재정비하고, 이슈의 우선순위를 정한 뒤 장기적 차원에서 하나씩 해결해 나가고 있다.
지난해 7월 22일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壓勝)한 직후 일본 정계(政界)에서는 ‘아베 6년 장기집권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문예춘추》 9월호는 ‘6년 장기집권 시나리오’에 관한 글을 길게 보도했다. 이 보도에 의하면, 자민당 수뇌부는 아베를 통해 안정된 정권을 실현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잃어버린 20년’ 복원체제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현안들을 빨리 처리해서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말고 천천히 계획적으로 6년에 걸쳐 일을 추진하자는 것이 그 핵심내용이다.
아베의 최종 목표는 헌법개정이다. 맥아더가 만든 평화헌법의 일부 조항을 수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통째로 헌법을 바꾸는 수준의 개헌이다. 아베 등은 이를 ‘자주(自主)헌법’이라고 말한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집단적 자위권 인정, 무기수출 3원칙 해제, 일본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창설과 같은 것들은 헌법개정에 앞선,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헌법개정을 위한 정족수(定足數)를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에서 2분의 1 이상으로 바꾸는 법안이 일본 의회를 통과했다는 뉴스도 가까운 시일 내에 듣게 될 것이다.
아베는 전임자 고이즈미처럼 기자회견을 자주 갖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필요할 때는 짧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식으로 대신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한 7월 4일, 아베는 기자회견을 통해 대북(對北)제재 일부해제를 일본 국민에게 알렸다. 그가 기자회견장에서 보낸 시간은 1분이었다. 그는 질문 없이 간략하게 제재 해제 사실을 알렸다.
아베가 힘주어 말하는 이슈의 대부분은 전임 총리들이 입에 올리길 꺼리던 것들이다. 전통적으로 군사·외교·안보 문제는 일본 총리가 간여하고 싶지 않아하던 분야들이다. 말해 봤자 지지율을 떨어뜨리고, 해결점도 찾지 못한 채 결국 유야무야로 끝나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위기는 동맹국인 미국이 나서서 해결해 주겠지’라는 의미의 ‘헤이와보케(平和ボケ)’가 정치문화의 하나로 정착했다. 아베는 그 같은 정서를 말과 행동으로 깬 종전(終戰) 후 첫 번째 인물이다.
이러한 아베의 성공은 1기 재임 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각고의 노력과 준비의 소산이다.
아베와 비교할 때 박근혜 대통령은 실패보다는 시련의 극단을 맛본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이후 201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극단의 시련을 경험했다.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보도가 있었다.
한국은 정(情)에 기초한, 감성적 문화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따라서 실패를 이겨 낸 사람보다 시련을 극복해 낸 사람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일본은 어떨까. 한국과는 정반대다. 20세기 정치사에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시련을 이겨 낸 정치인보다는 실패를 극복한 정치인을 더 높이 쳐 준다. 입지전적인 인물인 스가보다 실패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아베가 전면에 나선 것도 그 예(例)이다.
시련은 정신과 육체를 강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새로 닥친 일에 대한 성공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실패의 성공학은 정신적·육체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는 있지만, 디지털 숫자를 통한 대차대조표(貸借對照表)로 승부를 건다. 경제가 받쳐 주는 한 아베는 한층 더 강력해질 것이다.
아베 이후 日 총리는 40대로 낮아질 것
아베 이후 차세대 일본 총리는 한순간에 40대로 낮아질 것이다. 야당이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정권교체나 정책견제는 당분간 꿈꾸기 어렵다. 아베 다음에는 1973년생인 자민당 중의원 오부치 유코(小渕優子)가 총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는 오부치 게이조(小渕惠三) 전 총리의 딸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아들로 1981년생인 자민당 중의원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도 차기 총리 후보 중 하나다.
이들은 외교·안보에 관한 한, 아베와 노선 차이가 없는 정치인들이다. ‘실패의 정치학’은 아베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잃어버린 20년’간의 실패를 거울 삼아 총력전진(總力前進)하는 것이 차세대 일본 정치인들, 아니 대다수 일본인의 마음가짐이다.⊙
한국에도 비슷한 모임들이 있지만, 큰 차이가 있다. 1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규모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장소는 근사한 곳이 아니라, 벤쿄카이 참가자가 사용하는 사무실 내 회의실이다. 자기 몫의 식사는 스스로 가지고 와서 해결한다. 워싱턴에는 정치·경제·안보·외교를 공부하는 벤쿄카이가 10여 개 있다.
필자가 발표한 것은 ‘괴담(怪談)을 통해 본 한일(韓日)정서 분석’이다. <장화홍련전>과 일본의 <요쓰야(四谷) 괴담>을 비교하면서 ‘관(官)’을 대하는 자세가 두 나라 사이에 얼마나 다른지를 살펴봤다. 한국인은 관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공분(公憤)의 대상으로 삼는 데 익숙하다. 이에 반해 일본인은 절대 관을 건드리지 않는다.
장화와 홍련을 만난 신임 사또들이 기겁을 하면서 죽는다는 것은 관에 대한 원망이나 한(恨)으로 볼 수 있다. 요쓰야 괴담의 경우 부인을 살해한 사무라이 남편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전부이다. 사무라이를 통제하는 관에 대한 불만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요쓰야 괴담>의 여자귀신보다 관에 대한 공포가 더 큰 것처럼 느껴진다.
감히 관에 반기를 들었다가는 본인만이 아니라, 주변사람 모두가 참수(斬首)를 면할 수 없다. 북한의 5호 감시제는 에도시대의 ‘고닌구미(五人組)’와 태평양전쟁 당시의 ‘도나리구미(隣組)’를 철저히 모방한 것이다. 문제가 생길 경우 5가구, 바로 옆의 가구 모두가 책임을 지는 연좌(連坐)체제이다. 3·11 동일본 대지진에서 보듯 일본인은 관을 공분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마음속으로야 분노가 치밀겠지만, 데모를 하거나 시청으로 몰려가 멱살을 잡는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시청으로 몰려간다 해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한다.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협력해서 실리를 찾는 데 익숙하다. 일본을 관료국가라 부르는 것은 수백 년 지속된 유전자(DNA)와 관련돼 있다.
“일본 총리는 재난 사과 안 해”
30분 정도 발표가 끝나자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들이 가장 궁금해한 것은 최근의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두 가지 부분이다.
“왜 세월호 침몰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수차례 사과를 행하는가. 사과를 하면서 왜 대통령이 눈물까지 흘리는가.”
관을 건드리지 않는 일본의 정치문화에 비춰 볼 때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나는 한국적 정서,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관에 대한 부정적 태도, 대통령책임제에 따른 정치구도라는 관점에서 설명했다. 그러자 바로 옆자리에 있던, 두 차례에 걸쳐 전부 6년간 서울에서 근무했다는 한 경제관료가 조금 다른 각도의 분석을 내놓았다.
“한국적 정치문화도 있지만, 박 대통령 특유의 리더십에 따른 결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박 대통령이기에 사과를 되풀이하면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다른 대통령이었다면 대통령이 나서기 전에 일찍 진화됐을 것입니다. 김영삼,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 한국에서 일했지만, 만약 비슷한 사건이 터졌더라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식으로 대응했을 것입니다.”
벤쿄카이가 끝나고 20여 명의 참가자와 함께 근처 맥주집에 들렀다. 한국을 경험한 경제관료에게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라면 세월호 사건에 어떻게 대응했을지 물어봤다.
“3·11 동일본 대지진의 희생자가 세월호 피해자의 50배인 10만여 명에 달합니다. 당시 총리 간 나오토(菅直人)는 사고경위를 발표했을 뿐입니다. 총리가 텔레비전에 등장해 사과성명을 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정치가가 눈물을 보이는 일도 흔치 않습니다. 눈물을 통해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치문화를 고려할 때 아베가 직접 나설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설령 있다 해도 다른 인물이 아베를 대신해 사건을 마무리지었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청와대=박 대통령’으로 받아들입니다. 한국적 정치문화로 보면 ‘내각=아베’로 보기 쉽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내각=아베와 그의 참모들’이 일본정치의 본모습이죠.”
日각료 중 인기 1위는?
집에 돌아와 ‘내각=아베와 그의 참모들’의 실상이 어떤지 자세히 알아봤다. 5월 19일 후지텔레비전(FNN)과 《산케이(産經)신문》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필자의 궁금증을 풀어 줬다.
‘아베 내각 구성원 가운데 가장 높게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은?’
놀랍게도 1위에 오른 인물은 관방(官房)장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이다. 응답자의 7.9%가 스가를 최고 인기의 내각 멤버로 평가했다. 아베는 스가의 뒤를 이어, 7.5%의 인기도로 2위에 그쳤다. 3위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교섭책임자인 경제재생담당 장관 아마리 아키라(甘利明)로 5.5%의 인기도였다.
아무리 내각제의 나라라고 하지만, 총리를 제치고 관방장관이 인기 1위라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내각의 얼굴인 아베가 아니라, 아베를 받쳐 주는 장관이 총리를 넘어선 것이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아베 입장에서 볼 때 장차, 아니 지금 당장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가상적(假想敵)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사실 하극상(下剋上)이 가장 빈발한 나라가 일본이다.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그대로 치고 올라온다. 한국에서 대통령의 지지율을 넘어서는 장관이 있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대통령의 빛을 가리는 장애물 정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필자의 그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은 도쿄(東京)대학 법학부 구보 후미아키(久保文明)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풀 수 있었다. 구보 교수는 워싱턴에 6개월간 머물면서 미·일(美日) 외교문제를 다루고 있는 정치학자이다. 특히 ‘미·일관계와 미 의회 및 공화당 정책’에 관한 한, 일본 제1의 전문가에 해당된다. 그와 동북아(東北亞) 정세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던 중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리더십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戀人 같은 오바마와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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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3년 5월 7일 박근혜 대통령이 오바마 미 대통령과 백악관 로즈가든 옆 복도를 거닐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인사 스타일이나 성격이 비슷하다는 평을 듣는다. |
그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 유형에 대해 물어봤다.
“용병술이란 관점에서 볼 때,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과 비슷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은 누구입니까?”
“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현재의 오바마와 많이 닮은 듯합니다. 오바마는 사람을 피하고 혼자 지내는 대통령으로 유명합니다.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골프를 치고, 민주당 중진들과 별로 만나지도 않습니다.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도 적습니다. 박 대통령의 경우도 혼자 식사하고, 혼자 일하는 스타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워싱턴의 아시아전문가 대부분이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사이의 특별한 ‘케미컬(화학반응)’에 관해 인정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2013년 5월 7일이다.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을 가까이서 지켜본 미국인의 말이다. “현재 백악관 내 복도에 보면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대화를 하는 장면인데, 누가 보더라도 연인(戀人)처럼 느껴지는 사진입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밝은 것은 물론, 박 대통령에 대한 오바마의 남다른 배려를 사진만 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국가이익을 앞세우려는 외교정상들이 케미컬을 느낄 정도로 가깝다는 것은 극히 예외적(例外的)입니다. 정치외교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신뢰가 가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인물이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스타 참모가 없는 오바마
아베의 리더십은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누구와 비견할 수 있을지 물어봤다.
“레이건 대통령과 가장 흡사할 듯합니다.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주변 사람을 통해 정치를 하는 스타일입니다. 레이건은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을 통해 정치를 했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기보다 베이커의 충고와 정보를 갖고 쿠션을 한 번 넣는 정치입니다. 한국에서는 아베가 일본 우익(右翼)의 대표로 모든 일을 전부 하는 듯 보겠지만, 최근에 이뤄진 일련의 변화는 아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베이커를 통해 일을 했던 레이건처럼, 참모를 통한 수합형(收合型) 정치가 아베의 리더십입니다. 관방장관 스가는 베이커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입니다.”
스가가 왜 아베보다 인기가 높은지, 배보다 배꼽이 크다 해도 아베가 스가를 적으로 여기지 않을 근거를 구보 교수의 분석을 통해 이해하게 됐다. 아베가 스가를 앞세운다는 점에서, ‘스가의 인기=아베의 인기’라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한국의 청와대에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오바마의 백악관에는 눈에 띄는 인물이 극히 드물다. 레이건은 물론, 클린턴 때의 백악관은 수많은 스타들을 양산(量産)해 냈다. 이렇게 탄생한 스타들은 퇴임 후에도 그 인기를 바탕으로 정치분석가·정책전문가로 미국 중심에서 활동했다.
‘백악관=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란 이미지가 오바마 행정부에는 없다. ‘강렬한 오바마’라는 태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둠 속에 빠진 상태이다. 워싱턴에서 유행하는 조크가 있다. “오바마의 참모들은 백악관에서 나가는 순간 모두 실업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것이다. ‘백악관=오바마’일 뿐, ‘백악관=오바마와 그의 참모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방장관 스가라는 존재를 곁에 둔 아베와 그런 스타 참모를 갖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 여기서 두 사람의 리더십은 극적으로 차이가 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박근혜 대통령은 2인자를 안 두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버지의 죽음이 2인자 자리를 노리는 측근들의 암투(暗鬪)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에서 아예 오른팔, 나아가 왼팔과 다리 전부를 잘랐다고도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주변 참모 모두 자신을 향하도록 만드는, ‘해바라기 스타일’의 정치를 하고 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을 얘기할 때 등장하는 ‘가신(家臣)’이란 말과 무관한 대통령이다.
2인자가 없다는 말은 호가호위(狐假虎威) 정치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부패가 생길 염려가 없고, 대통령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 쓸데없는 일에 연루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같은 상황은 세월호 침몰 이전의, 60%가 넘는 지지율을 자랑할 때의 상황이다. 오른팔이 없기 때문에, 청와대 안에까지 밀려오는 급물살에 살아남기 어렵다. ‘해바라기 정치’답게 주변 참모들 모두 대통령에게 초점을 맞추는 사이에 시기를 놓치게 된다. 도망가듯 적극적으로 피하는 참모도 있겠지만, 대개는 ‘누군가 나서서 대통령을 구하겠지’라는 수동적인 자세로 대처한다. 그러는 사이에 대통령은 물에 떠내려간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은 ‘청와대=박 대통령’으로 보는 데 익숙하다. ‘청와대=박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로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문 듯하다. 레이건 시절의 베이커와 같은 사람이 있기는 한지, 설령 있다고 할 때 어느 수준에서 쿠션을 주고받는지 궁금해진다.
‘官房장관’이라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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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총리의 오른팔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
구보 교수가 말했듯이, 현재 벌어지는 일본의 엄청난 변화는 아베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다. 아베 주변에 포진한 수많은 참모들의 머리가 합쳐진 결과이다. 스가는 아베 주변의 머리들을 하나로 묶어 정책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따라서 스가를 보면 아베가 구상하는 정책방향을 잡아낼 수 있다. ‘아베 없이 스가 없고, 스가 없이 아베 없다’는 것이 현재 일본정치의 기본구도이다.
한국인이 볼 때 스가가 담당하고 있는 관방장관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자리이다.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일단 국민들이 거의 매일 접하는 ‘얼굴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내각 내 인물이라 보면 된다. 내각 수반인 총리보다도 국민과 만나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관방장관이 정부 대변인(代辯人)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임명직인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청와대의 입장을 발표하지만, 일본은 관방장관이 직접 나서서 내각의 생각을 외부에 알린다. 텔레비전·신문·인터넷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거의 매일 정부의 입장을 외부에 알린다. 사무실이 도쿄 나가타초(永田町) 총리관저 5층에 있기 때문에, 같은 층 바로 옆 15초 거리에 있는 아베와 만나 수시로 생각을 다듬는다.
관방장관은 ‘입(口)’만이 아니라, ‘머리(頭)’로서의 영향력이 한층 더 강하다. 관방장관이 ‘2인자’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내각의 조정(調停)역할에 있다. ‘조정’이란 명분하에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다. 현안이 있으면 여당 내 계파(系派) 지도자와 관료·기업가·언론인 등을 직접 만나 자신의 생각을 요청하면서 합일점을 찾아낸다.
총리가 리더십을 ‘확실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관방장관의 협조와 정보가 필수적이다. 대통령도 그렇지만, 내각책임제 국가의 총리란 자리는 빡빡한 일정의 공식행사로 날과 밤을 새운다. 집안 단속, 즉 내부 정치에 나설 시간이 극히 드물다.
末席에 선 ‘2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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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2기 내각 출범 기념사진. 스가 관방장관은 총리 옆에 서는 관례를 깨고 셋째 줄 오른쪽 끝에 섰다(원 안). |
차세대 총리로 인정받는다고 해도 가만히 앉아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 무슨 암초를 만날지 모른다. 관방장관은 언젠가 총리가 될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 난관에 부딪히면, 총리와 운명을 같이하기보다는 혼자 살기 위해 독자노선을 취할 가능성도 높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스가는 오직 아베를 위해 일하는, ‘영원한 2인자’로 보인다. 자신이 총리 자리에 오르려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베를 돕다가 ‘장렬히’ 전사(戰死)할 듯한 인물이 스가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의 정치가·언론·국민들이 모두 인정한다. 아베가 성공하지 못할 경우, 총리 자리에 오를 의지도, 가능성도 없는 것이 스가의 운명이다.
2인자로서 스가의 모습은 2012년 12월 26일 아베 내각 출범 당시 찍은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내각 기념사진을 찍을 때에는 총리가 가장 아래 계단 중간에, 그 오른쪽에 관방장관이, 왼쪽에 여성이 서는 것이 관례(慣例)다. 2년 전 아베 내각 출범 기념사진에서 스가는 가운데줄 끝 부분에서 얼굴이 보일락 말락한 모습으로 서 있다. 필자의 친구인 일본 텔레비전의 한 여성기자는 이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넘버투가 말석(末席) 계단 뒤쪽에 서 있어요. 그의 ‘겸손한 자세’를 통해 아베 정권에서는 자기사람 심기나, 정상을 향한 권력투쟁 같은 것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방장관의 협력을 바탕으로, 오랜만에 장기집권도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立志傳的 정치인 스가
아베는 스가를 절대 신임한다고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6선 의원으로 항상 아베를 지지한 정치인이라는 점과, 2012년 가을 자민당 총재 경선(競選) 당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던 아베가 결단을 하도록 만든 주역이기 때문이다. 총재 경선 당시 아베는 차기(次期)에 나서자는 신중론으로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스가는 당시 신중론자들 앞에서 책상을 두드리면서 “지금 당장!”이라고 고함을 쳤다. 그리고 자민당 사람들을 만나 아베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했다. 아베를 다시 총리 자리에 오르게 한 1등공신인 셈이다.
아베 입장에서 볼 때 스가는 자신이 갖지 못한 장점을 가진 인물이다. 스가는 고생이 몸에 밴 듯한,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세상사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인 아키타(秋田)현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도쿄로 올라왔다. ‘슈단슈쇼쿠(集團就職)’의 일원으로 상경한다. 슈단슈쇼쿠란 시골 출신 청년들이 한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막노동에 종사하는 일용직(日傭職) 노동자집단을 말한다. 스가는 이후 종이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주오(中央)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졸업과 함께 중의원(衆議員) 비서로 일하다가 1989년 요코하마(橫浜) 시(市)의원에 당선됐고, 1996년 자민당 공천을 받아 중의원에 입후보해 당선됐다.
아베가 가문(家門)과 경력을 자랑하는 ‘귀족정치인’이라면, 스가는 입지전적(立志傳的) 정치인이다.
스가는 ‘귀공자 2세 정치가’ 아베를 위한 ‘장식물’에 그치지 않는다. 스가 자신이 아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비슷하지만, 일본에서는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한 조건으로 ‘삼반(三バン)’이란 것이 있다. ‘기반(基盤)·간판(看板)·가방(カバン)’이다. 발음이 전부 ‘반(バン)’으로 끝나면서 만들어진 말이다.
‘기반’은 출신지나 지역구, ‘간판’은 학력이나 얼굴, ‘가방’은 돈다발을 넣는 곳을 의미한다. 스가는 ‘삼반’ 가운데 제대로 갖춘 것이 하나도 없는 정치가이다. 아베는 그 같은 결점을 보완해 주는 최고의 후원자이다. 아베는 자신의 엄청난 정치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스가를 보호할 수 있고, 선거를 위한 정치자금도 지원할 수 있다. 아베가 스가를 필요로 하는 것만큼, 스가도 아베를 필요로 한다. 공생공사(共生共死) 천생연분(天生緣分) 공동운명체가 두 사람의 관계이다.
아베는 퇴근 후에 무얼 하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일요일 일정은 하루 종일 골프이다. 대통령 경호팀들은 골프장 동선(動線)이 테러리스트에 알려질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한다. 체력이 대단한 오바마는 18홀을 하루에 두 번 도는 날도 있다고 한다.
한국 언론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도 오바마와 비슷한 것 같다. 본인이 들으면 억울할지 모르겠지만, 식사는 애완견과 함께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아베는 어떨까. 아베는 2007년 건강 때문에 1년 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때마침 개발된 신약(新藥) 덕분에 병은 완치됐다고 하지만, 이 때문에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쓴다. 저녁 6시쯤 총리 관저에서의 일과가 끝나면 곧바로 퇴근해서 자기 시간을 갖는다. 아베가 자기 시간에 주로 하는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아베는 일본 총리 중에서는 드물게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는 인물이다. 한국 언론을 보면 ‘극우적(極右的)’ 행보 때문에 일본 언론이나 국민들의 배척을 받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아베는 현재 50%대의 지지율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청년층의 지지율이 엄청나다. 박근혜 대통령은 출발 당시 아베보다 훨씬 높았지만, 7월 현재 아베보다 낮은 지지율에 머물러 있다. 특히 2030세대 청년층의 지지율은 한 자리 수에 머물러 있다. 아베 역시 지지율이 낮아지기는 하지만, 취임 초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베 지지율 저하를 요란스럽게 보도하는 곳은 리버럴 성향이 강한 《아사히(朝日)신문》 《마이니치(每日)신문》과 일부 주간지들뿐이다.
스가, 괴벨스에 비견되기도
다른 신문, 특히 텔레비전의 경우 아베에 대한 평가가 사뭇 다르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경우, 국민들의 인기는 높았지만, 거의 모든 신문·방송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었다.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이벤트 식의 ‘극장정치’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아베의 경우, 비난의 목소리가 극히 드물다. 일본 정치학자들은 “1945년 이후 아베만큼 미디어로부터 비난의 화살에서 벗어난 총리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베와 미디어의 밀월관계는 퇴근 후 아베의 일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퇴근 후 아베가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은 미디어 관계자다. 텔레비전·신문·잡지 등 닥치는 대로 만난다고 한다. 간부뿐 아니라 평기자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적극 알린다는 것이다. 아베는 원래 술을 못 마셨지만, 최근에는 미디어 관계자들과 저녁식사를 할 때 와인을 한 잔 정도 곁들인다고 한다.
정치인이 신문·방송 종사자와 만나는 것은 한국 정치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총리가 일과 후 기자를 만나는 것은 극히 드물다. 총리가 되기 위해 기자를 만나는 것이지, 일단 총리가 되고 나면 필요할 때만 간헐적으로 상대한다. ‘극장정치’의 대명사인 고이즈미조차 총리 재임 동안에는 미디어와의 접촉을 멀리했다고 한다.
미디어와의 관계강화는 아베의 오른팔 스가 관방장관의 주요 임무이기도 하다. 언론에 우호적으로 접근하는 아베와 달리 스가는 ‘채찍’의 역할을 맡고 있다. 《아사히》 《마이니치》 같은 반(反)아베 신문들은 스가를 히틀러의 선전상(宣傳相) 요제프 괴벨스에 비견한다. 스가는 언론사 최고 책임자와 식사를 하면서 은연중에 압력을 가해 아베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유도해 낸다고 한다.
反아베 평론가는 밀려나는 분위기
일본의 모든 텔레비전들은 ‘와이드 쇼’란 이름의 백화점식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오락+정치+문화’에 관한 수시간짜리 방송이다. 중간중간에 평론가란 타이틀은 단 전문가들이 나와, 나름대로의 분석과 평가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최근 아베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평론가는 곧바로 자리에서 쫓겨나는 추세이다. 주간지들이 거의 매주 지적하고 있지만, 반아베 평론가는 방송국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공기(분위기)’가 정착되고 있다.
이런 풍조가 가장 심한 곳은 공영방송인 NHK이다. 아베를 적극 지지하는 모미이 자쓰도(籾井勝人)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반아베 성향 기자나 제작자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관방장관 스가는 그 같은 미디어 정책을 총괄하는 인물이다. 시골 출신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스가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지만 NHK는 파업을 벌이지 않는다. 걸핏하면 정치성 파업을 벌이는 한국의 KBS나 MBC와는 다르다. 왜 그럴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모두(冒頭)에서 분석했듯이 관을 적으로 돌리지 못하는 일본인의 DNA 때문이다. 이런 DNA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NHK는 물론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 대부분이 파업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일본 전체의 ‘공기’가 아베로 나가면서 감히 앞서서 대항해 나갈 사람이나 세력이 없다.
젊은 시절 천황제에 반대하며 언론자유를 외쳤던 60년대 말의 단카이(團塊) 세대만이 ‘불온한 공기’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동력(動力)이다. 한국에 비치는 반아베 데모 영상을 자세히 살펴보길 바란다. 대부분 백발이 성성한 60대, 70대이다. 이들이 정년(停年)을 맞아 사회에서 사라지면서 NHK발(發) 공기가 사회 저변에 퍼져 나가고 있다.
둘째, 경제이다. 아베가 집권하던 19개월 전의 닛케이(日經) 평균주가지수는 1만엔 정도였다. 지난 7월 8일의 지수는 1만5314엔이다. 50% 정도 오른 셈이다. 어린이가 투자해도 확실하게 돈을 버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일자리도 넘친다. 6월 26일 일본정부 발표 통계에 따르면 5월 실업률은 3.5%에 그쳤다. 이 정도면 완전고용 수준이다. 실제로 직장을 원하는 사람과 직원을 구하려는 회사와의 비율인 유효구인비율은 1.09로 상승했다. 109개의 일자리가 있는데 비해,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100명에 불과하다는 얘기이다.
이는 지난 21년간의 경제성적표 중 최고의 것이다. 현재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탁월한 성적이다.
아베 정부는 소비세를 8%로 올렸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경기를 위축시키지 않고 있다. 아파트값이 오르고 곳곳에서 건설붐이다. 구조개혁은 아베가 활용한 아베노믹스(アベノミクス) 세 가지 화살 중 마지막 남은 방안이다. 공적기금을 통한 경기부양과 소비세 인상을 통해 19개월 전보다 경제를 50% 업그레이드한 현장이 2014년 여름의 일본이다. ‘모처럼 경제가 상승곡선을 그리는데, 굳이 아베에 반대하면서 파국으로 몰고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 보통 일본 사람들의 정서다. 과거사 문제나 집단적 자위권 등을 밀어붙일 수 있는 아베의 힘도 여기서 나온다.
‘실패의 성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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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총리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오른쪽)의 외손자이다. 그 옆이 세 살 때의 아베 총리. |
우선 한 사람은 ‘공주’, 다른 한 사람은 ‘왕자’라는 점이 비슷하다. 한국에서 ‘공주’라는 표현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편견을 담은 용어다. 하지만 입헌군주제 국가인 일본에서는 아베를 ‘왕자 정치인’이라 부르는 데 익숙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의 딸, 퍼스트레이디 대리(代理)로 18년간 청와대에서 생활했다.
아베는 널리 알려졌다시피, 일본 최고의 정치명문가 출신이다. 아버지는 외무장관을 지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어머니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딸이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총리는 아베의 작은할아버지다. 기시 노부스케의 양자(養子)로 들어간, 현재 참의원(參議員)인 기시 노부오(岸信夫)는 아베의 친동생이다. 기시 노부오는 지난 6월 말에도 워싱턴을 방문하는 등 미·일 외교창구를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비슷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집권 이후 두 사람의 리더십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실패의 성공학’이라는 말은 아베가 다시 총리가 된 후 유행하는 말 중 하나다. 아베를 위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아베가 첫 번째 총리 재임시보다 두 번째로 총리가 된 후에 정치적으로 성공하게 된 이유가 ‘실패의 성공학’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다.
2006년 9월 26일부터 366일간 계속된 아베의 첫 번째 임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아름다운 나라(美しい国)’라는 슬로건과 함께 출발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비리와 관련해 현직 농수산장관이 의원회관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총력을 기울인 납치자 문제도 북한의 핵실험으로 무산됐다. 연금·교육 문제도 시동만 걸다가 중단했다. 지지율 최하라는 악조건 속에서 참의원 선거에 나서지만 대패(大敗)했다. 거기에 건강까지 나빠지면서 아베는 선거 패배 후 2개월 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베 6년 장기집권 프로젝트’
아베는 1기 재임 때의 실패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고 있다고 한다. 우선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서부터, 1기 때 서둘러 처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재정비하고, 이슈의 우선순위를 정한 뒤 장기적 차원에서 하나씩 해결해 나가고 있다.
지난해 7월 22일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壓勝)한 직후 일본 정계(政界)에서는 ‘아베 6년 장기집권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문예춘추》 9월호는 ‘6년 장기집권 시나리오’에 관한 글을 길게 보도했다. 이 보도에 의하면, 자민당 수뇌부는 아베를 통해 안정된 정권을 실현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잃어버린 20년’ 복원체제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현안들을 빨리 처리해서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말고 천천히 계획적으로 6년에 걸쳐 일을 추진하자는 것이 그 핵심내용이다.
아베의 최종 목표는 헌법개정이다. 맥아더가 만든 평화헌법의 일부 조항을 수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통째로 헌법을 바꾸는 수준의 개헌이다. 아베 등은 이를 ‘자주(自主)헌법’이라고 말한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집단적 자위권 인정, 무기수출 3원칙 해제, 일본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창설과 같은 것들은 헌법개정에 앞선,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헌법개정을 위한 정족수(定足數)를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에서 2분의 1 이상으로 바꾸는 법안이 일본 의회를 통과했다는 뉴스도 가까운 시일 내에 듣게 될 것이다.
아베는 전임자 고이즈미처럼 기자회견을 자주 갖는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필요할 때는 짧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식으로 대신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한 7월 4일, 아베는 기자회견을 통해 대북(對北)제재 일부해제를 일본 국민에게 알렸다. 그가 기자회견장에서 보낸 시간은 1분이었다. 그는 질문 없이 간략하게 제재 해제 사실을 알렸다.
아베가 힘주어 말하는 이슈의 대부분은 전임 총리들이 입에 올리길 꺼리던 것들이다. 전통적으로 군사·외교·안보 문제는 일본 총리가 간여하고 싶지 않아하던 분야들이다. 말해 봤자 지지율을 떨어뜨리고, 해결점도 찾지 못한 채 결국 유야무야로 끝나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위기는 동맹국인 미국이 나서서 해결해 주겠지’라는 의미의 ‘헤이와보케(平和ボケ)’가 정치문화의 하나로 정착했다. 아베는 그 같은 정서를 말과 행동으로 깬 종전(終戰) 후 첫 번째 인물이다.
이러한 아베의 성공은 1기 재임 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각고의 노력과 준비의 소산이다.
아베와 비교할 때 박근혜 대통령은 실패보다는 시련의 극단을 맛본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이후 201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극단의 시련을 경험했다.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보도가 있었다.
한국은 정(情)에 기초한, 감성적 문화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따라서 실패를 이겨 낸 사람보다 시련을 극복해 낸 사람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일본은 어떨까. 한국과는 정반대다. 20세기 정치사에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시련을 이겨 낸 정치인보다는 실패를 극복한 정치인을 더 높이 쳐 준다. 입지전적인 인물인 스가보다 실패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아베가 전면에 나선 것도 그 예(例)이다.
시련은 정신과 육체를 강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새로 닥친 일에 대한 성공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실패의 성공학은 정신적·육체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는 있지만, 디지털 숫자를 통한 대차대조표(貸借對照表)로 승부를 건다. 경제가 받쳐 주는 한 아베는 한층 더 강력해질 것이다.
아베 이후 日 총리는 40대로 낮아질 것
아베 이후 차세대 일본 총리는 한순간에 40대로 낮아질 것이다. 야당이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정권교체나 정책견제는 당분간 꿈꾸기 어렵다. 아베 다음에는 1973년생인 자민당 중의원 오부치 유코(小渕優子)가 총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는 오부치 게이조(小渕惠三) 전 총리의 딸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아들로 1981년생인 자민당 중의원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도 차기 총리 후보 중 하나다.
이들은 외교·안보에 관한 한, 아베와 노선 차이가 없는 정치인들이다. ‘실패의 정치학’은 아베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잃어버린 20년’간의 실패를 거울 삼아 총력전진(總力前進)하는 것이 차세대 일본 정치인들, 아니 대다수 일본인의 마음가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