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시내 대형서점에 나갔다가 눈길을 끄는 책을 발견했다. 강상중 일본 도쿄대 교수와 현무현 홋카이도대학 교수가 쓴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라는 책이었다. 책 제목을 보는 순간, ‘아, 만주국(滿洲國)을 매개(媒介)로 해서 한일(韓日) 양국(兩國) 보수세력의 원조(元祖) 격인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를 조명하는 책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일부 학자들은 기시가 만주국에서 근무할 때 입안(立案)한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이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중화학공업 건설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박정희에 관심이 많은 내게 ‘만주와 박정희’는 흥미로운 주제였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서 저자들은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모두 일본 제국의 분신, 만주국이었다”면서 “박정희가 추진했던 병영국가적인 국력배양과 총력안보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바탕에는 만주제국의 유산이 자리하고 있고, 이 유산을 낳은 주인공은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으로 활약한 기시 노부스케”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일제(日帝)의 만주침략 과정과 만주국 경영, 그리고 만주 체험이 박정희와 기시에게 미친 영향을 나름 잘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어딘지 음습한 느낌을 주는 생소한 단어가 자주 나왔다. ‘귀태(鬼胎)’라는 말이었다. ‘만주가 낳은 귀태들’, ‘만주제국과 제국의 귀태들’, ‘되살아나는 귀태들’….
저자들은 ‘귀태’라는 말을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에게서 차용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시바는 《이 나라의 모습》에서 러일전쟁 이후의 역사를 일본 근대의 싱그럽고도 다부진 정신과는 전혀 딴판인 ‘이태(異態)’의 시대 혹은 ‘귀태’의 시대라고 불렀다. 그것은 일본 정체가 ‘통수권’이라는 마물(魔物)에 의해 농락당하고 마술의 숲에서 헤매는 것 같은, 제정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재액(災厄)의 시대였다. 마치 태반의 일부를 이루는 융모막(絨毛膜) 조직이 이상증식(異常增殖)을 해서 태아를 죽음으로 몰아가듯이, 러일전쟁 이후 발랄했던 메이지국가의 유산은 그 내부에서 이상증식을 한 조직으로 인해 숨통이 끊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이상한 조직이야말로 통수권이라는 마물의 봉인을 풀어버린 군부였다.〉
시바 료타로의 ‘鬼胎’
시바 료타로는 일본이 근대국민국가 건설에 매진하던 메이지(明治)시대와, 전쟁의 폐허 위에서 기적처럼 국가를 재건한 전후(戰後) 쇼와(昭和)시대를 긍정한다. 반면에 군부가 나라를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몰고 간 전전(戰前) 쇼와시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통수권은 천황에게 속한다’는 논리 아래 정부나 국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폭주하던 군부를 ‘이태’ ‘귀태’라고 표현했다. 저자들은 이 ‘귀태’라는 말을 박정희와 기시에게 사용했다. 성향상 ‘진보’지식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저자들이 기시와 박정희에 대해 품고 있는 거부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이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인(知人)이 “청년 시절의 박정희에 관심이 있다”면서 박정희의 만주 시절에 대해 참고할 만한 책을 찾기에 이 책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나중에 “너무 실망스러웠다. 역겹고 수준 이하였다”고 혹평했다.
홍익표 민주당 의원이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 나오는 ‘귀태’라는 말을 인용했다가 논란을 빚었다. 민주당 대변인이던 그는 지난 7월 11일 국정원을 비판하면서 “작년에 나온 책 중에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라는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책 중에 귀태라는 표현이 있다. 귀신 귀(鬼)자에다, 태아 태(胎)자를 써서, 그 뜻은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태어났다, 당시 만주국의 일본제국주의가 만주국에 세운 괴뢰국에, 만주국의 귀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논란을 빚자 홍 의원은 이틀 후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번 논란이 있기 전인 지난 4월 23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대를 이용해 대통령직을 찬탈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과 경찰을 이용해 대통령직을 도둑질했다”고 한 적이 있다.
홍 의원은 486정치인이다. 경박한 언행과 맹목적인 체제 부정은 이 세대 학생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거의 공통된 특징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는데 이들은 우물 안에서 좁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낳은 ‘귀태’가 아닐까?⊙
일부 학자들은 기시가 만주국에서 근무할 때 입안(立案)한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이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중화학공업 건설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박정희에 관심이 많은 내게 ‘만주와 박정희’는 흥미로운 주제였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서 저자들은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모두 일본 제국의 분신, 만주국이었다”면서 “박정희가 추진했던 병영국가적인 국력배양과 총력안보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바탕에는 만주제국의 유산이 자리하고 있고, 이 유산을 낳은 주인공은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으로 활약한 기시 노부스케”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일제(日帝)의 만주침략 과정과 만주국 경영, 그리고 만주 체험이 박정희와 기시에게 미친 영향을 나름 잘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어딘지 음습한 느낌을 주는 생소한 단어가 자주 나왔다. ‘귀태(鬼胎)’라는 말이었다. ‘만주가 낳은 귀태들’, ‘만주제국과 제국의 귀태들’, ‘되살아나는 귀태들’….
저자들은 ‘귀태’라는 말을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에게서 차용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시바는 《이 나라의 모습》에서 러일전쟁 이후의 역사를 일본 근대의 싱그럽고도 다부진 정신과는 전혀 딴판인 ‘이태(異態)’의 시대 혹은 ‘귀태’의 시대라고 불렀다. 그것은 일본 정체가 ‘통수권’이라는 마물(魔物)에 의해 농락당하고 마술의 숲에서 헤매는 것 같은, 제정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재액(災厄)의 시대였다. 마치 태반의 일부를 이루는 융모막(絨毛膜) 조직이 이상증식(異常增殖)을 해서 태아를 죽음으로 몰아가듯이, 러일전쟁 이후 발랄했던 메이지국가의 유산은 그 내부에서 이상증식을 한 조직으로 인해 숨통이 끊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이상한 조직이야말로 통수권이라는 마물의 봉인을 풀어버린 군부였다.〉
시바 료타로의 ‘鬼胎’
시바 료타로는 일본이 근대국민국가 건설에 매진하던 메이지(明治)시대와, 전쟁의 폐허 위에서 기적처럼 국가를 재건한 전후(戰後) 쇼와(昭和)시대를 긍정한다. 반면에 군부가 나라를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몰고 간 전전(戰前) 쇼와시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통수권은 천황에게 속한다’는 논리 아래 정부나 국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폭주하던 군부를 ‘이태’ ‘귀태’라고 표현했다. 저자들은 이 ‘귀태’라는 말을 박정희와 기시에게 사용했다. 성향상 ‘진보’지식인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저자들이 기시와 박정희에 대해 품고 있는 거부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이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인(知人)이 “청년 시절의 박정희에 관심이 있다”면서 박정희의 만주 시절에 대해 참고할 만한 책을 찾기에 이 책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나중에 “너무 실망스러웠다. 역겹고 수준 이하였다”고 혹평했다.
홍익표 민주당 의원이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 나오는 ‘귀태’라는 말을 인용했다가 논란을 빚었다. 민주당 대변인이던 그는 지난 7월 11일 국정원을 비판하면서 “작년에 나온 책 중에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라는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책 중에 귀태라는 표현이 있다. 귀신 귀(鬼)자에다, 태아 태(胎)자를 써서, 그 뜻은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태어났다, 당시 만주국의 일본제국주의가 만주국에 세운 괴뢰국에, 만주국의 귀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논란을 빚자 홍 의원은 이틀 후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번 논란이 있기 전인 지난 4월 23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대를 이용해 대통령직을 찬탈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과 경찰을 이용해 대통령직을 도둑질했다”고 한 적이 있다.
홍 의원은 486정치인이다. 경박한 언행과 맹목적인 체제 부정은 이 세대 학생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거의 공통된 특징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는데 이들은 우물 안에서 좁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낳은 ‘귀태’가 아닐까?⊙
김용근
(201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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