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추적] ‘金鍾勳 사퇴’ 이후 술렁이는 미국 교포사회 : 월간조선

작년 7월 29일 재미(在美)교포가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이런 글이 실렸다고 한다.

<‘누구라 말하긴 곤란하지만, 밤마다 뉴저지 패리세이트 파크의 한인 룸살롱을 돌아다니며 술을 퍼마시는 자가 하나 있습니다. 기분이 내키면 팁을 1만 달러씩 주기도 하고, 보통은 1000달러씩 주는데 웨이터 출신에게 벤츠를 사주고 운전사로 쓰며 ○○○ 노릇까지 시킨 사람으로, 성이 김가입니다. …’>

이 글은 한 교포가 올렸다. 그러나 대개의 교포는 ‘김가라는 성(姓)’을 가진 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지난 2월 17일 당선자 신분의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미국 이민 1.5세대인 ‘김종훈(金鍾勳) 알카텔-루슨트 벨연구소 사장’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미국인들이 정킴(Jeong H. Kim)이라 부르는 ‘코리언 아메리칸(Korean-American·한국계 미국인)’ 김종훈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자 한국인 최초로 《포브스》지가 발표한 미국 400대 부자에 뽑힌 인물이었다. 장관 후보자 신분의 그는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인 2월 23일 국내 포털의 한 블로그에 비슷한 내용의 글이 다시 올라왔다. 작성자는 7개월 전 글을 올린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재미교포(제임스 주)였다. 그는 ‘김가라는 성’의 남자를 ‘김종훈’이라 명시하며 “8년 전 직접 목격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도 이런 글을 올렸고, 종북성향의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실과 여러차례 접촉했다고 한다. 국내 언론이 관심을 보이자 그의 블로그는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도무지 확인하기 어려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었다.

그 사이 국내 일부 매체가 김 사장 부인이 소유한 건물에 성매매 업소가 있다는 의혹(2월 26일)을 제기됐다. 김 사장은 “다른 업체에 관리를 맡겨 내용을 모르는데, 마치 우리가 성매매나 방치하는 나쁜 사람처럼 몰고 갔다”고 해명했지만 흥분한 여론은 식지 않았다.

한때 미 중앙정보국(CIA)과 연계된 인큐텔(In-Q-Tel)의 이사로 활동해 불거졌던 ‘CIA 스파이 연루설’도 해명되지 않았다. 2011년 12월 미 해군이 발행하는 잡지 《프로시딩(Proceedings)》 12월호 ‘부름에 응답하다’라는 코너에 “미 해군 복무를 통해 나는 ‘진짜 미국인’이 됐다”는 글을 직접 기고한 사실도 드러났다.

인사청문회가 열리면 해명해야 할 사안이 무척 많아 보였다. 그러나 3월 4일 그는 돌연 사퇴 기자회견을 가진 뒤 이튿날 출국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했던 마음을 접으려 한다”는 말을 남긴 채.

김종훈과 서남표, 그리고 안철수

1997년 5월 김종훈을 표지얼굴로 다룬 《비즈니스위크》.

미국으로 돌아간 김종훈 사장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현실이 몽환(夢幻) 같았을 한국에서 보낸 날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한국의 지인에게 “당분간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다른 일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은 인천공항 출국장을 나서는 김종훈의 뒷모습에서 두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 명은 서남표(徐南杓) 카이스트 전 총장. 카이스트를 개혁하겠다며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했으나 그의 개혁에는 언제나 ‘소통 부재’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박수를 보내면서도 언제나 ‘미국인 불도저’라고 손가락질했다. 결국 미국 시민권자인 서 전 총장은 교수집단과 학생들에 밀려 임기를 1년5개월을 남긴 올해 2월 24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기자에게 “당분간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또 한 명의 얼굴은 안철수(安哲秀) 전 서울대 교수다. 작년 12월 19일 대선 개표도 보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던 그는 김종훈이 떠났던 인천공항을 통해 3월 11일 귀국했다. 82일 만의 귀국이었다. 안 전 교수는 4월 보궐선거가 예정된 서울 노원병(丙)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지켜본 한국인은 물론 재미 교포들까지 적잖은 당혹감과 충격을 받았다. ‘코리언 아메리칸’ 김 사장과 서 전 총장의 미국행을, 미국에서 잠행(潛行)하던 안 전 교수의 한국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은 쏠림과 축복과 저주와 반전의 덫에 갇힌 사회일까. 기자는 김종훈 사장의 사퇴 이후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교포사회 분위기를 취재했다.

미주위성방송 ‘TV KOREA’ 전 사장 임춘훈(林椿薰)씨는 LA에서 발행되는 한 주간신문에 이런 글을 올렸다.

<성공한 벤처기업인인 안철수와 김종훈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비유한다. ‘이뤄 낸 성취도에서 김종훈이 장관급이라면 안철수는 구청장급이다.’

대통령 자리를 놓치고 나서 구차하게 국회의원 자리라도 얻어 차겠다고 나서는 구청장급의 안철수가 장관 자리를 박차고 가족의 품으로 쿨하게 돌아간 김종훈보다 썩 그럴싸해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임 전 사장은 “김종훈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능하고 저명한, 정보화 시대의 글로벌 인재”라고 했다.

“그는 일찍이 ATM을 개발했고 38세 나이에 미국의 400대 부자 대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안철수가 1000만 달러에 매각 오퍼를 받았을 때 김종훈의 통신장비 벤처인 유리시스템즈는 그 100배인 10억 달러에 팔렸습니다. 김종훈이 최고경영자(CEO)를 맡은 벨연구소는 노벨상 수상자만 13명 배출한 미국의 상징기업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산 청담동 4층 빌딩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아요. 이걸 투기목적으로 샀다고 시비를 거는가 하면 지하에 있는 유흥주점이 성매매를 하고 있다고 좌파들은 악악댔어요. IMF 때 저도 친구 몇 명이 함께 10만 달러를 모아 한국에 보낸 적이 있어요. 한국에선 금 모으기로, 해외동포 사회에서는 달러를 송금하며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어요. 그때 김종훈이 경매에 나온 집을 샀다면, 그건 애국이지 투기가 될 수 없어요. 당시 김종훈은 세계 100대 벤처기업인 중 1위였어요. 보유재산 1%도 안되는 돈으로 산 빌딩이 투기용이라고 떠들어대는 한국의 배타적 생떼 문화에 중학교 때부터 40년을 미국에서 산 그가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미리 사퇴하길 잘했다” vs. “조국 헌신의 결심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뉴욕에 거주하는 한태격씨.

한태격(韓泰格)씨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은행주재원으로 근무하다 뉴욕 최대 일간지인 《뉴욕데일리뉴스》(New York Daily News)에서 일했다. 미국 최대 은행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에서 근무하다 2005년 퇴직한 뒤 뉴욕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저는 김종훈씨가 장관 내정자로 발표됐을 당시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 컸습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유심히 한국 반응을 살폈어요. 한국 국민은 다소 어리둥절한 반응이었어요. 차분했지만 환영하는 분위기가 강했어요. 그런데 야당의 흠집 내기가 시작되고 정부조직법이 미뤄지면서 저는 그가 낙마할 수 있겠다고 느꼈어요.”

그는 “목에 줄이 감겨 죽을망정 줄을 팔고, 줄을 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한국사회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런 지연과 학연이 자리를 잡은 특유의 텃새가 사람을 끌어내리고 때로는 죽이고 살린다는 것을 저는 경험으로 배웠다”는 것이다.

“미 CIA 자문위원으로 일한 그에게,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을 떠난 ‘코리언 아메리칸’에게 진충보국(盡忠報國)의 국가관이 서 있겠습니까. 그가 국가를 위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에게 던져진 치욕까지 견디며 한국을 위해 일할 명분이 있겠습니까. 그를 헐뜯는 내용이 불거진 것도 그의 지명을 반대하는 진영에서 의도적으로 준비했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한씨는 “솔직히 그가 야당의 공세를 견디며 장관을 맡아 임기를 채웠더라면, 그리고 훗날 그 자리를 떠날 때, 한국에 대한 실망과 공허만이 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가 사퇴한 것을 환영한다”고 했다.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쏠림과 저주의 이중성’을 타파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들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뒤에서 공격하는 사회는 삶을 너무 각박하게 만듭니다. 국민과 정치권은 더 이상 해외동포에 대한 의심과 견제, 그리고 기존의 자리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한국사회와 발전이라는 대전제하에 인재를 받아들여 주세요.”

그는 3월 27일자 한인신문 《뉴욕일보》에 실린 ‘한미자유수호운동본부’ 최응표(崔應杓) 상임대표의 시론을 이메일로 보내 왔다.

<… 해외두뇌와 해외투자 유치는 좀 더 넓은 마음과 진정한 애국정신 틀 안에서 펼쳐 나가야 한다. 남을 도둑처럼 보는 눈으로 먼저 자신을 보고,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에 봉사하겠다는 해외두뇌들의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 해외두뇌의 조국봉사와 해외동포의 투지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시비를 건다면 앞으로 어떤 해외두뇌가 조국에 봉사할 마음이 생길 것이며 누가 조국에 투자할 생각을 가지겠는가. 해외동포 자산이 곧 대한민국 자산이다. …>

그러나 뉴욕 한인을 상대로 한 인터넷 신문 《뉴스로》의 노창현(盧昌賢) 편집인(전 뉴시스 뉴욕특파원)은 자신의 칼럼을 통해 김종훈의 사퇴를 호되게 비난했다.

“검증(檢證)의 칼날에 고통스러워했지만 이는 국민을 위한 공직자로서 견뎌야 할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라며 “그의 사퇴는 대통령과 국민을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야 하는 공복(公僕)의 자세가 아니다”는 것이다. 다음은 칼럼의 일부다.

<… 아니할 말로 그는 해외동포 사회를 배려(配慮)하는 차원에서라도 청문회 통과 가능성이 높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워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 극단적인 표현을 써 가며 사퇴한다는 말입니까. (중략) 정말 참기 힘든 것은 ‘이제 저는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고 했던 마음을 접으려고 한다’는 대목입니다. 조국을 위한 헌신을 손바닥 뒤집듯 없던 일로 한단 말입니까? 조국을 위한 헌신은 상황에 따라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재미교포 인명록 《미국 땅에서 역사를 만든 한인들》(←)과 그 책에 실린 김종훈의 프로필(↑).

한인 행사에 참석한 적 없어

사실 많은 한국인은 김종훈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서울 정릉의 산동네에서 살다가 중학교 2학년 때인 1975년 14살의 나이에 부모를 따라 이민, 메릴랜드의 빈민촌에 정착했던 한 소년의 ‘믿기지 않은’ 성공을 한국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사실 미국 교포조차 그를 잘 모른다고 했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에 거주하는 한 교포는 이렇게 설명했다.

“김종훈씨는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경계지역인 부촌 ‘포토맥’ 강변에 집이 있다는 것, 메릴랜드대에 큰돈을 기부해 그분 이름의 건물이 있다는 것, 그리고 벨연구소에 있다는 것, 돈이 아주 많다는 것 등이 알려졌습니다. 많은 한인 교포들이 교회에서 교류하는데, 그가 기독교 신자인지조차 몰랐습니다. 한인사회 행사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으니까요.”

장관 지명을 거부한 그에게 국내 언론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논조였다.

<… “조국에 헌신하겠다”던 다짐이 단 보름 만에 포기되고 산산조각 날 만큼 가벼운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조국’과 ‘헌신’이라는 말의 무게에 비해 장관 자리를 받아들이고 중간에 사퇴하는 과정이 너무 가볍지 않으냐는 시선이다. …>(3월 6일자 《조선일보》의 ‘기자수첩’에서)

<… 김종훈씨가 강조한 조국은 정말 어디이며, 조국에 대한 헌신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입신양명을 위해서라면 없다가도 생기고 변하기도 하며, 기분 나쁘면 언제든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인가. 조국에 대한 헌신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있는 것쯤으로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조국에 대한 헌신을 접겠다”는 말과 낮도깨비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3월 6일자 《한국일보》의 ‘메아리’에서)

그러나 일부 교포들은 모국의 장관 자리보다 가족을 택한 그의 결정이 옳았다고 했다.

“김종훈씨 루머는 미국에서 처음 듣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메릴랜드에서 뉴저지까지 차로 4시간가량 가야 합니다. 굳이 그곳까지 가서 술을 마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또 CIA 자문을 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정보통신 분야면 그런 사람들과 친분이 있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또 혹자는 그가 ‘미국에 보답하기 위해 해군에 갔다’고 한 표현을 두고 공격하는데, 미국 시민권자가 되려면 시민권 신청서 37항과 38항(‘법이 원한다면 미국을 위해 총을 들 수 있고, 미국을 위해 싸울 수 있는지 맹세하라’)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런 맹세 없이 시민권자가 될 수 없어요. 그런 분이 미국 시민으로 합당한 역할을 하고, 오히려 그런 인맥을 활용, 한국 장관이 되면 국익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익명을 요구한 《월간조선》 해외통신원)

CNN과 코카콜라가 있고,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영면한 미국 남부의 서울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사는 교포 조무제씨는 클린턴 정권 시절, 미국 국무장관을 지냈던 이민자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1937~)를 예로 들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망명한 올브라이트의 모국은 체코슬로바키아. 옛 체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후 공산정권으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받자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레 미국인이 됐다. 조씨의 말이다.

“공산정권이 퇴진하고 하벨 대통령을 비롯한 체코 지식인들이 올브라이트에게 고국으로 돌아와 대통령직을 맡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어요. 체코의 권력지성이 한국보다 더 대외 개방적이라는 증거가 아닐까요?

미국 이민 1.5세대 김종훈의 한국 귀환은 1200년 전 당 제국 이민 1.5세대였던 최치원(崔致遠·857~?)의 신라 귀환을 데자뷔하게 만듭니다. 당 시스템을 꿰차고 있었고 시대의 천재였던 최치원은, 그러나 당시 신라의 강력한 토착세력에 의해 겉돌다가 여러 개혁조치가 좌초됩니다. 이후 최치원은 유리방랑(遊離放浪)했어요. 그리고 그 변화를 거부했던 신라는 얼마 안 가 붕괴하고 말았어요.”

디아스포라는 인재를 활용한다. 크기가 손바닥만 한 이스라엘이 강소국 반열에 오른 것은 바로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의 애국심과 이를 활용한 네트워크 때문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김종훈은 누구?

영어 못하던 외톨이가 38세에 미국 400대 부자가 되다!

1960년생인 그는 중학교 2학년 때인 1975년 가난한 부모를 따라 미국 메릴랜드의 흑인 동네에 정착했다. 학창시절, 영어 한마디 못하는 외톨이였으나 수학과 과학성적이 뛰어나 존스홉킨스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6년간 미 해군에서 핵잠수함 장교로 근무했다. 핵잠수함 장교 선발시험은 매사추세츠공대(MIT) 입학시험보다 어렵다고 한다. 장교로 근무하며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졸업과 동시에 메릴랜드대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2년 만에 공학박사 학위를 땄다. 이 기록은 메릴랜드대의 전설로 남아있다. 나중 그는 메릴랜드대 교수가 되었고, 이 대학에 500만 달러를 기부해 ‘김종훈 엔지니어링 빌딩’을 세웠다.

김종훈은 1997년부터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해 5월 《비즈니스위크》는 그의 벤처 ‘유리시스템즈’를 미국 초고속 성장 1위 업체로 선정했다. 유리는 큰딸 이름이다. 1992년 창립한 유리시스템즈는 직원 1명, 자본금 40달러에 불과했으나 5년 만에 매출액이 무려 230배가 뛰었다. LDR이라는 통신장비를 개발한 것이다.

걸프전(戰)이 일어난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ATM 방식의 통신기술은 실용화되기 어려웠다. 데이터 송수신이 늦어 적군의 이동이나 미사일, 전투기 추적이 어려웠다. 기존 구리 전화선을 광케이블로 바꾸면 되지만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그가 개발한 기술은 구리선으로 운용되는 통신 네트워크에서도 ATM 방식의 통신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1998년 상용화에 성공한 그는 세계적인 통신장비업체 루슨트테크놀로지스(현재의 알카텔·루슨트)에 유리시스템즈를 매각했다. 매각 대금은 10억 달러(약 1조800억원). 이 거래로 그는 38세의 나이에 미국 400대 부자가 됐다. 그는 “돈 때문에 매각한 것이 아니다. 합병하지 않고선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루슨트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면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더 큰 꿈을 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의 활동 무대는 미국 전역이 되었다. 하루에 워싱턴, 뉴욕, 뉴저지 등 3곳을 돌고서 집이 있는 메릴랜드로 퇴근했다. 2005년 4월 그는 알카텔·루슨트 벨연구소 사장직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벨연구소는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의’ 이름을 따 1925년 설립된 민간연구소. 삼고초려 끝에 그는 외부 출신 중 처음으로 최연소 벨연구소 사장이 됐다.

한국으로 돌아간 교포 80%는 정착에 실패

LA 한인 역사박물관 민병용 관장.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 역사박물관’ 민병용 관장은 2011년 5월 재미교포 인명록을 만들었다. 《미국 땅에서 역사를 만든 한인들》이란 제목의 인명록은 각 분야에서 이름을 남긴 재미교포 3012명의 출생지, 미국에 온 연도, 학력, 경력과 같은 개인정보를 사진과 함께 담았다. 민 관장의 말이다.

“초기 이민으로 1903년 이후 1~3세대, 그리고 새 이민으로 1965년 이후에 온 1~2세대 등 전 미주의 한인 3012명이 이 책의 주인공입니다. 공직자·판사·연예인 등 17개 분야에 걸쳐 주류사회에 진출한 인사 530명, 남가주 지역의 한인 1178명, 북가주와 전 미주 43개 주 및 도시에 사는 한인 1188명, 그리고 미주의 독립유공자 116명의 이름을 담았습니다. 물론 김종훈 사장도 실려 있어요.”

인명록 69쪽에 김종훈 사장의 프로필이 나온다.

<김종훈 Jeong H. Kim, Ph. D.

현직 : 벨연구소 소장 / 출생지 : 서울 / 생년월일 : 1960년 / 학력 : 존스홉킨스대 학사, 석사, 1991년 메릴랜드대 공학박사. / 경력 : 미 해군입대. 7년간 원자력 잠수함 장교. 미 해군 연구실험실 근무. 1992년 유리시스템즈(Yurie systems) 회사 설립. 1998년 루슨트 테크놀로지 10억 달러 판매. 미국 400대 기업인. 메릴랜드대 실습교수. 2003년 3월 CTIA 회사 경영. 2005년 벨연구소 소장 취임. 메릴랜드대는 Jeong H. Kim 이름을 딴 건물 건립. 나스닥상장 청문재심위원회 이사. 스탠퍼드대에 200만 달러 기증. / 수상 : 2008년 코리아 소사이어티 벤플리트상, 메릴랜드대 명예혁신전당상, 포스텍 명예 공학박사.>

과거 인명록을 준비하며 민 관장은 김 사장에게 한 차례 자료협조 요청을 했으나 답신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는 한인 교포 커뮤니티에 후원이나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그냥 미국 주류사회 안에서 생활했지, 한인과의 연결고리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미리 (그의) 장관 내정 소식을 들었다면 한국행을 만류했을지 모릅니다.”

—왜 막을 생각인가요.

“한국은 그 나름의 시스템과 인맥, 뿌리 깊은 관료조직 등이 있습니다. 교포들이 머리만 믿고 준비 없이 한국에 들어갔다간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김종훈 사장 역시 덜컥 장관직을 받아들이기보다 한국정부에 자문역할을 하며 적응기간을 거친 뒤 장관을 맡아야 했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했을지라도 말이죠. 재미교포 중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역(逆)이민을 떠난 이들 중 80%는 끝내 한국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만큼 대단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들어가면 물과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다 고통당하기 십상이죠.”

—미국적 사고와 한국적 사고의 차이가 뭡니까.

“미국적 사고는 논리적인 프로세스를 중시하지만, 한국적 정서는 사람들의 관계나 정실주의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미국적 사고는 싫든 좋든 직설적으로 ‘예스냐 노냐’를 분명히 말합니다. 서남표 전 총장이나 김종훈 사장 역시 외모는 한국인일지라도, 사고는 미국인입니다. 돌려 말하지 않고,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니 한국인의 눈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어요. 그의 급작스런 사퇴, 그리고 사퇴 이튿날 공항 출국장을 나선 것도 미국적 사고의 표현이죠.”

김종훈 사퇴문 (요약)
“저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오늘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어려서 미국 이민 가서 열심히 연구하고 도전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갖고 미국에서 인정받는 한국인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수많은 도전과 어려움을 극복해 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미국에서 일궈 온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저를 낳아 준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남은 일생을 바치고자 돌아왔습니다. 그 길을 선택한 것은 한국의 미래는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창조경제에 달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미래가 걸려 있는 중대한 시점에서 국회는 움직이지 않고 미래부를 둘러싼 정부조직 개편안 논란과 여러 혼란상을 보면서 조국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 했던 저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조국을 위해 바치려고 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고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제 저는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했던 마음을 접으려 합니다. 부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치와 국민 여러분이 힘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김종훈·서남표·러플린이 必敗할 수밖에 없는 이유

미 해군대학원 송광섭 연구원.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몬터레이, 그곳에서 골프장으로 유명한 페블비치에 거주하는 송광섭(宋光燮)씨는 2003년까지 해군사관학교 교수(전기공학과)로 재직하다 전역했다. 현재 몬터레이 소재 미 해군대학원 무인 잠수정 연구실 연구원으로 근무 중이다.

“최근 코리언 아메리칸 미국인의 한국 내 공직 수행 문제에서 나타난 일련의 소란을 이해하려면 한국사회와 관료조직 문화, 한국인과 미국인의 정서, 미국의 국민정서 등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경험한 한국문화는 붕당(학연, 지연, 친족 등) 중심이고 인정주의와 하향적 지시, 순종적 문화, 여기다 공사(公私)의 영역이 얽혀 있다면, 미국문화는 자격조건을 기반으로 자유와 경쟁을 인정하며 법치주의를 중시하죠. 토론과 다수결의 원칙, 리더십을 중요 가치로 인정합니다. 개인과 공적 영역이 기본적으로 완전히 분리돼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조직문화와 달리 미국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미국사회에서 성과를 낸 사람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인맥이나 혈연, 지연, 학연이 아닌 순전히 실력으로, 자신의 비전을 통해 선택을 받은 만큼 자신만의 독특한 리더십과 능력, 창의성과 내공과 에너지가 있다고 이해합니다. 조직의 리더가 되면, 언제나 전문적 임무수행과 개인의 학술적 능력, 조직비전에 대한 성실성, 적법 절차에 따른 과업수행, 절차에 따라 조직의 운영을 합니다. 그러니 서남표 전 총장과 카이스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분쟁의 소지가 있었을 겁니다. 서 전 총장은 대학조직을 시스템에 따라 운영하며 자신의 비전을 실천하려 했을 것이고요. 저돌적이고 확신에 찬 변화 요구에 위험을 무릅쓰기가 카이스트 구성원들로서는 쉽지 않았을 테죠. 그러니 서남표와 러플린(R.Laughlin)은 한국 내 게임에서 필패(必敗)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김 사장을 둘러싼 좋지 못한 소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의혹을 제기한 블로그 글을 모두 읽어 보았어요. 김종훈의 성공과 오랜 경력에 비해 믿을 수 없거나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었어요. 직무수행 능력은 전문성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공적인 자격과 능력, 자질이 문제이지 개인의 특별한 성향은 개인의 책임일 뿐이죠.”

—김종훈씨 사퇴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그나 가족들은 한국적 인신, 신상공격에 공포감을 느꼈을 겁니다. 절차에 따른, 합리적인 비판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했을 겁니다. 대통령 진영에서도 그의 사퇴를 만류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움직임이 없었어요. 그를 뒤에서 지지하고 방어해 줄 세력이 전혀 없이 일방적인 인신공격만 당했던 겁니다.”

그는 수타니파이타 경전에 나오는 경구(어둠에서는 등불에 의지하라. 악인의 등불이라도 등불의 빛만 취하라)를 인용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한국의 공공기관에 필요한 일자리가 있고, 한국계 외국인이 그 일에 적합한 능력을 보유할 때, 우수자원인 경우 불법한 일을 했거나 파렴치한 언행이 없다면 능력과 자질을 판단해 채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