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大選 포커스] 추석민심과 大選 : 월간조선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미국의 시인 T.S.엘리엇의 장편 시 <황무지(荒蕪地)>의 첫 구절이다. 만물이 소생하고 희망이 싹트는 음력 춘삼월인 4월을 시인은 왜 황무지라고 했을까.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는 구절이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변화가 없고 현상이 유지되는 그 겨울은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싹을 틔우고 성장하여 결실을 맺어가는 과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다. 비바람이 불 수도 있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한발(旱魃)이 계속될 수도 있다. 만난을 극복하고 탐스런 열매로 영글었어도 수확 일보 직전에 태풍이 몰아치기라도 하면 만사가 허사가 된다.

올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넉 달 남겨놓았다. 대선주자들에게 짧게는 1년, 길게는 4년 반의 준비기간은 따뜻한 겨울일 수 있다. 각자 자기 진영에서 내공을 기르고 지지자들을 상대로 이야기하면서 환호와 지지를 받았다. 한마디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인큐베이터 안에서 극진한 보호를 받아가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8월 20일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필두로 9월 중하순에는 제1 야당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가 선출될 것이다. 장외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비롯한 강호의 강자들도 호시탐탐 결선의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 모두 반드시 넘어야 할 중간다리가 있다. 바로 추석(秋夕)민심이라는 검증터널이다.

대선 70일 전에 맞는 2012 추석

올해 추석연휴도 여지없이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9월 28일 금요일부터 10월 3일 개천절까지 무려 5박6일에 걸쳐 있다. 5박6일이면 고향을 찾는 귀성인파도 비교적 마음 편하게 고향을 찾아 부모님·친지들을 만나며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간이다. 특히 올해처럼 대선전망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인 경우, 아무래도 정치가 대화의 흥미로운 안줏거리로 오를 가능성이 높다. 서울에 사는 자식세대의 의견과 시골에 사는 부모세대의 생각들이 뒤엉키며 어떤 새로운 여론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제부터 대통령 선거가 추석을 지나 12월에 치러졌을까.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던 1948년 7월 20일 초대 이승만(李承晩) 대통령부터 1971년 4월 27일에 치러진 7대 대통령 선거까지는 대선이 혹한·혹서기를 피해 대개 봄가을에 치러졌다. 통일주체국민회의나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던 8대부터 12대 대선을 지나, 1987년 13대 대선 때부터 국민들은 5년 단임제 대통령을 직접선거로 선출하고 있다. 이때부터 다섯 차례의 대선은 예외 없이 12월 16~19일 사이에 치러졌다. 1987년 13대, 1992년 14대 대선은 정부에서 선거일을 공고했으나, 1997년 대선부터는 선거일이 법정화되었다.

정말 추석민심이라는 것은 있는가. 있다면 유권자의 심리와 지지성향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전문가들 간에도 의견이 팽팽하게 갈린다. 혹자는 통신과 교통이 열악했던 시절에는 추석민심이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KTX와 SNS시대에는 가당치도 않다고 주장한다. 반면 여전히 추석민심을 믿는 측에서는 매스미디어의 홍수 속에서도 일가친척들 간 뒷담화식의 의견교환이 새로운 여론을 만들 수 있다고 반박한다.

추석민심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측에서는 명절민심이라는 것이 구태의연한 분석의 틀이라고 폄하한다. 이제는 시골 두메산골에도 TV가 다 보급되어 있고, 모바일 화상으로 시골의 할아버지와 서울의 손녀가 매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정도다. 서울의 민심과 지방의 민심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민심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출신 지역에 따라 편차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그 의견과 고향의 민심 간에는 큰 편차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설민심이나 추석민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데 언론에서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며 만들어낸 또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추석민심의 존재를 인정하는 측에서는 여전히 명절민심이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명절 때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 가장 잘 오르는 화제는 단연 정치 이야기다. 시골에서는 신문도 TV도 접하기 쉽지 않던 시절, 오랜만에 내려온 서울 사는 자식들의 이야기는 단연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었다. 자식들 입장에서도 고향집에서 들은 민심 그리고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친척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모아 모아서 마치 용광로에서 혼합하듯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의 얼개를 만들어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명절민심의 약발이 예전만 같지 않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명절민심은 나름 꽤 과학적인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다양한 생각과 판단이 고향이라는 1차원적 집단인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에서 솔직하고 자발적인 정서적 교류를 통해 일정하게 가닥을 잡는다. 그리고 명절이 끝나고 2차원적 집단인 게젤샤프트(Gesellschaft)로 돌아왔을 때, 집단의 구성원은 좀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게마인샤프트에서 나름 검증받고 확신을 얻는 주장을 펴게 된다.

추석연휴 직전에 대선출마 선언한 李仁濟

이인제 경기도지사는 추석연휴 직전인 1997년 9월 13일 대통령 출마를 선언, 추석민심을 잡았다.

1997년 9월 13일 이인제 경기지사가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그해 추석은 9월 16일 화요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9월 12일부터 추석연휴가 시작되었고 상당수 귀성객은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에 이인제 지사의 탈당 소식을 접했다. 당시 분위기는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였다.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 측에서는 경선결과에 불복한 이인제 지사를 집중 공격했다.

하지만 추석연휴가 끝나고 《조선일보》와 MBC가 한국갤럽과 공동으로 9월 17~18일 이틀 동안 전국 유권자 1033명을 대상으로 한 후보자별 지지도 조사에서 이인제 지사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즉 추석민심 승부에서 일단 승리한 것이다. 당시 조사결과에 따르면 김대중 후보(29.9%)가 1위, 2위는 이인제 전 지사(21.7%), 이회창 후보(18.3%)가 3위 그리고 조순 민주당 총재가 4위(11.6%)였다.

추석연휴 후 10일 정도 경과한 9월 27일 MBC는 한국갤럽과 함께 전국의 유권자 1555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MBC TV토론회가 끝난 직후였다. 결과는 김대중 후보가 31.9%, 이인제 전 지사가 23.3%로 열흘 전에 비해 각각 2%p, 1.6%p 지지율이 상승한 반면, 이회창 후보는 1.2%p가 빠진 17.1%를 보였다.

추석 직후 두 차례 여론조사에서 민심을 확인한 이인제로서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파죽지세(破竹之勢)의 기세로 밀고 나갔고 10월 7일 부산에서 3000여 명의 지지자가 운집한 가운데 ‘이인제 신당’ 발기인대회를 가졌다. 그날은 마침 집권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DJ 비자금’을 폭로하며 김대중 후보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 날이기도 했다.

이제 시곗바늘을 본격적으로 15년 전으로 돌려보자. 15대 대선이 있었던 1997년은 암울하게 시작됐다. 1996년 12월 26일 노동법 날치기 파동, 중견 대기업들의 도산, 김영삼 대통령 차남의 한보비리 연루 의혹으로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국민들은 ‘3김(金)시대’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했고, 경제가 불안해지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되살렸다.

당시 야당에는 김대중 총재·김종필 총재가 있었으나 국민들의 달라진 눈높이를 맞추기엔 부족했다. 여당인 신한국당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깨끗함으로 상징되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였다. 대쪽판사라는 그의 별명대로 국민들은 깨끗하게 국정을 이끌어갈 인물로 이회창 전 총리에게 기대를 걸었다.

또 한 인물이 있었다. 이인제 경기지사다. 김영삼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 사이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순식간에 대세를 형성했다. 이인제 지사는 박정희 신드롬에 철저하게 편승했다. 심지어 머리 스타일까지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하게 꾸미고는 “나이(집권 당시 40대)와 키(161cm)가 같고 얼굴도 닮았다”며 박정희 마케팅에 열을 올렸다.

이회창 대표나 이인제 지사나 분명 시대적 흐름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3김 시대의 구태의연함에 지칠 대로 지쳐 세대교체를 요구하는 민심, 이제는 낡고 시든 정치가 아닌 패기 있고 역동적인 리더십을 요구하는 유권자의 심리를 파고든 것이다.

97년 여당, 이회창 아들 병역 의혹에 속수무책

그해 6월 2일부터 13일까지 《조선일보》와 KBS는 공동으로 10명의 여야 대선후보를 초청하여 TV토론회를 열었다. 그리고 6월 14일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전국 1550명을 대상으로 전화여론조사를 한 결과 김대중 25.4%, 이회창 16.5%, 박찬종 13.2%, 이인제 11.1%로 나왔다. 김대중 총재는 토론회 직전인 5월 29일 실시한 여론조사와 차이가 없는 반면, 이인제 지사는 4.4%에서 불과 보름 만에 6.7%p가 수직상승하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인제의 급속한 상승세는 경선 당일이었던 7월 21일까지 계속됐다.

당시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선출방식은 1차 투표에서 1위 득표자가 과반수를 얻지 못하면 결선투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민정계의 전폭적 지원을 등에 업은 이회창 후보는 1차 투표에서 투표수 1만2049표의 41.1%인 4955표를 얻어 1위를 했으나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바람에 1차 투표에서 이한동 후보를 8표 차로 이기고 2위를 차지한 이인제 후보와 결선투표를 하게 됐다. 결선투표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6022표(59.9%)를 얻어 4622표(40.1%)에 그친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 후보로 결정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회창 후보가 연말 대선에서 승리를 거머쥐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였고, 이인제 후보도 원래의 자리인 경기지사로 돌아가 도정(道政)에 전념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당내 경선기간 중, 이한동 후보가 제기했던 ‘이회창 후보 두 아들 병역면제 의혹’이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7월 26일 3성 장군 출신인 천용택 의원(새정치국민회의)이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이 당초 신체검사에서 갑종판정을 받았으나, 병역연기 후 4~7년이 지나 입대했을 시 장남은 15~20kg, 차남은 10~15kg씩 체중을 감량, 면제받았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 대목에서 이회창 후보는 ‘천추의 한’이 될 오판을 했다. 국민들은 이회창 후보가 ‘깨끗한 대쪽’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고 성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7월 28일 이회창 후보는 “두 아들의 병역면제는 적합했다”고 대응했다.

민심은 조석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만약 백 번을 양보해서 두 아들이 적법하게 병역면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의 일반적 정서와는 천양지차 동떨어진 것이다. 대법원 판사와 국무총리까지 지낸 지도급 인사가 두 아들을 잘 못 먹여서 군대도 가지 못하게 키웠다면 대통령이 될 소양이 없는 것이고, 만약 부정한 방법으로 군에서 뺐다면 처벌받아야 할 일이다. 더욱이 두 아들뿐 아니라 군 입대 대상인 친인척의 자제 10여 명 중 8명이 군 면제를 받았다는 뉴스를 접한 국민들의 마음은 급속히 식어갔다.

8월 28일 리서치 앤 리서치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에 시달리던 이회창 후보의 하락세는 확연했다. 이인제 31.7%, 김대중 25.2%, 이회창 15.2%의 충격적 결과였다.

이후 이인제 지사는 9월 13일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독자 출마의 길을 걸으며 10월 7일 ‘이인제 신당’ 발기인대회, 11월 4일 국민신당 창당을 거쳐 12월 18일 대선에 나섰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 이인제 후보는 493만 표(19.2%)를 얻었다. 김대중 후보는 1032만 표(40.3%)로 당선되어 헌정 50년 만에 처음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반면 이회창 후보는 993만 표(38.7%)로 39만 표(1.6%) 차이로 낙선했다.

2002년 노무현의 부상과 이회창의 추락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1997년과 2002년 모두 두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으로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낙마했다. 사진은 2002년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을 제기했던 김대업.

“대선이 100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이회창 후보와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제외하곤 대선후보 구도가 아직 오리무중.”

2002년 추석을 열흘 앞둔 9월 10일 한나라당 남경필 대변인의 논평이다. 1997년에 이어 재수(再修)로 대선에 도전하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일찌감치 당내경선을 끝내고 12월 19일 대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한 대세론을 앞세워 여당의 온갖 훼방 책동에도 불구하고 대선승리는 따놓은 당상으로 여겼다.

반면 당시 집권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노무현 후보를 선출했으나, 그해 6월의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면서 노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급락했고 급기야는 후보를 교체하느니 마느니 내홍(內訌)에 휩싸여 있었다.

2002년 한일 공동 월드컵대회에서 우리나라는 4강 신화를 이룩했다.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월드컵대회임에도 처음에는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어차피 남의 잔치를 우리가 애써 열어주어야 할 까닭이 무엇이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초반부터 세계적 강호들을 차례로 물리치면서 16강, 8강을 넘어 4강에 도전하자 전국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대한민국~”의 구호 아래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응원에 나섰고, 이런 문화적 충격은 국민들에게 ‘자발적 참여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각인되었다. 4강 위업을 달성하면서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대한축구협회 회장이던 정몽준 의원이다.

당시 이회창 후보는 가회동 고급빌라 3채를 전세 내어 아들딸과 함께 산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구설수에 시달리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며느리의 미국 원정출산 의혹이 불거지고 급기야 김대업의 병역비리(물론 나중에 허위로 밝혀져 김대업은 사법처리됐다)까지 이어져 이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눈에 띄게 떨어지는 분위기였다. 노무현 후보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만 해도 좋았던 분위기가 6월 13일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급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월드컵대회를 치르면서 한창 흥이 오른 국민들에게 이회창도 노무현도 그리 탐탁하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국민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정몽준 의원을 향했다.

2002년 대선 1년 전인 2001년 12월 12일부터 17일까지 한국기자협회는 한길리서치와 함께 전국의 신문, 방송, 통신사 기자 503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72.6%로 당선가능성 1위 후보로 나타났고, 새천년민주당 이인제 상임고문이 9.7%로 2위, 노무현 상임고문이 8.0%로 조사됐다. 김근태 상임고문과 한나라당의 박근혜 부총재는 각각 0.8%에 그쳤다. 한마디로 이회창 대세론 앞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그런 정치지형이었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절치부심하던 새천년민주당은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국민참여경선제도를 도입했다. 대성공이었다. 새천년민주당의 아성인 광주는 노무현을 선택했고, 당내에서 대세론을 형성했던 이인제 후보는 무너졌다. 무명에 가깝던 노무현은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13.1%p 차로 여유있게 따돌렸다.(《조선일보》-한국갤럽 공동조사, 4월 19일부터 24일까지 유권자 10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노무현 49.4%, 이회창 36.3%)

2002년 추석은 이회창-정몽준 양자구도

갑자기 좋아진 분위기에 도취된 노무현 후보는 6월 13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두 가지 악수(惡手)를 둔다. 불과 5년 전 IMF 환란위기를 초래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사저로 찾아간 것이다. 그것도 노 후보가 처음 정치를 시작할 1988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주었다는 ‘03시계’를 자랑스럽게 보이면서. 또 하나의 패착은 노 후보가 “만약 지방선거에서 부산·울산·경남 세 곳 중 단 한 곳에서도 광역단체장이 안 된다면 후보직을 사퇴하겠다”는 무모한 약속을 한 것이다.

5월 1일 MBC와 한국갤럽이 공동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한 것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1023명의 응답자 중 26%만이 ‘좋게 본다’고 대답했고, 57.9%의 응답자는 ‘좋지 않게 본다’고 대답했다.

6월 13일 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은 참패한다. 광주·전남·전북·제주 등 4곳의 광역단체장만을 배출했을 뿐이었다.

6월 15~16일 실시된 《중앙일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무현(36.3%)은 이회창(48.9%)과의 양자대결에서 13.6%p 차로 뒤진다. 월드컵대회가 폐막된 직후인 7월 6일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101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그 당시까지 출마여부를 밝히지 않았던 정몽준 의원을 포함한 다자대결에서 이회창(37.4%)-노무현(24.2%)-정몽준(21.9%)으로 노무현 후보의 위치가 점차 하락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몽준 의원은 장고에 들어갔다. 8월 16~17일 지인들과 함께 지리산 등반에 나서면서 조만간 최종결심을 하겠다고 밝혔다. 본격적인 대선출마 수순 밟기에 들어선 것이다.

8월 22일 KBS와 한국갤럽이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 이회창(31.3%)-정몽준(29.7%)-노무현(18.9%)으로 나타났다. 여권 내부에서 ‘정몽준과 노무현의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말이 좋아서 후보단일화지, 대선후보를 정몽준에게 양보하라는 압박이었다. 정몽준 의원은 9월 6일 자서전 《나의 도전 나의 열정》을 출간하며 사실상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했다. 그리고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짧은 추석연휴가 있었다.

추석연휴가 끝나는 9월 22일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1054명을 대상으로 긴급 조사한 결과 이회창(31.3%)-정몽준(30.8%)-노무현(16.8%)의 순위는 변하지 않았고, 이회창 대 정몽준의 대결구도로 굳어져 가는 분위기였다.

여권 내부에서 노무현 흔들기가 본격화되었다. 10월 4일에는 후보단일화협의회가 발족되어 노무현의 백기투항을 압박하고 들어왔다. 10월 16일 정몽준 의원이 국민통합21 발기인대회를 개최하면서 노무현 후보의 위치는 더더욱 흔들렸다.

10월 17일 YTN과 TNS가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 이회창(34%), 정몽준(31.1%), 노무현(18.1%) 순서였고, 10월 19일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공동으로 실시한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에서는 정몽준(51.4%), 노무현(32.7%)으로 정몽준의 대세론은 확고한 듯 보였다. 단일화 합의 후인 11월 22일 한국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누가 더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정몽준(39.9%)-노무현(37.0%)으로 여전히 정몽준이 우세했다.

노무현 후보 측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것은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였다. 당시 한국갤럽, 미디어리서치 등 국내 유수의 여론조사기관은 대통령 후보를 여론조사를 통해 선출하는 데 대해 무척 부담감을 느꼈던 것 같다. 11월 24일 리서치 앤 리서치와 월드리서치 두 곳만이 참여한 대선후보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은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누르고 단일 대선후보로 결정됐다.

후보단일화 직후인 11월 25일 한국갤럽이 조사한 결과는 노무현(43.5%)-이회창(37.0%)이었다. 12월 19일 대선 결과 노무현 후보는 1201만 표(48.9%)를 얻었고, 이회창 후보는 1144만 표(46.6%)로 또다시 고배를 마셔야 했다.

2007년 대선은 2005년 추석에 사실상 결판

2005년 9월 추석연휴에 완공을 앞둔 청계천을 찾은 시민들. 2007년 대선의 승패는 이때 갈렸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9월 18일 추석연휴가 끝난 직후인 10월 1일 청계천 통수(通水)식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이명박 서울시장과 함께 복원된 청계천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TV를 통해 생생하게 안방으로 전달됐다. 노무현 대통령의 뒤를 이어 징검다리를 밟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모습에는 자부심과 당당함이 엿보였다.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새로운 강자가 출현하는 순간이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시대에 속도전(速度戰)을 위해서 건설되었던 3·1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 복개 콘크리트를 뜯어내어, 청계천의 옛 물줄기를 복원하는 대역사에 방점을 찍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였다.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2002년 대선에서 대기업들로부터 차떼기로 불법선거자금을 받은 것이 동티가 난 것이다. 한나라당이 간판을 내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잔다르크같이 나타나 당을 구한 사람이 박근혜 의원이다. 중앙당사를 팔고 여의도 둔치에 천막당사를 세웠다. 전국을 돌며 백배사죄하고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하소연했다. 그 결과 한나라당은 기적같이 회생했다. 박근혜 대표는 한나라당의 심장이 됐다. 각종 선거는 박근혜의 지휘 아래 백전백승했다. 한나라당의 실질적 주인인 박근혜와 새로운 강자 이명박의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는 불가피했다.

노무현 정권은 우왕좌왕 표류했다. 2004년 “민주당을 찍어주면 한나라당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로 노골적으로 열린우리당을 지원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한 가운데 17대 총선이 치러졌다.

열린우리당은 단독 과반을 차지했으나, 노무현 정권의 아마추어적인 국정운영에 국민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마지막 반기(反旗)를 들고 자리에서 물러난 고건 전 국무총리의 인기가 치솟아 올랐다. 2005년 1월부터 시작된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의 정치인 정기지표조사에서 고건 전 총리는 확고한 차기 대통령 후보 지지도 1위(30.0%)였고, 그 다음이 이명박 시장(11.5%), 박근혜 대표(11.3%)의 순이었다. 2005년 7월에 있었던 2차 정치인 정기지표조사에서도 지지율 추이는 큰 변화가 없었다. 고건 전 총리(33.8%), 이명박 시장(15.9%), 박근혜 대표(14.4%)의 순이었다.

청계천은 이명박 시장을 청와대로 인도한 지름길이었다. 청계천 통수식이 있은 지 두 달 후에 실시한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의 3차 정치인 정기지표조사에서 고건(28%), 이명박(27.5%), 박근혜(17.3%)로 이명박 시장은 고건 전 총리의 1위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다. 해를 넘겨 2006년 2월에 《중앙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명박 시장은 23%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했고, 고건(21%)과 박근혜(18%)가 그 뒤를 쫓는 형국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北도 2006년 추석 직전 핵실험 예고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에서 일시적 조정국면이 있었다.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하면서 한나라당의 압승을 일구어낸 박근혜 대표에 대한 지지율이 일시 반등한 것이다.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 실시된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의 5차 조사에서는 고건(26.7%), 박근혜(24.4%), 이명박(22.8%)의 순으로 지지율이 나왔다.

고건의 고공행진과 박근혜의 반등은 거기까지였다. 2006년 7월 5일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했고 보수층을 중심으로 안보의식이 강화됐다. 한나라당의 지지기반인 보수층을 중심으로 ‘과연 남북대치 상황에서 여성 대통령이?’라는 회의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해 추석(10월 6일)을 앞두고 10월 3일 북한은 핵실험을 예고했다. 북한이 설마 핵실험을 할 수 있을까, 느슨했던 민심은 추석연휴를 거치며 10월 9일 실제로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자 급속하게 보수화되면서 이명박에게로 쏠렸다.

추석연휴 직전인 10월 2일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의 조사결과는 이명박(25.1%), 박근혜(20.5%), 고건(18.9%)의 지지율을 보였다.

추석연휴와 북한의 핵실험 충격을 거치며 연말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이명박 전 시장이 박근혜 전 대표와 고건 전 총리를 거의 더블스코어로 누르고 독보적인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12월 26~27일 양일에 걸쳐 2024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이명박(40.7%), 박근혜(19.3%), 고건(15.0%)의 순으로 나왔다. 비슷한 시기 유권자 15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MBC·코리아리서치의 차기 대통령 선호도 조사에서 이 전 시장은 45.6%를 기록하며 박 전 대표(19.7%)와 고 전 총리(14.4%)를 가볍게 눌렀다.

2007년에 접어들면서 고건 전 총리는 대선출마를 포기했고,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큰 이변 없이 이명박 대세론이 자리 잡았다. 8월 20일 이명박 전 시장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명박 후보는 선거인단의 현장투표와 여론조사를 합산한 16만3617표 중 8만4084표(49.56%)를 얻어 7만8632표(48.06%)를 얻은 박근혜 후보를 눌렀다.

한편 여권은 심각한 내홍에 시달리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상당수 의원이 탈당하여 신당 창당을 추진하는 등 도저히 이명박 후보의 적수가 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결국 이런 분위기는 그해 12월 19일 대선투표일까지 계속되었고, 이명박 후보는 1149만 표를 얻어 역대 최대 표차(531만 표)로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가볍게 누르고 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안철수, 2012년 추석민심 확인 후 대선출마 여부 결심할 듯

올해 대선일정을 보면 추석민심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 결정이 8월 20일에 이뤄진다.

새누리당 후보선출이 끝나기 무섭게 제1 야당인 민주통합당은 대선경선에 들어간다. 빠르면 9월 16일, 만약 그날 1위 득표자가 과반수를 득표하지 못했을 경우 일주일간의 결선투표 과정을 거쳐 9월 23일 일요일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가 결정된다. 그럴 경우 그 일주일 동안 국민들의 눈길은 민주통합당 1위와 2위 후보 간의 결선투표에 쏠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9월 28일 금요일부터 10월 3일 개천절까지 5박6일의 추석연휴에 접어든다.

현재로서 가장 강력한 야권주자인 안철수 원장은 여전히 최종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는 정말 영리하다. 마치 나비처럼 날아서 벌같이 쏘는 식으로 자기가 필요할 때 불쑥 한마디 던지고는 몸을 숨긴다. 바라보는 국민들이 오히려 몸이 달아서 빨리 입장을 밝히라고 안달하고 있다.

안철수는 추석민심의 향배를 예의주시할 것이다. 만약 민주통합당의 대통령 후보가 추석연휴를 지나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경우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선판에서 사라질 공산이 크다. 안 교수는 처음부터 자신이 사회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그냥 사라진다고 해서 약속을 저버린 사람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민주통합당 후보가 추석을 지나서도 별 힘을 못 쓴다면 야권은 안철수 교수를 대타(代打)로 옹립하려고 들 것이다. 안철수의 강력한 이미지와 민주통합당의 조직력이 합체한다면 새누리당으로서는 정말 버거운 상대와 싸우게 될 것이다.

더욱이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교수가 독자적으로는 박근혜의 적수가 아니지만, 만약 후보단일화를 했을 때는 승산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대대적인 ‘야권후보단일화를 통한 정권교체’의 시도가 있을 것이다. 이때 국민들의 시선은 당연히 그 방향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에게 10월은 트라우마가 있는 달이다. 1979년 10월 26일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는 물론이거니와,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은 박근혜의 꿈을 앗아가 버렸다. 2008년 이후 막강한 대세론에 안주하던 박근혜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도 지난해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다. 혹시나 했던 ‘안철수 바람’이 구체적 실체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안철수 교수의 양보로 5%도 채 되지 않는 지지율로 출발했던 박원순 변호사가 나경원 후보, 그것도 박근혜가 몸소 뛰면서 지원했던 후보를 상당히 큰 표 차로 눌렀다.

“오늘 불행은 잘못 보냈던 시간의 보복”

박근혜에게 또다시 10월의 망령(亡靈)이 스멀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 결정과정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시작됐고, 4·11총선 공천 관련 금품수수 등 온갖 잡음과 혼란의 와중에 자기들만의 잔치로 끝났다.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지도 못했고, 가슴 시린 감동을 선사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당내 경선임에도 상당수 현역의원과 당협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당직자들이 마치 소 닭 보듯 경선과정을 바라봤다. 박근혜 후보나 친박 입장에서 본다면 그냥 조금 ‘시끄러웠던 추대식’일 것이다. 하지만 12월 19일 대선은 전혀 새로운 국면이다.

“오늘 나의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냈던 시간의 보복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에서 퇴위당한 후 유배지에서 한 말이다.

새누리당과 박근혜는 전당대회라는 정말 좋은 기회를 무의미하게 소비해 버렸다.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다. 당초 비박 3주자들, 정몽준·이재오·김문수가 완전국민경선제를 요구하고 올림픽 기간을 피해서 경선을 하자고 했을 때 조금 양보하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박근혜의 불통(不通) 이미지도 많이 줄었을 테고 전당대회에 활기가 돌면서 핵심 지지자들을 전사(戰士)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7월 10일 박근혜 후보는 대선출마를 선언하면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박 후보의 절박한 심정은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절박함이 무리수를 촉발했다. 무리수는 또 다른 무리수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 하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오로지 승리를 향해 돌진하는 박근혜와 친박에게 추석민심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추석민심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 박근혜가 바꾸네”가 아니라 “모두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나라 - 박근혜가 바뀌었네”가 돼야 박근혜에게 희망이 있다.⊙

상단주메뉴

2012 大選 포커스

추석민심과 大選

박근혜, ‘10월의 트라우마’ 극복할 수 있을까?

1건

사이트 이용안내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