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의 생생정치토크] 정기국회 현안분석 : 월간조선

시인 박두진은 꽃을 순결의 상징으로 노래했다. 시인 김춘수는 불완전한 ‘나’를 완성시켜 줄 반려(伴侶)로 꽃을 형상화했다. 꽃은 아름다운 자태(姿態)와 향기로운 꿀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여 수정(受精)하고 열매를 맺는다. 야생동물이 먹고 배설한 열매의 씨앗은 새로운 땅에 뿌리를 박고 싹을 틔운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놓고 살피면 시인이 창조한 이미지와는 별개로, 종(種)을 번식시키고자 하는 치열함이 꽃의 본질임을 알 수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우리 역사의 길섶에 핀 한 떨기 꽃과 같은 존재이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이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정략을 앞세운 정치싸움에 시들게 하고 말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그 꽃이 과연 얼마나 풍요로운 열매를 맺어 우리를 살찌우고 튼튼한 씨앗으로 번영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이것이 우리의 관심이다. 이미 미국 상·하원 비준을 거쳐, 이제 대한민국 국회로 공이 넘어온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논해 보자.

역사의 아이러니, 노 정권의 FTA 추진

반미 성향이 강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의외로 한미 FTA를 적극 추진했다. 2007년 4월 3일 ‘한미 FTA 한국경제 워크숍’에서 인사말을 하는 노무현 대통령.

주지하다시피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노무현(이하 정치인은 존칭 생략) 정권의 작품이다. 반미정서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던 정권이 어떻게 중국이나 러시아를 제쳐 두고 미국과 FTA를 추진하게 되었을까. 정확히 취임 3년이 지난 2006년 2월 협상개시가 발표되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는 분명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에 우연은 없다. 노 정권은 왜 대담하게 미국과의 협상을 추진했을까.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는 일본의 전 총리로서 대표적 보수정객이다. 그는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어렵사리 30분간의 면담을 허락받은 그는 노무현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일본이나 한국은 좋든 싫든 적어도 앞으로 30년 동안 미국과 친하게 지내야 합니다.” 반미성향의 좌파정권 등장으로 미국과 일본을 우선했던 한국의 대외정책 기조가 급격하게 변화되지 않을까 우려하던 일본으로서는 대통령의 입을 통해 이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나카소네가 던진 화두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면담이 끝날 때쯤 노무현은 작심한 듯 결연하게 대꾸한다. “지금까지 한국은 해양세력과 손을 잡고 대외정책을 펴 왔지만, 앞으로는 대륙세력에 비중을 두게 될 것입니다.” 충격을 받은 나카소네는 이 일화(逸話)를 김종필 전 총리에게 말했고, 정권이 바뀐 다음 한국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노무현 정권은 거침없이 미국, 일본으로 상징되는 해양세력에 치중하던 대외정책을 중국, 러시아로 상징되는 대륙세력 중심으로 개편하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의도는 평양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그가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더 심화시킨 ‘평화번영정책’을 들고 나왔지만 평양이 싸늘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 정권 출범 이후 평양은 서울을 의식하지 않은 채 노골적으로 핵개발을 추진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대결을 심화시켰다. 평양과의 관계를 대폭 개선하고 이를 발판으로 대륙 중심의 대외정책을 추진하려 했던 노 정권으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대륙중심 대외정책의 발판이 되어 주리라 믿었던 평양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나아가 미국의 불신은 커져만 갔다. 노 정권으로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돌파할 전략이 필요했다. 평양에 대한 낭패감이 반감으로 돌변하면서 노무현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상을 개시한다는 충격적이고 대담한 전략을 채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협상이 절정에 이르던 2006년 10월 9일 평양은 마침내 제1차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노무현의 전략에 반격을 가했다.

또 하나의 역설

여기에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왜 평양은 반미세력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노무현 정권을 출범 초부터 대수롭지 않게 냉대했을까. 그 배경을 이해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다.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 직후 중요한 비밀을 인수한다.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 평양에 5억 달러의 돈을 준 사실이다. 풍문으로는 꾸준히 나돈 이야기지만, 보수세력들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비밀 중의 비밀을 인수한 노무현은 놀랍게도 스스로 이를 국민 앞에 공개하면서 김대중에게 퇴임 전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국민들은 충격에 빠지고 보수세력은 총공격에 나섰다. 곤경에 처한 김대중은 통치행위라고 강변했지만, 결국 그를 제외한 참모들은 감옥에 가야만 했다.

노무현이 김대중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대통령이 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그처럼 중요한 비밀을 왜 앞장서 공개하고 김대중을 궁지로 몰았을까. 독자 세력 없이 권력을 잡은 그로서는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김대중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시대를 열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이런 고민 가운데 때마침 이 엄청난 비밀을 인수하게 되었고, 이를 공개하면 김대중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중요한 한 가지를 계산에서 빠뜨리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5억 달러를 준 사람이 있으면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준 사람이 곤경에 빠지면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 비밀이 가까운 장래에 폭로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주고받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굳이 비밀에 부치지 않고 특별차관 등의 합법형태를 궁리했을 것이다. 평양의 김정일로서는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은 그렇다 치고, 자기를 신격화하는 북한 인민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게 되었다. 그 비밀을 폭로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와 비밀거래한 당사자의 후계자인 사실에 더 당혹하고 분노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러한 감정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남한과의 관계를 통해 현금조달을 기대하는 평양으로서는 노무현에게서 앞으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민노당이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을 배반한 것도 마찬가지

지난 10월 6일 서울 여의도에서 ‘한미FTA 국회비준 저지 전국 농어민 결의대회’ 참가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렇게 역설에 역설을 넘어 꽃망울을 맺게 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이번 정기국회에서 활짝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그러나 반대세력이 만만치 않다. 반대논리도 화려하다. 충분한 토론을 통해 질서 있게 결론에 이르면 좋겠지만, 폭력과 날치기라는 우리 정치의 고질이 재연될 개연성이 높다.

먼저 이 협정의 본질을 살펴보자.

다른 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과 같이 이 협정도 ‘시장의 확대’를 의미한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시장이다. 세계 최대 시장과 관세, 비관세 장벽을 낮추어 시장을 공유하게 된다. 그만큼 기회와 위험도 클 것이다. 또 하나는 이 협정이 ‘새로운 한미동맹 시대’의 이정표로서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 한미동맹은 군사동맹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군사보다 경제가 더 중요한 국가안보가 되는 시대이다. 우리가 미국과의 동맹을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키기를 원한다면 미국과의 시장공유를 확대시키는 것이 상책이다. 시장을 공유하는 나라가 경제위기에 빠졌을 때, 자기 나라 경제를 지키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손을 잡고 위기극복에 나서게 된다. 공통화폐로 시장을 공유하는 EU 국가들이 그리스의 부도를 막기 위해 나서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으로 ‘한미 군사동맹 시대’가 열렸다면, 2011년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한미 경제동맹 시대’가 열리게 된다. 예측불가능하게 터지는 국제 경제위기로부터 한미 경제동맹은 하나의 안전판 구실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왜 반대하는가.

민주노동당이 가장 극렬하게 이 협정 비준에 반대한다.

이 협정이 ‘시장확대’로서의 의미만을 갖고 있다면 반대의 강도는 그리 크지 않을지 모른다. 사실 민노당의 주요 지지기반은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다. 이 협정이 몰고 올 기회는 대부분 제조업에 있고, 위험은 농업과 일부 서비스업에 있다. 그러므로 민노당이 제조업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 이 협정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민노당이 농민도 지지기반으로 한다고 하지만, 한국의 농민은 서구의 농민과 처지가 다르다. 서구의 농민은 농업이 약화되면 100% 자기의 경제이익에 위협을 받는다. 그러나 한국의 농민은 도시의 노동자들과 아직은 미분화(未分化) 상태에 있다. 농민의 자녀, 형제자매 가운데 도시 노동자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농업에 일부 위협이 있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에게 큰 이익이 있다면 농민들이 그 위협을 감수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농업에 대한 위협을 최소화하는 대책을 강구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민노당은 미국이 아니라 칠레나 EU와의 자유무역협정에도 반대했고, 거슬러 올라가 다자간 협정인 WTO에도 극력 반대했다. 일반적으로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흐름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반대의 이유는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세계화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불안이 바탕에 깔려 있다. 특히 미국의 금융자본이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무장하여 급속하게 밀어붙이는 데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민노당은 미국 주도의 세계화를 공식적으로 반대하고 있어 어떤 자유무역협정도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니 앞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한미동맹’의 이정표인 미국과의 협정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세력이 미국과의 시장공유를 확대하는 협정을 배척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 모르지만, 민노당은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민주당의 자가당착

민주당은 완전히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협정을 만든 것은 민주당 바로 자신들이다. 동기가 어디에 있든, 자신들이 추진한 성과물을 놓고 반대에 나선다면 소가 웃을 일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대하고 나선다.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노무현의 분신을 자처하는 충남도지사, 인천시장 등 몇몇 젊은 사람들이 정론(正論)을 펴고 있어 다행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내놓고 민노당과의 정책연합을 추진하며 재재협상을 주장한다. 10개 사항에 대하여는 미국과의 재재협상을 하고, 두 개 사항에 대하여는 국내적 보완대책을 세울 것을 요구한다(‘10+2’). 이는 사실상 협정의 비준을 반대한다는 선언이다. 민주당 어떤 인사는 이 협정으로 우리 경제주권을 팔아먹었다고 주장하는데, 참으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당시 노 정권의 법무부장관이었다. 만일 이 협정이 우리 경제주권을 팔아먹는 것이라면, 그의 주장은 그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안에는 민노당과 노선을 같이하며 민노당과 아예 통합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민주당을 둘러싼 재야에는 아직도 미군철수와 동맹해체를 주장하는 반미세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중도개혁을 추구해 온 민주당이 왜 갑자기 그들의 볼모가 되어 바로 자신들이 집권하던 시절 만든 협정을 반대하는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 참으로 보기 민망하고 딱한 일이다.

모호한 집권당의 태도

지난 9월 16일 국회 외통위에서 강기갑 민노당 의원 등 야당의원들이 남경필 위원장에게 한미FTA 안 상정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집권당인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하여 정확히 어떤 입장인지 모호하다. 반대는 아닌 것 같은데 강력히 추진할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17대 국회에 제출되었던 비준동의안이 임기만료로 폐기된 것은 그렇다 치고, 18대 국회에 제출된 동의안을 지지부진 미루다가 미국 측 요구에 의해 추가협상 테이블에 끌려가고 말았다. 미국 상·하원에서 비준을 받고 우리 국회로 넘어오자 한나라당은 “이번 회기내 처리”를 공언하고 있지만 당내 복잡한 사정을 감안하면 확신을 하기 어렵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제기한 ‘10+2’ 안을 중심으로 의견 접근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이 시점에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나라당은 이 협정으로 인해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농민과 일부 서비스업 분야 종사자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미국 의회는 초고속으로 이 협정의 비준절차를 마쳤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의회와의 조율을 거쳐 이행법안을 제출했고, 상원과 하원 모두 10월 12일 이를 처리했다. 국익과 직결되는 안보·외교문제는 여야가 초당적으로 대처한다는 의회정치의 상식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은 상대 나라에 비해 비준절차가 늦는 것이 상례이다. 미국의 통상 주도권은 우리와 달리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구성의 하원에 있으며, 협상결과를 놓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의회가 우리 국회보다 서둘러 이행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국빈방문에 대한 예우 이전에 미국 경제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우리 국회가 대응할 차례다. 이 안건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해야 할 때, 최선은 좋은 결정을 하는 것이다. 차선은 나쁜 결정을 하는 것이고, 최악은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 결정도 하지 않고 또 미루면 이는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차라리 부결시키는 것보다 못한 일이다. 우리는 더 이상 때를 놓치지 말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국회의원 전원이 1주일만 토론하자

우리 정치의 가장 큰 후진성은 토론을 거부하고 몸싸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국 의회가 클린턴 대통령 탄핵과 건강보험 개혁법안을 처리할 때 깊은 감동을 받았다. 두 안건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운명이 갈리는 중대 사안이었고, 결과에 따라 미국 정치지형이 바뀌는 일대사건(一大事件)이었다. 자연히 미국 국민의 여론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미국 의회는 몇날 며칠이고 토론을 계속했다. 의원들이 20~30분씩 찬성과 반대 토론을 하는 모습이 일일이 생중계됐다. 수많은 의원이 토론에 참여하여 분명히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국민의 여론과 의회의 토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질서 있게 표결에 들어갔다. 시간을 정해 놓고 진행된 표결의 찬반(贊反) 숫자가 순간순간 생중계로 발표됐다. 두 안건 모두 당론이 정해져 있었지만 국민 여론에 따라 반대투표를 한 의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결론에 모두 깨끗이 승복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당론에 불복한 의원들에게 어떤 비난이 쏟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왜 우리 국회는 토론을 두려워할까. 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놓고 의원들이 모두 참여하여 20분씩 토론을 한다 해도 1주일이면 충분하다. 국회 토론을 지켜보며 국민의 건강한 여론이 형성되고, 의원들은 당론, 자기의 소신, 국민 여론을 종합해 책임 있는 결정을 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면 우리 정치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직도 몸싸움과 극단적 수단으로 의회주의를 마비시키려는 유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각성시킬 방도를 찾아야 한다. 아무래도 선거를 통한 국민의 힘밖에는 다른 수단이 없어 보인다.

시장은 끊임없이 확대되어 왔다. 어떤 역사학자는 인류역사를 ‘자유 확대의 역사’라고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시장 확대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이 시장의 양적·질적 확대를 이끌었다면, 공간의 확대는 전쟁과 식민지배를 거쳐 지금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협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협정에는 WTO 같은 다자간 협정이 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같은 두 나라 사이의 FTA가 있다. 또 일정 지역 안에 있는 나라들 사이에 블록을 형성하기도 한다. 유럽 여러 나라들이 EEC → EC를 거쳐 EU로 블록을 확대 강화해 나간 것이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이 시장 확대의 흐름에서 떨어져 외톨이가 된다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구한말 산업화한 서구 나라들이 아시아로 몰려 왔을 때, 조선과 중국은 쇄국(鎖國)을 고집했고 일본은 개화(開化)를 선택했다. 그 선택이 20세기 세 나라의 운명을 결정했다. 굳이 과거로 갈 것도 없이 탈냉전 이후 개방·개혁을 거부한 북한이 지금 어떤 운명을 맞고 있는지 우리는 생생히 보고 있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은 지혜 이전에 의무라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장의 확대, 이른바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인류사회의 흐름이라면 우리는 이에 저항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흐름을 선도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다.

반대론자들은 미국, 특히 미국 금융자본의 탐욕이 세계화의 주범이므로 이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확대, 통합하려는 흐름의 본질은 디지털 혁명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진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특히 정보, 통신, 교통 분야의 혁명적 변화를 이루면서 인류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한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국가들이 더 자유롭고 더 넓은 활동공간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되었다. 산업사회, 산업문명을 밀어내고 바야흐로 지식사회, 지식문명의 아침이 밝아 온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 미국의 탐욕어린 금융자본이 이 변화의 전선(前線)에 서 있다고 하여 이들이 이 같은 혁명적 변화를 이끄는 본질적 힘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오류(誤謬)이다.

시장확대로 자본주의 문제점 풀 수 있어

우리는 산업화 과정 이래 끊임없이 개방의 길을 선택했다. 매판자본으로 나라가 망하고, WTO로 농촌이 붕괴한다는 공포를 감내하며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더 큰 시련이 우리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실업, 특히 청년실업이 폭발점을 향해 치닫는다. 벌어지는 빈부격차가 중산층을 붕괴시킨다. 급속한 저출산, 고령화가 미래를 불안케 한다.

이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고 새 지평을 여는 전략은 무엇일까. 시장을 넓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소득을 창출하는 길 이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 혁신적인 기술의 진보로 질적·양적 시장확대를 도모함과 동시에 공간적인 시장확대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세계 최대시장인 미국과 서로 간에 시장을 확대하는 또 하나의 개방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전략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물론 이익과 함께 고통을, 기회와 함께 위험을 가져다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지혜롭게 고통과 위험을 최소화하고 이익과 기회를 극대화하느냐에 따라 이 협정의 열매는 그만큼 더 달콤하고 풍요로울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앞으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주요 나라들과 시장을 확대해 나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며, 나아가 한반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는 통일에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실업, 빈부격차, 노령화라는 벅찬 과제도 그 시장확대 과정에서 풀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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