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軍의 웅기·나진·청진 해방 전투에 참여한 조선인은 나 하나… 1945년 9월19일 入北한 金日成이 내게 한 첫마디는「김성주입니다」 였다』
20세 때 카자흐로 강제이주, 소련軍으로 對日戰 치러, 문예총 副위원장, 문화선전성 제1副相 등 역임
20세 때 카자흐로 강제이주, 소련軍으로 對日戰 치러, 문예총 副위원장, 문화선전성 제1副相 등 역임
파란의 한 세기를 살다
올해 90세인 그의 삶은 기구했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新韓村(신한촌)에서 태어났다. 어린 그에게 安重根(안중근) 義士(의사)의 이야기를 해주며 抗日(항일)의식을 길러 주던 아버지는 그가 스무 살이던 1937년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인민의 敵(적)」으로 몰려 총살됐다.
1937년 추수를 앞둔 가을 韓人(한인)들은 짐짝처럼 화물열차에 태워져 수만리 밖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됐다. 不毛(불모)의 땅으로 향하는 화물열차 안에서 그는 친구들을 부둥켜안고 巴人 金東煥(파인 김동환) 詩(시)를 읊었다.
<벽은 말할 줄 모르고
나는 할 말을 못 하니
종일 두 벙어리
마주 앉았으나
죽었음인가 살았음인가?!
하늘과 땅도 이렇게 있다간
소낙도 울고 벼락도 치거늘
때만 오면 때만 오면 하고
나는 다만 빈 주먹만
쥐었다 폈다…> (「손톱으로 새긴 노래」)
1945년 8월, 그는 소련 해군 陸戰隊(육전대·해병대) 대원으로 북한에 상륙했다. 북한에 진주하는 소련군의 최선봉이었다.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웅기·나진·청진을 해방시키고 났을 때, 그의 부대원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한 달 후, 그는 상부의 명령으로 귀국하는 「金日成 장군」을 영접했다. 「金日成 장군」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그는 30代 초반의 나이에 차관 자리까지 올랐다. 여기서 그는 洪命熹(홍명희)·李泰俊(이태준)·崔承喜(최승희)·金順男(김순남) 등 내로라하는 북한의 문화예술인들과 사귈 수 있었다.
북한 땅을 밟은 지 12년 후, 金日成의 소련파 숙청에 내몰린 그는 다시 추방자가 되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갔다. 그는 여기서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소련제국의 붕괴를 지켜보았고, 金日成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鄭尙進, 정율, 정 유리 다닐로비치
그의 이름은 鄭尙進(정상진). 러시아 이름은 정 유리 다닐로비치, 북한에서의 이름은 鄭律(정율)이었다. 올해 나이 90세인 그를 만난 것은 지난 6월 말 서울 이태원 해밀턴 호텔에서였다. 그는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 학술대회 및 고려인 예술가 초청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그를 만난 것은 6·25 당시 북한 문화선전성 제1副相(부상·차관)이던 그의 입을 통해 拉北(납북)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편집장으로부터 그를 만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90세 노인을 인터뷰하라니, 골치 아프게 됐다」고 생각했다. 말귀가 어둡고, 옛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 희미한 목소리로 重言復言(중언부언)하는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鄭尙進 옹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 깜짝 놀랐다. 키가 큰 그는 허리가 약간 굽었지만 건강해 보였다. 말은 또박또박했고, 논리정연했다. 기억력이 좋았다. 아무리 높게 보아도 70代 초반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인터뷰 자리에는 鄭尙進 옹을 초청한 우정권 단국大 교수, 한춘섭 성남문화원장이 함께 했다. 時調詩人(시조시인)인 韓원장은 鄭尙進 옹에게 越北(월북) 시조시인인 趙雲(조운)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찾아왔다.
韓원장이 『시조시인 조운 선생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鄭옹은 『잘 알고 있습니다.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했다.
韓원장이 『조운 선생은 한국에서는 거의 잊혀졌지만, 월북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렸을 것』이라고 말하자, 鄭옹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지금도 그분이 1급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을 통해 처음으로 시조를 접했는데, 참 좋았습니다. 자주 찾아 뵙고 시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조를 봉건잔재쯤으로 여기는 북한의 분위기 속에서 그분은 늘 「시조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없다」고 서운해하셨죠. 그분은 북한 유일의 시조시인이었습니다』
韓원장은 鄭옹에게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문학인들과 시조 문학 교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鄭옹의 대답은 쌀쌀맞다 싶을 정도로 단호했다.
『그건 꿈입니다. 허웅배(허진) 선생이 소련 시절 시조시집을 낸 적이 있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후 고려인 사회에서 시조문학은 맥이 끊겼습니다. 우리말로 문학작품을 창작하고 감상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거의 사라진 마당에 시조를 전파하고 교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鄭옹의 말 속에는 슬픔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잊혀져 가는 언어」로, 결국은 자손들로부터 「잊혀질」 詩作(시작)을 하고 있는 「잊혀진 세대」의 悲哀(비애)가…. 그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일생을 정리해 보았다.
共産主義를 제대로 이해 못 한 李東輝
鄭尙進이 태어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新韓村은 러시아로 건너간 조선인들의 개척촌이었다. 舊韓末(구한말) 헤이그 밀사 가운데 한 분이었던 李相卨(이상설) 선생, 上海(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李東輝(이동휘) 선생 등이 이곳 신한촌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함북 명천 출신으로 韓日합방 직후 연해주로 건너온 아버지 정치문은 민족의식이 강했다. 鄭尙進의 회고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는 安重根 義士 얘기를 해주시면서 「너는 일본 놈들과 싸울 때가 올 것이다. 그놈들은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다. 그놈들과 싸워 이겨야 조선 땅에 발을 놓기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러시아학교에 입학시키자 아버지는 「일생 러시아에서 살 작정이오? 이곳은 우리에겐 임시 거처지에 불과해! 조선은 곧 해방되고 말 거요」 하면서 크게 화를 냈습니다. 결국 학교까지 찾아와 저를 끌어내 조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3·1절 기념식 때면 봉오동 전투의 영웅 洪範圖(홍범도), 上海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李東輝(이동휘) 등 抗日 독립투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소년단 단장이던 어린 鄭尙進은 그들을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李東輝에 대한 회고다.
『李東輝 선생은 공산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레닌이 제국주의 타도와 被(피)압박 민족 해방을 외치니까, 그 구호를 믿고 공산주의를 통해 조선을 해방시키겠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죠. 李東輝 선생은 1935년에 돌아가셨는데, 만일 1937년까지 생존해 계셨다면 스탈린에 의해 처형됐을 것입니다』
新韓村의 향학열
아버지는 漢學(한학)에 밝았다. 다섯 살 때부터 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고, 「삼국지」·「수호지」·「홍루몽」·「서유기」 등을 이야기해 주었다. 鄭尙進은 신한촌 조선인들의 향학열을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帝政(제정) 러시아 말기에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위해 연해주에 왔던 작가 겸 철도기사 가린 미하일로비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조선인 마을에서 저녁 때 노래 비슷한 단조로운 소리가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통역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무슨 기분으로 저녁이면 저렇게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느냐?」고 물었답니다. 통역이 「저건 노랫소리가 아니라, 서당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소리다」라고 하자, 그는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半기아 상태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저렇게 열심히 공부에 열중하는 민족은 아마 세상에 조선인들뿐일 것이다. 지식에 대한 이런 指向(지향)은 진실로 너무나 理想的(이상적)이다」』
연해주로 건너오는 조선 사람들은 조선어 잡지나 소설책, 시집들을 짊어지고 들어와 학교 등에 나누어 주었다. 소년 鄭尙進은 1920~1930년대에 나온 「삼천리」 잡지는 거의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이런 잡지나 책들을 통해 그는 金東仁(김동인)·李光洙(이광수)·金東煥(김동환)·李相和(이상화)·崔南善(최남선) 등과 만날 수 있었다.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해 간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鄭尙進은 巴人 金東煥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 감회에 젖어 그가 지은 최초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을 읊조렸다.
『「아아,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 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무사히 건넜을까」, 이건 「위대한 초조감」입니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될 때, 화물열차 안에서 친구들을 끌어안고 金東煥 선생의 「손톱으로 새긴 노래」를 읊었습니다』
1928년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서 활동하던 소설가 抱石 趙明熙(포석 조명희)가 연해주로 망명해 왔다. 그는 소왕령(우수리스크) 유성촌이라는 마을에 자리 잡고 2세 교육과 문학 활동에 힘썼다. 신문 「선봉」, 잡지 「로력자의 고향」 등을 발간했다.
1930년 趙明熙가 지은 詩 「짓밟힌 고려」는 연해주 일대에 사는 고려인 청년들의 피를 끓게 했다. 많은 고려인 청년들이 趙明熙의 영향을 받아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사범大 노문학부에 다니던 鄭尙進도 그중 하나였다.
이들은 가난하고 고된 현실 속에서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사회주의 理想鄕(이상향)」과 「해방된 조선」에 대한 꿈에….
1937년은 그 꿈이 박살난 해였다. 그해 8월부터 소련 NKVD(내무인민위원부·KGB의 前身)는 연해주 조선인 인텔리들을 무차별 체포, 처형하기 시작했다. 한 달 뒤에 시작될 강제이주의 事前(사전) 포석이었다. 소련작가동맹의 유일한 조선인 문학가이면서 소련 국적 취득을 한사코 거부했던 소설가 趙明熙도, 어린 鄭尙進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워 줬던 아버지 정치문도 체포돼 총살당했다. 조선인 인텔리 2800여 명이 재판 없이 처형됐다.
그가 아버지의 처형 사실을 확인한 것은 1955년 북한에 있을 때였다. 부친의 묘소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NKVD가 처형자들을 한꺼번에 묻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카자흐人들의 친절
1937년 9월25일, 연해주 페르바야 레츠카驛(역)에서 조선인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연해주 거주 고려인(러시아 시절부터 그곳에 거주하는 韓人들을 일컫던 말)들이 日帝와 내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선사범大, 조선사범전문학교, 사범노동학원, 사범기술학교, 4개의 고급중학교(고등학교), 8개 초급중학교(중학교), 23개 인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 교직원 및 그 가족들이 첫 이주대상자였다. 조선극장, 조선어라디오방송국, 선봉신문사 등 문화기관 직원과 가족들도 함께였다.
이들은 열차 32량에 가축처럼 실려 한 달 뒤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 도착했다. 鄭옹은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그들보다 나중에 연해주를 출발한 열차에 탄 사람들은 열차사고와 추위 등으로 수없이 죽었는데, 그들이 탄 열차에서는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던져진 땅은 불모의 땅이었다. 鄭尙進의 회고다.
『열차에서 내린 여자들은 주저앉아 통곡했어요.「죽으라고, 우리보고 죽으라고 이런 땅으로 보낸 거야」라면서….
그때 나귀에 빵을 가득 싣고서 카자흐 여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름 모를 민족이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빵을 구워서 식을세라 모포에 덮어 가지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 빵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조선 어머니들은 다시 통곡했고, 카자흐 아낙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카자흐 사람들, 참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들은 다 죽었을 겁니다. 우리 민족은 그 고마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주 첫해에 추위와 굶주림, 풍토병으로 2만~3만 명이 죽었다. 청년 鄭尙進은 잃어버린 친척들을 찾으러 고려인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매일같이 장례가 치러지는 것을 보았다.
『소련은 1937년에 망했다』
鄭尙進은 아버지의 처형과 강제이주를 겪으면서, 공산주의에 대해 품었던 열정이 식었다.
『아버지가 처형되기 전까지 저는 공산주의를 무한히 믿었습니다. 하지만 강제이주와 학살을 보면서 「이런 건 공산주의라고 할 수 없다. 소련은 언젠가 망할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 인텔리들을 총살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 꿈도 총살해 버린 것입니다.
레닌은 소련 내 少數(소수)민족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민족 간 화합을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스탈린은 민족들을 이간시키고, 탄압하고, 학살했습니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련은 1991년에 망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소수민족 강제이주를 감행했던 1937년에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참변 속에서 고려인 사회는 서서히 재건되기 시작했다. 농부들은 황망 중에 챙겨 온 씨앗들을 뿌렸다.
연해주에 있던 학교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민족교육을 할 수는 없었다. 조선사범大는 크질오르다사범大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의 친구로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가 활동하다가 6·25 때 죽은 詩人 조기천은 어문학부에서 세계문학을 강의했다. 1940년 청년 鄭尙進은 크질오르다사범大 노문학부를 졸업했다.
조선극장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市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1942년 봄 조선극장에서는 태장춘 각본의 연극 「洪範圖」를 공연했다. 당시 봉오동 전투의 영웅 洪範圖 장군은 조선극장의 수위로 일하고 있었다. 조선극장이나 언론사 등에서 일하던 고려인 청년들이 老장군을 위해 만들어 준 자리였다.
연극이 막을 올리던 날, 청년 鄭尙進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작가 김기철과 함께 洪範圖 장군 바로 뒷줄에서 연극을 관람했다.
『연극이 끝난 후 배우들은 객석으로 내려와 洪範圖 장군의 손을 잡고 「장군님, 연극이 어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팔십이 넘은 장군님은 「너희들이 나를 너무 추켰구나!」 하시더니, 웃으면서 「어쨌든 고맙다」 하시더군요』
입당, 그리고 입대
1942년 鄭尙進은 공산당에 입당했다.
『지역당 서기가 「동무는 많이 배웠고 사상도 투철한데 왜 당원이 되지 않소?」라며 입당을 권유했습니다.
저는 당서기에게, 「아버지가 인민의 적인데, 어떻게 내가 당원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소련헌법은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연루시키지 않소. 동무는 자격이 충분하므로 입당하시오」 하더군요』
1941년 청년 鄭尙進은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을 상대로 하는 신문 「레닌기치」에 詩를 발표한 데 이어, 「시인과 현실」, 「로멘찌즘에 대하여」 등의 평론을 발표했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에게 나치 독일과의 전쟁은 그 동맹국인 일본과의 聖戰(성전)을 의미했다. 鄭尙進은 수차 군사동원부를 찾아가 자원입대하려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추방당한 2등 시민은 군대에 갈 권리조차 없었다.
1944년 8월 鄭尙進은 우연히 태평양 함대 정보처에서 고려인 병사들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다시 군사동원부를 찾아가 태평양함대 정보처 복무를 자원했다. 이듬해 3월 그는 태평양함대 정보처 직속 해군 육전대로 편입됐다.
病中(병중)이던 어머니는 戰線(전선)으로 아들을 보내며 『아버지가 늘 일본 놈들과 싸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더니, 네가 이렇게 싸우러 나가게 됐구나. 나는 너의 길을 막지 못하겠다』며 울었다.
청진 전투
1945년 8월9일,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對日(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라디오로 방송되는 몰로토프 外相(외상)의 성명을 들으며 鄭尙進은 옆에 있던 병사를 끌어안았다. 이날 이후 이틀 동안 소련 폭격기들이 북한의 웅기·나진·청진·원산을 폭격했다. 태평양함대 소속 군함들은 포격을 가했다.
8월11일 아침, 鄭尙進은 60명의 육전대원들과 함께 6척의 어뢰정에 분승해 웅기항을 향해 출동했다. 지휘관 레오노프 대위는 『자네 조국은 해방되면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며 鄭尙進을 격려했다.
鄭尙進의 부대는 웅기에 無血(무혈)입성했다. 피란 갔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鄭尙進은 그들에게 달려가며 『여러분은 오늘 이 순간부터 해방된 땅의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들은 『선생님, 아이구! 조선 분이시구먼』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도 눈물을 흘렸다.
8월12일 나진항 진주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소련군의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항만과 선박들이 불타고 있었다. 술과 안주를 들고 해방군을 환영하러 모여 든 주민들에게 레오노프 대위가 일장 연설을 했다. 鄭尙進이 통역했다.
『우리는 여러분을 日帝로부터 해방시켰을 뿐, 어떤 나라를 세울지는 조선인민들의 意思(의사)에 달렸습니다. 해방된 여러분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나 鄭尙進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정말 소련군이 공언한 대로 조선이 자유로운 나라가 될 줄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 소련 점령군의 정책은 조선 인민들에게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소련은 反인민적 「붉은 식민지」 정책으로 일본 식민 통치자들보다 더 무서운 참극을 전체 한반도 인민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는 북한의 비참한 현실이 웅변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일단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던 鄭尙進의 부대는 8월13~18일 벌어진 청진 전투에 참가했다. 60명의 소련 육전대원들이 청진항에 상륙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남사단 예하 일본군 1개 연대 병력이었다.
육전대의 임무는 敵情(적정)을 파악해 本隊(본대)에 알리는 전투정찰이었다. 포탄이 날아오고 총탄이 쏟아졌다. 전투가 잠시 잠잠해지자 鄭尙進은 우울해졌다. 소년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抗日정신을 물려받았고, 李光洙·金東煥·李相和 등의 작품을 통해 祖國愛(조국애)를 길러 왔던 그로서는 「조국해방전쟁」에 참여한 조선인이 자기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조선에는 이렇게도 투사가 없다는 말인가?」
8월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청진 전투는 계속됐다. 전투는 8월18일에서야 끝났다. 당초 60명이던 부대원은 31명으로 줄어 있었다.
청진형무소 정치犯 석방
레오노프 대위는 부대內의 유일한 조선인인 그에게 청진형무소의 정치범들을 석방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레오노프 대위, 소련군 25군단 정치부 장교와 함께 차를 타고 청진형무소로 간 그는 간수로부터 형무소 열쇠를 넘겨받아 첫 번째 감방의 문을 열었다. 정치범들이 「만세」를 부르며 쏟아져 나왔다.
이로써 그의 「조선해방전쟁」은 끝났다. 그때 그의 계급은 특무상사였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金日成이 창건한 조선인민혁명군 예하 오백룡 부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웅기를 해방시켰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처음으로 해방시킨 도시라는 의미에서 웅기를 「선봉」으로 개칭했다. 鄭尙進은 이러한 북한의 주장을 단호하게 일축했다.
『나는 웅기는 물론, 나진·청진에서 단 한 사람의 인민혁명군도, 항일투사도, 혁명가도 戰場(전장)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전투에 참전한 조선인은 나 한 사람뿐이었소. 우리 부대가 피를 흘리며 청진에서 싸우고 있을 때, 金日成이나 오백룡은 하바로프스크 인근 왜트스코예 마을에 주둔한 소련군 88정찰여단 막사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소련군 88여단 예하 일개 조선인 부대가 하루아침에 조선인민혁명군이 돼서 8월9일부터 만주 일대와 북한 웅기·나진·청진·어대진을 해방시킨단 말입니까? 아무리 역사와 백성을 속이려 해도 거짓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내가 북한에 있던 1950년대 중반까지 金日成은 「내가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가 북한을 해방시켰다」는 얘기는 감히 꺼내지 못했습니다』
入北하는 金日成을 영접
鄭尙進은 戰場에서 만나지 못했던 金日成을 그해 9월19일 원산항에서 만났다. 그날은 마침 추석이었다. 당시 그는 원산시 교육부 차장으로 鄭律(律이라는 이름은 그의 러시아 이름 「유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회고다.
『그 전날 소련군 정치부에서 부르더니, 「내일 金日成 장군이 들어온다. 나가서 영접하도록 하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푸가초프號가 원산항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원산市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태성수, 원산시당 조직부장 한일무, 市 상공부장 박병섭 등과 함께 마중을 나갔습니다. 소련군사령부 측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련군 군복 가슴에 赤旗(적기) 훈장을 단 젊은 대위가 내리면서 「김성주입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아침식사 뒤 원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추석놀이를 참관한 후 저녁에 기차편으로 평양으로 갔습니다.
소련군 정치부로 돌아가 「일행 중에 金日成 장군은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김성주 대위가 바로 金日成 장군이오」라고 하더군요.
전설적인 抗日 영웅 金日成 장군이라면 풍채가 당당하고 연륜이 있는 분일 줄 알았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허웅배(허진)가 은밀히 「진짜 金日成 장군」이 누구인지 수소문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金日成 장군」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후일 그는 문화선전성 제1副相으로 있으면서 업무상 金日成과 자주 만났지만, 인간적인 교류는 없었다. 그의 회고다.
『許貞淑(허정숙) 문화선전상이 자주 앓아서, 제1副相이던 제가 그를 대신해서 金日成을 자주 만났습니다. 공무상 만난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그를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鄭律(鄭尙進)이 일을 잘한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는 얘기는 남을 통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설가 韓雪野는 범죄작가』
1945년 9월, 원산시 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위원장인 詩人 박경수가 그를 찾아왔다. 박경수를 통해 그는 당시 원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具常(구상) 시인 등을 만났다.
1946년 초 박경수는 그에게 해방 경축 시집을 내자고 제안했다. 박경수가 사업추진과 편집을 맡고, 鄭尙進이 발행책임을 맡았다. 그는 박경수의 부탁으로 웅기 전투를 회고한 「웅기항! 눈물에 젖은 나의 발자취」라는 詩를 게재했다.
몇 달 후 시집이 나왔다. 시집의 제목은 「凝香(응향)」이었다. 모두들 만족스러워했다. 具常 시인은 「시와 삶의 노트」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북한의 정황 속에서는 가장 문화적 생산을 한 셈이어서(그 시집의 외장만으로 치면 현재 서울 출판계에 내놓아도 호화로운 축에 든다) 동인들 중에는 서창훈과 같은 공산당 간부도 있었고 鄭律(鄭尙進)이라는 우리 2세 소련군 장교도 있었으나 이 시집의 출간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던 판인데 얼마 안 가서 날벼락이 떨어졌던 것이다>
「날벼락」의 원인은 바로 具常 시인이 쓴 「黎明圖(여명도)」라는 詩였다. 평양에서 검열원들이 들이닥쳤다. 당시 북한 문단의 거물이었던 김사량·송영 등 네 명이었다. 송영 등은 이 詩가 『북조선 현실에 대한 회의적·공상적·퇴폐적·도피적·절망적·반동적 경향을 가졌다』고 비판했다. 시집 「응향」에 대해서는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自我(자아)비판에 직면한 具常 시인은 越南(월남)했다. 鄭尙進은 1989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具常 시인과 재회했다.
1946년 7월 鄭尙進은 함남 인민위원회 교육부 차장으로 임명됐다. 근무지는 함흥이었다. 여기서 그는 작가 韓雪野(한설야)를 만났다.
『함께 점심식사를 했는데, 첫인상은 좋았습니다.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945년 12월경인 것 같은데 그가 쓴 金日成에 관한 세 편의 논문을 신문에서 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이 논설들을 읽으면서 그가 金日成 장군을 잘 아는 분이라고 생각했고, 만나서 金日成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韓雪野는 金日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군요. 「이건 아부, 아첨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했습니다.
金日成에 대해 쓴 논설과 전기 등이 金日成의 눈에 들어 韓雪野는 나중에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재능이 뛰어난 李泰俊·林和(임화)·金南天(김남천) 같은 문인들이나 작곡가 金順男 등을 시기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1950~1960년대에 걸쳐 북한 문화계에서 가장 막강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이 숙청당해 비참하게 죽는 것을 방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金東煥이나 李光洙 선생 같은 拉北 문인들을 충분히 구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구명하러 애쓰기는커녕, 그들에 대한 비판에 앞장섰습니다.
나중에 그는 숙청당해 원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고 하더군요. 이는 응당한 천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희생시킨 「범죄작가」로 기록될 것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鄭尙進이 나쁘게 말한 사람은 韓雪野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韓雪野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미움과 경멸이 느껴졌다)
1947년 봄, 鄭尙進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문예총 위원장은 韓雪野였다. 무용가 崔承喜의 남편 안막이 鄭尙進과 함께 문예총 부위원장을 맡았다.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간부부에 가서 임명을 받고 난 후 그는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朴昌玉(박창옥)이었다. 그는 鄭尙進의 조선사범大 2년 선배였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州 치일리 구역 교육부장으로 일하던 그는 북한에 들어와 요직 중의 요직인 선전선동부장을 맡고 있었다. 朴昌玉은 명석하고 추진력이 강했지만 경솔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중에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정치국원·부수상을 지내다가 숙청, 처형됐다.
고려인 428명이 각 부처 副책임자 맡아
당시에는 어딜 가나 고려인(소련 출신 조선인)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鄭尙進의 회고다.
『소련 軍政(군정) 당국은 고려인 428명을 데려와 각 부처의 제1副책임자 자리에 앉혔습니다. 어느 부서나 그 부서의 2인자는 반드시 고려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일을 반드시 소련 軍政 당국에 보고해야 했고, 소련 軍政은 이들을 통해 북한을 통제했습니다.
북한 주둔 소련군 정치위원 슈티코프 대장은 우리 고려인들을 모아 놓고 「여러분들의 역할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1개 사단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金日成은 「동지들의 도움이 없으면 내가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해방 당시 일개 소련 해군 육전대 특무상사에 불과했던 鄭尙進은 문예총 부위원장, 김일성종합大 노문학부장, 문화선전성 제1副相 등을 거치면서 북한 문화예술계의 실력자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에서 문과교육을 받았고, 문예에 관심이 깊어 일찍부터 카프문학 등 조선의 현대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 발탁의 이유인 것 같습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 諸(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가 열렸다. 흔히 말하는 「남북협상」이었다. 그는 金九(김구)와 洪命熹를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한눈에 金九는 「정치가」, 洪命熹는 「애국문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북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다. 金九 일행은 서울로 출발하기 전 기자회견을 했다. 鄭尙進은 그 자리에 있었다.
金九의 오판
『한 기자가 「북조선에 대한 인상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金九 선생은 「親日派(친일파) 청산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더군요. 기자가 다시 「북조선에서 사업하면 어떻겠느냐?」고 묻자 金九 선생은 「北은 제대로 되어 가는 것 같은데 南은 그렇지 못하다. 거기에 내가 할 일이 있다. 더 많은 백성들이 살고 있는 南에 가서 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金九와 함께 평양으로 올라갔던 洪命熹는 北에 남았다. 후일 洪命熹는 鄭尙進에게 자신이 북한에 남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남조선에서 親日派가 날뛰는 것이 보기 싫었습니다. 반면에 북조선에서는 親日派들을 청산하고 일련의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남조선의 李承晩은 미국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공부했지만, 金日成 장군은 총을 잡고 만주벌에서 항일투쟁을 했습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냐, 공산주의냐」가 아니라, 「애국자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북조선을 택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洪命熹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洪命熹는 북한 초대 내각의 부수상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도 아닌 양반계급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崔南善·李光洙와 더불어 조선 3才(재)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던 洪命熹 선생이 북한 정부의 부수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남한의 문화예술인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작곡가 金順男, 영화배우 문예봉, 만담가 신불출 등이 월북한 것은 洪命熹 선생의 영향이 컸습니다. 참 어질고 착한 분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洪命熹는 명목상으로는 교육과 문화 부문을 총괄하는 부수상이었지만, 實權(실권)은 없었다. 문화선전성의 관리들이나 문화예술단체 관계자들은 洪命熹를 찾지 않았다. 북한에 들어온 후 洪命熹의 「임꺽정」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鄭尙進은 1952년 문화선전성 제1副相(차관)이 되자, 洪命熹 부수상실을 자주 찾았다.
『洪命熹 선생은 착하고 어진 분이었습니다. 내가 부수상실로 찾아가면, 선생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나오면서 내 두 손을 잡고 인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鄭副相 동지, 감사합니다. 나를 찾아 주시는 분은 鄭副相 동지뿐입니다」』
鄭尙進은 한번은 洪命熹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과거 우리 조선의 양반들이 전부 선생님처럼 어질고, 성실하고, 착하고, 모든 면에서 아름답다면, 나는 양반계급을 절대 지지하고 존경하겠습니다』
洪命熹는 그 말을 듣자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鄭副相 동지, 양반들이 전부 그랬더라면 임꺽정이 나타날 수 없었고, 나의 소설 「임꺽정」이 나올 리도 없었겠지요』
창작 금지당한 李泰俊
越北 소설가 李泰俊(이태준)은 越北 후에도 늘 「순수문학가」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鄭尙進이 그와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8월15일 朝蘇(조소)친선협회 주최 해방 2주년 경축연에서였다.
1948년 어느 날 李泰俊은 소주 한 병과 안줏감을 들고 鄭尙進의 집을 찾아왔다. 李泰俊은 『鄭형, 언제까지 회의에서만 만날 것입니까? 이렇게 집에서 만나야 하고 싶은 말들을 주고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했다.
술이 좀 들어가자 李泰俊은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순수문학이라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내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순수문학을 反動(반동)문학과 혼동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鄭尙進은 『선생님이 越北한 것으로 그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라며 李泰俊을 위로했다.
『李泰俊 선생은 「나는 될 수 있는 한 조선적인 아름다움을 더 선명하고 고상하게 보여 주려 힘썼다. 나는 이것도 하나의 애국사상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일제 말기에도 끝까지 조선적인 것을 지키려고 애쓴 작가였습니다. 그런 그를 「순수문학가」라고 공격하는 데 앞장선 사람은 日帝시대에 일본어 親日소설 「피」라는 작품까지 썼던 韓雪野였습니다』
李泰俊의 처지는 1953년 남로당 숙청이 시작되면서 더욱 고단해졌다. 林和·金南天 등이 숙청되는 와중에 李泰俊은 창작금지를 당했다.
『1955년 10월, 내가 남로당계 작가·예술인들을 비호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해 집에 있을 때, 李泰俊 선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鄭형도 숙청됐으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외로워서 찾아왔다. 늘 鄭형을 믿고 의지했는데…」 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우리가 술 한잔 나누지 않고 식사만 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습니다.
1957년 소련으로 떠나올 때 그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랬다가는 안전기관(정보기관)에 불려 다니며 시달렸을 테니까요. 그는 내 마음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趙明熙의 안부를 묻던 李箕永
鄭尙進이 소설가 李箕永(이기영)을 만난 것은 1947년 5월 문예총 행사에서였다. 鄭尙進은 193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있었던 趙明熙의 문학강연에서 李箕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李光洙·崔南善·金東煥만 알고 있던 고려인 청년들 앞에서 趙明熙는 카프문학의 동지였던 李箕永을 극찬했었다.
李箕永은 鄭尙進에게 抱石 趙明熙의 소식부터 물었다.
『鄭律 동무, 抱石 趙明熙 선생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참 가까운 친구였으며, 진실한 전우였습니다. 抱石은 해방되면 꼭 귀국하실 분인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니 좀 알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는 李箕永에게 鄭尙進은 차마 「抱石은 1937년 체포되어 처형됐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趙明熙 선생은 1938년경 病死(병사)했다」고 둘러댔다. 李箕永은 鄭尙進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망명 전야의 趙明熙를 회고했다.
『1928년 늦은 봄 어느 날, 抱石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그때 우리 가족은 팥죽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抱石은 「내일 소련으로 떠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팥죽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밤을 새웠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있어 소련은 貧富(빈부)의 차이가 없는 자유의 나라, 꿈의 나라였고, 그런 소련으로 망명하는 抱石이 부러웠습니다』
李箕永은 豪酒家(호주가)였다. 朝蘇친선협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1947년 해방 2주년 축하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소련 태평양함대 가무협주단장과 술시합을 벌여 이겼다. 토지개혁 이후 李箕永은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열망을 담은 소설 「땅」을, 1950년대에는 우리 민족의 고난을 다룬 「두만강」을 내놓았다.
『1957년 소련으로 망명하기 전, 李箕永 선생에게 전화로 작별인사를 올렸습니다. 「鄭律 동무, 부디 소련에 가서 건강하시고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워 가지고 귀국해서 다시 좋은 사업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동무를 믿습니다」 하더군요』
崔承喜의 의문
鄭尙進이 세계적인 무용가 崔承喜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원산에서 교육부 차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이후 崔承喜의 남편 안막과 함께 문예총 부위원장으로 일했고, 김일성종합大 노문학부 시절에는 그의 조카 최로사를 가르친 적이 있어 崔承喜와는 가깝게 지냈다.
崔承喜는 金日成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열었다. 1948~1949년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동독·루마니아·헝가리 등을 순회공연하고 돌아온 그는 鄭尙進에게 東유럽에서 받은 인상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런데 왜 東유럽 사회주의 나라 인민들은 소련을 미워하는 거죠? 특히 독일·헝가리가 심하더군요. 상점에 들어가서 러시아말을 하면 판매원들이 돌아서서 상대도 하지 않더군요』
崔承喜는 지방공연을 다녀온 후에는 이런 말을 했다.
『해방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우울한 표정이에요. 해방된 느낌은 어디에서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어요. 왜 그럴까요?
日帝시대에 나는 22개국을 돌면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창작사업을 했어요. 그런데 북조선에 와서는 당과 정부의 넉넉한 지원을 받고 있고, 어떠한 억압이나 제한도 없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늘 내 생활, 내 활동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 같아요』
崔承喜는 1948년, 일제시대에 중국 北京에 사두었던 집을 팔았다. 鄭尙進은 崔承喜가 이 집을 파는 서류를 작성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崔承喜는 집을 팔면서 鄭尙進에게 말했다.
『남루한 옷차림의 인민들이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피땀으로 지은 쌀을 팔아 극장표를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울고 싶었어요. 미국이나 서구 사람들처럼 좋은 옷차림을 하고 활기 있는 모습의 인민들을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崔承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崔承喜는 1954년 장편 무용극 「사도성의 달밤」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아마 조선무대예술사상 첫 무용극이었을 이 작품은 아쉽게도 실패작이었다. 무용극은 崔承喜의 영역이 아니었다. 鄭尙進은 『이 무용극에서는 崔承喜씨, 아니 무용가 崔承喜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비평했다. 崔承喜는 크게 화를 냈고, 이후 그와는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퇴폐음악가로 몰려 창작 금지당한 金順南
鄭尙進이 越北 작곡가 金順男을 만난 것은 1948년 10월 어느 날 북조선민속학연구소에서 민요의 채집 등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을 때였다. 그는 예술인들의 친목모임에서 鄭尙進을 위해 즉흥 피아노 연주를 해주었다.
金順男은 모임 때면 항상 아내를 동반했다. 후일 鄭尙進은 서울을 방문했을 때, 金順男의 딸인 아나운서 김세원으로부터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나를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北에서 만난 金順男의 아내는 金順男이 越北 후 새로 얻은 아내였던 것이다.
1953년 남로당 숙청이 시작된 후 金順男은 창작금지처분을 받았다. 1955년 정월, 金順男은 당시 문화선전성 제1副相이던 鄭尙進을 찾아왔다.
金順南은 『副相 동지, 정말 작곡할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내 마음속의 창작열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호소했다. 그는 『「춘향전」을 오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자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鄭尙進이 적극적으로 찬성의사를 표시하자, 그때까지 풀이 죽어 있던 金順男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눈에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얼마 후 鄭尙進은 한 모임에서 북한 음악계의 실력자이던 이면상으로부터 『鄭부상 동지는 왜 종파분자, 퇴폐음악가인 金順男을 껴안고 춤을 추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언제까지 남조선 퇴폐 문학예술인들을 비호할 것인가』라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역시 남로당系 숙청 때 숙청당한 越北 만담가 신불출이 鄭尙進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출판검열부에서 대본 요지를 공연 전에 반드시 제출하여 매번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계속 못살게 군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만담가에게 대본을 미리 제출하라는 것은 사실 웃기는 얘기였다. 결국 당중앙위원회에서는 신불출만은 공연 전에 대본 등을 사전에 제출하지 않고 공연할 수 있도록 특별허가를 내줬다. 후일 鄭尙進은 「신불출이 숙청되어 요덕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화가 정관철
미술가들 가운데서는 문예총 미술가동맹 위원장을 지낸 정관철과 가까이 지냈다. 기자는 越北 미술가들의 그림집 「특별한 시대의 화가와 그림들」을 꺼내 보이며 『이 중에서 기억나는 분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화보집을 뒤적이던 鄭尙進의 눈길이 정관철 화가의 그림에 가서 멎었다.
『정관철, 이분하고 참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림을 들여다보며) 이 필치, 그 분의 필치가 분명하네요. 문예총 미술가동맹 위원장이었는데, 화가로서 그는 겸손하고 소박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북한 체제에 충실했기 때문에 金日成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6·25 뒤 어느 전시회에 그는 「청진해방전투」라는 그림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순전히 노동당의 주문에 따른 宣傳畵(선전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소련군 탱크의 좌우에서 붉은 기를 휘날리며 용감무쌍하게 싸우고 있는 조선인민혁명군 유격대원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는데, 청진해방전투 참가자인 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왜곡이었습니다』
鄭尙進은 계속해서 화보를 넘겼다.
『변월룡 화백, 이분은 중학동창인데 내가 북한으로 초청했습니다. 1954년 말, 소련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북한에서 활동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정종녀, 이분은 동양화가인데 가까이 알았습니다. 이분이 그린 그림이 우리 집에 있었습니다』
洪命熹, 납북된 李光洙 간병
6·25 당시 수많은 문인과 예술인들이 拉北되었다. 문화선전성 제1副相이던 그는 안전계통(정보기관)에 근무하던 소련 고문들로부터 金東煥, 李光洙 등 그가 젊어서부터 존경했던 문인들이 拉北되어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 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전쟁포로처럼 납치되어 온 처지였고, 사회안전성의 관리 아래 있었기 때문에 만나볼 수는 없었습니다.
李光洙 선생에 대해서는 부수상으로 있던 洪命熹 선생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洪선생께서는 「金日成 수상에게 간청해서 春園(춘원)을 15일 동안 우리 집에서 묵게 했다」고 말씀하더군요. 그때 春園 선생은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洪命熹 선생께서는 지극정성으로 간병했다고 합니다. 결국 春園 선생은 얼마 후 病死(병사)했습니다. 金東煥 선생에 대해서는 나중에 「평양의 어느 신문사에서 교정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북한이 전쟁 중 문화예술인들을 납북해 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추측했다.
『안전계통에 있던 사람들로부터도 문화예술인들을 납치해 간 이유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을 납치해 再교양시켜 공산주의 건설에 활용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예컨대 북한 정권은 국회의원 등 납북 정치인들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 소속된 인사들에게는 사무실과 비서들까지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남한 국회의원들과의 만남을 요구하고 나오자, 金日成은 그들을 숙청했습니다. 납북문화예술인들도 그런 식으로 활용하려 한 것일 수 있습니다』
남로당파에 이어 1955년 소련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越北 문화예술인들과 가깝게 지내던 鄭尙進에게 시련이 닥쳤다.
1955년 9월, 그가 북한 문화예술단을 이끌고 소련 순회공연을 하고 돌아오자, 「사회과학원 과학도서관 관장」이라는 직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좌천이었다.
1955년 10월22일, 그는 박창옥 부수상, 기석복 인민군 중장, 박영빈 당중앙위 조직부장, 전동혁 참사관 등과 함께 노동당 정치위원회에 출두했다.
『그 자리에서 金日成은 「당신들에게는 왜 주체가 없느냐?」고 다그쳤습니다. 북한에서 「主體(주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나흘 후 노동신문에 「주체」에 관한 논문이 실리더군요.
6·25 와중에 「이제 金日成 동지에게 元帥(원수) 칭호를 줄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스탈린의 지시가 있은 후 元帥 칭호를 사용했던 사람이 「주체」라니…』
소련파 숙청
그가 사회과학원 도서관장으로 근무할 때, 사회과학원장은 유명한 경제사학자이자 북한 초대 내각에서 敎育相(교육상)을 지냈던 월북 경제사학자 白南雲(백남운)이었다.
『白南雲 선생은 전형적인 조선 노인이었고, 학자였습니다. 말이 적고 마음씨가 착한 분이었습니다. 숙청당해 밀려난 저에게 많은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이 무렵 원로 한글학자이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낸 金枓奉(김두봉)이 찾아왔다. 그는 『鄭선생, 어떻게 사시는가?』라며 안부를 물었다.
鄭尙進은 金日成의 소련파 숙청에 대해 『고등지식을 가진 소련 출신자들이 무식한 자기를 몰아내려 한다고 생각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의 회고다.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간 고려인들은 늘 소련 軍政 당국으로부터 「여러분은 북조선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임시로 여기에 와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소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때문에 저도 소련 국적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客(객)」으로 여기고 있던 우리가 북한의 권력을 두고 金日成과 투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였습니다. 북한 국적을 취득한 고려인 중 48명이 소련파 숙청 때 처형당했습니다』
1957년 鄭尙進은 함께 숙청된 소련파 기석복·전동혁·송진파 등과 金日成에게 「소련으로 돌아가겠다」는 청원을 했다. 이들을 북한에 두어 봤자 골치만 아플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金日成은 쉽게 이들의 출국청원을 수락했다.
북한을 떠나다
북한을 떠나기 전 鄭尙進은 許貞淑 문화선전상을 찾아갔다. 그는 『相동지, 소련으로 가게 되어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간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고 인사했다.
늘 다정다감하게 그를 대했던 許貞淑의 반응은 싸늘했다.
『鄭동무, 소련에 간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작별 인사를 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동무에게 더 할 말이 없습니다』
1957년 10월, 鄭尙進은 12년 만에 북한을 떠났다.
『슬펐습니다. 저는 평양을 사랑했고, 북한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금강산처럼 아름다운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 특히 붉은 해가 물속에서 쑥 올라오는 삼일포의 일출, 아, 그런 일출경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소련으로 돌아온 鄭尙進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출두했다. 공산당에서는 모스크바에서 대학원에 다니든지, 아니면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타슈켄트의 고급당학교에 입교하든지 택일하도록 요구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가족들과 함께 그런 집에서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아, 타슈켄트의 고급당학교 입교를 택했습니다. 당학교 기자부에 다니는 동안 매월 학비조로 320루블을 받았습니다. 당시 소련 副相(부상·차관)들의 월급이 그 정도였습니다』
1961년 고급당학교를 졸업한 후, 鄭尙進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던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에 入社(입사)했다. 이후 그는 「레닌기치」의 문화부 담당 기자, 특파기자,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한편, 문학평론가로 활약했다. 1991년 「레닌기치」는 「고려일보」로 제호를 바꾸었다. 그는 「레닌기치」라는 제호로 신문이 나오는 마지막 호인 1990년 12월19일자 「레닌기치」에 『「레닌기치」 독자들과의 작별』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소련제국이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려인 강제이주 때 이미 「소련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저는 소련연방의 붕괴까지는 원치 않았습니다. 소련이 자유롭고 민주화된 나라가 되고 그 나라에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카자흐스탄이 독립된 후 카자흐人들이 어깨를 펴고 다니는 것을 보니, 「역시 독립이란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청진 전투』
鄭尙進 옹과 헤어지기 전, 「북한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鄭尙進 옹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역시, 허정숙 相이 가장 보고 싶습니다』
뜻밖이었다.
―선생님이 북한을 떠나올 때,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는데도 許貞淑이 보고 싶습니까.
『1980년 모스크바에서 북한에 있을 때 친구였던 박길룡 당시 북한 외교부 부부장(차관)을 만났더니, 「許貞淑 동지가 안부를 전하더라. 불쾌한 일이 있었으면 잊으라고 하더라」고 전하더군요. 「착한 말 한마디가 병을 치료한다」는 러시아 속담이 정말 맞더군요. 박길룡의 그 한마디에 서운했던 감정은 사라졌습니다』
―90세가 되어서도 그렇게 정정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40년 동안 매일 아침 1시간씩 아침체조와 달리기, 걷기를 했습니다. 자기 전에는 꼭 찬 우유를 한 잔씩 마셨습니다. 음식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습니다. 무엇보다도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저는 남이 저를 나쁘게 말해도 흘려듣고, 나서서 해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선생님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그는 지긋이 눈을 감더니 이렇게 말했다.
『역시 청진 전투였습니다. 그때를 제외하면, 나는 남을 위해 내세울 만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사진 : 김보배
▣ 鄭尙進은 누구인가?
191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출생했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후 1940년 크질오르다사범大 노문학부를 졸업했다. 1945년 소련 태평양함대 해군 육전대원으로 웅기·나진·청진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원산시 인민위원회 교육부 차장, 함남 인민위원회 교육부 차장, 문예총 부위원장, 김일성종합大 노문학부장, 인민군 병기총국 부국장, 문화선전성 제1副相 등을 역임했다.
1957년 소련으로 귀환한 후 고려인 신문인 「레닌기치」에서 근무하면서 언론인 겸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1992년에는 박갑동·유성철·허진 등 북한 출신 망명자들과 함께 反김일성 조직인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을 창설, 사무총장·공동의장으로 활동했으며, 민주평통 해외자문위원을 지냈다. 1989년과 1990년 서울을 방문했다.●
1937년 추수를 앞둔 가을 韓人(한인)들은 짐짝처럼 화물열차에 태워져 수만리 밖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됐다. 不毛(불모)의 땅으로 향하는 화물열차 안에서 그는 친구들을 부둥켜안고 巴人 金東煥(파인 김동환) 詩(시)를 읊었다.
<벽은 말할 줄 모르고
나는 할 말을 못 하니
종일 두 벙어리
마주 앉았으나
죽었음인가 살았음인가?!
하늘과 땅도 이렇게 있다간
소낙도 울고 벼락도 치거늘
때만 오면 때만 오면 하고
나는 다만 빈 주먹만
쥐었다 폈다…> (「손톱으로 새긴 노래」)
1945년 8월, 그는 소련 해군 陸戰隊(육전대·해병대) 대원으로 북한에 상륙했다. 북한에 진주하는 소련군의 최선봉이었다.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웅기·나진·청진을 해방시키고 났을 때, 그의 부대원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한 달 후, 그는 상부의 명령으로 귀국하는 「金日成 장군」을 영접했다. 「金日成 장군」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그는 30代 초반의 나이에 차관 자리까지 올랐다. 여기서 그는 洪命熹(홍명희)·李泰俊(이태준)·崔承喜(최승희)·金順男(김순남) 등 내로라하는 북한의 문화예술인들과 사귈 수 있었다.
북한 땅을 밟은 지 12년 후, 金日成의 소련파 숙청에 내몰린 그는 다시 추방자가 되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갔다. 그는 여기서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소련제국의 붕괴를 지켜보았고, 金日成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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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문화선전성 간부들과 함께. 앞줄 오른쪽이 鄭尙進, 그 옆이 許貞淑 문화선전상. |
鄭尙進, 정율, 정 유리 다닐로비치
그의 이름은 鄭尙進(정상진). 러시아 이름은 정 유리 다닐로비치, 북한에서의 이름은 鄭律(정율)이었다. 올해 나이 90세인 그를 만난 것은 지난 6월 말 서울 이태원 해밀턴 호텔에서였다. 그는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 학술대회 및 고려인 예술가 초청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그를 만난 것은 6·25 당시 북한 문화선전성 제1副相(부상·차관)이던 그의 입을 통해 拉北(납북)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편집장으로부터 그를 만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90세 노인을 인터뷰하라니, 골치 아프게 됐다」고 생각했다. 말귀가 어둡고, 옛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 희미한 목소리로 重言復言(중언부언)하는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鄭尙進 옹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 깜짝 놀랐다. 키가 큰 그는 허리가 약간 굽었지만 건강해 보였다. 말은 또박또박했고, 논리정연했다. 기억력이 좋았다. 아무리 높게 보아도 70代 초반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인터뷰 자리에는 鄭尙進 옹을 초청한 우정권 단국大 교수, 한춘섭 성남문화원장이 함께 했다. 時調詩人(시조시인)인 韓원장은 鄭尙進 옹에게 越北(월북) 시조시인인 趙雲(조운)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찾아왔다.
韓원장이 『시조시인 조운 선생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鄭옹은 『잘 알고 있습니다.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했다.
韓원장이 『조운 선생은 한국에서는 거의 잊혀졌지만, 월북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렸을 것』이라고 말하자, 鄭옹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지금도 그분이 1급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을 통해 처음으로 시조를 접했는데, 참 좋았습니다. 자주 찾아 뵙고 시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조를 봉건잔재쯤으로 여기는 북한의 분위기 속에서 그분은 늘 「시조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없다」고 서운해하셨죠. 그분은 북한 유일의 시조시인이었습니다』
韓원장은 鄭옹에게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문학인들과 시조 문학 교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鄭옹의 대답은 쌀쌀맞다 싶을 정도로 단호했다.
『그건 꿈입니다. 허웅배(허진) 선생이 소련 시절 시조시집을 낸 적이 있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후 고려인 사회에서 시조문학은 맥이 끊겼습니다. 우리말로 문학작품을 창작하고 감상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거의 사라진 마당에 시조를 전파하고 교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鄭옹의 말 속에는 슬픔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잊혀져 가는 언어」로, 결국은 자손들로부터 「잊혀질」 詩作(시작)을 하고 있는 「잊혀진 세대」의 悲哀(비애)가…. 그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일생을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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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블라디보스토크의 韓人 거주지. |
共産主義를 제대로 이해 못 한 李東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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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
함북 명천 출신으로 韓日합방 직후 연해주로 건너온 아버지 정치문은 민족의식이 강했다. 鄭尙進의 회고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는 安重根 義士 얘기를 해주시면서 「너는 일본 놈들과 싸울 때가 올 것이다. 그놈들은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다. 그놈들과 싸워 이겨야 조선 땅에 발을 놓기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러시아학교에 입학시키자 아버지는 「일생 러시아에서 살 작정이오? 이곳은 우리에겐 임시 거처지에 불과해! 조선은 곧 해방되고 말 거요」 하면서 크게 화를 냈습니다. 결국 학교까지 찾아와 저를 끌어내 조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3·1절 기념식 때면 봉오동 전투의 영웅 洪範圖(홍범도), 上海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李東輝(이동휘) 등 抗日 독립투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소년단 단장이던 어린 鄭尙進은 그들을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李東輝에 대한 회고다.
『李東輝 선생은 공산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레닌이 제국주의 타도와 被(피)압박 민족 해방을 외치니까, 그 구호를 믿고 공산주의를 통해 조선을 해방시키겠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죠. 李東輝 선생은 1935년에 돌아가셨는데, 만일 1937년까지 생존해 계셨다면 스탈린에 의해 처형됐을 것입니다』
新韓村의 향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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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 출신 작가로 연해주 고려인 문단 형성에 이바지했던 趙明熙. |
『帝政(제정) 러시아 말기에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위해 연해주에 왔던 작가 겸 철도기사 가린 미하일로비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조선인 마을에서 저녁 때 노래 비슷한 단조로운 소리가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통역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무슨 기분으로 저녁이면 저렇게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느냐?」고 물었답니다. 통역이 「저건 노랫소리가 아니라, 서당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소리다」라고 하자, 그는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半기아 상태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저렇게 열심히 공부에 열중하는 민족은 아마 세상에 조선인들뿐일 것이다. 지식에 대한 이런 指向(지향)은 진실로 너무나 理想的(이상적)이다」』
연해주로 건너오는 조선 사람들은 조선어 잡지나 소설책, 시집들을 짊어지고 들어와 학교 등에 나누어 주었다. 소년 鄭尙進은 1920~1930년대에 나온 「삼천리」 잡지는 거의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이런 잡지나 책들을 통해 그는 金東仁(김동인)·李光洙(이광수)·金東煥(김동환)·李相和(이상화)·崔南善(최남선) 등과 만날 수 있었다.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해 간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鄭尙進은 巴人 金東煥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 감회에 젖어 그가 지은 최초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을 읊조렸다.
『「아아,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 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무사히 건넜을까」, 이건 「위대한 초조감」입니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될 때, 화물열차 안에서 친구들을 끌어안고 金東煥 선생의 「손톱으로 새긴 노래」를 읊었습니다』
1928년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서 활동하던 소설가 抱石 趙明熙(포석 조명희)가 연해주로 망명해 왔다. 그는 소왕령(우수리스크) 유성촌이라는 마을에 자리 잡고 2세 교육과 문학 활동에 힘썼다. 신문 「선봉」, 잡지 「로력자의 고향」 등을 발간했다.
1930년 趙明熙가 지은 詩 「짓밟힌 고려」는 연해주 일대에 사는 고려인 청년들의 피를 끓게 했다. 많은 고려인 청년들이 趙明熙의 영향을 받아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사범大 노문학부에 다니던 鄭尙進도 그중 하나였다.
이들은 가난하고 고된 현실 속에서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사회주의 理想鄕(이상향)」과 「해방된 조선」에 대한 꿈에….
1937년은 그 꿈이 박살난 해였다. 그해 8월부터 소련 NKVD(내무인민위원부·KGB의 前身)는 연해주 조선인 인텔리들을 무차별 체포, 처형하기 시작했다. 한 달 뒤에 시작될 강제이주의 事前(사전) 포석이었다. 소련작가동맹의 유일한 조선인 문학가이면서 소련 국적 취득을 한사코 거부했던 소설가 趙明熙도, 어린 鄭尙進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워 줬던 아버지 정치문도 체포돼 총살당했다. 조선인 인텔리 2800여 명이 재판 없이 처형됐다.
그가 아버지의 처형 사실을 확인한 것은 1955년 북한에 있을 때였다. 부친의 묘소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NKVD가 처형자들을 한꺼번에 묻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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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이 살던 半지하 오두막집. |
조선사범大, 조선사범전문학교, 사범노동학원, 사범기술학교, 4개의 고급중학교(고등학교), 8개 초급중학교(중학교), 23개 인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 교직원 및 그 가족들이 첫 이주대상자였다. 조선극장, 조선어라디오방송국, 선봉신문사 등 문화기관 직원과 가족들도 함께였다.
이들은 열차 32량에 가축처럼 실려 한 달 뒤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 도착했다. 鄭옹은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그들보다 나중에 연해주를 출발한 열차에 탄 사람들은 열차사고와 추위 등으로 수없이 죽었는데, 그들이 탄 열차에서는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던져진 땅은 불모의 땅이었다. 鄭尙進의 회고다.
『열차에서 내린 여자들은 주저앉아 통곡했어요.「죽으라고, 우리보고 죽으라고 이런 땅으로 보낸 거야」라면서….
그때 나귀에 빵을 가득 싣고서 카자흐 여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름 모를 민족이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빵을 구워서 식을세라 모포에 덮어 가지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 빵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조선 어머니들은 다시 통곡했고, 카자흐 아낙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카자흐 사람들, 참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들은 다 죽었을 겁니다. 우리 민족은 그 고마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주 첫해에 추위와 굶주림, 풍토병으로 2만~3만 명이 죽었다. 청년 鄭尙進은 잃어버린 친척들을 찾으러 고려인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매일같이 장례가 치러지는 것을 보았다.
『소련은 1937년에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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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
『아버지가 처형되기 전까지 저는 공산주의를 무한히 믿었습니다. 하지만 강제이주와 학살을 보면서 「이런 건 공산주의라고 할 수 없다. 소련은 언젠가 망할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 인텔리들을 총살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 꿈도 총살해 버린 것입니다.
레닌은 소련 내 少數(소수)민족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민족 간 화합을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스탈린은 민족들을 이간시키고, 탄압하고, 학살했습니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련은 1991년에 망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소수민족 강제이주를 감행했던 1937년에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참변 속에서 고려인 사회는 서서히 재건되기 시작했다. 농부들은 황망 중에 챙겨 온 씨앗들을 뿌렸다.
연해주에 있던 학교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민족교육을 할 수는 없었다. 조선사범大는 크질오르다사범大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의 친구로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가 활동하다가 6·25 때 죽은 詩人 조기천은 어문학부에서 세계문학을 강의했다. 1940년 청년 鄭尙進은 크질오르다사범大 노문학부를 졸업했다.
조선극장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市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1942년 봄 조선극장에서는 태장춘 각본의 연극 「洪範圖」를 공연했다. 당시 봉오동 전투의 영웅 洪範圖 장군은 조선극장의 수위로 일하고 있었다. 조선극장이나 언론사 등에서 일하던 고려인 청년들이 老장군을 위해 만들어 준 자리였다.
연극이 막을 올리던 날, 청년 鄭尙進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작가 김기철과 함께 洪範圖 장군 바로 뒷줄에서 연극을 관람했다.
『연극이 끝난 후 배우들은 객석으로 내려와 洪範圖 장군의 손을 잡고 「장군님, 연극이 어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팔십이 넘은 장군님은 「너희들이 나를 너무 추켰구나!」 하시더니, 웃으면서 「어쨌든 고맙다」 하시더군요』
1942년 鄭尙進은 공산당에 입당했다.
『지역당 서기가 「동무는 많이 배웠고 사상도 투철한데 왜 당원이 되지 않소?」라며 입당을 권유했습니다.
저는 당서기에게, 「아버지가 인민의 적인데, 어떻게 내가 당원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소련헌법은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연루시키지 않소. 동무는 자격이 충분하므로 입당하시오」 하더군요』
1941년 청년 鄭尙進은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을 상대로 하는 신문 「레닌기치」에 詩를 발표한 데 이어, 「시인과 현실」, 「로멘찌즘에 대하여」 등의 평론을 발표했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에게 나치 독일과의 전쟁은 그 동맹국인 일본과의 聖戰(성전)을 의미했다. 鄭尙進은 수차 군사동원부를 찾아가 자원입대하려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추방당한 2등 시민은 군대에 갈 권리조차 없었다.
1944년 8월 鄭尙進은 우연히 태평양 함대 정보처에서 고려인 병사들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다시 군사동원부를 찾아가 태평양함대 정보처 복무를 자원했다. 이듬해 3월 그는 태평양함대 정보처 직속 해군 육전대로 편입됐다.
病中(병중)이던 어머니는 戰線(전선)으로 아들을 보내며 『아버지가 늘 일본 놈들과 싸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더니, 네가 이렇게 싸우러 나가게 됐구나. 나는 너의 길을 막지 못하겠다』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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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단 시절의 鄭尙進(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
청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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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金日成 장군환영 평양시민대회」에 모습을 나타낸 金日成. 뒤편의 소련군 장성들이 김일성 정권이 소련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보여 준다. |
8월11일 아침, 鄭尙進은 60명의 육전대원들과 함께 6척의 어뢰정에 분승해 웅기항을 향해 출동했다. 지휘관 레오노프 대위는 『자네 조국은 해방되면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며 鄭尙進을 격려했다.
鄭尙進의 부대는 웅기에 無血(무혈)입성했다. 피란 갔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鄭尙進은 그들에게 달려가며 『여러분은 오늘 이 순간부터 해방된 땅의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들은 『선생님, 아이구! 조선 분이시구먼』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도 눈물을 흘렸다.
8월12일 나진항 진주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소련군의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항만과 선박들이 불타고 있었다. 술과 안주를 들고 해방군을 환영하러 모여 든 주민들에게 레오노프 대위가 일장 연설을 했다. 鄭尙進이 통역했다.
『우리는 여러분을 日帝로부터 해방시켰을 뿐, 어떤 나라를 세울지는 조선인민들의 意思(의사)에 달렸습니다. 해방된 여러분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나 鄭尙進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정말 소련군이 공언한 대로 조선이 자유로운 나라가 될 줄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 소련 점령군의 정책은 조선 인민들에게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소련은 反인민적 「붉은 식민지」 정책으로 일본 식민 통치자들보다 더 무서운 참극을 전체 한반도 인민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는 북한의 비참한 현실이 웅변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일단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던 鄭尙進의 부대는 8월13~18일 벌어진 청진 전투에 참가했다. 60명의 소련 육전대원들이 청진항에 상륙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남사단 예하 일본군 1개 연대 병력이었다.
육전대의 임무는 敵情(적정)을 파악해 本隊(본대)에 알리는 전투정찰이었다. 포탄이 날아오고 총탄이 쏟아졌다. 전투가 잠시 잠잠해지자 鄭尙進은 우울해졌다. 소년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抗日정신을 물려받았고, 李光洙·金東煥·李相和 등의 작품을 통해 祖國愛(조국애)를 길러 왔던 그로서는 「조국해방전쟁」에 참여한 조선인이 자기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조선에는 이렇게도 투사가 없다는 말인가?」
8월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청진 전투는 계속됐다. 전투는 8월18일에서야 끝났다. 당초 60명이던 부대원은 31명으로 줄어 있었다.
청진형무소 정치犯 석방
레오노프 대위는 부대內의 유일한 조선인인 그에게 청진형무소의 정치범들을 석방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레오노프 대위, 소련군 25군단 정치부 장교와 함께 차를 타고 청진형무소로 간 그는 간수로부터 형무소 열쇠를 넘겨받아 첫 번째 감방의 문을 열었다. 정치범들이 「만세」를 부르며 쏟아져 나왔다.
이로써 그의 「조선해방전쟁」은 끝났다. 그때 그의 계급은 특무상사였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金日成이 창건한 조선인민혁명군 예하 오백룡 부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웅기를 해방시켰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처음으로 해방시킨 도시라는 의미에서 웅기를 「선봉」으로 개칭했다. 鄭尙進은 이러한 북한의 주장을 단호하게 일축했다.
『나는 웅기는 물론, 나진·청진에서 단 한 사람의 인민혁명군도, 항일투사도, 혁명가도 戰場(전장)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전투에 참전한 조선인은 나 한 사람뿐이었소. 우리 부대가 피를 흘리며 청진에서 싸우고 있을 때, 金日成이나 오백룡은 하바로프스크 인근 왜트스코예 마을에 주둔한 소련군 88정찰여단 막사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소련군 88여단 예하 일개 조선인 부대가 하루아침에 조선인민혁명군이 돼서 8월9일부터 만주 일대와 북한 웅기·나진·청진·어대진을 해방시킨단 말입니까? 아무리 역사와 백성을 속이려 해도 거짓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내가 북한에 있던 1950년대 중반까지 金日成은 「내가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가 북한을 해방시켰다」는 얘기는 감히 꺼내지 못했습니다』
入北하는 金日成을 영접
鄭尙進은 戰場에서 만나지 못했던 金日成을 그해 9월19일 원산항에서 만났다. 그날은 마침 추석이었다. 당시 그는 원산시 교육부 차장으로 鄭律(律이라는 이름은 그의 러시아 이름 「유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회고다.
『그 전날 소련군 정치부에서 부르더니, 「내일 金日成 장군이 들어온다. 나가서 영접하도록 하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푸가초프號가 원산항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원산市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태성수, 원산시당 조직부장 한일무, 市 상공부장 박병섭 등과 함께 마중을 나갔습니다. 소련군사령부 측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련군 군복 가슴에 赤旗(적기) 훈장을 단 젊은 대위가 내리면서 「김성주입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아침식사 뒤 원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추석놀이를 참관한 후 저녁에 기차편으로 평양으로 갔습니다.
소련군 정치부로 돌아가 「일행 중에 金日成 장군은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김성주 대위가 바로 金日成 장군이오」라고 하더군요.
전설적인 抗日 영웅 金日成 장군이라면 풍채가 당당하고 연륜이 있는 분일 줄 알았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허웅배(허진)가 은밀히 「진짜 金日成 장군」이 누구인지 수소문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金日成 장군」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후일 그는 문화선전성 제1副相으로 있으면서 업무상 金日成과 자주 만났지만, 인간적인 교류는 없었다. 그의 회고다.
『許貞淑(허정숙) 문화선전상이 자주 앓아서, 제1副相이던 제가 그를 대신해서 金日成을 자주 만났습니다. 공무상 만난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그를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鄭律(鄭尙進)이 일을 잘한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는 얘기는 남을 통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설가 韓雪野는 범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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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설야. |
1946년 초 박경수는 그에게 해방 경축 시집을 내자고 제안했다. 박경수가 사업추진과 편집을 맡고, 鄭尙進이 발행책임을 맡았다. 그는 박경수의 부탁으로 웅기 전투를 회고한 「웅기항! 눈물에 젖은 나의 발자취」라는 詩를 게재했다.
몇 달 후 시집이 나왔다. 시집의 제목은 「凝香(응향)」이었다. 모두들 만족스러워했다. 具常 시인은 「시와 삶의 노트」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북한의 정황 속에서는 가장 문화적 생산을 한 셈이어서(그 시집의 외장만으로 치면 현재 서울 출판계에 내놓아도 호화로운 축에 든다) 동인들 중에는 서창훈과 같은 공산당 간부도 있었고 鄭律(鄭尙進)이라는 우리 2세 소련군 장교도 있었으나 이 시집의 출간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던 판인데 얼마 안 가서 날벼락이 떨어졌던 것이다>
「날벼락」의 원인은 바로 具常 시인이 쓴 「黎明圖(여명도)」라는 詩였다. 평양에서 검열원들이 들이닥쳤다. 당시 북한 문단의 거물이었던 김사량·송영 등 네 명이었다. 송영 등은 이 詩가 『북조선 현실에 대한 회의적·공상적·퇴폐적·도피적·절망적·반동적 경향을 가졌다』고 비판했다. 시집 「응향」에 대해서는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自我(자아)비판에 직면한 具常 시인은 越南(월남)했다. 鄭尙進은 1989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具常 시인과 재회했다.
1946년 7월 鄭尙進은 함남 인민위원회 교육부 차장으로 임명됐다. 근무지는 함흥이었다. 여기서 그는 작가 韓雪野(한설야)를 만났다.
『함께 점심식사를 했는데, 첫인상은 좋았습니다.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945년 12월경인 것 같은데 그가 쓴 金日成에 관한 세 편의 논문을 신문에서 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이 논설들을 읽으면서 그가 金日成 장군을 잘 아는 분이라고 생각했고, 만나서 金日成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韓雪野는 金日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군요. 「이건 아부, 아첨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씁쓸했습니다.
金日成에 대해 쓴 논설과 전기 등이 金日成의 눈에 들어 韓雪野는 나중에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재능이 뛰어난 李泰俊·林和(임화)·金南天(김남천) 같은 문인들이나 작곡가 金順男 등을 시기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1950~1960년대에 걸쳐 북한 문화계에서 가장 막강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이 숙청당해 비참하게 죽는 것을 방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金東煥이나 李光洙 선생 같은 拉北 문인들을 충분히 구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구명하러 애쓰기는커녕, 그들에 대한 비판에 앞장섰습니다.
나중에 그는 숙청당해 원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고 하더군요. 이는 응당한 천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희생시킨 「범죄작가」로 기록될 것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鄭尙進이 나쁘게 말한 사람은 韓雪野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韓雪野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미움과 경멸이 느껴졌다)
1947년 봄, 鄭尙進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문예총 위원장은 韓雪野였다. 무용가 崔承喜의 남편 안막이 鄭尙進과 함께 문예총 부위원장을 맡았다.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간부부에 가서 임명을 받고 난 후 그는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朴昌玉(박창옥)이었다. 그는 鄭尙進의 조선사범大 2년 선배였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州 치일리 구역 교육부장으로 일하던 그는 북한에 들어와 요직 중의 요직인 선전선동부장을 맡고 있었다. 朴昌玉은 명석하고 추진력이 강했지만 경솔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중에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정치국원·부수상을 지내다가 숙청, 처형됐다.
고려인 428명이 각 부처 副책임자 맡아
당시에는 어딜 가나 고려인(소련 출신 조선인)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鄭尙進의 회고다.
『소련 軍政(군정) 당국은 고려인 428명을 데려와 각 부처의 제1副책임자 자리에 앉혔습니다. 어느 부서나 그 부서의 2인자는 반드시 고려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일을 반드시 소련 軍政 당국에 보고해야 했고, 소련 軍政은 이들을 통해 북한을 통제했습니다.
북한 주둔 소련군 정치위원 슈티코프 대장은 우리 고려인들을 모아 놓고 「여러분들의 역할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1개 사단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金日成은 「동지들의 도움이 없으면 내가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해방 당시 일개 소련 해군 육전대 특무상사에 불과했던 鄭尙進은 문예총 부위원장, 김일성종합大 노문학부장, 문화선전성 제1副相 등을 거치면서 북한 문화예술계의 실력자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에서 문과교육을 받았고, 문예에 관심이 깊어 일찍부터 카프문학 등 조선의 현대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 발탁의 이유인 것 같습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 諸(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가 열렸다. 흔히 말하는 「남북협상」이었다. 그는 金九(김구)와 洪命熹를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한눈에 金九는 「정치가」, 洪命熹는 「애국문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북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다. 金九 일행은 서울로 출발하기 전 기자회견을 했다. 鄭尙進은 그 자리에 있었다.
金九의 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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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 당시 金日成과 함께 회의장으로 가는 金九. |
金九와 함께 평양으로 올라갔던 洪命熹는 北에 남았다. 후일 洪命熹는 鄭尙進에게 자신이 북한에 남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남조선에서 親日派가 날뛰는 것이 보기 싫었습니다. 반면에 북조선에서는 親日派들을 청산하고 일련의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남조선의 李承晩은 미국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공부했지만, 金日成 장군은 총을 잡고 만주벌에서 항일투쟁을 했습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냐, 공산주의냐」가 아니라, 「애국자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북조선을 택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洪命熹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洪命熹는 북한 초대 내각의 부수상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도 아닌 양반계급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崔南善·李光洙와 더불어 조선 3才(재)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던 洪命熹 선생이 북한 정부의 부수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남한의 문화예술인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작곡가 金順男, 영화배우 문예봉, 만담가 신불출 등이 월북한 것은 洪命熹 선생의 영향이 컸습니다. 참 어질고 착한 분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洪命熹는 명목상으로는 교육과 문화 부문을 총괄하는 부수상이었지만, 實權(실권)은 없었다. 문화선전성의 관리들이나 문화예술단체 관계자들은 洪命熹를 찾지 않았다. 북한에 들어온 후 洪命熹의 「임꺽정」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鄭尙進은 1952년 문화선전성 제1副相(차관)이 되자, 洪命熹 부수상실을 자주 찾았다.
『洪命熹 선생은 착하고 어진 분이었습니다. 내가 부수상실로 찾아가면, 선생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나오면서 내 두 손을 잡고 인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鄭副相 동지, 감사합니다. 나를 찾아 주시는 분은 鄭副相 동지뿐입니다」』
鄭尙進은 한번은 洪命熹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과거 우리 조선의 양반들이 전부 선생님처럼 어질고, 성실하고, 착하고, 모든 면에서 아름답다면, 나는 양반계급을 절대 지지하고 존경하겠습니다』
洪命熹는 그 말을 듣자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鄭副相 동지, 양반들이 전부 그랬더라면 임꺽정이 나타날 수 없었고, 나의 소설 「임꺽정」이 나올 리도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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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5월, 메이데이 행사가 끝난 후 평양 교외의 호수에서 金日成과 뱃놀이를 하는 洪命熹. |
창작 금지당한 李泰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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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北화가 김용준이 그린「홍명희 선생과 김용준」. |
1948년 어느 날 李泰俊은 소주 한 병과 안줏감을 들고 鄭尙進의 집을 찾아왔다. 李泰俊은 『鄭형, 언제까지 회의에서만 만날 것입니까? 이렇게 집에서 만나야 하고 싶은 말들을 주고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했다.
술이 좀 들어가자 李泰俊은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순수문학이라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내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순수문학을 反動(반동)문학과 혼동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鄭尙進은 『선생님이 越北한 것으로 그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라며 李泰俊을 위로했다.
『李泰俊 선생은 「나는 될 수 있는 한 조선적인 아름다움을 더 선명하고 고상하게 보여 주려 힘썼다. 나는 이것도 하나의 애국사상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일제 말기에도 끝까지 조선적인 것을 지키려고 애쓴 작가였습니다. 그런 그를 「순수문학가」라고 공격하는 데 앞장선 사람은 日帝시대에 일본어 親日소설 「피」라는 작품까지 썼던 韓雪野였습니다』
李泰俊의 처지는 1953년 남로당 숙청이 시작되면서 더욱 고단해졌다. 林和·金南天 등이 숙청되는 와중에 李泰俊은 창작금지를 당했다.
『1955년 10월, 내가 남로당계 작가·예술인들을 비호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해 집에 있을 때, 李泰俊 선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鄭형도 숙청됐으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외로워서 찾아왔다. 늘 鄭형을 믿고 의지했는데…」 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우리가 술 한잔 나누지 않고 식사만 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습니다.
1957년 소련으로 떠나올 때 그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랬다가는 안전기관(정보기관)에 불려 다니며 시달렸을 테니까요. 그는 내 마음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趙明熙의 안부를 묻던 李箕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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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낙향하기 직전 서울 성북동 집에서 가족과 함께한 李泰俊. |
李箕永은 鄭尙進에게 抱石 趙明熙의 소식부터 물었다.
『鄭律 동무, 抱石 趙明熙 선생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참 가까운 친구였으며, 진실한 전우였습니다. 抱石은 해방되면 꼭 귀국하실 분인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니 좀 알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는 李箕永에게 鄭尙進은 차마 「抱石은 1937년 체포되어 처형됐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趙明熙 선생은 1938년경 病死(병사)했다」고 둘러댔다. 李箕永은 鄭尙進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망명 전야의 趙明熙를 회고했다.
『1928년 늦은 봄 어느 날, 抱石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그때 우리 가족은 팥죽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抱石은 「내일 소련으로 떠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팥죽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밤을 새웠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있어 소련은 貧富(빈부)의 차이가 없는 자유의 나라, 꿈의 나라였고, 그런 소련으로 망명하는 抱石이 부러웠습니다』
李箕永은 豪酒家(호주가)였다. 朝蘇친선협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1947년 해방 2주년 축하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소련 태평양함대 가무협주단장과 술시합을 벌여 이겼다. 토지개혁 이후 李箕永은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열망을 담은 소설 「땅」을, 1950년대에는 우리 민족의 고난을 다룬 「두만강」을 내놓았다.
『1957년 소련으로 망명하기 전, 李箕永 선생에게 전화로 작별인사를 올렸습니다. 「鄭律 동무, 부디 소련에 가서 건강하시고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워 가지고 귀국해서 다시 좋은 사업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동무를 믿습니다」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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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평양 교외의 소설가 李箕永(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집에서. 뒷줄 왼쪽이 鄭尙進. |
崔承喜의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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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대표작「보살춤」복장을 한 崔承喜. |
崔承喜는 金日成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열었다. 1948~1949년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동독·루마니아·헝가리 등을 순회공연하고 돌아온 그는 鄭尙進에게 東유럽에서 받은 인상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런데 왜 東유럽 사회주의 나라 인민들은 소련을 미워하는 거죠? 특히 독일·헝가리가 심하더군요. 상점에 들어가서 러시아말을 하면 판매원들이 돌아서서 상대도 하지 않더군요』
崔承喜는 지방공연을 다녀온 후에는 이런 말을 했다.
『해방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우울한 표정이에요. 해방된 느낌은 어디에서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어요. 왜 그럴까요?
日帝시대에 나는 22개국을 돌면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창작사업을 했어요. 그런데 북조선에 와서는 당과 정부의 넉넉한 지원을 받고 있고, 어떠한 억압이나 제한도 없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늘 내 생활, 내 활동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 같아요』
崔承喜는 1948년, 일제시대에 중국 北京에 사두었던 집을 팔았다. 鄭尙進은 崔承喜가 이 집을 파는 서류를 작성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崔承喜는 집을 팔면서 鄭尙進에게 말했다.
『남루한 옷차림의 인민들이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피땀으로 지은 쌀을 팔아 극장표를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울고 싶었어요. 미국이나 서구 사람들처럼 좋은 옷차림을 하고 활기 있는 모습의 인민들을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崔承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崔承喜는 1954년 장편 무용극 「사도성의 달밤」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아마 조선무대예술사상 첫 무용극이었을 이 작품은 아쉽게도 실패작이었다. 무용극은 崔承喜의 영역이 아니었다. 鄭尙進은 『이 무용극에서는 崔承喜씨, 아니 무용가 崔承喜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비평했다. 崔承喜는 크게 화를 냈고, 이후 그와는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퇴폐음악가로 몰려 창작 금지당한 金順南
鄭尙進이 越北 작곡가 金順男을 만난 것은 1948년 10월 어느 날 북조선민속학연구소에서 민요의 채집 등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을 때였다. 그는 예술인들의 친목모임에서 鄭尙進을 위해 즉흥 피아노 연주를 해주었다.
金順男은 모임 때면 항상 아내를 동반했다. 후일 鄭尙進은 서울을 방문했을 때, 金順男의 딸인 아나운서 김세원으로부터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나를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北에서 만난 金順男의 아내는 金順男이 越北 후 새로 얻은 아내였던 것이다.
1953년 남로당 숙청이 시작된 후 金順男은 창작금지처분을 받았다. 1955년 정월, 金順男은 당시 문화선전성 제1副相이던 鄭尙進을 찾아왔다.
金順南은 『副相 동지, 정말 작곡할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내 마음속의 창작열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호소했다. 그는 『「춘향전」을 오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자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鄭尙進이 적극적으로 찬성의사를 표시하자, 그때까지 풀이 죽어 있던 金順男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눈에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얼마 후 鄭尙進은 한 모임에서 북한 음악계의 실력자이던 이면상으로부터 『鄭부상 동지는 왜 종파분자, 퇴폐음악가인 金順男을 껴안고 춤을 추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언제까지 남조선 퇴폐 문학예술인들을 비호할 것인가』라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역시 남로당系 숙청 때 숙청당한 越北 만담가 신불출이 鄭尙進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출판검열부에서 대본 요지를 공연 전에 반드시 제출하여 매번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계속 못살게 군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만담가에게 대본을 미리 제출하라는 것은 사실 웃기는 얘기였다. 결국 당중앙위원회에서는 신불출만은 공연 전에 대본 등을 사전에 제출하지 않고 공연할 수 있도록 특별허가를 내줬다. 후일 鄭尙進은 「신불출이 숙청되어 요덕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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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첫 작곡 발표회 후 金順男(오른쪽 끝). |
화가 정관철
미술가들 가운데서는 문예총 미술가동맹 위원장을 지낸 정관철과 가까이 지냈다. 기자는 越北 미술가들의 그림집 「특별한 시대의 화가와 그림들」을 꺼내 보이며 『이 중에서 기억나는 분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화보집을 뒤적이던 鄭尙進의 눈길이 정관철 화가의 그림에 가서 멎었다.
『정관철, 이분하고 참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림을 들여다보며) 이 필치, 그 분의 필치가 분명하네요. 문예총 미술가동맹 위원장이었는데, 화가로서 그는 겸손하고 소박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북한 체제에 충실했기 때문에 金日成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6·25 뒤 어느 전시회에 그는 「청진해방전투」라는 그림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순전히 노동당의 주문에 따른 宣傳畵(선전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소련군 탱크의 좌우에서 붉은 기를 휘날리며 용감무쌍하게 싸우고 있는 조선인민혁명군 유격대원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는데, 청진해방전투 참가자인 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왜곡이었습니다』
鄭尙進은 계속해서 화보를 넘겼다.
『변월룡 화백, 이분은 중학동창인데 내가 북한으로 초청했습니다. 1954년 말, 소련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북한에서 활동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정종녀, 이분은 동양화가인데 가까이 알았습니다. 이분이 그린 그림이 우리 집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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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北화가 정관철(원안)이 知人에게 보낸 편지.『「김일성 원수 빨치산 시대 그림」의 스케치는 무사히 (검열에) 통과됐지만 김일성 원수의 뽀자(포즈)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고치려 한다』는 내용과 함께 그림을 곁들였다. |
洪命熹, 납북된 李光洙 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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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화가 정종녀 |
『그들은 전쟁포로처럼 납치되어 온 처지였고, 사회안전성의 관리 아래 있었기 때문에 만나볼 수는 없었습니다.
李光洙 선생에 대해서는 부수상으로 있던 洪命熹 선생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洪선생께서는 「金日成 수상에게 간청해서 春園(춘원)을 15일 동안 우리 집에서 묵게 했다」고 말씀하더군요. 그때 春園 선생은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洪命熹 선생께서는 지극정성으로 간병했다고 합니다. 결국 春園 선생은 얼마 후 病死(병사)했습니다. 金東煥 선생에 대해서는 나중에 「평양의 어느 신문사에서 교정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북한이 전쟁 중 문화예술인들을 납북해 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추측했다.
『안전계통에 있던 사람들로부터도 문화예술인들을 납치해 간 이유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을 납치해 再교양시켜 공산주의 건설에 활용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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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 |
남로당파에 이어 1955년 소련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越北 문화예술인들과 가깝게 지내던 鄭尙進에게 시련이 닥쳤다.
1955년 9월, 그가 북한 문화예술단을 이끌고 소련 순회공연을 하고 돌아오자, 「사회과학원 과학도서관 관장」이라는 직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좌천이었다.
1955년 10월22일, 그는 박창옥 부수상, 기석복 인민군 중장, 박영빈 당중앙위 조직부장, 전동혁 참사관 등과 함께 노동당 정치위원회에 출두했다.
『그 자리에서 金日成은 「당신들에게는 왜 주체가 없느냐?」고 다그쳤습니다. 북한에서 「主體(주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나흘 후 노동신문에 「주체」에 관한 논문이 실리더군요.
6·25 와중에 「이제 金日成 동지에게 元帥(원수) 칭호를 줄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스탈린의 지시가 있은 후 元帥 칭호를 사용했던 사람이 「주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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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尙進의 초청으로 북한에 와서 북한미술에 많은 영향을 준 변월룡 화백. |
소련파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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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소련 순회공연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북한문화예술단원들과 함께(오른쪽 끝이 鄭尙進). 이 순회공연에서 돌아온 직후 鄭尙進은 숙청됐다. |
『白南雲 선생은 전형적인 조선 노인이었고, 학자였습니다. 말이 적고 마음씨가 착한 분이었습니다. 숙청당해 밀려난 저에게 많은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이 무렵 원로 한글학자이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낸 金枓奉(김두봉)이 찾아왔다. 그는 『鄭선생, 어떻게 사시는가?』라며 안부를 물었다.
鄭尙進은 金日成의 소련파 숙청에 대해 『고등지식을 가진 소련 출신자들이 무식한 자기를 몰아내려 한다고 생각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의 회고다.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간 고려인들은 늘 소련 軍政 당국으로부터 「여러분은 북조선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임시로 여기에 와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소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때문에 저도 소련 국적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客(객)」으로 여기고 있던 우리가 북한의 권력을 두고 金日成과 투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였습니다. 북한 국적을 취득한 고려인 중 48명이 소련파 숙청 때 처형당했습니다』
1957년 鄭尙進은 함께 숙청된 소련파 기석복·전동혁·송진파 등과 金日成에게 「소련으로 돌아가겠다」는 청원을 했다. 이들을 북한에 두어 봤자 골치만 아플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金日成은 쉽게 이들의 출국청원을 수락했다.
북한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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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평양비행장에서 소련문화대표단을 맞아 환영사를 하는 鄭尙進.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許貞淑 문화선전상. |
늘 다정다감하게 그를 대했던 許貞淑의 반응은 싸늘했다.
『鄭동무, 소련에 간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작별 인사를 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동무에게 더 할 말이 없습니다』
1957년 10월, 鄭尙進은 12년 만에 북한을 떠났다.
『슬펐습니다. 저는 평양을 사랑했고, 북한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금강산처럼 아름다운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 특히 붉은 해가 물속에서 쑥 올라오는 삼일포의 일출, 아, 그런 일출경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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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옛 집터 앞에 선 鄭尙進. |
『모스크바에서는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가족들과 함께 그런 집에서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아, 타슈켄트의 고급당학교 입교를 택했습니다. 당학교 기자부에 다니는 동안 매월 학비조로 320루블을 받았습니다. 당시 소련 副相(부상·차관)들의 월급이 그 정도였습니다』
1961년 고급당학교를 졸업한 후, 鄭尙進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던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에 入社(입사)했다. 이후 그는 「레닌기치」의 문화부 담당 기자, 특파기자,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한편, 문학평론가로 활약했다. 1991년 「레닌기치」는 「고려일보」로 제호를 바꾸었다. 그는 「레닌기치」라는 제호로 신문이 나오는 마지막 호인 1990년 12월19일자 「레닌기치」에 『「레닌기치」 독자들과의 작별』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소련제국이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려인 강제이주 때 이미 「소련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저는 소련연방의 붕괴까지는 원치 않았습니다. 소련이 자유롭고 민주화된 나라가 되고 그 나라에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카자흐스탄이 독립된 후 카자흐人들이 어깨를 펴고 다니는 것을 보니, 「역시 독립이란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청진 전투』

鄭尙進 옹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역시, 허정숙 相이 가장 보고 싶습니다』
뜻밖이었다.
―선생님이 북한을 떠나올 때,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는데도 許貞淑이 보고 싶습니까.
『1980년 모스크바에서 북한에 있을 때 친구였던 박길룡 당시 북한 외교부 부부장(차관)을 만났더니, 「許貞淑 동지가 안부를 전하더라. 불쾌한 일이 있었으면 잊으라고 하더라」고 전하더군요. 「착한 말 한마디가 병을 치료한다」는 러시아 속담이 정말 맞더군요. 박길룡의 그 한마디에 서운했던 감정은 사라졌습니다』
―90세가 되어서도 그렇게 정정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40년 동안 매일 아침 1시간씩 아침체조와 달리기, 걷기를 했습니다. 자기 전에는 꼭 찬 우유를 한 잔씩 마셨습니다. 음식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습니다. 무엇보다도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저는 남이 저를 나쁘게 말해도 흘려듣고, 나서서 해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선생님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그는 지긋이 눈을 감더니 이렇게 말했다.
『역시 청진 전투였습니다. 그때를 제외하면, 나는 남을 위해 내세울 만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사진 : 김보배
▣ 鄭尙進은 누구인가?
191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출생했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후 1940년 크질오르다사범大 노문학부를 졸업했다. 1945년 소련 태평양함대 해군 육전대원으로 웅기·나진·청진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원산시 인민위원회 교육부 차장, 함남 인민위원회 교육부 차장, 문예총 부위원장, 김일성종합大 노문학부장, 인민군 병기총국 부국장, 문화선전성 제1副相 등을 역임했다.
1957년 소련으로 귀환한 후 고려인 신문인 「레닌기치」에서 근무하면서 언론인 겸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1992년에는 박갑동·유성철·허진 등 북한 출신 망명자들과 함께 反김일성 조직인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을 창설, 사무총장·공동의장으로 활동했으며, 민주평통 해외자문위원을 지냈다. 1989년과 1990년 서울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