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리뷰] 안혜경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왼편에 대한 탐구》 : 월간조선

1982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안혜경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왼편에 대한 탐구》를 읽는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오민석 문학평론가는 ‘슬픔과 울음의 어두운 통로 끝에서 희뿌옇게 동터올 희망의 순간을 꿈꾼다’고 안 시인을 평한다. ‘희망의 순간’을 느껴보고 싶어 시집을 읽는다.

어둠 속의 어둠을 찾아 치자꽃 화분에 심으면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나지

이따금 귀를 기울이곤 해

창가에 놓인 긴 의자에 몸을 내뻗은 채

불빛 사이로 치자꽃과 어둠이 실내화를 질질 끌면서 돌아디니는 소리를 듣곤 하지 (중략)

나는 종종 어둠의 걸음걸이와 얼굴을 생각하곤 하지

분명 어느 날엔가 아파트 계단에서 마주쳤을 텐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처럼

아마도 옆집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인사를 했을 수도 있어

시장바구니를 무겁게 들고 살짝 몸을 비키면서 말이야

- 시 ‘옆집 사람’ 일부

‘어둠 속의 어둠’이 뭘까.

시인은 ‘어둠 속의 어둠을 찾았다’고 말한다.

때로 ‘어둠이 실내화를 질질 끌면서 돌아다니는 소리’를 듣곤 한다.

‘종종 어둠의 걸음걸이와 얼굴을 생각’하는데 ‘분명 어느 날엔가 아파트 계단에서 마주쳤을 텐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처럼’ ‘아마도 옆집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인사를 했을 수도 있’다. ‘시장바구니를 무겁게 들고 살짝 몸을 비키면서 말이’다.

시인이 말하는 어둠은 시인 내면이다.

내면을 ‘옆집 사람’처럼 낯설게 표현한다. 어둠 속의 어둠, 밤 속의 밤을 향해 내딛는 내면은 ‘나’이면서 ‘내’가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나’ 자신을 다 잘 알지 못한다. 죄다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자신을 어떻게 배반할지 알 수 없다. 통제할 수 있는 ‘내’가 있지만 ‘내’ 안의 어둠, ‘내’ 안의 밤마저 모두 통제하긴 어렵다. 그러나 ‘내’ 안의 것, 그 슬픔도 사랑해야 한다. 슬픔이 ‘나’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눈이 내린다

아우성치는 소리에 눈이 어지럽다 창문을 여니 네가 떠나던 날과 마찬가지로 아우성은 차갑게 차갑게 발등을 누른다 어깨는 먹구름이라도 뭉쳐 있는 양 팔다리도 움직일 수 없다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입술은 어느 방에 숨어 있기라도 한 걸까 네가 떠난 곳은 어때? 거기도 눈이 내리는 거야 네 소식 듣자 하고 몰려오는 눈송이에 손을 휘저으니 너의 외투가 날아 다닌다 손목은 거칠고 떠다니는 안경도 손에 잡힌다 네가 떠난 곳은 어때? 눈 속에 문득 네가 서 있을까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하늘 높이 번쩍 손을 든다 눈은 네가 떠난 곳에서 보내는 밀서 은밀하게 내게만 보내는 거야

- 시 '눈사람' 전문

눈이 온다. 눈이 아우성치듯 온다. 차갑게 차갑게 발등을 누르고 양팔다리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많다. 그런데 화자는 묻는다. ‘네가 떠난 곳은 어때?’라고. 그것도 두 번씩이나 묻는다. 그곳에도 폭설이 내렸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내가 아프면 너도 아팠으면 좋겠다는 심보다. 그러더니 ‘눈 속에 문득 네가 서 있을까 하고 눈사람을 만’드는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눈사람은 ‘옆집 사람’일지 모른다. 내 안의 나, 내가 그리워하는 너 닮은 나….

왼편에 있던 슬픔을 오른편으로 옮겨놓았다

모든 게 더 슬퍼 보였다

얼굴빛은 밝은 회색인데 눈빛은 파르스름하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입김을 뿜어낸다

오른편 책장 뒤에 장난감 병정들은 일렬로 걸어가지 않고

총을 어깨에 멘 채 일제히 슬픈 표정이다

책장 뒤의 공터에서 병정들은 제자리걸음을 한다

네 번째 선반에서 슬픔은 몸을 돌려 언덕길을 올라간다

슬픔의 뒷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속삭임은 치즈케이크 모양으로 선반에 앉아 있고

그 아래 선반에는 어둠의 가방이 있다

물거품으로 변하는 날들이 칭얼대긴 하지만

현관문에서 늘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 소리는 슬픔과 어둠의 전쟁이었을까

가방을 흘깃 열어보니 비둘기의 날갯죽지

가방 옆 주머니를 열어보니 왜가리 한마리

다시 오른편의 슬픔을 왼편으로 옮겨놓았다

- 시 ‘왼편에 대한 탐구’ 전문

왼편, 오른편, 어둠 속의 어둠, 밤 속의 밤… 모두 내면의 실체이다. 입김처럼 내 안에 생명을 불어넣어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말을 걸고 생각을 나누며 느낌을 비유로 묘사한다. ‘오른편 책장 뒤’, ‘책장 뒤의 공터’, ‘네 번째 선반’이라는 서술에서 보듯 마치 실재(實在)하는 것처럼 디테일을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