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사를 주재한 도쿄교구(東京敎區)의 우라노 유우지(浦野 雄二) 신부는 "오늘 우리가 오다 줄리아 님의 '겐쇼우비(顯彰碑)' 앞에 모인 이유는 하늘의 뜻입니다. 400여 년 전 조선에서 태어나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정벌에 따른 피해자로서, 이 섬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생을 마감한 ‘오다 줄리아’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그녀를 위해 다 같이 기도합시다."
신도들은 땡볕아래서도 흐트러짐 없이 머리 숙여 기도했다. 미사는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도미자와 히테코(富澤日出子)라는 67세의 할머니는 "얼마 전 성당의 잡지에 난 글을 읽고 스스로 감동하여 처음으로 이 축제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동안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습니다"고 했다.
도쿄의 하치오지(八王子) 성당에서 단체로 온 츠카모토 세치코(塚本世智子, 54세)씨도 "최근에 이러한 사실을 접하고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무리해서 참석했다"면서 참석하기를 너무나 잘했다고 만족해했다.
우라노 유우지(浦野 雄二) 신부는 미사를 마치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월이 흘러서 변한다 할지라도, 믿음이 변해서는 안 됩니다."
성녀(聖女) 오다 줄리아
필자는 '오다 줄리아'가 이토록 일본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데 대해 무척 궁금했다. 일본인들은 어린나이에 일본으로 잡혀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심을 잃지 않고 어려운 삶을 살았던 사실 자체가 부터 존경을 받게 된 이유라고 했다. 그리고 유배지인 '고우즈 시마'에서도 섬사람들에게 복음과 글을 깨우치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것도 그녀가 추앙받는 이유라고 했다.
옛날부터 이 섬에서는 '줄리아의 묘지에 참배하면 병이 나았고, 소원도 이루어졌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고 했다.
도쿄 환경보전 연구회의 직원 '이노우에 아키노리(60세)'씨는 "오다 줄리아를 참으로 존경한다"면서 "줄리아는 나가사키(長崎)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를 당한 26성인(聖人)에 버금가는 순교자입니다. 오다 줄리아도 이들과 같은 성인의 대열에 끼어야 합니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오늘날 일본 사회는 오다 줄리아와 같은 순수성을 지닌 사람이 없습니다. 동정녀 오다 줄리아를 통해서 인간의 순수성과 존엄성을 배워야 합니다. 순수성이 사라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면서, '내년의 40주년 행사에 꼭 참석 할 것'이라고 했다.
'아리마' 전망대에 올라
필자는 참배객들과 함께 고우즈시마(神津島) 언덕에 있는 '아리마'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에는 높은 십자가 하나가 섬 전체를 굽어보며 서 있었다. 십자가 밑에는 '줄리아 종언(終焉)의 섬'이라고 쓰여 있었다. <종언(終焉)이란 생명이 끝나는 것. 죽음을 맞이하는 것. 또는 임종을 뜻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오다 줄리아는 조선 전쟁의 고아였다. 크리스찬인 아우구스치노(小西行長)에 의해서 일본에 와 양녀로 자랐다. 카토릭 세례명은 줄리아였다......1612년 크리스찬 탄압에 의해 체포되어 오오시마(大島)·니이지마(神島)를 거쳐 고우즈시마(神津島)에 이송되었다......쇼와 45년(1970년) 5월 25일. 제1회 오다 줄리아 제(祭)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사연은 서글펐으나 전망대의 경관은 아름다웠다. 눈앞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발밑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피어있었으며 작은 산새들이 허공을 가르며 노래하고 있었다.
'아! 여기가 바로 천국이로구나.'
그러나, 그 당시의 오다 줄리아는 이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철모르는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이국땅에 잡혀온 그녀는 한(恨) 많은 세월 눈물로 적시다가 이 섬에 묻혔으니.......
"여름 오면 겨울 잊고 가을 오면 여름 잊듯
그렇게 살라 한다......(중략)
구름은 자꾸 손 내저으며 그만 두라 한다.
산다는 것은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시인 도정환은 지나간 세월의 아픔은 잊어버리고 오는 세월을 맞아 살라고 했다. 산다는 것은 지나간 것을 잊는 것이란다. 전망대를 내려오자 건너편 비탈진 산등성이에 외롭게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한 눈으로 보아 풍상(風霜)의 세월을 모질게 살았던 소나무라고 생각 되었다. 저 소나무도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전나무처럼 등성이를 넘어오는 거센 바람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다 줄리아도 그랬을 것이다.
<집 옆으로 몇 그루의 제대로 자라지 못한 전나무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나,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이 모두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등성이를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가를 알 수 있으리라.>
고우즈 시마(神津島)는 절해고도로서 정치범들이 유배되던 일본 땅 밖의 섬이었다. 이 섬에 유배된 사람은 이곳에서 죽어야 했고, 죽으면 유배인 묘지에 묻혀야 했다. 줄리아의 박해에 대해서는 일본에 온 '마치우스'라고 하는 선교사가 예수회 앞으로 보낸 보고서(1613년 1월 12일자)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고 한다.
오다 줄리아 종언(終焉)의 섬!
수 백 년이 지난 오늘도 이토록 일본인들의 발길이 잦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오다 줄리아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세운 신념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