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야마토(大和) 정권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를 돕기 위하여 조선반도에 원군을 보냈다. 그 후 663년 금강 하류의 백촌강(白村江)에서 나·당(羅唐)의 수군과 전쟁을 벌였다. 이른 바 '백촌강 전투'다. 야마토(大和) 정권은 이 전쟁에서 패배하자 신라와 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서일본 각지에 성을 쌓게 되었다. 664년에는 변방을 지키는 병사를 일컫는 사키모리(防人)를 각지에 파견했고, 적의 침공을 알리는 봉화 설치와 수성(水城)을 구축하였다. 665년에는 오오노(大野)·기이(基肄)·나가도(長門)성을 구축하였고, 667년에는 야마토에 다카야스(高安)성, 사누키(讚岐)에 야시마(屋嶋)성을, 쓰시마(對馬島)에 가네다(金田)성을 구축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와 있는 백촌강 전투와 그 후 일본이 나·당(羅唐) 연합군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기쿠지성(鞠智城)
필자는 지역 유지인 도미야마 도시하루(富山年春, 58세)씨의 안내로 기쿠지성(鞠智城)을 둘러보았다. 성터는 나지막한 야산의 정상에 있었다. 도미야마 씨는 '해발 160미터에 불과하지만 주변의 산봉우리들을 연결하여 축조한 포곡식 산성'이라고 했다. 일본의 여느 성처럼 웅장한 천수각이나 해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레가 3.5 킬로미터나 되는 큰 규모의 성터였다. 성터의 곳곳에서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성터에서는 어린이들의 그림그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으며, 현지 방송에서 이를 중계하고 있었다.
이 성은 일종의 병참기지였다. 백제가 멸망하고, 백촌강 전투에서 패한 일본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본에 쳐들어오는 것을 대비하여 이 성을 쌓았던 것이다. 제1차 방어선이 쓰시마(對馬島)의 가네다(金田)성이었고, 2차 방어선이 후쿠오카 현의 다자이후를 지키기 위한 오오노(大野)성과 사가(佐賀) 현의 기이(基肄)성이었으며, 마지막 보루가 기쿠지성(鞠智城)이었다는 것이다.
역사공원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여러 명의 안내자들이 목에 표찰을 걸고 관광객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는 70세의 다나카(田中) 씨는 기다리던 손님을 반기 듯 밝은 표정으로 필자를 맞이했다.
"이곳이 그 당시의 쌀 창고였습니다. 이곳은 병사들의 숙소였습니다. 이곳은 무기 창고였습니다. 건너 편 저 산이 봉화대였습니다." 다나카(田中) 씨는 정성스럽게 안내하면서 하나하나 설명했다.
고대 조선식 산성
자유 백과사전 「Wikipedia」에도 '기쿠지성(鞠智城)은 고대 조선식 산성의 하나'라고 표기되어 있다. 다분히 백제와 관련이 있었다는 말이다. '살아있는 백제사(이도학)'에도 "성 안에서는 초석과 탄화된 벼·조·밀 등의 낱알과 더불어 한국의 기와들이 20개소에서 출토됨에 따라 이 산성의 축조자가 백제계의 인물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기쿠지성(鞠智城)'의 상징이라고 하는 팔각형의 '고로우(鼓樓)'가 왠지 눈에 익었다. 이 성의 안내 책자에도 이렇게 쓰여 있었다.
<국내의 산성중에서 최초로 8각형 건물이 발견되었다. 직경 90센치의 기둥이 3중으로 세워진 3층 건물이다. 높이 15.8미터의 건물이며, 기와의 무게는 약 76톤이다. 한국의 이성산성(二聖山城 :하남시 이성산에 있는 성)에도 같은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성은 1959년에 현(縣) 지정 유적지가 되었고, 1967년부터 발굴이 시행되었다. 팔각형 건물 '고로우(鼓樓)'는 1999년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2004년에 나라의 사적(史跡)으로 지정되었다.
필자는 '기쿠지성(鞠智城)'이 한국의 이성산성(二聖山城)과 흡사하다는 것을 이 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필자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자료 보내온 이노우에 씨
기쿠지(菊池) 시의 근거리에서 살고 있는 오이타 현 의원인 이노우에(井上) 부부가 필자에게 자료를 보내 왔다. 물론 기쿠지성(鞠智城)에 관련한 것이었다. 일부러 성을 답사하여 조사했으며, 박물관에 부탁하여 구한 자료를 한 보따리 보내왔다. 이노우에씨의 부인 이노우에 유코(井上 裕子, 57세) 씨는 정성스러운 편지 까지 동봉했다.
<일전에 황망 중에 기쿠지성(鞠智城)에 대한 얘기를 자세하게 나누지 못해서 미안 합니다. '한국과 일본이 고대로부터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촌강 전투가 '백제의 무장이 일본에 망명하여 재기를 노리는 전쟁이었다'는 것과 패전한 일본이 기쿠지성(鞠智城) 등 여러 개의 성을 쌓게 되었다는 사실을 공부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동행하여 안내를 하지 못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꼭 동행해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친절하고 열성적인 이노우에(井上) 부부는 필자를 위해 현지를 방문하고 자료까지 구해서 보내왔다. 특별한 이익이 없는 일에도 서슴없이 뛰어다니는 그들의 지극 정성이 사뭇 감동적이었다.
기쿠지(菊池)와 기쿠지성(鞠智城)
이 지역의 이름은 구마모토(熊本) 현(縣)의 기쿠지(菊池)다.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인구 5만의 작은 도시다. 이 시의 심볼인 국화(菊)가 어울릴 만큼 꽃이 많은 도시다. 그리고 아소산으로 부터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이 지역의 명물이다. '기쿠지 계곡'은 일본 내에서도 맑은 물과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다. 이 계곡에 이토록 맑은 물이 흐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계곡에는 음식점이 하나도 없다. 계곡 입구에 매점이 하나 있을 뿐이다. 계곡을 걸으면서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 것이 또 다른 절경이다.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 중에 '세세라기(細流)'가 있다. 일본의 대중가요에도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이 세세라기(細流)는 "여울에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말한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까닭에 이토록 깨끗한 자연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기쿠지(菊池) 시의 <시민 헌장>에도 “기쿠지 시민은 자연을 사랑하며 초록의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자연 보호는 시민의 몫이라는 뜻이다.
기쿠지성(鞠智城)의 이름은 지역 이름인 기쿠지(菊池)와 관계없이 1300년 전 정치 중심이 야마토(大和: 奈良盆地)에 있었던 이유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무더운 여름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그리운 계절이다. 계곡도 역사도 깨끗한 흐름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