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일본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어디를 가나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일부러 골목길을 가보기도 한다. 마치 청소 감독원처럼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그러나, 골목길 어디도 나무랄 수 없을 만큼 깨끗하다.
‘일본 사람들은 밥도 안 먹고 청소만 하나?’
식당에 가도, 화장실에 가도 청결은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다. 이것은 아마도 ‘청소 매뉴얼’에 의한 결과물 일 것 같다. 안내 데스크에 가서 길을 물어도 질문에 비해 답변이 너무 길어 오히려 짜증이 날 때도 있다. 아마도 ‘매뉴얼’ 대로 답변하는 것이리라.
서점에 가도 ‘매뉴얼’ 일색이다. ‘매뉴얼’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이 유난히 많다. 예를 들어 ‘기획 업무 매뉴얼’ ‘판매관리 매뉴얼’ ‘위기관리 매뉴얼’ ‘인사총무 매뉴얼’ 등 업무 지침서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일본에는 왜 ‘매뉴얼’이 이토록 많은 것일까?
‘로마가 서방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매뉴얼이었다’
한국 소프트웨어진흥원 유영민 원장은 한 신문의 기고에서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를 언급하면 멋진 기병이나 중무장 보병을 떠올리게 된다. 로마제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벤허’에서도 전차와 기병은 중요한 소재로 쓰인다. 그러나 전성기 로마군의 힘은 화려한 전차와 기병이 아니라 체계적인 ‘매뉴얼’과 이를 철저히 지키는 병사들의 마인드였다”고 했다.
<로마군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숙영지부터 건설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병사들은 숙지된 ‘매뉴얼’에 따라 자리를 잡고, 연설대와 성화대를 짓고 천막을 설치했다. 전쟁에서 패하는 것은 용서해도 ‘매뉴얼’을 안 지키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로마군과 ‘매뉴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셈이다. 체계적인 ‘매뉴얼’과 기본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바로 대제국 로마를 만든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로마는 체계적인 ‘매뉴얼’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것이다.
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류기업으로 가는 길은 ‘매뉴얼’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기업들도 최근 들어 분야별로 ‘매뉴얼’을 작성한다. 하지만 ‘매뉴얼’의 수준도 걸음마 단계일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자세에도 문제가 있다. 다분히 형식에 치우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수년 전에 들은 회사원의 얘기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회사원은 도쿄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일본인 학교에 보냈다. 공부도 잘 하였고 말썽도 부리지 않았다.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숙제도 밀리지 않고 잘했다. 더욱 기특한 것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날 입었던 옷을 잘 접어서 머리맡에 놓는 등 자기생활이 완벽하여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자 채 한 달이 못되어 양상이 달라졌다고 했다. 옷은 옷대로, 양말은 양말대로 춤을 추고 책가방도 내동이치더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엄마는 가을철 낙엽 줍듯이 아이들의 옷과 양말, 책가방을 치우면서 한탄해 했단다.
무슨 이유일까? 학교의 잘못일까? 부모의 잘못일까? 아마도 가르치는 사람들의 체계적인 ‘매뉴얼’ 문제인 듯싶다.
‘매뉴얼’은 업무의 효율화, 활성화, 창조화
일본인들은 “매뉴얼을 보면 업무를 하는 데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묻지 않고서도 업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업무의 집중도를 높일 수 있으며, 스스로 창의적인 생각을 키울 수 있는 효과를 가져 온다”고 했다.
유영민 원장도 “혹자는 ‘매뉴얼’은 창조성의 결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매뉴얼’은 기본을 지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기본이 지켜지지 않는 기업에서 창조성은 백해무익하다”고 했다.
‘매뉴얼’의 정의는 경영의 기본방침과 가치관을 명시하여 개개인의 업무가 기대되는 수준으로 수행되도록 구체적인 실시사항, 순서, 요구수준, 업무완성을 위한 포인트와 골격 등을 기술해서 업무 수행자가 독자적으로 학습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급자가 OJT(On the Job Training)를 할 경우 지침으로 하는 업무 순서를 말한다.
‘매뉴얼’의 역할은 업무의 효율화와 활성화 그리고 창조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매뉴얼’이 있으면 무엇 하랴. 그것을 잘 지키려는 마인드가 뒤따라야 한다. 아무리 좋은 ‘매뉴얼’이라고 하더라도 사원 스스로 ‘매뉴얼’을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혼(魂)이 없는 매뉴얼’은 일상의 업무에 스며들지 않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일본 대기업의 기획실장인 야마다 카츠히코(山田一彦, 57세)씨는 “매뉴얼은 엄격하면서도 창조적인 지침서”라고 했다. 그러나, 작성한 ‘매뉴얼’ 자체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매뉴얼’을 활용하는 교육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매뉴얼’을 만드는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에 주관적인 요소가 들어있어 객관성이 결여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소설가 은희경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서 매뉴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인간이 가진 오감과 뇌의 용량을 생각해 보세요.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가 일상에서 제공받는 정보는 엄청난 양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는 것을 모두 기억한다면 삶을 통제할 수가 없겠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사고회로에 적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기억의 질서예요. 일종의 ‘판단매뉴얼’인 셈이죠. 그런데 그 ‘매뉴얼’이 극히 주관적이고 부분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어요.>
‘매뉴얼’로 해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불가항력이라고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일까? 아니다. 그‘ 매뉴얼’을 기본으로 하여 창조성을 발휘해야 한다.
<‘매뉴얼’로 해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인간은 대개 우연이라는 말로 뭉뚱그려버리지만, 사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법이에요. 그 인과관계를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기존 ‘매뉴얼’의 질서에 적합하지 않아 누락되어 있었던 것뿐이죠.>
어찌했던 국가도 기업도 ‘매뉴얼’이 없이는 선진화를 이룩할 수 없다.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사건 사고들도 대부분 ‘매뉴얼’이 없어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작은 일에서부터 ‘매뉴얼’을 만들어 보자.
작은 것이 하나하나 모이다 보면 더 큰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