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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CEO
  1. 리더십·전략

이한우의 知人之鑑 〈18〉 나라를 폭망(暴亡)케 한 지도자들

군왕이 불혹(不惑)하지 못하면 나라도 망한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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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梁) 개국군주 무제(武帝), 불교에 빠져들었다가 비참하게 죽어
⊙ 천하통일한 진시황, 교만과 불로장생의 꿈에 인사 그르치고 나라 망쳐
⊙ 한 무제, 실정(失政) 많았으나 말년에 간언(諫言) 받아들여 폭망 모면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양 무제. 개국군주이면서도 불교에 탐닉해 나라를 망쳤다.
  나라가 망하는 이유나 원인은 수없이 많다. 외우(外憂)와 내환(內患)으로 나뉘는데 외부의 위협이 있어도 내부가 단결돼 있으면 나라가 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사례는 제외해야 할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실은 내환, 그중에서도 내분(內紛)이 결정적이다. 조선이 일본에 전쟁 한 번 못해보고 망한 것은 그래서 더 치욕스럽다.
 
  내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다양한 진단이 있겠지만 결국은 리더십 붕괴 혹은 무능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한때 제국을 건설할 만큼 뛰어난 역량을 보였던 제왕이 자기 당대나 바로 다음 대에서 나라를 망하게 한 요인을 추적함으로써 그 그림자를 살펴보자.
 
 
  양(梁) 나라를 일으킨 무제(武帝)
 
  중국 역사에서 후한(後漢)이 멸망한 다음 해부터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기까지 서기 221년부터 589년까지를 위진 남북조(魏晉 南北朝) 시대라고 한다. 그중에서 남조는 송(宋)·제(齊·남제)·양(梁)·진(陳) 네 나라를 함께 부르는 말이다. 그중 세 번째인 양나라가 오늘의 주인공 무제(武帝)가 세운 나라다. 이름은 소연(蕭衍·464~549년)이다.
 
  그는 제나라에서 벼슬하여 옹주자사(雍州刺史)가 돼 양양(襄陽)을 지켰다. 제나라 말인 영원(永元) 2년(500년) 황실이 어지러워지자 군사를 일으켜 도읍인 건강(建康·南京)을 함락시킨 뒤 정권을 장악하면서 양왕(梁王)에 봉해졌다. 이어 502년 제나라 화제(和帝)를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양(梁)이라 했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였으니 말 그대로 영웅(英雄)이었다.
 
  즉위 초 그의 모습에 대해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이렇게 전한다.
 
  〈상(上)은 몸소 빨래한 옷을 입었고 항상 먹는 음식은 오직 채소로만 만들었다. 지방 고위 관리들을 고를 때마다 힘써 청렴하고 공정한 사람을 뽑았으며 모두 앞에 불러서 접견하고 정치의 도리를 가지고 권고했다.〉
 
  그는 유술(儒術·유학)을 국학(國學)으로 재건했고 지방에서 효도와 청렴으로 이름난 인재들을 올려 썼다. 《주역강소(周易講疏)》 《중용강소(中庸講疏)》 《예기대의(禮記大義)》 《효경강소(孝經講疏)》 《효경의소(孝經義疏)》 《공자정언(孔子正言)》 등 유학의 경전에 대한 그의 주석은 전문가 수준에 이르렀다. 문학에 뛰어났으며 음률(音律)도 잘 알아 스스로 작곡을 했으며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무(文武)를 갖춘 준걸이었다.
 
 
  불교에 빠져든 황제
 
  재위 30년을 바라볼 무렵부터 무제는 불교에 흠뻑 젖어 들었다. 그는 중대통(中大通) 원년(529년) 9월 본인이 세운 동태사(同泰寺)에 행차하여 승려와 비구니, 그리고 일반 남녀신도 등이 아무 차별 없이 참여하는 법회인 사부무차대회(四部無遮大會)를 열었다. 황제는 어복(御服)을 벗고 법의(法衣)를 입었으며 마음을 깨끗이 하고 번뇌와 사욕을 버렸다. 여러 신하도 많은 돈을 내고서 삼보(三寶-불보·법보·승보)에 기도하고 황제보살을 받들어 속죄하였다. 승려들은 잠자코 허락하였다. 이후 황제는 환궁했다.
 
  문제는 그것이 지나친 데 있었다. 사마광은 이렇게 말한다.
 
  〈상은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공손하고 검소했으며 학문을 널리 익혔고 글을 잘 지었으며 정사를 보는 데도 부지런하여 겨울에도 새벽 3~4시면 일어나 정사를 보면서 추위를 무릅쓰며 붓을 잡아 피부가 얼어서 터졌다.
 
  (그러나) 당시 왕후(王侯)와 그 자제들은 대부분 교만하고 음란했으며 불법(不法)을 일삼았다. 황상은 연로하여 국정에 싫증을 내고 있었다. 또 오로지 불법(佛法)의 계율에만 정성을 쏟아 매번 무거운 죄를 판결할 때마다 하루종일 즐거워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반역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는데도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용서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왕후들은 더욱 횡포를 부려 어떤 때는 대낮에 도시의 길거리에서 사람을 죽이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한밤중에 공공연하게 약탈을 했다. 또 죄를 짓고 도망친 사람이 왕후들의 집에 숨으면 유사(有司-해당관청)가 감히 집을 뒤져 체포할 수 없었다. 상은 이런 폐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애로움에 깊이 빠져 금지시킬 수가 없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전형이다.
 
  〈중대동(中大同) 원년(546년) 3월 경술일에 상(이때 나이 83세였다)이 동태사에 행차했다가 사성(寺省·절에 마련한 천자용 임시숙소)에 머물면서 《삼혜경(三慧經)》을 친히 강론했다. 여름 4월 병술일에 강론을 해산했는데 이날밤 동태사의 부도(浮屠)에 화재가 나자 상은 말했다.
 
  “이는 마귀의 짓이다. 마땅히 크게 법사(法事-절의 신축)를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곧장 조서(詔書)를 내려 말했다.
 
  “도가 높으면 마귀가 성하고 선(善)을 행하면 장애가 생기니 마땅히 힘을 다하여 더욱 토목사업을 일으켜 지난날보다 두 배로 늘리도록 하라!”〉
 
  이리하여 12층짜리 부도를 짓기 시작했고 거의 완성되려는 시점에 후경(侯景)의 난(~548년)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됐다. 이듬해 무제는 후경에 의해 유폐됐다가 굶어 죽었다. 이후 간문제(簡文帝)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2년 후인 551년에 후경에 의해 살해됐고 양나라는 이로써 사실상 멸망했다.
 
  《논어(論語)》 선진(先進)편에서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
 
  삶의 정점에 오른 황제가 죽음만을 걱정한 결과는 곧 제국의 초단명(超短命)이었다.
 
 
  진시황의 불로장생(不老長生) 꿈이 부른 비극
 
진시황. 천하통일 후 교만해지면서 망국의 길을 열었다.
  기원전 221년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秦)나라 왕 영정(嬴政)은 자신의 다움[德]은 삼황(三皇-복희·신농·황제)을 겸했고 공로[功]는 오제(五帝-소호·전욱·고신·요임금·우임금)를 능가한다고 여겨 스스로를 황제(皇帝)라고 칭했다.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부른 것도 영정이 처음이다.
 
  그의 교만함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시호법을 없앴다. 그는 이렇게 명했다.
 
  “죽고 나서 행적을 가지고 시호를 정한다면 이는 아들이 아버지를 논하는 것이며 신하가 임금을 논하는 것이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짐은 시(始)황제이고 후대에는 수를 계산해 2세, 3세 하여 만세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할 것이다.”
 
  진나라의 멸망 원인을 과도한 법치주의나 엄격한 군현제(郡縣制)에서 찾는다. 그것은 본질적 진단이라 하기 어렵다. 위대한 성공이 부른 이 교만함이야말로 진나라의 폭망을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무궁함에 대한 그의 집착은 자신의 불로장생(不老長生) 기획으로 나타난다. 그가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한 지 2년 만인 기원전 219년(시황제 28년)에 그는 동쪽의 제(齊)와 연(燕)을 순행하다가 신선과 불사약(不死藥)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 공자의 말대로 불혹(不惑)해야 할 나이였는데 혹(惑)하고 만 것이다.
 
  여기서 공자가 말한 혹 혹은 불혹의 의미를 알고서 이야기를 진행하자. 《논어》 안연(顔淵)편에서 제자 자장(子張)이 혹이 무슨 뜻인지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자기가 사랑한다고 해서 (이미) 죽은 것도 살기를 바라고 자기가 미워한다고 해서 (버젓이) 살아 있는 것도 죽기를 바라는 것이 혹이다.”
 
  이 말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소관이지만 죽고 사는 것은 사람의 소관이 아닌데 그 경계를 헷갈리는 것이 혹이라는 뜻이다. 앞서 공자가 자로에게 했던 말과 그대로 통한다. 인간사(人間事)는 인간사의 범위를 넘어서서 해결을 시도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논어》의 여러 곳에서 공자는 “지자(知者)는 불혹한다”고 말한다. 이때 지자는 그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보다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 혹은 인간사의 사리(事理)를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국 40세에 불혹이라고 했으니 사람을 볼 줄 알고 사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매한 자가 불혹할 수도 있으나 권력에 도취되면 아무리 뛰어난 자도 교만으로 인해 불혹하기 마련이다.
 
 
  인사 그르쳐 망국을 부르다
 
  다시 진시황의 이야기다. 당시 승상(丞相·재상)은 이사(李斯)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는 승상으로서 진시황의 혹에 대해 간언했어야 했다. 시황제 35년(기원전 212년) 이사는 유학을 금지할 것을 청했다. 소위 분서갱유(焚書坑儒)다. 그리고 같은 해 진시황은 아방궁과 자신의 능인 여산(驪山)을 짓게 했다. 이때는 스스로를 짐이라고 부르지 않고 신선을 뜻하는 진인(眞人)으로 불렀다. 그리고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여 버렸다.
 
  기록을 유심히 보면 그의 장자 영부소(嬴扶蘇)만이 직간(直諫)을 했다.
 
  “유생들은 모두 공자의 말씀을 외우고 본받는데 지금 상께서는 무거운 법률로 이들을 묶어 버리시니 신은 천하가 불안할까 걱정입니다.”
 
  진인은 화를 내며 부소를 북쪽으로 쫓아 흉노 정벌을 위해 나가 있던 몽염(蒙恬)의 군대를 감독하라고 했다.
 
  시황제 37년(기원전 210년) 천하를 순행하며 산동 지방을 돌아보던 시황제는 병이 났다. 그해 가을 하북성 사구평대란 곳에서 시황제는 눈을 감았다. 그가 혹하여 어두운 정사를 펼친 지 10년이었다. 대가는 컸다. 시황제는 조고(趙高)라는 환관에게 영부소에게 내리는 유서를 전했다.
 
  아마도 지난 10년간 바른 정사를 펼쳤다면 조고는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정에 바른 신하들이 있는 한 그 같은 꾀를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황제와 조정 신하들 사이를 오가며 바른 신하들이 대부분 제거되고 주변에는 굽은 신하들만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조고는 잘 알고 있었다. 조고는 진시황의 또 다른 아들 영호해(嬴胡亥)를 설득했다. 시황제가 영부소를 죽이고 영호해를 후사로 삼으라고 명한 것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관건은 이사였다. 이사에게 이 계획을 전하자 이사는 처음에는 반대했다.
 
  “어찌 나라를 망칠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조고는 이사가 라이벌로 여기고 있던 몽염의 존재를 언급하며 자극했다. 이사는 이를 묵인하기로 했다. 이로써 모든 일은 결정됐다. 결국 영부소, 몽염, 이사 등은 죽고 호해와 조고의 세상이 됐다. 기원전 206년 호해와 조고도 모두 죽고 진나라는 망했다. 이건 누가 봐도 시황제가 망하게 만든 것이다. 인사(人事)를 그르친 결과다.
 
 
  구렁텅이에서 겨우 빠져나온 한(漢) 무제(武帝)
 
한무제. 실정이 많았지만 말년에 뉘우쳤다.
  한나라 무제는 중국 역사에서 공과(功過) 논란이 있는 제왕이다. 사방으로 영토를 넓힌 면에서는 시황제를 능가한다. 예악을 정비해 국내 정치의 제도적 안정을 가져온 사람도 무제다. 그의 업적은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런 그도 말년에 성공에 도취돼 문성장군(文成將軍)이나 난대(欒大)니 하는 방사(方士)를 통해 신선의 술법에 빠져들었다. 무제 원정(元鼎) 4년(기원전 113년)에 제나라 사람인 공손경(公孫卿)이 전설 속의 인물 황제(黃帝)가 마지막에 죽지 않고 용을 타고서 후궁 70여 명을 거느리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자 이렇게 말한다.
 
  “아! 정말로 황제와 같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처자를 버리기를 헌신짝 벗듯이 할 것이다.”
 
  그는 신하들의 간계에 넘어가 태자를 죽이는 일까지 저질렀다. 어떤 면에서는 진시황을 능가하는 암군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정화(征和) 3년(기원전 90년) 전천추(田千秋)라는 사람이 글을 올려 태자의 무고함을 호소하자 무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이어 전천추는 방사들의 허망함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지적했다. 이에 무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에 어리석고 미혹되어 방사들에게 속아 넘어갔다. 천하에 어찌 신선이 있겠는가? 밥 덜 먹고 약을 먹으면 질병은 줄일 수 있다.”
 
  그 후에 후사(後嗣)에 대해서도 미리 대비를 갖춘 다음 후원(後元) 2년(기원전 87년) 세상을 떠났다. 말년의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는 폭망을 면하고 소제(昭帝)를 거쳐 선제(宣帝) 때 다시 한 번 중흥의 시대를 맞이했다. 무제에 대한 사마광의 사평(史評)으로 결론을 대신한다.
 
  〈무제는 끝까지 사치하고 큰 욕심을 갖고서 번거로운 형벌을 사용했으며 세금을 무겁게 거두어 안으로는 궁실을 사치스럽게 꾸몄고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들에게 일을 벌였으며 신선의 괴이함을 믿고 현혹되어 순행하는 데 절도가 없었고 백성들로 하여금 피폐하게 하여 도적이 되게 했으니 이는 진시황과 다를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는 이로써 망했는데 한나라는 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무제는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도리를 존중했고 스스로 지켜야 할 도리를 알았으며 충직한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뛰어난 사람을 좋아했으며 게으르지 않았고 상벌이 엄정했으며 만년에는 허물을 고치고 후사를 돌아보아 부탁하는 적당한 사람을 얻었으니 이것이 그가 망한 진나라와 같은 허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끝내 망한 진나라와 같은 재앙을 면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입력 : 201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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