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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19〉 전남 담양의 관방제림과 이몽룡·성춘향 로맨스의 미스터리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등 한국 3대 고전소설의 주인공은 다 호남 사람?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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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향이는 전북 남원, 홍길동은 전남 장성, 심청은 전남 곡성이 고향?
⊙ 춘향이의 배필 이몽룡은 경북 봉화의 실존 인물, 《춘향전》은 ‘영호남 커플’의 사랑
⊙ 이몽룡의 실제 모델 성이성은 암행어사로 남원에만 두 차례 들러
⊙ 아버지 따라 처음 남원에 간 때가 소설 속 나이와 흡사
⊙ 담양부사 지낼 때 매년 홍수로 골치앓던 담양천에 관방제림 축조
⊙ 남원에는 춘향사당뿐 아니라 춘향 무덤도 있지만 누구 것인지는 불분명
죽녹원.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을 흔히 한국의 3대 고전소설이라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한국 3대 고전소설의 주인공들이 다 전라도 출신이다. 원전(原典)에 나온 것도 있고 이 고장이 ‘우리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도 있다. 딱히 시비 걸 일은 아니지만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문학작품의 배경이 호남인 게 재미있다.
 
  《춘향전》의 주인공 성춘향은 전라북도 남원이 고향이다. 남원에서 유명한 광한루(廣寒樓)에 가면 실제로 춘향사당(祠堂)이 있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전라남도 장성이 고향이다. 장성에 홍길동 생가(生家)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복원돼 있다. 이에 질세라 전남 곡성에 가면 ‘심청이 마을’이 있는데 이것은 개인이 만든 한옥이다.
 
  성춘향과 이몽룡의 러브스토리의 무대는 남원인데 실제로 이몽룡의 모델이 된 인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전라남도 담양이다. 담양에서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인 죽녹원 앞 관방제림을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봉화이니 요즘으로 치면 ‘영호남 커플’인 것이다.
 
죽녹원의 길에는 재미있는 말들이 붙어 있다. 운수가 대통하고 싶거나 변치 않는 사랑을 꿈꾸는 이들은 죽녹원이 추억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전남 담양은 최고의 자연도시다. 40여 년 전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산림녹화 정책을 펴자 여기에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심어졌다. 메타세쿼이아가 선택된 이유는 하나다. 속성수(速成樹)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나무들은 도시를 살리는 자원이 됐다. 아마 나무를 심은 이들은 꿈에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담양은 어느 때 가도 좋지만 추색(秋色) 완연한 가을이 제격이다. 가을에는 매년 세계대나무박람회가 열린다. 세계대나무박람회는 요란한 선전만큼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박람회장에 세워진 캠프는 대부분 국내 대나무 관련 회사들의 제품 홍보, 판매장과 다름없다. 개중에는 대나무와 관계없는 한복·발마사지기 코너도 있다.
 
  외국관도 있는데 대나무의 효능, 대나무와 인간의 관계 같은 내용을 기대했지만 외국 기업인지 불분명한 업체들의 홍보물만 난무하고 있다. 왜 ‘세계’라는 말까지 붙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실망감을 박람회장 옆 죽녹원(竹綠苑)이 단번에 청량하게 씻어준다.
 
이 힘찬 기상이 느껴지는가? 이래서 대나무는 선비가 사는 곳이 아니면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파란 대밭의 광경이 매우 인상적인 죽녹원이 있는 산의 원래 이름은 성인산이라고 한다. 바로 옆에는 담양향교가 내려다보인다. 성인산의 규모는 5만여 평에 달하는데 죽녹원으로 조성되기 전까지는 담양의 특산물인 죽세공품의 재료를 조달하는 대나무 밭에 불과했다고 한다. 관리도 엉성해 볼품없는 야산이 2003년 5월 일변한다.
 
  담양군이 대나무 정원으로 조성하자 죽녹원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메타세쿼이아 길과 함께 담양의 상징이 됐다. 고 박 대통령의 산림녹화에 이은 지방자치단체장의 훌륭한 결정이라 하겠다. 울창한 대밭에는 2.2km의 산책로가 있는데 이름이 다 재미있다. 운수대통길-죽마고우길-철학자의 길 같은 것들이다.
 
전남 담양의 관방제림 입구다.
  관람객들은 운(運)에 굶주렸는지 운수대통길을 즐겨 찾는다. 죽녹원은 산 위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높은 위치에 자리해 담양의 또 다른 상징인 메타세쿼이아 길이 한눈에 보인다. 직접 걸을 때와 위에서 내려다보는 메타세쿼이아 길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죽녹원을 걷다 보니 낯익은 인물이 눈에 띄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 부부가 방문했을 때의 사진이 있는데 옆에는 당시 비서실장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서 있다. 죽녹원에서 본 담양의 경치 중 관심을 끈 것은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 길 사이 하천과 주변 제방의 나무들이다. 영산강 상류를 둘러싼 제방에 심은 나무에는 공식 명칭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된 관방제림이다.
 
관광명소가 된 관방제림. 이 제방을 만든 이들은 몇백 년 후 후손들이 이 제방을 즐길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관방제림 길은 늦가을에 가면 낙엽이 수북이 깔려 있다. 세상 어떤 화가가 그린 채색화(彩色畵)보다 더 화려한 낙엽이 관광객들의 발길에 바삭바삭 밟혀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길로 접어드는 순간 입구에 서 있는 표석(標石)의 내용이 흥미를 자극한다. 표석에 쓰인 글을 따라서 읽어본다.
 
  관방제림은 말 그대로 관(官·정부)이 만든 제방을 보호하기 위한 나무(防堤林)라는 뜻이다. 2km에 달하는 숲에 200~300년 된 노목들로 가득한데 종류는 푸조나무, 팽나무, 개서어나무 등이다. 북으로 추월산과 용추봉, 남으로 덕진봉과 봉황산, 동으로 광덕산에 둘러싸인 영산강 상류, 담양천은 해마다 홍수를 겪었다.
 
전남 담양의 관방제림을 처음 만든 담양목사 성이성은 소설 《춘향전》 속 이몽룡의 모델이었다.
  그러던 1648년, 인조 26년에 이 고을 부사(府使)가 치수(治水)를 위한 대담한 결정을 한다. 담양천변에 제방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면 제방도 튼튼해지고 나무 자체로도 물의 범람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바로 그 부사의 이름이 성이성(成以性·1595~1664)이다.
 
  본관이 창녕인 성 부사의 행적은 《인조실록》 《국조방목》 《영남인물고》 등에 등장한다. 그의 아버지는 승지를 지낸 성안의(成安義)인데 아들 성이성은 1610년 진사가 됐지만 광해군 때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인 1627년에야 비로소 과거를 치러 식년문과 병과에서 급제했는데 당대의 반골(反骨)이었다고 한다.
 
  성이성은 사간원정언-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사헌부지평을 지낸 뒤 1637년 사간원헌납이 됐는데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국정을 농단한 세도가 윤방(尹昉)·김류(金瑬)·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에 대해 ‘오국불충(誤國不忠)의 죄를 저질렀다’고 직언하기도 했다.
 
  성이성의 대찬 면모는 그 한 해 전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고립돼 있을 때 왕을 구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출전하기도 했는데 길이 막혀 더 이상 남한산성에 접근할 수 없게 되자 경상감사 휘하로 들어갔다.
 
  대쪽같은 성격 때문에 중앙에서 승진이 좌절된 성이성은 진주-강계-담양-창원 등 5곳의 외직(外職)을 돌았는데 그중 하나가 담양부사였다. 1648년 성이성이 쌓은 제방은 200여 년 뒤인 1854년 담양부사 황종림(黃鍾林)이 보수했다. 관방제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황종림이 연인원 3만명을 동원해 이곳을 다듬은 뒤의 일이다.
 
  성이성은 고을마다 송덕비가 세워졌는데 강계부사 때는 이 고장의 특산물인 인삼에 붙는 삼세(蔘稅)를 면제해 줘 ‘관서활불(關西活佛)’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혼자 글 읽기를 좋아하고, 찾아오는 이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으며, 재물에 초연해 늙어서는 생활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광한루원에 있는 춘향이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이당 김은호의 작품이다. 실제 춘향이는 박색이었다고 한다.
  성이성은 1695년(숙종 21년) 조선시대 공직자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기도 했다. 성이성이 《춘향전》의 모델이라는 사실은 꽤 알려져 있다. 이것은 후손들이 성이성의 호 계서(溪西)를 따 만든 《계서선생일고》와 역시 후손이 지은 《필원산어》 등을 한 대학교수가 《춘향전》과 비교한 바에 따른 것이다.
 
  성이성의 부친은 1607년 남원부사로 발령 났다. 당시 13세였던 성이성은 아버지를 따라갔다. 성이성은 아버지가 광주목사로 떠날 때까지 5년간 남원에서 살았다. 당시 성의성은 17세, 《춘향전》 속 이몽룡이 춘향이를 만난 것은 16세 때로 그려진다. 벼슬길에 오른 성이성은 네 차례나 암행어사로 제수되는 ‘암행어사’ 전문 관리였다.
 
  그는 전국을 순회 감찰하면서 남원에 두 번이나 들렀다. 흥미로운 것은 성이성이 남긴 〈호남암행일지〉에 나온 자신의 호남 방문 루트와 《춘향전》 속 이몽룡의 루트가 흡사하다는 것이다. 또한 《춘향전》 속에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탐관오리의 잔치 때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시(詩)와 비슷한 시도 성이성이 남긴 기록에 등장한다.
 
  이런 것들로 미뤄보면 성이성이 이몽룡의 모델이라는 추측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인다. 어쨌든 성이성의 고향인 경북 봉화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성이성의 생가를 보존하고 있다. ‘재단법인 이몽룡(성이성) 기념사업회’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지자체의 관광객을 끌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 아닌가 싶다.
 
  경북 봉화에 있는 계서당은 국가 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1613년에 건립된 것인데도 상당히 보존이 잘 돼 있다. 봉화가 오지(奧地)여서 각종 전란을 잘 피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춘향은? 그의 뒤를 캐려면 전북 남원의 광한루에 가야 한다.
 
광한루에는 호남제일루란 현판이 걸려 있다. 광한루는 황희 정승이 유배시절 세운 건축물이다.
  지금 광한루는 예전과 달리 ‘광한루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한루원은 기억에 생생한 곳이다. 1984년 대학 4학년 때 졸업여행을 다녀온 곳이기 때문이다. 첫날 전주에서 비빔밥을 먹고 남원에 들러 광한루를 본 뒤 여수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부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2박 3일짜리 졸업여행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훨씬 지난 뒤에 광한루원에 갔는데 30년 전 본 광한루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 뒤편에 작은 사당이 있는 것이었다. “그때도 이런 사당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 여성의 초상화가 있고 현판엔 ‘열녀 춘향사’라는 글씨가 보였다. 이 사당은 1931년 지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대학 졸업여행 때 남원에 갔을 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사당은 남원 유지인 강대형·이현순이 세울 것을 주장했으며 남원·진주·평양·개성 등의 기생들로부터 돈을 모금해 지었다고 한다. 사당이 건립된 것은 1931년 3월 1일이며 그해 6월 20일 단옷날 준공식과 함께 처음 춘향이에게 제사를 지냈다.
 
열녀 춘향을 추모하는 사당.
  이들이 춘향사당을 지은 것은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해서인데 춘향이가 정절을 지켰는지 이몽룡을 유혹했는지에 대해 시각이 엇갈린다. 정문에는 단심(丹心)이라는 글이 걸려 있고 사당 정면에는 ‘열녀(烈女) 춘향사(春香祀)’라 쓰인 현판이 있으며 사당 안에는 춘향의 영정이 있다.
 
  현재의 영정은 당대의 화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을 송요찬 전 내각수반이 기증한 것이다. 남원에는 춘향사당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광한루원 한편에는 1992년 만든 춘향관이 있다. 내부에 《춘향전》 고서(古書)와 당시 생활을 보여주는 자료, 풍속화 등이 있다. 남원시는 매년 4월 말부터 5월 초에 춘향제를 여는데 올해가 92회째다.
 
광한루원의 돌기둥에 새겨진 춘향이의 캐릭터다.
  그뿐이 아니다.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즉 88올림픽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구례 방향으로 가다 보면 육모정 교차로가 나오고 여기서 주천 방향으로 가면 국립공원 매표소에 닿기 전 춘향묘를 볼 수 있다. 묘가 1995년 조성된 데는 사연이 있다. 1962년 지금의 춘향묘 위치에서 ‘성옥녀지묘’라는 지석(誌石)이 발견됐다.
 
  이에 흥분한 남원시는 이곳이 춘향의 무덤으로 생각하고 묘를 만든 것이다. 1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면 봉분이 보이는데 앞에는 ‘만고열녀 성춘향지묘(萬古烈女成春香之墓)’라는 글씨가 보인다. ‘성옥녀’는 누구일까? 옥녀라는 여인에게 성이성이 자신의 성씨를 부여해 ‘성옥녀’라 부른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지만 안타깝게도 성옥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한마디로 미상(未詳)의 인물 무덤을 춘향묘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남원시민의 상당수가 ‘춘향이는 실존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관련 내용을 알아보니 원래 춘향이는 미인이 아니고 천하의 박색(薄色)으로 삼십 넘도록 결혼을 못 했으며 어머니는 관기(官妓) 월매였다는 설화가 여럿 있다. 그중 하나를 살펴본다.
 
광한루와 오작교의 원경이다.
  춘향이 어느 날 남원 시내를 흐르는 요천에서 빨래를 하다 도령을 만나 연정(戀情)을 품다 상사병에 걸렸다. 월매는 자기 딸을 위해 도령을 광한루로 유인한 뒤 춘향의 하녀인 향단이를 말쑥하게 꾸며 도령에게 보냈고 술을 강권해 취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도령이 일어나 보니 옆에는 천하 박색 춘향이가 있는 것이었다.
 
  놀란 도령은 사태를 수습하려 비단 수건을 정표로 준 뒤 한양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떠난 뒤 연락을 끊었다. 지금이나 조선시대나 신분의 귀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상심한 춘향이는 도령이 준 비단 수건을 이용해 광한루에서 목매 죽었다는 것이 설화의 내용이다.
 
  그런데 다른 설화들도 하나같이 춘향이는 못생겼다고 하니, 이것도 하나의 진본(眞本)이 여러 이본(異本)을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다른 설화의 줄거리도 앞선 설화와 비슷하지만 결말 부분이 다르다. 춘향이가 도령에 대한 원한을 품고 죽자 남원에는 3년이나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방(吏房)이 《춘향전》을 지어 원혼을 위로했더니 비로소 흉년과 재앙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이 역시 설화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보면 성이성이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머물 때 한 처녀와 로맨스를 가졌고 그것이 훗날 성이성이 암행어사 시절 재차 알려지면서 구전(口傳)민담으로 내려오다 《춘향전》이 된 것 아닐까 싶다.
 
견우 직녀가 사랑을 맺었다는 오작교에는 지금도 사랑을 찾는 젊은이들이 자주 보인다.
  담양의 관방제림에서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다 성이성에서, 다시 이몽룡으로, 무대를 남원으로 옮겨 광한루와 춘향이를 되짚어보면서 든 생각이 있다. 전남 장성에서 ‘홍길동 생가’와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내용을 봤을 때도 그랬다. 우리 지자체들은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지역발전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 관광수입을 늘리려 하고 그 방편으로 자기 지역과 연관된 소재를 활용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콘크리트로 어마어마한 건물을 지어놓고 소프트웨어는 부실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규모를 키우는 것은 다음번 당선을 위한 업적 과시용 전시(展示) 행정의 일환일 것이다. 차라리 자료가 없다면 소박한 자연이라도 보게 해줬으면 오히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싶다. 예산을 잔뜩 쏟아부어 아무도 찾지 않는 기괴한 유령건물을 만드느니 자연을 벗삼아 우리가 잘 아는 문화의 주인공들을 잠시 만날 기회를 준다면, 그게 웰빙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의 흐름과도 맞지 않을까?⊙

입력 :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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