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현지 취재] 후세인의 독재, 그 충격의 실상
제가 2003년 4월 이라크에 가서 취재한 내용입니다. 기사는 월간조선 2003년 6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 독재자 후세인이 사형 선고를 받았기에 다시 게재합니다. 후세인이 범죄혐의로 재판을 받은 '두자일市 학살사건'도 아래 기사에 잠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기사 아래 두 건의 관련 기사가 더 첨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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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이라크 국경 초소 경비
지난 4월25일, 기자에게 이라크 戰後(전후) 상황을 취재하라는 데스크의 지시가 떨어졌다. 출국 날짜를 4월30일로 잡았다. 『바그다드 시내 호텔에 빈 방이 없다』는 현지 정보에 따라, 호텔 로비에서 잘 각오를 했다.
짐의 부피를 최대한 줄였다. 청바지 하나에 티셔츠, 열흘 치 음식과 생필품을 등산용 가방 하나에 챙겨 넣고, 노트북과 카메라 같은 취재장비는 어깨에 메고 가기로 했다. 현금은 5000달러(600만원)만 챙겼다.
4월30일 오후 2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요르단의 암만에 도착하자 5월1일 새벽 2시(한국시각 오전 8시)였다. 암만 공항에서 자동차로 약 20분 정도 달려 메르디안 호텔에 도착하니 새벽 4시가 넘었다.
그때부터 그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현금 5000달러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바그다드에 들어가면 누군가 총을 들이대고 돈을 털어갈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바지 안쪽 비밀 주머니에 1000달러, 신발 밑창 아래 각각 1000달러씩 숨기고 나니 좀 안심이 됐다.
이날 아침부터 바그다드行 차량을 수배했다. 그러나 5월1일은 노동절 휴일로 아무도 일하지 않았다. 현대건설 바그다드 지사장 이영철씨에게 「긴급 구조 요청」 전화를 걸었다. 李지사장은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가까운 「아무라 호텔」에 가면 차편을 구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절대 400달러 이상 주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호텔 직원을 통해 1인당 400달러에 차를 빌렸다. 바그다드에 도착해 보니 100달러에 온 사람도 있었다. 정보에 어두운 이들 가운데는 800달러를 준 경우도 있었다.
5월1일 낮 12시30분.
우리 일행을 태운 1995년식 미국 시보레社 4륜 구동차가 바그다드를 향해 출발했다. 단조롭고 초라한 암만 외곽을 벗어나자 곧바로 황량한 사막이다. 운전사 가산(30)은 10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황토 사막, 붉은 사막, 자갈 사막, 스텝 사막을 가로질러 네 시간 정도 달리자 요르단과 이라크의 국경 지대가 나타났다.
요르단 국경초소의 경찰관 두 명은 우리 여권을 쓱 훑어보고 도장을 「쾅」 찍었다. 요르단 국경초소에서 3분 정도 더 달리니까 이라크 국경초소가 나타났다. 이라크 국경 초소에는 미군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한 미군이 여권을 한번 살펴보고 통과하라고 했다. 미국의 군정이 실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여기서부터 바그다드까지는 자동차로 약 다섯 시간 거리라고 한다. 국경 초소를 빠져 나온 우리 차는 갑자기 국경 근처의 넓은 공터로 들어갔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을 피해 사막에서 露宿
그곳에는 대형 탱크로리 서너 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차해 있었다. 국경을 오가는 장거리 차량을 대상으로 기름을 파는 기름 장수들이었다.
기름 장수들의 옷은 기름과 땀에 절고 먼지가 범벅이 되어 마치 넝마 조각을 걸치고 있는 듯했다. 이들은 기름을 사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바그다드를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사막에서 노숙을 한다고 한다.
차에 기름을 다 넣은 후에도 가산은 도무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산은 『슬리프, 슬리프(Sleep, Sleep)』 하며 잠자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알리바바, 알리바바(도둑)』라고 말했다.
「지금 출발하면 차량 강도에게 습격을 당하니 자고 나서 출발하자」는 얘기라는 게 이해됐다. 보디 랭귀지의 위대함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공터로 온갖 차량이 꾸역꾸역 밀려 들었다.
바그다드로 가는 국경 택시, 생필품과 공산품을 나르는 트럭, 대형 기름 탱크로리, 컨테이너 차량…. 한국의 중고 자동차 부품을 실은 소형 트럭도 8대 있었다.
5월2일 오전 8시.
국경 택시 10여 대가 행렬을 지어 바그다드로 출발했다.
길가로 불 탄 이라크軍 탱크와 차량의 잔해가 간간이 눈에 띄었다. 미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도로 한가운데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을 빼면, 도로 상태는 아주 좋았다. 바그다드에 머무는 열흘 동안 도로가 부서진 것을 본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경우다.
사막을 달린 지 다섯 시간 만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야자나무 숲과 황토색 저층 건물이 즐비한 바그다드 외곽에 도착했다. 불에 탄 채 나뒹구는 이라크軍의 탱크, 공터에 널려 있는 곡사포, 순찰을 도는 미군 장갑차가 얼마 전 전쟁이 이 땅을 지나갔음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다시 한 시간 후, 황토색 바그다드 시내가 눈앞에 펼쳐졌다.
시내에 들어서자 매연 냄새가 진동했다. 낡은 자동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커먼 연기가 바그다드 하늘에 짙게 드리워 있었다. 시내 주유소는 기름을 넣기 위해 수백m씩 줄을 선 자동차 행렬이 보였다.
오후 2시, 티그리스江을 건너 바그다드 서쪽에 있는 「팔레스타인 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 로비에서 자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과 달리 팔레스타인 호텔의 방 사정은 넉넉했다.
우리는 통신장비부터 점검했다. 인공위성 안테나를 설치했으나 우리가 원하는 주파수가 잡히지 않았다. 같은 호텔에 있는 日本 교도(共同)통신 기자들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이날 밤새 총소리가 들렸고, 호텔 주변의 건물에서는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일자리를 원하는 이라크 사람들
매일 아침 10시쯤 되면 100~200명의 이라크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호텔 앞으로 몰려든다.
미국에 있는 딸에게 국제전화를 걸게 해 달라는 할머니, 치안이 엉망이라며 美軍을 성토하는 사람, 자기 차를 50달러에 하루 종일 쓰라는 운전사, 직업을 구해 달라는 전직 군인 등 사연도 가지가지였다.
전쟁으로 회사가 문을 닫았다는 카심(32)은 『정유 공장이 잘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대통령宮에서 발견된 돈은 다 어디 갔나. 나도 언젠가 누구 것을 훔쳐야 살 수 있을 것』이라며 소리를 높였다.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한 카줌(40)은 『학교도 없고 병원도 없다. 사람들은 길에서 서로 총을 쏘고 있다. 후세인은 독재자이지만 그는 우리에게 평화와 안전을 주었다. 미국은 무엇을 주고 있느냐. 이것이 재앙이 아니면 무엇이 재앙이냐』고 말했다.
카줌처럼 이곳에 모인 사람 대부분은 이번 이라크 전쟁으로 직업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이들과 대화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이내 군중들이 몰려 들어 무엇인가 말을 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자 미군과 호텔 관계자들은 호텔 주변에 철조망을 치기 시작했다.
철조망 범위가 점점 넓어지더니 기자가 호텔에 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은 아예 팔레스타인 호텔 주변 전부가 철조망으로 둘러쳐졌다.
기자가 바그다드에 머무는 동안 안내와 통역을 한 압바스 라티프(38)는 자신을 서른여덟이라고 소개했지만 50代 초반은 된 것처럼 늙어 보였다.
압바스는 전쟁 전에 요르단에 본사가 있는 통신장비 수입 판매사에서 영어 통역으로 일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회사가 요르단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그는 바그다드에 있는 무스탄시리야(mustansiriya)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프랑스語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바그다드 도착한 다음날인 5월3일이었다. 기자는 호텔 앞에 몰려 있는 군중 틈을 겨우 빠져 나와 택시를 타기 위해 길을 서성거렸다. 그때 압바스가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었다. 그는 『내가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그의 제의를 거절했지만, 그는 『다른 일 할 것도 없다. 내가 원해서 도와주는 것이다』며 우리를 따라 나섰다.
택시에 오르는 순간 기자는 안내원과 통역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택시 운전사들이 대부분 영어를 하지 못해 목적지를 알려 주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이날 취재를 끝낸 후 압바스에게 당일 사례비로 10달러를 주고, 다음날부터 정식으로 일을 같이 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다음날 얼마를 주겠다고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그저 『인샬라, 인샬라(신의 뜻이라면)』를 반복했다.
이라크의 공무원들과 전·현직 군인들은 두 달 가까이 월급과 연금이 중단된 상태다. 바그다드 대학 교수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바그다드 대학은 23개의 단과대학을 거느린 이라크에서 제일 큰 국립대학이다. 戰時(전시) 휴교 중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등교했다. 5월17일 전시 휴교가 끝나기 때문에 수업준비를 하러 나왔다는 것이다.
바그다드大 게시판, 「범죄자 사담 후세인이 몰락했다」
바그다드 대학은 이번 전쟁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바그다드를 함락한 美軍이 이곳을 일찍 점령하면서 주민들의 약탈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다.
교내 중앙 도서관 앞에 서 있던 후세인 동상은 파손되고 기단만 남아 있었다. 자연과학大 건물 앞 낡은 게시판에는 누군가 분필로 「범죄자 사담 후세인이 몰락했다」고 써 놓았다. 거기서 만난 지질학과 학생 세 명은 『사담이 망할 줄 알았다』, 『앞으로 학문의 자유가 보장될 것』이라는 희망을 나타냈다.
자연과학大 건물 앞에서 세 명의 교수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 머리가 희끗한 메디 나지(56)라는 물리학과 교수는 이런 얘기를 했다.
『이라크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이라크人들은 이라크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수천 년간 이민족과 아무 문제없이 평화롭게 살아왔다. 이라크 문제에 외국이 더 이상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교수들은 2개월 동안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고통이 크다고 했다. 전쟁 직전에 월급이 반으로 줄더니 3월20일부터는 월급이 끊겼다는 것이다.
바그다드 서쪽 아드미에 지역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경찰 압둘 와하브(49)도 『지난 4월17일부터 월급 없이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미군의 허락하에 권총을 차고 근무한다고 했다.
시내에 있는 이라크 항공사를 방문했다. 교통관제사로 일하고 있는 압둘 카림(44)은 바그다드의 治安(치안) 부재를 우려했다.
『지금 누가 당신 머리에 총을 쏘면 누구에게 불평을 하겠는가. 바그다드는 지금 그런 상태다. 서로 훔치고 길에서 총을 쏘고 있다. 이것은 이라크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후세인의 30년 독재가 착한 이라크 사람을 도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후세인 정권이 붕괴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후세인이 없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후세인이 지난 30년 동안 어떤 죄를 저질렀나.
『후세인에게 당한 것을 어떻게 다 이야기 하겠는가. 후세인은 착한 이라크人들에게 폭력성을 심었다. 영양실조로 국민의 두뇌를 마비시켰다. 그는 이라크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라크 국민 500만 명을 감옥에 보내 고문하거나 학살했다. 이라크의 지식인, 의사, 과학자, 기술자 등 500만 명이 국외로 강제로 추방당했다. 이라크에는 가난하고 못 배운 자만 남았다. 후세인을 피해 이라크의 지식인은 전부 이라크를 떠났다. 지금 교수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팔고, 의사가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집이 없어 공중변소와 다리 밑에서도 자는데 그는 궁궐에서 살았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관련자들을 반드시 처벌해야 할 것이다』
바그다드에 넘쳐 나는 「음모론」
─이라크 전쟁이 벌어지기 전후해 우리는 방송을 통해 이라크 국민들이 「미국에 대항해 끝까지 싸우겠다」, 「후세인을 사랑한다」고 다짐하는 장면을 많이 봤다.
『이라크 사람들이 사담을 그렇게 사랑했다면, 미군이 바그다드를 이렇게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겠나』
─그렇다면 왜 후세인 정권 전복에 이라크人들이 나서지 않았나.
『후세인은 가족을 인질로 잡고 젊은이들을 전쟁에 보냈다. 후세인은 주민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부인이 남편을 배신하게 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신고하게 했다. 비밀경찰 조직이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길에서 택시 운전사가 유도 질문을 해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집 대신 감옥에 갔다. 히틀러는 자살이라도 했지만 그는 자살할 용기도 없는 비겁한 인간이다』
─지금 월급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난 30년간 아무도 변한 것이 없지만, 이제는 변한다는 희망이 있으니 기다릴 수 있다. 새 정부가 설 때까지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라크人들도 외국에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자유를 얻었다.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항공기 조종사 알완(45)은 현재의 이라크 상황을 미국이 1991년부터 꾸민 거대한 시나리오의 일부라고 했다.
『1991년 미국이 후세인을 살려 두면서 그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후세인은 바그다드만 겨우 지배하고 있었다. 미국은 중동의 석유를 지배하기 위해 후세인을 이용해 중동의 상황을 나쁘게 하게 했다. 그동안 석유 수출한 것 전부 후세인에게 간 것을 미국이 허용하지 않았나』
알완의 이런 주장은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여러 「음모론」 가운데 하나다. 기자가 만난 많은 이라크인들은 이런 다양한 음모론을 얘기했다.
<후세인과 그 가족은 지금 미국이 보호하고 있다>
<후세인은 미국의 비밀 첩보원이다>
<후세인은 미국의 명령에 따라 이라크와 아랍을 약화시켰다. 후세인이라는 인물이 있기 전에 미국이 감히 中東에 어떻게 군사기지를 둘 수가 있었겠나>
안내원 압바스의 집
취재를 마치고 그날 저녁에 가이드로 채용한 압바스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바그다드 서쪽의 변두리인 돌라디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집 바로 앞에는 시장이 있었다. 시장 골목 곳곳에 쓰레기와 먼지가 날리고 쓰레기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전기는 밤 12시까지 제대로 공급된다고 했다.
10평 남짓한 집에는 거실 겸 침실 하나와 부엌 하나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부인과 열 살 이하인 세 아이들과 살고 있다.
뜻밖에 그의 집에는 펜티엄급 컴퓨터가 있었다. 전쟁 전에 300달러를 주고 샀다고 한다.
회사 일을 하자면 컴퓨터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컴퓨터에는 MS워드와 엑셀(사무용 계산프로그램), 포토샵(사진편집 프로그램) 등 서너 개의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다. 그는 『요르단에 피신해 있는 우리 회사가 곧 들어올지 모르겠다. 실직 상태가 오래되면 살림을 하나씩 팔아야 한다』고 했다.
5월4일, 이라크 남쪽 100km 정도 떨어진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방문하기로 했다. 바빌론은 인류 최초 문명을 꽃피운 도시다. 후세인은 이 고대 유적지가 내려다보는 곳에 대통령宮을 지어 놓았다.
아침 10시경, 압바스를 만났던 장소로 나갔으나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압바스를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맸다. 그를 찾아 팔레스타인 호텔 앞의 파라다우스 광장(천국의 광장)으로 갔다.
행색이 초라한 군중들 틈에서 한 이라크 젊은이가 여유롭게 구두를 닦고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그는 자신을 무스탄시리야 대학 영문학 박사과정에 있는 하미드(35)라고 소개했다.
바빌론 유적지에 후세인 이름 안 새겨 넣은 인부들 집단 처형
압바스를 못 찾았기 때문에 그를 가이드 삼아 바빌론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의 친구라는 프랑스 여자도 같이 동행하겠다고 따라왔다. 차를 타고 보니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두 사람과 먼 길을 여행한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택시 운전사와 안내원 하미드가 불순한 작당을 꾸밀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차는 출발했고 어쩔 수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신뢰가 갔다. 하미드에게 『후세인 궁과 그의 아들들 집에서 수억 달러의 돈뭉치가 발견된 것에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안내원 하마드는 『많은 사람들이 사담의 부정축재가 미워서 그가 지은 사원에 가지 않고 허름한 사원에 다녔다』
바그다드에서 바빌론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그대로 이라크 최남단의 도시들로 이어진다. 하미드는 『후세인 시절에는 이 길을 오가려면 5km마다 초소가 있어서 뇌물을 주지 않으면 통과가 힘들 정도였다』고 했다.
『후세인은 바그다드 남쪽 도시인 카르발라 주민을 싫어해서 그 사람들이 바그다드로 들어오려면 갖가지 이유를 들어 통제를 했다. 나시리아 등 이라크 남쪽 지방은 일부러 농사를 못 짓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하미드도 『후세인이 미국의 간첩이기 때문에 이라크를 약하게 만들어 미국의 점령을 용이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바그다드를 한참 벗어났는데도 주유소마다 기름을 넣기 위해 차량이 두 줄로 수백m씩 서 있었다. 기름을 한 번 넣기 위해서는 하루에 두 시간 정도는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고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지면 그나마 그냥 돌아가야 한다.
주유소의 기름값은 아직까지 공식적인 가격이 유지되고 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경우 1ℓ에 50디나르(3센트) 인 반면에 길거리에서 파는 기름은 5배에서 25배까지 더 비싸다고 한다. 주유소에 줄을 서는 이런 풍경은 전쟁 전에는 없었다고 한다.
바빌론으로 가는 인근 도로변과 숲에는 불 탄 이라크 軍 탱크, 군용 트럭, 대공포, 곡사포 등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부서진 탱크 대부분은 이라크軍이 버리고 간 것을 미군이 바그다드로 진격하면서 부숴 버린 것이라고 한다.
자동차로 한 시간 반 정도 달리자 바빌론 유적지에 도착했다. 바빌론 유적지 입구에는 남색 바탕에 사자·용 등의 동물을 새긴 이슈타르 문의 복제품이 서 있었다. 이곳에서 미군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미드는 『바빌론 유적 복원이 진행될 때 후세인이 이곳에 왔다가, 자기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현장 기술자들을 처형해 버렸다』고 했다. 그 후에 겁을 먹은 다른 기술자들은 기존의 벽돌을 뜯어 내고 후세인의 이름을 새긴 벽돌을 박았다고 한다.
말을 듣고 보니 후세인의 이름이 적힌 벽돌은 모두 색깔도 다르고 새로 박은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적지를 돌아보고 있는데 10代 초반의 한 소년이 다가와서 좋은 골동품이 있는데 400달러에 사라고 했다.
『이 부근 어느 무덤에서 발굴된 것인데, 머리 부분에 글자가 새겨진 동물상』이라고 했다. 또 다른 꼬마는 무엇인가 글자가 새겨진 옛날 벽돌을 들고 와서 사라고 했다. 복원된 바빌론 유적 뒤편으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후세인宮이 버티고 있었다.
후세인宮은 기단을 산처럼 높인 후 바빌론 유적지를 내려다볼 수 있게 지어 놓았다. 이 후세인宮은 이미 이웃 주민들에게 약탈당했다고 한다. 그 안에는 미군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어 宮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전역에 72개의 대통령宮을 건설했다.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라마디라는 도시에도 후세인宮이 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 지어진 이 대통령宮 주위에는 약 15km에 걸쳐 담장을 쳐 놓았다. 담장이 강물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게 강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도 철제 담장을 쳐 놓았다.
누군가 다리 부근의 철제 담장 한 곳을 뚫어 놓아 그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강변을 따라 어마어마한 크기의 후세인 宮이 視野(시야)에 들어왔다. 후세인宮 앞을 흐르는 강물은 같은 강물인데도 담장 안쪽의 물과 밖의 물 색깔이 달랐다. 철제 담장을 쳐 놓은 다리를 기준으로 후세인宮 앞을 흐르는 강물은 강바닥을 더 깊게 팠는지 색깔이 짙푸르고 강변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반면 담장 밖의 강물은 물색이 탁하고 갈대와 쓰레기가 뒤섞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라크 현역 대령, 우리는 이렇게 졌다
5월5일, 전날 안내를 한 하미드가 자기 고향인 라마디市에 현직 이라크軍 장성이 산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라마디市는 이라크에서 서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져 있다. 사전 약속도 없이 軍 장성을 만날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 없었지만, 들이닥쳐 보기로 했다.
오후 2시쯤, 이라크 현직 장군이 산다는 집에 도착했으나 不在中이었다. 그 장군은 바그다드에 현지 사정을 살피러 갔다고 한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군의 옆집에 그 사람의 동생이 살고 있어서 찾아 갔다. 단독 주택에 방이 서너 개 정도 있는 비교적 큰 집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며 온 식구가 달려들어 음식을 만드는 통에 인터뷰는 뒷전이었다. 한 시간을 꼬박 기다리자 양고기로 만든 음식이 한 상 가득 나왔다. 이것을 다 먹고 나서야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장군의 동생은 이마드 무클리프(42)라는 이라크軍 대령이었다. 전쟁이 나기 전까지 16년째 軍 변호사 생활을 했는데, 전쟁 후 군대가 없어져서 집에서 한 달 가까이 쉬고 있다고 한다. 한 달에 35달러 정도인 그의 월급도 지급이 중단됐다.
이마드 대령은 『사담 후세인이 동족의 나라인 쿠웨이트를 침략하는 것을 보고 그를 싫어하게 됐다』고 말했다.
─바그다드 폭격 때 어디에 있었나.
『민간인 복장을 하고 바그다드 시내의 정부 관료 집을 중심으로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면서 폭격을 피했다. 그러다가 폭격 7일째쯤 통신센터가 폭격을 받고서 모든 명령체계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어서 집에 왔다』
탈영병의 귀를 자르고 이마에 낙인을 찍었다
─이라크軍이 왜 그렇게 쉽게 무너졌나.
『내가 왜,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나? 내 조국을 위해? 내 돈을 위해? 우리는 이번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이라크 국민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오직 사담과 그 가족을 위한 전쟁이었다. 우리의 무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쓰던 것이었다. 미국에 상대가 안 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전쟁 시작 전에 모든 군인이 다 도망갔다고 알고 있다』
─탈영하는 병사들은 사살했다고 들었는데.
『후세인은 그랬을 것이다. 탈영한 병사의 귀를 자르거나 이마에 낙인을 찍었다. 나의 직업이 軍에서 그런 일을 매일 보고 겪는 것이라 누구보다 잘 안다』
기자는 다음날 탈영하다가 귀를 잘린 사람을 만났다.
그는 하심(28)이라는 청년이었는데, 1994년 軍에 가기를 거부했다가 왼쪽 귀를 잘렸다고 한다. 하심은 그 후로 한 번도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도 결혼하고 싶은데 후세인이 미래를 망쳤다고 말했다.
이마드 대령에게 『「사담 페다인 민병대」, 「공화국 수비대」 같은 충성스런 후세인 부대는 어디로 갔나』고 묻자, 그는 『그런 말은 후세인의 거짓 선전선동에 불과하다』고 못을 박았다.
『사담 페다인의 대부분은 시리아나 사우디 등지에서 온 외국인들이다. 그들은 군사캠프에 머물면서 활동했다. 1인당 1000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군인들이 다 도망갔는데도 중간 고위 장성들이 후세인에게 계속 거짓 보고를 했다』
─미군이 어떻게 바그다드를 그렇게 쉽게 함락할 수 있었나.
『미군이 들어왔을 때 바그다드에 이라크軍은 다 도망가고 한 명도 없었다. 우리의 기관총은 1km 안 나가고, 큰 대포도 코앞에 떨어졌다. 누구도 이번 전쟁을 우리가 이기리라고 믿지 않았다. 특히 후세인은 자기와 가까운 군인들과 일반 군인을 차별했다. 사병들에게 한 달에 2달러와 담배 두 갑을 주었다. 사담과 가까운 고급 장교들은 월급만 3000달러가 넘었다.
그들은 어쩌면 자기 돈을 지킬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것도 장병들의 사기를 꺾는 큰 역할을 했다. 팔레스타인 자살 특공대 가족에게는 1만5000달러를 주고, 우리 백성은 다리 밑에 살게 했다』
─공화국 수비대는 어떻게 되었나.
『폭격으로 명령체계가 마비되었는데 어떻게 싸우겠나. 일부는 도망가고 대부분은 미군들이 비밀 협상을 해서 다 데리고 갔다. 이것은 사실이다』
─당신은 전쟁에서 미군이 이기기를 바랐나.
『현재 미국이 들어와 있는 것이 슬프지만 지금의 상황이 후세인 정권보다는 좋은 것이다. 현재 일시적으로 고통받지만 곧 정상화될 것이다. 사람들은 후세인이 없어진 것을 이제 겨우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이라크는 매우 지쳤다. 나는 나의 아들의 미래를 위해 살고 있다』
─어떤 정부를 원하나.
『모든 국민과 종교와 인종이 평등하게 대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이슬람 정부를 원한다』
─지금 군대가 없어졌는데 기다리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보나.
『미군이 우리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미래가 불확실하다』
바그다드 국제공항(前 사담 국제공항) 근처에 사는 미사크(25)는 이번 전쟁 때 바그다드의 서쪽 지역인 만수르에 있었다. 그도 전쟁 중 약 5달러의 돈을 한 번 받고 지금까지 월급을 못 받았다고 한다. 그의 월급은 약 22달러였다고 한다.
그는 이라크 사병으로 만수르 지역 국방부 건물에서 근무했다. 행정병이었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사담이 좋다』고 말한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폭격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나.
『미군의 폭격이 있기 전에 꼭 국방부 정문에서 누군가 무전기로 어딘가 신호를 보내는 것이 목격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대피했다. 그러고 나면 몇 분 후에 우리 건물에 미사일이 쏟아졌다. 우리는 그를 미군 간첩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우리 부대원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당신이 있던 건물에 폭격은 몇 번 있었나.
『우리 건물에 모두 네 번 있었는데 전쟁 후 10일 경부터 모든 명령체계가 마비됐다. 많은 장교가 도망가고 우리의 지휘관도 도망갔다. 4월9일 나도 옷을 갈아입고 집에 왔다』
─주민을 방패로 삼고 전쟁을 하는 것이 좋은 군사 계획이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좋은 계획이 아니다』
그는 후세인을 『이라크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그는 『지금도 후세인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며 『그가 대통령이었을 때는 싫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엉망이라 후세인이 다시 와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이라크軍 대공포 부대의 한 소위는 『전쟁 때 우리 부대는 바빌론 부근에 주둔했다』며 당시의 전황을 소개했다.
─언제 부대가 해산됐나.
『4월10일경 지휘관이 도망가서 부대원들이 전부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은 후 군인 신분증을 버리고 집에 왔다. 내가 지휘한 소대는 9명이었는데 전쟁 중에 이미 5명이 도망하고 1명이 죽었다』
─전투는 어떻게 전개 되었나.
『미군과 전투 중일 때도 지휘관이 미군 비행기를 쏘라는 명령을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다. 전쟁 2~3일 후에 이미 지휘체계가 마비되었기 때문에 명령을 못 내린 것 같다. 우리 대공 미사일은 7km밖에 나가지 않고, 미국 비행기는 30km 밖에 있는데 어떻게 맞추겠는가. 불가능하다』
─당신은 후세인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나. 이라크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나.
『나는 후세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군인들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탈영하면 죽인다고 들었으나 우리 부대에서는 실제로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를 이용해 40분 정도 달려서 마하무디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이 도시 중심의 상가 골목 곳곳에 불 탄 이라크軍 탱크가 방치되어 있다. 주민들은 『이라크軍이 모두 여섯 대의 탱크를 민가 주변에 배치했고, 민간시설과 민간인들을 인질로 방어에 나섰다』고 증언했다.
상가에서 식당과 전자제품 판매점을 운영했던 무하마드 알리(32)는 『이라크軍이 탱크를 내 가게 옆에 숨겨두는 바람에 가게 두 개가 모두 불에 탔다』고 했다.
팔레스타인 호텔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져 있는 아드함(adham) 사원 부근은 4월9일 미군과 사담 페다인 부대원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당시 이곳에서 저항을 한 페다인 부대원은 20명 정도였다고 한다.
통신시설은 모두 파괴당해
이 전투로 인근 상가는 검게 불 탔고 아드함 사원의 시계 첨탑도 포격을 맞아 구멍이 뚫렸다. 심지어 사원 안까지 미사일이 날아 들어왔다.
미군에게 쫓기던 일부 페다인 부대원들이 사원이 부근에 있는 주택가로 뛰어들어 그곳에서도 세 명이 죽었다고 한다. 전투 중 전사한 사담 페다인 부대원들은 주민들이 이맘 사원 안쪽 정원에 임시로 묻어 놓았다. 그곳에는 약 20기의 무덤이 있었다.
바그다드 시내를 돌아다니면 폭격을 당한 건물이 곳곳에 눈에 띈다. 이런 건물은 어김없이 정부 관련 기관과 군사 시설물 아니면 후세인 가족의 집이었다.
이라크의 통신시설만은 그것이 민간 시설이든 정부 시설이든 모두 폭격을 당했다.
첫날 기자를 안내한 압바스는 『바그다드 폭격 당시 지붕에 올라가 폭경 장면을 구경했다. 미국의 정밀 폭격을 믿었기 때문에 그리 겁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미군이 바그다드로 들어오면 후세인과 미국이 화학전을 펼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그다드 북쪽 100km 정도에 있는 도시로 잠시 피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사는 인근 주민 70% 정도가 바그다그 인근 도시로 피해 있었다고 말했다.
실종자를 찾는 가족들
5월6일, 바그다드 서쪽 티그리스 강변 카드미야 지역에 「석방죄수협회」를 방문했다. 이들이 쓰는 건물은 후세인의 경호원 중 한 명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지하 2층 지상 2층의 이 집은 그 크기부터 어마 어마했다. 집 앞의 큰 도로는 후세인 정권 시절에는 폐쇄되었다고 한다. 이 단체는 지난 4월12일 이브라힘이라는 사람이 설립했다.
그는 1980년 이슬람 정당인 「다와黨」에 가입했다가 체포되어 1991년 석방됐다. 협회 사무실 사방 벽면에 사람들의 이름을 쓴 종이가 가득 붙어 있었다. 후세인 정권下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의 명단이다.
이 협회에서 이라크 전역의 비밀경찰서에서 가져온 수감자 파일을 하나씩 뒤져 처형자 명단을 뽑아 벽에 붙였다. 벽면에는 실종자 가족들이 붙여 놓은 쪽지도 붙어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이산가족 찾기 할 때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벽보에 있는 명단 중에 한 소년은 「1981년 학교 칠판에 알라신의 이름을 적었다가 이슬람 비밀 정당인 다와 당원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명단을 유심히 보고 있던 무슬림 이브라힘(42)은 하이다르(22)라는 아들을 찾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1998년 비밀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아버지 이브라힘이 많은 돈을 주고 아들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고 한다.
『전쟁 직전에 아들의 수감 장소가 옮겨졌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생매장됐는데 아들도 희생됐을 가능성이 크다』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디와니야市에서 아침에 버스를 타고 왔다는 리아드(28)는 실종된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1991년 체포된 후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와 같이 감옥에 있던 사람이 2001년경에 『살아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아버지는 의료센터에서 근무했는데, 사람들이 아버지를 존경했다. 후세인은 그런 것도 못 참는 사람이다. 그래서 끌고 갔을 것이다』고 했다. 이라크 최남단 도시 바스라에서 버스를 타고 온 살만 다우드(60)라는 노인은 『아들이 22세 때 집에 있다가 잡혀 간 후 아직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이 노인은 처음에는 자기 아들을 누가, 왜 잡아갔는지 몰랐다고 한다.
『어느 날 아들의 친구가 와서 「아드님이 나와 같이 이란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해서 국경을 넘다 체포됐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 동네는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국경을 넘나드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노인은 『미군이 아부그레이브 교도소를 점령했을 때 죄수 500명을 발견해서 현재 바그다드에 있는 야묵 병원에 데려다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내일은 병원에 가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바그다드에서 120km 떨어진 어느 도시에서 왔다는 한 노인은 『앞으로 돈이 없어서 이곳에 못 오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벽에 쪽지를 붙여 놓고 가면, 고향 사람 누군가가 와서 보고 알려 주지 않겠는가』 했더니 고맙다고 여러 번 인사를 했다.
건물 출입구 쪽에 있는 「실종자 명단 대조실」에서 처형자 명단을 하나씩 읽고 있던 하이다르 하센(23)은 『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하센은 『1980년 형이 잡혀간 후 정부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퇴직을 당했다』며 『그 후 아버지는 이란으로 추방됐고, 나는 이번 전쟁 전까지 감시를 받았다』고 했다.
『후세인 정권은 처형된 사람들의 신분증을 빼앗아 이라크人의 신분을 박탈한 후 이란 태생이라고 표시한 신분카드를 새로 발급했다. 이란 국적이 표시된 신분 카드로는 이라크 어느 곳에서도 정상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대학교도 입학할 수 없고 은행이나 정부기관에 취직도 못 한다. 후세인은 집과 돈, 사람의 꿈까지 뺏어간 사람이다』
지하실에 내려가자 지하 1층과 2층의 방마다 비밀경찰서에서 가져왔다는 파일이 수백 상자가 쌓여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선풍기도 없는 어두컴컴한 방에 앉아 먼지를 뒤집어쓴 파일을 뒤적이고 있었다.
이곳에 일하는 자원 봉사자는 75명. 그들 중 후세인 치하에서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 15명 정도라고 한다.
한 개 파일의 분량은 A4 용지로 20~30장 가량 되었다. 표지에는 수감자의 이름, 체포된 날, 생일, 죄목, 고향 등이 표기되어 있다. 처형된 수감자의 파일에는 겉표지에 처형일이 표시되어 있다.
100명이 한꺼번에 처형된 기록도
어느 파일에는 100명의 처형자 이름이 한꺼번에 적혀 있었다. 모두 같은 날 처형할 것을 판결한 판결문이었다. 판결문에는 「교수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한다」로 되어 있었다. 특히 이 판결문 제일 아래에는 후세인의 친필 사인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와黨」에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이 협회의 홍보국장인 사타르 자바르(39)는 『지금까지 약 400만 개의 파일을 발견했다. 안전을 위해 그 대부분을 미군에게 맡겨 놓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그 중 일부』라고 말했다. 후세인 정권이 수많은 파일을 소각해 버렸다고 한다.
사타르는 지금까지 처형한 것으로 확인한 5600여 명의 명단을 벽에 붙여 놓았다고 했다. 이 단체에서는 약 700만 명의 이라크 국민들이 후세인에 의해 체포, 구금, 고문, 학살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사타르도 「다와黨」에 가입했다가, 1984년 체포되어 1991년 걸프전 후에 석방됐다. 그는 『만약 걸프戰이 없었다면 우리는 전부 죽거나 아직도 감옥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담 후세인은 1979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감정에 대해서도 혐의를 씌워 사람을 처형했다. 나는 아버지가 이 정권에 절대 복종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모든 국민이 이라크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석방되어도 항상 감시를 받기 때문에 이라크 전체가 감옥이었다. 형제 중에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 있으면 남아 있는 다른 형제들까지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다』
─정상적인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았나.
『형량을 판사가 알아서 정한다. 나를 맡은 판사는 처음에는 사형을 구형했다. 그 다음에 너무 어리니까 다시 25년형을 구형한 후 감옥에 보냈다. 감옥에서 가족은커녕 태양도 한 번 본 적이 없다. 다른 곳으로 옮길 때도 냉장차에 집어 넣고 옮겼다. 아부그레이브 교도소에 7년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감되었다. 가족이 알아도 가난한 사람들은 면회를 올 수 없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감옥에서 음식은 어땠나.
『난 호텔에 있지 않았다』
─고문도 받았나.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문을 받았다. 처형자들은 대부분 집단 매장해서 이곳에서 이름을 찾아도 시체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의 反戰운동에 배신감
─한국에서 이라크전 反戰운동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봤나.
『한국에서 反戰운동이 있었다고 들었다. 한국인은 反戰운동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반대하고 이번 전쟁에 반대한 것을 보고 배신감을 느꼈다. 反戰운동을 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든 反美·反戰운동을 한 사람들은 더 나쁜 짓을 한 것이다. 그들은 악마 사담에게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 와서 보라. 우리는 후세인의 사인 하나로 닭처럼 도살당했다』
─지금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全세계에서 자원봉사자가 왔다는데 이곳에는 없다. 복사기, 사람, 컴퓨터 아무 것도 없다. 컴퓨터 세 대가 있지만 35년 동안 사담 후세인이 처형한 사람들의 명단을 컴퓨터 세 대로 정리할 수 있겠는가. 세계 인권단체는 여기 와서 보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는 인터뷰 도중 기자를 구석진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고문받아서 생겼다는 상처를 보여 주었다. 발꿈치 뒷부분에 깊게 팬 상처가 있었다. 전기 고문으로 생긴 상처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뙤약볕에서 명단을 확인하고 있었다.
콜라병에 앉게 해 항문을 찢는 고문도
「이라크국민협정」(INA)의 사무실을 찾았다. 아야드 알라위 의장이 이끌고 있는 이 정당에는 후세인 정권 당시 國外로 망명했던 정치인들이 집결해 있다. 이 黨의 사무실은 전쟁 前 바트黨 당사로 쓰이던 건물이다.
후세인 정권은 바트黨 당사를 짓는 데 10억 달러로 계약했다. 실제 든 비용은 5000만 달러였고, 나머지 돈은 후세인과 일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INA 홍보국 위원인 라심 알 아와디(60)는 요르단에서 12년간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했다. 그는 『후세인 일당을 새로운 이라크 헌법에 따라 반드시 처벌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후세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죽었다면 세상은 너무나 불공정하다. 그는 반드시 살아서 자신의 동상이 무너지는 것을 봐야 한다. 또 인민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INA 당원이며, 「이라크인권협의회」 의장인 사타르 알 바이르(60)도 1991년 망명해서 12년 동안 요르단, 시리아 등지를 떠돌았다. 그는 후세인 시절 집권당인 바트黨의 창당 멤버였다고 한다.
『나는 후세인에 의해 1968년 처음 체포됐고, 1970년 석방되었다. 1984년까지 세 번에 걸쳐 투옥과 석방 과정을 거친 후 당에서 추방당했다.
후세인은 1979년 이라크 대통령에 취임한 후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시키고, 전·현직 관료를 처형했다. 21명의 장관 및 고위 관료가 처형당했고 외무부 장관 등 또 다른 21명은 투옥 중 사망했다. 후세인은 특히 바트 당원의 경우 내부 비밀을 많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조그만 혐의만 있어도 처형을 했다』
후세인 시절을 이야기하는 이 노인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내가 이라크를 탈출하자 후세인 정권은 나의 아들과 어머니를 잡아서 고문을 한 후 죽였다. 나의 형은 영국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역시 체포되어 죽었다.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 목숨을 바치려고 한다』
─당신의 가족들은 어떻게 처형됐나.
『내가 이라크를 탈출하자 그들은 나를 찾겠다며 어머니와 아들을 잡아갔다. 내 아들은 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를 배신하게 하고… 어머니와 아들이 처형당하자 다른 아들 하나는 폴란드로 도망가서 지금 그곳에 살고 있다. 후세인은 내 가족만 처형한 것이 아니라 재산과 집도 빼앗아 갔다』
─당신도 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나.
『비밀경찰 한 명이 내 살을 먹겠다며 손을 물어 뜯었다. 귀에 전기선을 연결해 전기고문을 했다. 담뱃불로 지지고 차마 다 얘기할 수 없다. 특히 콜라병에 앉게 하는 고문이 횡행했다. 이 고문을 받던 전직 경찰 간부 한 명은 항문이 터져 울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소리 쳤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예다. 지금 우리는 수백만 건의 처형기록과 고문기록을 확보하고 있다』
그의 손바닥 엄지손가락 쪽의 두툼한 부분에는 그때 비밀경찰이 물어뜯었다는 흉터가 큼직하게 남아 있었다.
─집권하면 어떤 정부를 만들 것인가.
『모든 아랍族과 쿠르드族이 평등하게 대접받고, 폭력이 없고 독재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독재정권이 이라크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
5월7일, 사타르 알 바이르 「이라크인권연합회」 의장은 후세인 정권이 뺏은 자신의 옛 집을 방문했다. 바그다드 동쪽 우르 지방에 있는 곳이다. 2층으로 된 이 집은 한 층에 방이 7개나 있는 큰 집이다. 창문은 다 깨지고 의자와 소파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마당 한 곳에는 후세인 사진이 찢어진 채 뒹굴고 있었다. 그는 『법적으로는 아직도 내 집으로 돼 있는 이 집을 돌려받고 싶다』고 했다.
이날 저녁 늦게 일가족 여섯 명이 처형되었다는 집을 방문했다. 이들은 바그다드 서쪽 카드미야 지역에 살고 있었다. 남아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아미르(38)가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아미르는 1984년 4월14일 갑자기 아버지 파딜(당시 60세)과 형 다섯 명이 비밀경찰에 체포됐고, 석 달쯤 후인 7월17일 여섯 구의 시체를 돌려받았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는 곡물 장사를 했다. 다섯 명의 형 중 세 명은軍에서 장교로 복무 중이었으며, 한 명은 사병으로 복무 중이었다』
아미르는 처형당한 여섯 명의 사망진단서를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살아남은 형제들은 이들이 왜 처형당했는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돌려받은 시신은 매우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고 한다.
후세인은 富者를 용납하지 않았다
처형된 아미르의 큰형 압바스(당시 38세)의 시신에는 전기고문 흔적이, 둘째 형 무하메드(당시 35세)의 머리에는 도끼 자국이 나 있었다.
─가족들이 왜 처형당했나. 장교로 복무하던 사람들인데.
『아버지가 부유한 상인이었고, 모스크에서 자주 기도를 했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다.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사담 후세인은 어떤 한 가족이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려고 탄압을 많이 했다. 특히 쿠르드族이나 시아파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고향인 티크리트 사람만은 부자가 되는 것을 허용했다』
─다른 가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나.
『나머지 형제들도 1991년에 잡혀서 15일간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종교를 바꿀 것을 강요했다. 아버지와 같이 일한 사람들도 감시를 받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 감시를 받고 살았다. 그나마 우리는 시신이라도 찾았으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우리가 아는 다른 한 가족은 7명이 처형 당했지만 1명의 시신도 돌려받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은 정부가 없어서 어디 진정도 못 한다. 사담의 범죄를 全세계에 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아미르는 『가족들의 시신을 인수하러 아부그레이브 교도소에 갔을 때 같이 죽은 6000명의 사망진단서를 보았다』고 했다.
아부그레이브(Abughrayb)는 바그다드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있다. 지난 5월3일 아부그레이브 교도소를 방문했다. 우리 일행을 태우고 가던 택시 운전사 압바스(33)는 우리가 교도소에 간다는 것을 알고 『내 사촌도 아부그레이브에서 처형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21세이던 그의 사촌은 1999년 사원에서 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후 2002년 처형되었다고 한다.
택시 운전사와 이름이 같은 우리의 안내자 압바스도 『1980년 내 사촌 3명이 체포됐는데,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의 사촌 3명 중 1명은 사원에서 기도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나머지 2명은 그들의 형이 체포된 후 이유 없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후세인은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는 젊은이들을 이슬람 비밀 정당인 「다와黨」의 당원으로 의심해서 잡아갔다고 한다. 안내원 압바스는 『후세인은 이슬람이 금지한 술을 파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이슬람 종교인도 이슬람 정당도 싫어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교도소 정문 초소에 있던 후세인의 대형 초상화는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어 있었다. 주민들이 교도소 창틀을 뜯어내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건물이 100동은 넘는 것으로 보였다. 눈 닿는 데가 다 교도소 건물이었다.
교수형실 바로 옆 사형수들이 묵었던 건물에는 10여 개의 큰 방이 있었다. 방의 벽면에는 「신이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죽음을 보게 될 것이다」, 「나의 영원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등의 마지막 유언들이 가득했다.
암살 시도 있었던 도시를 밀어 버려
5월9일 아침, 오랜만에 에어컨이 들어오는 차를 타고 나자프市를 갔다.
나자프市는 바그다드 남쪽 200km 떨어진 곳에 있다. 바그다드 외곽 남쪽 지역인 도라(dora) 지역을 지나가는데 다리만 남은 후세인 동상이 있었다.
택시 운전사 알라(39)는 『이 동상이 바그다드에서 처음으로 쓰러진 후세인 동상』이라고 알려 줬다. 그 동상의 머리는 자기 친구 집에 있다고 한다. 알라의 친구는 후세인에 의해 가족이 처형됐다. 그는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마다 신발을 벗어 후세인 동상의 머리를 때리게 한다고 했다.
나자프市로 가는 지루한 길에 택시 운전사가 들려 주는 후세인의 일화가 재미있었다.
<자동차狂 우다이는 길거리에서 고급 차를 보면 죄다 빼앗았다. 그는 바그다드 시내에 자기가 가진 차와 같은 차가 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쩌다 같은 차를 산 사람은 색깔이라도 바꾸어야 했다>
<후세인은 한 번 움직일 때 5000명의 경호원을 각각 다른 곳에 풀어 사람을 혼란시킨 다음 자기는 헌 택시를 타고 곧잘 나타났다. 후세인은 국민들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1993년경 이라크 북쪽 지방인 디자일市에서 후세인 암살 시도가 있었다. 후세인이 이 도시를 지나가는데 어떤 여자가 양의 피가 묻은 손을 들어 차를 제지시켰다. 후세인은 불길하다고 하여 차를 바꾸어 타고 갔다. 얼마 가다가 그가 원래 탔던 차가 저격을 당했다. 후세인은 탱크와 비행기를 보내 디자일市를 부숴 버렸다. 폭격을 피해 나온 사람들은 모두 잡아다가 남쪽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감옥에 넣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1976년, 바그다그 인근에 카라데라는 지역의 모스크 사원에서 그 사원의 지도자가 존경을 받는 것을 보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후세인이 그 종교지도자를 처형해 버렸다>
한참 후세인 이야기를 하던 택시 운전사는 1991년 어떤 사람이 가족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며 자신의 차를 대절했던 때를 기억했다.
『어느 가족이 와서 가족의 시신을 가져와야 한다며 나의 차를 이용했다. 그 가족과 함께 시신을 인수하는데 처형된 시신의 양쪽 눈이 다 없었다. 감옥에서 약물을 투여해 사형수의 의식을 잃게 한 후 눈을 빼서 팔았음이 틀림없다. 그때 냉장고에 들어 있는 시신도 보았다』
나자프市를 가는 길에 잠시 내려서 음료수를 사는데 음료수를 파는 아이들이 신발을 모두 신지 않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당연히 읽고 쓸 줄 모른다고 했다. 평생 저렇게 길거리에서 음료수나 팔아야 할 아이들의 미래가 자꾸만 떠올랐다.
두 시간 정도 달리자 나자프市에 도착했다. 알리 사원 옆으로 조성된 거대한 공동묘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자프 시민들 『후세인을 제거한 미군에 감사한다』
이 공동묘지는 이라크뿐만 아니라 中東지역의 시아派들이 죽어서 묻히고 싶어 하는 곳이라고 한다. 안내원 압바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여기 묻혀 있다고 했다. 시가지는 마치 판자촌처럼 초라했고 주민들은 궁핍하게 살고 있었다.
나자프市는 1991년 시아派들의 反후세인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후세인은 시아派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자프市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이곳의 주민들은 당시 많은 사람이 생매장당하거나, 길에서 학살당했다고 말했다.
알리 사원 앞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1991년 걸프戰이 끝나고 나자프가 고향인 수천 명의 군인들이 돌아왔는데 후세인은 이들은 인근 사캄 호텔에 불러 모은 후 어디론가 데리고 가서 처형했다』고 말했다.
한 노인은 『당시에 후세인 군대는 나자프에 연일 폭격을 한 후 우리 집이 있는 한 블록을 불도저와 탱크로 밀어 버려 나는 집을 잃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 만난 나자프 시민들은 『후세인을 제거해 준 미국에게 감사한다』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바그다드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것은 기쁘지만 미국은 싫다』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현재 全세계 이슬람 시아派의 최고 지도자라고 하는 이맘 시스타니가 알리 사원 인근에 산다고 하여 찾아갔다. 마침 금요일이라 기도하러 나가고 없다고 했다. 안내원 압바스는 『그의 말 한마디면 全시아派들이 복종을 한다』고 말했다. 이라크 시아派 최고 지도자의 집이라고 해서 그나마 사는 구색은 갖추었을 거라는 기자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의 집은 알리 사원 부근의 어느 좁은 골목에 있었다. 골목을 이루는 벽에 낡은 쪽문 하나가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압바스는 『이슬람敎에서는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고 가르치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철저히 실천하기 때문에 검소하게 산다』고 설명했다. 시스타니의 집 앞에는 차세대 종교 지도자들인 젊은이들이 거리 설교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나자프 인근에 있는 이슬람 종교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한다.
나자프에서 돌아오는 길에 택시 운전사에게 후세인 동상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택시 운전사는 기자를 그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의 집은 바그다드 동쪽 자드리야 지역에 있었다. 후세인 동상을 보관한다는 택시 운전사의 친구는 집에 없었고, 바로 앞집에 그의 조카가 살고 있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조카는 알리 알 딜라이미(48)였다.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는 후세인의 발
이 사람의 아홉 명의 형제 중 세 명이 처형되고, 세 명의 형은 외국으로 도망갔다. 한 형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죽었다고 했다. 자신도 1984년 체포되어 20년 형을 선고 받았다가, 1989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풀려났다고 했다.
─후세인이 많은 명예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아는가.
『후세인 패거리가 교육을 못 받아서 교육받은 자를 매우 싫어했다. 세상에 많은 학위가 있지만 후세인의 학위는 사람 죽이는 학위일 것이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학살이다. 2년 전 한국을 방문했다가 온 내 사촌 한 명이 하는 말이 마치 별세계에 갔다 온 것 같다고 했다. 후세인이 이라크를 몇백 년을 후퇴시켰다』
─후세인宮에서 많은 달러가 나온 것을 아는가.
『그것을 모르는 이라크 국민이 어디 있나. 후세인宮뿐 아니라 그의 배 다른 형제 집 한 곳에서는 2층 비밀장소에 돈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주민들이 모두 가져갔다. 그 집에서 골동품도 나왔는데 이라크 박물관에 있었던 것이다. 이라크 유산을 자기 집에 두고 해외로 팔아먹은 것이다. 우다이 집의 수백만 달러도 주민들이 가져갔다』
─그동안 형들이 처형된 것은 어디에다 하소연해 보았나.
『오직 神에게만 물어 보았다』
팔레스타인 호텔에서 50m도 채 안 되는 곳에 있는 파라다우스(faradaws:천국) 광장이 있다. 이곳에 있던 대형 후세인 동상은 지난 4월9일 이라크 국민들에 의해 쓰러졌다.
이번 이라크 전쟁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연일 떠들던 사람들은 일순간 침묵했다. 權座(권좌)에서 내려오기 싫다는 듯 후세인 동상의 발 부분만은 떨어지지 않고 기단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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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이라크 르포-한국의 反戰 운동은 도살자를 위한 것이었나?
(이 기사는 위의 기사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월간조선 2003년 7월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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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라라는 작은 도시에서 학살된 1만여 구의 암매장 시신이 발견됐다. 한국의 反戰 운동은 도살자를 위한 것이었나?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hanal@chosun.com)
『이제 우리에겐 미래가 있다』
기자는 지난 5월1일부터 20일간 이라크를 취재했다. 이라크에 다녀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이라크 국민들이 후세인이 없어진 걸 정말로 기뻐하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한 친구는 『이라크인들이 아무리 후세인을 싫어했다지만 설마 미국보다 더 미워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기자는 이라크에서 평범한 이라크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노력했다.
음료수를 파는 가게 주인, 전직 공무원, 경찰관, 택시 운전사, 대학 교수, 학생, 군인, 언론인…. 그들의 얘기는 한결같았다.
『미국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있는 게 기분 나쁘긴 하지만 후세인 시절보다는 낫다』
어떤 사람은 『우리 아이들에게 이제 미래가 있다』고, 또 다른 사람은 『미국을 몰아 내는 것이 후세인을 몰아 내는 것보다야 쉽지 않겠는가』라며 좋아했다. 후세인은 도대체 자기 국민들에게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힐라(바빌론)」라는 도시가 있다. 5월14일, CNN 방송은 이곳 힐라市에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마하윌」이란 지역에서 후세인 시절 집단 학살당한 시신 수천 구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다음날인 5월15일 기자는 이곳을 찾았다.
발굴 현장에는 시신을 찾기 위해 몰려 온 가족들과 현장 주민, 보도진이 뒤엉켜 있었다. 이곳저곳에 시신 발굴을 위해 파놓은 큰 구덩이가 있었다. 한 구덩이에서는 70여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발굴된 유골은 비닐 봉지에 담겨 땅바닥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행방불명된 가족을 찾는 이들이 비닐 봉지를 하나씩 들추어 가며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찾고 있었다.
시신 발굴 장비는 포크레인 한 대가 전부였다. 포크레인이 땅을 파헤치다가 시신이 나오면 주민들이 달려들어 맨손으로 흙을 걷어 낸 후 시신을 밖으로 들어 날랐다.
힐라 일대에서만 1만여 명 암매장
시신 발굴 현장 지휘 책임자인 마지드 움란(43)씨는 『10여 일 前부터 힐라 지역 주민들과 인권단체들이 시신 발굴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제서야 기자들이 몰려 오고 있다』고 했다. 인권단체 회원인 그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약 2600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는 『힐라 인근에 이라크軍 기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매장된 시신이 발견됐다』고 했다. CNN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힐라 일대에서만 약 1만1000구 이상의 시신이 발견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발견된 시신의 약 절반 가량의 신분이 확인되고 있었다.
형체를 불간하기 어려운 시신의 신분 확인이 이렇게 원활하게 이뤄진 데는 후세인의 虐政(학정)이 큰 기여를 했다. 후세인 정권 시절 신분증 없이 집 밖으로 나갔다가는 곧바로 연행됐다. 이라크 국민들은 누구나 신분증을 소지했다.
형을 찾으러 왔다는 한 사람은 후세인의 초상화가 그려진 지폐를 꺼내더니 그 위에다 침을 뱉었다. 남편의 시신을 찾은 한 여인과 그의 아들은 시신이 놓여 있는 뜨거운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이곳에 암매장된 이들은 대부분 힐라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다.
1991년 1차 걸프전쟁이 끝나고 이라크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시아파를 중심으로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힐라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사담 후세인은 공화국 수비대를 이 도시에 보내, 길거리에 보이는 힐라 주민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차에 태워 끌고 갔다.
목격자들은 당시 체포된 시민들은 트럭으로 이곳에 실려온 후 대부분은 생매장 당했다고 증언했다. 공화국 수비대원들은 일부 시민들에게는 강제로 휘발유를 마시게 한 후 총을 쏘아 몸에 불을 붙여 죽였다고 한다.
마지드씨는 『발견되는 시신의 두개골이나 옷에 총상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생매장된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나자프市를 방문했을 때도 양민 학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힐라 시가지에는 검은 천이 도시 곳곳에 걸려 있었다. 이번에 시신 발굴 현장에서 시신을 찾은 가족들이 걸어 놓은 것이다. 시내의 사원마다 시신을 인도한 가족들이 장례식을 치르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죽은 이들의 사망일자는 검은 천에 모두 1991년으로 표기돼 있었다.
힐라를 방문한 날 리비아의 한 TV 방송사는 후세인의 양민 학살 장면을 담은 화면을 내보냈다.
비밀 경찰들이 체포한 젊은이의 가슴 부위에 폭발물을 장착한 후 리모콘을 작동시켜 폭파시켜 처형하는 장면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고위급 간부들은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反戰운동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반감
많은 이라크인들은 『후세인은 이라크가 미국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주민들을 죽음과 고통 속에 방치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후세인은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에 따라 석유를 팔아 마련한 돈을 단 한 푼도 이라크 국민들을 위해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후세인과 그 아들들은 미국의 경제제재와 상관없이 각종 이권 사업을 하거나 시리아, 리비아 등 인근 중동 국가들과 엄청난 비밀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富를 챙겨 왔다. 후세인은 전국에 70여 개에 이르는 대통령궁을 지어 놓았다.
전쟁 후 엄청난 달러가 후세인의 궁궐과 별장, 그 가족들의 집에서 발견됐다. 그런데도 이라크의 병원에는 의약품이 없어 아이들을 비롯한 환자들이 죽어 갔고, 학생들은 낡은 학교에서 공부했다.
바그다드 시내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이슬람 사원이 거의 완공 단계에 있으며, 역시 어마어마한 크기의 후세인 사원이 건설이 중단된 채 흉물스럽게 서 있다. 각 지방 중소도시에는 어김없이 사담 후세인의 이름이 붙은 대규모 사원이 건설됐다.
이라크인들은 『후세인은 엄청난 돈을 이런 식으로 탕진하면서 국민을 위해 병원하나 짓지 않고 의약품 한 번 산 적이 없다』고 분노했다. 기자의 통역을 해 준 압바스씨(38)는 『후세인은 1차 걸프전쟁 후 경제제재의 부당성을 외부에 선전하기 위해, 이라크 아이들이 기초 의약품이 없어 죽는 것을 방치했다』고 전했다.
어느 시장 골목을 취재하면서 한 이라크 남자에게 『후세인은 자기 피로 코란을 쓸 정도로 신앙심이 깊지 않은가. 그는 또 팔레스타인을 사랑하지 않았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주변에 있던 이라크 사람들은 기자를 둘러싸고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무슬림은 피를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피로 코란을 쓴단 말인가. 우리 종교에서는 손에 피가 묻으면 여러 번 씻어 내도록 교육받는다』
『후세인은 매일 술을 마셨고 그 아들은 술주정뱅이들이다. 이라크 국민 중에는 그가 무슬림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들은 후세인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아꼈다는 얘기에 대해 이런 설명을 했다.
『팔레스타인에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나면 그 가족들에게 엄청난 돈을 주었다. 팔레스타인들이 이라크에 오면 집도 주고 돈도 주었다. 자국민들을 다리 밑에 살도록 방치한 사람이 진정으로 팔레스타인 사람을 사랑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아랍 세계에 잘 보이려는 쇼였다』
바그다드에 살고 있는 알리 알 딜라이미(48)씨는 아홉 명의 형제 중 세 명이 후세인 정권에서 처형되었다. 세 명의 형은 외국으로 도망갔다. 그의 삼촌 두 명도 자녀 8명을 잃었다고 한다. 모두 이슬람 비밀 정당인 다와 정당에 가입했다는 이유였다.
알리씨는 『전쟁으로 얼마의 시민들이 죽거나 다칠 수 있겠지만, 후세인은 단 하룻밤에 수만 명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며 『서방세계에서 벌어진 反戰운동은 후세인의 돈을 받은 사람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자신이 고문받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라크의 비밀경찰은 잡아 온 사람의 입에서 다섯 명의 이름이 나올 때까지 고문을 했다』며 『거명된 사람은 끌려와서 똑같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다』고 말했다.
알리씨는 이라크 최고의 대학인 바그다드대학을 졸업했지만, 복학도 못 하고 직장을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석방죄수협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타르 자바르(39)씨는 『한국에서 이라크戰을 반대한 反戰운동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한국인들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反戰운동을 한 사람들은 악마인 사담에게 힘을 주었기 때문에 사담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라고 흥분했다.
누구를 위한 反戰운동이었나
아하메드 모하마드씨는 육군 대령 출신이다. 그는 1987년 전쟁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0년을 감옥에 있었다고 한다. 영어가 유창한 이 사람은 자신을 57세라고 소개했지만 70代 중반도 더 되어 보였다. 그는 감옥에 있는 10년 동안 가족을 단 한 번도 못 보았다고 한다. 처음 1년은 가로, 세로 1m 독방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그에게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미국이 이라크에 주둔하는 상황을 반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후세인을 제거해 준 미국에게 꼭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美軍이 이 땅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결코 쉽게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아니었으면 사담과 그의 가족은 이 나라를 영원히 집권하면서 이라크 국민을 고통 속에 빠뜨렸을 것이다. 당신이 이곳에서 앞으로 10년 동안 취재를 한다고 해도 이라크 국민들이 후세인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다 취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라크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부모, 형제, 가까운 친척 가운데 한 명 이상이 후세인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했다고, 어느 지역에서 신망이 높다고, 종교지도자란 이유로, 가족 중에 누가 체포되었다는 이유로, 친구나 학교에서 후세인과 그의 가족에게 말 한마디 잘못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거나 처형당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행방불명되면, 가족들은 그를 찾기 위해 비밀경찰에게 돈을 갖다 바쳤다. 처형을 확인한 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비밀경찰에 돈을 갖다 바쳤다. 그나마 시신을 찾은 가족은 운이 있는 편이었다.
팔레스타인 호텔 주변에는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기자는 그 중에 열 살이 안 되어 보이는 한 남자 아이와 친해졌다. 『어머니가 어디 계시니?』 하고 묻자 그 소년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어디서 자니?』 하고 다시 묻자 땅바닥을 가리켰다.
이 아이는 기자가 취재를 마치고 호텔에 들어서면 어느새 쪼르르 달려와서 볼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이 아이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서 글을 읽고 쓸 줄을 모른다. 이른바 문명국의 평화주의자들은 「反戰 평화」라는 이름으로 저 아이의 미래를 영원히 후세인의 잔혹한 손아귀에 맡겨 놓는 일에 동참해 온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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虐殺로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한「바그다드의 도살자」후세인의 삶
(이 기사는 후세인이 체포된 직후 쓴 것입니다. 2004년 1월호에 나갔습니다)
『국민들을 인질로 잡고 전쟁을 했으면서, 자살할 용기도 없는 비겁한 인간』
● 후세인의 존재 때문에 이라크인들은 그가 체포될 때까지 공포를 떨쳐내지 못했다
●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이 학살한 인명수는 수십만 명선
● 혁명 동지와 恩人, 그리고 가족까지 처형시키는 冷血漢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hanal@chosun.com)
후세인 체포 뉴스를 듣고
月刊朝鮮 마감이 끝난 2003년 12월14일 저녁 7시, CNN은 이라크 前 대통령 후세인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긴급 뉴스로 전하고 있었다. 그 순간 기자의 머리에는 2003년 5월, 20일간 취재차 이라크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이라크 백성들이 후세인의 사인 하나로 닭처럼 도살되고 있을 때 反戰운동을 벌여 독재자 후세인에게 힘을 실어준 사람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한 인권운동가 사타르 자바르(39)씨. 그는 이슬람 비밀정당인 다와黨에 가입했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10년을 복역했다.
『후세인은 우리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전쟁을 했으면서, 자기는 히틀러처럼 자살할 용기도 가지지 못하고 도망간 비겁한 인간』이라고 분개하던 이라크 항공 교통관제사 압둘 카림(44)씨.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후세인이 없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아버지와 형제 다섯 명이 후세인 정권에게 처형 당했지만, 그 이유조차 듣지 못한 아미르(38)씨, 기자를 아부그레이브 교도소까지 태워 준 후 자기의 사촌이 갇혀 있었던 교도소 감방 쇠창살을 붙들고 울던 택시 운전기사 압바스(33)씨. 후세인 체포 소식에 환호하는 이라크 군중의 모습 위로 이들의 얼굴이 교차되어 떠 올랐다.
무엇을 위한 反戰平和 운동이었나?
기자가 머물던 팔레스타인 호텔 뒤편에 있는 한 여관에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인간방패를 자처했던 한국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전쟁에 고통 받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을 돕고,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겠다는 것이 이들이 이라크에 온 이유라고 했다.
취재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우연히 이라크의 한국 反戰平和팀과 함께 활동했던 20代의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열린 무슨 「세계평화회의」에 참석하고 돌아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전쟁이 끝났는데 이라크에서 反戰平和 운동을 할 것이 더 남아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우리는 모든 점령정책을 반대한다』며 『이제 이라크의 일은 이라크 국민에게 맡기고 美軍이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순간 『이대로 美軍이 철수하면 후세인과 그 일당들이 다시 政權을 잡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1991년 시아파 봉기 진압 때와 같은 대량 학살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참았다.
反戰平和를 외치던 사람들은 국내에 돌아와 이라크인들의 궁핍한 모습을 전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누가 이 이라크인들을 이렇게 만들었냐』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국내 방송사들은 이라크의 혼돈 상황을 보도하면서 『전쟁 때문에 고통받는 이라크에 빨리 평화가 와야 한다』는 방송을 수없이 내보냈다.
도대체 그 많은 한국의 기자들과 反戰平和팀 운동가들이 이라크에서 무엇을 보고 온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후세인의 몰락을 축하하며 거리에서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후세인의 독재에 고통받으며 죽어간 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기자는 이라크 취재기간 동안 통역을 해준 압바스(38)씨와 헤어지는 날 그에게 한글 편지 한 통을 써 주었다. 「한국인들은 이 사람에게 믿고 통역을 맡기라」는 일종의 추천서였다.
아이 세 명을 둔 압바스씨는 『후세인이 없어져서 이제 내 아이들에게도 미래가 있다』고 기뻐했다. 그는 『지난 35년간 그랬듯이 앞으로 35년이 지난다고 해도 외부의 도움 없이는 이라크인들 스스로 후세인을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美國의 도움을 고마워했다. 독실한 시아파 무슬림 신자인 그는 후세인 정권에게 조카 두 명을 잃었다. 그는 『祖國에 美軍이 주둔하는 것을 누구보다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평생 후세인의 몰락을 기도했다』고 말했다.
후세인에 대한 공포
후에 이라크에 다녀온 기자를 통해 알아 보니 압바스씨는 이라크를 방문한 대한적십자사 일행의 통역을 했고, 현재는 美軍 군정청의 통역사로 일하면서 돈을 제법 모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자가 이라크에 갔을 때는 부시 대통령이 사실상의 종전을 선언한 이후였다. 당시 현지 치안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시민들의 대량 약탈이 조금 진정되기는 했으나, 바그다드 곳곳의 빈 관공서 건물에는 방화로 추정되는 불길이 매일 치솟았고, 밤거리에는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라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치안 부재」를 가장 큰 불만으로 이야기했다. 강도들에게 차를 잃었다는 한 시민은 『빚 3000달러를 내서 차를 구입해 택시 영업을 했는데 빚을 갚을 길이 막혀 버렸다』며 『자살을 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며 울먹였다. 그는 내가 기자라고 하자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뻐하며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외에는 없었다.
매일 택시를 타고 취재에 나서면 『어제는 이웃에 강도가 들어 세 명이 죽었다』, 『대낮에 거리에서 차를 뺏는 강도를 보고도 어쩔 수 없이 구경만 했다』는 험악한 이야기를 들었다. 바그다드 서쪽지역에서 구두 가게를 하는 지야드(36)씨는 『사담 시절에는 장사하는 데 걱정이 없었는데 지금은 무서워서 못 살겠다』며 『빨리 새 정부가 들어서든지 美軍이 순찰을 강화해야 하든지 해야 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바그다드 시민들은 세계 최강의 美軍이 기본적인 거리 치안을 장악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보냈다. 심지어 『美軍이 본격적인 이라크 再建 작업이 들어갔을 때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치안을 방치하고 있다』는 소문이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 상식처럼 퍼져 있을 정도였다.
영원히 죽지 않는 大兄 사담
미국은 심각한 이라크의 치안상태를 조기에 회복하기 위해 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이라크의 치안이 불안하기 때문에 파병에 신중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동맹국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세인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라크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를 보내며 기뻐했다. 기자는 이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이제야 후세인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에게 가졌던 공포의 깊이를 알 수 없을지 모른다. 기자는 바그다드에 머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후세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 질문을 받은 이라크인들은 일단 얼굴 표정이 심각해지며 귓속말을 할 듯 바짝 다가선 후 낮은 목소리로 『후세인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미국 방송국에서 통역을 하던 한 이라크인은 『후세인은 지금 티크리트 자기 고향 어딘가 땅 속에 숨어 있다』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후세인은 영원히 죽지 않는 「大兄(대형)」이었다.
기자는 이라크에 머무는 동안 후세인이 죽었다고 믿고 있는 이라크인은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많은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을 미국이 보호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심지어 후세인이 미국의 간첩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전직 경찰관 알리 아브라힘(32)씨는 『美軍은 이라크 질서유지를 위해 다시 사담을 權座(권좌)에 세울 수도 있다』며 겁을 먹고 있었다. 이라크 사람들은 1991년 걸프 전쟁 때 후세인이 제거될 것으로 믿고 봉기를 했다가 미국이 발을 빼는 바람에 후세인에게 대량 학살을 당했던 쿠르트族 시야派 이슬람 교도들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라크인들은 후세인의 확실한 말로를 보지 않은 한 그가 살아 있다고 믿을 것이고, 그에 대한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 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후세인을 체포한 이후 미국은 『후세인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라크인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박힌 후세인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기 위한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고통을 잊지 못하는 가족들
후세인은 상상하기 힘든 공포정치로 이라크를 통치했다. 그는 이라크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어 놓고 주민들을 감시했다.
기자는 바그다드 취재 중이던 2003년 5월 중순경 힐라市 (바빌론) 북쪽 1km 지점인 마하윌에서 1991년 후세인에게 대량 학살당한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방문했다. 현장에는 약 3000구의 시신이 발굴된 상태였다. 힐라 주민들은 『이 일대에 1만여 구의 시신이 더 묻혀 있다』고 말했다.
이곳 주민들은 『1991년 후세인이 힐라市에 탱크를 몰고와 길에 보이는 사람들은 무조건 체포해 생매장을 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힐라 부근 여러 곳에 학살된 주민들이 매장돼 있다고 증언했다.
이곳에 사촌을 찾으러 왔다는 케림 하심(36)씨는 『사담 후세인에 맞서 싸워준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한국인들도 사담에 대항해 싸워줘서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바그다드 남쪽 나시리야에 파병된 한국군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도 이번 전쟁에서 싸웠다고 알고 있었다. 그는 『사담은 전쟁 범죄자, 아비 없는 자』라고 욕을 퍼 부은 후 사라졌다.
차도르를 쓴 늙은 여인이 울면서 『1991년 실종된 17세 된 아들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이 여인은 『아들이 실종되자 티크리트에서 온 정부 관리들이 「자기들이 아들을 데리고 있다」며 후세인 사촌이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후 이 여인은 후세인 사촌이라는 사람에게 『아들을 살려달라』며 200달러씩 10번 가량 돈을 주었으나 아들을 끝내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이날 저녁 리비아의 한 TV방송은 후세인 정권의 비밀경찰들이 체포한 젊은이들의 가슴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해서 리모컨으로 폭파시켜 처형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2003년 10월30일, 미국 폭스 뉴스와 CNN은 후세인 치하에서 軍과 경찰이 정치적 반대자를 처참하게 고문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이 비디오는 다음날 국내방송에도 일부가 소개 됐다. 23분짜리 이 비디오 테이프에는 웃통이 벗겨진 채 두 팔이 기둥에 묶인 남자의 알몸을 철봉으로 수없이 내리치는 장면, 살아 있는 사람의 혀를 뽑거나 팔목을 자르는 장면, 목을 치기 위해 머리를 나무받침에 끌어 올리는 장면,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10m 아래의 위에서 밀어떨어뜨려 관절을 골절시키는 장면 등이 담겨 있었다.
알리 알 딜라이미(48)씨는 이슬람 정당(다와黨)에 가입했다가 1984년 체포되어 2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1989년 이란-이라크 전쟁 후 풀려 났다. 그는 감옥에서 고문당했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형제 아홉 명 중 세 명이 이슬람 정당에 가입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고, 한 명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戰死했고, 두 명은 국외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의 삼촌도 네 명의 아들을 잃었다. 그 자신이 감옥에 6년 동안 있는 동안 가족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처형된 알리씨의 형의 장례식에는 아버지 혼자만 참석이 허락됐고, 비밀경찰은 아들을 쏜 총알을 강제로 아버지에게 사게 했다고 말했다.
다섯 명의 이름을 댈 때까지 고문 계속
『잡혀 온 많은 사람들이 조사과정에서 죽었다. 비밀경찰은 잡아 온 사람들을 총으로 쏘거나 때리거나, 복부를 걷어 차서 많이 죽였다. 내 친구 마하무드는 신장을 차여 즉사했다. 그는 이슬람 정당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가 죽은 후 경찰은 그가 다와 정당에서 활동했다고 서류를 조작했다』
알리씨는 후세인 비밀 경찰들의 다양한, 그리고 기상천외한 고문 방법을 들려주었다. 콜라병에 앉게 해 항문을 찢는 고문, 신체의 가장 민감한 부위에 전기 충격을 주는 고문, 눈을 가린 후 무조건 구타하는 고문, 손을 뒤로 묶고 천장에 매달아 어깨를 탈골시키는 고문…. 그가 직접 당하거나 목격한 고문이다.
비밀경찰들은 잡혀 온 사람들 입에서 다섯 명의 다른 사람 이름이 나올 때까지 고문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야 자기들의 실적이 올라가고 명단에 이름을 채워 상부에 보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리씨는 『잡혀 온 한 남자가 고문에 못 이겨 자기 부인의 이름을 말하는 광경도 보았다』고 했다. 비밀경찰이 이 사람의 아들을 잡아와서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이자, 겁에 질린 그는 자기 부인의 이름을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잡혀 온 사람들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사람들은 곧바로 연행되어 같은 식으로 고문을 받고 처형됐다고 한다.
아미르(38)씨의 아버지와 아미르씨의 형제 다섯 명이 같은 날 처형당했다. 그는 가족들의 시신을 인수하러 갔을 때 형들의 시신 머리부분에 도끼자국이 나 있었다고 말했다.
전직 육군 대령 아하메드(57)씨는 기자에게 『당신이 10년을 취재한다고 한들 이라크인들이 고통받은 이야기를 다 취재하지 못할 것』이라며 『美軍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쉽게 나가지 않겠지만, 미국이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후세인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이라크인들을 만나면서 「바그다드의 도살자」, 「중동의 히틀러」 등 그 동안 미국이 후세인을 칭했던 별명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세인은 1937년 바그다드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티크리트의 가난한 농촌마을인 알 아우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그는 의붓 아버지 아래서 구박받으며 교육도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자랐다.
그는 18세 때 외삼촌을 따라 바그다드로 와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다니며 아랍 민족주의에 깊이 빠진 후세인은 학생운동에 참여 했다. 후세인은 1957년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혼합한 바트黨의 암살 행동대원으로 가입했다. 1958년 압둘 살람 아레프 대령이 압둘 카림 카심 총리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연루돼 후세인도 투옥됐으나, 곧 탈출했다. 후세인은 다시 카심 총리 암살 계획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이집트로 가서 망명 생활을 했다.
인간 도살자 후세인
1963년 바트黨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후세인은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1964년 다시 정권이 뒤집히자 체포되어 1966년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이때쯤 바트黨에서 후세인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1968년 쿠데타로 바트黨이 再집권하는 데 핵심역할을 한 후세인은 혁명평의회(RCC) 부의장이 되어 권력의 실세로 떠 올랐다. 1979년 후세인은 바크르 대통령을 사임시키고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9년 7월 대통령에 취임하기 며칠 전 후세인은 22명의 바트黨 지도급 인사에게 반역죄를 씌워 처형했다. 이때 처형한 사람 중에는 과거 그가 지하 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그의 친한 친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의 비밀재판 과정은 비디오로 생생하게 녹화되어 있다.
넓은 회의실에 400여 명의 바트黨 고위 간부와 RCC 소속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RCC 서기장인 마샤디가 단상에 서서 『내가 반역을 했다』는 자백을 털어놓았다. 고문에 의한 사전 각본에 따른 자백이었다. 마샤디의 입에서 공모자의 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비밀경찰들은 그 사람을 회의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들에게는 변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후세인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권총을 지급한 뒤 반역혐의를 받은 이들을 즉결 처형하게 했다. 후세인은 자기와 가장 친했던 인사와, 유력 가문 인사들은 더욱 가혹하게 처형했다. 후세인은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 조의를 표하자고 한 사람도 불필요한 동정을 보였다는 죄목으로 처형했다.
기자가 만났던 이라크 국민협정(INA)의 알 아와디(60)씨도 이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후 투옥됐으며, 그 후 후세인을 피해 12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그가 망명하자 후세인 일당은 그 아들과 부인을 잡아 고문한 후 처형했다.
후세인은 자기의 가족에게조차 관대하지 않았다. 1995년 그의 두 사위가 요르단에 머물며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관해 폭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세인은 사위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겠다』며 귀국을 종용했다. 두 사위가 귀국하자 후세인은 72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을 살해했다.
후세인은 1984년에는 자신의 측근이던 오마르 알 하자 중장이 후세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오마르 중장과 그의 아들의 혀를 자른 후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평화조약 체결 조건으로 후세인의 퇴진을 요구했을 때 이브라힘 보건장관이 『각하께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평화협정 체결 후 다시 복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다음날 이브라힘 장관은 토막 살해된 채 발견됐다.
1991년 걸프戰을 틈타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시아파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후세인은 탱크를 몰고 도시를 쑥대밭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약 14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죽었다. 반군 부상자를 치료했다는 이유로 15개의 병원이 파괴됐고, 시민들은 산 채로 헬리콥터 위에서 던져졌다.
1991년 30만 명 학살
바스라의 시아파 종교 지도자들도 투옥 후 살해됐으며, 반군에 동요한 수많은 軍 장교들은 즉결 처형됐다. 이 당시 바스라를 비롯한 이라크 남부에서 죽은 사람은 약 5만 명에서 3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북부 쿠르드族은 당시 무덤을 만들지 못해 시신들을 불도저로 밀어넣을 정도로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쿠르드族은 이미 1988년 후세인에게 독가스 공격을 받아 5000여 명이 학살당한 경험이 있었다.
바그다드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도시인 나자프를 방문했을 때 그곳 주민들은 1991년 당시 후세인 군대가 도시의 몇 개 블록을 밀어 버렸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걸프戰에서 갓 돌아온 젊은 군인 수천 명은 따로 어디론가 끌려가 모두 처형됐다』고 말했다.
국민들에게 최후의 일인까지 聖戰(성전)을 펼치라던 후세인은 바그다드 함락과 동시에 사라져 토굴에 숨어 지내다 8개월 만에 美軍에게 총 한방 쏘지 못한 비겁한 모습으로 체포됐다. 후세인은 서방언론을 향해 『나는 미군에게 살아서 체포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저 초라한 모습의 인간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인생을 고통 속에 빠뜨렸나」하고 생각하니 쓴 웃음이 나왔다.●
제가 2003년 4월 이라크에 가서 취재한 내용입니다. 기사는 월간조선 2003년 6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 독재자 후세인이 사형 선고를 받았기에 다시 게재합니다. 후세인이 범죄혐의로 재판을 받은 '두자일市 학살사건'도 아래 기사에 잠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기사 아래 두 건의 관련 기사가 더 첨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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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이라크 국경 초소 경비
지난 4월25일, 기자에게 이라크 戰後(전후) 상황을 취재하라는 데스크의 지시가 떨어졌다. 출국 날짜를 4월30일로 잡았다. 『바그다드 시내 호텔에 빈 방이 없다』는 현지 정보에 따라, 호텔 로비에서 잘 각오를 했다.
짐의 부피를 최대한 줄였다. 청바지 하나에 티셔츠, 열흘 치 음식과 생필품을 등산용 가방 하나에 챙겨 넣고, 노트북과 카메라 같은 취재장비는 어깨에 메고 가기로 했다. 현금은 5000달러(600만원)만 챙겼다.
4월30일 오후 2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요르단의 암만에 도착하자 5월1일 새벽 2시(한국시각 오전 8시)였다. 암만 공항에서 자동차로 약 20분 정도 달려 메르디안 호텔에 도착하니 새벽 4시가 넘었다.
그때부터 그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현금 5000달러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바그다드에 들어가면 누군가 총을 들이대고 돈을 털어갈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바지 안쪽 비밀 주머니에 1000달러, 신발 밑창 아래 각각 1000달러씩 숨기고 나니 좀 안심이 됐다.
이날 아침부터 바그다드行 차량을 수배했다. 그러나 5월1일은 노동절 휴일로 아무도 일하지 않았다. 현대건설 바그다드 지사장 이영철씨에게 「긴급 구조 요청」 전화를 걸었다. 李지사장은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가까운 「아무라 호텔」에 가면 차편을 구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절대 400달러 이상 주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호텔 직원을 통해 1인당 400달러에 차를 빌렸다. 바그다드에 도착해 보니 100달러에 온 사람도 있었다. 정보에 어두운 이들 가운데는 800달러를 준 경우도 있었다.
5월1일 낮 12시30분.
우리 일행을 태운 1995년식 미국 시보레社 4륜 구동차가 바그다드를 향해 출발했다. 단조롭고 초라한 암만 외곽을 벗어나자 곧바로 황량한 사막이다. 운전사 가산(30)은 10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황토 사막, 붉은 사막, 자갈 사막, 스텝 사막을 가로질러 네 시간 정도 달리자 요르단과 이라크의 국경 지대가 나타났다.
요르단 국경초소의 경찰관 두 명은 우리 여권을 쓱 훑어보고 도장을 「쾅」 찍었다. 요르단 국경초소에서 3분 정도 더 달리니까 이라크 국경초소가 나타났다. 이라크 국경 초소에는 미군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한 미군이 여권을 한번 살펴보고 통과하라고 했다. 미국의 군정이 실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여기서부터 바그다드까지는 자동차로 약 다섯 시간 거리라고 한다. 국경 초소를 빠져 나온 우리 차는 갑자기 국경 근처의 넓은 공터로 들어갔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을 피해 사막에서 露宿
그곳에는 대형 탱크로리 서너 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차해 있었다. 국경을 오가는 장거리 차량을 대상으로 기름을 파는 기름 장수들이었다.
기름 장수들의 옷은 기름과 땀에 절고 먼지가 범벅이 되어 마치 넝마 조각을 걸치고 있는 듯했다. 이들은 기름을 사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바그다드를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사막에서 노숙을 한다고 한다.
차에 기름을 다 넣은 후에도 가산은 도무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산은 『슬리프, 슬리프(Sleep, Sleep)』 하며 잠자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알리바바, 알리바바(도둑)』라고 말했다.
「지금 출발하면 차량 강도에게 습격을 당하니 자고 나서 출발하자」는 얘기라는 게 이해됐다. 보디 랭귀지의 위대함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공터로 온갖 차량이 꾸역꾸역 밀려 들었다.
바그다드로 가는 국경 택시, 생필품과 공산품을 나르는 트럭, 대형 기름 탱크로리, 컨테이너 차량…. 한국의 중고 자동차 부품을 실은 소형 트럭도 8대 있었다.
5월2일 오전 8시.
국경 택시 10여 대가 행렬을 지어 바그다드로 출발했다.
길가로 불 탄 이라크軍 탱크와 차량의 잔해가 간간이 눈에 띄었다. 미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도로 한가운데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을 빼면, 도로 상태는 아주 좋았다. 바그다드에 머무는 열흘 동안 도로가 부서진 것을 본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경우다.
사막을 달린 지 다섯 시간 만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야자나무 숲과 황토색 저층 건물이 즐비한 바그다드 외곽에 도착했다. 불에 탄 채 나뒹구는 이라크軍의 탱크, 공터에 널려 있는 곡사포, 순찰을 도는 미군 장갑차가 얼마 전 전쟁이 이 땅을 지나갔음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다시 한 시간 후, 황토색 바그다드 시내가 눈앞에 펼쳐졌다.
시내에 들어서자 매연 냄새가 진동했다. 낡은 자동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커먼 연기가 바그다드 하늘에 짙게 드리워 있었다. 시내 주유소는 기름을 넣기 위해 수백m씩 줄을 선 자동차 행렬이 보였다.
오후 2시, 티그리스江을 건너 바그다드 서쪽에 있는 「팔레스타인 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 로비에서 자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과 달리 팔레스타인 호텔의 방 사정은 넉넉했다.
우리는 통신장비부터 점검했다. 인공위성 안테나를 설치했으나 우리가 원하는 주파수가 잡히지 않았다. 같은 호텔에 있는 日本 교도(共同)통신 기자들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이날 밤새 총소리가 들렸고, 호텔 주변의 건물에서는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일자리를 원하는 이라크 사람들
매일 아침 10시쯤 되면 100~200명의 이라크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호텔 앞으로 몰려든다.
미국에 있는 딸에게 국제전화를 걸게 해 달라는 할머니, 치안이 엉망이라며 美軍을 성토하는 사람, 자기 차를 50달러에 하루 종일 쓰라는 운전사, 직업을 구해 달라는 전직 군인 등 사연도 가지가지였다.
전쟁으로 회사가 문을 닫았다는 카심(32)은 『정유 공장이 잘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대통령宮에서 발견된 돈은 다 어디 갔나. 나도 언젠가 누구 것을 훔쳐야 살 수 있을 것』이라며 소리를 높였다.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한 카줌(40)은 『학교도 없고 병원도 없다. 사람들은 길에서 서로 총을 쏘고 있다. 후세인은 독재자이지만 그는 우리에게 평화와 안전을 주었다. 미국은 무엇을 주고 있느냐. 이것이 재앙이 아니면 무엇이 재앙이냐』고 말했다.
카줌처럼 이곳에 모인 사람 대부분은 이번 이라크 전쟁으로 직업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이들과 대화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이내 군중들이 몰려 들어 무엇인가 말을 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자 미군과 호텔 관계자들은 호텔 주변에 철조망을 치기 시작했다.
철조망 범위가 점점 넓어지더니 기자가 호텔에 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은 아예 팔레스타인 호텔 주변 전부가 철조망으로 둘러쳐졌다.
기자가 바그다드에 머무는 동안 안내와 통역을 한 압바스 라티프(38)는 자신을 서른여덟이라고 소개했지만 50代 초반은 된 것처럼 늙어 보였다.
압바스는 전쟁 전에 요르단에 본사가 있는 통신장비 수입 판매사에서 영어 통역으로 일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회사가 요르단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그는 바그다드에 있는 무스탄시리야(mustansiriya)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프랑스語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바그다드 도착한 다음날인 5월3일이었다. 기자는 호텔 앞에 몰려 있는 군중 틈을 겨우 빠져 나와 택시를 타기 위해 길을 서성거렸다. 그때 압바스가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었다. 그는 『내가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그의 제의를 거절했지만, 그는 『다른 일 할 것도 없다. 내가 원해서 도와주는 것이다』며 우리를 따라 나섰다.
택시에 오르는 순간 기자는 안내원과 통역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택시 운전사들이 대부분 영어를 하지 못해 목적지를 알려 주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이날 취재를 끝낸 후 압바스에게 당일 사례비로 10달러를 주고, 다음날부터 정식으로 일을 같이 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다음날 얼마를 주겠다고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그저 『인샬라, 인샬라(신의 뜻이라면)』를 반복했다.
이라크의 공무원들과 전·현직 군인들은 두 달 가까이 월급과 연금이 중단된 상태다. 바그다드 대학 교수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바그다드 대학은 23개의 단과대학을 거느린 이라크에서 제일 큰 국립대학이다. 戰時(전시) 휴교 중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등교했다. 5월17일 전시 휴교가 끝나기 때문에 수업준비를 하러 나왔다는 것이다.
바그다드大 게시판, 「범죄자 사담 후세인이 몰락했다」
바그다드 대학은 이번 전쟁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바그다드를 함락한 美軍이 이곳을 일찍 점령하면서 주민들의 약탈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다.
교내 중앙 도서관 앞에 서 있던 후세인 동상은 파손되고 기단만 남아 있었다. 자연과학大 건물 앞 낡은 게시판에는 누군가 분필로 「범죄자 사담 후세인이 몰락했다」고 써 놓았다. 거기서 만난 지질학과 학생 세 명은 『사담이 망할 줄 알았다』, 『앞으로 학문의 자유가 보장될 것』이라는 희망을 나타냈다.
자연과학大 건물 앞에서 세 명의 교수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 머리가 희끗한 메디 나지(56)라는 물리학과 교수는 이런 얘기를 했다.
『이라크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이라크人들은 이라크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수천 년간 이민족과 아무 문제없이 평화롭게 살아왔다. 이라크 문제에 외국이 더 이상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교수들은 2개월 동안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고통이 크다고 했다. 전쟁 직전에 월급이 반으로 줄더니 3월20일부터는 월급이 끊겼다는 것이다.
바그다드 서쪽 아드미에 지역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경찰 압둘 와하브(49)도 『지난 4월17일부터 월급 없이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미군의 허락하에 권총을 차고 근무한다고 했다.
시내에 있는 이라크 항공사를 방문했다. 교통관제사로 일하고 있는 압둘 카림(44)은 바그다드의 治安(치안) 부재를 우려했다.
『지금 누가 당신 머리에 총을 쏘면 누구에게 불평을 하겠는가. 바그다드는 지금 그런 상태다. 서로 훔치고 길에서 총을 쏘고 있다. 이것은 이라크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후세인의 30년 독재가 착한 이라크 사람을 도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후세인 정권이 붕괴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후세인이 없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후세인이 지난 30년 동안 어떤 죄를 저질렀나.
『후세인에게 당한 것을 어떻게 다 이야기 하겠는가. 후세인은 착한 이라크人들에게 폭력성을 심었다. 영양실조로 국민의 두뇌를 마비시켰다. 그는 이라크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라크 국민 500만 명을 감옥에 보내 고문하거나 학살했다. 이라크의 지식인, 의사, 과학자, 기술자 등 500만 명이 국외로 강제로 추방당했다. 이라크에는 가난하고 못 배운 자만 남았다. 후세인을 피해 이라크의 지식인은 전부 이라크를 떠났다. 지금 교수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팔고, 의사가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집이 없어 공중변소와 다리 밑에서도 자는데 그는 궁궐에서 살았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관련자들을 반드시 처벌해야 할 것이다』
바그다드에 넘쳐 나는 「음모론」
─이라크 전쟁이 벌어지기 전후해 우리는 방송을 통해 이라크 국민들이 「미국에 대항해 끝까지 싸우겠다」, 「후세인을 사랑한다」고 다짐하는 장면을 많이 봤다.
『이라크 사람들이 사담을 그렇게 사랑했다면, 미군이 바그다드를 이렇게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겠나』
─그렇다면 왜 후세인 정권 전복에 이라크人들이 나서지 않았나.
『후세인은 가족을 인질로 잡고 젊은이들을 전쟁에 보냈다. 후세인은 주민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부인이 남편을 배신하게 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신고하게 했다. 비밀경찰 조직이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길에서 택시 운전사가 유도 질문을 해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집 대신 감옥에 갔다. 히틀러는 자살이라도 했지만 그는 자살할 용기도 없는 비겁한 인간이다』
─지금 월급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난 30년간 아무도 변한 것이 없지만, 이제는 변한다는 희망이 있으니 기다릴 수 있다. 새 정부가 설 때까지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라크人들도 외국에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자유를 얻었다.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항공기 조종사 알완(45)은 현재의 이라크 상황을 미국이 1991년부터 꾸민 거대한 시나리오의 일부라고 했다.
『1991년 미국이 후세인을 살려 두면서 그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후세인은 바그다드만 겨우 지배하고 있었다. 미국은 중동의 석유를 지배하기 위해 후세인을 이용해 중동의 상황을 나쁘게 하게 했다. 그동안 석유 수출한 것 전부 후세인에게 간 것을 미국이 허용하지 않았나』
알완의 이런 주장은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여러 「음모론」 가운데 하나다. 기자가 만난 많은 이라크인들은 이런 다양한 음모론을 얘기했다.
<후세인과 그 가족은 지금 미국이 보호하고 있다>
<후세인은 미국의 비밀 첩보원이다>
<후세인은 미국의 명령에 따라 이라크와 아랍을 약화시켰다. 후세인이라는 인물이 있기 전에 미국이 감히 中東에 어떻게 군사기지를 둘 수가 있었겠나>
안내원 압바스의 집
취재를 마치고 그날 저녁에 가이드로 채용한 압바스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바그다드 서쪽의 변두리인 돌라디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집 바로 앞에는 시장이 있었다. 시장 골목 곳곳에 쓰레기와 먼지가 날리고 쓰레기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전기는 밤 12시까지 제대로 공급된다고 했다.
10평 남짓한 집에는 거실 겸 침실 하나와 부엌 하나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부인과 열 살 이하인 세 아이들과 살고 있다.
뜻밖에 그의 집에는 펜티엄급 컴퓨터가 있었다. 전쟁 전에 300달러를 주고 샀다고 한다.
회사 일을 하자면 컴퓨터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컴퓨터에는 MS워드와 엑셀(사무용 계산프로그램), 포토샵(사진편집 프로그램) 등 서너 개의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다. 그는 『요르단에 피신해 있는 우리 회사가 곧 들어올지 모르겠다. 실직 상태가 오래되면 살림을 하나씩 팔아야 한다』고 했다.
5월4일, 이라크 남쪽 100km 정도 떨어진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방문하기로 했다. 바빌론은 인류 최초 문명을 꽃피운 도시다. 후세인은 이 고대 유적지가 내려다보는 곳에 대통령宮을 지어 놓았다.
아침 10시경, 압바스를 만났던 장소로 나갔으나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압바스를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맸다. 그를 찾아 팔레스타인 호텔 앞의 파라다우스 광장(천국의 광장)으로 갔다.
행색이 초라한 군중들 틈에서 한 이라크 젊은이가 여유롭게 구두를 닦고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그는 자신을 무스탄시리야 대학 영문학 박사과정에 있는 하미드(35)라고 소개했다.
바빌론 유적지에 후세인 이름 안 새겨 넣은 인부들 집단 처형
압바스를 못 찾았기 때문에 그를 가이드 삼아 바빌론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의 친구라는 프랑스 여자도 같이 동행하겠다고 따라왔다. 차를 타고 보니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두 사람과 먼 길을 여행한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택시 운전사와 안내원 하미드가 불순한 작당을 꾸밀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차는 출발했고 어쩔 수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신뢰가 갔다. 하미드에게 『후세인 궁과 그의 아들들 집에서 수억 달러의 돈뭉치가 발견된 것에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안내원 하마드는 『많은 사람들이 사담의 부정축재가 미워서 그가 지은 사원에 가지 않고 허름한 사원에 다녔다』
바그다드에서 바빌론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그대로 이라크 최남단의 도시들로 이어진다. 하미드는 『후세인 시절에는 이 길을 오가려면 5km마다 초소가 있어서 뇌물을 주지 않으면 통과가 힘들 정도였다』고 했다.
『후세인은 바그다드 남쪽 도시인 카르발라 주민을 싫어해서 그 사람들이 바그다드로 들어오려면 갖가지 이유를 들어 통제를 했다. 나시리아 등 이라크 남쪽 지방은 일부러 농사를 못 짓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하미드도 『후세인이 미국의 간첩이기 때문에 이라크를 약하게 만들어 미국의 점령을 용이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바그다드를 한참 벗어났는데도 주유소마다 기름을 넣기 위해 차량이 두 줄로 수백m씩 서 있었다. 기름을 한 번 넣기 위해서는 하루에 두 시간 정도는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고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지면 그나마 그냥 돌아가야 한다.
주유소의 기름값은 아직까지 공식적인 가격이 유지되고 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경우 1ℓ에 50디나르(3센트) 인 반면에 길거리에서 파는 기름은 5배에서 25배까지 더 비싸다고 한다. 주유소에 줄을 서는 이런 풍경은 전쟁 전에는 없었다고 한다.
바빌론으로 가는 인근 도로변과 숲에는 불 탄 이라크 軍 탱크, 군용 트럭, 대공포, 곡사포 등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부서진 탱크 대부분은 이라크軍이 버리고 간 것을 미군이 바그다드로 진격하면서 부숴 버린 것이라고 한다.
자동차로 한 시간 반 정도 달리자 바빌론 유적지에 도착했다. 바빌론 유적지 입구에는 남색 바탕에 사자·용 등의 동물을 새긴 이슈타르 문의 복제품이 서 있었다. 이곳에서 미군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미드는 『바빌론 유적 복원이 진행될 때 후세인이 이곳에 왔다가, 자기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현장 기술자들을 처형해 버렸다』고 했다. 그 후에 겁을 먹은 다른 기술자들은 기존의 벽돌을 뜯어 내고 후세인의 이름을 새긴 벽돌을 박았다고 한다.
말을 듣고 보니 후세인의 이름이 적힌 벽돌은 모두 색깔도 다르고 새로 박은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적지를 돌아보고 있는데 10代 초반의 한 소년이 다가와서 좋은 골동품이 있는데 400달러에 사라고 했다.
『이 부근 어느 무덤에서 발굴된 것인데, 머리 부분에 글자가 새겨진 동물상』이라고 했다. 또 다른 꼬마는 무엇인가 글자가 새겨진 옛날 벽돌을 들고 와서 사라고 했다. 복원된 바빌론 유적 뒤편으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후세인宮이 버티고 있었다.
후세인宮은 기단을 산처럼 높인 후 바빌론 유적지를 내려다볼 수 있게 지어 놓았다. 이 후세인宮은 이미 이웃 주민들에게 약탈당했다고 한다. 그 안에는 미군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어 宮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전역에 72개의 대통령宮을 건설했다.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라마디라는 도시에도 후세인宮이 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 지어진 이 대통령宮 주위에는 약 15km에 걸쳐 담장을 쳐 놓았다. 담장이 강물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게 강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도 철제 담장을 쳐 놓았다.
누군가 다리 부근의 철제 담장 한 곳을 뚫어 놓아 그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강변을 따라 어마어마한 크기의 후세인 宮이 視野(시야)에 들어왔다. 후세인宮 앞을 흐르는 강물은 같은 강물인데도 담장 안쪽의 물과 밖의 물 색깔이 달랐다. 철제 담장을 쳐 놓은 다리를 기준으로 후세인宮 앞을 흐르는 강물은 강바닥을 더 깊게 팠는지 색깔이 짙푸르고 강변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반면 담장 밖의 강물은 물색이 탁하고 갈대와 쓰레기가 뒤섞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라크 현역 대령, 우리는 이렇게 졌다
5월5일, 전날 안내를 한 하미드가 자기 고향인 라마디市에 현직 이라크軍 장성이 산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라마디市는 이라크에서 서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져 있다. 사전 약속도 없이 軍 장성을 만날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 없었지만, 들이닥쳐 보기로 했다.
오후 2시쯤, 이라크 현직 장군이 산다는 집에 도착했으나 不在中이었다. 그 장군은 바그다드에 현지 사정을 살피러 갔다고 한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군의 옆집에 그 사람의 동생이 살고 있어서 찾아 갔다. 단독 주택에 방이 서너 개 정도 있는 비교적 큰 집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며 온 식구가 달려들어 음식을 만드는 통에 인터뷰는 뒷전이었다. 한 시간을 꼬박 기다리자 양고기로 만든 음식이 한 상 가득 나왔다. 이것을 다 먹고 나서야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장군의 동생은 이마드 무클리프(42)라는 이라크軍 대령이었다. 전쟁이 나기 전까지 16년째 軍 변호사 생활을 했는데, 전쟁 후 군대가 없어져서 집에서 한 달 가까이 쉬고 있다고 한다. 한 달에 35달러 정도인 그의 월급도 지급이 중단됐다.
이마드 대령은 『사담 후세인이 동족의 나라인 쿠웨이트를 침략하는 것을 보고 그를 싫어하게 됐다』고 말했다.
─바그다드 폭격 때 어디에 있었나.
『민간인 복장을 하고 바그다드 시내의 정부 관료 집을 중심으로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면서 폭격을 피했다. 그러다가 폭격 7일째쯤 통신센터가 폭격을 받고서 모든 명령체계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어서 집에 왔다』
탈영병의 귀를 자르고 이마에 낙인을 찍었다
─이라크軍이 왜 그렇게 쉽게 무너졌나.
『내가 왜,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나? 내 조국을 위해? 내 돈을 위해? 우리는 이번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이라크 국민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오직 사담과 그 가족을 위한 전쟁이었다. 우리의 무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쓰던 것이었다. 미국에 상대가 안 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전쟁 시작 전에 모든 군인이 다 도망갔다고 알고 있다』
─탈영하는 병사들은 사살했다고 들었는데.
『후세인은 그랬을 것이다. 탈영한 병사의 귀를 자르거나 이마에 낙인을 찍었다. 나의 직업이 軍에서 그런 일을 매일 보고 겪는 것이라 누구보다 잘 안다』
기자는 다음날 탈영하다가 귀를 잘린 사람을 만났다.
그는 하심(28)이라는 청년이었는데, 1994년 軍에 가기를 거부했다가 왼쪽 귀를 잘렸다고 한다. 하심은 그 후로 한 번도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도 결혼하고 싶은데 후세인이 미래를 망쳤다고 말했다.
이마드 대령에게 『「사담 페다인 민병대」, 「공화국 수비대」 같은 충성스런 후세인 부대는 어디로 갔나』고 묻자, 그는 『그런 말은 후세인의 거짓 선전선동에 불과하다』고 못을 박았다.
『사담 페다인의 대부분은 시리아나 사우디 등지에서 온 외국인들이다. 그들은 군사캠프에 머물면서 활동했다. 1인당 1000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군인들이 다 도망갔는데도 중간 고위 장성들이 후세인에게 계속 거짓 보고를 했다』
─미군이 어떻게 바그다드를 그렇게 쉽게 함락할 수 있었나.
『미군이 들어왔을 때 바그다드에 이라크軍은 다 도망가고 한 명도 없었다. 우리의 기관총은 1km 안 나가고, 큰 대포도 코앞에 떨어졌다. 누구도 이번 전쟁을 우리가 이기리라고 믿지 않았다. 특히 후세인은 자기와 가까운 군인들과 일반 군인을 차별했다. 사병들에게 한 달에 2달러와 담배 두 갑을 주었다. 사담과 가까운 고급 장교들은 월급만 3000달러가 넘었다.
그들은 어쩌면 자기 돈을 지킬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것도 장병들의 사기를 꺾는 큰 역할을 했다. 팔레스타인 자살 특공대 가족에게는 1만5000달러를 주고, 우리 백성은 다리 밑에 살게 했다』
─공화국 수비대는 어떻게 되었나.
『폭격으로 명령체계가 마비되었는데 어떻게 싸우겠나. 일부는 도망가고 대부분은 미군들이 비밀 협상을 해서 다 데리고 갔다. 이것은 사실이다』
─당신은 전쟁에서 미군이 이기기를 바랐나.
『현재 미국이 들어와 있는 것이 슬프지만 지금의 상황이 후세인 정권보다는 좋은 것이다. 현재 일시적으로 고통받지만 곧 정상화될 것이다. 사람들은 후세인이 없어진 것을 이제 겨우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이라크는 매우 지쳤다. 나는 나의 아들의 미래를 위해 살고 있다』
─어떤 정부를 원하나.
『모든 국민과 종교와 인종이 평등하게 대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이슬람 정부를 원한다』
─지금 군대가 없어졌는데 기다리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보나.
『미군이 우리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미래가 불확실하다』
바그다드 국제공항(前 사담 국제공항) 근처에 사는 미사크(25)는 이번 전쟁 때 바그다드의 서쪽 지역인 만수르에 있었다. 그도 전쟁 중 약 5달러의 돈을 한 번 받고 지금까지 월급을 못 받았다고 한다. 그의 월급은 약 22달러였다고 한다.
그는 이라크 사병으로 만수르 지역 국방부 건물에서 근무했다. 행정병이었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사담이 좋다』고 말한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폭격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나.
『미군의 폭격이 있기 전에 꼭 국방부 정문에서 누군가 무전기로 어딘가 신호를 보내는 것이 목격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대피했다. 그러고 나면 몇 분 후에 우리 건물에 미사일이 쏟아졌다. 우리는 그를 미군 간첩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우리 부대원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당신이 있던 건물에 폭격은 몇 번 있었나.
『우리 건물에 모두 네 번 있었는데 전쟁 후 10일 경부터 모든 명령체계가 마비됐다. 많은 장교가 도망가고 우리의 지휘관도 도망갔다. 4월9일 나도 옷을 갈아입고 집에 왔다』
─주민을 방패로 삼고 전쟁을 하는 것이 좋은 군사 계획이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좋은 계획이 아니다』
그는 후세인을 『이라크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그는 『지금도 후세인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며 『그가 대통령이었을 때는 싫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엉망이라 후세인이 다시 와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이라크軍 대공포 부대의 한 소위는 『전쟁 때 우리 부대는 바빌론 부근에 주둔했다』며 당시의 전황을 소개했다.
─언제 부대가 해산됐나.
『4월10일경 지휘관이 도망가서 부대원들이 전부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은 후 군인 신분증을 버리고 집에 왔다. 내가 지휘한 소대는 9명이었는데 전쟁 중에 이미 5명이 도망하고 1명이 죽었다』
─전투는 어떻게 전개 되었나.
『미군과 전투 중일 때도 지휘관이 미군 비행기를 쏘라는 명령을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다. 전쟁 2~3일 후에 이미 지휘체계가 마비되었기 때문에 명령을 못 내린 것 같다. 우리 대공 미사일은 7km밖에 나가지 않고, 미국 비행기는 30km 밖에 있는데 어떻게 맞추겠는가. 불가능하다』
─당신은 후세인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나. 이라크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나.
『나는 후세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군인들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탈영하면 죽인다고 들었으나 우리 부대에서는 실제로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를 이용해 40분 정도 달려서 마하무디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이 도시 중심의 상가 골목 곳곳에 불 탄 이라크軍 탱크가 방치되어 있다. 주민들은 『이라크軍이 모두 여섯 대의 탱크를 민가 주변에 배치했고, 민간시설과 민간인들을 인질로 방어에 나섰다』고 증언했다.
상가에서 식당과 전자제품 판매점을 운영했던 무하마드 알리(32)는 『이라크軍이 탱크를 내 가게 옆에 숨겨두는 바람에 가게 두 개가 모두 불에 탔다』고 했다.
팔레스타인 호텔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져 있는 아드함(adham) 사원 부근은 4월9일 미군과 사담 페다인 부대원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당시 이곳에서 저항을 한 페다인 부대원은 20명 정도였다고 한다.
통신시설은 모두 파괴당해
이 전투로 인근 상가는 검게 불 탔고 아드함 사원의 시계 첨탑도 포격을 맞아 구멍이 뚫렸다. 심지어 사원 안까지 미사일이 날아 들어왔다.
미군에게 쫓기던 일부 페다인 부대원들이 사원이 부근에 있는 주택가로 뛰어들어 그곳에서도 세 명이 죽었다고 한다. 전투 중 전사한 사담 페다인 부대원들은 주민들이 이맘 사원 안쪽 정원에 임시로 묻어 놓았다. 그곳에는 약 20기의 무덤이 있었다.
바그다드 시내를 돌아다니면 폭격을 당한 건물이 곳곳에 눈에 띈다. 이런 건물은 어김없이 정부 관련 기관과 군사 시설물 아니면 후세인 가족의 집이었다.
이라크의 통신시설만은 그것이 민간 시설이든 정부 시설이든 모두 폭격을 당했다.
첫날 기자를 안내한 압바스는 『바그다드 폭격 당시 지붕에 올라가 폭경 장면을 구경했다. 미국의 정밀 폭격을 믿었기 때문에 그리 겁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미군이 바그다드로 들어오면 후세인과 미국이 화학전을 펼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그다드 북쪽 100km 정도에 있는 도시로 잠시 피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사는 인근 주민 70% 정도가 바그다그 인근 도시로 피해 있었다고 말했다.
실종자를 찾는 가족들
5월6일, 바그다드 서쪽 티그리스 강변 카드미야 지역에 「석방죄수협회」를 방문했다. 이들이 쓰는 건물은 후세인의 경호원 중 한 명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지하 2층 지상 2층의 이 집은 그 크기부터 어마 어마했다. 집 앞의 큰 도로는 후세인 정권 시절에는 폐쇄되었다고 한다. 이 단체는 지난 4월12일 이브라힘이라는 사람이 설립했다.
그는 1980년 이슬람 정당인 「다와黨」에 가입했다가 체포되어 1991년 석방됐다. 협회 사무실 사방 벽면에 사람들의 이름을 쓴 종이가 가득 붙어 있었다. 후세인 정권下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의 명단이다.
이 협회에서 이라크 전역의 비밀경찰서에서 가져온 수감자 파일을 하나씩 뒤져 처형자 명단을 뽑아 벽에 붙였다. 벽면에는 실종자 가족들이 붙여 놓은 쪽지도 붙어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이산가족 찾기 할 때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벽보에 있는 명단 중에 한 소년은 「1981년 학교 칠판에 알라신의 이름을 적었다가 이슬람 비밀 정당인 다와 당원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명단을 유심히 보고 있던 무슬림 이브라힘(42)은 하이다르(22)라는 아들을 찾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1998년 비밀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아버지 이브라힘이 많은 돈을 주고 아들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고 한다.
『전쟁 직전에 아들의 수감 장소가 옮겨졌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생매장됐는데 아들도 희생됐을 가능성이 크다』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디와니야市에서 아침에 버스를 타고 왔다는 리아드(28)는 실종된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1991년 체포된 후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와 같이 감옥에 있던 사람이 2001년경에 『살아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아버지는 의료센터에서 근무했는데, 사람들이 아버지를 존경했다. 후세인은 그런 것도 못 참는 사람이다. 그래서 끌고 갔을 것이다』고 했다. 이라크 최남단 도시 바스라에서 버스를 타고 온 살만 다우드(60)라는 노인은 『아들이 22세 때 집에 있다가 잡혀 간 후 아직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이 노인은 처음에는 자기 아들을 누가, 왜 잡아갔는지 몰랐다고 한다.
『어느 날 아들의 친구가 와서 「아드님이 나와 같이 이란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해서 국경을 넘다 체포됐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 동네는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국경을 넘나드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노인은 『미군이 아부그레이브 교도소를 점령했을 때 죄수 500명을 발견해서 현재 바그다드에 있는 야묵 병원에 데려다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내일은 병원에 가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바그다드에서 120km 떨어진 어느 도시에서 왔다는 한 노인은 『앞으로 돈이 없어서 이곳에 못 오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벽에 쪽지를 붙여 놓고 가면, 고향 사람 누군가가 와서 보고 알려 주지 않겠는가』 했더니 고맙다고 여러 번 인사를 했다.
건물 출입구 쪽에 있는 「실종자 명단 대조실」에서 처형자 명단을 하나씩 읽고 있던 하이다르 하센(23)은 『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하센은 『1980년 형이 잡혀간 후 정부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퇴직을 당했다』며 『그 후 아버지는 이란으로 추방됐고, 나는 이번 전쟁 전까지 감시를 받았다』고 했다.
『후세인 정권은 처형된 사람들의 신분증을 빼앗아 이라크人의 신분을 박탈한 후 이란 태생이라고 표시한 신분카드를 새로 발급했다. 이란 국적이 표시된 신분 카드로는 이라크 어느 곳에서도 정상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대학교도 입학할 수 없고 은행이나 정부기관에 취직도 못 한다. 후세인은 집과 돈, 사람의 꿈까지 뺏어간 사람이다』
지하실에 내려가자 지하 1층과 2층의 방마다 비밀경찰서에서 가져왔다는 파일이 수백 상자가 쌓여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선풍기도 없는 어두컴컴한 방에 앉아 먼지를 뒤집어쓴 파일을 뒤적이고 있었다.
이곳에 일하는 자원 봉사자는 75명. 그들 중 후세인 치하에서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 15명 정도라고 한다.
한 개 파일의 분량은 A4 용지로 20~30장 가량 되었다. 표지에는 수감자의 이름, 체포된 날, 생일, 죄목, 고향 등이 표기되어 있다. 처형된 수감자의 파일에는 겉표지에 처형일이 표시되어 있다.
100명이 한꺼번에 처형된 기록도
어느 파일에는 100명의 처형자 이름이 한꺼번에 적혀 있었다. 모두 같은 날 처형할 것을 판결한 판결문이었다. 판결문에는 「교수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한다」로 되어 있었다. 특히 이 판결문 제일 아래에는 후세인의 친필 사인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와黨」에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이 협회의 홍보국장인 사타르 자바르(39)는 『지금까지 약 400만 개의 파일을 발견했다. 안전을 위해 그 대부분을 미군에게 맡겨 놓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그 중 일부』라고 말했다. 후세인 정권이 수많은 파일을 소각해 버렸다고 한다.
사타르는 지금까지 처형한 것으로 확인한 5600여 명의 명단을 벽에 붙여 놓았다고 했다. 이 단체에서는 약 700만 명의 이라크 국민들이 후세인에 의해 체포, 구금, 고문, 학살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사타르도 「다와黨」에 가입했다가, 1984년 체포되어 1991년 걸프전 후에 석방됐다. 그는 『만약 걸프戰이 없었다면 우리는 전부 죽거나 아직도 감옥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담 후세인은 1979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감정에 대해서도 혐의를 씌워 사람을 처형했다. 나는 아버지가 이 정권에 절대 복종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모든 국민이 이라크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석방되어도 항상 감시를 받기 때문에 이라크 전체가 감옥이었다. 형제 중에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이 있으면 남아 있는 다른 형제들까지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다』
─정상적인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았나.
『형량을 판사가 알아서 정한다. 나를 맡은 판사는 처음에는 사형을 구형했다. 그 다음에 너무 어리니까 다시 25년형을 구형한 후 감옥에 보냈다. 감옥에서 가족은커녕 태양도 한 번 본 적이 없다. 다른 곳으로 옮길 때도 냉장차에 집어 넣고 옮겼다. 아부그레이브 교도소에 7년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감되었다. 가족이 알아도 가난한 사람들은 면회를 올 수 없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감옥에서 음식은 어땠나.
『난 호텔에 있지 않았다』
─고문도 받았나.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문을 받았다. 처형자들은 대부분 집단 매장해서 이곳에서 이름을 찾아도 시체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의 反戰운동에 배신감
─한국에서 이라크전 反戰운동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봤나.
『한국에서 反戰운동이 있었다고 들었다. 한국인은 反戰운동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반대하고 이번 전쟁에 반대한 것을 보고 배신감을 느꼈다. 反戰운동을 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든 反美·反戰운동을 한 사람들은 더 나쁜 짓을 한 것이다. 그들은 악마 사담에게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 와서 보라. 우리는 후세인의 사인 하나로 닭처럼 도살당했다』
─지금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全세계에서 자원봉사자가 왔다는데 이곳에는 없다. 복사기, 사람, 컴퓨터 아무 것도 없다. 컴퓨터 세 대가 있지만 35년 동안 사담 후세인이 처형한 사람들의 명단을 컴퓨터 세 대로 정리할 수 있겠는가. 세계 인권단체는 여기 와서 보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는 인터뷰 도중 기자를 구석진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고문받아서 생겼다는 상처를 보여 주었다. 발꿈치 뒷부분에 깊게 팬 상처가 있었다. 전기 고문으로 생긴 상처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뙤약볕에서 명단을 확인하고 있었다.
콜라병에 앉게 해 항문을 찢는 고문도
「이라크국민협정」(INA)의 사무실을 찾았다. 아야드 알라위 의장이 이끌고 있는 이 정당에는 후세인 정권 당시 國外로 망명했던 정치인들이 집결해 있다. 이 黨의 사무실은 전쟁 前 바트黨 당사로 쓰이던 건물이다.
후세인 정권은 바트黨 당사를 짓는 데 10억 달러로 계약했다. 실제 든 비용은 5000만 달러였고, 나머지 돈은 후세인과 일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INA 홍보국 위원인 라심 알 아와디(60)는 요르단에서 12년간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했다. 그는 『후세인 일당을 새로운 이라크 헌법에 따라 반드시 처벌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후세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죽었다면 세상은 너무나 불공정하다. 그는 반드시 살아서 자신의 동상이 무너지는 것을 봐야 한다. 또 인민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INA 당원이며, 「이라크인권협의회」 의장인 사타르 알 바이르(60)도 1991년 망명해서 12년 동안 요르단, 시리아 등지를 떠돌았다. 그는 후세인 시절 집권당인 바트黨의 창당 멤버였다고 한다.
『나는 후세인에 의해 1968년 처음 체포됐고, 1970년 석방되었다. 1984년까지 세 번에 걸쳐 투옥과 석방 과정을 거친 후 당에서 추방당했다.
후세인은 1979년 이라크 대통령에 취임한 후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시키고, 전·현직 관료를 처형했다. 21명의 장관 및 고위 관료가 처형당했고 외무부 장관 등 또 다른 21명은 투옥 중 사망했다. 후세인은 특히 바트 당원의 경우 내부 비밀을 많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조그만 혐의만 있어도 처형을 했다』
후세인 시절을 이야기하는 이 노인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내가 이라크를 탈출하자 후세인 정권은 나의 아들과 어머니를 잡아서 고문을 한 후 죽였다. 나의 형은 영국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역시 체포되어 죽었다.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 목숨을 바치려고 한다』
─당신의 가족들은 어떻게 처형됐나.
『내가 이라크를 탈출하자 그들은 나를 찾겠다며 어머니와 아들을 잡아갔다. 내 아들은 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를 배신하게 하고… 어머니와 아들이 처형당하자 다른 아들 하나는 폴란드로 도망가서 지금 그곳에 살고 있다. 후세인은 내 가족만 처형한 것이 아니라 재산과 집도 빼앗아 갔다』
─당신도 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나.
『비밀경찰 한 명이 내 살을 먹겠다며 손을 물어 뜯었다. 귀에 전기선을 연결해 전기고문을 했다. 담뱃불로 지지고 차마 다 얘기할 수 없다. 특히 콜라병에 앉게 하는 고문이 횡행했다. 이 고문을 받던 전직 경찰 간부 한 명은 항문이 터져 울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소리 쳤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예다. 지금 우리는 수백만 건의 처형기록과 고문기록을 확보하고 있다』
그의 손바닥 엄지손가락 쪽의 두툼한 부분에는 그때 비밀경찰이 물어뜯었다는 흉터가 큼직하게 남아 있었다.
─집권하면 어떤 정부를 만들 것인가.
『모든 아랍族과 쿠르드族이 평등하게 대접받고, 폭력이 없고 독재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독재정권이 이라크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
5월7일, 사타르 알 바이르 「이라크인권연합회」 의장은 후세인 정권이 뺏은 자신의 옛 집을 방문했다. 바그다드 동쪽 우르 지방에 있는 곳이다. 2층으로 된 이 집은 한 층에 방이 7개나 있는 큰 집이다. 창문은 다 깨지고 의자와 소파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마당 한 곳에는 후세인 사진이 찢어진 채 뒹굴고 있었다. 그는 『법적으로는 아직도 내 집으로 돼 있는 이 집을 돌려받고 싶다』고 했다.
이날 저녁 늦게 일가족 여섯 명이 처형되었다는 집을 방문했다. 이들은 바그다드 서쪽 카드미야 지역에 살고 있었다. 남아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아미르(38)가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아미르는 1984년 4월14일 갑자기 아버지 파딜(당시 60세)과 형 다섯 명이 비밀경찰에 체포됐고, 석 달쯤 후인 7월17일 여섯 구의 시체를 돌려받았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는 곡물 장사를 했다. 다섯 명의 형 중 세 명은軍에서 장교로 복무 중이었으며, 한 명은 사병으로 복무 중이었다』
아미르는 처형당한 여섯 명의 사망진단서를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살아남은 형제들은 이들이 왜 처형당했는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돌려받은 시신은 매우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고 한다.
후세인은 富者를 용납하지 않았다
처형된 아미르의 큰형 압바스(당시 38세)의 시신에는 전기고문 흔적이, 둘째 형 무하메드(당시 35세)의 머리에는 도끼 자국이 나 있었다.
─가족들이 왜 처형당했나. 장교로 복무하던 사람들인데.
『아버지가 부유한 상인이었고, 모스크에서 자주 기도를 했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다.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사담 후세인은 어떤 한 가족이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려고 탄압을 많이 했다. 특히 쿠르드族이나 시아파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고향인 티크리트 사람만은 부자가 되는 것을 허용했다』
─다른 가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나.
『나머지 형제들도 1991년에 잡혀서 15일간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종교를 바꿀 것을 강요했다. 아버지와 같이 일한 사람들도 감시를 받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 감시를 받고 살았다. 그나마 우리는 시신이라도 찾았으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우리가 아는 다른 한 가족은 7명이 처형 당했지만 1명의 시신도 돌려받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은 정부가 없어서 어디 진정도 못 한다. 사담의 범죄를 全세계에 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아미르는 『가족들의 시신을 인수하러 아부그레이브 교도소에 갔을 때 같이 죽은 6000명의 사망진단서를 보았다』고 했다.
아부그레이브(Abughrayb)는 바그다드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있다. 지난 5월3일 아부그레이브 교도소를 방문했다. 우리 일행을 태우고 가던 택시 운전사 압바스(33)는 우리가 교도소에 간다는 것을 알고 『내 사촌도 아부그레이브에서 처형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21세이던 그의 사촌은 1999년 사원에서 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후 2002년 처형되었다고 한다.
택시 운전사와 이름이 같은 우리의 안내자 압바스도 『1980년 내 사촌 3명이 체포됐는데,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의 사촌 3명 중 1명은 사원에서 기도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나머지 2명은 그들의 형이 체포된 후 이유 없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후세인은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는 젊은이들을 이슬람 비밀 정당인 「다와黨」의 당원으로 의심해서 잡아갔다고 한다. 안내원 압바스는 『후세인은 이슬람이 금지한 술을 파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이슬람 종교인도 이슬람 정당도 싫어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교도소 정문 초소에 있던 후세인의 대형 초상화는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어 있었다. 주민들이 교도소 창틀을 뜯어내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건물이 100동은 넘는 것으로 보였다. 눈 닿는 데가 다 교도소 건물이었다.
교수형실 바로 옆 사형수들이 묵었던 건물에는 10여 개의 큰 방이 있었다. 방의 벽면에는 「신이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죽음을 보게 될 것이다」, 「나의 영원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등의 마지막 유언들이 가득했다.
암살 시도 있었던 도시를 밀어 버려
5월9일 아침, 오랜만에 에어컨이 들어오는 차를 타고 나자프市를 갔다.
나자프市는 바그다드 남쪽 200km 떨어진 곳에 있다. 바그다드 외곽 남쪽 지역인 도라(dora) 지역을 지나가는데 다리만 남은 후세인 동상이 있었다.
택시 운전사 알라(39)는 『이 동상이 바그다드에서 처음으로 쓰러진 후세인 동상』이라고 알려 줬다. 그 동상의 머리는 자기 친구 집에 있다고 한다. 알라의 친구는 후세인에 의해 가족이 처형됐다. 그는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마다 신발을 벗어 후세인 동상의 머리를 때리게 한다고 했다.
나자프市로 가는 지루한 길에 택시 운전사가 들려 주는 후세인의 일화가 재미있었다.
<자동차狂 우다이는 길거리에서 고급 차를 보면 죄다 빼앗았다. 그는 바그다드 시내에 자기가 가진 차와 같은 차가 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쩌다 같은 차를 산 사람은 색깔이라도 바꾸어야 했다>
<후세인은 한 번 움직일 때 5000명의 경호원을 각각 다른 곳에 풀어 사람을 혼란시킨 다음 자기는 헌 택시를 타고 곧잘 나타났다. 후세인은 국민들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1993년경 이라크 북쪽 지방인 디자일市에서 후세인 암살 시도가 있었다. 후세인이 이 도시를 지나가는데 어떤 여자가 양의 피가 묻은 손을 들어 차를 제지시켰다. 후세인은 불길하다고 하여 차를 바꾸어 타고 갔다. 얼마 가다가 그가 원래 탔던 차가 저격을 당했다. 후세인은 탱크와 비행기를 보내 디자일市를 부숴 버렸다. 폭격을 피해 나온 사람들은 모두 잡아다가 남쪽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감옥에 넣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1976년, 바그다그 인근에 카라데라는 지역의 모스크 사원에서 그 사원의 지도자가 존경을 받는 것을 보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후세인이 그 종교지도자를 처형해 버렸다>
한참 후세인 이야기를 하던 택시 운전사는 1991년 어떤 사람이 가족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며 자신의 차를 대절했던 때를 기억했다.
『어느 가족이 와서 가족의 시신을 가져와야 한다며 나의 차를 이용했다. 그 가족과 함께 시신을 인수하는데 처형된 시신의 양쪽 눈이 다 없었다. 감옥에서 약물을 투여해 사형수의 의식을 잃게 한 후 눈을 빼서 팔았음이 틀림없다. 그때 냉장고에 들어 있는 시신도 보았다』
나자프市를 가는 길에 잠시 내려서 음료수를 사는데 음료수를 파는 아이들이 신발을 모두 신지 않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당연히 읽고 쓸 줄 모른다고 했다. 평생 저렇게 길거리에서 음료수나 팔아야 할 아이들의 미래가 자꾸만 떠올랐다.
두 시간 정도 달리자 나자프市에 도착했다. 알리 사원 옆으로 조성된 거대한 공동묘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자프 시민들 『후세인을 제거한 미군에 감사한다』
이 공동묘지는 이라크뿐만 아니라 中東지역의 시아派들이 죽어서 묻히고 싶어 하는 곳이라고 한다. 안내원 압바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여기 묻혀 있다고 했다. 시가지는 마치 판자촌처럼 초라했고 주민들은 궁핍하게 살고 있었다.
나자프市는 1991년 시아派들의 反후세인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후세인은 시아派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자프市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이곳의 주민들은 당시 많은 사람이 생매장당하거나, 길에서 학살당했다고 말했다.
알리 사원 앞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1991년 걸프戰이 끝나고 나자프가 고향인 수천 명의 군인들이 돌아왔는데 후세인은 이들은 인근 사캄 호텔에 불러 모은 후 어디론가 데리고 가서 처형했다』고 말했다.
한 노인은 『당시에 후세인 군대는 나자프에 연일 폭격을 한 후 우리 집이 있는 한 블록을 불도저와 탱크로 밀어 버려 나는 집을 잃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 만난 나자프 시민들은 『후세인을 제거해 준 미국에게 감사한다』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바그다드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것은 기쁘지만 미국은 싫다』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현재 全세계 이슬람 시아派의 최고 지도자라고 하는 이맘 시스타니가 알리 사원 인근에 산다고 하여 찾아갔다. 마침 금요일이라 기도하러 나가고 없다고 했다. 안내원 압바스는 『그의 말 한마디면 全시아派들이 복종을 한다』고 말했다. 이라크 시아派 최고 지도자의 집이라고 해서 그나마 사는 구색은 갖추었을 거라는 기자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의 집은 알리 사원 부근의 어느 좁은 골목에 있었다. 골목을 이루는 벽에 낡은 쪽문 하나가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압바스는 『이슬람敎에서는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고 가르치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철저히 실천하기 때문에 검소하게 산다』고 설명했다. 시스타니의 집 앞에는 차세대 종교 지도자들인 젊은이들이 거리 설교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나자프 인근에 있는 이슬람 종교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한다.
나자프에서 돌아오는 길에 택시 운전사에게 후세인 동상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택시 운전사는 기자를 그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의 집은 바그다드 동쪽 자드리야 지역에 있었다. 후세인 동상을 보관한다는 택시 운전사의 친구는 집에 없었고, 바로 앞집에 그의 조카가 살고 있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조카는 알리 알 딜라이미(48)였다.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는 후세인의 발
이 사람의 아홉 명의 형제 중 세 명이 처형되고, 세 명의 형은 외국으로 도망갔다. 한 형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죽었다고 했다. 자신도 1984년 체포되어 20년 형을 선고 받았다가, 1989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풀려났다고 했다.
─후세인이 많은 명예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아는가.
『후세인 패거리가 교육을 못 받아서 교육받은 자를 매우 싫어했다. 세상에 많은 학위가 있지만 후세인의 학위는 사람 죽이는 학위일 것이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학살이다. 2년 전 한국을 방문했다가 온 내 사촌 한 명이 하는 말이 마치 별세계에 갔다 온 것 같다고 했다. 후세인이 이라크를 몇백 년을 후퇴시켰다』
─후세인宮에서 많은 달러가 나온 것을 아는가.
『그것을 모르는 이라크 국민이 어디 있나. 후세인宮뿐 아니라 그의 배 다른 형제 집 한 곳에서는 2층 비밀장소에 돈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주민들이 모두 가져갔다. 그 집에서 골동품도 나왔는데 이라크 박물관에 있었던 것이다. 이라크 유산을 자기 집에 두고 해외로 팔아먹은 것이다. 우다이 집의 수백만 달러도 주민들이 가져갔다』
─그동안 형들이 처형된 것은 어디에다 하소연해 보았나.
『오직 神에게만 물어 보았다』
팔레스타인 호텔에서 50m도 채 안 되는 곳에 있는 파라다우스(faradaws:천국) 광장이 있다. 이곳에 있던 대형 후세인 동상은 지난 4월9일 이라크 국민들에 의해 쓰러졌다.
이번 이라크 전쟁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연일 떠들던 사람들은 일순간 침묵했다. 權座(권좌)에서 내려오기 싫다는 듯 후세인 동상의 발 부분만은 떨어지지 않고 기단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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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이라크 르포-한국의 反戰 운동은 도살자를 위한 것이었나?
(이 기사는 위의 기사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월간조선 2003년 7월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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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라라는 작은 도시에서 학살된 1만여 구의 암매장 시신이 발견됐다. 한국의 反戰 운동은 도살자를 위한 것이었나?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hanal@chosun.com)
『이제 우리에겐 미래가 있다』
기자는 지난 5월1일부터 20일간 이라크를 취재했다. 이라크에 다녀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이라크 국민들이 후세인이 없어진 걸 정말로 기뻐하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한 친구는 『이라크인들이 아무리 후세인을 싫어했다지만 설마 미국보다 더 미워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기자는 이라크에서 평범한 이라크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노력했다.
음료수를 파는 가게 주인, 전직 공무원, 경찰관, 택시 운전사, 대학 교수, 학생, 군인, 언론인…. 그들의 얘기는 한결같았다.
『미국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있는 게 기분 나쁘긴 하지만 후세인 시절보다는 낫다』
어떤 사람은 『우리 아이들에게 이제 미래가 있다』고, 또 다른 사람은 『미국을 몰아 내는 것이 후세인을 몰아 내는 것보다야 쉽지 않겠는가』라며 좋아했다. 후세인은 도대체 자기 국민들에게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힐라(바빌론)」라는 도시가 있다. 5월14일, CNN 방송은 이곳 힐라市에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마하윌」이란 지역에서 후세인 시절 집단 학살당한 시신 수천 구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다음날인 5월15일 기자는 이곳을 찾았다.
발굴 현장에는 시신을 찾기 위해 몰려 온 가족들과 현장 주민, 보도진이 뒤엉켜 있었다. 이곳저곳에 시신 발굴을 위해 파놓은 큰 구덩이가 있었다. 한 구덩이에서는 70여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발굴된 유골은 비닐 봉지에 담겨 땅바닥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행방불명된 가족을 찾는 이들이 비닐 봉지를 하나씩 들추어 가며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찾고 있었다.
시신 발굴 장비는 포크레인 한 대가 전부였다. 포크레인이 땅을 파헤치다가 시신이 나오면 주민들이 달려들어 맨손으로 흙을 걷어 낸 후 시신을 밖으로 들어 날랐다.
힐라 일대에서만 1만여 명 암매장
시신 발굴 현장 지휘 책임자인 마지드 움란(43)씨는 『10여 일 前부터 힐라 지역 주민들과 인권단체들이 시신 발굴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제서야 기자들이 몰려 오고 있다』고 했다. 인권단체 회원인 그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약 2600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는 『힐라 인근에 이라크軍 기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매장된 시신이 발견됐다』고 했다. CNN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힐라 일대에서만 약 1만1000구 이상의 시신이 발견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발견된 시신의 약 절반 가량의 신분이 확인되고 있었다.
형체를 불간하기 어려운 시신의 신분 확인이 이렇게 원활하게 이뤄진 데는 후세인의 虐政(학정)이 큰 기여를 했다. 후세인 정권 시절 신분증 없이 집 밖으로 나갔다가는 곧바로 연행됐다. 이라크 국민들은 누구나 신분증을 소지했다.
형을 찾으러 왔다는 한 사람은 후세인의 초상화가 그려진 지폐를 꺼내더니 그 위에다 침을 뱉었다. 남편의 시신을 찾은 한 여인과 그의 아들은 시신이 놓여 있는 뜨거운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이곳에 암매장된 이들은 대부분 힐라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다.
1991년 1차 걸프전쟁이 끝나고 이라크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시아파를 중심으로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힐라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사담 후세인은 공화국 수비대를 이 도시에 보내, 길거리에 보이는 힐라 주민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차에 태워 끌고 갔다.
목격자들은 당시 체포된 시민들은 트럭으로 이곳에 실려온 후 대부분은 생매장 당했다고 증언했다. 공화국 수비대원들은 일부 시민들에게는 강제로 휘발유를 마시게 한 후 총을 쏘아 몸에 불을 붙여 죽였다고 한다.
마지드씨는 『발견되는 시신의 두개골이나 옷에 총상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생매장된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나자프市를 방문했을 때도 양민 학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힐라 시가지에는 검은 천이 도시 곳곳에 걸려 있었다. 이번에 시신 발굴 현장에서 시신을 찾은 가족들이 걸어 놓은 것이다. 시내의 사원마다 시신을 인도한 가족들이 장례식을 치르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죽은 이들의 사망일자는 검은 천에 모두 1991년으로 표기돼 있었다.
힐라를 방문한 날 리비아의 한 TV 방송사는 후세인의 양민 학살 장면을 담은 화면을 내보냈다.
비밀 경찰들이 체포한 젊은이의 가슴 부위에 폭발물을 장착한 후 리모콘을 작동시켜 폭파시켜 처형하는 장면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고위급 간부들은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反戰운동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반감
많은 이라크인들은 『후세인은 이라크가 미국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주민들을 죽음과 고통 속에 방치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후세인은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에 따라 석유를 팔아 마련한 돈을 단 한 푼도 이라크 국민들을 위해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후세인과 그 아들들은 미국의 경제제재와 상관없이 각종 이권 사업을 하거나 시리아, 리비아 등 인근 중동 국가들과 엄청난 비밀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富를 챙겨 왔다. 후세인은 전국에 70여 개에 이르는 대통령궁을 지어 놓았다.
전쟁 후 엄청난 달러가 후세인의 궁궐과 별장, 그 가족들의 집에서 발견됐다. 그런데도 이라크의 병원에는 의약품이 없어 아이들을 비롯한 환자들이 죽어 갔고, 학생들은 낡은 학교에서 공부했다.
바그다드 시내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이슬람 사원이 거의 완공 단계에 있으며, 역시 어마어마한 크기의 후세인 사원이 건설이 중단된 채 흉물스럽게 서 있다. 각 지방 중소도시에는 어김없이 사담 후세인의 이름이 붙은 대규모 사원이 건설됐다.
이라크인들은 『후세인은 엄청난 돈을 이런 식으로 탕진하면서 국민을 위해 병원하나 짓지 않고 의약품 한 번 산 적이 없다』고 분노했다. 기자의 통역을 해 준 압바스씨(38)는 『후세인은 1차 걸프전쟁 후 경제제재의 부당성을 외부에 선전하기 위해, 이라크 아이들이 기초 의약품이 없어 죽는 것을 방치했다』고 전했다.
어느 시장 골목을 취재하면서 한 이라크 남자에게 『후세인은 자기 피로 코란을 쓸 정도로 신앙심이 깊지 않은가. 그는 또 팔레스타인을 사랑하지 않았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주변에 있던 이라크 사람들은 기자를 둘러싸고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무슬림은 피를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피로 코란을 쓴단 말인가. 우리 종교에서는 손에 피가 묻으면 여러 번 씻어 내도록 교육받는다』
『후세인은 매일 술을 마셨고 그 아들은 술주정뱅이들이다. 이라크 국민 중에는 그가 무슬림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들은 후세인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아꼈다는 얘기에 대해 이런 설명을 했다.
『팔레스타인에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나면 그 가족들에게 엄청난 돈을 주었다. 팔레스타인들이 이라크에 오면 집도 주고 돈도 주었다. 자국민들을 다리 밑에 살도록 방치한 사람이 진정으로 팔레스타인 사람을 사랑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아랍 세계에 잘 보이려는 쇼였다』
바그다드에 살고 있는 알리 알 딜라이미(48)씨는 아홉 명의 형제 중 세 명이 후세인 정권에서 처형되었다. 세 명의 형은 외국으로 도망갔다. 그의 삼촌 두 명도 자녀 8명을 잃었다고 한다. 모두 이슬람 비밀 정당인 다와 정당에 가입했다는 이유였다.
알리씨는 『전쟁으로 얼마의 시민들이 죽거나 다칠 수 있겠지만, 후세인은 단 하룻밤에 수만 명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며 『서방세계에서 벌어진 反戰운동은 후세인의 돈을 받은 사람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자신이 고문받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라크의 비밀경찰은 잡아 온 사람의 입에서 다섯 명의 이름이 나올 때까지 고문을 했다』며 『거명된 사람은 끌려와서 똑같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다』고 말했다.
알리씨는 이라크 최고의 대학인 바그다드대학을 졸업했지만, 복학도 못 하고 직장을 잡을 수 없었다. 그는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석방죄수협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타르 자바르(39)씨는 『한국에서 이라크戰을 반대한 反戰운동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한국인들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反戰운동을 한 사람들은 악마인 사담에게 힘을 주었기 때문에 사담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라고 흥분했다.
누구를 위한 反戰운동이었나
아하메드 모하마드씨는 육군 대령 출신이다. 그는 1987년 전쟁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0년을 감옥에 있었다고 한다. 영어가 유창한 이 사람은 자신을 57세라고 소개했지만 70代 중반도 더 되어 보였다. 그는 감옥에 있는 10년 동안 가족을 단 한 번도 못 보았다고 한다. 처음 1년은 가로, 세로 1m 독방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그에게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미국이 이라크에 주둔하는 상황을 반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후세인을 제거해 준 미국에게 꼭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美軍이 이 땅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결코 쉽게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아니었으면 사담과 그의 가족은 이 나라를 영원히 집권하면서 이라크 국민을 고통 속에 빠뜨렸을 것이다. 당신이 이곳에서 앞으로 10년 동안 취재를 한다고 해도 이라크 국민들이 후세인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다 취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라크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부모, 형제, 가까운 친척 가운데 한 명 이상이 후세인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했다고, 어느 지역에서 신망이 높다고, 종교지도자란 이유로, 가족 중에 누가 체포되었다는 이유로, 친구나 학교에서 후세인과 그의 가족에게 말 한마디 잘못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거나 처형당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행방불명되면, 가족들은 그를 찾기 위해 비밀경찰에게 돈을 갖다 바쳤다. 처형을 확인한 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비밀경찰에 돈을 갖다 바쳤다. 그나마 시신을 찾은 가족은 운이 있는 편이었다.
팔레스타인 호텔 주변에는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기자는 그 중에 열 살이 안 되어 보이는 한 남자 아이와 친해졌다. 『어머니가 어디 계시니?』 하고 묻자 그 소년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어디서 자니?』 하고 다시 묻자 땅바닥을 가리켰다.
이 아이는 기자가 취재를 마치고 호텔에 들어서면 어느새 쪼르르 달려와서 볼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이 아이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서 글을 읽고 쓸 줄을 모른다. 이른바 문명국의 평화주의자들은 「反戰 평화」라는 이름으로 저 아이의 미래를 영원히 후세인의 잔혹한 손아귀에 맡겨 놓는 일에 동참해 온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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虐殺로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한「바그다드의 도살자」후세인의 삶
(이 기사는 후세인이 체포된 직후 쓴 것입니다. 2004년 1월호에 나갔습니다)
『국민들을 인질로 잡고 전쟁을 했으면서, 자살할 용기도 없는 비겁한 인간』
● 후세인의 존재 때문에 이라크인들은 그가 체포될 때까지 공포를 떨쳐내지 못했다
●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이 학살한 인명수는 수십만 명선
● 혁명 동지와 恩人, 그리고 가족까지 처형시키는 冷血漢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hanal@chosun.com)
후세인 체포 뉴스를 듣고
月刊朝鮮 마감이 끝난 2003년 12월14일 저녁 7시, CNN은 이라크 前 대통령 후세인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긴급 뉴스로 전하고 있었다. 그 순간 기자의 머리에는 2003년 5월, 20일간 취재차 이라크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이라크 백성들이 후세인의 사인 하나로 닭처럼 도살되고 있을 때 反戰운동을 벌여 독재자 후세인에게 힘을 실어준 사람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한 인권운동가 사타르 자바르(39)씨. 그는 이슬람 비밀정당인 다와黨에 가입했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10년을 복역했다.
『후세인은 우리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전쟁을 했으면서, 자기는 히틀러처럼 자살할 용기도 가지지 못하고 도망간 비겁한 인간』이라고 분개하던 이라크 항공 교통관제사 압둘 카림(44)씨.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후세인이 없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아버지와 형제 다섯 명이 후세인 정권에게 처형 당했지만, 그 이유조차 듣지 못한 아미르(38)씨, 기자를 아부그레이브 교도소까지 태워 준 후 자기의 사촌이 갇혀 있었던 교도소 감방 쇠창살을 붙들고 울던 택시 운전기사 압바스(33)씨. 후세인 체포 소식에 환호하는 이라크 군중의 모습 위로 이들의 얼굴이 교차되어 떠 올랐다.
무엇을 위한 反戰平和 운동이었나?
기자가 머물던 팔레스타인 호텔 뒤편에 있는 한 여관에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인간방패를 자처했던 한국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전쟁에 고통 받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을 돕고,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겠다는 것이 이들이 이라크에 온 이유라고 했다.
취재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우연히 이라크의 한국 反戰平和팀과 함께 활동했던 20代의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열린 무슨 「세계평화회의」에 참석하고 돌아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전쟁이 끝났는데 이라크에서 反戰平和 운동을 할 것이 더 남아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우리는 모든 점령정책을 반대한다』며 『이제 이라크의 일은 이라크 국민에게 맡기고 美軍이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순간 『이대로 美軍이 철수하면 후세인과 그 일당들이 다시 政權을 잡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1991년 시아파 봉기 진압 때와 같은 대량 학살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참았다.
反戰平和를 외치던 사람들은 국내에 돌아와 이라크인들의 궁핍한 모습을 전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누가 이 이라크인들을 이렇게 만들었냐』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국내 방송사들은 이라크의 혼돈 상황을 보도하면서 『전쟁 때문에 고통받는 이라크에 빨리 평화가 와야 한다』는 방송을 수없이 내보냈다.
도대체 그 많은 한국의 기자들과 反戰平和팀 운동가들이 이라크에서 무엇을 보고 온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후세인의 몰락을 축하하며 거리에서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후세인의 독재에 고통받으며 죽어간 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기자는 이라크 취재기간 동안 통역을 해준 압바스(38)씨와 헤어지는 날 그에게 한글 편지 한 통을 써 주었다. 「한국인들은 이 사람에게 믿고 통역을 맡기라」는 일종의 추천서였다.
아이 세 명을 둔 압바스씨는 『후세인이 없어져서 이제 내 아이들에게도 미래가 있다』고 기뻐했다. 그는 『지난 35년간 그랬듯이 앞으로 35년이 지난다고 해도 외부의 도움 없이는 이라크인들 스스로 후세인을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美國의 도움을 고마워했다. 독실한 시아파 무슬림 신자인 그는 후세인 정권에게 조카 두 명을 잃었다. 그는 『祖國에 美軍이 주둔하는 것을 누구보다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평생 후세인의 몰락을 기도했다』고 말했다.
후세인에 대한 공포
후에 이라크에 다녀온 기자를 통해 알아 보니 압바스씨는 이라크를 방문한 대한적십자사 일행의 통역을 했고, 현재는 美軍 군정청의 통역사로 일하면서 돈을 제법 모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자가 이라크에 갔을 때는 부시 대통령이 사실상의 종전을 선언한 이후였다. 당시 현지 치안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시민들의 대량 약탈이 조금 진정되기는 했으나, 바그다드 곳곳의 빈 관공서 건물에는 방화로 추정되는 불길이 매일 치솟았고, 밤거리에는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라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치안 부재」를 가장 큰 불만으로 이야기했다. 강도들에게 차를 잃었다는 한 시민은 『빚 3000달러를 내서 차를 구입해 택시 영업을 했는데 빚을 갚을 길이 막혀 버렸다』며 『자살을 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며 울먹였다. 그는 내가 기자라고 하자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뻐하며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외에는 없었다.
매일 택시를 타고 취재에 나서면 『어제는 이웃에 강도가 들어 세 명이 죽었다』, 『대낮에 거리에서 차를 뺏는 강도를 보고도 어쩔 수 없이 구경만 했다』는 험악한 이야기를 들었다. 바그다드 서쪽지역에서 구두 가게를 하는 지야드(36)씨는 『사담 시절에는 장사하는 데 걱정이 없었는데 지금은 무서워서 못 살겠다』며 『빨리 새 정부가 들어서든지 美軍이 순찰을 강화해야 하든지 해야 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바그다드 시민들은 세계 최강의 美軍이 기본적인 거리 치안을 장악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보냈다. 심지어 『美軍이 본격적인 이라크 再建 작업이 들어갔을 때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치안을 방치하고 있다』는 소문이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 상식처럼 퍼져 있을 정도였다.
영원히 죽지 않는 大兄 사담
미국은 심각한 이라크의 치안상태를 조기에 회복하기 위해 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이라크의 치안이 불안하기 때문에 파병에 신중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동맹국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세인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라크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를 보내며 기뻐했다. 기자는 이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이제야 후세인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에게 가졌던 공포의 깊이를 알 수 없을지 모른다. 기자는 바그다드에 머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후세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 질문을 받은 이라크인들은 일단 얼굴 표정이 심각해지며 귓속말을 할 듯 바짝 다가선 후 낮은 목소리로 『후세인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미국 방송국에서 통역을 하던 한 이라크인은 『후세인은 지금 티크리트 자기 고향 어딘가 땅 속에 숨어 있다』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후세인은 영원히 죽지 않는 「大兄(대형)」이었다.
기자는 이라크에 머무는 동안 후세인이 죽었다고 믿고 있는 이라크인은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많은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을 미국이 보호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심지어 후세인이 미국의 간첩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전직 경찰관 알리 아브라힘(32)씨는 『美軍은 이라크 질서유지를 위해 다시 사담을 權座(권좌)에 세울 수도 있다』며 겁을 먹고 있었다. 이라크 사람들은 1991년 걸프 전쟁 때 후세인이 제거될 것으로 믿고 봉기를 했다가 미국이 발을 빼는 바람에 후세인에게 대량 학살을 당했던 쿠르트族 시야派 이슬람 교도들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라크인들은 후세인의 확실한 말로를 보지 않은 한 그가 살아 있다고 믿을 것이고, 그에 대한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 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후세인을 체포한 이후 미국은 『후세인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라크인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박힌 후세인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기 위한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고통을 잊지 못하는 가족들
후세인은 상상하기 힘든 공포정치로 이라크를 통치했다. 그는 이라크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어 놓고 주민들을 감시했다.
기자는 바그다드 취재 중이던 2003년 5월 중순경 힐라市 (바빌론) 북쪽 1km 지점인 마하윌에서 1991년 후세인에게 대량 학살당한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방문했다. 현장에는 약 3000구의 시신이 발굴된 상태였다. 힐라 주민들은 『이 일대에 1만여 구의 시신이 더 묻혀 있다』고 말했다.
이곳 주민들은 『1991년 후세인이 힐라市에 탱크를 몰고와 길에 보이는 사람들은 무조건 체포해 생매장을 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힐라 부근 여러 곳에 학살된 주민들이 매장돼 있다고 증언했다.
이곳에 사촌을 찾으러 왔다는 케림 하심(36)씨는 『사담 후세인에 맞서 싸워준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한국인들도 사담에 대항해 싸워줘서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바그다드 남쪽 나시리야에 파병된 한국군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도 이번 전쟁에서 싸웠다고 알고 있었다. 그는 『사담은 전쟁 범죄자, 아비 없는 자』라고 욕을 퍼 부은 후 사라졌다.
차도르를 쓴 늙은 여인이 울면서 『1991년 실종된 17세 된 아들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이 여인은 『아들이 실종되자 티크리트에서 온 정부 관리들이 「자기들이 아들을 데리고 있다」며 후세인 사촌이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후 이 여인은 후세인 사촌이라는 사람에게 『아들을 살려달라』며 200달러씩 10번 가량 돈을 주었으나 아들을 끝내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이날 저녁 리비아의 한 TV방송은 후세인 정권의 비밀경찰들이 체포한 젊은이들의 가슴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해서 리모컨으로 폭파시켜 처형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2003년 10월30일, 미국 폭스 뉴스와 CNN은 후세인 치하에서 軍과 경찰이 정치적 반대자를 처참하게 고문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이 비디오는 다음날 국내방송에도 일부가 소개 됐다. 23분짜리 이 비디오 테이프에는 웃통이 벗겨진 채 두 팔이 기둥에 묶인 남자의 알몸을 철봉으로 수없이 내리치는 장면, 살아 있는 사람의 혀를 뽑거나 팔목을 자르는 장면, 목을 치기 위해 머리를 나무받침에 끌어 올리는 장면,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10m 아래의 위에서 밀어떨어뜨려 관절을 골절시키는 장면 등이 담겨 있었다.
알리 알 딜라이미(48)씨는 이슬람 정당(다와黨)에 가입했다가 1984년 체포되어 2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1989년 이란-이라크 전쟁 후 풀려 났다. 그는 감옥에서 고문당했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형제 아홉 명 중 세 명이 이슬람 정당에 가입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고, 한 명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戰死했고, 두 명은 국외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의 삼촌도 네 명의 아들을 잃었다. 그 자신이 감옥에 6년 동안 있는 동안 가족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처형된 알리씨의 형의 장례식에는 아버지 혼자만 참석이 허락됐고, 비밀경찰은 아들을 쏜 총알을 강제로 아버지에게 사게 했다고 말했다.
다섯 명의 이름을 댈 때까지 고문 계속
『잡혀 온 많은 사람들이 조사과정에서 죽었다. 비밀경찰은 잡아 온 사람들을 총으로 쏘거나 때리거나, 복부를 걷어 차서 많이 죽였다. 내 친구 마하무드는 신장을 차여 즉사했다. 그는 이슬람 정당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가 죽은 후 경찰은 그가 다와 정당에서 활동했다고 서류를 조작했다』
알리씨는 후세인 비밀 경찰들의 다양한, 그리고 기상천외한 고문 방법을 들려주었다. 콜라병에 앉게 해 항문을 찢는 고문, 신체의 가장 민감한 부위에 전기 충격을 주는 고문, 눈을 가린 후 무조건 구타하는 고문, 손을 뒤로 묶고 천장에 매달아 어깨를 탈골시키는 고문…. 그가 직접 당하거나 목격한 고문이다.
비밀경찰들은 잡혀 온 사람들 입에서 다섯 명의 다른 사람 이름이 나올 때까지 고문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야 자기들의 실적이 올라가고 명단에 이름을 채워 상부에 보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리씨는 『잡혀 온 한 남자가 고문에 못 이겨 자기 부인의 이름을 말하는 광경도 보았다』고 했다. 비밀경찰이 이 사람의 아들을 잡아와서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이자, 겁에 질린 그는 자기 부인의 이름을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잡혀 온 사람들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사람들은 곧바로 연행되어 같은 식으로 고문을 받고 처형됐다고 한다.
아미르(38)씨의 아버지와 아미르씨의 형제 다섯 명이 같은 날 처형당했다. 그는 가족들의 시신을 인수하러 갔을 때 형들의 시신 머리부분에 도끼자국이 나 있었다고 말했다.
전직 육군 대령 아하메드(57)씨는 기자에게 『당신이 10년을 취재한다고 한들 이라크인들이 고통받은 이야기를 다 취재하지 못할 것』이라며 『美軍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쉽게 나가지 않겠지만, 미국이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후세인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이라크인들을 만나면서 「바그다드의 도살자」, 「중동의 히틀러」 등 그 동안 미국이 후세인을 칭했던 별명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세인은 1937년 바그다드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티크리트의 가난한 농촌마을인 알 아우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그는 의붓 아버지 아래서 구박받으며 교육도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자랐다.
그는 18세 때 외삼촌을 따라 바그다드로 와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다니며 아랍 민족주의에 깊이 빠진 후세인은 학생운동에 참여 했다. 후세인은 1957년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혼합한 바트黨의 암살 행동대원으로 가입했다. 1958년 압둘 살람 아레프 대령이 압둘 카림 카심 총리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연루돼 후세인도 투옥됐으나, 곧 탈출했다. 후세인은 다시 카심 총리 암살 계획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이집트로 가서 망명 생활을 했다.
인간 도살자 후세인
1963년 바트黨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후세인은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1964년 다시 정권이 뒤집히자 체포되어 1966년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이때쯤 바트黨에서 후세인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1968년 쿠데타로 바트黨이 再집권하는 데 핵심역할을 한 후세인은 혁명평의회(RCC) 부의장이 되어 권력의 실세로 떠 올랐다. 1979년 후세인은 바크르 대통령을 사임시키고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9년 7월 대통령에 취임하기 며칠 전 후세인은 22명의 바트黨 지도급 인사에게 반역죄를 씌워 처형했다. 이때 처형한 사람 중에는 과거 그가 지하 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그의 친한 친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의 비밀재판 과정은 비디오로 생생하게 녹화되어 있다.
넓은 회의실에 400여 명의 바트黨 고위 간부와 RCC 소속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RCC 서기장인 마샤디가 단상에 서서 『내가 반역을 했다』는 자백을 털어놓았다. 고문에 의한 사전 각본에 따른 자백이었다. 마샤디의 입에서 공모자의 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비밀경찰들은 그 사람을 회의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들에게는 변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후세인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권총을 지급한 뒤 반역혐의를 받은 이들을 즉결 처형하게 했다. 후세인은 자기와 가장 친했던 인사와, 유력 가문 인사들은 더욱 가혹하게 처형했다. 후세인은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 조의를 표하자고 한 사람도 불필요한 동정을 보였다는 죄목으로 처형했다.
기자가 만났던 이라크 국민협정(INA)의 알 아와디(60)씨도 이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후 투옥됐으며, 그 후 후세인을 피해 12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그가 망명하자 후세인 일당은 그 아들과 부인을 잡아 고문한 후 처형했다.
후세인은 자기의 가족에게조차 관대하지 않았다. 1995년 그의 두 사위가 요르단에 머물며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관해 폭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세인은 사위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겠다』며 귀국을 종용했다. 두 사위가 귀국하자 후세인은 72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을 살해했다.
후세인은 1984년에는 자신의 측근이던 오마르 알 하자 중장이 후세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오마르 중장과 그의 아들의 혀를 자른 후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평화조약 체결 조건으로 후세인의 퇴진을 요구했을 때 이브라힘 보건장관이 『각하께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평화협정 체결 후 다시 복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다음날 이브라힘 장관은 토막 살해된 채 발견됐다.
1991년 걸프戰을 틈타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시아파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후세인은 탱크를 몰고 도시를 쑥대밭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약 14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죽었다. 반군 부상자를 치료했다는 이유로 15개의 병원이 파괴됐고, 시민들은 산 채로 헬리콥터 위에서 던져졌다.
1991년 30만 명 학살
바스라의 시아파 종교 지도자들도 투옥 후 살해됐으며, 반군에 동요한 수많은 軍 장교들은 즉결 처형됐다. 이 당시 바스라를 비롯한 이라크 남부에서 죽은 사람은 약 5만 명에서 3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북부 쿠르드族은 당시 무덤을 만들지 못해 시신들을 불도저로 밀어넣을 정도로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쿠르드族은 이미 1988년 후세인에게 독가스 공격을 받아 5000여 명이 학살당한 경험이 있었다.
바그다드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도시인 나자프를 방문했을 때 그곳 주민들은 1991년 당시 후세인 군대가 도시의 몇 개 블록을 밀어 버렸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걸프戰에서 갓 돌아온 젊은 군인 수천 명은 따로 어디론가 끌려가 모두 처형됐다』고 말했다.
국민들에게 최후의 일인까지 聖戰(성전)을 펼치라던 후세인은 바그다드 함락과 동시에 사라져 토굴에 숨어 지내다 8개월 만에 美軍에게 총 한방 쏘지 못한 비겁한 모습으로 체포됐다. 후세인은 서방언론을 향해 『나는 미군에게 살아서 체포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저 초라한 모습의 인간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인생을 고통 속에 빠뜨렸나」하고 생각하니 쓴 웃음이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