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이지 심드렁해졌다. 시내로 가는 107번 버스에 몸을 싣고 종점에서 종점을 오가며 ‘마지막 어린이’ 요금의 혜택을 누렸다. 그래도 난 축축하고 지저분한 동시상영관에 걸린 <무릎과 무릎 사이> 간판을 보며 괜히 얼굴이 붉어질 만큼 '세상 물정'을 이해해 가고 있었다. 물정을 알아간다는 것은 오이채처럼 마음이 가늘어지고 촉촉하게 떨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쉬고 자고 뒹굴고 그러다가 학교 가방 메고 오후 2~3시면 '칼' 퇴근해 앉은뱅이 책상 앞에 엎드려 끼적끼적 숙제를 하거나 골목으로 나아가 꼬마들을 일렬종대로 세우는 일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해 해제된 야간통행금지의 자유를 느끼고 싶었고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 왜 똑같은 건전가요가 삽입돼 있는 지 아버지께 물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너무 우울하셨다.
유사 이래 가장 거대한 놀자판인 '국풍 81'이 흥을 돋우던 시절이었지만, 전 국민이 벌겋게 프로야구에 빠져들었지만, 아버지는 원채 말이 없으셨다. 푸세식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신문을 또보고, 또보고, 돌려보며 세월과 맞섰다. 그는 재미와 설득력이라고는 당최 갖지 못한 분이셨다. 낙차가 큰 변화구를 던지듯, 공이 어디로 날아갈 지, 이해못할 아버지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 역시 ‘마지막 어린이’의 기를 살릴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바로 그 점에서 ‘이하동문’이었고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미웠다. 나도 아버지가 되면 내 아이의 손을 잡고 골목 공터에 앉아 가을 밤하늘의 별자리를, 헵틱 휴대폰처럼, 손끝으로 찌릿찌릿 눌러주고 싶었다.
그해 나는 많이 아팠다.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다가 이를 바드득 갈 곤 했다. 엄마의 “밥 먹고 자”란 잔소리도 마다하고 자다가도 이튿날 아침이면 말짱하게 학교에 갔다. 꿈 속을 마구 헤매었으나 무슨 꿈인지 알 턱이 없었다. ‘미친년 널뛰듯’ 그렇게 밖을, 세상을 쏘다니며 살아가고 싶었다. 졸업식 날 담임선생님이 장래희망을 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선생님은 이내 내 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 속으로 외쳤다. 시외버스 기사가 되어 가속페달을 마구, 마구 밟고 싶었다고. 카우보이처럼, 소변을 누는 어른들의 등짝을 쩍~ 때리며 역마차를 몰고 싶었다.
그렇게 '마지막 어린이'는 어린이의 견장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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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가 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역시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의 이야기다. 주인공 화자는 6학년생이다. 소설 속 '나'는 그해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의 자랑스런 어린이 회원이 되어 있었다. 가입비 5000원을 쥐고 인천체육관 앞에 늘어선 길고 긴 줄을 기다려 마침내 삼미의 스포츠 가방을 받아 쥐던 그 순간의 감격을 나는 잊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