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全螢弼·崔淳雨 등 문화재 大家들로부터 한국 문화를 독특한 방법으로 전수받은 그는 남대문과 불국사 석굴암 보수공사 현장에서 實戰을 익혔다. 『나는 학문적으로 유식한 말은 쓸 줄 모른다. 문화재를 아는 것은 사물에 곧바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에게는 現場이 곧 훈련소고 학교다.
●젊어서는 늙은이 같았던 사람, 이제 늙어가는 마당에 거꾸로 젊은이 같아지는 사람 申榮勳은 방송출연·강연회·현장답사 강의·집필 등 할 일이 너무 많아 즐거운 사람이다. 「문화재 보수」의 匠人, 「우리 문화」의 전도사에서 韓屋의 「名人」이 된 그는 21세기의 건축은 韓屋으로 회귀하게 된다고 말한다.
●젊어서는 늙은이 같았던 사람, 이제 늙어가는 마당에 거꾸로 젊은이 같아지는 사람 申榮勳은 방송출연·강연회·현장답사 강의·집필 등 할 일이 너무 많아 즐거운 사람이다. 「문화재 보수」의 匠人, 「우리 문화」의 전도사에서 韓屋의 「名人」이 된 그는 21세기의 건축은 韓屋으로 회귀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론과 경험의 조화 이룬 예술가
우리 사회는 미처 申榮勳(신영훈·64)씨 같은 사람을 정확하게 부를 만한 명칭을 마련해두지 못했다. 신문, 잡지에서는 그를 「큰 목수」라 부르고 있으나 이는 그가 하고 있는 일의 한 단면에 한정하여 부풀린 호칭일 뿐이다. 그는 분명 전통적인 목조건축물을 짓는 일에 누구도 따르지 못할 기술과 이론, 상상력을 두루 갖춘 大家(대가)이지만 직접 대패질을 하고 끌질, 자귀질을 하는 大木(대목)은 아니다. 집을 짓는 일 자체를 기획하고 청부하여 설계 및 시공을 총괄 관리하여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직책을 指諭(지유)라 하는데 집을 지을 때의 그의 역할은 바로 이 지유이다. 국보 1호인 남대문 보수공사를 비롯하여 석굴암 보수공사, 송광사 중창, 경복궁 복원, 황룡사 9층탑 이래 최대 규모인 충북 진천 보탑사의 3층목탑 건설 등 굵직한 문화재의 보수, 重創(중창)과 기념비적인 전통 한옥의 건축공사는 예외 없이 그의 손길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의 일은 궁궐과 사찰을 포함하여 전통 韓屋(한옥)을 오늘에 되살려 짓는 「匠人(장인)의 우두머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문화의 중요한 부분인 한옥의 역사를 典籍(전적)과 유적 및 실물 답사를 통해 낱낱이 밝혀내고 이를 체계화하여 「한옥과 그 역사(1974년)」, 「한국의 살림집(75년)」, 「신라의 기와(76년)」, 「한옥의 미학(86년)」, 「한옥의 조형(89년)」, 「절로 가는 마음(94년)」, 「우리 문화 이웃 문화(97년)」, 「申榮勳의 역사기행(1998년 이후 계속 간행 중)」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니 한국건축사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그는 분명한 학자이다.
그러나 그는 책상물림의 이론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를 끌어내어 새로운 창조의 기폭제로 삼는 예술가다. 한국건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이 한 사람 巨匠(거장)의 혼에 질펀하게 녹아 무한한 창조의 샘물을 퍼올리고 있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申씨의 이름 앞에 1962년부터 계속 맡아 온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 전문위원」이라는 관직을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조차 申씨의 활동영역을 오히려 왜소하게 보이게 하는 군더더기같이 느껴진다.
그럼 어떻게 불러야 그를 정확하게 자리매김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군더더기 없이 그냥 「申榮勳」이라는 이름 석자로 불러주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한 사람의 위대한 匠人은 그 자신의 삶과 일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생성하는 것인데 申씨야말로 「申榮勳流」의 문화운동을 낳고 끌어가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匠人이자 학자이며 또한 예술가이자 문화운동의 기수이기도 한 申씨를 그의 사무실인 서울 종로구 옥인동 해라시아문화연구소로 찾아가 만났다. 방금 집 짓는 현장에서 일을 하다 들어온 것 같은 모습, 「문화 유산 있는 곳에 내가 있다」는 식으로 40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손님을 맞기 위해 그는 잠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申씨는 『月刊朝鮮에서 나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고 하는 것은 내 이름에 붙은 거품 때문일 것』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언론은 왜 필요 없는 과대포장으로 사람 이야기를 만들어 팔아먹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한 예를 들어 유명 인명사전에 자신의 학력이 「성균관대학 졸업」으로 나오지만 자신은 중간에 그만둔 「中退生(중퇴생)」인데 언론사가 무슨 까닭인지 「졸업」을 시켜주었으니 『해당 대학에 미안하기 그지없다』고 했다.
서울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보니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이맘 때쯤 그는 어줍잖은 일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신문, 잡지마다 앞을 다투어 보도에 열을 올린 사연인 즉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申榮勳씨가 서울대학 강단에 섰다」는 것이었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立志傳(입지전)적인 인물들이 서울대학에서 특강을 한 예는 더러 있었으나 정규 강좌를 맡아 대학원생들을 지도한 예는 처음이라는 것이 뉴스의 초점이었다. 이때는 어떻게 된 셈인지 대학을 중퇴했다는 사실은 쏙 빼고 「高卒(고졸) 출신이 서울대학에…」 하고 법석을 떨었다.
『시간강사가 된 것 가지고 그 야단이었으니 정식으로 교수가 되었다면 어쩔 뻔했겠느냐』고 申씨는 쓰게 웃었다.
-서울대학에 가서 뭘 가르쳤습니까
『가르칠 게 뭐 있습니까. 국사학과에서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한국예술사 연구」를 강의했는데 나는 첫 강의에서 그랬어요. 申榮勳이라는 山(산)이 여기 있다. 여러분들이 갈퀴로 긁어가든 낫으로 베어가든 도끼로 찍어가든 재주껏 가져가라. 그랬는데 한 학기를 지나고 나니 다시 연락이 없어요. 해 보니 별 거 아니더라 싶었겠지요. 「高卒(고졸) 출신 서울대학 강사」는 고작 한 학기 만에 쫓겨나고 만 셈입니다』
-학생들이 갈퀴와 도끼를 들고 덤벼들던가요?
『혼란만 생긴 것 같습니다. 그간 문자만 가지고 배우던 학생들이 슬라이드를 가지고 생생한 현장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나가는 나의 방식이 낯설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서로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달랐던 셈이지요. 나는 학문적으로 비틀어지고 꼬인 유식한 말은 쓸 줄 모르고 사물에 곧바로 접근하는 식인데다 말투 자체도 어린 시절 개성에서 자랄 때 배운 옛 말투에 우리의 문화재와 함께 살면서 몸에 익힌 어휘들이 몸에 배어 예스러운데, 이것도 젊은 사람들에게는 낯설었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내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럴 듯했는데 돌아앉아 학문이라는 그릇에 담아 정리하려니 기왕에 배운 학설과 相衝(상충)되는 점이 적지 않아 곤혹스러웠을 겁니다. 申榮勳이라는 사람의 말을 무시할 수도 안할 수도 없어 혼란스러웠겠지요』
서울대학에서는 그를 더 이상 부르지 않았으나 다른 장소에서는 그의 가르침에 목이 마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건축강좌를 맡아 하고 있는데 처음 딱 1회를 하고 말려다가 수강생들의 열의가 높자 1년으로 연장하여 지금까지 강의를 해 오고 있다.
수강생은 60여명, 전국에서 강의를 들으러 일부러 찾아오는 아마추어들이다. 그만큼 한옥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는 증거다. 한겨레문화센터에 申씨의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천연색 슬라이드를 통하여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며 막힘이 없는 달변으로 토해내는 그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사랑에 매료된다.
한옥에 대한 지난 반세기 동안의 集積(집적)된 지식과 현장체험을 강의실에서 설명만 하는 것은 그의 성에 차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우리의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직접 유적지로 내려가 실물을 앞에 두고 공부를 하는 「집중탐구」에 申씨는 신명을 낸다. 申씨를 따라 「집중탐구」 여행을 해 본 사람들은 지금까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역사 저편의 시간 속으로 안내받아 그 시절 위대한 건축물을 창조했던 匠人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처음 박물관회에서 이런 탐구여행을 시작했을 때는 마이크로 버스 한 대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많을 때는 대형버스 열 세 대를 동원할 정도였지요. 대형행사가 되자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산만하고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나중에 탐구여행을 民學會(민학회)가 주관할 때도 버스 네 대씩을 동원했는데 결과는 「야유회」 수준이었습니다. 이처럼 행사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문화재를 직접 현장에서 보면서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려고 하는 知的(지적) 갈증이 얼마나 심한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현재 해라시아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집중탐구」는 과거의 「행사」를 지양하고 문자 그대로 「탐구여행」이 될 수 있도록 참가인원을 버스 한 대 수용규모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제가 참가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면서 토론도 하고, 현장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보고 느낀 것을 서로 충분히 이야기하다 보면 기대 이상의 소득을 얻었다고 만족해 합니다』
완벽한 팀워크의 동료들
申씨는 이처럼 어떤 종교를 전파하는 전도사처럼 사람들을 韓屋으로 안내한다. 韓屋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숨결이자 삶의 모습이다. 韓屋의 겉모습과 그것을 만들기까지의 역사와 기술적인 문제, 예술적인 가치, 이런 것만을 찾아내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썩어가는 목조건물의 기둥과 서까래에서, 기울어가는 석탑의 탑신에서 세월의 이끼를 걷어내고 우리네 삶의 숨결을 再生(재생)시킨다.
그는 또 여기서 그치지 않고 10여년 전부터 해외의 건축문화를 돌아보는 탐구여행도 계속해 오고 있다. 우리의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웃한 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물줄기를 따라 중국에 가 보니 인도로 가게 되고 인도에 이르러 보니 이집트가 건너다 보인다. 결국 세계 全域(전역)의 문화가 그의 탐구의 용광로 속으로 녹아들어 「한옥의 역사」는 비로소 세계사 속에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申씨가 지금까지 해 온 탐사와 연구, 정리 작업에서 2인3각으로 팀을 이루어 온 인물이 있다. 문화재만 전문으로 필름에 담아온 사진작가 金大壁(김대벽)씨가 그 사람이다. 두 사람은 한옥을 비롯한 문화재를 보는 눈의 깊이가 비슷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가슴의 열기도 비슷하다. 申씨는 『金선생이 준 사진을 늘어놓고 사진설명을 쓰다보면 글이 된다』고 했고, 金大壁씨는 『申선생의 글은 매우 까다롭고 의미가 깊다.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데 이제는 거의 근접해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처마는 2차원적인 곡선이다. 겉으로도 휘었지만 안으로도 휘었다」는 글을 사진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감추어져 있는 내면적인 곡선을 사진으로 잡아내는 작업, 두 사람이 30년 이상 호흡을 함께 하며 우리의 한옥을 글과 사진으로 담아내는 직업을 하다 보니 이르게 된 交感(교감)의 세계다.
이쯤에서 그친다면 申씨는 문화재관리국 소속의 한 연구위원으로 우리 문화재를 연구해 온 학자의 대접을 받으면서 그럭저럭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申씨의 본령은 옛 사람들이 지어놓은 건축물의 흔적을 연구하여 밥 먹고 사는 「학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런 집을 짓는 「匠人」의 역할에 있다.
집을 짓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다. 도면을 그리는 설계사가 있어야 하고 시공을 담당하는 도편수가 있어야 하며, 기와, 단청, 드잡이 등 각 분야의 숙련된 기술자가 있어야 한다. 申씨의 주변에는 申씨를 중심으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설계 朴泰壽(박태수)씨, 시공의 주무 金榮一(김영일)씨, 도편수 曺喜煥(조희환)씨, 기록 金大壁(김대벽)씨, 건축도예 曺正鉉(조정현)씨, 단청의 韓奭成(한석성)씨 등이 그들이다. 그 외에도 많은 기술자들과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젊은 학도들이 현장에 참여한다.
『우리는 함께 일을 한다』고 申씨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 사람이 아니라 팀워크를 이루어야만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이름에 거품이 묻었다』고 겸손해 했지만 팀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유일한, 최고의 팀』이라는 자랑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韓屋에서 찾아낸 우리의 삶의 숨결은 어떤 것인가. 그는 또 어떤 집을 지었고 앞으로 지으려고 하는가. 온통 콘크리트로 뒤덮인 답답한 주거문화를 어떤 식으로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인가, 그런 문제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申씨 자신의 살아온 세월을 뒤적여보아야 할 것이다.
인생을 바꾼 崔淳雨 선생의 미술강좌
申榮勳씨는 1935년 경기도 開城(개성)에서 태어나 6·25 전까지 그곳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그의 부친은 원래 포목상을 했으나 업종을 바꾸어 木物(목물)을 제작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판매하는 가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개성에서 木造(목조) 이층집은 우리집뿐이었을 것』이라고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그 이층집을 지을 때 申씨는 어린 나이에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 집을 짓는 작업을 전체적으로 지휘한 사람은 그의 부친이었다. 시공을 맡은 도편수는 申씨의 고모 아들이었다. 도편수인 고종사촌 형은 어린 申씨에게 『야 이 녀석아, 저기 대패 좀 가져 오너라』 『이 연장을 저기 저 아저씨한테 갖다줘라』 하고 심부름을 시켰다. 이때 집을 짓던 기억은 뒷날 자신이 집을 지을 때 자주 떠올랐다. 그는 『목수가 되는 것이 타고난 業(업)이었던 모양』이라고 했다.
「타고난 業」이 시절 인연을 만나 외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1955년, 서울 중앙고등학교 졸업이 가까운 무렵이었다. 문예반장이었던 그는 학교 도서관 한 귀퉁이에 책상을 갖다놓고 교우지 「桂友(계우)」의 편집을 한답시고 수업을 곧잘 빼먹고 있었다. 주시경 선생의 아들인 주왕산 선생이 교감이자 국어선생이었는데 주선생이 문예반장의 특별한 활동을 적극 밀어주었기 때문에 그 뒤를 믿고 비교적 학교생활이 자유스러운 편이었다.
校誌(교지)에 삽화를 그리던 서성배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가 김환기 화백의 친척으로 미술 쪽에 발이 넓었다. 서성배의 권유로 학교 수업을 빼먹고 국립박물관에서 실시하는 「미술강좌」를 들으러 간 것이 「業」과의 만남이었다. 국립박물관의 前身(전신)인 민족박물관은 6·25 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還都(환도)한 후 李承晩 대통령의 반대로 경복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임시로 남산 기슭의 예장동에 짐을 풀고 있었다. 그 남산에 있던 국립박물관에서 실시한 미술강좌에 갔다가 당시 박물관의 미술과장이던 崔淳雨(최순우) 선생의 강의를 듣게 된 것이 외길 인생의 첫걸음이었다.
崔淳雨 선생은 한국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申씨로서는 「생전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미술이 지닌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긴 선비정신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申씨는 그 이야기에 젖어들어 자주 강의를 들으러 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崔淳雨 선생도 고향이 개성이어서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마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 국문과에 시험을 쳐서 떨어져 할 일도 없던 차에 그는 崔선생을 찾아가 「박물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했다.
박물관은 남산에서 덕수궁으로 옮겨졌다. 유물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데 많은 일손이 필요했으나 예산은 별로 없었다. 申씨처럼 자원봉사로 나선 젊은 사람들은 겨우 전차를 탈 정도의 교통비만 받고 일을 했다. 그래도 申씨는 즐거웠다.
大선배들의 제자 양성법
日帝(일제) 때 전 재산을 들여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시고 간송미술관을 세운 全螢弼(전형필) 선생이 덕수궁으로 자주 찾아왔다. 全선생은 박물관에 오면 젊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탁구로 운동을 한 후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 가자』 하고 데리고 갔다. 全씨는 젊은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 사랑방에 앉혀놓고 도자기, 서화 등 귀중한 소장품들을 일일이 꺼내어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申씨는 『어떤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할 굉장한 공부였다』고 했다.
그런 산 공부를 한 다음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정종을 따르는 술잔이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져요. 처음에는 백자로 마시다가 나중에는 고려시대의 상감청자가 나와요. 취한 김에 놓쳐서 깨는 날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全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더러 돌아가며 술잔에 대해 설명을 하라고 시켰어요. 그런 훈련을 3년 동안 받았습니다』
서울대학 국문과 시험에는 떨어졌으나 申씨의 대학은 이처럼 따로 예비되어 있었다.
『어떤 날은 全螢弼 선생, 어떤 날은 崔淳雨 선생, 또 어떤 날은 黃壽永(황수영) 선생이 우리 젊은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런 식의 교육을 시켰습니다. 일종의 사랑방 순례였지요. 지금 나도 영혼이 交感하는 그런 방식으로 젊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으나 잘 안돼요. 우선 가족들이 가족 외의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못견뎌 합니다. 그들에게 술과 밥을 해 먹이고 밤새 이야기하는 옆에서 시중 드는 것을 참아내지 못해요.
그 이유의 하나가 가옥구조에 있습니다. 옛날 崔淳雨 선생이나 全螢弼 선생의 시대만 하더라도 한옥에서 살았거든요. 한옥에는 사랑채가 있어 손님들과 가족이 자연스럽게 분리됩니다. 그러나 요즘의 집 구조는 손님과 기족들이 분리되는 공간이 없어요. 그러니 자연 외부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기가 힘들어지는 거지요. 어쨌든 그 아름다운 사랑채 교육의 전통을 우리가 代를 잇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全螢弼 선생은 申씨가 대학을 못갔다는 사실을 알고 선뜻 장학금을 주어 성균관대학 국문과의 야간대학에 다니도록 지원을 해주었다. 그러나 몇 학기를 다니지 못하고 현장에 나가 일을 하는 사이에 등록 마감시한을 넘겨 자동으로 除籍(제적)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申씨의 「대학 중퇴생」 또는 「고졸 학력」이 된 사연이었다.
1957년 申씨는 현지입대의 형식으로 陸士(육사)박물관에서 근무한 후 1959년에 제대했다. 제대하고 보니 국립박물관장은 金載元(김재원)씨였는데 박물관에 개성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하여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놀러가서 옛날처럼 자원봉사를 했으나 차비도 주지 않았다.
딱한 모습을 본 임천 선생이 『내 조수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여 선뜻 따라나섰다. 林泉(임천)씨는 국립박물관에 딱 한 명뿐인 문화재 수리 보수공사의 名匠(명장)이었다. 1960년대까지는 문화재의 수리 보수공사를 박물관이 맡아서 하고 있었는데 林泉 선생은 문화재 수리공사의 설계, 시공, 감독까지 도맡아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남대문 수리공사에 모인 名匠들
申榮勳씨는 林泉 선생의 조수로서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처음 3년간은 예비훈련을 톡톡히 했다. 林泉 선생을 모시고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보고서를 쓰라면 쓰고, 도면을 그리라면 어깨 너머로 배운 솜씨로 그렸다. 3년간 피나는 수련을 하여 조금 눈을 뜨게 되자 기회가 왔다.
1963년 정부는 서울의 얼굴이자 국보 제1호인 남대문 重建(중건)공사를 시작했다. 林泉 선생이 중앙감독관을 맡고 申씨가 현장감독관으로 임명됐다. 남대문은 6·25 때 직격탄을 맞아 임시복구공사를 했으나 건물 전체가 한쪽으로 기우는 등 불안했으므로 전체를 뜯어내고 석축부터 다시 쌓아야 했다. 석축과 그 위의 木造(목조)건물 모두 申씨의 감독과 책임 아래 공사가 진행됐다.
이 경험, 국보 1호인 남대문을 헐어서 새로 짓는 기회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었다. 申씨도 『보통 福(복)이 아니었다』고 했다.
-당시 申선생은 아직 경험도 많지 않았던 시절인데 남대문 같은 중요한 문화재의 복구공사에 감독을 맡는다는 것은 아무리 사람이 없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좀 무리였겠습니다.
『나 한 사람으로 볼 때는 분명 무리였지요. 그러나 당시 남대문 복구공사에 참여한 기술자들 중에는 일흔이 넘은 나이의 임목수, 배목수 같은 어른들이 있었는데 임목수는 경복궁을 지을 때 참여했던 목수이고, 나머지 사람들도 경운궁, 동대문 重修(중수)공사에서 관록을 쌓은 쟁쟁한 분들이었습니다. 도편수 조원제 선생은 대원군 시절 경복궁을 지을 때 도편수를 했던 최원식 선생의 제자이고요. 그중 가장 젊은 사람이 이원규씨였어요.
이렇게 각 분야에서 옛날 기법을 그대로 간직한 名匠들이 모두 한데 모여 작업을 한 것이 남대문 수리공사였는데 이분들을 한데 모아놓으니 일이 저절로 되더군요. 노인들은 나를 데리고 놀았습니다. 「감독님」이라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고, 여차하면 「야, 이놈아, 니가 감독이냐? 이것 한번 그려봐라」 하고 놀려댔습니다. 나는 그들이 시키는 도면을 열심히 그렸고 무슨 일이든지 직접 해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감독이 아니라 철저하게 훈련받는 훈련소였고, 학교였던 셈입니다. 그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로서는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한국 전통 건축의 기법을 간직한 名匠들을 한 자리에 모아 남대문을 헐고 다시 만든 경험, 이것은 申씨로 하여금 옛 전통을 몸에 배게 한 일종의 세례식이었다. 이때 참여했던 名匠들 중 일부는 타계했고, 일부는 아직 생존해 있으나 연로하여 활동을 못하고 있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 우리의 옛 전통이 끊어져 이를 복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韓屋 분야에서만은 바로 이분들 덕택에 옛 기법이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그 고마움에 보답할 겸, 개인적으로도 은혜를 갚는 의미에서 「匠人列傳(장인열전)」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우선 「한석성의 외곬 단청인생」부터 시작하여 생존해 계신 분들부터 정리해 드릴 생각입니다. 이광규, 조원제, 홍사준 선생의 순으로 계속 간행할 계획인데 장사가 되지 않을 책이라 어느 출판사에서 나서지는 않을 테니 우리가 직접 출판해야겠지요. 그 중 홍사준 선생은 부여박물관장을 역임하며 백제 유물을 찾는 데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내가 서산 마애불의 집을 지어주니 洪선생이 그 보답으로 내 호를 「木壽(목수)」라고 지어줬습니다. 음으로는 목수라 내가 평생 해 온 일과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좋고, 뜻으로는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의미가 있으니 그 넉넉함이 역시 좋습니다』
석굴암 重修공사와 「前室 시비」
남대문 重修공사를 마친 申씨는 이어서 석굴암 중수공사의 감독을 맡았다. 문화유산 중에서 목조건축물의 대표격인 남대문에 이어 석조 건축물의 최고봉인 석굴암의 치료가 申씨의 손에 맡겨진 것이었다. 이 무렵 이미 그는 문화재가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하는 名醫(명의)가 되어 있었다.
『1년 반 동안 토함산 현장에서 살았어요. 토함산 허리에 구름이 걸렸다 하면 석굴암이 있는 頂上(정상) 부근에는 어김없이 비가 와요. 일년 3백65일 중 해 뜨는 날이 절반도 안됩니다. 큰 아이가 돌이 되던 무렵 토함산 현장으로 데리고 갔다가 애가 폐렴에 걸리는 바람에 혼이 난 적도 있습니다. 1913년에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重修한답시고 콘크리트 돔을 씌웠는데 돔 밑으로 흐르는 감로수를 식수로 떠 마시니 그게 시멘트 녹은 물이라 토사곽란이 일어나고, 우리가 지금처럼 광장을 만들기 전에는 발 붙일 곳도 없을 정도로 정말 어려운 지형이었어요.
석굴암은 지난 1천년 동안 진행된 풍화작용보다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씌운 이후 약 50년 동안 진행된 풍화작용이 더 심했습니다. 시멘트가 지닌 알칼리性이 화강암이 지닌 장석질을 없애는 바람에 불상의 표면에 결정체가 생겨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더운 물로 씻어내고 시멘트 구조물을 모두 없애고 나니 지금은 풍화작용이 멈췄어요. 한창 풍화작용이 심할 때는 바닥에 하얀 분말이 쌓일 정도였어요. 일본인들이 철도공사를 하는 무식한 사람들을 투입하여 세계적인 미술품을 重修(중수)했으니 그 모양이 된 거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겨났다. 申씨의 감독 아래 重修한 석굴암은 일본인들이 重修할 때는 없었던 前室(전실)을 만들어 여기서 예불과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학계의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석굴암의 前室이 신라시대 석굴암을 만들 때부터 존재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前室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엉뚱하게도 『일본인들이 오죽 정확하게 알아서 했을라고』 하는 소리도 있었다. 즉 일본인들이 잘 고증하여 前室이 없는 형태로 重修를 했는데 한국인인 네가 뭘 안다고 前室을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全 세계 석굴 치고 前室이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석굴암은 부처님을 모신 石室金堂(석실금당)입니다. 부처님을 모셨으니 예배를 드려야지 공연히 석불을 만들었겠습니까. 옛날에는 방수처리할 방법이 기와를 잇는 수밖에 없었는데 발굴해 보니 신라시대 기와지붕에 사용했던 각종 부속품이 다 출토되었습니다. 前室이 있었다는 증거지요.
공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노인이 「야, 이 도둑놈들아. 불상에 입혔던 금을 네놈들이 몽땅 벗겨갔구나」 하고 야단을 치길래 그 노인을 가만히 찾아가 물어보았습니다. 「금이 확실히 있었느냐. 눈으로 보았느냐」 하고요. 그러자 노인은 곰곰 생각하더니 「내가 어렸을 때 해맞이하다가 번쩍거리는 것을 본 것 같은데 금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해요.
이런 식으로 석굴암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재의 重修에는 말이 많고 탈이 많아요. 석실에 光窓(광창)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소리도 있어요. 무슨 창이 어디에 생길 자리가 있다는 것인지 한심한 소리들입니다. KBS의 일요스페셜 같은 프로에서도 그런 주장들을 하고 있는데 이게 큰 일입니다』
덴마크와 멕시코에 한국집 지어주기
석굴암 重修공사를 마치고 1960년 중반, 전국적으로 큰 물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많은 문화재들이 깊은 상처를 입었다. 申씨는 태풍으로 상처를 입은 문화재의 응급 수리를 하느라고 몇 년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황전, 쌍봉사의 3층목탑 등이 申씨의 손으로 응급치료를 받은 문화재들이었다.
이 일을 마치고 나자 이상한 임무가 주어졌다. 덴마크 국립박물관 안에 한국식 사랑방인 「백악산방」을 지어주고 오라는 정부의 명령이었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반도 3국은 6·25 때 병원선을 보내어 한국을 지원했고, 戰後(전후)에는 이를 토대로 국립의료원이 창설케 하는 등 많은 도움을 준 나라다. 그 보답으로 우리 정부에서 「백악산방」을 지어주기로 한 것인데 돈이 없으니 申씨 혼자 달랑 보내어 지어주고 오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申씨는 혼자서 덴마크로 날아가 멋진 한국의 사랑방을 再現(재현)해 놓았다. 이것이 申씨가 해외에서 만들어놓은 최초의 한옥이었다.
덴마크 국립박물관 내에 세워진 한국식 사랑방은 서양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매력을 던져주었던 모양이었다. 申씨가 귀국하자 문공부장관 洪鍾哲(홍종철)씨가 불렀다.
『덴마크에 지어준 한옥의 평판이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내년(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앞두고 멕시코에 「한국亭(정)」을 건립하여 세계인들에게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한 번 더 수고를 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이광규씨를 데리고 멕시코로 갔다. 거기서 8개월 동안 멕시코시티의 대통령 관저 앞의 차플 테벡공원에 「한국亭」을 완공해 놓았다.
『덴마크에는 혼자 갔지만 이번에는 이광규씨와 함께 갔으니 든든하고 좋았어요. 아, 그런데 기와를 잇는 날 이 영감님이 아파서 나오지를 못하는 거에요. 혼자서 기와를 이었지요. 「한국亭」은 그 뒤로 수리를 안해 지금은 상태가 나쁜 편이지만 멕시코 시티를 휩쓴 몇 번의 지진에도 끄떡없이 견디고 있어 한국의 전통 건축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申씨의 살아온 궤적은 현장에서 문화재 건축물을 보수,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작업을 지휘하는 감독의 역할이었다. 아직 젊은 나이였으나 그는 이미 누구도 따르지 못할 현장 경험을 쌓고 있었고, 국내 최고의 名匠들과 손을 맞추면서 일하면서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명성을 쌓아두고 있었다.
이제부터 할 일은 그 많은 현장체험과 풍부한 지식을 체계화하여 나름대로의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저술로 펴내는 일이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학원사」의 세계대백과사전 편찬작업이었다. 백과사전에 韓屋에 대한 분야의 글을 집필하게 되면서 그는 본격적인 「공부」에 들어간다. 글을 쓰는 작업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목수의 글 쓰기
월간지 「공간」이 첫 무대였다. 이 잡지에 「고건축 단장」을 30여 회 연재했다. 연재를 하는 3년 동안 그는 현장보다는 글 쓰는 일에 매달렸다. 1974년에 「한옥과 그 역사」를 펴낸 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이듬해에는 「한국의 살림집」을 간행했고, 1976년에는 「신라의 기와」를 내놨다. 실로 왕성한 저작활동이었다. 그러나 「고건축 단장」을 自費(자비)로 출판했다가 큰 손해를 보고 집안이 거덜나는 아픔도 겪었다. 이 무렵 그는 문화재관리국 월급쟁이 노릇에 싫증이 나던 참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1978년부터 1979년까지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실장으로 갔다가 다시 문화재관리국으로 돌아오는 등 일터를 옮겨 다니기도 했다.
이 무렵 申씨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民學會(민학회)」의 창립이 이 운동의 구심점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학 붐이 일기 시작했는데 학문의 영역과 방법론의 定立(정립)에 정력을 쏟고 있던 한국학의 흐름과는 달리 民學會는 한국의 기층문화를 바탕으로 우리 문화의 본령에 접근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김대벽, 조자용을 비롯하여 진주 쪽 사람들이 적극 참여하여 발족시킨 이 학회는 한국 사람들의 삶터, 밥의 문화, 탄생과 죽음, 한국인의 웃음, 바위문화 등 삶과 직결된 현장과 소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고, 매스컴은 이런 식의 접근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우리 문화에 접근하는 이같은 새로운 방식은 오늘날에는 매스컴은 물론이고 학문의 영역에서도 일반적인 경향을 이루고 있다. 그러한 흐름을 이끈 것이 民學會의 회보였다. 단순히 회보를 발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식인들을 문화의 살아 있는 현장으로 데리고 가서 생생한 모습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답사여행이 시작되었다.
「마당」, 「뿌리 깊은 나무」 등의 월간지들이 이러한 경향을 잡지 편집의 기본방향으로 설정하여 대중에게 유포시키는 첨병의 역할을 하였으나 깊이 있는 접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민학회의 답사 여행과 토론을 통한 연구 발표에는 그러한 한계가 애당초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民學的 관점」이라는 것이 탄생하는데 그것은 문화에 대한 申씨의 독창적인 시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세계 문명 속에서 우리 문화의 위상을 바로세우는 디딤돌이 되고 있다. 『기층문화에서는 세계가 통한다』는 民學的 관점은 그대로 진리다.
1980년대 들어 申씨는 또 한번 중요한 일을 만난다. 송광사의 重創佛事(중창불사)가 그것이었다. 약 10년에 걸쳐 진행된 이 佛事는 고려시대 普照國師(보조국사) 知訥(지눌) 이래 한국 禪宗(선종)의 중심사찰로 역할해 온 송광사를 새로 짓다시피 한 보기 드문 중창공사였다. 6·25 사변 때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을 방장 九山(구산)스님이 願力(원력)을 세워 옛 가람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 것인데 그 일을 申씨에게 위촉한 것이었다.
申씨는 많은 사찰의 중창불사를 맡아 했으나 『인연 없는 절 일은 안한다』는 不動(부동)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송광사의 중창불사를 맡게 된 것은 方丈(방장) 구산스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九山스님은 申씨에게 「집이 뭣고」라는 화두를 주었다. 이 화두를 받은 이후 申씨의 예술세계는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다.
九山스님과 松廣寺 중창불사
『집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집이란 사람이 사는 처소입니다. 인간을 배제한 집이란 있을 수가 없고, 있다고 해도 가치가 없는 물건이지요. 양식 위주의 서양건축사가 명품 해설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 비하여 내가 쓰는 韓屋의 역사, 내가 짓는 韓屋은 주인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삶을 출발점이자 귀착점으로 하는 건축의 역사를 쓰고 그런 건축물을 만들겠다는 정신을 일깨워 준 분이 九山스님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내가 한국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1955년부터입니다. 그때는 이 분야에서도 읽을 만한 책들은 모두 일본인들의 저작뿐이었지요. 그 책들을 처음 읽을 때는 일본인이지만 참 멋이 있다, 명쾌하게 잘 썼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지나 나 자신의 안목이 깊어가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의 설명이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그것을 몰라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도 나뿐이어서 달리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었지요.
崔淳雨 선생님 같은 분들에게 가서 물어보면 『이 사람아, 자기가 전공이면서 누구에게 묻고 있나』 하고 핀잔을 들을 뿐이었어요. 큰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고 禪(선)을 배운 후부터 비로소 일본인들의 잘못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집과 사람을 분리하는 서양식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었지요. 집이란 궁궐이든 사찰이든 예외 없이 사람이 살자고 짓는 것입니다. 집 속의 사람이라는 관계를 빼버리고 명품 위주의 분석과 설명에 빠져 있는 종래의 한국 건축사가 비로소 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큰스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구산스님은 그러나 송광사 중창불사가 시작되던 그해 1983년 12월 入寂(입적)했다. 入寂하기 전 九山스님은 중창불사에 대해 『저 사람이 맡아서 잘 하겠지』 하는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고, 큰스님의 위촉에 따라 새로 주지가 된 玄虎(현호)스님과 申씨는 신명 들린 사람처럼 이 거대한 佛事(불사)를 10년에 걸쳐 이루어냈다.
그동안 申씨는 「중처럼」 절에서 살았다. 玄虎스님이 내준 요사채에서 기거하면서 낮에는 공사를 돌보고 밤에는 원고를 쓰는 작업을 계속했다. 스님들 못지않은 금욕생활이었다. 일반적으로 목수들이 술을 잘 마시고 가정을 등한시 한다는 통념이 있으나 申씨와 그의 팀 동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목수들이 가난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집니다. 하루 일당은 다른 건설공사 기술자들에 비해 높은 편인데 왜 가난하냐, 일거리가 많지 않고 있다 해도 지속적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현장이 끝나면 한동안 놀 수밖에 없으니 축적이 될 수가 없어요. 일을 한 번 나가면 한 달 이상 가족과 떨어져 꼬박 일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니 가정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수밖에요.
밖에 나가 지낸다고 해서 술 마시고 외도에 빠지느냐 하면 천만에요. 우리는 대부분의 일이 절 짓는 일인데 절을 지으려면 스님과 마찬가지로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절에서 사는데 흐트러진 생활을 할 수가 없지요. 이처럼 몸가짐을 操身(조신)하게 하니 일하다가 크게 다치는 사람도 없습니다. 공사장에서 큰 사고가 나는 것은 대부분 몸과 마음이 흐트러진 데서 오는 수가 많아요. 우리는 대부분 절에서 일을 하다 보니 스님과 같은 몸가짐을 익히게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나무를 다루기 위해 특별히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고, 나무도 생명입니다. 멀쩡한 나무를 깎아 먹고 살다보니 福(복)이 많을 수가 없겠지요. 나무는 나무마다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향이 다르고 끈적거리는 느낌이 다릅니다. 그게 생명의 느낌이지요. 큰 나무를 다듬을 때는 나무에게 참 미안하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무를 가지고 유익한 일에 쓰니 오히려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도 들지요.
송광사 중창 때도 그해 삼척 후동 산판에서 나는 소나무 전체를 송광사로 가져 왔는데 만약 그 나무들이 전국의 제재소로 흩어져 하찮은 재목으로 쓰인 것보다는 佛事에 소중하게 쓰인 것이 다행한 일 아니겠습니까. 나무로 볼 때는 복을 받은 셈이지요. 대개 생명 있는 것을 소재로 일을 하다 보면 이처럼 이중적인 잣대로 갈등하게 됩니다』
-요즘도 계속 답사를 다니시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집들을 보셨는지요.
『1959년부터 답사여행을 다니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40년을 다니고 있습니다. 문화재관리국에 있을 때는 한 번 나가면 3개 道(도)를 거쳐서 돌아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내가 다닌 길이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많은 집들을 보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아마 나라 안에서 제일 많은 집을 본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2만~3만 채는 더 보아야 할 거예요. 살림집들은 어느 것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초가삼간은 얼마나 큰가
-지금은 농촌에서도 한옥이 사라져가고 있는 중입니다. 전국적으로 한옥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서울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이나 한옥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19세기 이전 것도 많이 남아 있어요. 나는 한때 한옥 分布圖(분포도)를 만들려고 계획한 일이 있어요. 그 때 김수근씨가 자기 지프차를 줄 테니 해보라고 했으나 시간과 돈이 모두 부족해서 그만두었지요. 아쉬운 일입니다』
-韓屋의 크기에 대한 개념이 요즘 서양식 주택과는 달리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나는 초가삼간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定立하나 하는 문제로 고심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선비들이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하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어쩌구 하는 바로 그 초가삼간의 크기가 어느 정도이냐,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마침 1903년 대한제국 시절의 호구조사표를 손에 넣어 원적지를 조사하여 경남 의령군 어느 마을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문서에는 1統(통) 10채의 가옥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집들이 지금도 대부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3간집으로 기록된 집을 살펴보니 방 1간, 마루 1간, 또 방 1간을 합쳐 3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부엌 1간이 더 있었으나 이것은 간으로 치지 않고 일부러 빼먹고 있었어요. 안채 옆에 있는 사랑채도 숫자에 넣지 않았더군요. 그외에도 농가에는 외양간, 헛간, 곳간, 측간 등 여러 부속건물이 있으나 이런 것들을 모두 간으로 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시골 농가 3간집이라고 하면 실제로는 수십 평짜리 집이에요. 이렇게 개념을 정리한 후 고장마다 조사를 해 보았더니 토담집이나 귀틀집이나 모두 사정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3간짜리 집은 그 당시 생활의 기본이 되는 집의 규모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祥考(상고)해 보면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순화되어 살았는지 삶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이 있는 집, 또는 인간이 있는 집을 강조하셨는데 서양건축사의 어디가 잘못되었다고 보십니까.
『사람은 시대적 환경 속에서 각자가 갖고 싶은 집의 理想型(이상형)이 있습니다. 개인의 理想性(이상성)이 여러 사람의 공감을 얻어내면 보편적인 理想性이 되지요. 이러한 理想性은 시대에 따라 변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理想性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건축사의 본령 아니겠습니까. 名品(명품) 몇 개에 대한 설명만 가지고 건축사를 쓰는 것은 엉터립니다. 西洋건축사는 명품순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집에 대한 樣式史(양식사) 중심이지요. 집이라는 것은 거듭 말하지만 살자고 짓는 것이지 무슨 式(식) 때문에 짓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는 최종적으로 내일의 삶에 지표를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건축사가 다음 세기 백성들의 삶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하리라고 보십니까.
『우리나라의 건축은 19세기까지 흘러오던 韓屋의 흐름이 20세기 들면서 양옥의 도입으로 큰 혼란이 일어났어요. 이 혼란을 안고 이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에는 어떤 형태의 집으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한 번도 진지하게 논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건축사를 하는 학도라면 21세기 우리 백성들이 살 집의 모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21세기의 韓屋
-申선생님은 그런 모형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그런 작업을 하려면 현존하는 집들을 충분히 보고 연구해야 그 바탕 위에서 미래의 모습이 나옵니다. 죽을 둥 살 둥 물리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고 방방곡곡 집을 보러 다니는 이유가 다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집들이 이러할진대 다른 나라는 어떠한가, 특히 經度(경도)의 차이는 있으나 緯度(위도)는 같은 나라들을 찾아다니며 태양의 조건은 같은데 집의 모습은 왜 어떻게 다른가를 보러 다니는 이유도 거기 있고요』
-집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시대적인 보편성을 말씀하셨는데 한옥이 과연 21세기에도 살아 남을까요. 남는다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물론 살아남습니다.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洋屋의 도입에서 온 혼란을 극복하고 주거문화의 중심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의 한옥이 21세기에도 그대로 再現되지는 않을 겁니다. 19세기 이전의 집은 그 시대의 삶과 잘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시대의 어떤 신분의 사람들은 他人(타인)의 보조를 받으며 살았는데 집의 구조도 가족과 가족을 보조하는 남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습니다.
21세기에는 어떤 집이어야 하느냐.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남을 배제하고 기계의 보조를 받으며 가족만 사는 공간이어야겠지요. 그런 시대의 한옥을 어떻게 지어야 하느냐, 우리는 그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서양 이론을 가져와서 한국에 맞춘다는 것은 오늘과 같은 非(비)문화의 주거환경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우리는 그런 목표를 위해 연마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그런 과제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곳이 없습니까.
『공대에서 한국 건축을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이것은 서양에서 공부했거나 서양식의 학문을 배운 사람들의 獨善(독선)입니다. 앞으로 한옥의 수요가 늘어날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지금의 건축 교육은 정상이 아닙니다』
申씨는 보탑사의 3층목탑을 세운 것도 미래 건축의 방향 제시와 무관하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했다.
『공과대학 건축교육의 태도가 아주 잘못 되어 있으므로 하루 빨리 정상궤도에 오르도록 是正(시정)을 요구하는 것도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그러나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는 저런 작품을 통해 과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장차 저런 건축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대학 당국에 묻는 거지요. 서양건축하는 사람들은 저런 집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보탑사의 3층목탑이 기념비적인 건축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용도의 건축물일 뿐 일반적인 건축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까.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저런 건물이 광화문 네거리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장에 관광객이 미어질 것입니다. 6백년 古都(고도)에 궁궐의 잔재 외에는 그런 건축물 하나 없다는 것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도시계획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일은 자신이 없어 감히 못하지요. 빌딩만 하늘높이 치솟아 오르면 도시가 되는 줄로 아는데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갈 것인지 답답해요』
『아파트는 살기 위해 지은 집 아니다』
-지금 추세로는 아파트가 모든 도시와 농촌까지 뒤엎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까지의 아파트를 보면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건설업자의 장사를 위해 지었어요. 국가가 그것을 방조하고 장려한 결과 농촌에도 고층아파트가 서고 있는 판입니다. 한국땅 전체를 아파트로 뒤덮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대체 그렇게 해야만 되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파트가 좋은 집은 못되지만 당장 심각한 주택문제를 빨리 해결하자니 그 방법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요. 또 한옥이 기능상으로나 건설문제로 보거나 새로운 주거형태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國籍(국적) 없는 집들이 亂立(난립)하게 된 것 아닐까요.
『한때 집장사들이 한옥 비슷한 집을 날림으로 지어 대량 공급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사람들이 한옥에 대해 넌덜머리를 낸 나머지 6·25 이후 값싸고 편리한 블록집으로 몰려가고 말았어요. 엉터리 한옥에 대한 反動(반동)으로 外風(외풍)도 없고 건축도 간단한 블록집이 유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아파트가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아파트가 갈 데까지 갔으니 그 反動(반동)으로 韓屋이 새로운 주거문화의 주역으로 再등장할 것입니다. 아파트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어떤 집을 선택할 것인지는 그 시대인들의 특권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바르게 선택하도록 식견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의 역할인데 대학에서 한옥에 대한 교육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슨 횡포인지 모르겠어요』
-해라시아연구소의 역할은 제도 교육이 외면하고 있는 韓屋 건축교육을 대신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는 엉뚱한 방향으로 몽땅 휩쓸려 가는 것 같아도 그중에서 그래도 휩쓸리지 않고 정신 차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정상궤도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건축에 있어서도 같습니다. 한쪽 귀퉁이에서 작은 집단이라도 뭔가 다르게 움직여줘야 문화가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갈 때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집단(해라시아연구소)도 우리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여기 출신으로 석,박사들이 벌써 많이 나왔습니다. 이들에게는 실제경험을 쌓기 위해 모두 현장으로 내려보냅니다. 현장에서 터득한 기술을 토대로 이론을 정립하고 있는 젊은 학도들이 20명은 될 거예요. 우리 목표는 이 분야에서 먹고 사는 지식인이 1만명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작가들, 공부 좀 하시오』
申씨는 머지 않아 건축의 흐름이 크게 뒤바뀔 것이 분명하고, 그때 가서 지금의 해라시아연구소 멤버들이 새로운 건축문화의 전도사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韓屋의 특징은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자연과의 친화력입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韓屋이 들어감으로써 그 자연이 오히려 살아나는, 이것이 韓屋의 가장 큰 장점이지요. 구조상의 특징은 온돌과 대청입니다. 온돌은 추위를 막는 난방장치이고 대청은 냉방장치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집 속에 공존하고 있는 집은 全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파트를 지어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짓되 한옥의 편리한 특징을 가미하여 좀더 사람과 가까운 아파트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韓屋은 또 앉았을 때와 섰을 때의 천장 높이가 다르도록 하여 氣(기)를 잘 돌게 만들었어요. 안방은 앉아서 지내는 곳이기 때문에 천장을 낮게 했고, 마루에서는 서서 지내는 때가 많으므로 천장을 높게 했습니다. 그래야 氣가 잘 돌아 쾌적한 느낌을 주는데 아파트는 일률적으로 높이가 같으니 답답하고 氣가 돌지 않아요. 한국인의 심성과 신체 구조를 모르면 한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그것부터 공부해야 할 겁니다』
申씨는, 한편으로 해라시아연구소를 구심점으로 하여 한옥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관리들이 여전히 한옥을 시대적으로 생명이 끝난 주거형태쯤으로 여기고 있으면서 無識(무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못해 연민이 들 정도라고 했다.
『李선생도 작가인데, 작가를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기가 뭣하지만 金東仁(김동인)의 작품 속에 「추녀 끝에 고드름이 달렸다」는 구절이 있어요. 그건 「처마 끝에 고드름이 달렸다」로 고쳐야 합니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집의 구조와 명칭에 대한 無知(무지)에서 그리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문인들이 자기 삶의 체험 영역 속에서 고치에서 실 뽑아내듯이 작품을 쓸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공부를 한다면 얼마든지 더 좋은 작품이 나오리라 생각됩니다. 최근 작가들이 모여 10년 동안 원고료가 한 푼도 오르지 않아 살기 어렵다는 불만을 토로했던데, 내 생각으로는 한옥이나 우리 문화에 대한 공부만 열심히 해도 좋은 작품을 써서 먹고 사는 일이 좋아지리라는 생각입니다.
문학에서 한옥에 대한 자세한 명칭이나 아름다움, 그리고 기능상의 편리함을 다루지 않으니 일반인들은 더욱 모를 밖에요. 그러나 열심히 배우려는 작가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화가 이두호씨 얘깁니다만 이씨는 한겨레문화센터의 내 강좌에 매회 와서 열심히 듣기에 「뭘 배우러 오느냐」고 물었더니 「여기서 배운 것 때문에 한국인의 삶에 대한 나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해요』
그의 눈에 비친 한옥에 대한 無知는 공중파 방송의 텔레비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한옥은 윗목과 아랫목이 있는데 요즘 史劇(사극)을 보면 임금이 방 귀퉁이에 앉아 문 밖을 바라보는 자세로 있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했다. 방송국에 얘기를 해줘도 알아듣지를 못하니 답답하다고도 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의 작은 연구소는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보통 학자들은 자기 지식을 누가 가져갈까 봐 걱정을 하고 숨기지만 우리 연구소가 지니고 있는 정보와 지식의 양은 넘치고 넘쳐 언제 누가 오더라도 흔쾌하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申씨는 『李선생도 우리 팀에 들어와 함께 다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申씨가 한옥에 관심이 높은 사람들을 데리고 집중탐구 여행을 떠날 다음 목표는 오대산 상원사의 적멸보궁. 마치 상원사를 처음 가보는 소년처럼 그는 벌써부터 상기되어 있었다. 일에 대한 열정이 그로 하여금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게 하는 비결임에 틀림 없었다. 젊었을 때는 늙은이 같았던 사람, 이제 늙어가는 마당에 거꾸로 젊은이 같은 사람 - 申씨는 할 일이 너무 많아 즐거운 사람이었다.쭥
우리 사회는 미처 申榮勳(신영훈·64)씨 같은 사람을 정확하게 부를 만한 명칭을 마련해두지 못했다. 신문, 잡지에서는 그를 「큰 목수」라 부르고 있으나 이는 그가 하고 있는 일의 한 단면에 한정하여 부풀린 호칭일 뿐이다. 그는 분명 전통적인 목조건축물을 짓는 일에 누구도 따르지 못할 기술과 이론, 상상력을 두루 갖춘 大家(대가)이지만 직접 대패질을 하고 끌질, 자귀질을 하는 大木(대목)은 아니다. 집을 짓는 일 자체를 기획하고 청부하여 설계 및 시공을 총괄 관리하여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직책을 指諭(지유)라 하는데 집을 지을 때의 그의 역할은 바로 이 지유이다. 국보 1호인 남대문 보수공사를 비롯하여 석굴암 보수공사, 송광사 중창, 경복궁 복원, 황룡사 9층탑 이래 최대 규모인 충북 진천 보탑사의 3층목탑 건설 등 굵직한 문화재의 보수, 重創(중창)과 기념비적인 전통 한옥의 건축공사는 예외 없이 그의 손길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의 일은 궁궐과 사찰을 포함하여 전통 韓屋(한옥)을 오늘에 되살려 짓는 「匠人(장인)의 우두머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문화의 중요한 부분인 한옥의 역사를 典籍(전적)과 유적 및 실물 답사를 통해 낱낱이 밝혀내고 이를 체계화하여 「한옥과 그 역사(1974년)」, 「한국의 살림집(75년)」, 「신라의 기와(76년)」, 「한옥의 미학(86년)」, 「한옥의 조형(89년)」, 「절로 가는 마음(94년)」, 「우리 문화 이웃 문화(97년)」, 「申榮勳의 역사기행(1998년 이후 계속 간행 중)」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니 한국건축사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그는 분명한 학자이다.
그러나 그는 책상물림의 이론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를 끌어내어 새로운 창조의 기폭제로 삼는 예술가다. 한국건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이 한 사람 巨匠(거장)의 혼에 질펀하게 녹아 무한한 창조의 샘물을 퍼올리고 있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申씨의 이름 앞에 1962년부터 계속 맡아 온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 전문위원」이라는 관직을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조차 申씨의 활동영역을 오히려 왜소하게 보이게 하는 군더더기같이 느껴진다.
그럼 어떻게 불러야 그를 정확하게 자리매김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군더더기 없이 그냥 「申榮勳」이라는 이름 석자로 불러주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한 사람의 위대한 匠人은 그 자신의 삶과 일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생성하는 것인데 申씨야말로 「申榮勳流」의 문화운동을 낳고 끌어가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匠人이자 학자이며 또한 예술가이자 문화운동의 기수이기도 한 申씨를 그의 사무실인 서울 종로구 옥인동 해라시아문화연구소로 찾아가 만났다. 방금 집 짓는 현장에서 일을 하다 들어온 것 같은 모습, 「문화 유산 있는 곳에 내가 있다」는 식으로 40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손님을 맞기 위해 그는 잠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申씨는 『月刊朝鮮에서 나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고 하는 것은 내 이름에 붙은 거품 때문일 것』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언론은 왜 필요 없는 과대포장으로 사람 이야기를 만들어 팔아먹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한 예를 들어 유명 인명사전에 자신의 학력이 「성균관대학 졸업」으로 나오지만 자신은 중간에 그만둔 「中退生(중퇴생)」인데 언론사가 무슨 까닭인지 「졸업」을 시켜주었으니 『해당 대학에 미안하기 그지없다』고 했다.
서울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보니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이맘 때쯤 그는 어줍잖은 일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신문, 잡지마다 앞을 다투어 보도에 열을 올린 사연인 즉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申榮勳씨가 서울대학 강단에 섰다」는 것이었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立志傳(입지전)적인 인물들이 서울대학에서 특강을 한 예는 더러 있었으나 정규 강좌를 맡아 대학원생들을 지도한 예는 처음이라는 것이 뉴스의 초점이었다. 이때는 어떻게 된 셈인지 대학을 중퇴했다는 사실은 쏙 빼고 「高卒(고졸) 출신이 서울대학에…」 하고 법석을 떨었다.
『시간강사가 된 것 가지고 그 야단이었으니 정식으로 교수가 되었다면 어쩔 뻔했겠느냐』고 申씨는 쓰게 웃었다.
-서울대학에 가서 뭘 가르쳤습니까
『가르칠 게 뭐 있습니까. 국사학과에서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한국예술사 연구」를 강의했는데 나는 첫 강의에서 그랬어요. 申榮勳이라는 山(산)이 여기 있다. 여러분들이 갈퀴로 긁어가든 낫으로 베어가든 도끼로 찍어가든 재주껏 가져가라. 그랬는데 한 학기를 지나고 나니 다시 연락이 없어요. 해 보니 별 거 아니더라 싶었겠지요. 「高卒(고졸) 출신 서울대학 강사」는 고작 한 학기 만에 쫓겨나고 만 셈입니다』
-학생들이 갈퀴와 도끼를 들고 덤벼들던가요?
『혼란만 생긴 것 같습니다. 그간 문자만 가지고 배우던 학생들이 슬라이드를 가지고 생생한 현장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나가는 나의 방식이 낯설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서로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달랐던 셈이지요. 나는 학문적으로 비틀어지고 꼬인 유식한 말은 쓸 줄 모르고 사물에 곧바로 접근하는 식인데다 말투 자체도 어린 시절 개성에서 자랄 때 배운 옛 말투에 우리의 문화재와 함께 살면서 몸에 익힌 어휘들이 몸에 배어 예스러운데, 이것도 젊은 사람들에게는 낯설었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내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럴 듯했는데 돌아앉아 학문이라는 그릇에 담아 정리하려니 기왕에 배운 학설과 相衝(상충)되는 점이 적지 않아 곤혹스러웠을 겁니다. 申榮勳이라는 사람의 말을 무시할 수도 안할 수도 없어 혼란스러웠겠지요』
서울대학에서는 그를 더 이상 부르지 않았으나 다른 장소에서는 그의 가르침에 목이 마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건축강좌를 맡아 하고 있는데 처음 딱 1회를 하고 말려다가 수강생들의 열의가 높자 1년으로 연장하여 지금까지 강의를 해 오고 있다.
수강생은 60여명, 전국에서 강의를 들으러 일부러 찾아오는 아마추어들이다. 그만큼 한옥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는 증거다. 한겨레문화센터에 申씨의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천연색 슬라이드를 통하여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며 막힘이 없는 달변으로 토해내는 그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사랑에 매료된다.
한옥에 대한 지난 반세기 동안의 集積(집적)된 지식과 현장체험을 강의실에서 설명만 하는 것은 그의 성에 차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우리의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직접 유적지로 내려가 실물을 앞에 두고 공부를 하는 「집중탐구」에 申씨는 신명을 낸다. 申씨를 따라 「집중탐구」 여행을 해 본 사람들은 지금까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역사 저편의 시간 속으로 안내받아 그 시절 위대한 건축물을 창조했던 匠人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처음 박물관회에서 이런 탐구여행을 시작했을 때는 마이크로 버스 한 대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많을 때는 대형버스 열 세 대를 동원할 정도였지요. 대형행사가 되자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산만하고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나중에 탐구여행을 民學會(민학회)가 주관할 때도 버스 네 대씩을 동원했는데 결과는 「야유회」 수준이었습니다. 이처럼 행사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문화재를 직접 현장에서 보면서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려고 하는 知的(지적) 갈증이 얼마나 심한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현재 해라시아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집중탐구」는 과거의 「행사」를 지양하고 문자 그대로 「탐구여행」이 될 수 있도록 참가인원을 버스 한 대 수용규모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제가 참가자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면서 토론도 하고, 현장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보고 느낀 것을 서로 충분히 이야기하다 보면 기대 이상의 소득을 얻었다고 만족해 합니다』
완벽한 팀워크의 동료들
申씨는 이처럼 어떤 종교를 전파하는 전도사처럼 사람들을 韓屋으로 안내한다. 韓屋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숨결이자 삶의 모습이다. 韓屋의 겉모습과 그것을 만들기까지의 역사와 기술적인 문제, 예술적인 가치, 이런 것만을 찾아내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썩어가는 목조건물의 기둥과 서까래에서, 기울어가는 석탑의 탑신에서 세월의 이끼를 걷어내고 우리네 삶의 숨결을 再生(재생)시킨다.
그는 또 여기서 그치지 않고 10여년 전부터 해외의 건축문화를 돌아보는 탐구여행도 계속해 오고 있다. 우리의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웃한 나라인 중국과 일본의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물줄기를 따라 중국에 가 보니 인도로 가게 되고 인도에 이르러 보니 이집트가 건너다 보인다. 결국 세계 全域(전역)의 문화가 그의 탐구의 용광로 속으로 녹아들어 「한옥의 역사」는 비로소 세계사 속에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申씨가 지금까지 해 온 탐사와 연구, 정리 작업에서 2인3각으로 팀을 이루어 온 인물이 있다. 문화재만 전문으로 필름에 담아온 사진작가 金大壁(김대벽)씨가 그 사람이다. 두 사람은 한옥을 비롯한 문화재를 보는 눈의 깊이가 비슷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가슴의 열기도 비슷하다. 申씨는 『金선생이 준 사진을 늘어놓고 사진설명을 쓰다보면 글이 된다』고 했고, 金大壁씨는 『申선생의 글은 매우 까다롭고 의미가 깊다.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데 이제는 거의 근접해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처마는 2차원적인 곡선이다. 겉으로도 휘었지만 안으로도 휘었다」는 글을 사진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감추어져 있는 내면적인 곡선을 사진으로 잡아내는 작업, 두 사람이 30년 이상 호흡을 함께 하며 우리의 한옥을 글과 사진으로 담아내는 직업을 하다 보니 이르게 된 交感(교감)의 세계다.
이쯤에서 그친다면 申씨는 문화재관리국 소속의 한 연구위원으로 우리 문화재를 연구해 온 학자의 대접을 받으면서 그럭저럭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申씨의 본령은 옛 사람들이 지어놓은 건축물의 흔적을 연구하여 밥 먹고 사는 「학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런 집을 짓는 「匠人」의 역할에 있다.
집을 짓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다. 도면을 그리는 설계사가 있어야 하고 시공을 담당하는 도편수가 있어야 하며, 기와, 단청, 드잡이 등 각 분야의 숙련된 기술자가 있어야 한다. 申씨의 주변에는 申씨를 중심으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설계 朴泰壽(박태수)씨, 시공의 주무 金榮一(김영일)씨, 도편수 曺喜煥(조희환)씨, 기록 金大壁(김대벽)씨, 건축도예 曺正鉉(조정현)씨, 단청의 韓奭成(한석성)씨 등이 그들이다. 그 외에도 많은 기술자들과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젊은 학도들이 현장에 참여한다.
『우리는 함께 일을 한다』고 申씨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 사람이 아니라 팀워크를 이루어야만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이름에 거품이 묻었다』고 겸손해 했지만 팀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유일한, 최고의 팀』이라는 자랑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韓屋에서 찾아낸 우리의 삶의 숨결은 어떤 것인가. 그는 또 어떤 집을 지었고 앞으로 지으려고 하는가. 온통 콘크리트로 뒤덮인 답답한 주거문화를 어떤 식으로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인가, 그런 문제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申씨 자신의 살아온 세월을 뒤적여보아야 할 것이다.
申榮勳씨는 1935년 경기도 開城(개성)에서 태어나 6·25 전까지 그곳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그의 부친은 원래 포목상을 했으나 업종을 바꾸어 木物(목물)을 제작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판매하는 가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개성에서 木造(목조) 이층집은 우리집뿐이었을 것』이라고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그 이층집을 지을 때 申씨는 어린 나이에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 집을 짓는 작업을 전체적으로 지휘한 사람은 그의 부친이었다. 시공을 맡은 도편수는 申씨의 고모 아들이었다. 도편수인 고종사촌 형은 어린 申씨에게 『야 이 녀석아, 저기 대패 좀 가져 오너라』 『이 연장을 저기 저 아저씨한테 갖다줘라』 하고 심부름을 시켰다. 이때 집을 짓던 기억은 뒷날 자신이 집을 지을 때 자주 떠올랐다. 그는 『목수가 되는 것이 타고난 業(업)이었던 모양』이라고 했다.
「타고난 業」이 시절 인연을 만나 외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1955년, 서울 중앙고등학교 졸업이 가까운 무렵이었다. 문예반장이었던 그는 학교 도서관 한 귀퉁이에 책상을 갖다놓고 교우지 「桂友(계우)」의 편집을 한답시고 수업을 곧잘 빼먹고 있었다. 주시경 선생의 아들인 주왕산 선생이 교감이자 국어선생이었는데 주선생이 문예반장의 특별한 활동을 적극 밀어주었기 때문에 그 뒤를 믿고 비교적 학교생활이 자유스러운 편이었다.
校誌(교지)에 삽화를 그리던 서성배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가 김환기 화백의 친척으로 미술 쪽에 발이 넓었다. 서성배의 권유로 학교 수업을 빼먹고 국립박물관에서 실시하는 「미술강좌」를 들으러 간 것이 「業」과의 만남이었다. 국립박물관의 前身(전신)인 민족박물관은 6·25 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還都(환도)한 후 李承晩 대통령의 반대로 경복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임시로 남산 기슭의 예장동에 짐을 풀고 있었다. 그 남산에 있던 국립박물관에서 실시한 미술강좌에 갔다가 당시 박물관의 미술과장이던 崔淳雨(최순우) 선생의 강의를 듣게 된 것이 외길 인생의 첫걸음이었다.
崔淳雨 선생은 한국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申씨로서는 「생전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미술이 지닌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긴 선비정신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申씨는 그 이야기에 젖어들어 자주 강의를 들으러 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崔淳雨 선생도 고향이 개성이어서 더욱 친밀감을 느꼈다. 마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 국문과에 시험을 쳐서 떨어져 할 일도 없던 차에 그는 崔선생을 찾아가 「박물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했다.
박물관은 남산에서 덕수궁으로 옮겨졌다. 유물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데 많은 일손이 필요했으나 예산은 별로 없었다. 申씨처럼 자원봉사로 나선 젊은 사람들은 겨우 전차를 탈 정도의 교통비만 받고 일을 했다. 그래도 申씨는 즐거웠다.
大선배들의 제자 양성법
日帝(일제) 때 전 재산을 들여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시고 간송미술관을 세운 全螢弼(전형필) 선생이 덕수궁으로 자주 찾아왔다. 全선생은 박물관에 오면 젊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탁구로 운동을 한 후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 가자』 하고 데리고 갔다. 全씨는 젊은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 사랑방에 앉혀놓고 도자기, 서화 등 귀중한 소장품들을 일일이 꺼내어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申씨는 『어떤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할 굉장한 공부였다』고 했다.
그런 산 공부를 한 다음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정종을 따르는 술잔이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져요. 처음에는 백자로 마시다가 나중에는 고려시대의 상감청자가 나와요. 취한 김에 놓쳐서 깨는 날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全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더러 돌아가며 술잔에 대해 설명을 하라고 시켰어요. 그런 훈련을 3년 동안 받았습니다』
서울대학 국문과 시험에는 떨어졌으나 申씨의 대학은 이처럼 따로 예비되어 있었다.
『어떤 날은 全螢弼 선생, 어떤 날은 崔淳雨 선생, 또 어떤 날은 黃壽永(황수영) 선생이 우리 젊은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런 식의 교육을 시켰습니다. 일종의 사랑방 순례였지요. 지금 나도 영혼이 交感하는 그런 방식으로 젊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으나 잘 안돼요. 우선 가족들이 가족 외의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못견뎌 합니다. 그들에게 술과 밥을 해 먹이고 밤새 이야기하는 옆에서 시중 드는 것을 참아내지 못해요.
그 이유의 하나가 가옥구조에 있습니다. 옛날 崔淳雨 선생이나 全螢弼 선생의 시대만 하더라도 한옥에서 살았거든요. 한옥에는 사랑채가 있어 손님들과 가족이 자연스럽게 분리됩니다. 그러나 요즘의 집 구조는 손님과 기족들이 분리되는 공간이 없어요. 그러니 자연 외부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기가 힘들어지는 거지요. 어쨌든 그 아름다운 사랑채 교육의 전통을 우리가 代를 잇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全螢弼 선생은 申씨가 대학을 못갔다는 사실을 알고 선뜻 장학금을 주어 성균관대학 국문과의 야간대학에 다니도록 지원을 해주었다. 그러나 몇 학기를 다니지 못하고 현장에 나가 일을 하는 사이에 등록 마감시한을 넘겨 자동으로 除籍(제적)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申씨의 「대학 중퇴생」 또는 「고졸 학력」이 된 사연이었다.
1957년 申씨는 현지입대의 형식으로 陸士(육사)박물관에서 근무한 후 1959년에 제대했다. 제대하고 보니 국립박물관장은 金載元(김재원)씨였는데 박물관에 개성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하여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놀러가서 옛날처럼 자원봉사를 했으나 차비도 주지 않았다.
딱한 모습을 본 임천 선생이 『내 조수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여 선뜻 따라나섰다. 林泉(임천)씨는 국립박물관에 딱 한 명뿐인 문화재 수리 보수공사의 名匠(명장)이었다. 1960년대까지는 문화재의 수리 보수공사를 박물관이 맡아서 하고 있었는데 林泉 선생은 문화재 수리공사의 설계, 시공, 감독까지 도맡아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申榮勳씨는 林泉 선생의 조수로서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처음 3년간은 예비훈련을 톡톡히 했다. 林泉 선생을 모시고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보고서를 쓰라면 쓰고, 도면을 그리라면 어깨 너머로 배운 솜씨로 그렸다. 3년간 피나는 수련을 하여 조금 눈을 뜨게 되자 기회가 왔다.
1963년 정부는 서울의 얼굴이자 국보 제1호인 남대문 重建(중건)공사를 시작했다. 林泉 선생이 중앙감독관을 맡고 申씨가 현장감독관으로 임명됐다. 남대문은 6·25 때 직격탄을 맞아 임시복구공사를 했으나 건물 전체가 한쪽으로 기우는 등 불안했으므로 전체를 뜯어내고 석축부터 다시 쌓아야 했다. 석축과 그 위의 木造(목조)건물 모두 申씨의 감독과 책임 아래 공사가 진행됐다.
이 경험, 국보 1호인 남대문을 헐어서 새로 짓는 기회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었다. 申씨도 『보통 福(복)이 아니었다』고 했다.
-당시 申선생은 아직 경험도 많지 않았던 시절인데 남대문 같은 중요한 문화재의 복구공사에 감독을 맡는다는 것은 아무리 사람이 없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좀 무리였겠습니다.
『나 한 사람으로 볼 때는 분명 무리였지요. 그러나 당시 남대문 복구공사에 참여한 기술자들 중에는 일흔이 넘은 나이의 임목수, 배목수 같은 어른들이 있었는데 임목수는 경복궁을 지을 때 참여했던 목수이고, 나머지 사람들도 경운궁, 동대문 重修(중수)공사에서 관록을 쌓은 쟁쟁한 분들이었습니다. 도편수 조원제 선생은 대원군 시절 경복궁을 지을 때 도편수를 했던 최원식 선생의 제자이고요. 그중 가장 젊은 사람이 이원규씨였어요.
이렇게 각 분야에서 옛날 기법을 그대로 간직한 名匠들이 모두 한데 모여 작업을 한 것이 남대문 수리공사였는데 이분들을 한데 모아놓으니 일이 저절로 되더군요. 노인들은 나를 데리고 놀았습니다. 「감독님」이라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고, 여차하면 「야, 이놈아, 니가 감독이냐? 이것 한번 그려봐라」 하고 놀려댔습니다. 나는 그들이 시키는 도면을 열심히 그렸고 무슨 일이든지 직접 해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감독이 아니라 철저하게 훈련받는 훈련소였고, 학교였던 셈입니다. 그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로서는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한국 전통 건축의 기법을 간직한 名匠들을 한 자리에 모아 남대문을 헐고 다시 만든 경험, 이것은 申씨로 하여금 옛 전통을 몸에 배게 한 일종의 세례식이었다. 이때 참여했던 名匠들 중 일부는 타계했고, 일부는 아직 생존해 있으나 연로하여 활동을 못하고 있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 우리의 옛 전통이 끊어져 이를 복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韓屋 분야에서만은 바로 이분들 덕택에 옛 기법이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그 고마움에 보답할 겸, 개인적으로도 은혜를 갚는 의미에서 「匠人列傳(장인열전)」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우선 「한석성의 외곬 단청인생」부터 시작하여 생존해 계신 분들부터 정리해 드릴 생각입니다. 이광규, 조원제, 홍사준 선생의 순으로 계속 간행할 계획인데 장사가 되지 않을 책이라 어느 출판사에서 나서지는 않을 테니 우리가 직접 출판해야겠지요. 그 중 홍사준 선생은 부여박물관장을 역임하며 백제 유물을 찾는 데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내가 서산 마애불의 집을 지어주니 洪선생이 그 보답으로 내 호를 「木壽(목수)」라고 지어줬습니다. 음으로는 목수라 내가 평생 해 온 일과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좋고, 뜻으로는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의미가 있으니 그 넉넉함이 역시 좋습니다』
석굴암 重修공사와 「前室 시비」
남대문 重修공사를 마친 申씨는 이어서 석굴암 중수공사의 감독을 맡았다. 문화유산 중에서 목조건축물의 대표격인 남대문에 이어 석조 건축물의 최고봉인 석굴암의 치료가 申씨의 손에 맡겨진 것이었다. 이 무렵 이미 그는 문화재가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하는 名醫(명의)가 되어 있었다.
『1년 반 동안 토함산 현장에서 살았어요. 토함산 허리에 구름이 걸렸다 하면 석굴암이 있는 頂上(정상) 부근에는 어김없이 비가 와요. 일년 3백65일 중 해 뜨는 날이 절반도 안됩니다. 큰 아이가 돌이 되던 무렵 토함산 현장으로 데리고 갔다가 애가 폐렴에 걸리는 바람에 혼이 난 적도 있습니다. 1913년에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重修한답시고 콘크리트 돔을 씌웠는데 돔 밑으로 흐르는 감로수를 식수로 떠 마시니 그게 시멘트 녹은 물이라 토사곽란이 일어나고, 우리가 지금처럼 광장을 만들기 전에는 발 붙일 곳도 없을 정도로 정말 어려운 지형이었어요.
석굴암은 지난 1천년 동안 진행된 풍화작용보다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씌운 이후 약 50년 동안 진행된 풍화작용이 더 심했습니다. 시멘트가 지닌 알칼리性이 화강암이 지닌 장석질을 없애는 바람에 불상의 표면에 결정체가 생겨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더운 물로 씻어내고 시멘트 구조물을 모두 없애고 나니 지금은 풍화작용이 멈췄어요. 한창 풍화작용이 심할 때는 바닥에 하얀 분말이 쌓일 정도였어요. 일본인들이 철도공사를 하는 무식한 사람들을 투입하여 세계적인 미술품을 重修(중수)했으니 그 모양이 된 거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겨났다. 申씨의 감독 아래 重修한 석굴암은 일본인들이 重修할 때는 없었던 前室(전실)을 만들어 여기서 예불과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학계의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석굴암의 前室이 신라시대 석굴암을 만들 때부터 존재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前室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엉뚱하게도 『일본인들이 오죽 정확하게 알아서 했을라고』 하는 소리도 있었다. 즉 일본인들이 잘 고증하여 前室이 없는 형태로 重修를 했는데 한국인인 네가 뭘 안다고 前室을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全 세계 석굴 치고 前室이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석굴암은 부처님을 모신 石室金堂(석실금당)입니다. 부처님을 모셨으니 예배를 드려야지 공연히 석불을 만들었겠습니까. 옛날에는 방수처리할 방법이 기와를 잇는 수밖에 없었는데 발굴해 보니 신라시대 기와지붕에 사용했던 각종 부속품이 다 출토되었습니다. 前室이 있었다는 증거지요.
공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노인이 「야, 이 도둑놈들아. 불상에 입혔던 금을 네놈들이 몽땅 벗겨갔구나」 하고 야단을 치길래 그 노인을 가만히 찾아가 물어보았습니다. 「금이 확실히 있었느냐. 눈으로 보았느냐」 하고요. 그러자 노인은 곰곰 생각하더니 「내가 어렸을 때 해맞이하다가 번쩍거리는 것을 본 것 같은데 금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해요.
이런 식으로 석굴암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재의 重修에는 말이 많고 탈이 많아요. 석실에 光窓(광창)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소리도 있어요. 무슨 창이 어디에 생길 자리가 있다는 것인지 한심한 소리들입니다. KBS의 일요스페셜 같은 프로에서도 그런 주장들을 하고 있는데 이게 큰 일입니다』
덴마크와 멕시코에 한국집 지어주기
석굴암 重修공사를 마치고 1960년 중반, 전국적으로 큰 물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많은 문화재들이 깊은 상처를 입었다. 申씨는 태풍으로 상처를 입은 문화재의 응급 수리를 하느라고 몇 년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황전, 쌍봉사의 3층목탑 등이 申씨의 손으로 응급치료를 받은 문화재들이었다.
이 일을 마치고 나자 이상한 임무가 주어졌다. 덴마크 국립박물관 안에 한국식 사랑방인 「백악산방」을 지어주고 오라는 정부의 명령이었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반도 3국은 6·25 때 병원선을 보내어 한국을 지원했고, 戰後(전후)에는 이를 토대로 국립의료원이 창설케 하는 등 많은 도움을 준 나라다. 그 보답으로 우리 정부에서 「백악산방」을 지어주기로 한 것인데 돈이 없으니 申씨 혼자 달랑 보내어 지어주고 오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申씨는 혼자서 덴마크로 날아가 멋진 한국의 사랑방을 再現(재현)해 놓았다. 이것이 申씨가 해외에서 만들어놓은 최초의 한옥이었다.
덴마크 국립박물관 내에 세워진 한국식 사랑방은 서양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매력을 던져주었던 모양이었다. 申씨가 귀국하자 문공부장관 洪鍾哲(홍종철)씨가 불렀다.
『덴마크에 지어준 한옥의 평판이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내년(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앞두고 멕시코에 「한국亭(정)」을 건립하여 세계인들에게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한 번 더 수고를 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이광규씨를 데리고 멕시코로 갔다. 거기서 8개월 동안 멕시코시티의 대통령 관저 앞의 차플 테벡공원에 「한국亭」을 완공해 놓았다.
『덴마크에는 혼자 갔지만 이번에는 이광규씨와 함께 갔으니 든든하고 좋았어요. 아, 그런데 기와를 잇는 날 이 영감님이 아파서 나오지를 못하는 거에요. 혼자서 기와를 이었지요. 「한국亭」은 그 뒤로 수리를 안해 지금은 상태가 나쁜 편이지만 멕시코 시티를 휩쓴 몇 번의 지진에도 끄떡없이 견디고 있어 한국의 전통 건축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申씨의 살아온 궤적은 현장에서 문화재 건축물을 보수,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작업을 지휘하는 감독의 역할이었다. 아직 젊은 나이였으나 그는 이미 누구도 따르지 못할 현장 경험을 쌓고 있었고, 국내 최고의 名匠들과 손을 맞추면서 일하면서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명성을 쌓아두고 있었다.
이제부터 할 일은 그 많은 현장체험과 풍부한 지식을 체계화하여 나름대로의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저술로 펴내는 일이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학원사」의 세계대백과사전 편찬작업이었다. 백과사전에 韓屋에 대한 분야의 글을 집필하게 되면서 그는 본격적인 「공부」에 들어간다. 글을 쓰는 작업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목수의 글 쓰기
월간지 「공간」이 첫 무대였다. 이 잡지에 「고건축 단장」을 30여 회 연재했다. 연재를 하는 3년 동안 그는 현장보다는 글 쓰는 일에 매달렸다. 1974년에 「한옥과 그 역사」를 펴낸 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이듬해에는 「한국의 살림집」을 간행했고, 1976년에는 「신라의 기와」를 내놨다. 실로 왕성한 저작활동이었다. 그러나 「고건축 단장」을 自費(자비)로 출판했다가 큰 손해를 보고 집안이 거덜나는 아픔도 겪었다. 이 무렵 그는 문화재관리국 월급쟁이 노릇에 싫증이 나던 참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1978년부터 1979년까지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실장으로 갔다가 다시 문화재관리국으로 돌아오는 등 일터를 옮겨 다니기도 했다.
이 무렵 申씨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民學會(민학회)」의 창립이 이 운동의 구심점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학 붐이 일기 시작했는데 학문의 영역과 방법론의 定立(정립)에 정력을 쏟고 있던 한국학의 흐름과는 달리 民學會는 한국의 기층문화를 바탕으로 우리 문화의 본령에 접근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김대벽, 조자용을 비롯하여 진주 쪽 사람들이 적극 참여하여 발족시킨 이 학회는 한국 사람들의 삶터, 밥의 문화, 탄생과 죽음, 한국인의 웃음, 바위문화 등 삶과 직결된 현장과 소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고, 매스컴은 이런 식의 접근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우리 문화에 접근하는 이같은 새로운 방식은 오늘날에는 매스컴은 물론이고 학문의 영역에서도 일반적인 경향을 이루고 있다. 그러한 흐름을 이끈 것이 民學會의 회보였다. 단순히 회보를 발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식인들을 문화의 살아 있는 현장으로 데리고 가서 생생한 모습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답사여행이 시작되었다.
「마당」, 「뿌리 깊은 나무」 등의 월간지들이 이러한 경향을 잡지 편집의 기본방향으로 설정하여 대중에게 유포시키는 첨병의 역할을 하였으나 깊이 있는 접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민학회의 답사 여행과 토론을 통한 연구 발표에는 그러한 한계가 애당초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民學的 관점」이라는 것이 탄생하는데 그것은 문화에 대한 申씨의 독창적인 시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세계 문명 속에서 우리 문화의 위상을 바로세우는 디딤돌이 되고 있다. 『기층문화에서는 세계가 통한다』는 民學的 관점은 그대로 진리다.
1980년대 들어 申씨는 또 한번 중요한 일을 만난다. 송광사의 重創佛事(중창불사)가 그것이었다. 약 10년에 걸쳐 진행된 이 佛事는 고려시대 普照國師(보조국사) 知訥(지눌) 이래 한국 禪宗(선종)의 중심사찰로 역할해 온 송광사를 새로 짓다시피 한 보기 드문 중창공사였다. 6·25 사변 때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을 방장 九山(구산)스님이 願力(원력)을 세워 옛 가람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 것인데 그 일을 申씨에게 위촉한 것이었다.
申씨는 많은 사찰의 중창불사를 맡아 했으나 『인연 없는 절 일은 안한다』는 不動(부동)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송광사의 중창불사를 맡게 된 것은 方丈(방장) 구산스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九山스님은 申씨에게 「집이 뭣고」라는 화두를 주었다. 이 화두를 받은 이후 申씨의 예술세계는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다.
九山스님과 松廣寺 중창불사
『집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집이란 사람이 사는 처소입니다. 인간을 배제한 집이란 있을 수가 없고, 있다고 해도 가치가 없는 물건이지요. 양식 위주의 서양건축사가 명품 해설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 비하여 내가 쓰는 韓屋의 역사, 내가 짓는 韓屋은 주인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삶을 출발점이자 귀착점으로 하는 건축의 역사를 쓰고 그런 건축물을 만들겠다는 정신을 일깨워 준 분이 九山스님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내가 한국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1955년부터입니다. 그때는 이 분야에서도 읽을 만한 책들은 모두 일본인들의 저작뿐이었지요. 그 책들을 처음 읽을 때는 일본인이지만 참 멋이 있다, 명쾌하게 잘 썼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지나 나 자신의 안목이 깊어가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의 설명이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그것을 몰라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도 나뿐이어서 달리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었지요.
崔淳雨 선생님 같은 분들에게 가서 물어보면 『이 사람아, 자기가 전공이면서 누구에게 묻고 있나』 하고 핀잔을 들을 뿐이었어요. 큰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고 禪(선)을 배운 후부터 비로소 일본인들의 잘못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집과 사람을 분리하는 서양식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었지요. 집이란 궁궐이든 사찰이든 예외 없이 사람이 살자고 짓는 것입니다. 집 속의 사람이라는 관계를 빼버리고 명품 위주의 분석과 설명에 빠져 있는 종래의 한국 건축사가 비로소 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큰스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구산스님은 그러나 송광사 중창불사가 시작되던 그해 1983년 12월 入寂(입적)했다. 入寂하기 전 九山스님은 중창불사에 대해 『저 사람이 맡아서 잘 하겠지』 하는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고, 큰스님의 위촉에 따라 새로 주지가 된 玄虎(현호)스님과 申씨는 신명 들린 사람처럼 이 거대한 佛事(불사)를 10년에 걸쳐 이루어냈다.
그동안 申씨는 「중처럼」 절에서 살았다. 玄虎스님이 내준 요사채에서 기거하면서 낮에는 공사를 돌보고 밤에는 원고를 쓰는 작업을 계속했다. 스님들 못지않은 금욕생활이었다. 일반적으로 목수들이 술을 잘 마시고 가정을 등한시 한다는 통념이 있으나 申씨와 그의 팀 동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목수들이 가난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집니다. 하루 일당은 다른 건설공사 기술자들에 비해 높은 편인데 왜 가난하냐, 일거리가 많지 않고 있다 해도 지속적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현장이 끝나면 한동안 놀 수밖에 없으니 축적이 될 수가 없어요. 일을 한 번 나가면 한 달 이상 가족과 떨어져 꼬박 일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니 가정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수밖에요.
밖에 나가 지낸다고 해서 술 마시고 외도에 빠지느냐 하면 천만에요. 우리는 대부분의 일이 절 짓는 일인데 절을 지으려면 스님과 마찬가지로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절에서 사는데 흐트러진 생활을 할 수가 없지요. 이처럼 몸가짐을 操身(조신)하게 하니 일하다가 크게 다치는 사람도 없습니다. 공사장에서 큰 사고가 나는 것은 대부분 몸과 마음이 흐트러진 데서 오는 수가 많아요. 우리는 대부분 절에서 일을 하다 보니 스님과 같은 몸가짐을 익히게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나무를 다루기 위해 특별히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고, 나무도 생명입니다. 멀쩡한 나무를 깎아 먹고 살다보니 福(복)이 많을 수가 없겠지요. 나무는 나무마다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향이 다르고 끈적거리는 느낌이 다릅니다. 그게 생명의 느낌이지요. 큰 나무를 다듬을 때는 나무에게 참 미안하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무를 가지고 유익한 일에 쓰니 오히려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도 들지요.
송광사 중창 때도 그해 삼척 후동 산판에서 나는 소나무 전체를 송광사로 가져 왔는데 만약 그 나무들이 전국의 제재소로 흩어져 하찮은 재목으로 쓰인 것보다는 佛事에 소중하게 쓰인 것이 다행한 일 아니겠습니까. 나무로 볼 때는 복을 받은 셈이지요. 대개 생명 있는 것을 소재로 일을 하다 보면 이처럼 이중적인 잣대로 갈등하게 됩니다』
-요즘도 계속 답사를 다니시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집들을 보셨는지요.
『1959년부터 답사여행을 다니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40년을 다니고 있습니다. 문화재관리국에 있을 때는 한 번 나가면 3개 道(도)를 거쳐서 돌아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내가 다닌 길이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많은 집들을 보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아마 나라 안에서 제일 많은 집을 본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2만~3만 채는 더 보아야 할 거예요. 살림집들은 어느 것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초가삼간은 얼마나 큰가
-지금은 농촌에서도 한옥이 사라져가고 있는 중입니다. 전국적으로 한옥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서울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이나 한옥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19세기 이전 것도 많이 남아 있어요. 나는 한때 한옥 分布圖(분포도)를 만들려고 계획한 일이 있어요. 그 때 김수근씨가 자기 지프차를 줄 테니 해보라고 했으나 시간과 돈이 모두 부족해서 그만두었지요. 아쉬운 일입니다』
-韓屋의 크기에 대한 개념이 요즘 서양식 주택과는 달리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나는 초가삼간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定立하나 하는 문제로 고심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선비들이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하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어쩌구 하는 바로 그 초가삼간의 크기가 어느 정도이냐,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마침 1903년 대한제국 시절의 호구조사표를 손에 넣어 원적지를 조사하여 경남 의령군 어느 마을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문서에는 1統(통) 10채의 가옥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집들이 지금도 대부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3간집으로 기록된 집을 살펴보니 방 1간, 마루 1간, 또 방 1간을 합쳐 3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부엌 1간이 더 있었으나 이것은 간으로 치지 않고 일부러 빼먹고 있었어요. 안채 옆에 있는 사랑채도 숫자에 넣지 않았더군요. 그외에도 농가에는 외양간, 헛간, 곳간, 측간 등 여러 부속건물이 있으나 이런 것들을 모두 간으로 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시골 농가 3간집이라고 하면 실제로는 수십 평짜리 집이에요. 이렇게 개념을 정리한 후 고장마다 조사를 해 보았더니 토담집이나 귀틀집이나 모두 사정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3간짜리 집은 그 당시 생활의 기본이 되는 집의 규모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祥考(상고)해 보면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순화되어 살았는지 삶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이 있는 집, 또는 인간이 있는 집을 강조하셨는데 서양건축사의 어디가 잘못되었다고 보십니까.
『사람은 시대적 환경 속에서 각자가 갖고 싶은 집의 理想型(이상형)이 있습니다. 개인의 理想性(이상성)이 여러 사람의 공감을 얻어내면 보편적인 理想性이 되지요. 이러한 理想性은 시대에 따라 변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理想性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건축사의 본령 아니겠습니까. 名品(명품) 몇 개에 대한 설명만 가지고 건축사를 쓰는 것은 엉터립니다. 西洋건축사는 명품순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집에 대한 樣式史(양식사) 중심이지요. 집이라는 것은 거듭 말하지만 살자고 짓는 것이지 무슨 式(식) 때문에 짓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는 최종적으로 내일의 삶에 지표를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건축사가 다음 세기 백성들의 삶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하리라고 보십니까.
『우리나라의 건축은 19세기까지 흘러오던 韓屋의 흐름이 20세기 들면서 양옥의 도입으로 큰 혼란이 일어났어요. 이 혼란을 안고 이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에는 어떤 형태의 집으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한 번도 진지하게 논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건축사를 하는 학도라면 21세기 우리 백성들이 살 집의 모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21세기의 韓屋
-申선생님은 그런 모형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그런 작업을 하려면 현존하는 집들을 충분히 보고 연구해야 그 바탕 위에서 미래의 모습이 나옵니다. 죽을 둥 살 둥 물리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고 방방곡곡 집을 보러 다니는 이유가 다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집들이 이러할진대 다른 나라는 어떠한가, 특히 經度(경도)의 차이는 있으나 緯度(위도)는 같은 나라들을 찾아다니며 태양의 조건은 같은데 집의 모습은 왜 어떻게 다른가를 보러 다니는 이유도 거기 있고요』
-집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시대적인 보편성을 말씀하셨는데 한옥이 과연 21세기에도 살아 남을까요. 남는다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물론 살아남습니다.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洋屋의 도입에서 온 혼란을 극복하고 주거문화의 중심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의 한옥이 21세기에도 그대로 再現되지는 않을 겁니다. 19세기 이전의 집은 그 시대의 삶과 잘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시대의 어떤 신분의 사람들은 他人(타인)의 보조를 받으며 살았는데 집의 구조도 가족과 가족을 보조하는 남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습니다.
21세기에는 어떤 집이어야 하느냐.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남을 배제하고 기계의 보조를 받으며 가족만 사는 공간이어야겠지요. 그런 시대의 한옥을 어떻게 지어야 하느냐, 우리는 그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서양 이론을 가져와서 한국에 맞춘다는 것은 오늘과 같은 非(비)문화의 주거환경을 심화시킬 뿐입니다. 우리는 그런 목표를 위해 연마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그런 과제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곳이 없습니까.
『공대에서 한국 건축을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이것은 서양에서 공부했거나 서양식의 학문을 배운 사람들의 獨善(독선)입니다. 앞으로 한옥의 수요가 늘어날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지금의 건축 교육은 정상이 아닙니다』
申씨는 보탑사의 3층목탑을 세운 것도 미래 건축의 방향 제시와 무관하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했다.
『공과대학 건축교육의 태도가 아주 잘못 되어 있으므로 하루 빨리 정상궤도에 오르도록 是正(시정)을 요구하는 것도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그러나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는 저런 작품을 통해 과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장차 저런 건축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대학 당국에 묻는 거지요. 서양건축하는 사람들은 저런 집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보탑사의 3층목탑이 기념비적인 건축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용도의 건축물일 뿐 일반적인 건축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까.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저런 건물이 광화문 네거리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장에 관광객이 미어질 것입니다. 6백년 古都(고도)에 궁궐의 잔재 외에는 그런 건축물 하나 없다는 것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도시계획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일은 자신이 없어 감히 못하지요. 빌딩만 하늘높이 치솟아 오르면 도시가 되는 줄로 아는데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갈 것인지 답답해요』
『아파트는 살기 위해 지은 집 아니다』
-지금 추세로는 아파트가 모든 도시와 농촌까지 뒤엎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까지의 아파트를 보면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건설업자의 장사를 위해 지었어요. 국가가 그것을 방조하고 장려한 결과 농촌에도 고층아파트가 서고 있는 판입니다. 한국땅 전체를 아파트로 뒤덮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대체 그렇게 해야만 되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파트가 좋은 집은 못되지만 당장 심각한 주택문제를 빨리 해결하자니 그 방법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요. 또 한옥이 기능상으로나 건설문제로 보거나 새로운 주거형태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國籍(국적) 없는 집들이 亂立(난립)하게 된 것 아닐까요.
『한때 집장사들이 한옥 비슷한 집을 날림으로 지어 대량 공급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사람들이 한옥에 대해 넌덜머리를 낸 나머지 6·25 이후 값싸고 편리한 블록집으로 몰려가고 말았어요. 엉터리 한옥에 대한 反動(반동)으로 外風(외풍)도 없고 건축도 간단한 블록집이 유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아파트가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아파트가 갈 데까지 갔으니 그 反動(반동)으로 韓屋이 새로운 주거문화의 주역으로 再등장할 것입니다. 아파트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어떤 집을 선택할 것인지는 그 시대인들의 특권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바르게 선택하도록 식견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의 역할인데 대학에서 한옥에 대한 교육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슨 횡포인지 모르겠어요』
-해라시아연구소의 역할은 제도 교육이 외면하고 있는 韓屋 건축교육을 대신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는 엉뚱한 방향으로 몽땅 휩쓸려 가는 것 같아도 그중에서 그래도 휩쓸리지 않고 정신 차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정상궤도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건축에 있어서도 같습니다. 한쪽 귀퉁이에서 작은 집단이라도 뭔가 다르게 움직여줘야 문화가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갈 때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집단(해라시아연구소)도 우리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여기 출신으로 석,박사들이 벌써 많이 나왔습니다. 이들에게는 실제경험을 쌓기 위해 모두 현장으로 내려보냅니다. 현장에서 터득한 기술을 토대로 이론을 정립하고 있는 젊은 학도들이 20명은 될 거예요. 우리 목표는 이 분야에서 먹고 사는 지식인이 1만명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작가들, 공부 좀 하시오』
申씨는 머지 않아 건축의 흐름이 크게 뒤바뀔 것이 분명하고, 그때 가서 지금의 해라시아연구소 멤버들이 새로운 건축문화의 전도사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韓屋의 특징은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자연과의 친화력입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韓屋이 들어감으로써 그 자연이 오히려 살아나는, 이것이 韓屋의 가장 큰 장점이지요. 구조상의 특징은 온돌과 대청입니다. 온돌은 추위를 막는 난방장치이고 대청은 냉방장치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집 속에 공존하고 있는 집은 全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파트를 지어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짓되 한옥의 편리한 특징을 가미하여 좀더 사람과 가까운 아파트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韓屋은 또 앉았을 때와 섰을 때의 천장 높이가 다르도록 하여 氣(기)를 잘 돌게 만들었어요. 안방은 앉아서 지내는 곳이기 때문에 천장을 낮게 했고, 마루에서는 서서 지내는 때가 많으므로 천장을 높게 했습니다. 그래야 氣가 잘 돌아 쾌적한 느낌을 주는데 아파트는 일률적으로 높이가 같으니 답답하고 氣가 돌지 않아요. 한국인의 심성과 신체 구조를 모르면 한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그것부터 공부해야 할 겁니다』
申씨는, 한편으로 해라시아연구소를 구심점으로 하여 한옥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관리들이 여전히 한옥을 시대적으로 생명이 끝난 주거형태쯤으로 여기고 있으면서 無識(무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못해 연민이 들 정도라고 했다.
『李선생도 작가인데, 작가를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기가 뭣하지만 金東仁(김동인)의 작품 속에 「추녀 끝에 고드름이 달렸다」는 구절이 있어요. 그건 「처마 끝에 고드름이 달렸다」로 고쳐야 합니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집의 구조와 명칭에 대한 無知(무지)에서 그리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문인들이 자기 삶의 체험 영역 속에서 고치에서 실 뽑아내듯이 작품을 쓸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공부를 한다면 얼마든지 더 좋은 작품이 나오리라 생각됩니다. 최근 작가들이 모여 10년 동안 원고료가 한 푼도 오르지 않아 살기 어렵다는 불만을 토로했던데, 내 생각으로는 한옥이나 우리 문화에 대한 공부만 열심히 해도 좋은 작품을 써서 먹고 사는 일이 좋아지리라는 생각입니다.
문학에서 한옥에 대한 자세한 명칭이나 아름다움, 그리고 기능상의 편리함을 다루지 않으니 일반인들은 더욱 모를 밖에요. 그러나 열심히 배우려는 작가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화가 이두호씨 얘깁니다만 이씨는 한겨레문화센터의 내 강좌에 매회 와서 열심히 듣기에 「뭘 배우러 오느냐」고 물었더니 「여기서 배운 것 때문에 한국인의 삶에 대한 나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해요』
그의 눈에 비친 한옥에 대한 無知는 공중파 방송의 텔레비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한옥은 윗목과 아랫목이 있는데 요즘 史劇(사극)을 보면 임금이 방 귀퉁이에 앉아 문 밖을 바라보는 자세로 있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했다. 방송국에 얘기를 해줘도 알아듣지를 못하니 답답하다고도 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의 작은 연구소는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보통 학자들은 자기 지식을 누가 가져갈까 봐 걱정을 하고 숨기지만 우리 연구소가 지니고 있는 정보와 지식의 양은 넘치고 넘쳐 언제 누가 오더라도 흔쾌하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申씨는 『李선생도 우리 팀에 들어와 함께 다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申씨가 한옥에 관심이 높은 사람들을 데리고 집중탐구 여행을 떠날 다음 목표는 오대산 상원사의 적멸보궁. 마치 상원사를 처음 가보는 소년처럼 그는 벌써부터 상기되어 있었다. 일에 대한 열정이 그로 하여금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게 하는 비결임에 틀림 없었다. 젊었을 때는 늙은이 같았던 사람, 이제 늙어가는 마당에 거꾸로 젊은이 같은 사람 - 申씨는 할 일이 너무 많아 즐거운 사람이었다.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