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대통령인 김영삼 당선자가 구성한 대통령직 인수위는 ‘정권인수위적 성격 기구’로는 최초라고 볼 수 있어요. 1988년 노태우(盧泰愚) 당선자가 ‘취임준비위’를 구성했지만, 실제적인 활동범위는 매우 제한적이었어요. 그러니 문민정부의 시작과 함께 출범한 인수위가 사실상 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한규
73세.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정치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
러시아 극동문제연구소 명예정치학 박사. 13·14대 국회의원, 총무처 장관 역임.
現 21세기 한중교류협회 회장·명지대 석좌교수.
김한규
73세.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정치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
러시아 극동문제연구소 명예정치학 박사. 13·14대 국회의원, 총무처 장관 역임.
現 21세기 한중교류협회 회장·명지대 석좌교수.
인수위원장은 정원식(鄭元植) 전 총리. 그는 14대 대선에서 민자당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공로를 인정받아 인수위원장이 되었다. 두사람을 뺀 다른 인수위원들은 박관용·이민섭·서정화·신경식·최병렬·김한규·이해구·양창식·이재환·장영철·이환의·최창윤·남재희·유경현씨 등이었다. 이른바 민정·민주·공화계의 결합이었다.
“군사정부가 종식되고 문민(文民)정부의 시대가 개막되는 시점이었어요. 인수작업에 가장 역점을 둔 것은 김영삼(金泳三) 당선자가 주장해 온 ‘작고 깨끗하며 강력한 정부’ 구상을 구체화하는 것이었죠. 당선자의 지시는 경제활성화 대책과 부정부패 방지대책,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방안이라는 3가지로 압축되었다고 기억합니다. 저는 인수위의 제5분과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인수위 5분과는 김 전 장관을 비롯하여 이재환(李在奐) 전 의원(11·14대 국회의원), 남재희(南載熙) 전 장관(YS정권 출범 후인 1993년 12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노동부 장관으로 재임)이 인수위원으로 참여했는데, 교육·문화·체육청소년·보사·환경·국가보훈처 등의 부처 업무와 정책을 다뤘다.
“14대 대통령인 김영삼 당선자가 구성한 대통령직 인수위는 ‘정권인수위적 성격 기구’로는 최초라고 볼 수 있어요. 1988년 노태우(盧泰愚) 당선자가 ‘취임준비위’를 구성했지만, 실제적인 활동범위는 매우 제한적이었어요. 그러니 문민정부의 시작과 함께 출범한 인수위가 사실상 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人事가 萬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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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민자당 총재였던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총재비서실장에 임명된 김한규 전 장관. 임명장을 받는 모습. |
15명의 인수위원 모두가 정치인이라는 점에 대해 김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인수위의 근본목적은 대통령 당선인의 선거공약과 정책을 실현하는 데 있어요. 향후 5년 동안 분야별로 추진할 과업을 인수위가 제시해야 합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잖아요. 인수위는 아무래도 직접 대선공약을 만들고 정책을 가다듬은 이가 참여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요. 그래서 정치인이 다수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정치인만 참여해선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 학계 인사가 참여해 대통령이 5년간 추진할 국정과제를 정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14대 대통령직 인수위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인수위원 안배를 두고 다소 불협화음이 흘러나왔다. 공화계 의원 일각을 중심으로 충남 인사가 빠져 있어 불쾌하다는 불만이 있었다. 물론 대전 출신 이재환 전 의원이 충남 몫으로 참여하기는 했다.
—구(舊) 여권(민정계, 공화계)과 민주계의 갈등은 없었나요.
“오래전의 일이지만 (갈등이) 없지 않았다고 봐요. 특히 YS 당선자는 경제활성화와 부정부패 방지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로 금융실명제 도입을 두고 말이죠.
금융실명제는 YS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었어요. 부패 척결을 위해 금융실명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마찬가지로 깨끗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YS는 ‘청와대로 부정부패한 돈을 가져와도 안 되고, 받지도 않겠다’고 국민에게 선언했어요. 그리고 그런 선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칼국수를 드셨지요.”
인수위에서는 부정부패 방지책을 마련하며 이를 ‘윗물 맑기 운동’이라 불렀다. 또 대통령의 반(反)부패 선언, 공직자에 대한 대통령 당부 공한(公翰) 발송, 정치권 정화(淨化)도 인수위에서 논의했다.
그러나 일부 인수위원들은 부정부패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는 데 조심스럽게 이견을 피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민자당 내부에서도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및 등록문제, 금융실명제 도입 등 경제개혁안을 두고 속도조절 여부를 둘러싸고 ‘안정론자’와 ‘개혁론자’가 맞서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대쪽’이란 별명의 이회창(李會昌) 대법관이 1993년 3월 YS정권 출범과 함께 감사원장을 맡게 된 것도 부정부패 일소(一掃)의 밑그림 중 하나였다. 김 전 장관은 “아마 김현철씨 라인 쪽에서 천거했을 것”이라며 “감사원장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고 했다. 이회창 감사원장은 이후 YS와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집권 초 역대 정권에서 금기시되었던 청와대와 안기부 등에 대한 감사, ‘평화의 댐’, 율곡비리 감사 등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까지 파헤쳤다.
안기부는 必要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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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규 전 장관이 장관 재임 당시인 1997년 4월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총무처 간부를 상대로 특강을 하고 있다. |
—정부 업무의 인수작업은 어떻게 추진됐나요.
“각 부처 차관과 기획관리실장 등이 인수위의 해당 분과위에 출석, 소속 부처나 기구의 예산 등 일반 현황과 주요 현안 과제들을 보고합니다. 그러면 인수위원들이 현안 과제의 문제점에 대해 묻고 의견을 내는 형식으로 진행됐지요.”
인수위는 노태우 정권 시절 추진했던 정책도 점검했다. 인수작업이란 받을 것과 받지 않을 것을 가려내는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당시 도마에 오른 정책으로는 경부고속철 차종 선정, 제2 이동통신, 우루과이 라운드와 관련한 쌀 수입개방, 금리 하향 조정, 중소기업 지원정책, 북한 핵사찰, 종합유선방송(CATV) 허가, 대선(大選) 이후의 후속 사법 처리, 사면 범위, 안기부 기능조정 문제 등이었다. 김 전 장관은 “당시 정부 측 입장을 듣고 긴급 사안에 대해선 인수위의 자체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안기부 기능조정 문제는 안기부 기능을 어떻게 축소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YS는 평생 정치사찰을 당한 만큼 안기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필요악’이라는 거였어요. 당시 안기부 요원은 각 부처 간 이견(異見)을 줄이는 정책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습니다. 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확실한 컨트롤 타워가 있어야 하고 그 역할을 안기부가 했던 것이죠. 권한이 비대해 국가발전의 폐단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이 ‘필요악’이라고 본 것이죠.”
YS 인수위는 여러 한계도 가진다. 인수위를 구성하고도 비선(秘線)조직이 따로 있어 중요한 것은 모두 비선조직에서 결정했다. YS의 아들 김현철씨가 ‘소통령’으로 불린 것도 그런 이유다. 인선도 그렇고 정책과제 발표도 인수위에서 하지 않았다. 당시 인수위 대변인이었던 신경식(辛卿植) 전 의원은 “인수위 보고내용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최종 확정 과정에서 변경될 수 있는 내용이 공개되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비선조직을 뒀던 YS의 집권 스타일은 김현철씨를 중심으로 하는 비선그룹을 낳았고 결국 정권의 부패와 농단, 신뢰 추락과 레임덕 현상을 몰고 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선공약, 집권 후반기엔 이행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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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국회 국제경쟁력강화특위 위원장 시절 김한규 전 장관. |
김한규 전 장관은 1995년 민자당 총재 비서실장을 거쳐 이듬해 12월 총무처 장관에 임명됐다. YS정권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총무처 장관이 되어 당시 인수위 때 논의된 사항을 점검해 보았어요. 그런데 상당부분 대통령 뜻과 의지가 반영 안 된 게 많았어요. 인수위가 YS정권의 국정운영에 필요한 기초를 닦았다고 생각했지만,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니 제대로 실현된 게 없었어요. 대통령도 (어떻게 추진되는지) 모릅니다. 단적인 예가 ‘5·18 특별법’인데, YS가 법만 만들었지 이후 후속조치가 없었어요. 망월동 묘지조성 문제만 간신히 해결했지요. 인수위 때 논의됐지만 구체화하지 않았던 겁니다.
5·18 유족회에서 ‘보상문제는 제쳐놓고라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달라’는 요구가 거셌어요. 국가기념일 지정은 총무처가 하지만 주요 업무는 내무부가 관장합니다. 제가 장관이 되고 성사시켰습니다.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내세웠고 특별법까지 만들었는데 나 몰라라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김 전 장관은 “국가 어젠다를 포함해 임기 중 기초를 다지는 일과 시행하는 일을 나누어 놓아야 하는데, 그 일을 인수위가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산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며 “그래야 국민과 정부 사이에 신뢰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왜 인수위 때 논의되거나 결정된 공약이 이행되지 않을까요? 집권초기 국민과 약속한 사안이라도 아주 민감한 문제는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민족을 위해 하면 되는데 훗날 책임을 질까 봐 덮어놓는 거지요. 이런 현상은 집권 후반기가 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모든 국가공무원 채용시험을 일요일에 치르는 것을 기독교계가 반대했다. 교계는 ‘국가·기관 행사 주일(일요일) 실시 반대운동’까지 벌였다. 교회 장로인 YS도 교계 의견을 받아들여 이를 대선공약에 집어넣었다. 김 전 장관은 “YS가 당선되고 교계에서 약속을 안지켰다고 아우성이었다. 막상 시행하려는데 다른 종교단체의 반발이 심했다”고 했다.
“공무원들과 일반 국민의 여론을 수렴, ‘평일 시험’을 도입하려는데 다른 종교의 반발이 심했어요. 저도 교회 장로여서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어 조심했지요. 공무원이 일요일에 시험감독을 하며 받는 수당이 한끼 식사 값(1만원)에 불과하다는 점과 일요일에 근무해야 한다는 문제를 들어 평일 시험을 도입했어요. 물론 선거공약이었고 인수위에서 논의된 것이었어요.”
그러나 YS정부 때 부분적으로 도입된 공무원 평일 시험제도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좋은 정부란?
문민정부 이후 사회복지제도의 획기적인 변화는 사회보험제도의 정비다. 홀트아동복지회장 출신의 김 전 장관은 민자당 보건사회분과위원장, 민자당 사회복지대책위원장으로 1995년 사‘ 회보장기본법’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 사회복지제도를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복지 서비스, 관련 복지제도로 분류하는 법을 만든 것이다. 인수위에서 논의된 것을 여당 국회의원을 하며 뒷받침한 셈이다.
“당시 각 부처에 분산돼 있던 사회보장 사업의 균형·유지·발전과 조정이 필요했고 사회보장에 관한 기본 이념부터 정립할 필요가 있었어요. 물론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이 1963년 11월 제정됐지만, 기본법으로 갖춰야 할 실질적인 내용을 갖추진 못했지요. 그래서 1994년 10월 정부가 ‘사회보장기본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흩어진 사회보장제의 효율적 운영과 통합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래서 아동복지법, 장애인복지법, 노인복지법을 모두 합쳐 1995년 12월 사회보장기본법이 만들어졌고 이전의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은 폐지됐습니다. 그 일을 주도했다는 것에 가장 보람을 느끼지요.”
김 전 장관은 “인수위원이 정권 시작부터 끝까지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할 필요는 없지만, 집권 초기 마련한 정책과 공약의 설계를 실현하고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인수위의 위치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실, 인수위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는 모호하다. 전 정권의 모든 일을 파악하여 새 정부 업무가 개시되면 바로 정부를 운영할 수 있게 준비를 해야 하느냐, 아니면 말 그대로 정권 업무 인수에 불과한 것인지, 또 인수위가 전 정권에 대한 평가(과오와 책임소재) 내지 감사(監査) 기능까지 가졌는지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5년의 임기를 준비하는 인수기간 동안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 집권 중간에 공약이행 정도를 점검하고 끊임없이 피드백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인사·예산·조직 등의 도구(道具)적인 일에 끌려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수위가 세운 국정과제의 큰 골격에 맞게 정부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 ‘좋은 정부’이자 ‘성공한 인수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