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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공개

北 혁명조직원과의 死生決斷 대화록 ③ 北 혁명조직원이 밝히는 김정은의 해외 노동자 인권유린 참상

“쇠줄로 이빨을 묶어 소리치지 못하게 제압한 후 北으로 압송”

글 :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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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격적인 해외파견 보위부 강습 내용… 도주 꿈꾸는 노동자, 다리 쓸 수 없게 만들어
⊙ 선친 유언 때문에 南에 편지 보냈다 발각된 해외노동자 속옷만 입히고 3일 굶겨
⊙ 어린 아들 포함, 北에 있는 가족들 연좌제 적용해 모두 처형
⊙ 혁명조직원, 도희윤 대표와 김일성 일가 사생활 폭로하는 일명 ‘비둘기 작전’ 계획
⊙ 혁명조직원이 동료에게서 “악질 빨갱이가 어떻게 반공분자가 됐어”라는 농담 들은 이유

도희윤
1967년생. 연세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도대체 TV 대표, 한국자유전선 사무총장, 뉴라이트 전국연합 북한인권특별위원장,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역임

[편집자 註]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는 2019년 5월 16일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내부 혁명조직원 김씨와 2014년 중반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도 대표는 인터뷰에서 “혁명조직 일원은 ‘김정은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방법은 그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며 “그는 ‘새로운 지도자가 또 독재를 하더라도, 그건 개발독재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신격화된 독재보다 낫다. 박정희 같은 사람으로 북조선을 끌고 가다 통일을 이루면 된다고 했다’”고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도 대표는 《월간조선》 기고를 통해 혁명조직원과 나눈 대화 내용 등을 자세히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도 대표가 보내온 ‘北 혁명조직원과의 사생결단(死生決斷) 대화록’ 제목의 글에는 그가 혁명조직원 김씨와 메신저를 통해 나눈 대화 등이 담겼다.
  세 번째 연재 글을 쓰는 시점이, 강제징용 배상문제로 시작되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기로 발표한 일본과의 갈등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이후 최악의 길로 치닫는 상황이라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무거워 온다.
 
  필자는 이미 많은 칼럼을 통해 한일(韓日) 외교문제와 한·미·일 삼각동맹의 중요성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해왔다. 심지어 미국 국가기관에 초청받아 강연할 때도 현 정권의 반일(反日) 의식이 언젠가 크나큰 동맹의 위기로 다가올 것이라 강력히 경고해, 행사에 참가한 한국 정부 대표단으로부터 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얼마 전 일본 초계기 사건 때도 이런 대응방식, 의식구조 자체가 한일 축구경기처럼 무조건 자국을 응원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외쳐댔지만, 정부마저 나서서 ‘죽창가’를 운운하는 상황이고 보니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분위기여서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다.
 
  필자는 학창 시절 독립운동 단체 흥사단 활동을 하면서, 친일(親日) 규탄(糾彈)보다는 항일(抗日) 숭모(崇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극일(克日)에 종국적인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거침없이 주장해왔다.
 
 
  친일문제는 김일성도 大사기극으로 막 내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 사진=BBC 캡처
  친일문제는 정통성을 자랑하는 북한의 김일성조차 자유롭지 못해 대사기극으로 막을 내린 거 아닌가. 그리고 언제까지 토착왜구니, 친일 반민족이니 하는 구태 프레임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세력들이 오히려 토착왜구에 가까운 행적을 가진 자들이 많다는 것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려는 피해의식에서 발로하는 대(對)국민 사기극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는 항일의 숭고한 정신을 한시도 잊으면 안 된다. 그 정신은 약육강식의 정글 세상에서, 그것도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의 한반도에 있어서 반드시 가져야 할 생존정신이다.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겠다는 자유인의 당연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과거의 친일 행각을 파헤치는 데만 매몰된다는 것은, 오히려 항일의 미래 역사를 잊고 우리끼리 아귀다툼의 아수라장으로 빠져들어 가는 꼴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번 9월호에서는 러시아 벌목공 노동자의 안타까움이 절절히 담긴 사연을 가감 없이 공개한다. 당시 필자의 아우는 이 같은 구체적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 만큼, 이것을 공개하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외국에 나와 있는 북한 노동자들의 범죄행위, 특히 대한민국과 연결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어떤 식의 인권유린이 자행되며, 이들을 북한으로 압송할 때의 너무나 참혹한 이야기들은 국제사회의 경각심을 위해서라도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북한의 아우와 나눈 대화는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험천만한 평화상태의 총소리들이다. 자기 자신이 연루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독재자의 주구들도 인간적일 수 있고 변화될 수 있으며, 이들이야말로 독재를 무너뜨리는 최전선의 전사가 될 수 있음을 호소하는 최이상의 외침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의 여정을 따라가보자.
 
 
  남한 국민 각성해야
 
구 소련의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생도 기념사진. 사진=피랍탈북인권연대
  도: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한 가지 부탁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혁명사업을 하다가 안타깝게 희생된 분을 잊지 않는 것이 살아 있는 우리의 책무라고 봅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청년도 그렇고요. 그래서 이런 분들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한 정리를 부탁드립니다. 그분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우리는 가야 합니다.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6군단 사건이나 프룬제 사건이나 그 어떤 사건도 말이죠.
 
  필자는 북한에서 세습 독재왕조와 싸우다 희생된 개인이나 조직들을 절대 잊지 말자는 취지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여기서 6군단 사건을 간략히 소개한다.
 
  〈6군단 사건은 1995년 함경북도 청진에 있던 6군단 정치위원(중장)과 지휘관들이 김정일 정권 타도를 위해 쿠데타를 기획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망타진된 사건으로 알려졌음. 사건의 내용과 규모가 과장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제 처형된 정치위원을 비롯한 핵심 연루자들의 신원이 일체 비밀에 부쳐지고, 6군단 또한 9군단에 병합되어 지금도 존재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김정일 정권에 상당한 충격을 준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최: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은 자유의 그날까지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으로 리해하겠습니다.
 
  도: 독재타도를 위해 희생된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저는 그들의 자료가 있으면 여기 남한에서 그분들을 위한 추모제라도 매년 열고 싶습니다. 끊이지 않고 매년 되새기며 각오도 새롭게 하고 남한 국민도 각성케 하고요. 이 편한 세상에 우리만 잘 먹고 잘살면 뭐합니까. 남한 국민 각성시켜야 합니다.
 
  최: 알겠습니다. 제가 기억을 정리해서 래일 알려드리겠습니다.
 
 
  6·25전쟁으로 北에 홀로 살게 된 노병의 유언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 거의 밤을 새우면서 작성했을 것 같은 아우의 글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소설 형식을 빌려 작성된 글이지만 이름이나 사건 전개과정 전체가 실제 있었던 일이기에, 만약을 위해 실명 등은 수정했음을 밝힌다.
 
  최: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제발 아들만 살려주십시오! 2012년 12월 31일, 그해도 다 지나간 마지막 날에 31세의 청년이 한 말이다. 한 청년이 2012년 1월 추운 겨울에 로씨아(러시아)의 원동 지역으로 일하러 왔다. 그가 로씨아 땅에 들어선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의용군으로 입대하여 북에 들어왔다. 그 아버지의 고향은 서울이다. 서울에는 큰아버지(아버지의 형님)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며 고모가 두 분 계신다. 전쟁 전에 고모들은 출가를 가고 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16살에 의용군에 입대한 그의 아버지는 어린 나이였지만, 전선에서 잘 싸웠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건설에서 노력적 위훈을 세워 여러 개의 훈장과 메달을 받은 전쟁 로병이였다. 전쟁으로 하여 그의 아버지는 가족과 떨어져 북에서 홀로 가정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면 인차 가족과 모여 살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60년 세월이 흐르도록 이루어지지 못했고, 2010년 분단과 리별의 고통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림종의 시각에 아들을 불러 앉힌 아버지는, 편지 한 장을 쥐여주며 이렇게 유언했다.
 
  “○○아. 나는 종래 고향에 못 가보는구나. 통일이 언제 되겠는지. 이제는 너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세상을 뜨셨을 게다. 고모들은 소식을 모르지만 너의 큰아버지만은 서울에 내가 살던 집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 내가 의용군에 입대하여 집을 떠나던 날 너의 할머니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집을 옮기지 않고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게 아버지가 살던 서울의 주소다. 그리고 이건 이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쓴 편지다. 큰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실 수 있으니 나 대신 이 편지를 전해다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자니 중국이나 로씨아에서도 남한에 맘대로 려행도 하고 편지도 주고받고 전화도 하는 세상이 됐다더라. 남들은 다 그렇게 잘들 사는데, 우린 편지 한 장 주고받을 길이 없구나. 요즘 아라사(러시아의 한자 표현)에 보내는 일꾼들을 뽑는다는데 어떻게 돈을 좀 질러주고라도 거기에 갈 수 없겠니. 아라사에 가면 서울에 있는 집에 편지를 보내거라. 그리고 부디 조심해라. 남한에 편지를 보내다가 들키면 온 집안이 망하는 판이다. 제 고향에 소식을 띄우는 것이지만 지금 세월이 어디 그렇니. 일이 잘못되면 어떡하겠니. 돌 지난 ○○이가 불쌍하지 않으냐” 하고는 눈도 감지 못하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세상을 떠났다.
 
  ○○이는 처음으로 본 그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를 겨우 알아보는지 이따금 벌죽벌죽 웃는 아들애였다. 그런 사연이 있기에 그는 고된 로동 속에서도 이따금 만나는 고려인 동포들을 만날 때마다 누가 들을세라 조심조심 물었다.
 
 
 
노병의 아들이 로씨아 일꾼으로 간 이유

 
2009년 12월, 도희윤 대표와 러시아 노동자 출신의 탈북자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김정일을 인권범죄자로 고발하기 위해 방문했다. 사진=피랍탈북인권연대
  “저 여기서 남조선에 편지를 보낼 수 있나요.” “남조선이 뭐예요?” “유주느이 까레야.” “아, 한국! 여기서는 한국이라면 모르는 사람 없어요. 당연히 보낼 수 있지요.”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그는 무작정 달라붙어 사정했다. 그가 왜 그렇게 사정하는지,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고려인 동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편지 써서 우체통에 넣으세요. 그러면 미국이든 카나다(캐나다)건 한국이건 정확히 전달돼요” “회답 편지가 오면 어떻게 받지요?” “그야 받는 사람의 주소를 밝혀야지요.”
 
  최: 그 동포는 당연한 걸 가지고 답답하다는 듯 말했고 그는 수신인의 주소를 밝힐 수 없는 사연을 그 동포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 동포는 전화번호를 알면 편지를 보낼 게 있느냐며 자기의 전화를 꺼내 들었다. “여기서 한국에 전화가 돼요?” 그가 신기해서 물어보자, 세상물정 너무나 모르는 그와 이야기하기 답답해서인지 자리를 피하였다.
 
  편지도 보낼 수 없게 된 그는 한국에 아무 데나 전화를 걸면, 서울에 있는 할머니의 집 주소를 대주며 자기의 큰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만나는 고려인 동포들에게 한국에 전화를 걸 수 없겠는가 하고 부탁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전화를 할 수는 있는데 한국 누구에게 전화하겠는가 묻는 것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처음 만났던 동포에게 사례비를 내겠으니 그 사람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고 회답편지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자기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최: 그렇게 해서 서울까지 보낸 편지였으나 60여 년 전 주소로 보낸 편지는 로씨아로 되돌아왔다. 그 청년이 사는 나라의 실정을 전혀 모르는 고려인 동포는, 그가 그렇게 당부했건만 그 편지를 그가 거처하는 숙소로 찾아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한국에 보냈던 편지인데 주소가 잘못되어 되돌아왔다고 전해주세요.” 이 한마디의 말은 그 청년뿐만 아니라 온 가족, 온 친척에게 내려진 사형 판결문이었다. 그 청년은 그 시각에 작업장에 나가 있었고 숙소에는 ‘로동안전지도원’이라는 위장직업을 가진 보위부원만이 있었는데 편지가 그 사람 손에 들어갔다.
 
  최: 래일 계속…
 
 
  너무 잔인한 해외파견 보위부 강습 내용
 
  도: 뭐라고 드릴 말이 없네요. 분노와 안타까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우는 필자가 문자를 확인하고 답장을 하자마자 써놓았던 글들을 또 보내기 시작했다.
 
  최: 로동안전지도원은 편지를 받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편지의 겉봉에는 분명히 ‘대한민국’이라는 우편국 확인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 이 자식이 나를 죽이자고 잡도리를 했구나.” 그도 그럴 만했다. 그의 임무가 외국이나 남조선으로 도주 및 망명을 시도하는 자, 그러한 생각을 가진 자를 제때에 색출하여 미리 체포하거나 유인, 랍치하여 조국으로 호송하는 것이었다. 그가 사는 나라에서는 전체 인민을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외국에 인력으로 내보내는 일꾼을 뽑는 원칙이, 첫째가 도주할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다. 리혼한 경력이 있는 자, 부부간에 의가 좋지 못한 자, 자식이 없는 자, 이런 자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외국에 나가 있어도 외국에 련계를 취하거나 외국으로 도주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인 서명을 5명 이상 받아야 선발될 수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한단 말인가.
 
  최: “오늘 이 편지가 내 손에 들어왔기 망정이지 그 자식 손에 들어갔으면 내가 죽을 뻔했구나.” 그 나라는 질서가 그렇게 서 있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잡지 못하면 보위원이 대신 죽어야 한다. 그러니 오늘은 ○○이에게는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지만, 보위원에게는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자기와 온 가족의 목숨을 끌어올린 날이었다. 보위원은 서둘러 작업장으로 나갔다. ○○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체포할까 생각해보았으나 생각을 달리했다. ‘여기는 남의 나라 땅이다. 루스끼들도 보고 있으니까 재미없을 수 있다.’ 아직은 본인이 모르니 일없을 것 같았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면 체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해외파견 보위부 강습에서 받았던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았다.
 
  ▲첫째, 보위원은 위장신분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는 적지(원쑤의 땅)다. 신분은 부사장, 부지배인, 부소장, 부단장으로 한다. ▲둘째, 보위원은 자기가 담당한 단위에 체포한 자들을 구금할 수 있는 비밀감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셋째, 보위원은 체포한 자를 감금하고 소지품을 모두 압수하며 도주할 수 없도록 속내의만 입혀놓아야 한다. ▲넷째, 조국까지의 호송은 체포한 보위원이 책임지고 하며, 호송 도중 범인을 도주시켰을 경우 도주한 자와 같이 취급한다. ▲다섯째, 호송방법은 범인의 두 다리 무릎 관절을 나무와 석고 붕대로 고정해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만들고, 환자로 가장하여 운반하여야 하며, 범인이 주재국 말을 잘 아는 경우 범인의 웃이(윗니)와 아랫니를 쇠줄로 고정해 호송 도중 비행장이나 기차역에서 소리를 칠 수 없게 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호송 도중 주재국 경찰이나 유엔 단체 같은 단속조사 기관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南으로부터 반송된 편지 발각돼 체포된 노병의 아들

 
북한의 혁명조직원이 보내온 SD카드의 모습. 오른쪽은 도희윤 대표가 혁명조직원에게 보낸 드론 사진. 사진=피랍탈북인권연대
  북한인권운동에 앞장섰던 필자로서도 이렇게 생생한 해외노동자 체포 과정과 해외노동자 감시를 위해 파견된 보위부 요원의 행동요강을 본 적이 없었다. 움직일 수 없게 두 다리를 고정하고 환자로 위장하며, 심지어 소리를 지를까 봐 윗니와 아랫니를 쇠줄로 고정한다는 증언에서는 모골이 써늘해졌다. 이게 바로 해외에 나와 있는 북한 노동자들이 처한 끔찍한 실상이기에 가감 없이 공개한다.
 
  최: “래일은 설날인데 작업 구만 하자.” 작업 책임자의 구령 소리는 저녁 8시가 넘어서 울렸고, 숙소로 들어오자 그는 잡혔다. 비밀감방에 들어서서야 일이 잘못된 것을 짐작했다. ‘아버지가 림종의 순간에 그렇게 당부했는데….’ 자기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는 생각보다도 요람에 누워 자기를 올려다보며 벌죽벌죽 웃던 아들 ○○이가 생각났다. ‘이 아버지가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는 억이 막혔다.
 
  최: 감방 규정대로 그는 속옷 바람에 굶은 채로 앉아 있었다. 3일을 굶겨 아예 맥을 못 추게 하는 것도 규정이다. 새벽 2시가 넘어서자 12월의 마지막 날의 추위에 얼어 죽을 것만 같아 창문의 살창문을 당겼다. 예상외로 살창이 흔들리면서 떨어져 나갔다. 살창을 넘어서 도망을 치던 그는 어디로 갈까 하고 생각해보았으나 갈 데가 없었다. 로씨아의 12월 추위는 밖에서 10분을 못 견딘다. 이대로 있으면 알몸뚱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얼어 죽는다. 그 순간에도 아들애가 생각났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우리 ○○이가 죽는다. 차라리 돌아가서 사정해보자. 지금까지 우리 아버지도 전쟁 로병으로 미국놈들과의 싸움에서 부상도 많이 당했고 공로도 세웠다. 나도 10년 넘게 고스란히 군사 복무해오지 않았는가. 우리 집안이 이런 집안인데 아버지의 유언이 고향에 편지 한 장 보내는 것이어서 몰래 편지를 보냈는데,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달라고 사정하면 혹시 용서해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그는 감방으로 되돌아왔다. 감방에 돌아온 그는 다음 날 아침 초벌조사를 하는 보위원에게 어제 있은 일을 이야기하고 제 발로 돌아왔다고 말하였다. 어젯밤에 하려고 마음먹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공로 집안이 적지에 편지질을 해!
 
  그의 말을 들은 보위원은, “그렇게 공로를 많이 세운 집안이 적지에 편지질을 해! 이건 조국 반역이고 적지 내통, 간첩죄에 속해. 적지의 원쑤들과 소통하는 것은 형법 60조에 해당하는 조국 반역죄라는 걸 몰라!!” “원쑤들과 내통하다니요. 큰아버지를 찾아보려고 했을 뿐인데요.” “큰아버지, 큰아버지! 적지에 살면 다 원쑤지, 계급적 원쑤가 따로 있어! 그게 바로 계급적 원쑤야!” “그 계급적 원쑤와 소통하려 했으니 너도 지금 이 시각부터 계급적 원쑤고 혁명의 원쑤야.” 보위원에게는 ○○이가 자기와 온 가족을 죽이자고 덤벼든 용서할 수 없는 원쑤였다. 바로 그랬다. 그가 사는 나라는 서로 원쑤가 되어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이게 되는 그런 환경이었다. 서로 감시하고 질시하고 너를 죽여야 내가 사는 환경 속에서 오직 한 분만은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와 따뜻한 사랑, 바다와 같은 폭넓은 인자한 도량으로 만민을 한품에 안아 친어버이 심정으로 보살펴주고 계신다. 우리가 안겨 사는 세상의 둘도 없는 한없이 고마운 우리의 제도를 지켜주고 계신다. 그리하여 28세의 그분은 천만 군민의 다함 없는 존경과 흠모를 오늘도 받고 계시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둘도 없는 인권 불모의 사각지대를 만들어 인민들에게 안겨주시고도 천만 백성의 머리 우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그 땅을 통치하는 잘 만들어진 통치 프로그람의 덕이다. 모든 행복은 제가 만들어내고 모든 악은 남이 만들어내게 하는, 하여 서로 싸울 때 그것을 바라보며 한없이 인자한 웃음을 지울 수 있는 환경이다. 뿌리 깊은 력사를 가지는 그 악의 통치 프로그람은 할아버지 때부터 만들어져 아버지대에 와서 잘 다듬어지고 완성되어 손자에게까지 물려 이러한 악(惡)을 만들어낸 것이다.
 
  도: 제가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소설처럼 써놓은 것인지요. 정말 글 솜씨도 대단하시네요.
 
  최: 원래는 자료만 렬거하려고 했던 것이 나도 모르게 흥분하여 소설처럼 됐군요.
 
  도: 아무리 생각해도 아우께서는 북한의 변화를 위해 태어나신 분 같습니다.
 
  최: 저는 죽어야 할 사람입니다. 저의 경력에 대하여 모두 아신다면 실망할 것입니다.
 
  도: 실망이라니요. 한창 좋은 나이시니 영광을 보실 겁니다. 인민과 함께하는 영광 말입니다.
 
  아우는 자신의 신분을 알면 독재체제를 유지케 하는 최일선에 있다는 것에 실망할 것이고,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보상은 죽음밖에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었다.
 
 
  어린 아들도 연좌 죄목 씌워 죽여
 
南에 편지를 보냈다 적발된 해외 노동자의 경우, 北에 있는 가족 모두 연좌제를 적용해 처형당한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없음.
  최: 분노가 사라지기 전에 마저 쓰겠습니다. 고려민항의 비행기는 한 주일에 두 번 있다. 새해 들어서서 첫 비행기로 그는 그리도 가고 싶어 했던 아버지가 묻힌 땅으로 끌려갔다. 끌려가던 날 그가 소리쳤다.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제발 아들만 살려주십시오.” 그의 피나는 절규가 차디찬 원동의 하늘 가로 울려 퍼졌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누가 나의 이 글을 보고 사실인가’ 묻는다면 나는 그때의 환경을 함께 목격한 30명의 증인을 내세울 수 있다. 오늘 보도를 들으니 또 무슨 인권문제를 가지고 유엔에서 론의가 있은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유엔에 호소하고 싶다. “우리는 배고파도 좋습니다. 로임 없이(급여 없이) 일해도 좋습니다.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제발 죄 없는 사람까지 죽이는 련좌죄 법만 없애주시오.” 2013년 3월. 로씨아 원동에서
 
 
  김일성 가문 실체와 사생활 폭로 준비
 
  도: 장문의 내용을 작성하시느라 고생하셨고요. 앞으로 많은 글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제 본격적인 자료준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을 차분히 정리해주시고요. 저희도 신문을 만드는 것이 있는데 ○○○○에 참고하시도록 보내드리겠습니다. 사진이 오면 그 사진을 먼저 손으로 누르면 사진만 나타납니다. 그때 엄지와 검지를 대고 손가락을 양옆으로 펼치면 사진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알고 계실 수 있지만, 설명드리오니 참고하십시오.
 
  최: 북한 통치의 기본 밑뿌리는 김일성 가문의 우상입니다. 대표님이 김씨 가문의 위대성에 대하여 직접 듣지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정말 탄복할 정도로 잘 꾸몄습니다. 우리는 우선 김씨 가문의 사람됨에 대한 옳은 인식을 가지도록 그 가문의 실체와 사생활에 대하여 폭로하려고 합니다. 그 자료를 부탁했는데, 준비하고 있는지요.
 
  도: 예,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 기본적인 기초자료들은 대표님께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도: 알겠습니다. 세상에서 나도는 일반자료보다는 제대로 연구하고 축적된 자료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내드릴 카드를 배포할 방법에 대해서는 많이 연구하고 계시지요?
 
  최: 김일성 광장의 비둘기를 잡아다가 발목에 카드를 달아주면 광장으로 날아가 거기에 돌아치면 카드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비둘기를 붙잡아도 비둘기보고 누가 카드를 달았는가 하고 묻겠습니까?
 
  도: 하하하 대단합니다. 주로 평양을 위주로 계획하시는 거죠?
 
  최: 밤에 대학가를 향해 무인기를 날리면 카드를 탑재하고 300메터는 비행하여 마당에 착륙할 수 있습니다.
 
  최: 지방들에는 우리가 출장을 가서 바지 주머니에 가득 넣고 작은 구멍을 뚫은 다음 걸어가면서 바지 구멍으로 하나씩 떨구면 바지 가랭이를 타고 신발 등으로 해서 바닥에 떨어지는데, 비 오는 날을 선택하면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즉시 혼잡한 벌이 버스(우리의 시외버스)를 타고 지방 도시를 빠져나옵니다.
 
  도: 좋은 생각입니다.
 
 
  “악질 빨갱이가 어떻게 반공분자가 됐어”
 
  최: 자전거를 타고 재빨리 기동하면서 뿌릴 수 있고. 북한은 밤이면 캄캄 세상입니다.
 
  도: 저희도 예전에 버스 환풍기를 열고 전단을 두면 버스가 출발하면서 전단이 뿌려졌었죠.
 
  최: 대표님도 경험이 많으시군요.
 
  도: 예, 저도 민주화니 머니 하면서 감옥에 2년을…. 인생에 큰 경험이었습니다.
 
  최: 대표님께서 2년간 감옥살이를…. 어쩐지 대표님은 저와 인생경로가 어떤 부분은 비슷합니다. 우리 조직 내부에서 나보고 “악질 빨갱이가 어떻게 반공분자가 됐어” 하고 롱담을 하였던 생각이 납니다.
 
  도: 그러게요. 저도 맑스주의를 신봉했다가 반공분자가 되었습니다.
 
  최: 맑스주의는 애국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쉽게 매혹됩니다. 그리고 배신감을 느끼었을 때 더더욱 분노하여 반공의 길을 걷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도: 그렇습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도 많고요. 저도 정이 많은 편입니다. 하하.
 
  최: 그렇지 않으면 인권운동에 몸바치실 수 없습니다.
 
  아우와 필자는 서로에 대한 공감대를 이렇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겪었을지도 모르는 해외 노동자의 압송과정을 그리며 함께 분노했고, 남한의 학생운동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북한에서 목숨을 건 혁명운동의 시작을 아우는 그렇게 실천하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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