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일구(日寇) 차토(此土)에서 육량(陸梁)함이 오래라, 감(監)이라 독(督)이라 하여 패퇴하던 날까지 강산민인(江山民人)을 피(彼)는 피(彼)의 점제(占制) 하에 두었던 듯이 알았을 줄 아나, 우리 선열의 피로써 싸워 온 거룩한 진세(陣勢) 41년의 일월(日月)을 관철(貫徹)하여, 몸은 쓰러져도 혼(魂)은 나라를 놓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겨레와 얽매이어, 그 장(壯)하고 매움을 말할진대, 어느 분의 최후, 천읍지애(天泣地哀)할 거적(巨迹)이 아니시리오. 인(刄)에 절(絶)하였거나 약(藥)에 운(殞)하였거나 다 같은 국가독립의 발발(勃勃)한 매진(邁進)이요, 역중(域中)에서 기구(崎嶇)하다가 맹지(猛志)를 뇌옥(牢獄)에 묻었거나 해외에 표전(飄轉)하면서 고심(苦心)을 노봉(虜鋒)에 끝마치었거나 다 항적필살(抗敵必殺)의 강과(剛果)한 결정이니, 개인과 단체, 자살(自殺)과 피해(被害)가 불일(不一)한 대로 내어 뿜는 민족적 망릉(芒稜)은 일찍이 간헐(間歇)됨을 보지 못한즉, 이 피가 마르지 아니하매 적과 싸움이 쉬인 적 없고, 이 싸움이 쉬이지 아니하매 차토(此土) 마침내 적의 전거(全據)로 돌아갔다고 이르지 못할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 과거 41년을 통틀어 일구(日寇)의 역(役)이라 할지언정, 하루라도 피(彼)의 시대라 일컬을 수 없음은, 오직 순국선열들의 끼치신 피 향내가 항상 이곳에 주기(主氣)되어 온 연고(綠故)니, 이 여러분 선열이 아니런들 우리가 무엇으로써 원구(圓球) 상에 서리오. …〉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정인보(鄭寅普) 선생의 〈순국선열 추념문〉의 앞부분입니다.
김구를 반박한 미군 장성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 글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요즘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모습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20여 년간 한국의 보수 우파를 취재했는데, 그 바닥에서 20년을 버틴 사람이나 단체가 거의 없습니다. 몇 번의 정권 교체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떠나갔고, 단체들도 사라지거나 껍질만 남았습니다. 특히 이번에 또다시 세상이 뒤집어지자 과거 보수주의 혹은 자유주의 운동의 선봉에 서있다가 돌연 행보를 달리하는 이들을 보면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애꿎은 저를 붙잡고 “도대체 그분들이 왜 저러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제가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저는 ‘대일본제국’이 기세등등하던 시절에 감연(敢然)히 그에 맞섰던 분들의 의기(意氣)와 용기, 헌신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를 새삼 절감하게 됐습니다.
저는 일제 하에서 기업과 언론을 일으키고 근대적 군사 기술과 행정 기술을 익혀서 이후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고, 일으킨 분들을 늘 존경해 왔습니다. 그렇더라도 일제 하에서 모두가 그들에게 순응하기만 했다면 이 민족의 체면은 어떻게 되었겠으며, 오늘날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그런 창피를 면할 수 있게 해주신 순국선열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제국을 거꾸러뜨리는 데 우리 민족이 실질적으로 기여한 부분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일본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연합국, 특히 미국의 힘이었습니다.
1947년 2월 13일 창덕궁에서는 우익 지도자들과 미군정(美軍政) 관계자 등이 참석한 만찬(晩餐)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구 선생이 미군정과 신탁통치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자 로이 하워드 소장(少將)은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인내를 가져야 한다. 미국이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목숨과 비용을 들여 싸웠기 때문에 한국 독립을 찾아올 수 있었다. 미국은 한국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평화와 미국 안보라는 관점에서 힘쓸 것이다. … 한국인들은 즉시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으나, 미국은 그 독립을 찾아왔을 때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게끔 하기 위하여 독립이 질서 있는 절차를 거쳐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아마 그 자리에 있었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오늘날 한국인들에게도 자존심 상하는 소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국제정치 역학상, 그의 말이 정곡(正鵠)을 찌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해방’과 ‘광복’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일제를 물리치지 못했기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지만 3년간의 미군정이 지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고서야 비로소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8월 15일은 대한민국에는 해방의 날이자 건국과 독립의 날입니다.
당시 정치 지도자들은 당연히 ‘해방’과 ‘광복’을 분리하면서, ‘광복(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독립=건국’으로 인식했었습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1949년 8월 15일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사에서 “민국 건설 제1회 기념일인 오늘을 우리는 제4회 해방일과 같이 경축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야당인 민주국민당을 이끌던 김성수(金性洙) 선생도 “금(今)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만 4주년이 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지 1주년이 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광복’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국민이나 언론은 곧잘 ‘광복=해방’으로 오인(誤認)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1960년 4·19 이후 ‘이승만 지우기’가 횡행하면서 결국 오늘에 이르러서는 ‘1945년 광복’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고착돼 버렸습니다.
저희가 올해 들어 몇 번의 특집을 준비하면서 ‘해방 80주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러한 잘못된 인식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광복 80주년’은 건국 80주년이 되는 2028년입니다.
‘해방’이건 ‘광복’이건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하는 분도 아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을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유일한 나라”라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대한민국이 정말 성공한 나라인지 의문을 가져 왔습니다. 대한민국은 하드웨어적인 ‘스테이트 빌딩(state building)’에는 성공했지만, 소프트웨이적인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에는 실패한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한민족(韓民族)이라는 종족(種族)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헌법에 충성하는 헌법애국주의가 아직도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개인에게 충성하거나 정권의 눈치를 보는 공직자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은 민주공화국의 공복(公僕)이 아니라 봉건 왕조의 노복(奴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실이 모든 역사의 영혼이 되어야 한다”
왜 이런 지경이 됐을까요? 저는 허위의식에 기초한 역사 인식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몸담고 있고 봉사해야 할 국가의 기원(起源)조차 제대로 모르니 그 국가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 리 없습니다.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니 충성의 대상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허위에 기초한 역사 인식은 허위에 기초한 현실 인식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민족 자체만의 힘으로 해방과 광복을 이루었다는 서사(敍事)나, ‘우리민족끼리’ 통일을 이루자거나, 우리의 역량으로 동북아의 균형자·조정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나 모두 거기서 거기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자고자대(自高自大)하는 의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역사를 자기 좋을 대로 기억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표류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요?
외세(外勢)의 압제 아래서 체코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던 18세기 말, 과거의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민족을 분기(奮起)시키려는 자들에게 체코 민족주의자이자 가톨릭 사제인 겔라시우스 도브너(1719~1790년)는 이렇게 질타했습니다.
“진실이 모든 역사의 영혼이 되어야 한다. 역사가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지식에 대한 사랑으로 후세에 가공(架空)된 모든 것을 지워서 그의 민족을 외국인들의 조롱으로부터 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