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侖世
1955년생.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現 한국도전번역원) 졸업 / 現 ㈜인산가 회장, 《인산의학》 발행인, 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월간조선》 명예기자 / 저서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네》 《자연치유에 몸을 맡겨라》 《내 안의 자연이 나를 살린다》 등
1955년생.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現 한국도전번역원) 졸업 / 現 ㈜인산가 회장, 《인산의학》 발행인, 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월간조선》 명예기자 / 저서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네》 《자연치유에 몸을 맡겨라》 《내 안의 자연이 나를 살린다》 등

- 사진=게티이미지
문득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래 길에서
야인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홀문인어무비공 돈각삼천시아가
六月燕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유월연암산하로 야인무사태평가
근대 한국 불교의 중흥조로 알려진 조선조 말엽의 대(大) 선지식(善知識·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 경허(鏡虛·1849~1912년) 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선사는 1849년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완산 자만마을)에서 아버지 송두옥(宋斗玉)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廬山). 속가에서의 이름은 송동욱(宋東旭)이고 법호는 경허(鏡虛)이며 법명은 성우(惺牛)다.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죽었으며, 9세에 경기도 과천의 청계산(618m)에 있는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했다. 스승 계허(桂虛) 스님 밑에서 5년을 보내고, 1862년(철종 13년)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뒤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의 만화(萬化) 스님에게 불교 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제자백가〉를 익혔다.
1871년(고종 8년), 동학사의 강사로 추대됐다. 1879년에 옛 스승인 계허를 찾아가던 중, 돌림병이 유행하는 마을에서 죽음의 위협에 시달린 일을 계기로 다시금 크게 발심하고, 동학사로 돌아와 용맹정진에 돌입했다. 턱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받쳐 놓고 졸음을 쫓으며 목숨을 걸고 용맹정진한 지 석 달이 지난 어느 날의 일이다.
활연대오의 순간
동학사에 있던 경허 선사의 사형 학명(學明) 스님이 마을에 내려갔다가 오랜 수행으로 도가 높다고 알려진 이진사(李進士)라는 처사(處士)를 만났는데, 그 처사가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요새 동욱(경허) 대사는 어떻게 지내는가요?”
“그저 방 안에서 소처럼 앉아 있습니다.”
“중 노릇 잘못하면 소 되는 이치를 아는가요?”
“그거야 공부를 하지 않고 공양만 받아먹으면 소밖에 될 게 더 있겠습니까?”
“그걸 대답이라고 합니까? 중 노릇 그만큼 하고 겨우 대답을 그렇게밖에 못 합니까?”
“그럼, 뭐라 해야 하나요? 저는 선리(禪理)를 잘 모릅니다.”
“소가 되더라도 코뚜레 꿸 구멍이 없는 소가 되어야지요….”
학명 스님은 이 처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경허 선사에게 전달하기 위해 선사를 찾아갔으나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 않기에 문밖에서 이 처사한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하면서 “도대체 이 처사의 말은 무슨 뜻일까요?”라고 물었다.
경허 선사는 학명 스님에게서 ‘소가 되더라도 코뚜레 꿸 구멍이 없는 소가 되어야지요’라는 이 처사의 말을 전해 듣는 순간 활연대오(豁然大悟)했다. 1879년 11월 15일의 일이었다.
이 뒤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연암산(燕巖山) 천장사(天藏寺)로 옮겨 깨달음 뒤의 공부를 계속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버티고 앉아서 눕는 일도 없고, 누구하고 얘기하는 일도 없고, 바깥에 나가는 일도 없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양치하는 일도 없고, 세수하는 일도 없고 그저 대소변 보러 가는 일 외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벌 누더기에 빈대와 이가 득실거려 온몸을 물어뜯어 피투성이가 돼도 일절 긁는 법이 없었고, 그저 꼿꼿한 자세로 앉아 정진만 했다.
이러다 꼬박 1년이 지난 뒤 33세 되던 6월, 비로소 일대사를 마치고 옷을 벗어던지고 목욕한 뒤 갈아입고 나서 마침내 깨달음의 기연(機緣)이 된 ‘코뚜레 꿸 구멍 없는 소(無鼻孔牛)’를 노래하는, ‘오도송’을 읊었던 것이었다.
깨닫고 나니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나의 집이었다. 깨닫기 전에는 내 집은 천장사 절의 작은 방 하나였으나 이제는 세상천지가 모두 나의 집이었다.
6월 연암산 아래길에서 야인들이 부르는 노래는 태평세월의 태평가요, 자신이 읊은 깨달음의 노래 또한 온갖 번뇌의 비바람이 그친,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적멸의 태평가였다. 장부의 할 일 다 마친 것이니 이제 마음 놓고 두 다리 쭉 뻗고 잠잘 수 있게 된 것이다.
경허 선사는 1880년 용암 혜언(龍巖慧彦)으로부터 이어지는 법맥을 이었으며, 스스로 청허 휴정(淸虛休靜)의 11세손, 환성 지안(喚惺志安)의 7세손이라 밝혔다. 1884년 천장암에서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의 3대 제자를 지도했다. 한암(漢巖), 동산(東山), 금오(金烏), 전강(田岡), 향곡(香谷), 경봉(鏡峰) 등은 경허 선사의 문하에서 길을 찾은 선지식들이다.
1904년, 천장암에서 만공 스님에게 최후의 법문을 한 뒤 갑산(甲山), 강계(江界) 등지에서 박난주(朴蘭州)로 개명하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 임종게(臨終偈)를 남긴 뒤 입적했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였다. 저서로는 《경허집(鏡虛集)》이 있다.
불교 수행자의 본분사(本分事)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한 가르침의 참뜻을 깨달아 스스로 밝힌 ‘지혜의 등불’로 세상의 어둠을 밝혀 인류가 밝은 세상에서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제 본분사를 다하는 사람
경허 선사는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즈음에 홀연히 나타나 철저한 수행을 통해 스스로 칠통(漆桶) 같은 무명(無明)의 틀을 타파하는 깨달음을 이루어 ‘지혜의 자등명(自燈明)’으로 꺼져가는 ‘한국 선(禪)’의 등불을 밝혀 밝은 세상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는, 본분사를 다한 근대의 선지식이다.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경제인은 경제인으로서, 언론인은 언론인으로서, 군인은 군인으로서, 교육자는 교육자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각자 제 본분사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각자 제 본분사를 제대로 다 한다면 우리 사회는 자연스러운 변화와 혁신을 통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것으로 판단한다.
다른 분야보다 나라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인, 행정가, 법조인의 본분사는 무엇인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입법·사법·행정을 통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충실하게 노력하는 것이 본분사임에도 본분사를 제쳐두고 사리사욕과 이념적 편향, 당리당략에 매몰돼 오로지 권력 쟁취와 패거리 정치에 집중하는, 본말전도의 추태를 연출하고 있다.
염불보다는 잿밥에만 눈이 어두운 어리석음이나 마음이 콩밭에만 가 있는 사람의 눈빛을 세상 사람들이 모를 리 없건마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남들이 모를 것’이라 여기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벌이다가 제가 파놓은 함정에 결국 제가 빠지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느 분야에서 무엇을 하든 경허 선사처럼 제 본분사를 다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