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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11〉

文廟從祀의 정치학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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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조 이후 문묘종사가 정치적 도구화 되기 시작
⊙ 인조·효종·현종, 臣權論者인 西人이 요구하는 이이·성혼의 문묘종사 반대
⊙ 숙종, 문묘종사를 ‘정치적 선물’로 간주해 配享·黜享·復享을 거리낌 없이 단행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성균관 대성전(문묘·공자의 사당)에서는 지금도 매년 봄가을로 공자를 기리는 석전대제가 열린다. 사진=조선DB
  왕조 국가에서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는 종묘(宗廟)에 배향(配享)되는 것이다. 이 자체는 해당 임금 때의 충신을 일컫는 것인데 예를 들면 태조의 종사(從祀)공신은 조준·이화·남재·이제·이지란·남은·조인옥이고 태종의 종사공신은 하륜·조영무·정탁·이천우·이래다. 그러나 선조 때부터 당쟁(黨爭)이 본격화되자 종묘 배향은 의미가 퇴색하고 문묘(文廟), 즉 공자(孔子)의 사당에 올라가는 것이 최고의 명예가 된다.
 
  우리 역사에서 문묘에 종사된 첫 번째 인물은 고려 현종 11년(1020년) 최치원이 처음이고 2년 후에 설총이 문묘에 들어갔다. 그리고 1303년 고려 충렬왕 때 안유(安裕), 즉 안향(安珦)이 문묘가 황폐화된 것을 개탄해 국학(國學)의 대성전(大成殿)을 다시 짓고 사람을 보내 공자와 70제자 화상(化像) 및 제기(祭器)·악기·경서(經書) 등을 가져와 비치해 그 공로로 1319년(충숙왕 6년)에 문묘에 종사됐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태종 7년(1407년)에 성균관 문묘가 완성됐다. 문묘는 한(漢)나라 때 생겨난 것으로 유학을 국가 지도이념으로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조선은 건국이념 자체가 유학이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성균관에 공자를 비롯해 그 제자들의 위패(位牌)를 봉안하는 대성전이 있었다.
 
 
  文廟를 정치 도구화 하기 시작한 趙光祖
 
조광조
  이때까지만 해도 문묘는 그저 공자의 정신을 기리는 정신적 공간에 불과했다. 이를 처음으로 정치 도구화 한 이는 주자학 이념으로 무장한 조광조(趙光祖)다. 중종 초에 사림(士林)을 중심으로 정몽주(鄭夢周)를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처음으로 제기됐다. 조광조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시켜 자기 스승인 김굉필(金宏弼)을 끼워 넣고 정몽주와 김굉필을 함께 문묘 종사해야 한다는 소(疏)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중종실록》 12년(1517년) 8월 7일 사관(史官)의 평을 참고할 만하다.
 
  “그 뜻은 김굉필을 종사하게 하고 그것을 빙자해 당(黨)을 세우자는 데에 있었는데, 처음부터 정몽주를 위하여 계책을 세운 것은 아니다.”
 
  이때의 당이란 다름 아닌 주자당이자 반(反)왕권 세력을 말한다. 결국 이해에 김굉필은 빠진 채 정몽주의 종사가 이뤄졌다. 그리고 이황(李滉)이 세상을 떠나자 새롭게 5현, 김굉필·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의 문묘종사가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당쟁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선조는 재위 내내 사림의 요구를 묵살해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마침내 광해군 2년 5현의 문묘종사가 이뤄진다. 이것은 광해군이 파워게임에서 신하들에게 밀리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시 영의정은 남인의 이덕형(李德馨), 좌의정은 서인의 이항복(李恒福)이었다.
 
 
  정인홍의 이황 비판
 
  그런데 이듬해인 광해군 3년 3월 26일 정권 실세인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는 부당하다’고 극론하는 소를 올렸다. 이것은 대체로 이황을 겨냥했는데, 이황이 자신의 스승 조식(曺植)에 대해 “신이 일찍이 고 찬성 이황이 조식을 비방하는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뻣뻣한 선비는 중도(中道)를 요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장(老莊)을 숭상한다”라고 비방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인홍은 이황이나 이언적 모두 도리가 없는 세상이라 할 수 있는 명종 때 높은 벼슬을 한 것을 문제 삼았다.
 
  “두 사람은 모두 유학하는 사람이라는 칭호를 지니고서 소인이 득세하여 군자를 해칠 때에 구하지 못하고 같이 행동을 한 수치가 있으니, 신하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불가하면 그만두는 의리와 돌처럼 단단한 절개로 속히 떠나는 의리와는 또한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보기에 따라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론은 정인홍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당시 사관은 정인홍이 소를 올린 의도를 이렇게 풀어내고 있다.
 
  “이 시기에 임금이 덕을 닦지 않아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지고 어진 이와 사악한 자가 뒤섞이어 외척들이 용사(用事)를 하고 있으니, 군자로서 벼슬하지 못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데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유독 이 문제를 가지고 거취를 결정한단 말인가. 더구나 세상이 두 선비를 존숭한 지가 오래되었고 배향을 청한 것이 몇 해째인데 어찌하여 전에는 묵묵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 운운하는 것인가.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건대 임금을 협박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개 인홍의 사람됨이 편협하고 사나우며 식견이 밝지 못한데 방자하게 함부로 지어내어 다시금 돌아보고 거리끼는 것이 없었으므로 세상에서 이르는 현인 군자치고 그의 비방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한마디로 독불장군식 행태로 인해 정인홍에게는 적이 많았다. 그가 가는 곳에는 늘 분열이 있었다.
 
 
  동방 18賢이 만들어지다
 
  조선 시대 인물에 대한 문묘종사의 문이 열리자 다시 숙종 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서인(西人)들의 요구에 따라 문묘종사 됐다.
 
  당시 숙종은 문묘종사를 일종의 정치적 거래의 선물 정도로 여겼다. 이이와 성혼은 서인들을 다시 불러들인 경신환국(庚申換局) 1년 후인 숙종 7년(1681년)에 문묘에 종사되지만 숙종 15년(1689년)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출향(黜享)됐고, 5년 후인 숙종 20년(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복향(復享)된다. 김장생(金長生)도 종사됐다가 출향을 거쳐 복향된다. 그 후론 주로 정권이 서인-노론(老論)-벽파(辟派) 쪽에 있었기에 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 등이 영조 때 종사됐고, 김인후(金麟厚)의 경우 당쟁 이전의 사람이라 호남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정조 때 종사가 이뤄졌다. 그리고 조헌(趙憲)과 김집(金集)의 경우 영조 때 노론의 강한 요구가 있었으나 고종 때에 와서야 종사됐다. 이렇게 해서 흔히 말하는 동방 18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인조는 사실상 서인들의 지지로 반정(反正)에 성공하고 왕위에 올랐다. 서인의 종주(宗主)는 송익필(宋翼弼)이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내세울 수가 없었고 그 자리를 대신할 인물은 송익필과 평생 교유했던 이이와 성혼이었다. 인조 1년(1623년) 3월 27일 경연(經筵)에서 특진관 유순익이 이이의 문묘종사 문제를 꺼낸다. 이때 성혼은 신원(伸寃)이 되지 않아 이이만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정공신 중 많은 이가 송익필이나 성혼의 문인들이었기 때문에 성혼 또한 이들의 종사 대상이었다. 이에 대한 인조의 반응이다.
 
 
  “문묘종사는 중대한 일이라 가벼이 결단할 수 없다.”
 
이이
  승지 민성징(閔聖徵), 시독관 이민구(李敏求), 검토관 유백증(兪伯曾), 헌납 이경여(李敬輿) 등이 입을 맞춘 듯 유순익의 말을 거들었다.
 
  “이이를 종사하자는 소청(疏請)이 실로 공론에서 나왔음을 상께서도 필시 이미 들었을 것이며, 상의 학문이 고명하시니 그 문집도 혹시 이미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의리가 막히고 도학(道學)이 밝지 못하여 선비들의 지향이 그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쾌히 허락하여 일국의 선비들로 하여금 그 지향할 바를 알게 하소서.”
 
  인조는 신하들이 말하는 도학, 즉 주자학에 담긴 반(反)왕권주의 성향을 훤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를 추숭해 원종(元宗)으로 삼은 데서 보듯 인조는 강한 왕권을 추구한 인물이다. 계속되는 신하들의 요구에 인조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불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묘종사는 중대한 일이라 경솔히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또 그의 문인·제자 및 서로 아는 자들의 말만 가지고 갑자기 종사하는 것도 타당치 않은 것 같다.”
 
  이후 이괄의 난(1624년), 정묘호란(1627년)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워 문묘종사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 듯했다. 그러다 인조 13년(1635년) 5월 11일 서인 계통의 성균관 유생 송시형(宋時瑩) 등 270명이 연명으로 소를 올리면서 문묘종사가 다시 조정의 현안으로 떠오른다. 송시형은 송시열의 사촌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인조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이이와 성혼이 비록 선한 사람이기는 하나 도덕이 높지 않고 하자(瑕疵)가 있다는 비방을 받고 있으니, 막중한 문묘종사의 예전(禮典)을 결코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이이와 성혼이 비판받은 이유
 
성혼
  같은 날 남인 계통의 생원 채진후(蔡振後)가 소두(疏頭·소의 주동자)가 돼 이이와 성혼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지적하며 두 사람의 문묘종사를 반대했다. 서인 주도 정권에 그나마 참여했던 남인이지만 이이와 성혼을 이황과 같은 반열에 올리려는 서인의 이 같은 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이는 불교에 빠진 이력으로, 성혼은 왕실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늘 비판을 받아왔다. 채진후의 소에서도 바로 이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먼저 이이에 대한 비판을 보자.
 
  “이이가 무진년(戊辰年·1568년)에 부교리를 사직하면서 올린 소에서 ‘소싯적에 도학을 찾았으나 학문의 방향을 몰라서 제가(諸家)를 다 섭렵하여 보았지만 귀착지는 잡지 못하고, 신세가 불행하여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어서 슬픔을 달래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에 드디어 불교에 빠져들어 산속으로 달려가 불교에 종사하였다가, 오장을 다 끄집어내어 씻어도 가시지 않을 오점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 부끄러움과 격분에 북받친 나머지 죽을 길을 찾았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옛날부터 석씨(釋氏)의 해독에 빠진 사람치고 신과 같이 특별히 깊이 빠진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성혼에 대한 비판이다.
 
  “성혼의 경우에는 임인년(壬寅年·1602년) 선조 대왕께서, 성혼을 삭탈 관작 하자고 한 양사(兩司)의 계청에 답하기를 ‘간흉(奸兇)과 무리를 짓고 군부(君父)를 저버린 죄만으로 정죄하라’고 하였고, 그 전지 내에 또 이르기를 ‘임진년에 왜적이 서울을 핍박하였는데,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는 신하로서 하루 거리 이내의 경기 지역에 있으면서도 변고를 듣고 달려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가(大駕)가 그의 거처를 지나가던 날에도 배알하지 않았다. 그 뒤 왕세자가 이천(伊川)에 머무르고 있을 적에 그가 멀지 않은 곳에 피란을 와 있다는 말을 듣고 간곡히 불렀으나, 처음에는 말이 없다는 핑계를 대더니 말을 보내어 다시 불러도 끝까지 나오지 않다가, 성천(成川)으로 옮긴 뒤에야 비로소 왔다. 그러나 곧바로 북적(北賊)이 장치(獐峙)를 넘어오고 있고 왕세자는 용강(龍岡)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며 배행하지 않았다. 또 용강이 평양(平壤)의 적과 거리가 가깝자 의주(義州)로 질러가서 보국(報國)은 잊고 자신을 보전할 계책만 세웠다’라고 하였습니다. 고금 천하에 군부를 버리고 국난(國難)에 달려오지 않았는데도 천토(天討)를 면하는 이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조, “이이 등의 종사 청하는 것은 참람”
 
  이에 대한 인조의 답에 그의 본심이 들어 있다.
 
  “문성공 이이 등의 종사를 청하는 것은 참으로 너무나 참람되고 외람되니[僭猥] 나 또한 그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후 서인 쪽에서 삼정승이 나서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채진후의 처벌을 주장했지만, 왕권 강화의 뜻이 분명했던 인조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인조 재위 27년 동안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서인들은 자신들이 추대하다시피 한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본격적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에 나선다. 1649년 태학생 홍위(洪葳) 등 수백 명이 연명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이에 대한 효종의 답은 짤막했다.
 
  “성묘(聖廟)에 종사하는 것은 막중하고 막대한 전례(典禮)여서 가벼이 의논하기 어려울 듯싶다.”
 
  이에 영남 남인도 숫자로 맞섰다. 이듬해인 1650년 2월 22일 경상도 진사 유직(柳稷) 등 900여 명이 소를 올렸다. 이성무 교수는 《당쟁사 이야기》(아름다운 날)에서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홍위의 상소는 실로 엄청난 여파를 초래했다. 유직 등 950여 명이 연명한 ‘우율승무반대소(牛栗陞廡反對疏)’가 올라온 것이다. 이는 서인 측의 종사 운동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이었다. 안동 사림은 도내 10읍에 통문을 돌려 반대 상소를 위한 모임을 개최하고 유직을 상소의 대표자로 추대했다. 상소는 거도(擧道)적인 차원에서 추진되어 영남의 72읍이 대대적으로 궐기했다. 상소를 바치기 위해 상경한 유생들만도 150명을 넘어 조야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우율이란 우계(牛溪) 성혼과 율곡(栗谷) 이이를 통칭한 것이고 승무란 배향을 뜻한다. 이에 대해 효종은 “잘 알겠다[知道]”고 매우 긍정적으로 답했다.
 
 
  효종, “까마귀의 자웅을 가리는 것”
 
송시열
  석 달이 지난 5월 1일에는 특이하게도 경상도 출신의 진사 신석형(申碩亨) 등 40여 명이 소를 올려 유직의 소를 반박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효종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대들이 서로 배척하여 끝없이 분란을 조성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까마귀의 자웅(雌雄)을 가리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효종 역시 인조와 마찬가지로 심정적으로는 남인 편이었던 것이다. 신석형의 경우 이 소로 인해 영남 유림으로부터 훼가출향(毁家黜鄕) 조치를 당했다. 고향에서 내쫓김은 물론 집마저 헐린 것이다.
 
  효종 때도 결국 두 사람의 문묘종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패턴은 인조 때와 같았다. 신권론자인 서인들이 공세를 펼치면 임금은 왕권론자인 남인들을 이용해 방어하는 양상이다. 이런 패턴은 서인의 권력이 훨씬 강해진 현종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현종 때는 서인의 힘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예송(禮訟)논쟁에서도 서인이 압승을 거뒀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은 이이와 성혼의 저작들을 현종이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하는 방식으로 문묘종사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유생들의 합의가 없이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뒷감당을 하기 어려웠던 현종은 집권 초기에 보여준 관심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묘종사의 결단을 유보했다.
 
 
  ‘당쟁의 선물’이 된 문묘종사
 
  숙종이 즉위하기 직전인 1674년(현종 15년) 갑인예송 논쟁에서 남인이 승리했기에 숙종 즉위 초반기는 남인 정권이었다. 당연히 종사 논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숙종 6년(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이이·성혼의 문묘종사가 거론되기 시작한다.
 
  역설적이지만 정국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한 숙종은 이제 성혼·이이의 문묘종사 문제를 승리한 당파에 대한 일종의 선물로 여겼다. 서인에서는 이이와 성혼을 이현(二賢)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파주 삼현(三賢)이라고 해서 송익필까지 포함됐었지만 송익필은 잊힌 인물이 됐다.
 
  경신환국이 있고 나서 서인이 집권하자 서인 계통의 관리들과 유생들은 전방위로 숙종을 압박했다. 게다가 대신 김수항·김수흥·정지화·민정중·이상진 등이 하나같이 나서 “종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아뢰자 숙종은 마침내 이듬해(숙종 7년) 9월 “이현의 문묘종사 요청을 윤허하노라”고 말한다.
 
  인조반정 이후 무려 4대 58년에 걸친 논란 끝에 문묘종사가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주로 서인정권이라 하더라도 일부 남인이 늘 조정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의견을 격렬하게 개진할 수 있었지만, 경신환국 직후에는 남인 세력이 거의 박멸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게다가 특정 정파에 힘을 전폭적으로 몰아주는 숙종의 정국 운영 스타일도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
 
  이후 이현의 문묘종사는 환국과 부침(浮沈)을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곧바로 남인 세력은 유생 등을 동원하여 이현의 문묘 출향을 건의했다. 얼마 후 숙종은 이들의 출향 요청을 윤허하였다. 이때 숙종의 말이다.
 
  “두 신하는 문묘에 종사해서는 안 되는데 나 때문에 문묘를 더럽히게 됐도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후회스럽고 한스러운 마음이 늘 간절하다.”
 
 
  ‘뼛속까지 정치적인 군주’ 숙종
 
김장생
  숙종은 뼛속까지 정치적인 군주였다. 이런 정도의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군주였다. 심지어 갑술환국이 있기 직전인 숙종 20년 2월에는 이현의 출향을 반대하는 글을 엄금하는 비망기(備忘記)를 8도의 군현에 내리기까지 했다. 여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이나 성혼은 본래 덕이 갖춰진 사람이 아니고 또 가리기 어려운 결점이 많은데도 내가 살피지 못하고서 함부로 종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이미 거행했으므로 그 잘못을 바로잡고 시비를 밝힐 방도를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교화를 새롭게 하는 처음에 공론을 쾌히 따른 까닭이다. 다만 그때 혹 이이나 성혼을 위해 편드는 사람도 있었고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여 즉각 출향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는데, 이 인심이 퇴폐하고 의리가 가리어진 때에, 암퇘지가 머뭇거리듯 사설(邪說)이 멋대로 행해질 근심을 이미 엄하게 막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이후로 감히 이이·성혼의 일로 공론을 고려하지 않고 몸을 던져 깃발을 드는 자는 마땅히 문묘를 모독하는 죄로 논할 것을 명백하게 포고하노라!”
 
  그러고 한 달여가 지나 서인이 집권하는 갑술옥사 혹은 갑술환국이 있었다. 이제 숙종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다시 복향을 할 경우 국왕의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숙종은 그런 데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환국 직후인 4월 21일 성균관 유학 신상동이 이이와 성혼의 복향을 청하자 일단 “난처하다”는 입장을 밝힌다. 5월에도 경기도 유생들의 복향 상소가 올라왔다.
 
  이때 예조판서 윤지선과 영의정 남구만은 오히려 신중한 처리를 당부하는데 숙종이 앞장서서 복향을 결정해버렸다. 실은 이때 남구만과 윤지선은 형식적으로라도 대신들을 불러모아 공론에 부치는 절차를 밟을 것을 건의했지만 숙종은 “처음에 바른 이를 욕하는 무리에게 속임을 당해서 두 어진 신하를 출향하기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항상 후회하고 한탄해 왔노라”며 “특별히 두 신하의 복향을 명하노라”고 말했다. 숙종은 어느새 문묘종사마저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삼고 있었다. 이후 출향을 주장했던 남인들은 그 자리에서 귀양을 떠나야 했다.
 
 
  西人에게 문이 활짝 열린 문묘종사의 길
 
  인조반정 당시 막후 실력자였던 김장생 또한 숙종 14년(1688년)에 종사됐으나 이듬해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이이·성혼과 함께 출향됐다가 숙종 43년(1717년)에 복향됐다.
 
  문묘종사는 그 후 승리한 당파의 전리품(戰利品)으로 전락했다. 영조 32년(1756년) 노론을 대표해 송시열과 송준길이 종사됐다. 정조 20년(1796년)에는 호남의 포용 차원에서 김인후의 종사가 이뤄졌다. 조헌과 김장생의 아들 김집은 영조 때부터 노론이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고종 20년(1883년)에야 이뤄지게 된다.
 
  이처럼 문묘종사 과정에는 조선 중후기 사상투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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