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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의 인문학 〈12〉

치명적 유혹의 세기말 도시: 클림트의 비엔나

“클림트의 창조적 성과는 개인사적 배경과 性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예술적 통로로 대리 충족돼 발현된 것”(지그문트 프로이트)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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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였는데 집에 빵 한 조각도 없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
⊙ ‘수수께끼 화가’라 불려… 자서전을 남기지도 않았고, 인터뷰를 한 적도 없으며, 자기 작품을 설명한 적도 없었다
⊙ 비엔나 장식미술학교에서 클림트가 매료된 것은 한스 마카르트의 역사화, 한스 마카르트는 비엔나에서 ‘예술의 연인’ 혹은 ‘비엔나의 우상’으로 불려
⊙ 동생 에른스트가 뇌내출혈로 저세상으로 떠나자 상실의 아픔으로 이후 3년 동안이나 붓을 놓아
⊙ 얼마 뒤엔 아버지도 뇌내출혈로 사망… 클림트는 동생과 아버지의 기억 때문인지 ‘뇌내출혈 공포증’에 사로잡혔지만 정작 그를 죽게 만든 것은 스페인 독감
⊙ 1894년 비엔나대학의 대회랑 천장화를 맡았지만 여성의 자위행위나 성교 장면을 거침없이 그렸던 그에 대한 교수와 시민들 반발
⊙ 작품마다 대부분 ‘여성’ 등장… 그의 별명은 ‘비엔나의 카사노바’
구스타프 클림트 〈연인(키스)〉, 1862년, 캔버스에 유채, 180×180cm.
  ‘세기말’은 우울한 뉘앙스를 준다. 허무와 우울이 뒤섞인 잿빛의 절망처럼 찜찜한 냄새를 풍기는 단어다.
 
  여러분은 혹시 1999년의 세기말을 기억하는가? 당시 우리도 새로운 밀레니엄이 다가오는 설렘과 두려움 속에 지나온 천년이 사라지는 순간을 목격했다.
 
  세계의 도시사를 보면 몇몇 도시가 ‘세기말’이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가 그렇고 중국의 상하이도 같은 범주일 것이다. 반면 런던-파리-뉴욕은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번영과 발전의 상징처럼 비친다.
 
  ‘빈(Wien·비엔나의 독일식 발음) 체제의 종말’이란 말이 있다. 정치외교학에 등장하는 단어인데, 1848년 프랑스 2월혁명 때문에 ‘유럽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고 다시 왕정과 제정을 복고시키자’는 국가 간 약속이 붕괴된 것을 말한다.
 
이곳이 바로 비엔나커피의 본산이다.
  빈 체제가 무너진 후 오스트리아는 붕괴됐다. 신성로마제국(1806년)이 스스로 문을 닫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졌다. 파리와 함께 유럽 최고로 번화했던 비엔나에는 이제 쓸쓸한 ‘꿈’만이 남게 된 것이다.
 
  세기말이 나쁜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파괴의 끝에 창조가 찾아오니 그것도 헤겔이 변증법에서 말하는 인간사 정반합(正反合)의 진리다. 수많은 천재의 향연이 세기말 비엔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그 면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 아인슈타인이 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가 여기서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현대 미술에서 ‘표현주의의 시조’라 불리는 코코슈카와 음악가 바그너, 그리고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활동하던 무대도 세기말의 비엔나다.
 
비엔나커피의 원조인 이 레스토랑은 소련의 트로츠키가 자주 찾던 곳이다.
  비엔나에는 ‘링스트라세(Ring-strasse)’라는 게 있다. 원형으로 비엔나 도심을 둘러싼 링스트라세는 우리로 치면 명동이나 강남 같은 요지를 쭉 거치기 때문에 이곳을 따라 돌면 도시의 핵심적인 면면을 다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세기말 불꽃처럼 등장한 예술가들의 무대는 어디였을까. 살롱과 카페였다. 좌절한 엘리트들에게 살롱과 카페는 이념과 가치를 토론하는 장소였다.
 
 
  이번에 소개할 인물은 무채색이 지배하는 비엔나에 색채를 불어넣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클림트는 ‘수수께끼 화가’라 불렸다. 자서전을 남기지도 않았고, 인터뷰를 한 적도 없으며, 자기 작품을 설명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비엔나 근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 귀금속 세공사였다. 아버지가 훗날 그가 금으로 모자이크를 만들 때 도움이 됐다면 오페라 가수 출신인 어머니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클림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1873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워지게 됐다. 이와 관련된 회고가 있다.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였는데 집에 빵 한 조각도 없었다.”
 
  클림트가 남긴 이 말은 당시의 어려움을 짐작게 한다. 클림트가 대학을 목표로 한 인문계 학교 ‘김나지움’ 대신 실업계 학교 ‘뷔르거 쉴레’에 간 것은 빈곤해진 후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클림트의 기괴한 복장이다.
  그렇게 졸업 후 일자리를 찾아 평범한 일꾼이 되려던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클림트의 데생 솜씨를 알아본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1876년 열네 살 때 비엔나 장식미술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거기서 1883년까지 클림트는 거의 모든 미술 분야를 익혔다.
 
  모자이크 기법, 금속 세공법, 그리스의 도자기, 이집트와 바빌론의 부조 등에 대해 공부했다. 이때 클림트가 특히 매료된 것은 한스 마카르트로 대표되는 역사화였다고 한다. 한스 마카르트는 비엔나에서 ‘예술의 연인’ 혹은 ‘비엔나의 우상’으로 불렸다.
 
  거대한 스케일이면서도 섬세한 필치를 갖춘 그의 그림을 눈여겨본 클림트는 학교를 졸업할 즈음 이미 마카르트에 필적할 수준의 유명한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1883년 클림트는 동생 에른스트 등과 ‘쿤스틀러 콤파니(예술가 회사)’를 만들며 재능을 입증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황실에서는 새 건물을 세울 때나 수리할 때 내부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클림트는 동생 에른스트,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트란실바니아의 펠레스키 왕궁, 헤름스빌라의 침실 등 비엔나의 저택을 ‘한스 마카르트의 스타일’로 장식했다.
 
  이 작품들로 명성을 얻은 클림트는 1886년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888년 끝난 ‘옛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은 세밀한 인물화로 보는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황제는 특별격려상인 금십자 공로상을 수여했다.
 
  1888년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계단장식 작업으로 ‘황제대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픔을 겪는다. 1892년 예술 동반자이자 그가 아낀 동생 에른스트가 뇌내출혈로 저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상실의 아픔으로 이후 클림트는 3년 동안이나 붓을 놓았다.
 
  얼마 뒤엔 아버지도 뇌내출혈로 사망했다. 여담이지만 클림트는 동생과 아버지의 기억 때문인지 ‘뇌내출혈 공포증’, 요즘으로 말하면 ‘건강염려증’에 사로잡히는데 정작 그를 죽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스페인 독감이었다. 1918년 1월 11일 아침 루마니아 여행에서 돌아온 클림트는 오른쪽 반신이 마비됐다. 잠시 호전되는 듯했는데 클림트의 병세는 다시 악화되고 말았다. 독감이 폐렴으로 번진 것이다. 그는 평소 ‘60세까지 살고 싶다’는 소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망할 때 그는 56세였다.
 
 
  동생과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가 다시 붓을 잡은 것은 1895년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클림트는 과거의 클림트와는 결별한 상태였다. 상징주의자로 변모한 것이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교육부로부터 비엔나대학의 대강당을 장식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데, 고민 끝에 제출한 천장 도안이 훗날 완성됐을 때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그의 사조 변화에 있었다. 1897년 ‘비엔나 분리파’ 회원으로 가입한 것이 그러한 변화의 일환인데 여기엔 설명이 필요하다.
 
  분리파란 전통 예술양식에 대한 반동이다. 분리파의 사상적 기반은 헤르만 바르가 마련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버리자.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모든 장벽을 허물자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클림트식 작품’이 잇따른다. 1894년 비엔나대학의 대(大)회랑 천장화를 맡지만 그는 포기하고 말았다. 여성의 자위행위나 성교 장면을 거침없이 그렸던 그에 대한 교수와 시민의 반발이 이유였다.
 
  마침내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1898년 3월 23일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 개회식이 열렸는데, 정부는 “분리파 예술가들이 ‘적절한 선’만 넘지 않는다면 지원을 약속하겠다”고 한 것이다. 개회식에는 황제가 직접 참석하기로 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이 클림트가 만든 포스터였다.
 
  클림트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테세우스를 ‘젊은 예술가’를 상징하는 인물로,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인물로 상정하는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그만 테세우스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위기의 순간, 클림트는 테세우스의 성기 앞에 나무를 그려 넣는 기지를 발휘해 이 포스터는 검열을 통과했다.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5만7000명이 관람하고 작품 218점이 판매되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클림트의 명성도 높아졌다.
 
  그해 비엔나에는 분리파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인 ‘분리파 관’이 건설됐다.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클림트 일생에 정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전시회의 주제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 대한 헌정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기사 (베토벤 프리즈의 일부)〉, 1902년, 프레스코화.
  요제프 호프만이 전시실 내부 장식을 맡았고, 개막일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을 편곡한 작품을 지휘했으며, 클림트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베토벤 프리즈〉를 선보였다. 이것은 14회 전시회의 하이라이트였다.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통스런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림은 악마의 위협을 지나 합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영웅이 무절제한 여인들의 유혹과 악마의 방해를 물리치고 사랑하는 여인과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 작품을 관객들은 ‘난잡’과 ‘향락’과 ‘무절제’라고 칭하며 비난했다. 이 일로 분리파는 대중에게 외면받게 됐다.
 
  특이하게도 클림트의 작품에는 대부분 ‘여성’이 등장한다. 실제로 그는 ‘비엔나의 카사노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사랑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지만, 결혼하지 않았다는 게 청교도적 의미의 독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부겠지만 세계적인 미술가들의 삶을 보면 여자관계가 복잡한 경우가 복잡하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을 정도다.
 
  클림트도 여성 편력 면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그림의 모델이 된 여성과 꼭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말이 따라다녔다. 특이하게 여성을 ‘성녀’와 ‘요부’로 나눠 정신적 사랑은 지체 높은 귀족들과만 나눴다.
 
  작품 〈아들러 블레흐 바우어의 초상〉에 등장하는 아들러는 유대인 금융업자의 딸인데, 그녀가 자기 초상을 주문한 1897년부터 클림트와의 요란한 염문이 퍼졌다. 당시 그녀는 18세, 클림트는 37세였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1901년, 캔버스에 유채, 84×42cm.
클림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다 그의 애인이었다.
  유부녀인 아들러 바우어는 훗날 클림트의 대표작이 된 〈유디트〉 연작이나 〈키스(kiss)〉의 모델이었는데, 초상화를 완성하는 데 7년이나 걸린 것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지연작전’이었다는 설이 파다했다.
 
  알마 말러라는 여성은 클림트 뺨치는 바람둥이로 별명이 ‘비엔나의 꽃’이었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그녀는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 미술 운동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그로피우스, 문학가 베르펠 등과 결혼했는데도 클림트를 비롯한 9명의 남자를 연인으로 둔 소위 ‘여왕벌’이었다. 그녀가 쉰다섯 살 때 만난 신학자 호렌 슈타이너는 알마 말러 때문에 추기경 자리를 포기했다는 일화까지 있다. 세기말에 나타날 법한 데카당스가 따로 없다.
 
구스타프 클림트 〈다나에〉, 1907~1908년, 캔버스에 유채, 77×83cm.
  클림트가 훗날 〈다나에〉의 모델이 된 동료 화가의 딸 알마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17세 때였다. 둘은 자석에 이끌린 듯 첫눈에 서로 반하는데, 딸의 일기에서 ‘클림트와 키스했다’는 내용을 본 그녀의 어머니는 클림트를 쫓아냈다.
 
  자기 아이를 둘이나 낳은 마리아 치머만과의 관계도 유명하다. 클림트는 평생 사생아를 14명이나 낳았는데, 그가 자기 아이로 인정한 것은 치머만이 유일하다.
 
  에밀리 플뢰게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혹자는 ‘살바도르 달리에게 갈라 달리, 존 레논에게 오노 요코’ 같은 존재가 플뢰게였다고 한다. 에밀리는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와 결혼한 헬레네 플뢰게의 동생이었다.
 
  동생이 사망한 직후 둘은 묘한 관계가 됐다. 평생 클림트는 에밀리에게 399통의 편지를 썼는데 하루 8통이나 쓴 날도 있다고 한다. 에밀리는 클림트가 죽자 그의 사생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일도 맡았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열리는 클림트 전시회다.
  클림트는 모네・고흐・피카소에 비해 뒤늦게 조명을 받았다. 그의 첫 회고전이 비엔나에서 열린 것이 1960년대였고, 1986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비엔나 1900전’을 계기로 비엔나 모더니즘이 각광받았다.
 
  클림트는 왜 ‘퇴폐적 에로티시즘’이란 비판 속에도 여성에 탐닉했을까? 평론가들은 그가 살던 시대가 클림트의 그림보다 더 퇴폐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을 비판한 이가 윤락가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예술사회학자 아널드 하우저는 이런 말도 했다.
 
  “창부(娼婦)는 격정의 와중에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에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와 쌍둥이 짝이다.”
 
  공교롭게 클림트가 활동하던 시절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심리학자도 성(性)을 새로이 조망하여 이름을 떨치는데, 그는 클림트의 그림에 대해 “클림트의 창조적 성과는 개인사적 배경과 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예술적 통로로 대리 충족돼 발현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마디로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를 클림트가 깨부수었다는 것이다.
 
벨베데레 궁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비엔나에서 벨베데레 궁전은 클림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필수 방문 코스로 알려져 있다. 1697년 오스트리아 왕가가 사들여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한 궁전은 시원한 느낌을 주는 넓은 정원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1775년 이후 상부 벨베데레 궁전은 황실 회화 전시장으로 쓰였으며, 하부 벨베데레 궁전으로 다른 궁전의 그림을 이전해오기도 했는데 〈키스〉를 비롯한 클림트의 대표작은 상부 벨베데레에서 눈으로 볼 수 있다.
 
  관리인들은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에게 민감해서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워낙 클림트에 대한 동양인들의 관심이 높은 걸 아는 모양이었다. 한 안내인은 한참을 따라다니다가 이런 선심을 쓰기도 했다. 이상하게 생긴 깡통 로봇이 전시된 공간에서 “이곳은 촬영해도 된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대형 수송선에 사용되는 금속으로 된 화물적재함으로 만든 로봇이었는데 고맙긴 하지만 클림트와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쇤부른 궁전과 함께 비엔나를 대표하는 벨베데레는 비교적 한적한 골목에 있다. 관광객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렀는데 표를 끊고 30분쯤 지나고 보니 중국과 일본에서 온 단체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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