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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41〉 한국과 일본의 경제·외교 전면전에 다시 보는 서애 류성룡

“무능한 군주라도 곁에 察·配·諫·信의 자질을 지닌 재상이 있다면 나라를 구할 수 있다”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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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서애를 보자마자 “하늘이 내린 인물”
⊙ 정승에 복귀하자마자 왜의 침략 예견해 통신사 보내고 전시체제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다
⊙ 놀고 있던 권율의 재기용과 7단계 품계를 높인 이순신 기용이 神의 한수
⊙ 한양과 평양에서 도망치려던 선조의 앞길을 가로막아
⊙ 임진왜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징비록》은 당시로선 기밀도서
⊙ 하회마을 낙동강 건너편 절벽 바로 밑이 《징비록》 쓴 옥연정사
벚꽃 필 무렵의 하회마을은 천하의 절경이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이다. 특히 이번 한일 갈등은 우리 측이 ‘선제 도발’한 측면이 커 어떻게 난국을 헤쳐나갈지 궁금하다. 역사를 보면 한 나라가 망하는 조건은 두 가지다. 임금과 신하들이 하나같이 전부 무능할 때다. 유능한 재상이 있어도 임금이 앞을 제대로 못 보거나 임금은 영명(英明)한데 재상들은 무능할 경우다.
 
  우리 역사에 3대 비극이 있다. 왜란(倭亂·1592~1597)과 호란(胡亂·1627~1636)이다. 이 전쟁을 거치며 ‘해골’처럼 변한 조선은 1910년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다. 나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고향 경상북도 안동 하회마을을 여러 번 다녀왔다. 선생의 생애는 잘 알려졌기에 몇 가지 일화(逸話)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해본다.
 
 
  #하늘이 낸 사람
 
  서애는 여섯 살 때 《대학(大學)》을 읽었고 스무 살 때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된다. 도산서원에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퇴계는 서애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이 청년은 하늘이 낸 사람으로 장차 나라를 위해 크게 쓰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퇴계를 모신 학봉 김성일을 비롯한 누구도 그런 극찬을 받지 못했다. 퇴계의 예언은 훗날 적중한다.
 
 
  #명나라에서 떨친 文才
 
서애 류성룡 선생을 모시는 병산서원이다. 맞은편 산이 병산이다.
  서애가 1568년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의 수도로 갔다. 그곳에서 태학(太學)의 유생(儒生)들에게 오류를 지적하며 가르침을 주자 태학생들은 갓 스물을 넘은 류성룡을 ‘서애 선생’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
 
 
  #율곡의 10만 양병설과 서애의 변방방위책 5개조
 
  율곡 이이는 장차 큰 환란이 올 것을 예견하고 당시 임금 선조에게 10만명의 군사를 길러야 한다고 진언했다.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내다본 것이다. 서애는 당시 율곡의 10만 양병설 대신 변방방위책 5개조를 진언했다. 율곡과 달리 서애는 국지전(局地戰)을 예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율곡의 눈이 더 밝았지만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율곡과 서애의 생각이 올바랐다.
 
 
  #“나라를 戰時체제로 바꾸시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십시오”
 
병산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서애는 23세에 생진과를 거쳐 2년 후 별시 문과에 급제하며 벼슬길에 올랐다. 부제학을 지낼 당시 고향의 노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낙향했다. 형 류운룡마저 관직에 나서 누군가 홀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선조는 대사성, 경상도 관찰사, 예조판서 등을 제수했지만 서애는 사양했다. 선조는 “노모 때문에 부를 수가 없노라” 하며 탄식했다.
 
  1588년 선조는 서애에게 형조판서와 대제학을 겸하게 했다. 서애가 다시 응하지 않자 선조는 강권해 그를 조정으로 복귀시켰다. 서애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590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 무렵 일본은 전쟁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여서 조선에 대해 오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런데 서애는 정승(政丞)이 되자마자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나라를 전시체제로 바꾸고 유능한 장수를 요직에 기용하며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자고 했다. 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을 때 이에 반대했던 서애는 왜 무슨 위기감을 느꼈던 것일까. 《화헌파수록》이라는 책과 《청구야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안동 지방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인데 과연 왜란 때 안동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서애의 숙부는 집안에서 ‘바보’로 불렸다. 그런 숙부가 난데없이 서애 앞에 나타나 바둑이나 한 수 하자고 청했다. 당시 서애의 바둑 실력은 대단해 거의 국수(國手)급이었다고 한다. 첫판이 시작됐는데 서애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바보라던 숙부의 기묘한 행마 끝에 완패하고 말았다. 그 후 두 판을 더 두었지만 서애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런 숙부가 이런 말을 했다.
 
  “자네는 한 나라의 정승이고 이름난 학자이니 내가 더 가르칠 것은 없네. 다만 오늘 밤에 한 스님이 하루 묵자고 청할 것이네. 절대 집에서 재우지 말고 뒷산 암자로 보내게. 나는 거기 가 있겠네.”
 
  숙부의 말처럼 과연 잘생긴 용모에 학식 깊어 보이는 승려가 나타나 하룻밤 재워줄 것을 청했다. 서애는 핑계를 댔다.
 
  “오늘 밤은 집안에 일이 많으니 뒷산 암자로 모시겠소이다.”
 
  중은 어쩔 수 없이 암자로 갔는데 기다리던 숙부는 술과 안주를 잔뜩 차려놓고 서로 잔을 권했다. 대취(大醉)한 중이 곯아떨어지자 숙부는 그의 짐을 뒤졌다. 짐 속에서 조선의 성(城)과 도로, 군사들의 상황이 적힌 지도와 함께 날이 시퍼런 비수가 나왔다. 일본의 첩자였던 것이다.
 
  술에서 깬 일본 중 앞에서 숙부는 호통쳤다.
 
  “조선에서 7년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 내가 막을 수 없지만 내 고향 안동 땅에는 발을 들이지 마라. 가서 이 말을 너희 대장에게 전하라.”
 
  아마 서애가 전시체제로의 전환을 주장하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자고 선조에게 권한 것은 목숨을 살려준 숙부의 일화와 관계 있을 것이다.
 
 
  #“명나라에 알려야 합니다”
 
한국 최고의 건축물로 꼽히는 만대루다.
  서애의 주장으로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주장은 정반대였다. 그 내용은 주지하는 바이니 생략하고 그들이 들고 온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國書)가 논란을 일으켰다. ‘솔병일초직입대명(率兵一超直入大明)’, 즉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로 쳐들어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명에 알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입씨름이 벌어졌다.
 
  영의정 이산해 등은 “이 편지의 내용을 명에 전하면 우리가 왜와 사통(私通)했다는 의심을 사게 된다”고 주장했다. 서애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대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명에서 알게 된다면 왜와 모의해 일을 꾸몄다고 의심받을 텐데 뒷감당을 어찌 하겠느냐”고 주장했다. 서애의 주장처럼 명은 일본의 사정을 유구국을 통해 알고 있었다.
 
  명은 왜의 동향을 알면서도 조선이 어찌 하는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서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훗날 명의 원군은 없었을 것이다. 서애를 신뢰한 선조는 그를 좌의정으로 승진시키고 이조판서를 겸하게 해 ‘인사권’을 쥐여준다.
 
 
  #권율과 이순신의 파격적인 발탁
 
서애가 《징비록》을 저술한 옥연정사다.
  권율은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아들로 무예가 출중했지만 과거도 치르지 않고 음직(陰職·고관의 아들이 시험 없이 관리가 되는 것)도 마다했다. 그러다 마흔 넘어 과거를 치르고 호조정랑을 하다 벼슬을 내놓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서애는 권율을 호조정랑으로 복귀시킨 뒤 의주목사를 거쳐 광주(廣州)목사로 발령냈다.
 
  서애가 발탁한 또 다른 인물이 충무공 이순신이다. 어린 시절 서울 건천동에서 함께 지낸 이순신은 당시 종6품 정읍 현감을 하고 있었다. 서애는 이순신을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발탁했다. 품계를 한꺼번에 일곱 단계나 올리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부당하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는데 《조선왕조실록》 선조 24년 2월 16일의 기록이 지금도 전해진다.
 
  사간원이 아뢰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도 부임하지 않았는데 좌수사에 임명하시니, 인재가 아무리 모자라다지만 벼슬을 아무렇게 내리는 일은 너무 심하옵니다. 체차(강등)시키소서.”
 
  이에 선조가 말했다.
 
  “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규칙에만 얽매여 일을 지체시킬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니 어쩌겠는가. 그 사람으로서 충분히 감당하면 되는 것이지 벼슬의 높고 낮음을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이 일로 말을 꺼내 그의 마음을 흔들지 마라!”
 
  우리는 흔히 선조와 인조를 무능한 임금, 즉 암군(暗君)으로 동일시하지만 사실 선조는 인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임금이다. 그 예로 임진왜란 때 숱한 명신, 명장이 선조를 지켰지만 병자호란 때 인조의 곁에는 그런 신하나 무장이 거의 없었다.

 
  나는 1910년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시발점이 바로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이라고 본다. 그때 한일 간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으며 423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일본에 단 한 번도 군사적·경제적 우위를 탈환해본 적이 없다. 파죽지세로 부산부터 수도였던 한양까지 휩쓴 왜군으로부터 우리가 나라를 지킨 힘은 세 가지였다.
 
  첫째가 의병(義兵)으로 상징되는 백성들의 분전, 둘째가 창피하기 그지없지만 명(明)의 원군 파견, 셋째가 이순신 장군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백성들이 떨쳐 일어나게 만들고, 명의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이순신을 중용한 것이 모두 서애 선생에 의해 이뤄졌으니 과연 그는 하늘이 보낸 기인(奇人)이요 이사(異士)가 아닐 수 없다.
 
옥연정사에서 바라본 하회마을이다.
  임진왜란 발발 2년 전 서애는 위기를 직감했는지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을 예전의 진관(鎭管)으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제승방략과 진관법의 차이를 살펴본다. 진관법은 지방분권형, 제승방략은 중앙집권형 방어법이다. 진관법은 한 지역의 방어를 그 지역 군사들이 맡는 것이다. 농구로 치면 지역방어와 비슷하다.
 
  제승방략은 사변(事變)이 생기면 여러 지역의 군사들을 거점에 집결시킨 뒤 한양에서 내려온 장수가 그들을 지휘하는 방법이다. 과연 어느 게 옳을까? 원래 조선의 군사 진형은 진관법이었다. 그런데 1555년 을묘왜란 때 일시적으로 제승방략을 시행했던 것이 을묘왜란이 끝난 후에도 원위치로 환원되지 않고 굳어진 것이다.
 
  제승방략의 치명적인 약점은 한번 무너지면 더 이상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서애는 그것을 잘 알고 비변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초(國初)에는 각 도의 군병을 모두 진관에 나누어 소속시켰다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진관이 속읍(屬邑)을 물고기의 비늘처럼 잘 통솔하고 주장(主將)의 호령을 기다렸습니다. 경상도를 예를 들어 말하면 김해-대구-상주-경주-안동-진주가 6진(鎭)이 됩니다. 적군이 쳐들어와 한 진의 군대가 혹 패하더라도 다른 진이 차례로 군사를 엄중히 단속해 여러 진이 연달아 붕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선조는 제승방략을 고수하다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이 상주와 충주 탄금대에서 패한 뒤 빗물에 젖은 볏단처럼 무너져 한양까지 일거에 왜군이 쳐들어오는 사태를 맞은 것이다. 서애의 주장이 수용됐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서애는 유능한 수상(首相)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모두 보여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첫 번째 조건이 국가의 안보를 살피는 ‘찰(察)’이라면 두 번째는 인맥·학맥에 얽매이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배(配)’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과 일본의 외교·경제 전면전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서애 같은 이가 보좌했다면 지금의 이런 낭패는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서애는 《징비록》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이순신은 그 선대부터 강관(講官) 장령(掌令) 등의 벼슬을 하면서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은 강직 불굴한 가풍이 있었다. 이순신은 젊었을 때부터 영특하고 활달하여 어떤 사물에도 구속을 받지 않았다. 무과로 벼슬길에 나갔으나 권세가에 붙어서 승진하기를 희망하지 않았으며 정도에 어긋나면 직속 상관에게 대항하기도 했다.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는 단정하여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그의 배 속에는 담기(膽氣)가 있어 자기 몸을 잊고 국난(國難)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이것은 평소의 수양이 그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재간은 있어도 명운(命運)이 없어서 가졌던 재간 백 가지 중의 한 가지도 시행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아 애석한 일이다.”

 
《징비록》을 집필하던 방에는 아직도 서애의 넋이 살아 있는 듯하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서애를 이렇게 평가했다.
 
  “현인을 추천, 등용시켜 상상(上賞)을 받는 것은 옛날의 도리다. 세상 사람들은 임진전란에 류성룡 선생이 자신의 힘을 다 쓴 공로가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 일을 류 선생의 경우에는 사소한 의리이고 그보다는 더 큰 의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충무공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충무공은 한 사람의 부장(副將)에 불과했으니 류 선생이 아니었다면 다만 군졸 중에서 목숨을 버리고 말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회복시켜 백성을 편안하게 한 공로는 과연 누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인가. 근세에 와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킨 이런 도리는 실행되지도 않았으며 다만 추천 등용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뒤따라 시기하고 미워하기도 했으니 슬픈 일이다.”

 
  만일 서애가 등용한 인재가 충무공 하나였다면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다른 인재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 서애가 천거해 중용된 인물 중에는 형조정랑에서 의주목사가 된 권율, 이순신과 함께 바다를 지킨 이억기 장군이 있다. 살피고(察) 인재를 중용한(配) 뒤에 서애가 한 일은 임금에게 충언(諫)하는 것이었다.
 
  그는 선조가 도성(都城)을 버리려 하자 “임금께서 우리 땅을 단 한 걸음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소유가 안 될 것입니다”라며 앞을 가로막았다. 선조는 겁을 먹고 한양을 빠져나왔는데 이런 일이 평양에서도 재연됐다. 왜군이 다가오자 신하들이 몽진을 종용했다. 이때에도 임금의 앞으로 가로막고 나선 사람은 서애였다.
 
  “오늘날 사세는 먼젓번 한양에 있을 때와는 다릅니다. 한양은 군사와 백성이 모두 무너져서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가 없었지만 이 성(평양)은 앞이 강물에 막혀 있고 민심도 자못 안정되어 있으며 또 중원(中原)과 가까우니 며칠만 더 굳게 지킨다면 명나라 군사가 반드시 와서 구원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이곳에서부터 의주에 이르기까지는 다시 지킬 만한 땅이 없으니 형세가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옥연서당의 현판이다.

  서애의 공은 여러 가지를 나열할 수 있겠으나 마지막으로 내가 감탄한 것은 잘못된 자에게는 엄중한 벌을 주고, 잘못을 인정하고 실수를 만회하려는 자에게는 기회를 주는 믿음(信)이다. 왜군의 첩자 노릇을 하던 김순량을 목 베 엄격한 군율을 시행한 것이 그 첫 번째라면, 서애와 동문(同門)수학했지만 임진왜란 직전 “왜군이 침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해 대비를 소홀하게 했던 학봉 김성일에게 기회를 준 것은 후자의 예다.
 
  만일 이런 인물마저 없었더라면 백성들이 어떻게 의병이 돼 나라를 지켰을까. 아마 지킬 가치도 없는 나라는 없어져도 좋다며 손을 놓았을 것이다. 서애가 명과의 외교관계에서 보여준 지혜들은 너무 방대해 생략하기로 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에 있는 수상, 즉 지금의 국무총리는 네 가지를 갖춰야 한다.
 
  ‘찰(察)-배(配)-간(諫)-신(信)’ 네 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찰싹 권력자의 배에 달라붙어 단물만 뽑아먹는 간신’밖에 보이지 않는다. 굳이 현직 정치인이나 장관의 이름을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관리의 표본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되새기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안동 하회마을은 언제나 좋지만 정히 권한다면 벚꽃 필 무렵이 제격이다. 하회마을 출입소를 지나면 강둑이 나오는 양쪽에 벚꽃들이 하늘하늘 이파리를 떨구며 오른쪽으로는 낙동강이 물호리병처럼 마을을 감싸는데, 강 맞은편 절벽 밑이 서애가 낙향해 《징비록》을 집필한 옥연서당이다. 서애는 세 채로 이뤄진 택 가운데 원락재에서 집필했다.
 
뒷산에서 내려다본 옥연정사의 전경이다.
  찰-배-간-신이라는 평가가 퇴계가 서애를 보고 한 말이었다. 퇴계의 《징비록》에 대해 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고 있다.
 
  “《난중일기》가 전선(戰線)일기라면 《징비록》은 전란 극복기다.” 국보 132호인 《징비록》이 처음 간행된 것은 1647년 경상도 관찰사 조수익에 의해서인데, 일본에 이 책이 건너간 것은 1695년이라고 한다. 여기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징비록》이 당시만 해도 국가 기밀문서처럼 여겨진 것이다.
 
  숙종 때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일본에 간 신유한은 《해유록(海遊錄)》에서 “이것은 적을 정탐한 것을 적에게 고한 것”이라고 분노했고, 교리 오명항은 “《징비록》이 왜국에 흘러 들어갔다고 하니 지극히 놀랍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니 《징비록》은 우리뿐 아니라 일본에도 귀중한 책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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