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갑식의 주유천하 〈38〉 일연 스님과 《삼국유사》의 산실 麟角寺와 세 천재를 낳은 三聖山

“元曉는 薛聰을 낳고, 一然 스님은 그 부자의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기록했다. 이 세 사람을 三聖山이 낳았다”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gsmoon@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어머니, 해가 배를 비추는 꿈을 꾼 지 사흘 만에 태기… 일연이 태어날 때 칭기즈칸이 몽골 통일
⊙ 《삼국유사》 짓고 남해 정림사에서 〈팔만대장경〉 만들어… 한국 문화의 양대 보물에 모두 기여
⊙ 國師 된 후 아흔 살 노모 곁으로 가 ‘불심’과 ‘효심’이 하나인 것을 몸소 실천
⊙ 입적한 후 사람들이 “묫자리라도 물을걸” 하고 후회하자 돌연 깨어나 장지 알려줘
⊙ 삼성산이 낳은 또 다른 희대의 천재 설총은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 3문장’… 신라 10현에서도 맨 앞자리
⊙ 설총은 한국 유학의 원조… 해동 18현으로 추앙
⊙ 모란(왕)에게 장미(요부)를 멀리하라고 충언하는 ‘백두옹’(설총) 이야기를 다룬 〈화왕계〉가 설총의 작품
⊙ 경북 군위 인각사 자취 더듬는데 느닷없이 등장한 시인 고은의 ‘雜文’ 보고 기겁
인각사는 한때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으나 지금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경북 경산시의 남산면-자인면-남천면에 걸쳐 심상치 않은 이름을 지닌 산이 있다. 삼성산(三聖山). 계곡이 깊은 것도 아니고, 해발 544m로 그리 높지 않으며 절경(絶景)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닌데 세 성인(聖人)이 태어났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삼성산은 여자가 누워 있는 형상인데, 하필 자라가 여자의 다리 사이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조금 외설스러운데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 산자락에서 한국사에 기억될 세 성인이 태어났다. 그중 가장 늦게 세상의 빛을 본 이가 일연(一然·1206~1289)이다. 그의 삶은 ‘꿈’으로 시작돼 ‘풍수(風水)’로 끝났다. 어머니 꿈에 해가 집으로 들어와 배를 비추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꿈을 꾼 지 사흘 뒤에 태기(胎氣)를 느꼈다. 일연이 태어난 1206년은 몽골고원에서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한 해이기도 하다.
 
  일연은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다가 아홉 살 때 광주 무량사에서 출가(出家)했다. 삼성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매우 총명했던 그는 14세에 강원도 진전사로 가서 구족계를 받고, 22세에는 최고 고시인 선불장(選佛場)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후 현풍 비슬산으로 옮겨 수행할 무렵 아시아 전역을 제패한 몽골의 고려를 향한 침략이 개시됐다.
 
  이리저리 거처를 옮기며 선(禪)을 닦던 일연은 서른두 살 때 ‘삼계(三界)가 덧없는 꿈임을 알고 대지가 티끌만큼의 막힘도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일연은 44세 때 정안거사의 요청으로 남해 정림사로 가서 〈팔만대장경〉 간행에 참여했다. 왕실의 흠모를 한 몸에 받던 일연은 72세 때 임금의 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드디어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삼국유사》의 산실인 인각사 터다.
  특히 78세 때 충렬왕이 국사(國師)에 봉하면서 임금은 그가 곁에 있기를 원했으나 일연은 95세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군위의 인각사로 내려갔다. 그는 이곳에서 영원한 민족의 유산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그러고 나서 1289년 7월 8일 새벽 ‘오늘은 내가 갈 것’이라는 말을 남긴 뒤 제자들과 선문답을 나누고 앉은 채로 적멸의 세계에 들었다.
 
  일연이 당시 세계 최강국 몽골을 상대로 국토가 유린되는 아픔을 당하면서도 《삼국유사》 집필에 몰두한 것은, 광폭한 침략자들의 칼날에 이 땅 백성들의 목숨이 추풍낙엽처럼 스러지는 것도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한 과정일 뿐 전체는 아니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우리의 오랜 역사적 전통과 신성함을 들려줌으로써 희망과 자신감을 잃지 않기 바란 것이다.
 
  그가 ‘삼국사(三國史)’의 ‘사(史)’ 대신 ‘유사(遺事)’라고 한 까닭은 사(史)라는 전통적인 형식과 내용이 주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이미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각훈(覺訓)이 쓴 《해동고승전》 같은 역사서와 전기가 있었기에 이를 보충한다는 의미도 있은 것 같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곧바로 서방정토로 간다’거나 ‘용왕(龍王)’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아예 ‘황탄(荒誕)하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삼국유사》에는 ‘신이(神異)’가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 고유의 신비한 전설과 일화와 민담이 살아남았으니 그것이야말로 ‘신이’라고 하겠다. 만일 역사에만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반지의 제왕〉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각사 극락전과 삼층석탑. 인각사에서 그나마 번듯하게 중건된 것은 극락전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이라는 제목과 달리 신라 역사 위주다. 이는 일연이 ‘삼국사’를 쓰려던 때로부터 600여 년 전에 이미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했으며, 남아 있는 유적과 자료들이 대개 신라 쪽 사료였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많은 고승이 나오는데 일연은 유독 원효에게만 ‘성사(聖師)’라는 극존칭을 바쳐 “같은 고향의 대선배여서 우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연은 원효가 제왕의 불교를 평민의 불교로, 내생의 불교를 현세의 불교로, 산림(山林)의 불교를 세간의 불교로, 출가의 불교를 재가의 불교로 전진시켰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비록 원효의 법력이 ‘오어사(吾魚寺)의 전설’에선 혜공선사에 못 미치고, 친구인 의상대사가 본 관세음보살을 원효는 보지 못했지만 불교의 중흥에 있어 ‘대중화’에 기여한 점이 크기에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일연은 78세에 국존(국사)으로 책봉됐음에도 고향의 어머니를 모시겠다며 낙향했다. ‘출가자의 신분으로 세속에 연연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일연은 “어머니께서는 열아홉에 날 낳으신 후 77년을 홀로 사셨다. 아홉 살 때 출가한 후 한순간도 그분을 잊지 않았다. 마지막이나마 구순이 넘은 어머니를 맘껏 모시려고 한다”고 말했다. ‘효심’과 ‘불심’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일연이 〈대장경〉 간행에 깊숙이 관여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연은 남해 정림사로 와달라는 정안거사의 간곡한 부탁을 수락했고, 그곳의 분사도감(分司都監)에서 〈대장경〉 제작에 참여했다. 결국 일연은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두 가지, 즉 《삼국유사》와 〈팔만대장경〉 간행에 모두 참여한 거인이었다.
 
일연을 모시는 국사전.
  일연은 84세 때인 1289년 7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평소처럼 제자들과 선문답을 하며 담소를 나누다 앉은 채로 고요히 입적했다. 선원사에 있는 정공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부도탑 세울 곳을 여쭈어보지 못했으니 후회막급이오” 하니 뭇사람도 안타까워했다.
 
  바로 그때 일연 스님이 적정 상태에서 고요히 깨어나 뭇사람을 둘러보고, “여기서 동남쪽으로 4~5리쯤 가면 수풀이 우거진 산록이 기복을 이루면서 오래된 무덤 같은 곳이 있는데 그곳이 명당이니 거기에 안치토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사람들이 흔들어보니 이미 입적한 상태였다. 앞서 말했듯 ‘꿈’에서 시작돼 ‘풍수’로 마친 생애였다.
 
  일연의 생애처럼 《삼국유사》에는 예언, 풍수, 꿈과 관련된 설화가 30여 편 소개되어 있다. 어떤 이가 꿈의 유형을 나눠보니 빙의, 예조, 신성한 인물 탄생의 징조, 건국, 태몽, 신명 또는 징조였다. 불교학자 이능화는 《조선여속고》에서 “고승들의 비장을 상고해보면 태몽 없이 탄생한 이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습례가 그러함이로다”라고 했다.
 
  그는 몽골 침략에 짓밟히는 백성들에게 주옥같은 구두선(禪)을 남겼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풀뿌리와 약초로 배를 채웠고 입은 옷은 베 아닌 나뭇잎이다. 솔바람 쏴쏴 불고 돌길은 험한데 해 저문 숲길로 나무해 돌아온다. 밤 깊고 달은 밝아 그 아래 앉았으며 상반신은 시원스레 바람 따라 나는 듯. 떨어진 자리에 가로 누워 자더라도 꿈길에도 세속에는 가지 않으련다. 구름 따라 놀던 풍류는 가고 두 암자만 묵었는데 산 사슴만 오르내릴 뿐 인적 드물구나.”(《삼국유사》 중에서)
 
  “뒷날 돌아오면 다시 여러분과 더불어 거듭 한바탕 흥겹게 놀리라.”(보각국사 일연 비(碑) 중에서)

 
보각국사 일연 스님의 진영(眞影)이다.
  일연에 대해 후세인들도 흠모의 정을 아끼지 않았다.
 
  “스님은 사람됨이 말에 농담이 없고 성품은 꾸미지 않았으며 진정으로 사물을 대했다. 무리 가운데 있으면서도 홀로 있는 듯하고, 존귀함과 비천함을 같이 생각했다. 이미 도에 들어 알차게 훑어나가되 거침이 없이 분별해냈고, 옛사람이 말한 중요한 구절에 이르러 뿌리가 서리고 마디가 어긋지며 소용돌이치고 물결이 험한 곳이라도 분명히 갈라주었으니, 넓디넓은 모습이여, 거기서 헤엄치고 칼로 자르며 남음이 있도다.”(일연의 비문을 쓴 고려 민지)
 
  “근세의 비구로 불조(佛祖)의 도를 밝혀 후학에게 열어준 이는 보각국사로 그 문도가 수천 명에 달한다.”(고려 이제현)
 
  “일연이 왕실에서 주는 호사를 마다하고 평생의 도량으로 삼은 곳이란 화전민의 세계였다.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출가인으로서의 진정한 자각이 이때 이분의 마음을 어떻게 불사르고 있었던가, 나는 그것을 여기서 발견한다.”(고 민영규 연세대 명예교수)

 
  삼성산에서 태어난 첫 성인은 원효(元曉·617~668)대사다. 그의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신당(新幢)이다. 한마디로 설사, 설서당, 설신당으로 불렸다. 원효의 아버지 설담날(薛談捺)은 육두품이 맡는 제11등급 관직인 내말(奈末)을 지냈다. 원효대사와 관련된 일화들은 널리 알려져 있으니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그 아들 설총(薛聰) 이야기로 넘어가 본다.
 
  ‘한국 유학의 비조(鼻祖)로 불리는 설총(658~?)은 아버지의 머리를 닮아서인지 시대를 초월한 천재였다.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3문장(三文章)’으로서 신라 10현의 반열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한다. 신라 10현은 설총, 최치원, 최승우(崔承祐), 최언위(崔彦撝), 김대문(金大問), 박인범(朴仁范), 원걸(元杰), 왕거인(王巨仁), 김운경(金云卿), 김수훈(金垂訓)이다.
 
  그런가 하면 설총은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 한 사람이다. 설총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것은 중・고등학생들이 배우는 국사책에도 등장하는 〈화왕계〉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해석해놓은 〈화왕계〉의 원문(原文)을 보기로 한다. 화왕은 ‘꽃 중의 꽃’이라는 모란을 가리키는 말인데 흔히 설총이 살던 시대에 그를 아낀 신문왕을 이른다는 해석이 많다.
 
  (전략) …신문대왕(神文大王)이 한여름 5월에 높고 밝은 방에 거처하면서 설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오늘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그치고 향기로운 바람이 살랑살랑 부니 좋은 반찬과 애처로운 음악이 있더라도 고상한 말과 좋은 웃음거리로써 울적한 회포를 푸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대는 틀림없이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을 것이니, 나를 위해서 이야기해주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설총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이 들으니 옛날에 화왕(花王)이 처음 전래했을 때 이를 향기로운 정원에 심고 비취색 장막을 둘러 보호하자 봄 내내 그 색깔의 고움을 발산하니 온갖 꽃을 능가하여 홀로 빼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아름답고 고운 꽃들이 달려와 찾아뵙고 오직 자기가 여기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 아리따운 사람이 나타났는데, 붉은 얼굴에 옥같이 하얀 치아에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예쁜 옷을 입고 하늘거리며 천천히 다가서며 말하기를, ‘첩(妾)은 눈처럼 흰 모래를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대하면서 봄비에 목욕을 하여 때를 벗기고, 맑은 바람을 쏘이며 스스로 즐기는 장미입니다.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실까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 대장부가 있어 베옷을 입고 가죽띠를 둘렀으며, 흰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노쇠하여 비틀거리며 굽어진 허리로 걸어와 말하기를, ‘나는 서울 성 밖의 큰길가에 살면서 아래로는 넓은 들의 경치를 바라보고, 위로는 뾰족하고 높다란 산에 기대어 사는 백두옹(白頭翁)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좌우에서 갖다 바치는 것이 비록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고 옷장에 옷을 가득 저장하고 있더라도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북돋우고 아픈 침으로 독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실을 만드는 삼이 있더라도 띠를 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무릇 모든 군자는 어느 세대나 없지 않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왕께서도 그러한 뜻이 있으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왔는데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화왕이 말하기를, ‘장부의 말에도 합당한 것이 있으나 아름다운 사람은 얻기 어려운 것이니 이를 어떻게 함이 좋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장부가 다가가 말하기를, ‘저는 왕께서 총명하여 이치와 옳은 것을 알 것으로 생각하여서 왔는데,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닙니다. 무릇 임금이 된 자가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하고 정직한 사람을 멀리하지 않음이 드뭅니다. 이런 까닭에 맹가(孟軻)가 불우하게 몸을 마쳤고, 풍당(馮唐)은 낭중(郎中) 벼슬에 묶여 늙었습니다. 예부터 이러하니 저인들 이를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화왕이 이르기를, ‘내가 잘못하였구나! 내가 잘못하였구나!’ 했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왕이 슬픈 얼굴빛을 지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우화(寓話) 속에는 실로 깊은 뜻이 있으니 청컨대 이를 써서 임금이 된 자의 교훈으로 삼도록 하라” 하고, 설총을 발탁하여 높은 벼슬을 주었다.
 
  聰曰 唯 臣聞昔花王之始來也 植之以香園 護之以翠幕 當三春而發艶 凌百花而獨出 於是 自邇及遐 艶艶之靈 夭夭之英 無不奔走上謁唯恐不及 忽有一佳人 朱顔玉齒 鮮粧靚服 伶俜而來 綽約而前曰 妾履雪白之沙汀 對鏡淸之海而沐春雨以去垢 快淸風而自適 其名曰薔薇 聞王之令德 期薦枕於香帷 王其容我乎又有一丈夫 布衣韋帶 戴白持杖 龍鍾而步 傴僂而來曰 僕在京城之外 居大道之旁 下臨蒼茫之野景 上倚嵯峨之山色 其名曰白頭翁 竊謂左右供給雖足 膏梁以充腸 茶酒以淸神巾衍儲藏 須有良藥以補氣 惡石以蠲毒 故曰 雖有絲麻 無棄菅蒯 凡百君子 無不代匱 不識王亦有意乎 或曰 二者之來 何取何捨 花王曰 丈夫之言 亦有道理 而佳人難得將如之何 丈夫進而言曰 吾謂王聰明識理義 故來焉耳 今則非也 凡爲君者 鮮不親近邪侫 疎遠正直 是以 孟軻不遇以終身 馮唐郞潛而皓首 自古如此 吾其奈何 花王曰吾過矣 吾過矣 於是 王愀然作色曰 子之寓言 誠有深志 請書之 以謂王者之戒 遂擢聰以高秩

 
미륵상과 석탑은 인각사의 흥망성쇠를 지켜봤을 것이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꽃의 왕’인 모란꽃은 신문왕을 상징한다. 신문왕은 미인과 현자(賢者)를 두고 갈팡질팡한다. 현자의 간언에도 미인을 포기하지 못하다 결국에야 현자의 설득으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비록 모든 인간이 지니는 우유부단함을 지녔다는 한계를 지녔지만 현자의 간언을 뒤늦게나마 귀담아듣고 뉘우칠 줄 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는 인물이 바로 신문왕인 것이다.
 
  〈화왕계〉 속의 ‘장미’는 화왕의 앞에 나타난 미인이다. 장미는 부귀영화와 쾌락, 혹은 왕에게 아첨함으로써 제 이득을 챙기는 간신으로 왕을 유혹하고 찰나의 즐거움을 주지만 결국 왕을 그릇된 길로 이끄니 마땅히 내쳐야 하는 존재다. 화왕은 처음에는 장미를 포기하지 못해 우유부단하게 굴었으나 현자 백두옹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백두옹은 화왕의 앞에 나타난 늙은 현자로, 할미꽃이다. 그는 왕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충신이다. 처음에는 화왕에게 간언을 올렸으나 화왕이 우유부단하게 굴자 이에 실망하여 불우하게 생을 마친 현자들과 충신들을 예를 들며 화왕의 곁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화왕은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백두옹은 설총을 상징한다고 한다.
 
  만일 내게 절해고도(絶海孤島)로 들어갈 때 딱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세 권 중 한 권은 반드시 《삼국유사》일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독자 여러분도 익히 아는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할 것이다. 그 일화와 전설, 민담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일연 스님이 한국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우리에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될 것이다.
 
  신라의 4대 왕 탈해는 바다를 건너왔다. 23년 동안 재위하다 세상을 떴는데, 신령(神靈)이 돼서 나타나 “내 뼈를 삼가서 묻고 장례 지내라”고 했다. 사람들이 파보니 두개골이 석 자 두 치, 몸의 뼈는 길이가 아홉 자 일곱 치였다. 게다가 치아는 엉겨 한 덩어리 같았고 뼈는 마디가 모두 이어진 역사(力士)의 골격이었다. 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이 있다. 오디세우스다.
 
  신라 8대 아달라 왕 때 동해에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서 해초(海草)를 따고 있는데 바위가 연오랑을 싣고 일본으로 데려갔다. 연오랑은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 세오녀는 남편을 기다리다 연오랑이 벗어놓은 신을 보고 그 바위에 앉았다. 그랬더니 바위가 세오녀 역시 일본으로 싣고 갔다. 부부는 왕과 왕비가 돼 일본을 다스렸다. 한일관계의 시초가 이랬다.
 
  문무왕은 늘 지의(智義)법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서 나라를 지키려 하오.” “용은 짐승이 되는 과보인데 어찌 그러십니까?”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요. 추한 과보로써 짐승이 된다면 나의 뜻에 맞소.”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을 잃게 만든 문무왕은 과보를 씻기 위해 용이 됐고 지금도 수중릉에 묻혀 동해를 지키고 있다.
 
  “일본국 구법승 엔닌은 공물을 받자옵고 부족한 이 사람으로서는 감사한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국경 밖 나라 일본의 용렬한 승려로서 어찌 감히 이런 무거운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나온다. 한민족 최초의 해상왕국을 건설한 장보고는 정치 때문에 죽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천험의 요새 청해진도 폐허로 변했다.
 
  위에서 열거한 네 가지 예화의 공통점은 ‘바다’다. 한민족의 생존이 바다에 달려 있음을 고대를 사는 우리의 선조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과학과 지식이 발달한 지금에는 왜 바다가 우리에게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우리 에너지의 98%가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데 그 생명선이 끊기면 우리는 멸망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주군항을 건설할 때 기를 쓰고 반대했으니 어찌 설명하랴.
 
시인 고은이 쓴 ‘일연찬가’다.
  일연이 살던 시대는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원(元) 왕조가 돼 고려를 속국으로 삼던 때다. 원나라가 강해지자 이 땅의 온갖 간신(奸臣)과 권신(權臣)들이 원 황실에 머리를 조아리며 일신의 영달을 꾀했다. 아마 일제시대 때 친일파들의 말과 행동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다를 만나다》의 저자 정천구는 자신의 책에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백성의 고통은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불교계와 중생 구제보다 자기 구제가 더 절실하고 긴요했던 승려들에게 정문일침(頂門一針)이 필요했다. 그러나 불교계나 승려들이 스스로 정화되기에는 병증이 너무도 깊었다. 그리하여 일연은 민중의 이야기를 빌려서 일침을 가하는 것이 유익하리라 여겼다.
 
  일연은 천축으로 돌아간 승려들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기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다시 민중에게 이야기해줄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면 저 돌아오지 않는 승려들이 민중의 입을 통해 이야기로써 되살아날 것이고 되살아난 그 이야기는 관념과 타성에 젖은 지식인이나 수행자들에게 새로이 일깨움을 주리라 믿었을 것이다. 이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의 작용이리라.”
 
  이런 큰 인물을 낸 삼성산을 다시 되돌아본다. 얼마 전 일연 스님이 중건했다는 군위의 인각사를 찾았다. 건물만 몇 채 덩그러니 있을 뿐 과거의 위용은 찾을 길이 없다. 대웅전과 《삼국유사》를 안내하는 전시관을 돌다 누군가 쓴 글을 보았다. 아뿔싸, 한때 중으로 지냈다는, 매년 노벨 문학상 발표 때면 거명되는 고은(高銀)이 긁적여 놓은 것이었다. 못 볼 것을 본 것 같아 절을 뒤로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4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